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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1950년에서 1980년대 초,
고도성장기 한국 경제의 설계자들
1950년대에서 1980년대 한국은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였다. 한국 사회는 전쟁이 남긴 폐허를 딛고 세계가 주목하는 ‘한강의 기적’을 일궈 냈다. 한국 경제의 눈부신 성과의 그 이면에는 한국 경제의 설계자들이 있었다. 『경제 관료의 시대』는 반세기 전, 고도성장기를 주름잡은 경제 관료들 중 한국인의 기억에 잊힐 수 없는 13명을 뽑아 그들의 생애와 활약상을 살펴본다. 장기영, 김학렬, 오원철, 남덕우, 신현확 등 그야말로 경제관료들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걸출한 인물들이 등장했다. 『경제 관료의 시대』는 크게 네 시기, 즉 1부 재건(한국전쟁 이후 1950년대), 2부 도약(1960년대), 3부 질주(1970년대), 4부 전환(1970년대~1980년대 초)의 시기로 나눠 시기별로 주요한 경제 이슈와 정책, 아울러 어려운 시기 투철한 사명감으로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경제 관료들의 열정과 헌신의 실상에 다가선다. 이들의 행적을 따라가는 것은 한국 경제의 실제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아울러 13인의 전기적 초상뿐 아니라 ‘한국 경제사 인물과 이슈’를 실어 한국 경제의 테마와 다양한 인물을 소개한다.
이 책이 조명하는 시기에 대해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으나, 한국 경제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갖은 노력 끝에 고도성장을 일군 시기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 성과를 논하면서 경제 관료의 역할은 간과되거나 과소평가되어 오지는 않았는지 저자 홍제환은 문제제기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13명의 경제 관료들의 활약상을 통해 한국 사회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고안된 많은 경제정책과 전략, 그것들의 출발과 실패, 그리고 성공의 과정을 생생하게 들여다본다.
고도성장기 한국 경제의 설계자들
1950년대에서 1980년대 한국은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였다. 한국 사회는 전쟁이 남긴 폐허를 딛고 세계가 주목하는 ‘한강의 기적’을 일궈 냈다. 한국 경제의 눈부신 성과의 그 이면에는 한국 경제의 설계자들이 있었다. 『경제 관료의 시대』는 반세기 전, 고도성장기를 주름잡은 경제 관료들 중 한국인의 기억에 잊힐 수 없는 13명을 뽑아 그들의 생애와 활약상을 살펴본다. 장기영, 김학렬, 오원철, 남덕우, 신현확 등 그야말로 경제관료들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걸출한 인물들이 등장했다. 『경제 관료의 시대』는 크게 네 시기, 즉 1부 재건(한국전쟁 이후 1950년대), 2부 도약(1960년대), 3부 질주(1970년대), 4부 전환(1970년대~1980년대 초)의 시기로 나눠 시기별로 주요한 경제 이슈와 정책, 아울러 어려운 시기 투철한 사명감으로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경제 관료들의 열정과 헌신의 실상에 다가선다. 이들의 행적을 따라가는 것은 한국 경제의 실제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아울러 13인의 전기적 초상뿐 아니라 ‘한국 경제사 인물과 이슈’를 실어 한국 경제의 테마와 다양한 인물을 소개한다.
이 책이 조명하는 시기에 대해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으나, 한국 경제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갖은 노력 끝에 고도성장을 일군 시기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 성과를 논하면서 경제 관료의 역할은 간과되거나 과소평가되어 오지는 않았는지 저자 홍제환은 문제제기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13명의 경제 관료들의 활약상을 통해 한국 사회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고안된 많은 경제정책과 전략, 그것들의 출발과 실패, 그리고 성공의 과정을 생생하게 들여다본다.
목차
머리말
1부 재건
1장 백두진 - 한국경제의 재건을 이끌다
2장 송인상 - 장기경제개발계획의 선구자
2부 도약
3장 장기영 - 고도성장의 시동을 걸다
4장 김학렬 - 경제기획원 전성시대의 주역
5장 양윤세, 황병태 - 경제외교 현장을 누비다
3부 질주
6장 최형섭, 김재관 - 한강의 기적을 이끈 과학자들
7장 김정렴 - 박정희의 경제 총참모장
8장 오원철 - 한국 중화학공업화의 설계자
9장 남덕우 - 1970년대 한국경제의 뛰어난 관리자
4부 전환
10장 신현확 - 성장 우선주의에 제동을 걸다
11장 김재익 - 경제 안정화를 이끌다
1부 재건
1장 백두진 - 한국경제의 재건을 이끌다
2장 송인상 - 장기경제개발계획의 선구자
2부 도약
3장 장기영 - 고도성장의 시동을 걸다
4장 김학렬 - 경제기획원 전성시대의 주역
5장 양윤세, 황병태 - 경제외교 현장을 누비다
3부 질주
6장 최형섭, 김재관 - 한강의 기적을 이끈 과학자들
7장 김정렴 - 박정희의 경제 총참모장
8장 오원철 - 한국 중화학공업화의 설계자
9장 남덕우 - 1970년대 한국경제의 뛰어난 관리자
4부 전환
10장 신현확 - 성장 우선주의에 제동을 걸다
11장 김재익 - 경제 안정화를 이끌다
책 속으로
경제관료들의 생애를 소개하면서 특히 강조하고자 했던 바는 이들이 상당한 자율성을 부여받은 가운데 경제정책을 주도적으로 추진하면서 한국경제의 변화를 이끌어 갔다는 점이다. ‘한강의 기적’은 박정희 대통령의 최대 치적으로 평가받지만, 이는 결코 대통령 혼자 만들어 낼 수 있는 성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지도자의 뛰어난 리더십에 유능한 경제관료들의 정책적 뒷받침이 더해졌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와 함께 기업가들이 지녔던 탁월한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 산업 현장에서 구슬땀을 흘려가며 열심히 일했던 근로자들의 노고, 그리고 유리하게 조성되었던 국제 경제환경 또한 중요했음은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 p.10
백두진은 토지에 대한 세금을 현물로 내도록 하면 이러한 문제를 상당 부분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수매 대신 세금의 형태로 정부가 필요로 하는 양곡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면서 통화팽창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백두진은 임시토지수득세 도입을 적극 추진했고, 국회에서의 격렬한 논란 끝에 임시토지수득세법이 1951년 9월 통과되었다. 사실 이 법은 농민에게는 상당히 불리한 법이기도 했다. 농민이 부담해야 하는 세 부담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기존 지세법에서는 수확량에 농산물 가격을 곱한 금액의 4%를 징수했다. 그런데 임시토지수득세는 수확량의 15~28%라는 높은 세율이 적용되었다.* 그럼에도 백두진을 비롯한 재무부 관료들은 전쟁의 피해를 상대적으로 적게 받은 농촌이 더 많은 재정적 부담을 감당해야 된다고 판단하여 이러한 정책을 추진했다. 여기에 농산물에 대한 과세가 상대적으로 용이하다는 점도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 p.33
IMF와 미국 국무성의 거듭된 외면 속에서도 송인상은 포기하지 않았다. 일국의 중앙은행 부총재로서의 체면도 버린 채 물러서지 않았던 송인상의 집념은 조기에 한국이 이들 국제기구에 가입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후 한국 정부는 이들 국제기구로부터 장기저리로 자금을 빌려 경제발전 과정에서 유용하게 활용된다. 한 예로 정부는 IBRD로부터 자금을 빌려 디젤기관차를 도입했는데, 이는 철도 현대화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현대화된 철도는 한국경제의 발전 과정에서 운송수단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p.59
장기영은 물가를 잡기 위해 별의별 방법을 동원했다. 쌀값이 오르면 대규모 양곡상들에게 압력을 가했고, 정육업자들을 부총리실로 불러 물가를 올리지 말라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 커피 가격이 비싼 다방의 업주에게 찻값을 내리라고 종용하는 일도 있었는데, 해당 업주가 값을 내리지 않자 서울시 보사국장에게 트집을 잡아 다방에 영업정지 처분을 내리라고 지시한 경우도 있었다. 결국 이 업주는 위생 검사 결과에 문제가 있어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는데, 업주가 가격을 내리자 이 처분은 하루 만에 풀렸다고 한다.
--- p.98
농어촌 개발에 사용될 자금을 전용하자는 김학렬의 제안에 대해 농어촌 개발에 관심이 많았던 박 대통령은 처음에는 반대했다. 하지만 그의 거듭된 설득에 결국 생각을 바꾸었다. 남은 과제는 청구권자금 사용처를 바꿀 수 있도록 일본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1969년 8월 개최된 한일각료회담에서 이 문제를 제기하여 청구권자금을 사용해 연산 103만 톤 규모의 종합제철소를 건설하는 방안에 대한 일본 정부의 동의를 이끌어 냈다. 이에 앞서 ‘종합제철건설 전담반’이 제철소의 경제성 확보 방안을 마련하고, 박태준 사장을 비롯한 포항제철팀이 일본 민간기업으로부터 기술 협력에 대한 약속을 받아 낸 상태였는데, 이러한 선제적 조치들이 일본 정부의 동의를 이끌어 내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로써 그동안 한국경제의 숙원 사업이었지만 자금 문제로 인해, 또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번번이 좌절되었던 종합제철소 건설 사업이 마침내 추진될 수 있게 되었다.
--- p.131
황병태는 1965년 10월 다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야기한 것처럼, 같은 해 5월 박 대통령이 미국을 국빈 방문하여 AID 차관을 지원받기로 약속받았는데, 지급이 이루어지지 않자 조급해진 대통령이 그를 다시 미국으로 보낸 것이다. 그에게는 1억 달러를 받아내지 못하면 돌아오지 말라는 특명이 떨어졌다. 그는 매일 국무성 청사 앞으로 가서 담당자에게 인사를 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담당자가 부담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 박 대통령이 지시한 사항이었다.
--- p.150
유치과학자들은 한국행을 택함으로써 많은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한국의 연구 여건은 그들이 몸담고 있던 미국이나 유럽에 비하면 크게 열악했고, 그들이 받는 급여 또한 해외에서 받던 것에 비해서는 4분의 1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조국의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 하겠다는 일념으로 한국행을 택했다. 그런데 이들의 급여는 이들이 해외 에서 받던 것에 비해서는 크게 줄었지만, 당시 국내 대학교수 급여보다는 크게 높은 수준이었다. 이에 대해 거센 반발도 있었는데, 최형섭은 이러한 대우 조건을 끝내 관철시킴으로써 유치과학자들이 KIST에서 안정적으로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었다.
--- p.180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상당수의 차관기업이 사채시장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차관 상환을 위해 급전이 필요한데, 공식 부문을 통한 자금조달이 쉽지 않자 사채까지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기업의 재무 상태를 더욱 수렁에 빠뜨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결국 재계는 1971년 6월 대통령에게 특단의 조치를 요구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김용완 회장이 재계를 대표해서 정부가 사채 금리를 내리고, 사채업자의 횡포를 막는 등의 형태로 사채 문제 해결에 나서 줄 것을 강력히 건의한 것이다.
--- p.220
1979년 초 박정희 대통령과 임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현확 부총리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농가주택 개량사업 규모를 놓고 두 사람이 옥신각신한 것이다. 이 사업은 당초에는 7만 5,000호 규모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런데 내무부 업무보고 자료에 그 규모가 크게 줄어 있었다. 자재 가격과 건설 노임의 상승, 재정 부담 등이 이유였다. 박 대통령은 “나도 농촌 출신인데 더 투자합시다”라며 사업 규모 확대를 제안했다.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사실상 확대를 지시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현확은 경제안정을 위해서는 축소가 불가피하다고 답했다. 대통령의 지시를 거부한 것이다. 그러자 대통령이 절충안을 내놓았다. 대통령이 이 정도로 양보했으면 적당히 타협할 만도 한데 신현확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 후에도 박 대통령 은 두 차례에 걸쳐 이 문제를 꺼냈다. 하지만 신현확은 끝까지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 p.285
금융실명제 실시 방안이 발표되자 반대 세력의 많은 저항과 반발이 이어졌다. 집권 군부 세력 내부에서도 반발이 거셌다. 실명제가 실시되면 자신들의 정치권력의 기반인 정치자금의 돈줄도 마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정부 입장은 갈수록 후퇴했고, 결국 같은 해 10월 말 당시 여당이던 민정당은 실명제를 1986년 이후로 연기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명확한 시점도 정해지지 않은 무기한 연기였으니 사실상 도입이 철회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해서 김재익이 추진한 금융실명제 도입은 무산되었다.
--- p.10
백두진은 토지에 대한 세금을 현물로 내도록 하면 이러한 문제를 상당 부분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수매 대신 세금의 형태로 정부가 필요로 하는 양곡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면서 통화팽창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백두진은 임시토지수득세 도입을 적극 추진했고, 국회에서의 격렬한 논란 끝에 임시토지수득세법이 1951년 9월 통과되었다. 사실 이 법은 농민에게는 상당히 불리한 법이기도 했다. 농민이 부담해야 하는 세 부담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기존 지세법에서는 수확량에 농산물 가격을 곱한 금액의 4%를 징수했다. 그런데 임시토지수득세는 수확량의 15~28%라는 높은 세율이 적용되었다.* 그럼에도 백두진을 비롯한 재무부 관료들은 전쟁의 피해를 상대적으로 적게 받은 농촌이 더 많은 재정적 부담을 감당해야 된다고 판단하여 이러한 정책을 추진했다. 여기에 농산물에 대한 과세가 상대적으로 용이하다는 점도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 p.33
IMF와 미국 국무성의 거듭된 외면 속에서도 송인상은 포기하지 않았다. 일국의 중앙은행 부총재로서의 체면도 버린 채 물러서지 않았던 송인상의 집념은 조기에 한국이 이들 국제기구에 가입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후 한국 정부는 이들 국제기구로부터 장기저리로 자금을 빌려 경제발전 과정에서 유용하게 활용된다. 한 예로 정부는 IBRD로부터 자금을 빌려 디젤기관차를 도입했는데, 이는 철도 현대화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현대화된 철도는 한국경제의 발전 과정에서 운송수단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p.59
장기영은 물가를 잡기 위해 별의별 방법을 동원했다. 쌀값이 오르면 대규모 양곡상들에게 압력을 가했고, 정육업자들을 부총리실로 불러 물가를 올리지 말라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 커피 가격이 비싼 다방의 업주에게 찻값을 내리라고 종용하는 일도 있었는데, 해당 업주가 값을 내리지 않자 서울시 보사국장에게 트집을 잡아 다방에 영업정지 처분을 내리라고 지시한 경우도 있었다. 결국 이 업주는 위생 검사 결과에 문제가 있어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는데, 업주가 가격을 내리자 이 처분은 하루 만에 풀렸다고 한다.
--- p.98
농어촌 개발에 사용될 자금을 전용하자는 김학렬의 제안에 대해 농어촌 개발에 관심이 많았던 박 대통령은 처음에는 반대했다. 하지만 그의 거듭된 설득에 결국 생각을 바꾸었다. 남은 과제는 청구권자금 사용처를 바꿀 수 있도록 일본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1969년 8월 개최된 한일각료회담에서 이 문제를 제기하여 청구권자금을 사용해 연산 103만 톤 규모의 종합제철소를 건설하는 방안에 대한 일본 정부의 동의를 이끌어 냈다. 이에 앞서 ‘종합제철건설 전담반’이 제철소의 경제성 확보 방안을 마련하고, 박태준 사장을 비롯한 포항제철팀이 일본 민간기업으로부터 기술 협력에 대한 약속을 받아 낸 상태였는데, 이러한 선제적 조치들이 일본 정부의 동의를 이끌어 내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로써 그동안 한국경제의 숙원 사업이었지만 자금 문제로 인해, 또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번번이 좌절되었던 종합제철소 건설 사업이 마침내 추진될 수 있게 되었다.
--- p.131
황병태는 1965년 10월 다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야기한 것처럼, 같은 해 5월 박 대통령이 미국을 국빈 방문하여 AID 차관을 지원받기로 약속받았는데, 지급이 이루어지지 않자 조급해진 대통령이 그를 다시 미국으로 보낸 것이다. 그에게는 1억 달러를 받아내지 못하면 돌아오지 말라는 특명이 떨어졌다. 그는 매일 국무성 청사 앞으로 가서 담당자에게 인사를 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담당자가 부담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 박 대통령이 지시한 사항이었다.
--- p.150
유치과학자들은 한국행을 택함으로써 많은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한국의 연구 여건은 그들이 몸담고 있던 미국이나 유럽에 비하면 크게 열악했고, 그들이 받는 급여 또한 해외에서 받던 것에 비해서는 4분의 1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조국의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 하겠다는 일념으로 한국행을 택했다. 그런데 이들의 급여는 이들이 해외 에서 받던 것에 비해서는 크게 줄었지만, 당시 국내 대학교수 급여보다는 크게 높은 수준이었다. 이에 대해 거센 반발도 있었는데, 최형섭은 이러한 대우 조건을 끝내 관철시킴으로써 유치과학자들이 KIST에서 안정적으로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었다.
--- p.180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상당수의 차관기업이 사채시장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차관 상환을 위해 급전이 필요한데, 공식 부문을 통한 자금조달이 쉽지 않자 사채까지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기업의 재무 상태를 더욱 수렁에 빠뜨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결국 재계는 1971년 6월 대통령에게 특단의 조치를 요구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김용완 회장이 재계를 대표해서 정부가 사채 금리를 내리고, 사채업자의 횡포를 막는 등의 형태로 사채 문제 해결에 나서 줄 것을 강력히 건의한 것이다.
--- p.220
1979년 초 박정희 대통령과 임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현확 부총리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농가주택 개량사업 규모를 놓고 두 사람이 옥신각신한 것이다. 이 사업은 당초에는 7만 5,000호 규모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런데 내무부 업무보고 자료에 그 규모가 크게 줄어 있었다. 자재 가격과 건설 노임의 상승, 재정 부담 등이 이유였다. 박 대통령은 “나도 농촌 출신인데 더 투자합시다”라며 사업 규모 확대를 제안했다.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사실상 확대를 지시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현확은 경제안정을 위해서는 축소가 불가피하다고 답했다. 대통령의 지시를 거부한 것이다. 그러자 대통령이 절충안을 내놓았다. 대통령이 이 정도로 양보했으면 적당히 타협할 만도 한데 신현확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 후에도 박 대통령 은 두 차례에 걸쳐 이 문제를 꺼냈다. 하지만 신현확은 끝까지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 p.285
금융실명제 실시 방안이 발표되자 반대 세력의 많은 저항과 반발이 이어졌다. 집권 군부 세력 내부에서도 반발이 거셌다. 실명제가 실시되면 자신들의 정치권력의 기반인 정치자금의 돈줄도 마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정부 입장은 갈수록 후퇴했고, 결국 같은 해 10월 말 당시 여당이던 민정당은 실명제를 1986년 이후로 연기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명확한 시점도 정해지지 않은 무기한 연기였으니 사실상 도입이 철회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해서 김재익이 추진한 금융실명제 도입은 무산되었다.
--- p.334
출판사 리뷰
재건과 도약 : 백두진·송인상·장기영·김학렬·양윤세·황병태
책의 전반부는 ‘재건’과 ‘도약’의 시기 경제 관료를 찾는다. 한국전쟁 직후는 복구와 재건 나아가 부흥의 방안을 시급히 찾아내야 했다. 1960년대 장기경제개발계획 수립과 추진, 경제개발을 위한 차관 도입, 통화개혁, 금리와 외환 관리 등 온통 난제였다.
『경제관료의 시대』는 먼저 전후 한국 경제를 다시 세우고 부흥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백두진(1908~1993)과 송인상(1904~2015)을 소개한다. 백두진과 송인상이 경제관료의 길에 들어서는 과정은 상당히 흡사했다. 각각 조선의 엘리트들이 선망했던 조선은행과 식산은행에 근무하다 이른 나이에 경제 부처의 국장으로 발탁된 인물이었다. 당시 가장 큰 문제는 재정적자와 인플레이션이었다. 그들은 원조업무, 1차 통화개혁, 국제금융기구 가입, 환율 유지, 장기경제개발 계획 등 한국 경제를 살려내기 위한 방안을 찾기 위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1960년대는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을 실현하던 시기였다. 이때 활약했던 ‘왕초’ 장기영(1916~1977)과 ‘쓰루’김학렬(1923~1972)은 나란히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내면서 1960년대 ‘경제기획원 전성기’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한국일보 창업자이기도 한 장기영은 외자 도입, 유례없는 역금리, 특히 물가 잡기 총력전으로 유명했다. 김학렬의 업적은 단연 초대형 국책산업인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종합제철소 건설을 추진한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어 숱한 일화를 남기기도 했는데, 한국 경제가 성장궤도에 본격 진입하는 과정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에서 저자 홍제환은 반드시 살펴볼 필요가 있는 인물들이라 강조한다. 원조와 차관, 수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이 시기 경제외교는 특히 중요했는데 1960년대 가장 활약이 두드러졌던 인물로 양윤세(1931~ ), 황병태(1935~ )를 든다. 이 책에서는 이들이 경제외교의 실무 담당자로서 세계를 누비며 외자 도입 및 수출 증대 과정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가 두루 살펴본다.
질주와 전환 : 최형섭·김재관·김정렴·오원철·남덕우·신현확·김재익
1970년대에는 본격적인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하며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을 이끌었다. 성장 우선 정책 과정에서 물가상승, 과잉투자 등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1980년대 들어 여러 경제안정 정책을 추진하며 한국 경제는 지금 우리 사회가 누리고 있는 경제적 번영의 토대를 일구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포항제철 설립, 자동자 고유 모델의 육성, 의료보험제도와 공무원연금제도, 부가가치세 도입 등 ‘질주’와 ‘전환’의 시기 한국 경제에서 이루어진 일들은 현재 우리 삶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 역사의 한 장면으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 추진 과정에서 주목되는 경제 관료는 최형섭(1920~2004)과 김재관(1928~2017)이다. 최형섭은 한국 과학기술 분야를 개척한 인물로 평가되며, 김재관은 서독 체류 중 해외유치과학자 1호로 한국에 돌아와 중화학공업화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다방면에 걸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박정희의 ‘최장수 비서실장’으로 불린 김정렴(1924~2020)은‘경제관료의 시대’의 산증인이라 할 만한 인물이다. 엔지니어 출신 이력의 오원철(1928~2019)은 석유화학공업단지 건설과 금오공고 설립 등 중화학공업화의 청사진을 그렸다. 남덕우(1924~2013)는 역대 가장 뛰어났던 경제관료를 묻는 설문(1998년 5월 동아일보)에 무려 43.6%가 꼽은 인물이다. 그가 역대 최고의 경제 관료로 기억되는 이유를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경제가 성장 중심 정책 기조를 탈피하여 방향 전환을 위해 고군분투한 경제 관료로 단연 신현확(1920~2007)과 김재익(1938~1983)이 꼽힌다. 신현확은 역대 유일의 30대 장관으로 성장 우선주의에 제동을 걸었다. 김재익은 전두환 정권의 경제수석비서관으로 아웅산 테러 희생자 중 한 명이었다. 공직에 머문 기간이 길지 않았지만 경제자유화, 공정거래제, 금융실명제 등 시대를 앞선 정책을 개발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0년이 지나도록 한국인의 기억 속에 가장 탁월했던 관료 중의 한 사람으로 남아 있는 이유이다.
사명감과 헌신, 의지와 도전
저자는 한국 사회를 보다 다층적이고 다각도에서 바라보는 한 방법으로서 경제 관료를 조명하고 있지만, 그와 더불어 그들의 생애를 통해 독자들이 교훈을 얻기를 희망한다. 한 나라의 중앙은행 부총재라는 지위에 있으면서도 한국의 IMF 가입을 승인받기 위해 체면과 자존심을 내려놓고 일본과 미국 국무성을 수없이 드나들며 도움을 요청하던 송인상, 인기가 없을지라도 그것이 해야 할 일이라면 뚝심 있게 밀어붙이며 결국 한국 경제를 변모시킨 김재익의 모습에서 투철한 사명감을 확인할 수 있다. 높은 연봉과 안락한 삶이 보장된 해외에서의 삶을 기꺼이 포기하고 모국에서의 헌신을 택한 김재관과 수많은 해외 유치과학자들, 온갖 고생 속에서도 학업의 끈을 놓지 않으며 끝내 자신이 목표한 바를 성취했던 인물들의 삶을 통해 불굴의 의지와 도전의 자세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사업 완수를 위해 비밀을 엄수해야 한다며 누설 시 총살이라는 극단적인 요구 조건을 받아들였고, 때로는 간첩이라는 오인을 감수하기도 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았고, 지위 고하를 불문하며, 한국의 경제발전이라는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내달렸던 이들의 고군분투는 지금 우리에게 큰 울림을 안겨 준다.
반세기 전, 내로라하던 경제관료들을 요즘은 왜 찾아보기 힘든 걸까?
이 책에서 다루는 13명 경제 관료들은 몇 가지 측면에서 공통적인 특징을 엿볼 수 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 중에 하나가 젊다는 점이다. 13명 중 9명이 장관직을 역임했는데, 이들이 임명된 시점의 평균 나이가 44.7세에 불과하다. 심지어 신현확은 39세에 장관직에 올라 아직까지도 역대 최연소 장관으로 기록되고 있다. 또 양윤세는 35세에 국장급 자리에 올라 ‘한국 정부의 대외창구’로 불리며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를 누비며 투자유치 활동을 펼쳤다. 김정렴은 한국은행 과장이던 28세에 통화개혁의 실무를 맡아 전 과정을 주도했다. 가장 늦게 장관이 된 이는 최형섭인데, 그 역시 51세로 지금과 비교하면 놀라울 정도로 젊은 관료들이 장관이라는 고위직에 올라 한국 경제의 변화를 주도해 갔다.
그런데 그때와 비교해 지금은 그때보다 양질의 교육을 받은 이가 넘쳐나고 경제 환경 역시 당시의 열악함과는 비할 수 없이 좋아졌음에도 경제 관료 중에 스타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그 요인으로 몇 가지를 꼽는데, 일단은 경제 구조가 다른 점을 들 수 있다. 당시는 경제 규모도 작았고, 경제발전을 정부가 주도하면서 정부 관료들이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이 많았다. 한편 지금과 비교해 경제 관련 법과 규제가 아직 갖춰지지 않은 경우가 많아 다소 무리한 정책 추진을 하더라도 제동이 걸리지 않았고, 경제 관료가 재량권을 행사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환경이 열악하다는 것은 그만큼 일을 하기 어려운 조건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성과를 도출하고 그것이 도드라져 보이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지금 시대에 경제 관료 중에 스타가 적은 것은 이미 우리 경제의 많은 부분이 성숙했고, 또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갖춰져 개인의 역량이 두드러지기 어려워진 데 한 원인이 있다. 경제 환경이 변한 것이다. 지금은 한두 명의 특출난 경제 관료가 등장한다고 해서 한국 경제가 안고 있는 복합적인 문제를 풀어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짚었던 그 시기 관료들의 헌신과 사명감만은 되새겨볼 만하지 않을까.
책의 전반부는 ‘재건’과 ‘도약’의 시기 경제 관료를 찾는다. 한국전쟁 직후는 복구와 재건 나아가 부흥의 방안을 시급히 찾아내야 했다. 1960년대 장기경제개발계획 수립과 추진, 경제개발을 위한 차관 도입, 통화개혁, 금리와 외환 관리 등 온통 난제였다.
『경제관료의 시대』는 먼저 전후 한국 경제를 다시 세우고 부흥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백두진(1908~1993)과 송인상(1904~2015)을 소개한다. 백두진과 송인상이 경제관료의 길에 들어서는 과정은 상당히 흡사했다. 각각 조선의 엘리트들이 선망했던 조선은행과 식산은행에 근무하다 이른 나이에 경제 부처의 국장으로 발탁된 인물이었다. 당시 가장 큰 문제는 재정적자와 인플레이션이었다. 그들은 원조업무, 1차 통화개혁, 국제금융기구 가입, 환율 유지, 장기경제개발 계획 등 한국 경제를 살려내기 위한 방안을 찾기 위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1960년대는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을 실현하던 시기였다. 이때 활약했던 ‘왕초’ 장기영(1916~1977)과 ‘쓰루’김학렬(1923~1972)은 나란히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내면서 1960년대 ‘경제기획원 전성기’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한국일보 창업자이기도 한 장기영은 외자 도입, 유례없는 역금리, 특히 물가 잡기 총력전으로 유명했다. 김학렬의 업적은 단연 초대형 국책산업인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종합제철소 건설을 추진한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어 숱한 일화를 남기기도 했는데, 한국 경제가 성장궤도에 본격 진입하는 과정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에서 저자 홍제환은 반드시 살펴볼 필요가 있는 인물들이라 강조한다. 원조와 차관, 수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이 시기 경제외교는 특히 중요했는데 1960년대 가장 활약이 두드러졌던 인물로 양윤세(1931~ ), 황병태(1935~ )를 든다. 이 책에서는 이들이 경제외교의 실무 담당자로서 세계를 누비며 외자 도입 및 수출 증대 과정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가 두루 살펴본다.
질주와 전환 : 최형섭·김재관·김정렴·오원철·남덕우·신현확·김재익
1970년대에는 본격적인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하며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을 이끌었다. 성장 우선 정책 과정에서 물가상승, 과잉투자 등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1980년대 들어 여러 경제안정 정책을 추진하며 한국 경제는 지금 우리 사회가 누리고 있는 경제적 번영의 토대를 일구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포항제철 설립, 자동자 고유 모델의 육성, 의료보험제도와 공무원연금제도, 부가가치세 도입 등 ‘질주’와 ‘전환’의 시기 한국 경제에서 이루어진 일들은 현재 우리 삶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 역사의 한 장면으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 추진 과정에서 주목되는 경제 관료는 최형섭(1920~2004)과 김재관(1928~2017)이다. 최형섭은 한국 과학기술 분야를 개척한 인물로 평가되며, 김재관은 서독 체류 중 해외유치과학자 1호로 한국에 돌아와 중화학공업화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다방면에 걸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박정희의 ‘최장수 비서실장’으로 불린 김정렴(1924~2020)은‘경제관료의 시대’의 산증인이라 할 만한 인물이다. 엔지니어 출신 이력의 오원철(1928~2019)은 석유화학공업단지 건설과 금오공고 설립 등 중화학공업화의 청사진을 그렸다. 남덕우(1924~2013)는 역대 가장 뛰어났던 경제관료를 묻는 설문(1998년 5월 동아일보)에 무려 43.6%가 꼽은 인물이다. 그가 역대 최고의 경제 관료로 기억되는 이유를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경제가 성장 중심 정책 기조를 탈피하여 방향 전환을 위해 고군분투한 경제 관료로 단연 신현확(1920~2007)과 김재익(1938~1983)이 꼽힌다. 신현확은 역대 유일의 30대 장관으로 성장 우선주의에 제동을 걸었다. 김재익은 전두환 정권의 경제수석비서관으로 아웅산 테러 희생자 중 한 명이었다. 공직에 머문 기간이 길지 않았지만 경제자유화, 공정거래제, 금융실명제 등 시대를 앞선 정책을 개발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0년이 지나도록 한국인의 기억 속에 가장 탁월했던 관료 중의 한 사람으로 남아 있는 이유이다.
사명감과 헌신, 의지와 도전
저자는 한국 사회를 보다 다층적이고 다각도에서 바라보는 한 방법으로서 경제 관료를 조명하고 있지만, 그와 더불어 그들의 생애를 통해 독자들이 교훈을 얻기를 희망한다. 한 나라의 중앙은행 부총재라는 지위에 있으면서도 한국의 IMF 가입을 승인받기 위해 체면과 자존심을 내려놓고 일본과 미국 국무성을 수없이 드나들며 도움을 요청하던 송인상, 인기가 없을지라도 그것이 해야 할 일이라면 뚝심 있게 밀어붙이며 결국 한국 경제를 변모시킨 김재익의 모습에서 투철한 사명감을 확인할 수 있다. 높은 연봉과 안락한 삶이 보장된 해외에서의 삶을 기꺼이 포기하고 모국에서의 헌신을 택한 김재관과 수많은 해외 유치과학자들, 온갖 고생 속에서도 학업의 끈을 놓지 않으며 끝내 자신이 목표한 바를 성취했던 인물들의 삶을 통해 불굴의 의지와 도전의 자세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사업 완수를 위해 비밀을 엄수해야 한다며 누설 시 총살이라는 극단적인 요구 조건을 받아들였고, 때로는 간첩이라는 오인을 감수하기도 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았고, 지위 고하를 불문하며, 한국의 경제발전이라는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내달렸던 이들의 고군분투는 지금 우리에게 큰 울림을 안겨 준다.
반세기 전, 내로라하던 경제관료들을 요즘은 왜 찾아보기 힘든 걸까?
이 책에서 다루는 13명 경제 관료들은 몇 가지 측면에서 공통적인 특징을 엿볼 수 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 중에 하나가 젊다는 점이다. 13명 중 9명이 장관직을 역임했는데, 이들이 임명된 시점의 평균 나이가 44.7세에 불과하다. 심지어 신현확은 39세에 장관직에 올라 아직까지도 역대 최연소 장관으로 기록되고 있다. 또 양윤세는 35세에 국장급 자리에 올라 ‘한국 정부의 대외창구’로 불리며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를 누비며 투자유치 활동을 펼쳤다. 김정렴은 한국은행 과장이던 28세에 통화개혁의 실무를 맡아 전 과정을 주도했다. 가장 늦게 장관이 된 이는 최형섭인데, 그 역시 51세로 지금과 비교하면 놀라울 정도로 젊은 관료들이 장관이라는 고위직에 올라 한국 경제의 변화를 주도해 갔다.
그런데 그때와 비교해 지금은 그때보다 양질의 교육을 받은 이가 넘쳐나고 경제 환경 역시 당시의 열악함과는 비할 수 없이 좋아졌음에도 경제 관료 중에 스타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그 요인으로 몇 가지를 꼽는데, 일단은 경제 구조가 다른 점을 들 수 있다. 당시는 경제 규모도 작았고, 경제발전을 정부가 주도하면서 정부 관료들이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이 많았다. 한편 지금과 비교해 경제 관련 법과 규제가 아직 갖춰지지 않은 경우가 많아 다소 무리한 정책 추진을 하더라도 제동이 걸리지 않았고, 경제 관료가 재량권을 행사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환경이 열악하다는 것은 그만큼 일을 하기 어려운 조건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성과를 도출하고 그것이 도드라져 보이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지금 시대에 경제 관료 중에 스타가 적은 것은 이미 우리 경제의 많은 부분이 성숙했고, 또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갖춰져 개인의 역량이 두드러지기 어려워진 데 한 원인이 있다. 경제 환경이 변한 것이다. 지금은 한두 명의 특출난 경제 관료가 등장한다고 해서 한국 경제가 안고 있는 복합적인 문제를 풀어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짚었던 그 시기 관료들의 헌신과 사명감만은 되새겨볼 만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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