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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탁 호텔 (2012) - 근대 서울의 역사문화공간

동방박사님 2024. 10. 10.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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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근대개화기 역사의 현장이었던 서양인 호텔들. 그리고 커피, 활동사진, 당구장, 신식결혼식, 자전거 등의 유입이 시작된 개화기 풍물을 하나씩 짚어가는 책이다. 특히 미스 손탁이 운영했던 손탁 호텔은 1905년 당시 일본의 특파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이곳에 머물며 이른바 '을사조약'을 배후에서 조종했던 비운의 역사를 간직한 공간이다. 이처럼 근대개화기 서울의 서양인 호텔들은 그 자체가 하나의 중요한 역사현장이었던 순간들이 수두룩하다.

목차

들어가는 말

제1부 금대개화기 서울의 서양인 호텔
1. 서울호텔
2. 팔레호텔
3. 스테이션호텔
5. 보론 1 : 인천지역 호텔
6. 보론 2 : 철도호텔

제2부 손탁호텔과 미스 손탁
1. 손탁호텔과 그 주변
2. 손탁과 정동구락부
3. 미스 손탁에 관한 평전

제3부 개화기 풍물의 이모저모
1. 커피의 전래시기에 관한 오해와 진실
2. 활동사진과 애스터 하우스
3. 고쳐 써야 할 당구장 도입의 역사
4. 신식결혼식의 기원에 관한 자료
5. 철도개통 이전에 서울과 인천을 오가는 방법
6. 이 땅에 처음 자전거가 등장하던 시절의 풍경
7. 서울탐방 외국인이 궁궐을 구경하는 절차
 

저자 소개 

저 : 이순우
1962년 경북 경산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와 대학원(비교정치전공, 석사과정수료)을 나왔고, 10여 년 가량 증권회사와 투자자문회사에 몸을 담았다가 돌연 인생의 행로를 바꿔 거의 20여 년째 역사탐방과 사료발굴에 몰두하는 삶을 살고 있다. 다큐멘터리 방송작가이자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이던 시절에 일제강점기 이후 이 땅에서 벌어진 문화재 수난사에 대한 기록발굴과 뒤틀린 근대 역사의 흔적들에 대한 글쓰기에 ...

출판사 리뷰

근대개화기 역사의 현장이었던 서양인 호텔들……
그리고 커피, 활동사진, 당구장, 신식결혼식, 자전거 등의 유입이 시작된 개화기 풍물을 찾아가다


『근대서울의 역사문화공간 : 손탁호텔』은 근대개화기 역사의 현장이었던 서양인 호텔들과 커피, 활동사진, 당구장, 신식결혼식, 자전거 등의 유입이 시작된 개화기 풍물을 하나씩 짚어가는 책이다.
옛날과 오늘의 역사와 문화가 한데 어우러져 숨 쉬는 도시 서울, 그 속의 매력적인 공간을 탐방하는 ‘근대 서울의 역사문화 공간’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이다(첫 번째 책 『정동과 각국공사관』은 이미 출간되었고, 세 번째 책인 『광화문 육조앞길』이 이어서 출간됩니다).

1900년 무렵, 호텔(hotel)이 모습을 드러내다
근대개화기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와 헐버트(Homer B. Hulbert)가 발행했던 월간 영문소식지 『더 코리안 리포지토리(The Korean Repository)』 1896년 7월호에는 다음과 같은 문안의 ‘부동산 임대 광고(For Rent)’가 처음 등장했다.
“두 채의 말끔한 상업용 벽돌건물이 서울 유럽인 거주지(European quarter)의 공사관거리(Legation Street) 맞은편에 건립되어 이제 막 사용될 찰나에 있습니다. 각각의 건물은 1층에 네 개의 큰 창고방과 2층에 두 개의 훌륭한 거실과 연회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공사를 마치고 외국인의 입주를 기다립니다…….”
근대개화기에 이 땅을 찾아온 숱한 여행가, 외교관, 선교사, 특파원, 탐험가, 사냥꾼, 기업가 등이 한결같이 한국에서 불편함과 어려움을 호소하는 대상은 주로 '숙박시설'과 관련된 것이었다. 서울로 오는 서양사람들은 대개 자국의 외교공관이거나 조금이라도 안면이 있을 만한 다른 정착 서양인들의 선의(善意)에 기대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누추한 조선식 주막이나 숙박시설을 감수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이러한 탓에 그 누구라도 일단 자기 나라에서 설치한 공사관이나 영사관에 신세를 지는 것을 하나의 관례로 여기고 있을 정도였다.

서울에 근대 호텔이 등장한 것은 언제쯤일까?
우리나라에 있어서 근대 호텔의 첫 등장은 인천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일찍이 인천에서는 1880년대 이래 일본인 호리 큐타로(堀久太郞)가 운영한 대불호텔(大佛호텔, Daibutsu Hotel; 호텔 주인의 덩치가 아주 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중국인 이태(怡泰)의 스튜어드호텔(Steward's Hotel; 호텔 주인이 한때 미국 군함 모노카시호에서 급사로 지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오스트리아계 헝가리인 스타인벡(Joseph Steinbeck)이 주인이었던 꼬레호텔(Hotel de Coree) 등이 생겨나 성업 중이었다. 그러니까 서울은 인천에 비한다면, 서양식 호텔이 등장한 것이 늦어도 한참이 늦다.
이러한 상황에서 명실상부하게 호텔(hotel)이라는 이름을 내건 서양식 숙박시설이 마침내 본격적으로 서울의 거리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00년 무렵의 일이다.
새로운 황궁인 경운궁 영역과 인접한 곳에 자리했던 ‘서울호텔(Seoul Hotel, 삐이노호텔, 1897년 4월 개업)’, 정동 경운궁 대안문(大安門, 덕수궁 대한문) 앞의 ‘프렌치호텔’과 ‘임페리얼호텔’, 그리고 성문 밖 서대문정거장 부근의 '스테이션호텔'이 바로 그것들이었다. 이 가운데 프렌치호텔은 궁궐 바로 앞에 있다 하여 ‘팔레호텔(Hotel du Palais)’이라고도 하였다. 인천에 근거를 둔 스튜어드호텔도 한때 ‘이태호여관(怡泰號旅館)’이라는 이름의 분점을 따로 정동 대안문 앞쪽에 개업했던 시절도 있었다[저자는 여러 자료를 통해 근대시기 서울에서 건립된 최초의 서양식 호텔은 삐이노(F. Bijno)라는 이탈리아인 운영했던 서울호텔(삐이노호텔)의 몫으로 돌려지는 게 맞을 것 같다고 검증하고 있다].
새문 밖(충정로 1가 75-2번지, 현 농협중앙회 후면)에 있었던 ‘스테이션호텔(정거장호텔)’은 한강철교의 준공과 더불어 경인선이 완전 개통되면서 1901년 4월 영국인 엠벌리가 서대문역 바로 앞에서 개업하였다. 이 호텔은 1905년에 원래 ‘팔레호텔’을 운영했던 프랑스인 마르텡에게 인수되면서 그 이름도 ‘애스터 하우스(Astor House)’로 변경되었으며, 이곳은 마르텡의 한자이름을 따서 ‘마전여관(馬田旅館)’으로도 알려졌다. 1907년 이후에는 단순한 숙박시설에만 그치질 않고 활동사진연극장으로도 널리 이름이 높았다. 또한 이곳 ‘애스터 하우스’는 대한매일신보 사장이었던 영국인 어네스트 베델(Ernest Bethell, 裵說, 1872~1909)이 일제의 탄압으로 마지막 숨을 거둔 장소로도 기억되어야 하는 공간이다.

손탁호텔은 이토 히로부미가 머물며 '을사조약'을 배후에서 조종했던 비운의 현장이……
‘미스 손탁(孫澤孃)’으로 알려진 앙트와네트 손탁(Antoinette Sontag, 1854~1925)이 주인이었던 손탁호텔(정동 29번지)의 존재도 빼놓을 수 없다.‘손탁빈관(孫澤賓館)’ 또는 ‘한성빈관(漢城賓館)’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이 호텔은 아관파천이 있던 해인 1896년을 전후한 시기에 러시아공사관 건너편 자리를 사들이는 것으로 시작되었고, 1902년에는 벽돌건물이 신축되어 궁내부의 ‘프라이빗 호텔(Private Hotel : 예약된 손님만 투숙하는 특정 호텔)’의 형태로 운영되었다. 일찍이 그의 집은 반일친미 세력의 대명사인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 Chongdong Club)’의 회합소였던 적도 있었고, 또 한창때는 서울 거주 서양인들의 일상공간처럼 자리매김되기도 했다.
1904년 러일전쟁을 고비로 러시아 세력이 위축되면서 그럭저럭 명맥만 유지하는 수준으로 전락하였으나, 이 와중에 특히 1905년 당시 일본의 특파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이곳에 머물며 이른바 ‘을사조약’을 배후에서 조종했던 비운의 역사를 간직한 공간이 된 순간도 있었다.
이렇듯 주요한 정치인물의 회합소나 외국인 탐방객의 숙소로 널리 이름을 떨쳤던 손탁호텔은 결국 1909년에 이르러 다른 서양인 호텔이었던 팔레호텔의 주인 보에르에게 경영권이 넘어갔다. 그 이후 ‘손탁이 없는 손탁호텔’은 경영난 탓인지 1917년에 건물부지가 이화학당에게 넘겨져 여학생 기숙사로 전환되어 사용되다가, 1922년 그 자리에 프라이홀의 신축을 위해 헐리면서 그 이름마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손탁호텔의 당시 모습은 책에 실린 칼라 화보를 통해 그 모습과 규모를 짐작해볼 수 있다.
이처럼 근대개화기 서울의 서양인 호텔들은 그 자체가 중요한 역사 현장이었던 순간들이 많았다. 우리가 이들 서양인 호텔들을 단순히 커피나 사교문화와 같은 근대서양문물이 퍼져 나가는 진원지로만 이해해선 안 될 까닭은 바로 이러한 대목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다른 서양인 호텔들의 경우에도 손탁호텔의 운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것들 역시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전후한 시기에 잇달아 문을 닫아 더 이상 그 명맥을 잇지 못하였다.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이후에는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꾸려지는 '서양식' 호텔만이 서울 거리에 존재했을 따름이었다.

활동사진, 당구장, 신식결혼식, 자전거 등의 유입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저자는 근대개화기 우리의 생활상을 조금씩 바꿔놓았던 여러 가지 문물의 시작에 대해서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하나하나 읽어가다 보면,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의 소소한 생활사가 묻어나는 이채로운 역사의 한 단면이 아닐 수 없다. 상식의 오류를 지적하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커피[우리식 표기로 가배(??, ??, 加排), 가배차(??茶), 가비차(茄菲茶), 카피차, 가피차(加皮茶) 등]가 전래된 과정에 대해서 얘기할 때면, 아관파천 때 러시아공사관에서 처음 커피에 맛을 들인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한 뒤에도 그 맛을 잊지 못하고 미스 손탁을 시켜 커피를 가져오게 하여 일종의 야외다방인 정관헌(靜觀軒)에서 이를 즐겼다고 언급하곤 한다. 하지만 이는 커피의 ‘첫’ 이야기와는 그다지 관계가 없다.
『독립신문』 1898년 9월 14일자에 수록된 김홍륙(金鴻陸)의 독차사건(毒茶事件, Coffee Poisoning Plot) 관련 기사("그저께 밤에 황상폐하와 황태자전하께서 카피차 진어하신 후에……") 등으로 보아 궁중 내에서 서양식 요리와 커피 음용이 그만큼 진즉부터 일상화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다. 게다가 1883년 8월 ‘수입외물품목록에 ‘커피(コヒ)’가 엄연히 들어 있는 것을 보아도 커피의 유통은 구태여 손탁과 같은 특정인이 아니더라도 여느 서양인들을 통해 손쉽게 이뤄지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활동사진(活動寫眞)의 도래에 관해서는 영화 학계에서조차도 의견이 분분한데, 저자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영화를 소개한 주인공은 미국인 사진여행가 엘리아스 버튼 홈즈라고 한다.
또한 경술국치 이후 순종황제가 당구를 즐겼다는 사실은 제법 알려져 있는데, 이것을 우리나라 당구 역사의 시초라고 하는 식의 설명은 잘못된 것으로 개항 초기부터 이미 당구대를 들여놓은 공간이 있었다는 사실이 꽤나 많이 발견되고 있다고 한다.
최초의 서양식 결혼식 역시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최초의 확인된 자료는 1899년 7월 14일자라고 한다. 언론들이 ‘돌변하고 있는’ 결혼풍속도를 신랄하게 비꼬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들어서서 ‘신식결혼식’은 혼례풍속의 주류가 될 만큼 완연해졌다고 한다.
한편, 저자는 우리나라의 첫 철도선로인 경인철도가 개통되기 이전에 사람들이 서울과 인천을 오가는 방법을 찾아보고 있다. 인천에서 마포 또는 용산까지 왕복하는 작은 증기선(蒸氣船)과 육로를 통해 승마(乘馬), 태마(?馬, 타마), 교여(轎輿) 등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기록을 따라가는 시선이 흥미롭다.
독립협회 시절 서재필 박사가 미국에서 자전거를 먼저 들여와서 타고 다녔다는 이야기도 사실은 1884년의 시점까?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고 한다. 버튼 홈즈가 자전거 여행하는 장면이 담긴 오래된 사진들이 신기하기만 하다.
우리의 오래된 역사인 경복궁과 창덕궁이 서양인들이 입장료를 내고 드나드는 구경거리가 되었던 과정도 쉽게 보기 어려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