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중국.동아시아 이해 (독서요약)/5.유라시아몽골

바다의 황제 (2025) - 쿠빌라이 칸은 어떻게 유목 제국을 해양 초강국으로 변모시켰는가

동방박사님 2025. 4. 23.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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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그는 세계를 정복하고 싶었고, 바다는 마침 그 중간에 있었다.”
칭기스 칸 이래 가장 위대한 정복자, 쿠빌라이 칸
역사의 무대를 육지에서 바다로 옮기다

유목 제국 몽골과 바다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들린다. 

그러나 몽골인의 최고 통치자를 일컫는 칭호 ‘달라이 칸’, 즉 ‘바다의 황제’를 현실로 만든 유일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칭기스 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이다. 

그는 불가능해 보였던 남송 정벌을 성공해내면서 제국이 바다로 나아갈 발판을 마련했다. 

중국식 제도를 비롯해 적국과 피정복민의 기술·문화를 수용하고 외국인도 등용하며 제국의 운영 방식을 근본적으로 혁신했고, 이를 바탕으로 상업 기반의 재정 체계를 마련하고 수군을 육성해 새로운 전략을 펼쳤다. 

그에게 바다는 끝이 아니라, 정복 사업을 완성해가는 또 하나의 무대였다.

세계적인 몽골사 권위자 잭 웨더포드는 새로운 해양 질서를 일구어가는 과정으로서 쿠빌라이 칸의 일대기를 그린다. 

쿠빌라이 칸은 사할린에서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해상 무역망을 장악했고, 그가 세운 원나라는 이후 세계사 속 해양 제국들의 표본이 되었다.

 쿠빌라이 칸은 유목 제국의 경계를 최초로 넘어선 지도자이자 새로운 제국의 첫 설계자였다. 

더불어 고려의 역사, 신안 난파선, 일본 정벌 같은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를 색다른 맥락에서 만나는 재미도 있다.

목차
들어가며: 중국의 해양 황금시대
프롤로그: 마르코 폴로의 여행

1부 쿠빌라이: 자격 없는 황족

1장 몽골인들의 남하
2장 먼지 속에 그대로
3장 두 대륙의 형제들
4장 뭉케의 대칸 즉위와 몽골의 전쟁 재개
5장 태평양에서 지중해까지의 전쟁
6장 쿠빌라이의 기지개

2부 바다로 나간 쿠빌라이

7장 중국의 강해장성
8장 자금 조달로 시작된 군비 경쟁
9장 쿠빌라이의 공격용 수군 건설
10장 대원, 거대한 시작
11장 일본 앞바다의 혼돈
12장 범람 전의 타락
13장 대송의 대단원
14장 나라 없는 수군

3부 바다의 실크로드

15장 일본 상공의 검은 바람
16장 시장, 돈, 살인
17장 밀림에서 사라지고 해상에서 떠돌고
18장 베트남 대신 이집트로
19장 몽골 공주와 호랑이
20장 쿠빌라이 시대의 종말

4부 쿠빌라이 이후의 고요와 쇠락

21장 철인과 연꽃
22장 정복에서 상업으로
23장 이윤과 쾌락, 시와 허영의 항구들
24장 썩어가는 배, 가라앉는 화폐
25장 바다에서 철수하는 중국
26장 늑대는 우중에 온다
27장 엠프러스오브차이나호의 출항

에필로그: 역사는 총아를 허락하지 않는다

저자 소개 
저 : 잭 웨더포드 (Jack Weatherford)
미국 미네소타 주 매칼래스터 대학교 인류학과 교수이자 부족 연구 전문가. 

세계사 속 부족민의 역할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하던 중 칭기스 칸과 몽골 제국이 동서 문명 교류에 끼친 영향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1998년에 서구 학자로는 최초로 칭기스 칸의 고향 부르칸 칼둔 산을 방문한 이래 20년 동안 몽골 제국 연구에 전념했고, 매해 몽골에서 몽골 학자들과 위대한 정복자의 발자취를 찾아다녔다. 

그 첫 성과물로 20...

역 : 이재황
서울대 동양사학과에서 공부하고, 한국방송(KBS)·내외경제(현 헤럴드경제)·중앙일보 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역사와 언어·문자 등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재편집해 번역한 『태조·정종본기』, 『태종본기』(3권)를 펴냈으며,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 한자의 기원에 관한 글 『한자가 그렇게 만들어졌다고?』를 연재하고 『한자의 재발견』, 『가장 빨리 외워지는 한자책』, 『기발한 한자사전』, 『처음...

책 속으로
그(마르코 폴로)는 당시 인생의 절반을 중국에서 보낸 셈이었고, 나중에 중국 여행에서 본 바를 기록해 후대의 유럽인 탐험가들에게 자극을 주었다. 

우리는 그의 저작에서 그가 모호하게만 이해했던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쿠빌라이 칸이 그 20년 동안에 이룬 것에 대한 조사다.

 쿠빌라이는 세계 최대의 수군을 건설했다. 

그 수군을 거느리고 중국을 통일하고, 북극 지방의 태평양에서 열대 중국 해안에까지 뻗치는 상업 연결망을 더욱 확대했다. 

그는 해상 세력을 기반으로 한 국제 질서와 세계 상업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체제를 만들었다. 

쿠빌라이는 역사의 무대를 육지에서 바다로 옮겨놓았다.
---「프롤로그」중에서

쿠빌라이의 어머니는 그의 성장에 정말로 관심을 가진 유일한 사람인 듯했고, 그를 변화시키려 애쓰기보다는 그가 자신의 관심을 유지하도록 격려했다. 

소르콕타니는 쿠빌라이가 특별한 역할을 하도록 계획을 세웠다. 

자신과 남편이 북중국의 넓은 땅덩이를 맡고 있었고 습격, 약탈, 정복이 장기적으로 이득이 되지 않음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몽골인들은 자기네가 정복한 땅을 다스릴 필요가 있었다. 

소를 잡으면 잔치에 쓸 고기를 얻을 수 있지만, 소를 기르면 장래를 위한 우유를 얻을 수 있다. 

영리한 소르콕타니는 중국 문화와 교육에 익숙한 아들을 두면 그 땅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알았다

. 특히 몽골이 중국 남부를 정복한다면 말이다.
---「2장 먼지 속에 그대로」중에서

잘생긴 형에 비해 쿠빌라이는 과체중에다 통풍으로 고생이 심했다. 

지적이었지만 충동적이었다. 결국 말보다 코끼리를 타는 게 편안한 사람이 되었다. 

검은 밍크를 잘라 붙인 흰 담비 옷을 입고 사냥을 나가는 몽골인이었다. 

그는 몽골 병사들의 작은 나무 안장과는 잘 어울리지 않았다. 

쿠빌라이는 몽골 황실 남자들 중에서 가장 황제가 되지 못할 것 같은 사람이었다.
---「6장 쿠빌라이의 기지개」중에서

라시드웃딘에 따르면 차부이는 전장에 있는 쿠빌라이에게 우화의 형태로 암호 메시지를 보내 경고했다.

 “큰 물고기와 작은 물고기의 머리가 잘렸습니다. 

당신과 아릭부케 말고 누가 남았습니까? 

지금 돌아오세요.

” 차부이는 쿠빌라이에게 동생과 대결하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남중국을 정복하는 것은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남송의 황제가 아니라 아릭부케가 당장의 적이었다.

 차부이는 남편에게 원정을 연기하고 수도로 돌아와 대칸이 되기 위한 싸움을 하라고 말했다. … 

차부이의 전갈은 쿠빌라이에게 인생의 방향, 깊숙한 의미, 새로운 도전, 그저 몽골 본토에 있는 상급자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독특한 기회를 제공했다.
---「6장 쿠빌라이의 기지개」중에서

금나라가 송나라의 강해장성(江海長城)을 돌파하지 못한 것은 쿠빌라이에게 좋은 교훈을 제공했다. 

두 결정적인 해전으로부터 25년 뒤에 남송의 한 대신은 이를 명확하게 표현했다. 

이 승리들은 “우리의 기병이 거둔 것도 아니고, 우리의 궁수가 거둔 것도 아니고, 우리의 보병이 거둔 것도 아니며, 바로 우리 수준이 거둔 것”이라고 했다. 

전쟁의 새날이 밝았고, 쿠빌라이는 결연히 승리의 의지를 다졌다.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몰랐지만, 어떻게 하면 안 되는지는 알았다.
---「7장 중국의 강해장성」중에서

이전의 몽골 칸들은 싸움 기술을 우선시하고 재정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며(그것은 여자들의 일로 생각됐다), 이 체제는 군대가 자립적인 한 작동되었다.

 군대에서 소요되는 말과 기타 동물들을 먹일 목초지가 있고, 습격과 약탈로 다른 모든 재정과 사치품 수요를 충당할 수 있으며, 군대가 풀이 있는 스텝과 가까운 거리에서 배회하다가 언제라도 그 스텝으로 가서 동물들을 먹이고 번식시킬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군대가 더 멀리 베트남의 밀림으로, 유럽의 농사짓는 들판과 질척거리는 땅으로 이동하거나 남송의 강해장성과 맞닥뜨리면 모든 것이 허물어졌다.
---「8장 자금 조달로 시작된 군비 경쟁」중에서

몽골인들은 이제 자기네가 세계에서 가장 국제적인 도시 가운데 하나를 점령했음을 깨달았다. 

자기네가 북쪽에 가지고 있는 어떤 도시도 이에 훨씬 못 미쳤다. 

송나라가 항복한 뒤 몇 달 동안 기록 문서와 책, 가구와 비품, 무기와 미술품, 황실의 옷과 수놓은 직물, 은제품과 식기, 그저 진기한 것들이 수레와 배에 실려 베이징의 몽골 수도로 옮겨졌다.

 칭기스 칸의 시대 이래 약탈은 체계적이고 규율 잡힌 일이어서, 각 물품에 대한 꼼꼼한 설명이 기록되고 복잡한 재분배 체계가 모든 사람(심지어 죽은 병사의 아내와 아이까지도)이 합당한 자기 몫을 받도록 보장했다. 

원나라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이제 대규모 함대를 보유하게 된 바얀은 “송나라에서 약탈한 그림, 책, 기타 전리품을 바다를 통해 수도로 수송했다.”
---「13장 대송의 대단원」중에서

쿠빌라이가 도입한 재정과 해운 개혁은 무역이 흥성할 수 있게 했다. 

상품들은 해로와 여러 육로를 통해 남부의 몇몇 선택된 항구들로 운송돼 세계의 상인들에게 팔리고 외국의 도시들로 수출되었다. 

이로 인해 중국의 항구들은 세계적 상업 중심지로 변모했고, 문화와 부가 해안으로 퍼져나갔다. 

무역망이 지리적으로 급속하게 확장되고 배의 크기와 투자 규모가 커지면서 제공되는 산품의 다양성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유리와 산호 목걸이, 매우 다양한 직물, 향신료, 보석, 산업 원료(거북딱지에서부터 밀랍까지에 이르는) 같은 것들이었다. 

원 왕조 시기에 중국은 인도 말라바르 해안에서 검은 후추를 수입해 가장 많이 소비하는 나라가 되었다.
---「16장 시장, 돈, 살인」중에서

역사상 가장 강력한 지도자 가운데 하나였던 그는 자신이 베트남, 일본, 자바를 정복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배들이 그 주위의 바다를 장악했음을 알지 못했다. 

그는 역사상 최대의 해상 함대를 건설했고, 쿠케진의 여행을 통해 몽골의 육상 우편 체계를 해상으로 확장한다는 자신의 꿈을 이루었다. 

이전에 일본으로 가는 자신의 서곡에서 실패했던 일들이었다.

 바다를 통제하는 것은 육상의 상업적 지배를 보증했으며, 중국은 가장 수익성 높은 해로 모두를 관리했다.
---「20장 쿠빌라이 시대의 종말」중에서

쿠빌라이 칸과 테무르 칸 치하의 몽골제국은 추진력 있는 변화의 시기였다.

 중국의 당 왕조와 송 왕조 동안 수백 년에 걸쳐 항해와 기술 혁신이 이루어졌고, 그러다가 갑자기 중국이 세계의 주요 해상강국이 된 것은 몽골의 원나라 치하에서였다. 

해안을 끼고 항해하거나 좁은 보호 해역을 가로질러 섬에서 섬으로 건너다니는 작은 배들로만 이뤄지던 무역은 이제 넓은 바다로 무대를 옮기게 되었다. 

큰 배들이 겉보기에 무한히 펼쳐져 있는 바다를 건너고 육지가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를 몇 주씩 항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국가 사이의 대양 무역은 더욱 중요성이 커져 대부분 국가의 전통적인 내부 시장에 필적했다. 

해로를 장악하는 것은 육상 영토를 점령하는 것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니게 되었고, 제국들 사이의 공간은 그 중심부들보다 더 중요해졌다. 

이제 바다를 장악하는 나라가 상업을 장악하게 되었다.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이 되었고, 쿠빌라이 칸은 그뒤에 나오는 해양 국가들의 모형을 창조했다.
---「23장 이윤과 쾌락, 시와 허영의 항구들」중에서

1291년 공주 함대가 남중국을 떠난 것은 ‘중국의 해상 황금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 시기는 150년 가까이 지속됐고, 마지막 명나라 배가 호르무즈 항구를 떠난 것은 1433년 3월이었다. 

이후 중국은 세계에 등을 돌렸다. 

세계는 그 옛 항로를 떠안기 위해 새로이 일어서는 유럽 국가들에게 계속 문을 열어놓았다. 

명나라의 철수는 세계 무역에 큰 공백을 만들어냈다. 

명나라가 세계와 바다에서 철수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상하고 강력했던 것은, 그 철수가 명나라로 하여금 그 통치를 강화하고 주민과 경제에 대한 통제를 거듭 주장할 시간을 주었다는 것이다(그리고 결국 성공했다). 

중국 안의 삶은 서서히, 그 세기가 끝나기 전에 개선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늦었다. 

늑대는 이미 문 앞에서 짖고 있었다.
---「25장 바다에서 철수하는 중국」중에서

9월에 영국은 바다로부터 중국을 침공했다. 

이를 방어하기 위해 동원할 수군이 없었던 중국은 3년 동안의 파괴 끝에 항복했다

20세기가 시작되면서 프랑스는 광저우의 사몐섬을 점령했다.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외국인 무역항에서 식민지로 바꾸었다. 

독일 카이저는 칭다오만灣을 장악했고, 러시아 차르는 북쪽의 다롄을 점령했다. 

벨기에,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이탈리아, 미국 같은 더 약한 나라들은 톈진에서 조계(租界)를 차지했다. 

유럽인들은 자유무역에 대한 요구를 항구에 그치지 않고 강과 더 나아가 철도까지 확대했고, 중국을 여러 나라의 영향권으로 분할했다.

 여기서 아편은 대중에게 강요된 종교가 되었다. 중국인은 자기 나라에 갇힌 죄수가 되었다.
---「27장 엠프러스오브차이나호의 출항」중에서

출판사 리뷰
유목 제국의 한계를 뛰어넘으며
말 대신 배로 새로운 제국을 설계한 쿠빌라이 칸

1271년, 마르코 폴로는 아버지와 함께 원나라의 수도 대도(베이징)로 향했다. 

배를 타고 인도양을 건너려 했지만, 기술과 인프라가 부족했던 당시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3년에 걸쳐 육로를 통해 중국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들은 칭기스 칸이 창안한 획기적인 역참 제도를 이용했다.

 칭기스 칸은 이 제도로 동방과 서방을 하나의 통신·수송 체계로 통합했지만, 이는 육로에 국한되었다. 

그리고 20여 년 뒤인 1292년, 마르코 폴로는 중국 남해안에서 페르시아만까지 2년간 중국의 최첨단 정크선을 타고 고국 베네치아로 돌아갔다. 

그사이 세계는 분명히 바뀌어 있었다.

 말 위에서 아시아 전역을 누비던 유목 제국은 이제 해로를 통해 세계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 책 《바다의 황제》는 바로 그 획기적인 변화를 이끌어낸 인물, 쿠빌라이 칸에 관한 이야기다

칭기스 칸의 손자이자 원나라의 창건자인 그는 유목 제국의 후계자이면서도 인류 역사상 최초로 해양 제국을 설계한 지도자였다. 

또한 몽골에서 최고 통치자를 일컫는 칭호 ‘달라이 칸’, 즉 ‘바다의 황제’를 현실로 만든 유일한 인물이었다.

세계적인 몽골사 권위자 잭 웨더포드
쿠빌라이 칸에게서 새로운 세계 질서를 발견하다

“이 책은 내가 쓰려고 했던 것과 다르다. 

20년 동안 몽골제국의 성장을 연구한 뒤 나는 내가 그 쇠락 이야기라고 예상한 것을 시작했다. 

나는 먼저 쿠빌라이 칸이 일본과 자바의 해상에서 패배하고 베트남의 육지와 바다에서 패배한 것을 살폈다. 

그러나 자료를 더 깊이 파고들수록 서술되기를 기다리는 다른 이야기가 있음을 발견했다. 

그것은 쇠락의 이야기이기는커녕, 중국과 세계의 이례적인 상업 및 문화 발전의 한 세기를 여는 것이었다.” ― 〈감사의 말〉에서

잭 웨더포드는 대표작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를 비롯해 《칭기스 칸의 딸들, 제국을 경영하다》, 《칭기스 칸, 신 앞에 평등한 제국을 꿈꾸다》 등으로 잘 알려진 세계적인 몽골사 권위자다. 

그동안 칭기스 칸과 몽골제국이 세계사를 어떻게 바꿔왔는지에 천착해온 그는 이번 책에서 쿠빌라이 칸의 일대기와 그의 업적을 통해 사뭇 다른 몽골제국을 그린다.

일반적으로 원나라 시기부터 몽골의 쇠락이 시작되었다고 인식한다. 

저자 본인조차도 이 책을 몽골의 내리막을 쓰기 위한 기획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연구가 깊어질수록, 이 시기가 오히려 새로운 세계 질서의 출발점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저자는 밝힌다.

 유목 제국의 확장이 끝난 시점이 아니라 제국의 방향성이 바뀐 분기점, 즉 유목 제국이 해양 제국으로 나아간 역사적 전환기였다는 사실이 점점 드러났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상의 전환으로 그동안 육지에 국한된 유목 제국으로만 여겨지던 몽골제국과 원나라의 또다른 모습을 펼쳐낸다. 

더불어 우리에게 익숙한 고려의 역사, 신안 난파선, 일본 정벌 등의 이야기를 색다른 맥락에서 풀어낸다.

몽골인답지 않았던 쿠빌라이
유목의 전통 바깥에서 형성된 리더십

이 책은 쿠빌라이 칸의 일대기를 따라 그가 이루어낸 역사적 전환의 의미를 밝힌다. 

우선 그의 몽골인답지 않은 기질과 남달랐던 성장 과정에 주목하며, 그가 최종 승자가 되어 몽골을 새롭게 혁신할 수 있었던 요인을 구석구석 발견한다.

 쿠빌라이는 어린 시절 대칸이 될 자질이 부족하다고 여겨졌다. 

어머니를 닮아 피부가 까무잡잡해 겉모습부터 여느 몽골인들과 사뭇 달랐다. 

잔혹하고 무(武)를 숭상하며 전투에 나가 명성을 드높이고 싶어했던 또래들과 달리, 학문을 공부하고 토론하기를 즐겼다. 

무엇보다 그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 법을 알았다.

이러한 면모를 알아본 어머니 소르콕타니는 쿠빌라이에게 몽골 전통과는 다른 방식의 교육을 시도했다. 

즉 중국식 교육을 시키고, 도시 계획과 행정, 철학과 종교를 익히게 했다. 

그리고 솔선수범해 바이칼호를 거쳐 북극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소르콕타니가 보여준 혜안과 모범은 쿠빌라이가 장차 중국을 점령하고 바다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쿠빌라이는 44세가 되던 1259년, 마침내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다. 

그토록 잘 따르던 형 뭉케 대칸이 사망하자 그는 제위 경쟁에 나서지 않고 뭉케의 마지막 지시사항이었던 남송 정복에 집착했다. 

하지만 정치적 안목이 뛰어난 아내 차부이가 적극적으로 제위 경쟁에 나서도록 독려했고, 결국 쿠빌라이는 대칸이 되어 원나라를 세운 뒤 마침내 형제들과의 권력 투쟁에서 최후의 승자가 된다. 

이후 쿠빌라이 칸은 그동안 쌓아온 다양한 경험과 관점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제국을 설계해나가기 시작한다.

몽골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불가능해 보였던 남송 정복을 성공하다

“전쟁의 새날이 밝았고, 쿠빌라이는 결연히 승리의 의지를 다졌다.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몰랐지만, 어떻게 하면 안 되는지는 알았다.” ― 7장 〈중국의 강해장성〉에서

쿠빌라이 칸이 경쟁자들을 물리친 뒤 가장 먼저 마주한 과제는 남송 정복이었다. 

장강을 천연 방어선 삼아 오랫동안 버텨온 남송을 무너뜨리기 위해선 기존의 기병 중심 전략으로는 한계가 뚜렷했다. 

장강을 건너 남송을 공격하려면 강력한 수군이 필요했다. 

대규모 수군을 건설했으나 훈련이 부족하고 커다란 강에 적합한 배를 쓰지 않았던 금나라의 실패 사례를 교훈 삼아 쿠빌라이 칸은 전면적인 체제 개혁에 나선다. 

고려 기술자들에게 배를 만들게 하고, 남송에서 수군, 무기, 의학 등 관련 지식을 광범위하게 받아들이며 수군을 새로 편성했다.

무엇보다도 수군 건설을 위한 재정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근본적인 혁신을 이룬다. 

기존의 조공 중심 재정을 상업 기반으로 전환해 안정적인 세원을 확보했고, 지폐를 발행해 통화 시스템을 효율화하며 행정 제도를 정비했다. 

이는 몽골의 전통을 고집하지 않고 남송, 아라비아 등 외국 출신 전문가를 비롯해 다양한 인재를 적극 등용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결국 그는 불가능해 보였던 남송 정복을 성공해내고 중국 대륙 전체를 통일한다. 

바야흐로 몽골이 바다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역사의 무대를 바다로 옮기고
해양 제국의 모형을 창조하다

“이제 바다를 장악하는 나라가 상업을 장악하게 되었다.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이 되었고, 쿠빌라이 칸은 그뒤에 나오는 해양 국가들의 모형을 창조했다.” ― 23장 〈이윤과 쾌락, 시와 허영의 항구들〉에서

쿠빌라이 칸은 남송을 정복한 뒤 일본, 베트남, 자바 등을 침공해 영토 확장을 꾀했지만, 기후와 낯선 자연환경 등 여러 악조건 탓에 실패하고 만다. 

저자가 이 시기를 몽골 쇠락의 시작으로 여겨왔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실패를 겪었을지언정 그의 배들은 여전히 바다를 장악하고 있었다. 

쿠빌라이 칸은 자신이 건설한 역사상 최대의 해상 함대를 바탕으로 사할린에서 호르무즈에 이르는 방대한 해로를 통제했고, 이는 곧 할아버지 칭기스 칸이 창안한 몽골의 육상 우편 체계를 해상으로 확장한다는 그의 비전을 실현했음을 의미한다.

이 책에서 강조하는 쿠빌라이 칸의 진정한 업적은 해양 실크로드를 열고, 그에 맞는 국가 체계를 확립함으로써 세계 최초의 해양 제국을 정립했다는 것이다. 

그가 이룩한 재정·해운 개혁으로 상업과 무역이 크게 촉진되면서 도자기, 향신료, 보석, 산업 원료 같은 상품이 남부의 주요 항구들로 운송돼 세계의 상인들에게 팔리고 외국으로 수출되었다. 

무역망이 급속하게 확장되고 배의 크기와 투자 규모가 커지면서 제공되는 상품도 매우 다양해졌다. 

또한 공장식 생산 체제가 조직되고 전문화되면서 책, 미술품, 비단, 차, 도자기와 같은 고급 상품이 대중 소비품으로 바뀌었다. 

이 모든 변화는 강력한 함대를 운용해 전체 해로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렇게 쿠빌라이 칸은 역사의 무대를 육지에서 바다로 옮겨놓았고, 그의 제국은 이후 역사에 등장하는 해양 제국의 모형이 되었다.

쿠빌라이 칸의 교훈을 잊은 근대기 중국

책의 마지막 4부는 쿠빌라이 칸 이후 그가 일군 해양 제국이 빠르게 쇠락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쿠빌라이 칸의 후계자들은 부패하고 향락에 빠져 위기를 자초했고, 급기야 100여 년 만에 명나라가 새롭게 중국을 정복하면서 내몽골 지역으로 쫓겨나게 된다. 

명나라는 바다에서 철수했고, 상업을 억압하며 나라의 문을 걸어 잠궜다. 

영락제 때 정화가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아프리카까지 원정을 떠나기도 했지만, 이는 잠시뿐이었다.

 명나라의 뒤를 이은 청나라 때도 이러한 기조는 계속되었다. 

이렇게 중국은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 패권을 쥔다는 쿠빌라이 칸의 교훈을 망각하고 만다.

16세기 이후 신항로를 개척한 포르투갈, 에스파냐, 네덜란드, 영국 등 서구 제국들이 빠르게 태평양으로 침투해왔고, 마침내 19세기에 아편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중국은 패권을 완전히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중국이 다시 바다로 나와 세계 패권을 다투기까지 100년이 넘게 걸렸다

이러한 역사는 해양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울뿐더러, 쿠빌라이 칸의 선구자적 면모를 더욱 부각시킨다.

* 출처 : 예스2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45389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