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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아무도 기록하지 않는 역사
재일교포 북송 60년
남편을 따라 조선으로 건너간 일본인 아내를 취재한 포토 다큐멘터리
1959년부터 1984년 사이에 이뤄진 재일조선인 귀국사업. 일본에서는 ‘귀환’, 한국에서는 ‘북송’이라고 불리는 귀국사업에 남편과 동행했다가 고령이 된 지금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사는 ‘일본인 아내’들. 정치적 긴장으로 일본 방문은 불가능해졌고, 잊힌 존재로 정체성은 분열되었으며, 그들의 목소리는 보도되지 않는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희망을 품고 살까. 6년 동안 열한 번 진행한 방북 취재로 그녀들의 삶을 따라가 반세기의 기억을 잇는다.
재일교포 북송 60년
남편을 따라 조선으로 건너간 일본인 아내를 취재한 포토 다큐멘터리
1959년부터 1984년 사이에 이뤄진 재일조선인 귀국사업. 일본에서는 ‘귀환’, 한국에서는 ‘북송’이라고 불리는 귀국사업에 남편과 동행했다가 고령이 된 지금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사는 ‘일본인 아내’들. 정치적 긴장으로 일본 방문은 불가능해졌고, 잊힌 존재로 정체성은 분열되었으며, 그들의 목소리는 보도되지 않는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희망을 품고 살까. 6년 동안 열한 번 진행한 방북 취재로 그녀들의 삶을 따라가 반세기의 기억을 잇는다.
목차
한국의 독자들에게
프롤로그
1장. 원산에 사는 어머니와 딸: 1961년, 규슈를 떠나다
2장. 긴박한 상황 아래서: ‘화성-14’ 핵실험의 해에
3장. 아카시아의 추억: 홋카이도부터 배 속의 아이와 함께
4장. 최후의 잔류 일본인: 가족과 생이별, 조선의 아이로
5장. 닿을 수 없는 고향: 감동의 일본인 아내들
에필로그
프롤로그
1장. 원산에 사는 어머니와 딸: 1961년, 규슈를 떠나다
2장. 긴박한 상황 아래서: ‘화성-14’ 핵실험의 해에
3장. 아카시아의 추억: 홋카이도부터 배 속의 아이와 함께
4장. 최후의 잔류 일본인: 가족과 생이별, 조선의 아이로
5장. 닿을 수 없는 고향: 감동의 일본인 아내들
에필로그
책 속으로
한국의 독자들에게
1959년부터 1984년 사이에 진행된 재일조선인 귀국사업으로 약 9만 3,000명이 일본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중에는 일본에서 조선인과 결혼해 남편을 따라 바다를 건넌 ‘일본인 아내’라 불리는 여성 약 1,830명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910년 일본이 한반도를 침략한 이래 재일조선인의 수는 급증하여 1945년 종전 당시 200만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제가 취재한 일본인 아내의 남편들도 교육을 받기 위해 또는 생활고에서 벗어나기 위해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왔거나, 광산 노동자로 징용되어 강제로 끌려온 재일 1세 아니면 그 자녀로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 2세였습니다.
1950년대 일본에 사는 재일조선인의 완전실업률은 일본인의 약 8배에 달했고, 그들은 빈곤과 민족 차별 등 고난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시작된 것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의 ‘귀국사업’이었습니다. 몇 년 안에 일본을 오갈 수 있게 되리라고 믿은 일본인 아내들은 니가타항에서 북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 후로 60년이 흐른 지금, 일본인 아내들은 바다 건너에서 아이와 손자 손녀를 기르고 남편을 돌보며 살아왔습니다.
제가 처음 방북한 것은 20대 때였습니다. 그로부터 7년이 흘렀습니다. 제가 취재한 일본인 아내들은 반세기 전, 저와 비슷한 나이에 일본을 떠났습니다. 같은 여성으로서 그 시절 젊은 일본인 아내들이 시대에 휘둘리면서도 일본 그리고 새로운 땅에서 자신의 의지로 인생의 길을 모색하고 개척한 점에 깊이 공감해 오늘까지 취재를 계속해오고 있습니다.
이 책은 한반도 정세가 긴장과 완화를 반복하던 2013년 이후 열한 번의 방북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이미 고령이 된 그녀들을 인터뷰하면서 일본 각지의 고향도 찾아가고 여러 개인의 기억을 조금씩 이어가며, 지금을 살아가는 만년의 일본인 아내 모습을 담았습니다.
--- p.4~6
재일조선인 귀국사업이란
1959년 12월부터 1984년 7월까지 일본에 사는 한반도 출신 사람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이주하는 귀국사업이 진행됐다. 주최는 북한과 일본적십자사. 이 사업으로 일본에서 바다를 건넌 재일조선인과 그 가족은 약 9만 3,000명이다. 그중 일본인 아내와 그 자녀 등 일본 국적 소지자는 약 6,800명, 일본 국적 일본인 아내는 약 1,830명으로 알려졌다. 그 밖에 재일조선인 남편과 결혼해 국적을 조선으로 바꾼 일본인 여성도 있을 터라, 실제로 일본인 아내가 정확히 몇 명인지는 알 수 없다.
나는 2013년부터 지금까지 열한 차례 방북했고 주로 일본인 아내를 취재해왔다. 1910년 일본이 한일합병을 강제해 한반도를 식민지화한 이래 1945년 아시아·태평양전쟁으로 패전하기까지 일본에는 조선인이 급증했다. 1911년 겨우 2,500명이 조금 넘던 재일조선인이 1945년 패전 때는 약 200만 명으로 크게 늘었다(『조선총련을 중심으로 한 재일조선인 통계편람 쇼와56년판』, 공안조사청, 1981). 그 이유는 조선에서의 생활고를 벗어나기 위해, 교육을 받기 위해, 일본인 배우자와 함께 살기 위해, 탄광과 군수공장 등 노동 징용이나 징병으로 전쟁 중 동원된 경우, 유학 등 다양하다. 내가 취재한 일본인 아내의 남편도 일본에 온 재일 1세 혹은 그들의 자녀로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 2세다. 이 시기 일본에 건너온 조선인 대부분은 한반도 남쪽, 오늘날 한국 출신으로 알려졌다.
--- p.37~38
평양에 사는 일본인 아내
옛사람들은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를 순치보거唇?輔車라 불렀다고 한다. 입술과 치아처럼 관계가 밀접해서 서로 돕지 않으면 안 될 사이라는 뜻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조선 침략 등 어느 시기 그 관계가 무너진 적도 있었지만, 에도시대에는 조선사절단이 일본을 방문해 문화와 학문의 교류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메이지시대 ‘정한론’, 1910년 한국합병에 의해 이 관계가 완전히 무너졌다. 그리고 1945년 일본 패전으로부터 3년 뒤 냉전으로 인해 분단된 한반도 북측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탄생했다.
일본인이 지금 이 나라를 바라볼 때 그 시선의 끝에는 일정하게 고정된 나라의 이미지가 상을 맺는다. 일본인을 납치한 ‘기분 나쁜’ 나라.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쏘아 올리고 핵실험을 반복하는 나라. 이 나라 이미지의 원천은 이 나라가 탄생한 이후, 특히 2000년대 이후 미디어 보도의 영향이 압도적이다. 한편 일찍이 식민지 시대의 기억은 잊히고 있다.
--- p.96~97
이 만남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2015년 10월, 나는 평양 시내에 사는 후쿠시마 아이즈 출신 일본인 여성 나라 키리코 씨 댁을 방문한 적이 있다. 현관문을 열고 실내로 한 걸음 들어서자 키리코 씨는 “아! 내 조국 분이 오셨구나”라며 손을 내밀어주었다. 일본어가 유창한 아들과 함께 오래전 앨범을 보며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눴다. 잘 웃는 여성이었다. 그날 나는 사진은 하나도 찍지 않았다. “다음엔 봄에 올 테니 그때 취재하게 해주세요. 가능하면 사진도요. 다시 만납시다” 하고 악수를 한 뒤 헤어졌다. 헤어지는 현관 앞에서 키리코 씨는 “기념으로 가져가세요”라며 희고 붉은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하지만 반년 후 평양을 다시 방문했을 때, 키리코 씨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결국 내게는 그녀의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다. 시간이 흐르면서 키리코 씨 얼굴이 내 기억 속에서 조금씩 옅어진다. 만약을 위해 사진 한 장이라도 찍을까 했는데, 당시에는 아직 이 나라에서 막 취재를 시작한 참이라 ‘만약을 위해’라는 어설픈 마음으로 사진을 찍는 건 그만두었다. 쓸데없이 진중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키리코 씨의 사진을 찍지 못한 걸 후회하진 않는다. 다만 지금은 자연스레 대화를 하지만 그다음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염두에 두고 취재해야만 한다는 것을 키리코 씨의 죽음으로 통감했다.
--- p.106~107
안내인 이 씨와의 솔직한 대화
“남조선에 가본 적 있어?”
갑자기 이 씨가 물었다.
“응, 있어. 서울엔 친구도 있고.”
“남쪽 사람들을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그렇지, 여기 사람들하고 똑같아.”
이 씨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본 다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역사와 언어와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어. 같은 조선 민족이니까.”
나도 질문을 했다.
“일본을 어떻게 생각해?”
열차에서 마주 앉은 사람들에게 던진 것과 같은 질문이었다. 이 씨는 창밖을 바라보더니 다시 내 쪽을 보며 대답했다.
“이런 말 하는 건 미안하지만…… 많은 조선인이 일본을 싫어해. 하지만 개인적으론 일본 사람들이 정말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지금까지 내가 안내했던 일본인들은 단 한 사람도 내게 기분 나쁜 인상을 심어준 적이 없거든. 모두 친절하고 예의 발랐어. 너도 그렇고.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면 쉽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데 나라와 나라가 만나면 그게 어렵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어?”
“응, 잘 알겠어.”
나는 그의 눈을 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번에는 그가 물었다.
“7월에 발사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은 어떻게 생각해?”
그의 솔직한 질문에 놀랐다.
“음…… 그땐 나도 평양에 있었는데…….”
미사일 발사뿐만 아니라 그 이전 국제사회 움직임까지 모든 것을 다 포함해서 묻는 걸까 싶어 고민하는데, 그는 내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미국이 남조선과 군사훈련을 하지 않으면 미사일을 쏘는 일도 없을 거야.”
--- p.111~112
일본인 아내 9명과 잔류 일본인 여성 1명
내가 취재해온 일본인 아내들은 다양하다. 수도 평양에서 쭉 살아온 여성이 있는가 하면 일본 귀국자가 없는 농촌에서 수십 년 생활한 여성, 여러 번 이사 경험이 있는 여성, 귀국한 이후 60년 내내 같은 집에서 산 여성도 있다. 고향 방문을 할 수 있던 여성, 한 번도 돌아갈 수 없던 여성, 일본의 친척과 연락을 주고받는 여성, 연락이 끊긴 여성도 있다. 또 노동자로 공장이나 농장에서 일한 남편을 가진 여성이 있는가 하면, 연구자와 의사 등 전문가로 일한 남편을 가진 여성도 있다. 내가 만나지 못한 일본인 아내들은 훨씬 더 많다. 어떤 경우에도 그 사람 하나하나의 인생은 평등하고 둘도 없는 것임을 취재를 통해 강하게 느꼈다.
1959년부터 1984년 사이에 진행된 재일조선인 귀국사업으로 약 9만 3,000명이 일본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중에는 일본에서 조선인과 결혼해 남편을 따라 바다를 건넌 ‘일본인 아내’라 불리는 여성 약 1,830명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910년 일본이 한반도를 침략한 이래 재일조선인의 수는 급증하여 1945년 종전 당시 200만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제가 취재한 일본인 아내의 남편들도 교육을 받기 위해 또는 생활고에서 벗어나기 위해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왔거나, 광산 노동자로 징용되어 강제로 끌려온 재일 1세 아니면 그 자녀로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 2세였습니다.
1950년대 일본에 사는 재일조선인의 완전실업률은 일본인의 약 8배에 달했고, 그들은 빈곤과 민족 차별 등 고난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시작된 것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의 ‘귀국사업’이었습니다. 몇 년 안에 일본을 오갈 수 있게 되리라고 믿은 일본인 아내들은 니가타항에서 북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 후로 60년이 흐른 지금, 일본인 아내들은 바다 건너에서 아이와 손자 손녀를 기르고 남편을 돌보며 살아왔습니다.
제가 처음 방북한 것은 20대 때였습니다. 그로부터 7년이 흘렀습니다. 제가 취재한 일본인 아내들은 반세기 전, 저와 비슷한 나이에 일본을 떠났습니다. 같은 여성으로서 그 시절 젊은 일본인 아내들이 시대에 휘둘리면서도 일본 그리고 새로운 땅에서 자신의 의지로 인생의 길을 모색하고 개척한 점에 깊이 공감해 오늘까지 취재를 계속해오고 있습니다.
이 책은 한반도 정세가 긴장과 완화를 반복하던 2013년 이후 열한 번의 방북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이미 고령이 된 그녀들을 인터뷰하면서 일본 각지의 고향도 찾아가고 여러 개인의 기억을 조금씩 이어가며, 지금을 살아가는 만년의 일본인 아내 모습을 담았습니다.
--- p.4~6
재일조선인 귀국사업이란
1959년 12월부터 1984년 7월까지 일본에 사는 한반도 출신 사람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이주하는 귀국사업이 진행됐다. 주최는 북한과 일본적십자사. 이 사업으로 일본에서 바다를 건넌 재일조선인과 그 가족은 약 9만 3,000명이다. 그중 일본인 아내와 그 자녀 등 일본 국적 소지자는 약 6,800명, 일본 국적 일본인 아내는 약 1,830명으로 알려졌다. 그 밖에 재일조선인 남편과 결혼해 국적을 조선으로 바꾼 일본인 여성도 있을 터라, 실제로 일본인 아내가 정확히 몇 명인지는 알 수 없다.
나는 2013년부터 지금까지 열한 차례 방북했고 주로 일본인 아내를 취재해왔다. 1910년 일본이 한일합병을 강제해 한반도를 식민지화한 이래 1945년 아시아·태평양전쟁으로 패전하기까지 일본에는 조선인이 급증했다. 1911년 겨우 2,500명이 조금 넘던 재일조선인이 1945년 패전 때는 약 200만 명으로 크게 늘었다(『조선총련을 중심으로 한 재일조선인 통계편람 쇼와56년판』, 공안조사청, 1981). 그 이유는 조선에서의 생활고를 벗어나기 위해, 교육을 받기 위해, 일본인 배우자와 함께 살기 위해, 탄광과 군수공장 등 노동 징용이나 징병으로 전쟁 중 동원된 경우, 유학 등 다양하다. 내가 취재한 일본인 아내의 남편도 일본에 온 재일 1세 혹은 그들의 자녀로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 2세다. 이 시기 일본에 건너온 조선인 대부분은 한반도 남쪽, 오늘날 한국 출신으로 알려졌다.
--- p.37~38
평양에 사는 일본인 아내
옛사람들은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를 순치보거唇?輔車라 불렀다고 한다. 입술과 치아처럼 관계가 밀접해서 서로 돕지 않으면 안 될 사이라는 뜻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조선 침략 등 어느 시기 그 관계가 무너진 적도 있었지만, 에도시대에는 조선사절단이 일본을 방문해 문화와 학문의 교류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메이지시대 ‘정한론’, 1910년 한국합병에 의해 이 관계가 완전히 무너졌다. 그리고 1945년 일본 패전으로부터 3년 뒤 냉전으로 인해 분단된 한반도 북측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탄생했다.
일본인이 지금 이 나라를 바라볼 때 그 시선의 끝에는 일정하게 고정된 나라의 이미지가 상을 맺는다. 일본인을 납치한 ‘기분 나쁜’ 나라.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쏘아 올리고 핵실험을 반복하는 나라. 이 나라 이미지의 원천은 이 나라가 탄생한 이후, 특히 2000년대 이후 미디어 보도의 영향이 압도적이다. 한편 일찍이 식민지 시대의 기억은 잊히고 있다.
--- p.96~97
이 만남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2015년 10월, 나는 평양 시내에 사는 후쿠시마 아이즈 출신 일본인 여성 나라 키리코 씨 댁을 방문한 적이 있다. 현관문을 열고 실내로 한 걸음 들어서자 키리코 씨는 “아! 내 조국 분이 오셨구나”라며 손을 내밀어주었다. 일본어가 유창한 아들과 함께 오래전 앨범을 보며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눴다. 잘 웃는 여성이었다. 그날 나는 사진은 하나도 찍지 않았다. “다음엔 봄에 올 테니 그때 취재하게 해주세요. 가능하면 사진도요. 다시 만납시다” 하고 악수를 한 뒤 헤어졌다. 헤어지는 현관 앞에서 키리코 씨는 “기념으로 가져가세요”라며 희고 붉은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하지만 반년 후 평양을 다시 방문했을 때, 키리코 씨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결국 내게는 그녀의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다. 시간이 흐르면서 키리코 씨 얼굴이 내 기억 속에서 조금씩 옅어진다. 만약을 위해 사진 한 장이라도 찍을까 했는데, 당시에는 아직 이 나라에서 막 취재를 시작한 참이라 ‘만약을 위해’라는 어설픈 마음으로 사진을 찍는 건 그만두었다. 쓸데없이 진중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키리코 씨의 사진을 찍지 못한 걸 후회하진 않는다. 다만 지금은 자연스레 대화를 하지만 그다음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염두에 두고 취재해야만 한다는 것을 키리코 씨의 죽음으로 통감했다.
--- p.106~107
안내인 이 씨와의 솔직한 대화
“남조선에 가본 적 있어?”
갑자기 이 씨가 물었다.
“응, 있어. 서울엔 친구도 있고.”
“남쪽 사람들을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그렇지, 여기 사람들하고 똑같아.”
이 씨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본 다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역사와 언어와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어. 같은 조선 민족이니까.”
나도 질문을 했다.
“일본을 어떻게 생각해?”
열차에서 마주 앉은 사람들에게 던진 것과 같은 질문이었다. 이 씨는 창밖을 바라보더니 다시 내 쪽을 보며 대답했다.
“이런 말 하는 건 미안하지만…… 많은 조선인이 일본을 싫어해. 하지만 개인적으론 일본 사람들이 정말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지금까지 내가 안내했던 일본인들은 단 한 사람도 내게 기분 나쁜 인상을 심어준 적이 없거든. 모두 친절하고 예의 발랐어. 너도 그렇고.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면 쉽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데 나라와 나라가 만나면 그게 어렵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어?”
“응, 잘 알겠어.”
나는 그의 눈을 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번에는 그가 물었다.
“7월에 발사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은 어떻게 생각해?”
그의 솔직한 질문에 놀랐다.
“음…… 그땐 나도 평양에 있었는데…….”
미사일 발사뿐만 아니라 그 이전 국제사회 움직임까지 모든 것을 다 포함해서 묻는 걸까 싶어 고민하는데, 그는 내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미국이 남조선과 군사훈련을 하지 않으면 미사일을 쏘는 일도 없을 거야.”
--- p.111~112
일본인 아내 9명과 잔류 일본인 여성 1명
내가 취재해온 일본인 아내들은 다양하다. 수도 평양에서 쭉 살아온 여성이 있는가 하면 일본 귀국자가 없는 농촌에서 수십 년 생활한 여성, 여러 번 이사 경험이 있는 여성, 귀국한 이후 60년 내내 같은 집에서 산 여성도 있다. 고향 방문을 할 수 있던 여성, 한 번도 돌아갈 수 없던 여성, 일본의 친척과 연락을 주고받는 여성, 연락이 끊긴 여성도 있다. 또 노동자로 공장이나 농장에서 일한 남편을 가진 여성이 있는가 하면, 연구자와 의사 등 전문가로 일한 남편을 가진 여성도 있다. 내가 만나지 못한 일본인 아내들은 훨씬 더 많다. 어떤 경우에도 그 사람 하나하나의 인생은 평등하고 둘도 없는 것임을 취재를 통해 강하게 느꼈다.
--- p.258~259
출판사 리뷰
열한 번의 방북 취재로 감춰진 기억 60년을 잇다
1959년 12월 14일, 재일교포 975명은
일본 니가타항에서 ‘귀국선’에 몸을 싣고 북한 청진항으로 향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된 후 일본에서는 1959년부터 1984년까지 재일조선인 귀국사업이란 이름으로 약 9만 3,000명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건너갔다. 자본주의 진영에서 공산주의 진영으로 대규모 인구가 이주한 것은 대단히 특이한 사건이었다. 그들은 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택했을까? 아니면 선택당한 것일까?
1956년 2월 27일, 평양에서 열린 북일적십자회담에서 북한에 남은 잔류 일본인의 귀국 문제와 재일조선인의 귀국 문제가 처음 대두되었다. 이후 1959년 12월 14일, 제1차 재일조선인 귀국사업이 실시되었다. 북한 측은 재일 교포의 북한 귀국이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최초의 민족 대이동으로서 사회주의 제도의 우월성을 세상에 널리 알린 것이라고 선전했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남한이 고향이었기에 엄밀히 말하면 귀국사업은 아니었다. 그중에는 일본에서 조선인과 결혼해, 남편을 따라 바다를 건넌 ‘일본인 아내’라 불리는 여성 약 1,830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에서는 귀국, 한국에서는 북송이라 불리는 귀환사업
남편을 따라 조선으로 간 일본인 아내들
“오래 살았어. 죽은 남편은 다정한 사람이었어. 북한 사람들은 친절했고 비교적 순탄한 삶을 살았어.” 북한에 살고 있는 일본인 아내들은 20대에 찍은 결혼 기념사진을 여든이 넘은 지금까지도 보물처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전부 가족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한 결혼식을 올렸지만, 젊을 때 만난 조선인 남편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매우 깊다. 그들은 북한의 각지로 흩어져 저마다의 삶을 살았지만, 대부분 행복한 기억을 갖고 있다. 저자가 만난 9명의 일본인 아내들은 반세기 전 ‘선택(조선으로의 귀국)’을 후회하지 않는다. 유감인 것은, 일본에의 자유로운 왕래가 실현되지 않은 것뿐이다.
아무도 기록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은 사람들로 취급된다
국적, 민족, 분단의 디아스포라
일본에서 북한으로의 귀국사업은 한국인들에겐 알려진 게 거의 없다. 뉴스로 나오긴 했어도 귀국사업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1960년대 남북한 관계는 꽁꽁 얼어붙은 상황이었기에 서로에게 관심 두지 않았다. 우리는 피해국이라는 입장에 서서 조선인 남성과 결혼한 일본인 여성에 대한 관심은 더더구나 없었다. 북한과 일본 간의 귀국사업도 표면적으로는 인도주의 방침에 의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식민 지배의 산물로서 이미 사회 문제로 대두되던 재일조선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가 작용했다. 한국 정부는 재일조선인의 ‘북송’은 일본 정부의 추방 정책과 북한 정부의 정치 목적이 야합한 산물이라며 그 추진을 격렬히 반대했다. 당시 북한을 선택한 사람들은 현재 일본에서도 북한에서도 남한에서도 잊힌 존재다. 정치학을 전공한 사진작가인 저자는 일본인 아내들의 삶을 증거로 남겨두고 싶다며, 아무도 기록하지 않으면 이들은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들로 취급될 것이라고 이 책을 쓴 이유를 설명한다.
1959년 12월 14일, 재일교포 975명은
일본 니가타항에서 ‘귀국선’에 몸을 싣고 북한 청진항으로 향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된 후 일본에서는 1959년부터 1984년까지 재일조선인 귀국사업이란 이름으로 약 9만 3,000명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건너갔다. 자본주의 진영에서 공산주의 진영으로 대규모 인구가 이주한 것은 대단히 특이한 사건이었다. 그들은 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택했을까? 아니면 선택당한 것일까?
1956년 2월 27일, 평양에서 열린 북일적십자회담에서 북한에 남은 잔류 일본인의 귀국 문제와 재일조선인의 귀국 문제가 처음 대두되었다. 이후 1959년 12월 14일, 제1차 재일조선인 귀국사업이 실시되었다. 북한 측은 재일 교포의 북한 귀국이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최초의 민족 대이동으로서 사회주의 제도의 우월성을 세상에 널리 알린 것이라고 선전했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남한이 고향이었기에 엄밀히 말하면 귀국사업은 아니었다. 그중에는 일본에서 조선인과 결혼해, 남편을 따라 바다를 건넌 ‘일본인 아내’라 불리는 여성 약 1,830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에서는 귀국, 한국에서는 북송이라 불리는 귀환사업
남편을 따라 조선으로 간 일본인 아내들
“오래 살았어. 죽은 남편은 다정한 사람이었어. 북한 사람들은 친절했고 비교적 순탄한 삶을 살았어.” 북한에 살고 있는 일본인 아내들은 20대에 찍은 결혼 기념사진을 여든이 넘은 지금까지도 보물처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전부 가족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한 결혼식을 올렸지만, 젊을 때 만난 조선인 남편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매우 깊다. 그들은 북한의 각지로 흩어져 저마다의 삶을 살았지만, 대부분 행복한 기억을 갖고 있다. 저자가 만난 9명의 일본인 아내들은 반세기 전 ‘선택(조선으로의 귀국)’을 후회하지 않는다. 유감인 것은, 일본에의 자유로운 왕래가 실현되지 않은 것뿐이다.
아무도 기록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은 사람들로 취급된다
국적, 민족, 분단의 디아스포라
일본에서 북한으로의 귀국사업은 한국인들에겐 알려진 게 거의 없다. 뉴스로 나오긴 했어도 귀국사업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1960년대 남북한 관계는 꽁꽁 얼어붙은 상황이었기에 서로에게 관심 두지 않았다. 우리는 피해국이라는 입장에 서서 조선인 남성과 결혼한 일본인 여성에 대한 관심은 더더구나 없었다. 북한과 일본 간의 귀국사업도 표면적으로는 인도주의 방침에 의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식민 지배의 산물로서 이미 사회 문제로 대두되던 재일조선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가 작용했다. 한국 정부는 재일조선인의 ‘북송’은 일본 정부의 추방 정책과 북한 정부의 정치 목적이 야합한 산물이라며 그 추진을 격렬히 반대했다. 당시 북한을 선택한 사람들은 현재 일본에서도 북한에서도 남한에서도 잊힌 존재다. 정치학을 전공한 사진작가인 저자는 일본인 아내들의 삶을 증거로 남겨두고 싶다며, 아무도 기록하지 않으면 이들은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들로 취급될 것이라고 이 책을 쓴 이유를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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