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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구약성서는 그 자체로 권위를 갖는 하나님의 계시이며 최초 저자와 청중의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할 고대 텍스트다.”
전통적으로 학자들은 히브리 정경을 해석할 때 기독교 신학의 렌즈를 통해 신약성서와의 연관성 속에서, 특히 기독론적인 관점에서 텍스트를 다루어왔다. 고대 텍스트의 의미를 현재에 적용하는 작업은 수천 년간 이어온 교회와 신학의 주요 과제였으며 신학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시대마다 구약성서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해왔는데, 그 과정에서 구약성서가 그 자체의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 어떤 기능을 수행했는지는 서서히 잊히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여기 소개하는 존 H. 월튼의 『교회를 위한 구약성서 신학』은 과거의 책인 구약성서가 그 자체의 맥락과 인지환경에서 전달하고자 의도했던 메시지가 무엇인지 밝히는 것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는다. 고대 근동의 소위 “문화의 강”에 정통한 저자는 구약성서를 신약성서나 기독교 신학에 예속시키지 않고 그 자체로서 해석할 때 구약성서만이 제공할 수 있는 고유한 진리들을 밝혀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이러한 작업을 통해 신구약 성서의 연속성과 상호 의존 관계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며 결과적으로 기독교 신학이 더욱 풍성하고 온전해질 것으로 기대한다.
전통적으로 학자들은 히브리 정경을 해석할 때 기독교 신학의 렌즈를 통해 신약성서와의 연관성 속에서, 특히 기독론적인 관점에서 텍스트를 다루어왔다. 고대 텍스트의 의미를 현재에 적용하는 작업은 수천 년간 이어온 교회와 신학의 주요 과제였으며 신학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시대마다 구약성서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해왔는데, 그 과정에서 구약성서가 그 자체의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 어떤 기능을 수행했는지는 서서히 잊히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여기 소개하는 존 H. 월튼의 『교회를 위한 구약성서 신학』은 과거의 책인 구약성서가 그 자체의 맥락과 인지환경에서 전달하고자 의도했던 메시지가 무엇인지 밝히는 것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는다. 고대 근동의 소위 “문화의 강”에 정통한 저자는 구약성서를 신약성서나 기독교 신학에 예속시키지 않고 그 자체로서 해석할 때 구약성서만이 제공할 수 있는 고유한 진리들을 밝혀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이러한 작업을 통해 신구약 성서의 연속성과 상호 의존 관계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며 결과적으로 기독교 신학이 더욱 풍성하고 온전해질 것으로 기대한다.
목차
감사의 글 13
1. 서론과 기초 15
2. 야웨와 신들 60
3. 우주와 인류 125
4. 언약과 왕국 181
5. 성전과 토라 243
6. 죄와 악 309
7. 구원과 내세 375
8. 결론 441
약어표 486
참고문헌 488
주제색인 502
성구색인 511
1. 서론과 기초 15
2. 야웨와 신들 60
3. 우주와 인류 125
4. 언약과 왕국 181
5. 성전과 토라 243
6. 죄와 악 309
7. 구원과 내세 375
8. 결론 441
약어표 486
참고문헌 488
주제색인 502
성구색인 511
책 속으로
본서에서 내가 채택하는 접근법은 구약성서 내에 오랜 시간에 걸쳐 편집되어왔거나 혹은 후대에 이르러 하나의 문서로 취합된 보다 오래 된 자료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예를 들어 출애굽기의 성막 자료에 통일왕국 시대와 포로 시대 이후 편집의 흔적들이 발견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그 자료가 시내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관점도 보존하고 있다고 믿는다. 달리 말하자면 나는 성막에 대한 이해가 포로 시대 이후의 렌즈를 통해 걸러짐으로써 오로지 포로 시대 이후의 관점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가정한다. 나는 그 자료에 고대의 관점 역시 보존되어 있다고 믿는다. 비록 그러한 관점들이 전해져 내려오면서 편집 과정을 거치기는 했겠지만 말이다. 나는 본서를 구약성서의 문학단위나 저자를 기준으로 구성하기보다는 신학적 주제에 따라 구성할 것이다. 또한 가능하다면 각 주제와 관련하여 구약 시대에 발생했을 것으로 보이는 발전 과정을 식별하고자 시도할 것이다. 더 나아가 고대 근동의 보편적인 사상이 구약 텍스트 내에 반영되어 있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 논의할 것이며, 이스라엘 신학의 고유성과 그 결과로 나타나는 영속적인 신학, 그리고 그러한 신학이 신약성서로 연결되는 방식들을 탐구할 것이다
--- 제1장 “서론과 기초” 중에서
고대 세계 전반에 걸쳐 많은 신들이 비교불가능하고 탁월하며 독특한 존재로, 혹은 그 자체로서 여러 신들의 집합체로 간주되곤 했다. 야웨에 대해서도 이와 유사한 진술이 가능한데, 그것은 이스라엘의 신학에서 근본적인 요소일 뿐 아니라 오늘날의 기독교 신학에서도 여전히 그러하다. 고대 세계에서 비교불가능성은 이스라엘만 가지고 있는 독특한 개념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신학을 고대 세계의 나머지와 구별 짓는 독특한 요소는 신적 공동체를 이해하는 방식이었다. 앞서 논의했던 것처럼 고대 근동의 다신론 체계는 신들이 공동체로서 생활하고 활동하는 방식에 틀을 제공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야웨의 공동체는 어전회의 구성원들의 미미한 지위,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언약관계를 통해 자신의 백성 이스라엘과 공동체를 구성하신다는 사실로 차별화된다. 앞으로 밝혀지겠지만 이러한 언약이야말로 구약신학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모습이다.
--- 제2장 “야웨와 신들” 중에서
우리는 고대 세계에서 창조자 신은 우주에 질서를 부여하고 그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일을 수행하는 존재로 간주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질서 체계에 물질적 우주도 포함되기는 했지만, 우주가 갖는 물질성이 핵심은 아니었다. 고대에는 인간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에 더 큰 관심이 주어졌는데 여기에는 물질적 우주가 인간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일에서 차지하는 역할에 대한 관심도 포함되었다. 창조에 대해 고대 세계가 공유했던 이런 관점은 (평평한 지구나 단단한 하늘이라는 개념에 대해 우리가 판단하곤 하는 것처럼)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단지 우리가 창조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과 다른 것뿐이다. 고대 근동의 창조자 신들에 관한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이제는 창조주 야웨라는 구약성서의 개념으로 우리의 관심을 돌려보자.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엔릴이나 마르두크, 아문-레, 혹은 프타가 아니라 야웨를 창조주로 여겼다는 점이다.
--- 제3장 “우주와 인류” 중에서
이스라엘은 언약을 통해 야웨의 백성이라는 신분을 부여받았는데, 그들은 그 신분을 그들의 정체성으로 삼아야 했다. 이와 동시에 야웨는 이스라엘과의 언약 관계에 들어가심으로써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정체성을 취하신 것이다. 언약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창세기 12; 15장), 이스라엘(출 6:7), 그리고 마지막에는 다윗(삼하 7장)을 선택하셨는데, 이와 같은 언약의 각 단계들은 새로운 선택 행위와 새로운 방향의 계시를 동반한다. 언약의 맥락에서 선택이란 개인이나 단체에게 새로운 신분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의미한다. 여기서 각각의 선택 행위는 일련의 사건들로 이어지는데, 그 사건들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언약을 통해 스스로 취하신 정체성에 부합하도록 행동하시는 전형적인 방식이 어떠한 것인지를 가르쳐준다. 따라서 야웨는 단순히 선택하시는 하나님으로만 이해될 것이 아니라, 택하신 백성들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시는 동시에 그가 부여하신 가정이나 공동체에서 한 사람이 맡는 역할은 신분과 정체성의 요소들을 포함한다. 새로운 신분에 걸맞은 정체성을 자신에게도 취하시는 하나님으로 이해되어 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부여된 신분에 걸맞은 정체성을 취할 때 그들은 하나님과의 교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 제4장 “언약과 왕국” 중에서
질서는 고대 인지환경에서 가장 근본적인 요소였으며, 그 근원은 하나님이었다. 그 질서는 창조 안에 그리고 창조를 통해 수립되었고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고대 세계 인간에게 경험되는 질서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인 성전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질서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이 정결 개념이었는데, 성전에서 질서가 유지되는 방법 중 하나가 정결이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율법은 질서와 정결을 표현하는 수단인 동시에 제의적 타당성과 도덕성을 지배하는 원리였다. 도덕성은 이 모든 체계를 이끌어간다기보다는 그 체계가 만들어낸 결과물 중 하나였다. 이런 기본적인 개념을 바탕으로 성전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 제5장 “성전과 토라” 중에서
결론적으로, 고대 근동의 신들은 선하고 의로운 것을 장려할 책임을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는데, 이것은 그들의 성품과 속성이 그것을 강제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들에게 그런 영향력을 행사할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에게도 유익을 가져다주었다. 보응의 원리는 신들이 자신들의 필요가 채워지기를 원하는 동시에 사람들에게 이에 따른 보상을 내리거나 징벌을 내릴 힘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만 작동하는 논리적 추론으로 이해될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보응의 원리가 작동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모체는 제의의 영역인 반면, 이집트에서는 이 원리가 “마아트”를 확립하고 마술을 시행하기 위한 기본적인 메커니즘 역할을 했다. 비교의 범위를 질서의 영역으로 확대해보면 세 문화의 차이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질서의 토대는 제사 메커니즘을 통해 작동하는 “우주적 공생관계”이며, 이집트에서 질서의 근간은 마술 메커니즘을 통해 작동하는 “마아트”였고, 이스라엘에서 질서의 토대는 토라 메커니즘을 통해 작동하는 언약관계였다.
--- 제6장 “죄와 악” 중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우리는 이처럼 기초적인 선언을 자명한 경구로 치부해버리곤 하지만, 사실은 바로 이 같은 기초에서 출발하여 논리가 우리를 인도하는 대로 합당한 단계들을 밟아가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며, 그분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제공하셨음을 믿는다. 그분이 제공하신 수단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었고, 그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에게 사죄, 구원 그리고 영생을 포함하는 수많은 유익들을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유익들에 막대한 가치를 부여하다 보니 우리는 기독교를 “우리에게 유익을 가져다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개념과 동일시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현대의 개인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문화 속에서는 우리 자신의 일이나 우리가 장차 얻게 될 것을 우선시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막대한 대가를 치르심으로써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놀라운 유익들을 폄하하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믿는 기독교라는 것이 우리가 얻는 유익에 관한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하며, 이 같은 유익들이 우리의 신앙을 규정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 제7장 “구원과 내세” 중에서
네 번째 그룹은 성서의 탁월한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해석학적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텍스트의 모든 요소는 문화 상대주의적이라고 결론 짓는다. 이 관점에 따르면 구약성서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규범적인 제안도 제시하지 않는다. 이 관점의 문제는 구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가지는 중요성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만일 구약성서에 기록된 말씀이 우리를 향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면, 그 말씀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가진다는 것인가? 나는 마지막 관점을 지지하면서도, 성서가 현대 그리스도인 청중들에게 여전히 유효한 말씀이라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다. 토라는 모든 시대 모든 문화를 대상으로 주어진 규정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이스라엘과 야웨 간의 언약을 위해 주어진 규정으로서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이 신성한 공간에서 생존하고 번창하도록 돕기 위해 주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토라는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와 성전에서의 하나님의 임재에만 적용되는 상대적인 규정들이다. 그 같은 규정들 중에 우리를 대상으로 주어진 것은 하나도 없으며, 따라서 현대의 이슈들에 대한 각자의 입장을 지지하는 증거 텍스트로 사용될 수 없다. 다시 말해 토라는 우리에게 “성서적”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 백성 이스라엘의” 관점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말씀들이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며, 다만 그 같은 진술들이 문화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현대 문화에 관련된 사안들을 결정하는 증거 텍스트가 될 수 없다는 의미다.
--- 제1장 “서론과 기초” 중에서
고대 세계 전반에 걸쳐 많은 신들이 비교불가능하고 탁월하며 독특한 존재로, 혹은 그 자체로서 여러 신들의 집합체로 간주되곤 했다. 야웨에 대해서도 이와 유사한 진술이 가능한데, 그것은 이스라엘의 신학에서 근본적인 요소일 뿐 아니라 오늘날의 기독교 신학에서도 여전히 그러하다. 고대 세계에서 비교불가능성은 이스라엘만 가지고 있는 독특한 개념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신학을 고대 세계의 나머지와 구별 짓는 독특한 요소는 신적 공동체를 이해하는 방식이었다. 앞서 논의했던 것처럼 고대 근동의 다신론 체계는 신들이 공동체로서 생활하고 활동하는 방식에 틀을 제공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야웨의 공동체는 어전회의 구성원들의 미미한 지위,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언약관계를 통해 자신의 백성 이스라엘과 공동체를 구성하신다는 사실로 차별화된다. 앞으로 밝혀지겠지만 이러한 언약이야말로 구약신학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모습이다.
--- 제2장 “야웨와 신들” 중에서
우리는 고대 세계에서 창조자 신은 우주에 질서를 부여하고 그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일을 수행하는 존재로 간주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질서 체계에 물질적 우주도 포함되기는 했지만, 우주가 갖는 물질성이 핵심은 아니었다. 고대에는 인간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에 더 큰 관심이 주어졌는데 여기에는 물질적 우주가 인간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일에서 차지하는 역할에 대한 관심도 포함되었다. 창조에 대해 고대 세계가 공유했던 이런 관점은 (평평한 지구나 단단한 하늘이라는 개념에 대해 우리가 판단하곤 하는 것처럼)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단지 우리가 창조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과 다른 것뿐이다. 고대 근동의 창조자 신들에 관한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이제는 창조주 야웨라는 구약성서의 개념으로 우리의 관심을 돌려보자.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엔릴이나 마르두크, 아문-레, 혹은 프타가 아니라 야웨를 창조주로 여겼다는 점이다.
--- 제3장 “우주와 인류” 중에서
이스라엘은 언약을 통해 야웨의 백성이라는 신분을 부여받았는데, 그들은 그 신분을 그들의 정체성으로 삼아야 했다. 이와 동시에 야웨는 이스라엘과의 언약 관계에 들어가심으로써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정체성을 취하신 것이다. 언약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창세기 12; 15장), 이스라엘(출 6:7), 그리고 마지막에는 다윗(삼하 7장)을 선택하셨는데, 이와 같은 언약의 각 단계들은 새로운 선택 행위와 새로운 방향의 계시를 동반한다. 언약의 맥락에서 선택이란 개인이나 단체에게 새로운 신분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의미한다. 여기서 각각의 선택 행위는 일련의 사건들로 이어지는데, 그 사건들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언약을 통해 스스로 취하신 정체성에 부합하도록 행동하시는 전형적인 방식이 어떠한 것인지를 가르쳐준다. 따라서 야웨는 단순히 선택하시는 하나님으로만 이해될 것이 아니라, 택하신 백성들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시는 동시에 그가 부여하신 가정이나 공동체에서 한 사람이 맡는 역할은 신분과 정체성의 요소들을 포함한다. 새로운 신분에 걸맞은 정체성을 자신에게도 취하시는 하나님으로 이해되어 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부여된 신분에 걸맞은 정체성을 취할 때 그들은 하나님과의 교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 제4장 “언약과 왕국” 중에서
질서는 고대 인지환경에서 가장 근본적인 요소였으며, 그 근원은 하나님이었다. 그 질서는 창조 안에 그리고 창조를 통해 수립되었고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고대 세계 인간에게 경험되는 질서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인 성전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질서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이 정결 개념이었는데, 성전에서 질서가 유지되는 방법 중 하나가 정결이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율법은 질서와 정결을 표현하는 수단인 동시에 제의적 타당성과 도덕성을 지배하는 원리였다. 도덕성은 이 모든 체계를 이끌어간다기보다는 그 체계가 만들어낸 결과물 중 하나였다. 이런 기본적인 개념을 바탕으로 성전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 제5장 “성전과 토라” 중에서
결론적으로, 고대 근동의 신들은 선하고 의로운 것을 장려할 책임을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는데, 이것은 그들의 성품과 속성이 그것을 강제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들에게 그런 영향력을 행사할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에게도 유익을 가져다주었다. 보응의 원리는 신들이 자신들의 필요가 채워지기를 원하는 동시에 사람들에게 이에 따른 보상을 내리거나 징벌을 내릴 힘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만 작동하는 논리적 추론으로 이해될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보응의 원리가 작동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모체는 제의의 영역인 반면, 이집트에서는 이 원리가 “마아트”를 확립하고 마술을 시행하기 위한 기본적인 메커니즘 역할을 했다. 비교의 범위를 질서의 영역으로 확대해보면 세 문화의 차이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질서의 토대는 제사 메커니즘을 통해 작동하는 “우주적 공생관계”이며, 이집트에서 질서의 근간은 마술 메커니즘을 통해 작동하는 “마아트”였고, 이스라엘에서 질서의 토대는 토라 메커니즘을 통해 작동하는 언약관계였다.
--- 제6장 “죄와 악” 중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우리는 이처럼 기초적인 선언을 자명한 경구로 치부해버리곤 하지만, 사실은 바로 이 같은 기초에서 출발하여 논리가 우리를 인도하는 대로 합당한 단계들을 밟아가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며, 그분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제공하셨음을 믿는다. 그분이 제공하신 수단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었고, 그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에게 사죄, 구원 그리고 영생을 포함하는 수많은 유익들을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유익들에 막대한 가치를 부여하다 보니 우리는 기독교를 “우리에게 유익을 가져다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개념과 동일시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현대의 개인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문화 속에서는 우리 자신의 일이나 우리가 장차 얻게 될 것을 우선시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막대한 대가를 치르심으로써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놀라운 유익들을 폄하하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믿는 기독교라는 것이 우리가 얻는 유익에 관한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하며, 이 같은 유익들이 우리의 신앙을 규정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 제7장 “구원과 내세” 중에서
네 번째 그룹은 성서의 탁월한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해석학적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텍스트의 모든 요소는 문화 상대주의적이라고 결론 짓는다. 이 관점에 따르면 구약성서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규범적인 제안도 제시하지 않는다. 이 관점의 문제는 구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가지는 중요성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만일 구약성서에 기록된 말씀이 우리를 향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면, 그 말씀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가진다는 것인가? 나는 마지막 관점을 지지하면서도, 성서가 현대 그리스도인 청중들에게 여전히 유효한 말씀이라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다. 토라는 모든 시대 모든 문화를 대상으로 주어진 규정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이스라엘과 야웨 간의 언약을 위해 주어진 규정으로서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이 신성한 공간에서 생존하고 번창하도록 돕기 위해 주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토라는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와 성전에서의 하나님의 임재에만 적용되는 상대적인 규정들이다. 그 같은 규정들 중에 우리를 대상으로 주어진 것은 하나도 없으며, 따라서 현대의 이슈들에 대한 각자의 입장을 지지하는 증거 텍스트로 사용될 수 없다. 다시 말해 토라는 우리에게 “성서적”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 백성 이스라엘의” 관점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말씀들이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며, 다만 그 같은 진술들이 문화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현대 문화에 관련된 사안들을 결정하는 증거 텍스트가 될 수 없다는 의미다.
--- 제8장 “결론” 중에서
출판사 리뷰
제1장 “서론과 기초”에서는 저자의 새로운 통찰을 담은 독특한 신학을 전개하기 위한 토대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명제를 제시한다.
(1) 성서는 우리를 위해 쓴 책이지만 우리에게 쓴 책은 아니다. 우리는 구약성서의 저자들이 염두에 둔 내포청중이 아니며, 성서가 우리를 위해 기록된 방식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저자의 내포청중이 되고자 노력해야 한다.
(2) 구약성서의 핵심은 “하나님이 맨 처음부터 자신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기로 의도하셨으며 그들과 관계를 맺고자 하셨다”는 점이다. 성서는 창세기의 첫 장에서부터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까지, 다시 말해 에덴동산에서 성막과 성전, 그리스도의 성육신, 오순절 성령의 임재, 그리고 최종적으로 새 창조에 이르기까지 이 주제를 추적해간다. 하나님의 임재를 다루는 줄거리가 구원을 다루는 줄거리(구속사)보다 더 중요하다.
(3) 성서 연구에 비평적 방법론을 적용하는 것이 복음주의적 토대를 무너뜨리는 것은 아니다. 비평적 분석은 성서 텍스트를 고지식한 자세로 대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지, 근본적으로 신앙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텍스트에 담긴 진리를 밝히는 일은 생각보다 까다로우며, 텍스트를 관통할 수 있게 해주는 비평적인 도구들을 배제한 채 읽을 때에는 오히려 더욱 모호해질 수 있다.
(4) 구약성서 텍스트는 단지 그리스도 및 신약과의 관계에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정경의 권위를 갖는 문서다. 물론 신약성서도 영감된 저자들의 저작으로서 그 자체의 권위를 주장할 권리가 있으며 그러한 권리가 구약성서의 인간 저자의 의도에 매여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구약 텍스트에 대한 이런 새로운 차원의 해석이 구약성서 저자가 최초에 의도했던 의미를 대체할 수는 없다. 이 두 가지 차원의 의미는 나란히 공존할 수 있다.
(5) 구약성서가 비록 현대 조직신학의 기준으로 충분히 발전된 신학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갖춘 견실한 신학을 제공한다. 구약성서는 하나님의 계시로서 그분의 계획과 목적, 그리고 이를 통해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준다. 하나님은 변치 않는 분이시며 따라서 구약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도 결코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아니다.
(6) 구약성서는 고대 근동의 인지환경(우주론, 세계관)을 반영하는 고대 문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고대 세계에 속한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이 사고하는 방식도 고대인들과 다르지 않았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 있는 메시지가 가지는 파급력을 온전히 전달하는 방식으로 성서를 해석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속한 문화의 강을 벗어나서 그들이 속한 문화의 강을 이해하려고 시도해야 한다.
(7) 구약성서 해석은 우리의 해석은 그리스도 중심적(christocentric)이 아니라 그리스도 지향적(christotelic)이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종종 하나님의 계획의 정점(climax)으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류를 포함한 모든 창조세계를 자신에게로 구속하시기 위해 사용하신 도구로 여겨진다. 그러나 여기서 “중심”과 “정점”은 서로 구별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물론 정점이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구약의 중심을 그분께 두는 것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제2장 “야웨와 신들”에서는 구약성서의 야웨가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그들을 거룩하게 만드셨다는 독특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는 점을 역설한다. 야웨에 대한 이스라엘의 경배는 배타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으며, 야웨는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며 그들과 관계를 맺으시고 그들에게(그리고 그들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다. 야웨가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는 모두에게 가장 유익이 되는 방식으로 자신의 임재를 세상 속에 회복시키시기 위한 것이었다.
제3장 “우주와 인류”에서는 고대 근동과 이스라엘에서 신-인 관계가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를 제시한다. 고대 근동에서 신들과 인간의 관계를 특징짓는 용어는 “우주적 공생관계”다. 인류는 신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창조되었으며 그들의 섬김에 대한 대가로 그들을 돌볼 책임을 지닌다. 반면에 이스라엘에서 야웨와 백성의 관계는 “위대한 계획”으로 특징지어진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과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인간을 파트너로 삼으시고 그들에게 언약 백성이라는 신분을 부여하신다는 것이다.
제4장 “언약과 왕국”에서는 언약 백성으로서의 주관적인 정체성과 객관적인 신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언약이 전개되는 과정을 관계(아브람과 그의 가족), 내주(하나님의 임재 앞에서의 삶을 위한 토라), 통치(성막과 왕정제도를 통한 하나님의 다스리심), 구원(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새 언약)이라는 네 단계로 설명한다. 아브람과의 언약이 계시 프로그램의 첫 단계로서 의도되었다면, 예수는 계시 프로그램의 정점이자(히 1:1-2) 이스라엘 역사의 완성이다.
제5장 “성전과 토라”에서는 질서 개념과 신성한 공간 개념 간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질서는 고대 인지환경에서 가장 근본적인 요소였으며, 그 근원은 하나님이었다. 그 질서는 창조 안에 그리고 창조를 통해 수립되었고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고대 세계 인간에게 경험되는 질서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인 성전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이 개념들은 구약성서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던 주제였으며, 결과적으로는 언약 공동체의 맥락에 초점을 맞추었다. 질서와 신성한 공간은 구약성서의 핵심적인 신학적 개념일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신학적 사고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제6장 “죄와 악”에서는 고대 세계에서 악이라는 개념이 질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밝힌다. 구약성서에는 현대 기독교 신학에서 악, 죄, 사탄, 귀신들에 관해 전개하는 이론들과의 접점이 그리 많지 않다. 구약성서에서 악은 도덕적 실패도 포함하지만 악 자체가 도덕적 관점에서 정의되지는 않는다. 고대 이스라엘인들도 보편적인 죄의 성향에 대해서는 인식하고 있었지만 원죄라는 개념은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오늘날의 기독교 신학에서 표현하는 타락이라는 개념 역시 그들의 사고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죄는 사람에게 지워진 짐으로 간주되었으며 보다 일반적으로는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라는 관점에서 다루어졌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언약을 해치는 무질서의 근원이었다.
제7장은 구원과 내세의 문제를 다룬다. 이스라엘에는 천국에 대한 소망이나 천상에서의 영원한 실존을 성취할 수 있게 해주는 메커니즘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내세에서의 보상이나 심판에 대한 관념도, 하나님과 영원토록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생각도, 그리고 개인적인 부활이라는 개념도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라는 개념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그들의 개인적인 역경이나 운명에 대해 생각하기보다는 집합적이고 공동체적인 정체성이라는 관점에서 이 같은 사안들을 대했다. 우리는 이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는데,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이곳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며 살아가는 일에 대해 생각하기보다는 단지 우리가 구원받았고, 사죄 받았으며 천국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주와 우리를 위해 세우신 계획과 목적에 동참하는 하나님의 파트너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다.
이 책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에 중요한 핵심적인 주제들과 관련하여 구약성서 신학을 고대 근동 문학과 연계하여 비교분석하고, 신약신학과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철저히 구분하여 진술하며, 더 나아가 기독교신학까지 고려하여 오늘의 그리스도인을 위한 신학을 제시한다. 구약성서가 신약성서와 차이를 보이는 내용과 신약성서에서는 얻을 수 없는 구약성서만의 통찰들이 무엇인지 밝혀줌으로써 구약성서가 신약성서와는 독립적으로 그 자체로도 정경으로서 권위를 갖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한다. 복음주의 성서학에서 “인지환경 비평” 방법론을 적극 활용한 학문적 쾌거라고 할 수 있다.
(1) 성서는 우리를 위해 쓴 책이지만 우리에게 쓴 책은 아니다. 우리는 구약성서의 저자들이 염두에 둔 내포청중이 아니며, 성서가 우리를 위해 기록된 방식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저자의 내포청중이 되고자 노력해야 한다.
(2) 구약성서의 핵심은 “하나님이 맨 처음부터 자신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기로 의도하셨으며 그들과 관계를 맺고자 하셨다”는 점이다. 성서는 창세기의 첫 장에서부터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까지, 다시 말해 에덴동산에서 성막과 성전, 그리스도의 성육신, 오순절 성령의 임재, 그리고 최종적으로 새 창조에 이르기까지 이 주제를 추적해간다. 하나님의 임재를 다루는 줄거리가 구원을 다루는 줄거리(구속사)보다 더 중요하다.
(3) 성서 연구에 비평적 방법론을 적용하는 것이 복음주의적 토대를 무너뜨리는 것은 아니다. 비평적 분석은 성서 텍스트를 고지식한 자세로 대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지, 근본적으로 신앙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텍스트에 담긴 진리를 밝히는 일은 생각보다 까다로우며, 텍스트를 관통할 수 있게 해주는 비평적인 도구들을 배제한 채 읽을 때에는 오히려 더욱 모호해질 수 있다.
(4) 구약성서 텍스트는 단지 그리스도 및 신약과의 관계에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정경의 권위를 갖는 문서다. 물론 신약성서도 영감된 저자들의 저작으로서 그 자체의 권위를 주장할 권리가 있으며 그러한 권리가 구약성서의 인간 저자의 의도에 매여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구약 텍스트에 대한 이런 새로운 차원의 해석이 구약성서 저자가 최초에 의도했던 의미를 대체할 수는 없다. 이 두 가지 차원의 의미는 나란히 공존할 수 있다.
(5) 구약성서가 비록 현대 조직신학의 기준으로 충분히 발전된 신학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갖춘 견실한 신학을 제공한다. 구약성서는 하나님의 계시로서 그분의 계획과 목적, 그리고 이를 통해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준다. 하나님은 변치 않는 분이시며 따라서 구약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도 결코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아니다.
(6) 구약성서는 고대 근동의 인지환경(우주론, 세계관)을 반영하는 고대 문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고대 세계에 속한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이 사고하는 방식도 고대인들과 다르지 않았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 있는 메시지가 가지는 파급력을 온전히 전달하는 방식으로 성서를 해석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속한 문화의 강을 벗어나서 그들이 속한 문화의 강을 이해하려고 시도해야 한다.
(7) 구약성서 해석은 우리의 해석은 그리스도 중심적(christocentric)이 아니라 그리스도 지향적(christotelic)이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종종 하나님의 계획의 정점(climax)으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류를 포함한 모든 창조세계를 자신에게로 구속하시기 위해 사용하신 도구로 여겨진다. 그러나 여기서 “중심”과 “정점”은 서로 구별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물론 정점이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구약의 중심을 그분께 두는 것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제2장 “야웨와 신들”에서는 구약성서의 야웨가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그들을 거룩하게 만드셨다는 독특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는 점을 역설한다. 야웨에 대한 이스라엘의 경배는 배타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으며, 야웨는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며 그들과 관계를 맺으시고 그들에게(그리고 그들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다. 야웨가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는 모두에게 가장 유익이 되는 방식으로 자신의 임재를 세상 속에 회복시키시기 위한 것이었다.
제3장 “우주와 인류”에서는 고대 근동과 이스라엘에서 신-인 관계가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를 제시한다. 고대 근동에서 신들과 인간의 관계를 특징짓는 용어는 “우주적 공생관계”다. 인류는 신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창조되었으며 그들의 섬김에 대한 대가로 그들을 돌볼 책임을 지닌다. 반면에 이스라엘에서 야웨와 백성의 관계는 “위대한 계획”으로 특징지어진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과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인간을 파트너로 삼으시고 그들에게 언약 백성이라는 신분을 부여하신다는 것이다.
제4장 “언약과 왕국”에서는 언약 백성으로서의 주관적인 정체성과 객관적인 신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언약이 전개되는 과정을 관계(아브람과 그의 가족), 내주(하나님의 임재 앞에서의 삶을 위한 토라), 통치(성막과 왕정제도를 통한 하나님의 다스리심), 구원(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새 언약)이라는 네 단계로 설명한다. 아브람과의 언약이 계시 프로그램의 첫 단계로서 의도되었다면, 예수는 계시 프로그램의 정점이자(히 1:1-2) 이스라엘 역사의 완성이다.
제5장 “성전과 토라”에서는 질서 개념과 신성한 공간 개념 간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질서는 고대 인지환경에서 가장 근본적인 요소였으며, 그 근원은 하나님이었다. 그 질서는 창조 안에 그리고 창조를 통해 수립되었고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고대 세계 인간에게 경험되는 질서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인 성전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이 개념들은 구약성서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던 주제였으며, 결과적으로는 언약 공동체의 맥락에 초점을 맞추었다. 질서와 신성한 공간은 구약성서의 핵심적인 신학적 개념일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신학적 사고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제6장 “죄와 악”에서는 고대 세계에서 악이라는 개념이 질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밝힌다. 구약성서에는 현대 기독교 신학에서 악, 죄, 사탄, 귀신들에 관해 전개하는 이론들과의 접점이 그리 많지 않다. 구약성서에서 악은 도덕적 실패도 포함하지만 악 자체가 도덕적 관점에서 정의되지는 않는다. 고대 이스라엘인들도 보편적인 죄의 성향에 대해서는 인식하고 있었지만 원죄라는 개념은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오늘날의 기독교 신학에서 표현하는 타락이라는 개념 역시 그들의 사고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죄는 사람에게 지워진 짐으로 간주되었으며 보다 일반적으로는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라는 관점에서 다루어졌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언약을 해치는 무질서의 근원이었다.
제7장은 구원과 내세의 문제를 다룬다. 이스라엘에는 천국에 대한 소망이나 천상에서의 영원한 실존을 성취할 수 있게 해주는 메커니즘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내세에서의 보상이나 심판에 대한 관념도, 하나님과 영원토록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생각도, 그리고 개인적인 부활이라는 개념도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라는 개념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그들의 개인적인 역경이나 운명에 대해 생각하기보다는 집합적이고 공동체적인 정체성이라는 관점에서 이 같은 사안들을 대했다. 우리는 이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는데,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이곳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며 살아가는 일에 대해 생각하기보다는 단지 우리가 구원받았고, 사죄 받았으며 천국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주와 우리를 위해 세우신 계획과 목적에 동참하는 하나님의 파트너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다.
이 책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에 중요한 핵심적인 주제들과 관련하여 구약성서 신학을 고대 근동 문학과 연계하여 비교분석하고, 신약신학과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철저히 구분하여 진술하며, 더 나아가 기독교신학까지 고려하여 오늘의 그리스도인을 위한 신학을 제시한다. 구약성서가 신약성서와 차이를 보이는 내용과 신약성서에서는 얻을 수 없는 구약성서만의 통찰들이 무엇인지 밝혀줌으로써 구약성서가 신약성서와는 독립적으로 그 자체로도 정경으로서 권위를 갖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한다. 복음주의 성서학에서 “인지환경 비평” 방법론을 적극 활용한 학문적 쾌거라고 할 수 있다.
추천평
이번에 새물결플러스에서 번역, 출간된 『교회를 위한 구약성서 신학』은 지금까지 월튼 교수가 수행해온 연구의 종합판이라 할 수 있다. 성서학자들이 동경하면서도 가장 어려워하는 작업이 평생에 걸쳐 연구한 분과를 “인간과 하나님”이라는 큰 주제로 풀어내는 것인데, 이 책에서 월튼 교수는 바로 그 작업을 하고 있다. 저자의 해박한 전문 지식과 신앙에 대한 지혜가 아름다운 심포니처럼 어우러져 있어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고 싶어지는 책이다.
김구원 (서양고대문화사학회 연구 이사)
“하나님의 임재”를 중심 주제 삼아 구약성서의 신학적 주제들을 균형감 있게 포괄적으로 서술하는 이 책은 건강한 구약성서 신학을 경험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할 만하다.
김정훈 (부산장신대학교 구약학 교수)
월튼은 복음주의적 신앙고백이 확고부동한 신앙인인데 그의 구약학자로서의 학문은 깊고 넓어서 구약성서를 여전히 그리스도인을 위한 정경으로 수용하고 즐거워하고 활용하는 지혜를 제공한다. 이 은혜로우면서도 학문적으로 탄탄한 월튼의 책이 한국교회에게 큰 복이 되리라고 믿으며 일독을 추천한다.
김회권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구약학 교수)
구약의 “잃어버린 세계” 시리즈로 한국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존 월튼 박사가 구약성서에 관해 평생 생각한 것을 다듬어 “구약성서 신학”이란 주제로 단행본을 저술했다. 이 책을 통해 성서에 관한 독자들의 시각이 좀 더 예리하고 분명해질 것이고, 때론 망치로 얻어맞는 충격도 느낄 것이며, 무엇보다 하나님의 웅대한 계획을 이해하여 성서를 더욱 사랑하게 될 것이다.
류호준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은퇴 교수)
이 책의 특징과 특장은 구약신학을 고대 근동학과 연계하여 비교분석하고, 신약신학과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철저히 구분하여 진술하며, 더 나아가 기독교신학(역사신학과 조직신학)까지 고려하여 오늘의 그리스도인을 위한 구약성서 신학을 창출했다는 점이다. 고대 근동학, 구약학, 신약학, 역사신학, 조직신학 그리고 오늘의 교회를 넘나드는 행보에서 대가의 풍모가 느껴진다. 특히 구약성서가 신약성서와 차이를 보이는 내용과 신약성서에서는 얻을 수 없는 구약성서만의 통찰들에 관한 부분은 구약과 신약의 상호 필요성을 더욱더 두드러지게 한다. 이 책은 구약신학에 대한 교회의 지침이며, 신학도들에게는 오아시스 같은 구약신학의 교과서이며, 설교자들에게는 구약의 무궁무진한 보화를 선사하는 선물과도 같은 책이다. 무엇보다 구약 본문을 다루는 모든 설교자들에게 의무로 읽혔으면 하는 책이다.
차준희 (한세대학교 구약학 교수)
이 책은 구약성서가 특별히 고대 근동의 배경 속에서 읽힐 때 그 의미가 얼마나 분명해질 수 있으며 텍스트의 고유한 색깔과 풍미가 잘 드러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을 통해 구약성서에 대한 올바른 독법을 깨닫고 전 우주의 구속과 회복을 지향하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하경택 (장로회신학대학교 구약학 교수)
월튼의 책은 구약성서가 표방하는 신학과 세계관이 무엇인지 철저히 그 세계 속에서 파악하려 노력한다. 동시에 그렇게 파악된 의미를 오늘의 맥락과 끊임없이 조율한다. 이 책은 어렵지 않으면서 상세하고 묵직하지만 친절하다. 결국 구약성서 자체에 대한 신학의 이해를 높여 성서학계와 교회의 가교 역할을 수행하고자 한다. 구약성서를 그 자체로 읽어내는 일이 아직 어색한 한국교회에 꼭 필요한 책이 아닐 수 없다. 뛰어난 성서학자의 평생의 연구결과를 한 권으로 맛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에 많은 독자가 참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홍국평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구약학 교수)
존 월튼은 우리 세대를 대표하는 구약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구약성서가 고대 근동 세계에서 갖는 맥락에 대해 마땅한 세심함을 보이면서 그 책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대해 가지는 지속적인 중요성을 찾고자 한다. 『교회를 위한 구약성서 신학』은 지금까지 그가 내놓은 저작 중에 가장 광범위한 분석을 담고 있다. 구약성서를 진지하게 대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진심으로 추천한다.
트렘퍼 롱맨 3세 (웨스트몬트 칼리지 성서학과 로버트 H. 건드리 석좌교수)
오랜 시간 구약신학과 고대 근동 연구를 선도해온 월튼은 최신작에서 성서가 오늘날의 교회에 지속적으로 계시해오고 있는 신학이 무엇인지 밝히기 위한 역사적인 탐험에 착수한다. 우리는 월튼이 방대한 영역을 답파하고 수많은 자료를 분류해줌으로써 우리가 반복해서 읽을 가치가 있는 정보와 통찰의 보고를 우리에게 제공해주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브렌트 스트론 (에모리 대학교 구약학 교수)
김구원 (서양고대문화사학회 연구 이사)
“하나님의 임재”를 중심 주제 삼아 구약성서의 신학적 주제들을 균형감 있게 포괄적으로 서술하는 이 책은 건강한 구약성서 신학을 경험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할 만하다.
김정훈 (부산장신대학교 구약학 교수)
월튼은 복음주의적 신앙고백이 확고부동한 신앙인인데 그의 구약학자로서의 학문은 깊고 넓어서 구약성서를 여전히 그리스도인을 위한 정경으로 수용하고 즐거워하고 활용하는 지혜를 제공한다. 이 은혜로우면서도 학문적으로 탄탄한 월튼의 책이 한국교회에게 큰 복이 되리라고 믿으며 일독을 추천한다.
김회권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구약학 교수)
구약의 “잃어버린 세계” 시리즈로 한국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존 월튼 박사가 구약성서에 관해 평생 생각한 것을 다듬어 “구약성서 신학”이란 주제로 단행본을 저술했다. 이 책을 통해 성서에 관한 독자들의 시각이 좀 더 예리하고 분명해질 것이고, 때론 망치로 얻어맞는 충격도 느낄 것이며, 무엇보다 하나님의 웅대한 계획을 이해하여 성서를 더욱 사랑하게 될 것이다.
류호준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은퇴 교수)
이 책의 특징과 특장은 구약신학을 고대 근동학과 연계하여 비교분석하고, 신약신학과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철저히 구분하여 진술하며, 더 나아가 기독교신학(역사신학과 조직신학)까지 고려하여 오늘의 그리스도인을 위한 구약성서 신학을 창출했다는 점이다. 고대 근동학, 구약학, 신약학, 역사신학, 조직신학 그리고 오늘의 교회를 넘나드는 행보에서 대가의 풍모가 느껴진다. 특히 구약성서가 신약성서와 차이를 보이는 내용과 신약성서에서는 얻을 수 없는 구약성서만의 통찰들에 관한 부분은 구약과 신약의 상호 필요성을 더욱더 두드러지게 한다. 이 책은 구약신학에 대한 교회의 지침이며, 신학도들에게는 오아시스 같은 구약신학의 교과서이며, 설교자들에게는 구약의 무궁무진한 보화를 선사하는 선물과도 같은 책이다. 무엇보다 구약 본문을 다루는 모든 설교자들에게 의무로 읽혔으면 하는 책이다.
차준희 (한세대학교 구약학 교수)
이 책은 구약성서가 특별히 고대 근동의 배경 속에서 읽힐 때 그 의미가 얼마나 분명해질 수 있으며 텍스트의 고유한 색깔과 풍미가 잘 드러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을 통해 구약성서에 대한 올바른 독법을 깨닫고 전 우주의 구속과 회복을 지향하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하경택 (장로회신학대학교 구약학 교수)
월튼의 책은 구약성서가 표방하는 신학과 세계관이 무엇인지 철저히 그 세계 속에서 파악하려 노력한다. 동시에 그렇게 파악된 의미를 오늘의 맥락과 끊임없이 조율한다. 이 책은 어렵지 않으면서 상세하고 묵직하지만 친절하다. 결국 구약성서 자체에 대한 신학의 이해를 높여 성서학계와 교회의 가교 역할을 수행하고자 한다. 구약성서를 그 자체로 읽어내는 일이 아직 어색한 한국교회에 꼭 필요한 책이 아닐 수 없다. 뛰어난 성서학자의 평생의 연구결과를 한 권으로 맛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에 많은 독자가 참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홍국평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구약학 교수)
존 월튼은 우리 세대를 대표하는 구약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구약성서가 고대 근동 세계에서 갖는 맥락에 대해 마땅한 세심함을 보이면서 그 책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대해 가지는 지속적인 중요성을 찾고자 한다. 『교회를 위한 구약성서 신학』은 지금까지 그가 내놓은 저작 중에 가장 광범위한 분석을 담고 있다. 구약성서를 진지하게 대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진심으로 추천한다.
트렘퍼 롱맨 3세 (웨스트몬트 칼리지 성서학과 로버트 H. 건드리 석좌교수)
오랜 시간 구약신학과 고대 근동 연구를 선도해온 월튼은 최신작에서 성서가 오늘날의 교회에 지속적으로 계시해오고 있는 신학이 무엇인지 밝히기 위한 역사적인 탐험에 착수한다. 우리는 월튼이 방대한 영역을 답파하고 수많은 자료를 분류해줌으로써 우리가 반복해서 읽을 가치가 있는 정보와 통찰의 보고를 우리에게 제공해주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브렌트 스트론 (에모리 대학교 구약학 교수)
'45.성서신학 (연구>책소개) > 2.성경설교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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