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한국근대사 연구 (책소개)/1.한국근대사

한국 근대 공업사 (1876~1945)

동방박사님 2022. 8. 28.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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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원료·기술·자본의 종속과 판치는 군수하청
일제강점기 ‘공업화’의 본질을 파헤치다

이 책은 식민지 자본주의의 근대적·식민적 형성이라는 관점에서 1876년 개항에서 1945년 식민지 해방에 이르는 식민지 공업의 재생산구조와 발전의 한계를 해명하고자 하였다.

식민지의 부와 노동을 수탈하는 산업화

먼저 식민지 자본주의의 근대적·식민적 형성이라는 관점에 서서 식민지를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민족주의 인식에서 식민지란 이민족에 의한 정치권력의 탈취 및 이로 인한 정치적 억압이나 폭력으로 인식되었고, 그 때문에 식민지에서는 민족국가가 지향해야 할 보편적인 가치로 생각했던 근대화, 산업화란 들어설 여지가 없었다. 식민지의 산업화는 피지배 민족의 부와 노동을 빼앗는 기형적인 것 또는 파행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반면 1960~70년대 경제성장의 역사적 기원을 식민지 공업화에서 찾는 (식민지)근대화론의 인식에서 식민지란 경제성장의 조건으로서만 의미를 가질 뿐이다. 식민권력의 정치적 억압이나 폭력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부수적인 조건으로 치부되고, 일본의 식민지 투자와 식민권력의 지원, 산업화의 내부적 요인과 조선인의 적극적인 참여가 강조된다.

목차

책을 내면서
연보
수록 표·그림

서론
역사주의 너머의 근대성/식민성
식민지 공업 연구의 흐름
구성과 자료

Ⅰ. 개항과 공업화의 모색(1876~1904)

개항과 자본주의 세계경제로의 편입
식산흥업정책과 공장공업의 출현
한성·동래(부산)에서의 수공업 재편

Ⅱ. 식민지 자본주의와 식민지 공업의 형성(1905~1920년대 중반)

식민지 자본주의로의 전환
식민지 공업의 형성
경성에서 소비재 공업의 발흥
부산에서 소비재 공업의 발흥

Ⅲ. 대공황과 식민지 공업의 재편(1920년대 후반~1936)

대공황과 식민지 공업의 전환
경성에서 소비재 공업의 재편
부산에서 소비재 공업의 재편

Ⅳ. 전시통제와 군수공업화(1937~1945)

전시통제와 공업통제
경성의 공업통제와 군수공업화
부산의 공업통제와 군수공업화

결론


부표
참고문헌
찾아보기
 

저자 소개 

저 : 배성준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일제시기 경성 공업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공익법연구단 연구원, 명지대학교 국가기록원 연구원, 네덜란드 레이던대학교 동아시아연구센터 연구원, 고구려연구재단 및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을 역임했다. 식민지 자본주의 연구에서 출발하여 영토문제 연구를 병행하다가 동아시아 자본주의의 근대적/식민적 형성이라는 주제에 주목하고 있다. ...
 

책 속으로

러일전쟁의 결과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고, 전통적인 면직물 생산체계의 파괴와 더불어 일본의 면화공급지이자 면제품시장으로 편성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일본 방적업에 원료 공급을 위하여 한국의 재래면 대신 미국 육지면 재배사업을 추진하였으며, 식민지 조선에서 방적업의 발흥은 1930년대 일본 독점자본의 진출을 기다려야 했다
--- p.48

정부는 부국강병을 실현하기 위한 방책으로서 식산흥업殖産興業에 착수하였다. 1880년 12월 군비 강화와 대외 통상을 총괄하는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이듬해 일본으로 조사시찰단, 청국으로 영선사를 보내어 선진문물을 견학하고 근대적 군제 도입과 병기 제조를 추진하였다. …… 1880년대에 설립된 관영기구와 제조장은 외국인 기술자를 고용하고 근대적 기계를 도입하여 운영에 착수함으로써 근대적 공장공업의 효시가 되었다. 이 시기에 설립된 관영기구는 “○○국局”, 산하의 제조장은 “○○창廠” 또는 “○○소所”로 불리었는데, 당시 출현한 관영기구의 대표적인 형태가 통리기무아문 산하의 기기국이다
--- p.93

1880년대 정부 주도의 식산흥업정책이 실패한 원인으로 정부의 재정난에 따른 운영자금 부족, 관영사업 운영에 대한 경험 부족, 외국기술에의 의존 등 여러 요인이 거론되었다. 그중에서도 재정난에 따른 자금 부족이 가장 직접적인 요인으로 지목되는데, 재원으로 삼은 해관세는 절반 이상이 차관 상환금으로 사용되었고, 잡세는 제대로 징수되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그렇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국가주도적 산업화에 대한 인식의 결여와 식산흥업정책에 대한 외세의 개입이었다
--- p.97

1880년대 식산흥업정책이 관영기구와 제조장 설치라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면, 1890년대 후반의 식산흥업정책은 기술인력 양성과 관료가 주도하는 민간회사 설립이라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 1898년 5월에 농상공부 주관으로 “인민의 공예를 양성하고 이익을 진취해 갈 목적”으로 직조권업장을 설립하였고, 1901년에는 잠업과시험장을 설립하여 기술교육에 나섰다. 1899년에서 1900년에 걸쳐 우무학당郵務學堂, 전무학당電務學堂, 광무학교?務學校를 설립하고, 상공학교商工學校 관제를 제정하여 상업, 광업, 공업, 통신업에 걸친 기술자 양성체계를 마련하였다
--- p.101

관료의 회사 참여는 정부의 산업정책이 부재한 상태에서 관료의 개별적인 기업활동에 그치고 말았으며, 대부분의 회사가 경영난, 자금난으로 몇 해를 넘기지 못하였다. 내장원 주도로 설립된 관영 제조장은 러일전쟁 발발과 더불어 운영이 중단되었다. 유리창과 직조창은 제조장이 완공되지 못한 채 중단되었으며, 러일전쟁 발발 직후 일본군은 관영 제조장의 외국인 기술자들을 해고하고 운영을 중단시켰다
--- p.106

전통적인 수공업 생산을 의미하는 ‘공예’를 대신하여 근대적 공장공업factory system을 의미하는 ‘공업工業’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부터이다. ‘공업’ 용어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서양사정』(1866~70)에서 영어 ‘product, industry, work’의 번역어로 처음 사용하였다. 조선에서는 1886년에 간행된 『한성주보』에 처음 등장하며, 1880년대 말에 집필된 『서유견문西遊見聞』에서도 여러 용례가 발견된다
--- p.110

권공장과 제조소를 대신하여 공장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899년 9월 농상공부 상공국 산하에 공업과를 설치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관제개정에 따라 상업과는 ‘영업을 주장하는 회사들에 관한 사항’, 공업과는 ‘공업 및 공장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게 됨으로써 회사와는 별개의 대상으로서 공장을 인식하게 되었다
--- p.115

1913년에 간행된 『경성상공업조사』에서는 1911년 공업 현황을 수록하고 있는데, 당시 존재하였던 소규모 제조업자들, 종로의 금은세공업자, 남부 남소동南小洞의 직뉴업자織紐業者, 은평면 상평방常平坊의 제지업자, 서부 아현阿峴의 유기업자, 제혁업자, 마포의 소주 제조업자 등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소규모 제조업자의 존재는 종로 주변에 몰려 있던 각종 민영 수공업장이나 세검정의 제지업자가 당시까지 존속하였음을 보여준다
--- p.125

러일전쟁 발발 직후 일본이 추진한 화폐정리의 개시는 조선을 일본과 동일한 화폐유통권으로 만듦으로써 일본 상품과 자본이 안전하고 자유롭게 유통될 수 있는 기초를 만드는 것이며, 경부·경의철도의 군용화는 일본과 조선을 국유철도로 통합하고 이를 남만주철도에 연결함으로써 제국주의 경제와 국방에 필요한 인력과 물자가 안전하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 p.139

조선인 자본가들은 조선인 산업대회 등을 통하여 ‘조선인 본위’의 산업정책을 요청한 반면, 상업회의소에서는 조선을 식량 및 공업원료 공급지로 만들려는 총독부의 정책에 편승하여 ‘조선을 본위’로 한 산업정책을 요청하였다. 1921년 9월 산업조사위원회에서 채택한 「조선산업에 대한 일반방침」에서는 일본제국의 산업방침에 순응하는 식량·공업원료 공급지로서의 역할을 확인하였을 뿐이며, 공업의 장려는 조선 내 수요액이나 이출액이 상당한 업종 및 소공업에 한정되었다
--- p.149

1913년 쌀에 대한 이출세를 폐지하여 쌀의 이출을 장려하였다. …… 러일전쟁 이후 부산항을 중심으로 무역상이나 미곡상이 정미업에 투자하면서 정미업의 규모가 확대되었으며, 1910년대 들어서 쌀 이출이 크게 늘어나면서 정미업은 단일 업종으로 전체 공업생산액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공업에서 대표적인 업종이 되었다
--- p.152

통상 「회사령」 시행을 계기로 조선인 회사, 공장의 설립이 크게 위축된 것처럼 생각하지만, 1910년 이후 조선인 공장의 절반가량이 설립될 정도로 공장 설립이 활발하였다. 마포를 중심으로 경성 지역에 쌀을 공급하는 정미업이 발흥하였고, 연초공장, 직물공장, 인쇄소, 제화점 등 경성의 소비시장을 대상으로 각종 생활용품을 공급하는 공장이 설립되었다
--- p.155

식민지 조선에서 형성된 식민지 공업은 일본의 다른 식민지와 구별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식민지 공업은 식민 본국에 필요한 식량 및 원료를 공급하기 위한 가공업의 비중이 컸다. …… 둘째, 식민지 공업에서 관영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다. 조선총독부는 공채 및 차입금으로 철도, 도로, 항만 같은 인프라 건설에 투자하였는데, 관영 부문 투자에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이 철도사업이었다
--- p.166

연초는 대중소비품으로 수요가 많았기에 일본 연초의 판매시장으로 주목을 받았고, 조선총독부는 인삼, 소금과 더불어 식민지 경영을 위한 재원으로 삼았다. 1904년 일본에서 연초전매제가 실시됨에 따라 일본정부는 1906년 국책기업인 동아연초주식회사를 설립하고 한성과 다롄에 지점을 두었고, 1909년 한성과 잉커우에 연초공장을 설치하여 조선과 만주에 걸친 제조·판매망을 구축하였다
--- p.168

이입대체는 몇몇 업종에 불과할 뿐 대다수 업종은 이입품의 압박 속에서 틈새시장을 형성하거나 이입품이 잠식하지 못하는 공간에서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였다. 대표적인 업종이 면직물인데, 대부분의 면직물공장이 이입면직물의 압박을 피하여 한양저漢陽苧, 해동저海東苧, 세창저世昌苧 같은 의마포擬麻布나 허리띠, 대님 같은 직뉴 제품을 생산하였다
--- p.186

방직공업에서만 조선인 공장의 비중이 일본인 공장을 상회할 뿐 나머지 업종에서는 일본인 공장의 비중이 높다. 특히 기계공업, 요업, 제재업에서는 일본인 공장의 비중이 압도적이었다. 업종별로 보면 조선인 공장은 식료품공업, 기타 공업, 금속공업, 방직공업에 많은 반면 일본인 공장은 식료품공업, 기타 공업, 금속공업, 제재·목제품공업에 많다
--- p.191

한말에서 1910년대 말까지 일본인이 진고개, 명동 일대에 이주하여 본정을 중심으로 한 남촌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일본인 소비인구를 대상으로 한 일본인 공장은 남촌에 위치하였으며, 조선인 소비인구를 대상으로 한 조선인 공장은 북촌에 위치하였다. 광희정·병목정의 직물업, 죽첨정의 유기제조업, 공평동·남대문통의 모물업, 청진동·관철동의 조선주제조업 등이 조선인 거주 지역에 집중되었으며, 강기정·한강통의 철공업, 남미창정南米倉町의 제면업, 본정·원정의 제빵제과업, 원정의 양조업 등이 일본인 거주 지역에 집중되었다
--- p.200

1930년 중반 일본을 강타한 대공황의 여파는 그대로 조선에 파급되었다. 쌀값 폭락으로 농촌은 파탄지경에 이르렀으며, 도시에서는 상공업의 침체로 실업자가 쏟아져 나왔다. 물가의 폭락, 구매력의 감소, 상거래의 두절로 중소상공업자 중 도산하는 자가 속출하여 경성의 경우 1930년 말에는 1929년 7월에 비하여 중소상공업자가 725명이나 줄어들었으며, 실업자가 폭증하여 1931년 초에는 6만 명을 넘어섰다
--- p.227

만주사변과 만주국 수립으로 일만경제블럭을 구축하는 상황에서 우가키 총독은 일본, 조선, 만주를 아우르는 통합경제권으로서 ‘일선만日鮮滿경제블럭’을 제기하였다. 일선만경제블럭은 일본을 정공업精工業지대, 조선을 조공업粗工業지대, 만주를 농업·원료지대로 하여, 경제블럭 내부의 상호의존 관계를 강화함으로써 자급적 재생산 관계를 확보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구상이 농촌진흥운동과 결부되어 ‘농공병진農工竝進’정책으로 정리되었다
--- p.230

1930년대 일본 독점자본의 진출은 면방적, 인견직물, 맥주 등의 소비재 업종에 집중되었다. 이들 공장은 대부분 영등포에 위치하는데, 대규모 소비인구를 가진 경성에 인접해 있으며, 철도와 도로를 이용한 원료 및 제품의 운반에 편리하였기 때문이다
--- p.233

전기사업에서 비롯된 총독부의 경제통제는 공황으로 인해 과당경쟁이 이루어지는 고무, 인견염색, 법랑철기, 시멘트, 전구, 비누 등의 업종으로 확대되었다. 고무제품제조업의 경우 공황의 타격으로 농촌에서 고무신 대신 짚신을 신는 등 구매력 저하로 인하여 생산과잉이 된 데다, 생고무값 앙등, 일본상품 유입으로 인한 중국·만주시장 축소 등의 악조건이 겹침으로써 전국의 고무공장은 조업단축 또는 휴업이 불가피하였다
--- p.235

공황 직전인 1929년과 공황에서 회복되어 경제정책의 전환이 나타나는 1936년의 공업 현황을 비교해 보면, 화학공업의 비중 증대와 식료품공업의 비중 감소가 두드러진다. 화학공업은 1929년에 공업 생산의 5퍼센트를 차지하던 것이 1936년에는 23퍼센트로 급증하였다. 화학공업의 증대는 공업약품, 동물유지제조, 고무, 비료 같은 업종에서의 생산증대에 의한 것인데, 공장수로는 정어리기름?油을 만드는 정어리 가공공장이 가장 많았고 생산액은 조선질소비료의 비료 생산이 가장 비중이 컸다
--- p.240

식민지 공업의 재편을 추동한 것은 일본 독점자본의 투자에 의한 대규모 공장의 설립이었는데, 이러한 개발방식이 외형적인 공업의 비중 증대와 무역 및 산업구조의 변동을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산업연관의 확산이나 산업 구성의 고도화라는 측면에서는 부정적이었다. 조선의 풍부한 동력 및 원료와 저임금을 활용하기 위해 원료 산지나 대도시 인근에 설립된 대규모 공장은 조선 전체의 원료와 노동력을 흡수하는 거대한 ‘진공청소기’ 같은 역할을 하였을 뿐, 업종 내부에서나 여타 업종에 대해서도 산업연관을 창출하지 못하였다
--- p.243

1920년대 후반부터 경성 및 인근 지역에 면방적, 제사, 인견, 맥주, 제분 등의 업종에서 일본 독점자본 계통 대공장이 설립되면서 이입대체와 더불어 만주시장으로 수출도 확대되었다. …… 1920년대에 관영공업을 한 축으로 하면서도 소공업 중심구조를 형성했던 식민지 공업이 1930년대에는 일본에서 진출한 대공장과 기존의 관영 및 민영 대공장이 식민지 공업의 주도적 영역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 p.256

철도국공장이 직계체계를 중심으로 노동자를 관리, 통제한 반면, 방직계통 대공장은 미숙련 여공의 관리, 통제를 위하여 엄격한 노동규율, 분화된 위계조직, 포상제도, 기숙사제도 등을 도입하였다. 여공들은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여 퇴근할 때까지 30분의 점심시간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자유시간도 허용되지 않았으며, 작업은 생산현장의 위계조직에 의하여 체계적으로 관리, 감독되었다
--- p.270

노동력 면에서 대공장은 미숙련 노동력을 대량으로 고용하여 체계적인 위계제도 아래 다양한 방식으로 노동력을 관리·통제하였다. 반면 중소공장은 숙련 노동력과 미숙련 노동력을 같이 사용하였고, 업무와 직제가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력의 관리·통제는 임금제나 노동력 조절 등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가내사업장은 중소공장보다 숙련공의 비중이 컸으며, 일부에서는 전통적인 ‘장인-도제’관계가 남아 있었다. 이처럼 식민지 공업에서 나타나는 대공장과 중소공장·가내사업장의 현격한 격차 및 상이한 재생산구조를 ‘식민지 이중구조’로 개념화하고자 한다
--- p.282

식민지 이중구조의 첫 번째 특징은 대공업과 중소공업이 분리되어 생산연관이 없다는 점이다. 대공장에서 최신식 설비 및 일관생산체계를 통하여 대량생산된 제품은 시장을 독점적으로 지배하였기에 대공장과 중소공장은 기술적 연관을 가지지 못하였다
--- p.283

식민지 이중구조의 세 번째 특징은 소공업과 가내공업의 토대가 두텁다는 점이다. 1922년에 전체 공장의 97퍼센트를 차지하던 중소공장은 1937년에 가서도 여전히 97퍼센트라는 절대적인 비중을 유지하였으며, 그중에서도 고용 노동자가 10인 미만의 영세한 소공장이 전체 공장의 59퍼센트에 달하였다
--- p.285

1937년 9월에 「수출입품 등의 임시조치에 관한 법률」(이하 「임시조치법」), 10월에 「임시자금조정법」이 시행됨으로써 군수산업에 필요한 자재를 원활하게 공급하고 비군수물자의 수입 및 생산, 소비를 억제하였다. 「임시조치법」을 통하여 면화, 양모 등 중요 물자의 수입이 제한되었고, 기호품, 사치품 등 비군수품의 수입이 금지되었다. 이와 더불어 「임시자금조정법」으로 군수산업에 우선적으로 자금을 지원하고, 비군수 부문이나 생산과잉된 업종은 자금 공급 및 회사의 신설, 확장이 금지되었다
--- p.317

통제의 모순과 혼란의 와중에서 암거래가 생겨났으며, 업자의 자구책 또는 무분별한 이윤추구로 통제 위반이 더욱 늘어났다. 이에 총독부는 통제법령 위반자를 단속하기 위하여 경제경찰제도를 도입하였다. 1938년 11월 「조선경제경찰령」 시행으로 경제경찰이 신설되고, 경무국 경무과에 경제경찰계가 설치되었다
--- p.332

군수공업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 아래 경성 지역에서는 1938년을 전후하여 군수하청 생산이 시작되었다. …… 조선피혁, 조선계기는 육해군으로부터 수주하였으며, 국산자동차공업, 경성철공조합은 육해군 공창으로부터 하청을 받았다. 1938년에는 기계기구공업 관련 공장 가운데 육군에서 주문하는 군수품을 제작하는 공장이 5개소, 군수품을 가공하는 공장이 9개소 있었다
--- p.342

총독부와 경성부는 군수공업으로 전환하는 중소공업에 대하여 각종 시설 및 편의를 제공하고 보조금을 지급하였다. 또한 경기도 상공지도소, 경성부 전업상담소, 경성상공회의소 상공상담소 등의 전업 지도기관을 설립하고 직업소개소를 국영으로 전환하는 등 군수공업이나 수출품 및 대용품 공업으로 전업에 주력하였다
--- p.352

군수공업화는 민수공업의 감소와 군수공업의 확대라는 외형적 변화를 낳았지만 …… 군수공업의 설비와 노동력을 확대하거나 민수공업의 설비와 노동력을 군수공업으로 이전하는 것에 불과하였으며, 기업정비 역시 경금속, 철강 및 군수공업으로 기존의 설비와 노동력을 전용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공업조합을 통한 공업 재편과 군수공업화는 업종별 구성만 변화시켰을 뿐 공업구조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대공업과 중소공업이 분리되고 소공업·가내공업의 층이 두터운 식민지 이중구조는 1940년대에도 여전히 유지되었다
--- p.359

중일전쟁으로 만주와 일본을 연결하는 ‘대륙 루트’의 요충지이자 산업 거점으로서 경인 지역의 지리적 이점 및 병참기지로서의 중요성이 부각됨에 따라 국토계획 차원에서 공업지구 설정이 제기되었다
--- p.360

경성과 인천의 공업지구 설정과 더불어 경성과 인천의 중간 지역에도 공업지대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경기도에서는 1939년 들어 부평에 약 200만 평의 부지를 선정하여 공업지대 조성에 착수하였고, 총독부에서는 이를 확대하여 1940년 1월 경성과 인천 사이의 광범위한 지역을 포괄하는 ‘경인시가지계획京仁市街地計劃’을 공포하였다
--- p.362

1930년대 공업화가 일본경제의 재생산구조 속에 깊숙히 종속되는 한편 일본제국주의 경제권 내의 조공업제품 생산지로 기능하는 것이라면, 공업화를 통하여 공업 생산은 확대되었지만 그 결과, 일본경제의 재생산구조 속으로 종속이 강화되었으며, 잉여의 유출도 강화되었다. 나아가 조선 공업의 전망은 일본과의 종속관계 속에서 그 위치와 역할이 부여되었으며, 일본과의 연관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한 식민지 공업은 일본경제에 종속된 형태로 일본경제의 변동에 규정받을 수밖에 없다
--- p.392
 

출판사 리뷰

식민 본국과의 통합-재생산 방식의 파행 분석

이 책에서 제기하는 식민지 자본주의의 근대적·식민적 형성이라는 관점은 민족주의 인식과 근대화론의 인식을 넘어서기 위하여 식민지 산업(공업)의 재생산구조가 식민 본국에 통합되어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초점은 통합의 방식과 재생산의 방식이다. 식민지 산업(공업)의 식민 본국으로의 통합은 화폐와 철도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법률과 자본과 노동에 의해서 실질적인 통합이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식민지 조선은 별개의 국가권력(조선총독부), 별개의 법률(제령), 별개의 화폐(조선은행권)를 가진다는 점에서 일본의 지방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그리고 재생산구조에서 자본 투자, 생산설비, 작업과정, 노동력 수급, 상품 유통의 전 부면이 식민 본국과 통합되었다. 식민지 자본주의를 근대적·식민적 형성이라는 관점에서 탐구한다는 것은 이러한 통합이 방식과 재생산의 방식을 탐구한다는 것이고, 이러한 통합의 방식과 재생산의 구조는 근대적인 것이자 식민지적인 것이다. 양자는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분리 불가능한 하나의 구조를 이루기에 ‘근대적·식민적’ 형성인 것이다.

개항 이후 식산흥업정책의 좌절

다음으로 식민지 공업 개념을 제기하고 식민지 공업의 형성을 다루고자 하였다. 식민지 공업이란 식민 본국과의 통합을 거쳐 형성되었고 식민 본국과의 연관 속에서 존속하는 공업을 말한다. 식민지 공업으로서 조선 공업은 러일전쟁 이후 화폐와 철도를 매개로 한 조선 경제의 식민지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기반으로 하여 형성되었다. 즉 러일전쟁에서 1910년대 후반까지 이질적 기반을 가진 업종들, ① 일본에 식량 및 원료를 공급하기 위한 업종 ② 식민지 경제의 인프라 구축에 필요한 업종 ③ 일본인 거류민을 대상으로 생활용품을 생산하는 업종 ④ 전통적인 수공업에서 유래한 업종들로 구성되었다. 식민지 공업은 전통적인 분업체계와 생산체계가 해체되고 식민 본국과 연결되는 새로운 분업체계와 생산체계를 기반으로 하기에, 개항 이후의 공업화 시도, 즉 식산흥업정책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던 공업화 추진 및 민간의 공장 설립과는 단절되었다. 식민지 공업은 형성과정에서 서로 다른 기반에서 발생한 업종들, 즉 철도차량을 생산하는 근대적 업종에서 놋그릇을 생산하는 전통적 업종까지 식민지 공업을 구성하는 일부분으로 전환시킨다. 통상 생각하는 것처럼 전통적 업종은 소멸되어야 할 할 부분이 아니라 식민지 공업의 일부분으로 새로운 역할과 기능을 부여받게 된다.

일본 독점자본 계통 대공장과 소공업의 이중구조

결론적으로 이러한 방식으로 형성된 식민지 공업이 그 자체의 성장과 한계를 규정한다는 점을 밝히고자 하였다. 원료가공업과 관영공업을 주축으로 하는 식민지 공업은 소공업과 가내공업의 두터운 층이 토대를 형성하였으며, 일본 독점자본의 진출을 계기로 대도시를 중심으로 조공업지대를 형성하고, 일본에서 진출한 독점자본 계통 대공장과 기존의 대공장이 식민지 공업의 주도적인 부문으로 자리 잡으면서 식민지 이중구조가 창출되었다. 이러한 식민지 공업의 변천은 소공업과 가내공업 위주에서 대공장 위주의 조공업으로 성장한 것이지만 대공업과 중소공업의 상호 연관이 결여된 채 대공업과 중소공업 및 가내공업이 각기 식민 본국의 재생산구조와 통합되어 있었다. 중일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공업조합을 통한 공업 재편과 군수공업화로 1930년대의 식민지 이중구조는 1940년대 초까지 커다란 변동 없이 유지되었다.

전시 공업화의 본질과 민낯 제시

전시 공업화의 일단을 보여주는 경인공업지대의 기계기구 공업은 식민지 이중구조가 도달할 수 있는 한계를 보여준다. 병참기지화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경인공업지대의 기계기구 공업은 차량류, 광산용 기계, 전기기계 등 기계기구 생산을 증대시켜 기계기구의 자급률이 25%에 이르렀지만, 기계기구 공업의 핵심인 공작기계, 정밀기계 생산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기관차, 자동차 생산도 중요 부분품은 이입에 의존하는 형편이었다. 일본으로부터 기술 이전은 조공업에 국한되었고, 하청 관계도 군수하청에 국한되었다. ‘정공업-조공업’이라는 식민 본국과의 분업체계 및 식민제국 내에서의 위상이 변하지 않는 한 원료의 종속, 설비의 결여, 기술인력의 부족이라는 재생산 구조상의 한계는 여전한 것이고 공작기계·정밀기계로의 발전은 애초부터 가로막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