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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황폐화 원흉론’과 ‘식민지 근대화론’ 벗고
새롭게 보는 한국 근대 임업의 변천
전근대 시대에 나무는 난방과 취사를 위한 연료, 국방과 건축을 위한 재료, 제염 등 산업을 위한 동력이었다. 이 책은 그런 나무를 심고, 키우고, 활용하는 임업에 초점을 맞춰 한국 근대 경제사의 주요한 변모를 추적한 것이다. 지은이는 산림 소유권의 제도적 변화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 역사학자. 그는 탄탄한 조사와 설득력 있는 해석으로, 일제가 한국의 산림자원을 수탈해 갔다거나 일제의 정책이 한국 임업의 근대화 기반을 닦았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한국 근대 임업사를 제대로 보는 시각을 제공한다.
새롭게 보는 한국 근대 임업의 변천
전근대 시대에 나무는 난방과 취사를 위한 연료, 국방과 건축을 위한 재료, 제염 등 산업을 위한 동력이었다. 이 책은 그런 나무를 심고, 키우고, 활용하는 임업에 초점을 맞춰 한국 근대 경제사의 주요한 변모를 추적한 것이다. 지은이는 산림 소유권의 제도적 변화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 역사학자. 그는 탄탄한 조사와 설득력 있는 해석으로, 일제가 한국의 산림자원을 수탈해 갔다거나 일제의 정책이 한국 임업의 근대화 기반을 닦았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한국 근대 임업사를 제대로 보는 시각을 제공한다.
목차
책을 내며
Ⅰ. 서론
Ⅱ. 근대 임업 형성의 배경과 특징을 이해하는 시각
Ⅲ. 조선 후기 임업 생산기반의 위기
1. 산림 상태의 악화
2. 임산물 확보 활동과 정책의 문제점
3. 조선 후기 임업의 문제점
Ⅳ. 조선총독부의 ‘근대 임업’ 기반 조성 정책
1. 일제가 구상한 ‘문명적 임업’의 성격
2. 임야 소유권제도의 ‘확립’과 강제 조림 정책
3. ‘금벌주의’ 정책
4. 영림서와 일본인 임업회사의 목재 독점
5. 연료재 시장에 대한 통제
Ⅴ. 일제 당국의 임업 공익 확보 정책
1. 식민 당국의 화전정리 방향에 나타난 문제점
2. 사방사업의 추진과 그 한계
3. 조선총독부 공익 임업 정책에 나타난 문제점
Ⅵ. 전시 체제기의 임산물 증산과 임업 생산기반의 약화
1. 증벌 정책으로의 전환
2. 임업 생산기반의 약화
Ⅶ. 맺음말
참고문헌
주
찾아보기
Ⅰ. 서론
Ⅱ. 근대 임업 형성의 배경과 특징을 이해하는 시각
Ⅲ. 조선 후기 임업 생산기반의 위기
1. 산림 상태의 악화
2. 임산물 확보 활동과 정책의 문제점
3. 조선 후기 임업의 문제점
Ⅳ. 조선총독부의 ‘근대 임업’ 기반 조성 정책
1. 일제가 구상한 ‘문명적 임업’의 성격
2. 임야 소유권제도의 ‘확립’과 강제 조림 정책
3. ‘금벌주의’ 정책
4. 영림서와 일본인 임업회사의 목재 독점
5. 연료재 시장에 대한 통제
Ⅴ. 일제 당국의 임업 공익 확보 정책
1. 식민 당국의 화전정리 방향에 나타난 문제점
2. 사방사업의 추진과 그 한계
3. 조선총독부 공익 임업 정책에 나타난 문제점
Ⅵ. 전시 체제기의 임산물 증산과 임업 생산기반의 약화
1. 증벌 정책으로의 전환
2. 임업 생산기반의 약화
Ⅶ. 맺음말
참고문헌
주
찾아보기
책 속으로
정조와 같은 군주들이 식목에 뜻을 두고 적극적으로 이를 장려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국왕들이 식목을 장려한 곳은 대부분 조상들이 묻혀 있는 능묘와 같은 특수 시설이었다. …… 전국을 대상으로 한 체계적인 식목 계획을 입안해 의욕적으로 이를 적용했다는 정황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는다
--- p.36
조선왕조는 송금松禁 정책이라고 하여 봉산에 소재한 소나무 벌목을 엄금하는 조치를 매우 중시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국용 목재 확보를 위한 방편의 하나였다. …… 송금 정책에 구멍이 나면서 국가적 차원의 산림 보호 정책은 유명무실하게 되었으며, 사양산까지 도벌 대상이 되는 바람에 개인 간 산송山訟도 빈번했다
--- p.38
병선 및 조운선 제조용 선재船材, 소금 생산 및 난방용 연료재, 화전 개간의 성행 등으로 조선 후기에는 산림 상태가 악화되었다. 산림 황폐화는 경기도 지역이 특히 심해서 ……
--- p.40
18세기에는 강원도 주요 산지에서도 나무를 보기 어려워질 정도가 되었다. 비변사는 그 원인으로 ① 관용 임산물 수요의 증가, ② 건축용 목재 수요, ③ 목상의 무분별한 남벌과 도벌을 꼽았다
--- p.45
일제는 임야조사사업 등을 통해 산림 소유권을 확정하는 가운데 일정한 기준(식목 및 금양을 행한 실적)을 세워 그 기준에 맞으면 소유권을 인정하고 그렇지 않으면 연고권만을 인정한 다음, 연고자에게 조림을 하면 소유권을 부여하겠다는 정책을 펼쳤다. …… 일제는 이렇게 해서 소유권을 갖게 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금벌주의 정책이라 하여 소유지 입산 자체를 금지하는 방침을 추가로 시행했다. 조선총독부 당국자는 이러한 시스템을 이른바 ‘문명적 임업’이라고 규정했다
--- p.48
“조선왕조가 ‘산림천택 여민공리’를 철저하게 관철했다면 모든 산지가 사실상 ‘무주공산’이 된 셈이고, 그 결과 산림이 황폐해졌을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 …… ‘산림천택 여민공리’라는 이데올로기는 어디까지나 정치적 수사에 불과할 뿐이며, 실제로는 사점私占 현상이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 p.72
조선시대에는 ‘분묘금양의 권리’라는 독특한 제도가 있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조상의 분묘를 산지 안에 먼저 조성한 자가 그 분묘를 중심으로 일정한 보수步數 안에 존재하는 임야를 점유하는 것은 적법행위였다
--- p.74
숙종 때의 기록에는 “예전에는 여러 궁실을 판방板房으로 한 것이 많았는데, 지금은 온돌이 많아져 기인이 공물로 바치는 땔감과 숯을 지탱하기 어렵다”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17세기에 접어들면 궁궐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온돌을 설치한 가옥이 늘어났고, 그에 따라 장작의 수요가 크게 늘어났다
--- p.79
산림 상태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그 정황은 1910년에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조선임야분포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 도성 인근에는 성림지가 거의 없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무입목지도 많았다. …… 무입목지는 한반도 전체 임야의 25.9퍼센트에 달하고 치수 발생지는 41.8퍼센트 정도이다. 68퍼센트 정도의 산림 면적에 쓸 만한 나무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 p.85
선박 건조와 소금 생산으로 인해 연해 지역에 민둥산이 나타나는 현상은 17세기에 접어들어 심화되었던 것 같다. 조선왕조는 원래 해변으로부터 30리 안 내륙까지 송금 지역으로 정해두고 있었는데, 금령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자 1684년(숙종 10)에 ‘연해 30리’라는 기존의 방침 대신 의송산을 별도로 선정해 금송하는 방안을 골자로 하는 「제도연해송금사목諸道沿海松禁事目」을 발표했다
--- p.94
조선왕조는 전함 건조에 필요한 나무만 가져다가 쓴 것이 아니라 관곽재, 건축재에 쓰일 목재도 봉산에서 확보했다. 사실 봉산에는, 궁궐 건조용 목재 및 관곽재를 조달하기 위해 지정된 황장봉산黃腸封山, 선박 건조를 위해 지정한 선재봉산船材封山, 밤의 공급을 위해 지정한 율목봉산栗木封山, 참나무 공급을 위해 지정한 진목봉산眞木封山, 산삼 채취를 위해 일반인의 입장을 금하는 삼재봉산蔘材封山 등 여러 종류가 있었다
--- p.120
사양산의 주인들은 제3자의 도벌과 이권 침해에 대한 대응책의 하나로 지방관으로부터 일종의 부동산 소유 확인서라고 할 수 있는 입안立案을 발급받아 두기도 했다
--- p.140
조선 후기의 산림 상태가 악화된 원인이 …… 특권층을 중심으로 하는 임산물 수급구조에 대한 적절한 규제의 미비, 산림 자원 생산력을 확충하는 데 필요한 지원책의 부재, 특권층의 임산물 독점을 용인한 체제가 더 근본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 p.145
이하영, 이규환, 이종협 등은 이 같은 입장에서 1908년에 대한산림협회를 설립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이 단체는 제대로 회원을 모집하지도 못했고, 당연히 활동을 하지도 못했다. 이 단체를 주도한 이하영 등이 잘 알려진 친일 인사였기 때문이다. 이하영은 을사늑약에 서명한 ‘을사5적’의 하나이며, 일제강점기에는 자작 작위를 받기도 한 인물이다
--- p.154
조선총독부의 임업 정책을 주도하던 사이토 오토사쿠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원래 조선인은 산을 소유한다고 하는 관념이 결핍되어 있었다. 그래서 조선인의 대다수는 남벌 폭채를 일삼았고 식림을 행하는 것도 적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민둥산이 늘어나게 되었으니 더욱 산을 소유해야겠다는 생각이 없어지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었다고 생각된다
--- p.158
1911년까지 임야 소유권 신고가 이루어졌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당시 신고서가 접수된 건수는 대략 52만 건이었다. 상당히 많은 것으로 보이지만 신고를 필한 임야 면적은 220만 정보에 불과했다. 한반도 전체 임야 면적이 1,600만 정보라는 점에 비추어 본다면 소유권 신고를 이행한 사람이 적었다고 볼 수 있겠다
--- p.159
조선총독부는 국유림 관리를 위해 영림서라는 기관을 두고 ‘관행작벌’, 즉 국유임야 벌목을 주도하게 했다. 영림서는 매년 관행작벌량을 늘려나갔지만, …… 영림서가 관할하던 임야에서 한 번 관행작벌이 시행되면 그 임야는 그대로 방치되기 마련이었다. 요컨대 일제는 사유림의 소유자에게 식목 수량을 할당하고 그 비용까지 청구하는 반면, 국유림에서는 관행작벌 이후 남게 되는 적지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다
--- p.161
사이토 오토사쿠가 …… 국유림을 ‘요존국유림’과 ‘연고림(불요존국유림)’으로 구분하고 ‘연고림’의 권리 소유자에 대해 식목의 의무를 부과하는 방식 …… 구체적인 실행방안으로 ‘영년 금양의 실적’이라는 표준을 ‘소유권’ 부여의 기준으로 내세우고 그에 미달하는 자에게 식목을 의무화하는 정책을 세운 것이다
--- p.176
표준에 미달해 소유권을 획득하지 못한 신고자가 발생했는데 그들을 ‘연고자’라 부르고, 이들이 ‘소유권을 주장하며 신고서를 제출한 대상 임야’가 ‘연고림’이다. 이 연고림에 대해 조선총독부 임업 당국은 연고자에게 최우선적으로 조림대부를 해준다는 방침을 밝혔는데, 사실상 연고자에게 반강제적으로 “조림대부를 받게 하겠다”는 의미였다
--- p.177
「사유림 벌채 취체규칙」이나 「시업임야 시업 및 수목벌채 취체규칙」 등의 이름이 붙은 시업 제한 규정을 공포했는데, 이 규칙들에는 공통적으로 “수령 20년 미만의 침엽수와 수고 10척 미만의 활엽수는 벌채할 수 없다”는 내용이 있었다. 요컨대 침엽수는 20년 이상 자라야 벌목 대상이 되고, 활엽수는 그 키가 10척이 넘어야만 벨 수 있다는 것이다
--- p.186
일제강점기에는 임목벌채지도 기간 외에는 일체의 땔나무 채취가 금지되어 있었다. 또 묘목 대금이나 삼림조합비, 그리고 ‘임목벌채지도’ 기간에 조합에 납부해야 하는 입산료를 내지 아니한 자는 임목벌채 기간이라고 하더라도 땔나무를 채취할 권리가 인정되지 않았다. 형편이 어려워 돈을 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가피하게 삼림조합 직원이나 경찰의 눈을 피해 몰래 땔나무를 마련하곤 했는데, 그러다가 체포될 경우에는 ‘삼림범죄’를 저지른 대가로 벌금을 내거나 체형을 받아야 했다
--- p.190
삼림조합 반대 시위가 벌어진 곳은 손을 꼽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일제는 그와 같은 반대 분위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인명 살상행위까지 벌였으며, 그러한 폭행을 산림녹화 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라며 정당화하기까지 했다
--- p.192
조선임학회는 매년 조선인들이 땔감으로 사용하는 나무의 총량이 2천 만 척체를 넘고, 숯을 만드는 데 쓰이는 나무는 480만여 척체인 것으로 파악했다. 이 정도 규모의 벌채량은 조선 내 민유림 임목축적량의 7.6퍼센트에 달하는 것으로서, 임목축적량이 더 이상 늘어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단 13년 만에 민유림의 모든 나무가 사라질 정도가 된다
--- p.196
일제는 식민지 조선의 임업을 ‘문명적 임업’으로 바꾸기 위해 보속 수확 원칙을 적용하겠다고 하면서, 그 구체적인 실행방안으로 ‘금벌주의’라는 정책을 내놓았다. …… 그러나 이는 현실성이 무척 떨어지는 계획이었다. 금벌을 관철하게 되면 조선인들이 연료를 확보할 길이 없어질 것이 명백했다
--- p.199
영림창은 표류목뿐만 아니라 국유림에서 직접 원목을 생산해 신의주 일대에서 영업하는 업자들에게 판매하는 한편 직영으로 제재사업도 운영했다. 그런데 영림창은 1910년대 중반부터 이른바 지정상주의指定商主義라고 하여 소규모 자본의 업자는 배제하고 미쓰이물산, 신의주목재주식회사 등과 같이 일정 수준 이상의 자본력을 지닌 업자에게만 원목을 공급했다
--- p.206
이처럼 벌채에만 주력하다보니 1930년대 초반 국유림 임야 1정보당 평균 입목 축적 30.91입방미터에 이르던 것이 1938년에는 24.55입방미터로 줄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압록강, 두만강 연안의 요존국유림을 관리하던 영림창은 1919년까지 벌채적지 조림을 전혀 시행하지 않았다
--- p.211
1930년대 산림에서 생산된 용재의 양은 식민지 조선의 임목 생장량을 항상 웃돌았다. 결국 산림의 지속성은 항상 마이너스 값을 기록했고, 이로 인해 해가 갈수록 임목 축적은 줄어들게 되었다. 이와 같은 수치는 일제 산림 당국의 궁극적인 목적이 한반도에서 나무를 베어 팔거나 이용하는 데 맞추어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 p.221
1930년대 후반에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목재, 목탄 등과 같은 산림 자원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 이를 위해 국유림의 관행작벌량을 늘리더니 그 이후에는 기업림 증벌을 촉구하고, 마지막으로 사유림에서도 무조건적으로 나무를 베어 공급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형식적으로라도 ‘산림 보호’를 외치던 데에서 산림 자원 생산에 모든 인적 자원을 투입하는 방향으로 전환한 것이다
--- p.301
기업에 국유림 조림을 맡기게 되면 일제로서는 그다지 많은 비용을 들이지 않게 되고, 또 전시 동원에 투입해야 할 인적 자원도 절약할 수 있게 된다. …… 따라서 일제는 국유림 조림을 맡겠다고 나서는 기업에 인센티브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총독부는 이와 같이 복잡한 계산 끝에 1937년에 조선임업개발회사를 설립하고, 여러 기업이 컨소시엄 형태로 참여하도록 했다
--- p.309
일제는 1942년 물자동원계획위원회를 통해 ‘벌채증재계획’이라는 것을 만들고, 지역마다 의무 벌채량을 지정했다. 산림에도 ‘공출’ 제도를 도입했던 것이다. 일제는 1942년에 목탄 자재와 기타 용재의 생산 수량을 확대하고 그 생산을 감독하기 위해 원목 생산자를 조합원으로 한 원목생산출자조합까지 만들어 의무 생산량을 할당했다. 또 1943년도부터는 국민총력조선연맹을 통하여 각 농촌마을에 벌채 할당량을 부과하고, 마을 인근 산에 들어가 할당량만큼 벌채하도록 강요했다
--- p.316
일제는 상황 변화에 따라 임업 경영의 우선 원칙을 ‘보속성 확보’에서 ‘국책에 응하기 위한 무조건적인 증벌’로 갈아치우는 등 정책적 일관성을 갖추지 못했다. 식민권력에게 중요한 것은 ‘보속 원칙’을 지키는 정책이 아니라 침략전쟁이나 식민지배의 기반 강화를 위해 식민지 조선의 임업을 이용하는 데 있었다
--- p.36
조선왕조는 송금松禁 정책이라고 하여 봉산에 소재한 소나무 벌목을 엄금하는 조치를 매우 중시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국용 목재 확보를 위한 방편의 하나였다. …… 송금 정책에 구멍이 나면서 국가적 차원의 산림 보호 정책은 유명무실하게 되었으며, 사양산까지 도벌 대상이 되는 바람에 개인 간 산송山訟도 빈번했다
--- p.38
병선 및 조운선 제조용 선재船材, 소금 생산 및 난방용 연료재, 화전 개간의 성행 등으로 조선 후기에는 산림 상태가 악화되었다. 산림 황폐화는 경기도 지역이 특히 심해서 ……
--- p.40
18세기에는 강원도 주요 산지에서도 나무를 보기 어려워질 정도가 되었다. 비변사는 그 원인으로 ① 관용 임산물 수요의 증가, ② 건축용 목재 수요, ③ 목상의 무분별한 남벌과 도벌을 꼽았다
--- p.45
일제는 임야조사사업 등을 통해 산림 소유권을 확정하는 가운데 일정한 기준(식목 및 금양을 행한 실적)을 세워 그 기준에 맞으면 소유권을 인정하고 그렇지 않으면 연고권만을 인정한 다음, 연고자에게 조림을 하면 소유권을 부여하겠다는 정책을 펼쳤다. …… 일제는 이렇게 해서 소유권을 갖게 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금벌주의 정책이라 하여 소유지 입산 자체를 금지하는 방침을 추가로 시행했다. 조선총독부 당국자는 이러한 시스템을 이른바 ‘문명적 임업’이라고 규정했다
--- p.48
“조선왕조가 ‘산림천택 여민공리’를 철저하게 관철했다면 모든 산지가 사실상 ‘무주공산’이 된 셈이고, 그 결과 산림이 황폐해졌을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 …… ‘산림천택 여민공리’라는 이데올로기는 어디까지나 정치적 수사에 불과할 뿐이며, 실제로는 사점私占 현상이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 p.72
조선시대에는 ‘분묘금양의 권리’라는 독특한 제도가 있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조상의 분묘를 산지 안에 먼저 조성한 자가 그 분묘를 중심으로 일정한 보수步數 안에 존재하는 임야를 점유하는 것은 적법행위였다
--- p.74
숙종 때의 기록에는 “예전에는 여러 궁실을 판방板房으로 한 것이 많았는데, 지금은 온돌이 많아져 기인이 공물로 바치는 땔감과 숯을 지탱하기 어렵다”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17세기에 접어들면 궁궐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온돌을 설치한 가옥이 늘어났고, 그에 따라 장작의 수요가 크게 늘어났다
--- p.79
산림 상태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그 정황은 1910년에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조선임야분포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 도성 인근에는 성림지가 거의 없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무입목지도 많았다. …… 무입목지는 한반도 전체 임야의 25.9퍼센트에 달하고 치수 발생지는 41.8퍼센트 정도이다. 68퍼센트 정도의 산림 면적에 쓸 만한 나무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 p.85
선박 건조와 소금 생산으로 인해 연해 지역에 민둥산이 나타나는 현상은 17세기에 접어들어 심화되었던 것 같다. 조선왕조는 원래 해변으로부터 30리 안 내륙까지 송금 지역으로 정해두고 있었는데, 금령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자 1684년(숙종 10)에 ‘연해 30리’라는 기존의 방침 대신 의송산을 별도로 선정해 금송하는 방안을 골자로 하는 「제도연해송금사목諸道沿海松禁事目」을 발표했다
--- p.94
조선왕조는 전함 건조에 필요한 나무만 가져다가 쓴 것이 아니라 관곽재, 건축재에 쓰일 목재도 봉산에서 확보했다. 사실 봉산에는, 궁궐 건조용 목재 및 관곽재를 조달하기 위해 지정된 황장봉산黃腸封山, 선박 건조를 위해 지정한 선재봉산船材封山, 밤의 공급을 위해 지정한 율목봉산栗木封山, 참나무 공급을 위해 지정한 진목봉산眞木封山, 산삼 채취를 위해 일반인의 입장을 금하는 삼재봉산蔘材封山 등 여러 종류가 있었다
--- p.120
사양산의 주인들은 제3자의 도벌과 이권 침해에 대한 대응책의 하나로 지방관으로부터 일종의 부동산 소유 확인서라고 할 수 있는 입안立案을 발급받아 두기도 했다
--- p.140
조선 후기의 산림 상태가 악화된 원인이 …… 특권층을 중심으로 하는 임산물 수급구조에 대한 적절한 규제의 미비, 산림 자원 생산력을 확충하는 데 필요한 지원책의 부재, 특권층의 임산물 독점을 용인한 체제가 더 근본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 p.145
이하영, 이규환, 이종협 등은 이 같은 입장에서 1908년에 대한산림협회를 설립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이 단체는 제대로 회원을 모집하지도 못했고, 당연히 활동을 하지도 못했다. 이 단체를 주도한 이하영 등이 잘 알려진 친일 인사였기 때문이다. 이하영은 을사늑약에 서명한 ‘을사5적’의 하나이며, 일제강점기에는 자작 작위를 받기도 한 인물이다
--- p.154
조선총독부의 임업 정책을 주도하던 사이토 오토사쿠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원래 조선인은 산을 소유한다고 하는 관념이 결핍되어 있었다. 그래서 조선인의 대다수는 남벌 폭채를 일삼았고 식림을 행하는 것도 적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민둥산이 늘어나게 되었으니 더욱 산을 소유해야겠다는 생각이 없어지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었다고 생각된다
--- p.158
1911년까지 임야 소유권 신고가 이루어졌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당시 신고서가 접수된 건수는 대략 52만 건이었다. 상당히 많은 것으로 보이지만 신고를 필한 임야 면적은 220만 정보에 불과했다. 한반도 전체 임야 면적이 1,600만 정보라는 점에 비추어 본다면 소유권 신고를 이행한 사람이 적었다고 볼 수 있겠다
--- p.159
조선총독부는 국유림 관리를 위해 영림서라는 기관을 두고 ‘관행작벌’, 즉 국유임야 벌목을 주도하게 했다. 영림서는 매년 관행작벌량을 늘려나갔지만, …… 영림서가 관할하던 임야에서 한 번 관행작벌이 시행되면 그 임야는 그대로 방치되기 마련이었다. 요컨대 일제는 사유림의 소유자에게 식목 수량을 할당하고 그 비용까지 청구하는 반면, 국유림에서는 관행작벌 이후 남게 되는 적지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다
--- p.161
사이토 오토사쿠가 …… 국유림을 ‘요존국유림’과 ‘연고림(불요존국유림)’으로 구분하고 ‘연고림’의 권리 소유자에 대해 식목의 의무를 부과하는 방식 …… 구체적인 실행방안으로 ‘영년 금양의 실적’이라는 표준을 ‘소유권’ 부여의 기준으로 내세우고 그에 미달하는 자에게 식목을 의무화하는 정책을 세운 것이다
--- p.176
표준에 미달해 소유권을 획득하지 못한 신고자가 발생했는데 그들을 ‘연고자’라 부르고, 이들이 ‘소유권을 주장하며 신고서를 제출한 대상 임야’가 ‘연고림’이다. 이 연고림에 대해 조선총독부 임업 당국은 연고자에게 최우선적으로 조림대부를 해준다는 방침을 밝혔는데, 사실상 연고자에게 반강제적으로 “조림대부를 받게 하겠다”는 의미였다
--- p.177
「사유림 벌채 취체규칙」이나 「시업임야 시업 및 수목벌채 취체규칙」 등의 이름이 붙은 시업 제한 규정을 공포했는데, 이 규칙들에는 공통적으로 “수령 20년 미만의 침엽수와 수고 10척 미만의 활엽수는 벌채할 수 없다”는 내용이 있었다. 요컨대 침엽수는 20년 이상 자라야 벌목 대상이 되고, 활엽수는 그 키가 10척이 넘어야만 벨 수 있다는 것이다
--- p.186
일제강점기에는 임목벌채지도 기간 외에는 일체의 땔나무 채취가 금지되어 있었다. 또 묘목 대금이나 삼림조합비, 그리고 ‘임목벌채지도’ 기간에 조합에 납부해야 하는 입산료를 내지 아니한 자는 임목벌채 기간이라고 하더라도 땔나무를 채취할 권리가 인정되지 않았다. 형편이 어려워 돈을 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가피하게 삼림조합 직원이나 경찰의 눈을 피해 몰래 땔나무를 마련하곤 했는데, 그러다가 체포될 경우에는 ‘삼림범죄’를 저지른 대가로 벌금을 내거나 체형을 받아야 했다
--- p.190
삼림조합 반대 시위가 벌어진 곳은 손을 꼽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일제는 그와 같은 반대 분위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인명 살상행위까지 벌였으며, 그러한 폭행을 산림녹화 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라며 정당화하기까지 했다
--- p.192
조선임학회는 매년 조선인들이 땔감으로 사용하는 나무의 총량이 2천 만 척체를 넘고, 숯을 만드는 데 쓰이는 나무는 480만여 척체인 것으로 파악했다. 이 정도 규모의 벌채량은 조선 내 민유림 임목축적량의 7.6퍼센트에 달하는 것으로서, 임목축적량이 더 이상 늘어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단 13년 만에 민유림의 모든 나무가 사라질 정도가 된다
--- p.196
일제는 식민지 조선의 임업을 ‘문명적 임업’으로 바꾸기 위해 보속 수확 원칙을 적용하겠다고 하면서, 그 구체적인 실행방안으로 ‘금벌주의’라는 정책을 내놓았다. …… 그러나 이는 현실성이 무척 떨어지는 계획이었다. 금벌을 관철하게 되면 조선인들이 연료를 확보할 길이 없어질 것이 명백했다
--- p.199
영림창은 표류목뿐만 아니라 국유림에서 직접 원목을 생산해 신의주 일대에서 영업하는 업자들에게 판매하는 한편 직영으로 제재사업도 운영했다. 그런데 영림창은 1910년대 중반부터 이른바 지정상주의指定商主義라고 하여 소규모 자본의 업자는 배제하고 미쓰이물산, 신의주목재주식회사 등과 같이 일정 수준 이상의 자본력을 지닌 업자에게만 원목을 공급했다
--- p.206
이처럼 벌채에만 주력하다보니 1930년대 초반 국유림 임야 1정보당 평균 입목 축적 30.91입방미터에 이르던 것이 1938년에는 24.55입방미터로 줄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압록강, 두만강 연안의 요존국유림을 관리하던 영림창은 1919년까지 벌채적지 조림을 전혀 시행하지 않았다
--- p.211
1930년대 산림에서 생산된 용재의 양은 식민지 조선의 임목 생장량을 항상 웃돌았다. 결국 산림의 지속성은 항상 마이너스 값을 기록했고, 이로 인해 해가 갈수록 임목 축적은 줄어들게 되었다. 이와 같은 수치는 일제 산림 당국의 궁극적인 목적이 한반도에서 나무를 베어 팔거나 이용하는 데 맞추어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 p.221
1930년대 후반에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목재, 목탄 등과 같은 산림 자원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 이를 위해 국유림의 관행작벌량을 늘리더니 그 이후에는 기업림 증벌을 촉구하고, 마지막으로 사유림에서도 무조건적으로 나무를 베어 공급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형식적으로라도 ‘산림 보호’를 외치던 데에서 산림 자원 생산에 모든 인적 자원을 투입하는 방향으로 전환한 것이다
--- p.301
기업에 국유림 조림을 맡기게 되면 일제로서는 그다지 많은 비용을 들이지 않게 되고, 또 전시 동원에 투입해야 할 인적 자원도 절약할 수 있게 된다. …… 따라서 일제는 국유림 조림을 맡겠다고 나서는 기업에 인센티브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총독부는 이와 같이 복잡한 계산 끝에 1937년에 조선임업개발회사를 설립하고, 여러 기업이 컨소시엄 형태로 참여하도록 했다
--- p.309
일제는 1942년 물자동원계획위원회를 통해 ‘벌채증재계획’이라는 것을 만들고, 지역마다 의무 벌채량을 지정했다. 산림에도 ‘공출’ 제도를 도입했던 것이다. 일제는 1942년에 목탄 자재와 기타 용재의 생산 수량을 확대하고 그 생산을 감독하기 위해 원목 생산자를 조합원으로 한 원목생산출자조합까지 만들어 의무 생산량을 할당했다. 또 1943년도부터는 국민총력조선연맹을 통하여 각 농촌마을에 벌채 할당량을 부과하고, 마을 인근 산에 들어가 할당량만큼 벌채하도록 강요했다
--- p.316
일제는 상황 변화에 따라 임업 경영의 우선 원칙을 ‘보속성 확보’에서 ‘국책에 응하기 위한 무조건적인 증벌’로 갈아치우는 등 정책적 일관성을 갖추지 못했다. 식민권력에게 중요한 것은 ‘보속 원칙’을 지키는 정책이 아니라 침략전쟁이나 식민지배의 기반 강화를 위해 식민지 조선의 임업을 이용하는 데 있었다
--- p.323
출판사 리뷰
한반도 산림 황폐화는 조선 후기부터
지은이에 따르면 일제가 조선의 산림을 헐벗게 만들었다는 것은 과장이다. 이미 조선 후기에 한반도의 산야는 황폐했기 때문이다. 관찬 사료에 “관서 연로의 모든 산이 민둥산이 되었다”(38쪽)라든가 “조선총독부의 1910년 조사에서 산림의 68% 정도에 쓸 만한 나무가 거의 없었다”(85쪽)는 근거를 제시한다. 또한 19세기 조선 순조 때 한양 사람들이 땔감을 구할 길이 없어 빈 궁궐(경복궁)의 전각을 허물어 그 목재를 가져다 연료로 삼았다는 기사(78쪽)에서도 드러난다. 이는 병선 및 조운선의 선재船材, 소금 생산 및 온돌의 확대, 화전 개간의 성행 등 탓이었다. 여기에 유명무실한 송금松禁정책 외에는 체계적인 식목계획이나 대체연료재 개발 등 제대로 된 임업 정책의 부재가 부채질했다. 요컨대 일제강점기 전에 조선의 산야는 위기상황이었다.
일제가 내세운 ‘문명적 임업’의 기만적 실상
조선총독부는 산림 황폐화가 소유주가 없는 탓이라 파악하고, 산림 소유권을 확정하는 임야조사사업을 임업 정책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에 더해 금벌주의 정책이라 하여 소유지 입산 자체를 금지하고는 이를 ‘문명적 임업’이라 규정했다(48쪽). 그러나 1911년 조사에선 소유권 신고가 전체 임야 면적의 15%도 이뤄지지 않았고(159쪽), 그 외 ‘국유림’에선 일제가 만든 영림서와 일본 대기업에서 수익을 뽑아갔다. 또한 벌채량과 식목량의 균형을 뜻하는 ‘보속성의 원칙’을 지키지도 않았고, 조림은 산주의 책임이 되었으며 사방사업 등 산림녹화에 공공재정을 투입하지도 않았다. 여기에 1930년대 후반 들어 중일전쟁 확전 등으로 전시체제가 들어서면서 무분별하게 나무를 베어내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 강변하는 등 정책 일관성도 없었다. 요컨대 정책 입안 및 실행 능력도 떨어진 데다 제국주의 욕심을 채우는 데 급급했으니 식민지 근대화론은 허구에 불과하다.
탄탄한 자료조사, 설득력 있는 해석
지은이는 다양한 사료를 뒤져내 근대 임업의 변천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실록, [비변사등록], [시정5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 보고서] 등 조선과 조선총독부의 공식 자료를 동원한 것은 기본. 여기에 조선 후기 땔감난의 실상을 엿볼 수 있는 「은진강경고민등의송」 등 규장각문서, 1930년 함경남도 단천군에서 삼림조합의 횡포에 반발해 일어난 시위 사태를 다룬 [조선일보] 등 풍부한 보조 자료를 섭렵해 실상을 제대로 전한다. 여기에 일제가 망국수亡國樹로 꼽은 소나무가 조선의 으뜸 수종樹種이 되어야 했던 배경이나 산림 소유권 부재로 인한 부작용 등을 풀어가는 지은이의 시각이 책의 가치를 더한다.
역사를 읽는 재미 중 하나는 과거를 보는 ‘새로운 눈’을 갖게 되는 것이다. 현재는 과거를 딛고 선 것이기에 이는 미래로 가는 또 다른 길을 찾을 수 있게 해준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미덕은 잘못된 정책의 폐해를 알려주는 동시에 지속가능한 임업 발전을 위한 시사점을 제시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지은이에 따르면 일제가 조선의 산림을 헐벗게 만들었다는 것은 과장이다. 이미 조선 후기에 한반도의 산야는 황폐했기 때문이다. 관찬 사료에 “관서 연로의 모든 산이 민둥산이 되었다”(38쪽)라든가 “조선총독부의 1910년 조사에서 산림의 68% 정도에 쓸 만한 나무가 거의 없었다”(85쪽)는 근거를 제시한다. 또한 19세기 조선 순조 때 한양 사람들이 땔감을 구할 길이 없어 빈 궁궐(경복궁)의 전각을 허물어 그 목재를 가져다 연료로 삼았다는 기사(78쪽)에서도 드러난다. 이는 병선 및 조운선의 선재船材, 소금 생산 및 온돌의 확대, 화전 개간의 성행 등 탓이었다. 여기에 유명무실한 송금松禁정책 외에는 체계적인 식목계획이나 대체연료재 개발 등 제대로 된 임업 정책의 부재가 부채질했다. 요컨대 일제강점기 전에 조선의 산야는 위기상황이었다.
일제가 내세운 ‘문명적 임업’의 기만적 실상
조선총독부는 산림 황폐화가 소유주가 없는 탓이라 파악하고, 산림 소유권을 확정하는 임야조사사업을 임업 정책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에 더해 금벌주의 정책이라 하여 소유지 입산 자체를 금지하고는 이를 ‘문명적 임업’이라 규정했다(48쪽). 그러나 1911년 조사에선 소유권 신고가 전체 임야 면적의 15%도 이뤄지지 않았고(159쪽), 그 외 ‘국유림’에선 일제가 만든 영림서와 일본 대기업에서 수익을 뽑아갔다. 또한 벌채량과 식목량의 균형을 뜻하는 ‘보속성의 원칙’을 지키지도 않았고, 조림은 산주의 책임이 되었으며 사방사업 등 산림녹화에 공공재정을 투입하지도 않았다. 여기에 1930년대 후반 들어 중일전쟁 확전 등으로 전시체제가 들어서면서 무분별하게 나무를 베어내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 강변하는 등 정책 일관성도 없었다. 요컨대 정책 입안 및 실행 능력도 떨어진 데다 제국주의 욕심을 채우는 데 급급했으니 식민지 근대화론은 허구에 불과하다.
탄탄한 자료조사, 설득력 있는 해석
지은이는 다양한 사료를 뒤져내 근대 임업의 변천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실록, [비변사등록], [시정5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 보고서] 등 조선과 조선총독부의 공식 자료를 동원한 것은 기본. 여기에 조선 후기 땔감난의 실상을 엿볼 수 있는 「은진강경고민등의송」 등 규장각문서, 1930년 함경남도 단천군에서 삼림조합의 횡포에 반발해 일어난 시위 사태를 다룬 [조선일보] 등 풍부한 보조 자료를 섭렵해 실상을 제대로 전한다. 여기에 일제가 망국수亡國樹로 꼽은 소나무가 조선의 으뜸 수종樹種이 되어야 했던 배경이나 산림 소유권 부재로 인한 부작용 등을 풀어가는 지은이의 시각이 책의 가치를 더한다.
역사를 읽는 재미 중 하나는 과거를 보는 ‘새로운 눈’을 갖게 되는 것이다. 현재는 과거를 딛고 선 것이기에 이는 미래로 가는 또 다른 길을 찾을 수 있게 해준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미덕은 잘못된 정책의 폐해를 알려주는 동시에 지속가능한 임업 발전을 위한 시사점을 제시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36.한국근대사 연구 (독서>책소개) > 1.한국근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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