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정치의 이해 (독서>책소개)/6.보수주의

대형교회와 웰빙보수주의 (2020 김진호) 새로운 우파의 탄생

동방박사님 2023. 1. 1.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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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웰빙보수주의를 본격 탐구한 저작

지난 10여 년간 한국의 정치 지형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 하나는 개신교 우파의 강력한 정치세력화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 만들기에 연달아 지대한 공을 세웠던 개신교 우파는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파면을 계기로 분열하며 잠시 뒤로 물러나 있지만, 언제 또다시 정치의 전면에 나설지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막강한 인적, 물적 자원을 자랑하는 대형교회들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태극기부대와의 결탁 때문에 극우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져 있지만, 최근 전광훈과 한기총 세력의 급격한 왜소화에서 보듯이, 개신교 우파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상적 분화는 보다 면밀한 검토와 분석을 필요로 한다. 한국 개신교를 말할 때 흔히 거론되는 전통적 키워드, 즉 ‘극우 반공주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흐름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저자가 주목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주요 대형교회들이 주도하는 새로운 양상, 즉 ‘웰빙보수주의’가 오늘의 한국 개신교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핵심 키워드라는 것이다. 또 이들 중심으로 형성된 웰빙보수주의가 한국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치고 있고,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양상의 ‘우파’를 형성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대형교회와 웰빙보수주의』는 1990년대 중반 이후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웰빙보수주의를 본격 탐구한 노작이다. 새 신자의 급격한 감소라는 위기 속에서 기성 교회에 실망하여 떠돌이신자가 된 이들을 적극 유치함으로써 대형화에 성공한 교회들의 성장 전략을 웰빙보수주의로 개념화하고 이를 실증적으로 보여준다는 데 이 책의 독창적 의의가 있다. 저자는 웰빙보수주의를 ‘문화 현상으로서 웰빙의 정치화된 담론과 제도 양식’으로 규정한다. 품격 있는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성찰, 웰빙적 문화 실천이 대형교회의 보수주의적 정치성과 결합함으로써 나타난 것이 웰빙보수주의라는 것이다. 이러한 웰빙보수주의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두되었으며, 그것이 지향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한국 사회 전반에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목차

1장 책머리
2장 대형교회는 왜 보수주의적인가
3장 ‘주권신자’의 탄생
4장 교회의 캐릭터화 1―제자훈련
5장 교회의 캐릭터화 2―귀족영성
6장 교회 건축과 캐릭터 대형교회
7장 2000년대 보수대연합의 시대
8장 청부론과 새로운 캐릭터 교회의 탄생
9장 자기계발의 시대, 신자유주의적 귀족교육
10장 ‘아버지학교’의 ‘귀족 아빠’ 되기
11장 ‘성(性)으로 성(聖)하라’―웰빙 신성가족의 신앙 서사학
12장 교회 청년에게 세습되는 웰빙보수주의
13장 선교의 웰빙보수주의화, 그 가능성과 한계
14장 맺음글

보론 1 ‘한경직의 종교’―개신교 극우주의의 기원
보론 2 전광훈 현상을 읽다―극우의 좌절과 촛불정치의 효과
보론 3 신천지 현상을 읽다―신천지와 한국 교회, 적대적 공생

 

저자 소개

저 : 김진호
 
서강대 수학과를 졸업했으며, 한신대 신학대학원에서 민중 신학자 안병무로부터 신학을 배웠다.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연구원, '당대비평' 편집주간을 거쳐, 안병무 선생이 설립한 '한백교회'의 담임 목사를 지냈다. 현재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이사다. 민중신학자로서 한국 교회와 사회에 대한 신학적, 문화적 비평의 글을 써 왔으며, 인권연대가 수여하는 “올해의 종교인권상”(2011)을 수상했다. 2004년 2월 '당대...
 

책 속으로

반면, 두 번째 키워드인 웰빙보수주의 현상은 최근 한국 개신교의 변화를 주도하는 새로운 양상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한국 개신교를 이해하고자 할 때 쇠락을 거듭하고 있는 대형교회의 극우주의보다는 웰빙보수주의 현상에 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동시에 1940년대 중반~1950년대에 개신교 극우주의가 한국 사회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처럼, 웰빙보수주의 장소로서 대형교회 현상이 오늘의 한국 사회 변화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 점이 이 책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 논지다.
--- p.10~11

왜 보수주의가 더 강할까. 내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그것은 웰빙 담론이 형성되고 소통되는 가장 중요한 장소가 대형교회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대형교회는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보수주의의 아성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웰빙적인 문화 실천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웰빙적 실천이 보수주의적 정치성과 결합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을 뜻한다. 하여 이 책에서는 대형교회와 웰빙 현상, 그리고 보수주의에 대한 가설적 문제제기를 시도해보려 한다.
--- p.13

그렇다면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대면 예배를 중단하자는 사회 기조에 어떤 교회가 동참하고 어떤 교회가 반대할 것인가? 말할 것도 없이 선발대형교회 성향이 강한 공동체는 대면 예배를 중단하는 것이 주는 피해가 심각하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일부 교회들은 대면 예배를 강행했다. 그것이 코로나19의 감염 확대를 초래했다. 그리고 그만큼 이 교회들의 사회적 평판은 심각하게 추락했다. 반면 일부 대형교회들은 대면 예배 대신 다양한 방식으로 예배를 이어갔다. 별다른 이미지 손상 없이 말이다. 아니, 대면 예배를 고집한 교회들에 실망한 신자들에게 더 많은 주목을 받았다. 요컨대 웰빙보수주의의 아성인 후발대형교회의 위세는 더 강해졌다고 하는 게 적절하다.
--- p.26~27

한국의 개신교 전래 과정을 살피면 초기 개신교회들은 오늘날의 교회와 달리 근본주의 일색이 아니었다. 물론 개신교 반공주의도 그리 강한 신앙 기조가 아니었다. 그런데 개신교가 빠르게 안착하던 시기인 20세기 전반기를 거치면서 개신교는 근본주의를 모태로 하는 종교로 빠르게 탈바꿈하기 시작했고,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 10여 년의 시간 동안 근본주의는 반공주의와 떼려야 뗄 수 없이 결합되어 한국 개신교 신앙의 모태가 되었다. 즉 오늘 우리가 ‘한국 교회는 본래부터 당연히 그랬어’라고 생각하는 것이 실은 1940~1950년대에 조성된 ‘만들어진 역사’와 다름없다는 얘기다.
--- p.30

이 책 서두에서 나는 1990년대 중반 이전까지 대형교회의 등장이 개신교 교세의 증가와 더불어 나타났다고 말했다. 반면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교세의 증가 추세가 급격히 쇠락했고, 심지어 마이너스 성장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는 조사 결과도 볼 수 있는데, 흥미롭게도 이런 저성장 혹은 역성장 시기에도 대형교회가 된 교회들이 있다고 했다. 나는 이런 관점에서 대형교회의 유형을 둘로 나누었고, 그것을 각각 ‘선발대형교회’와 ‘후발대형교회’라고 명명했다. 여기서 하나 더 확인할 것은, 선발대형교회 유형에서 양적 성장은 ‘새 신자 유입’의 결과인 반면, 후발대형교회 유형은 수평이동한 신자들의 재정착이 중요했다는 점이다.
--- p.47

이렇게 수평이동 현상이 더 중요해졌다는 사실은 선교 상황의 변화와 연관된다. 많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넓은 곳에 산재하여 살고 있으며 교통수단이 덜 발전하여 장거리 이동이 여의치 않은 사회에서는 ‘교구(parish)’ 개념이 발전하기 마련이다. 이런 사회에서 수평이동 현상은 별 의미가 없다. 하지만 서울처럼 인구가 과잉 집중된 사회, 그리고 교통수단이 대단히 발달한 사회에서 교회는 일종의 종교시장의 상품처럼 전시되고 소비된다. 이때 디지털화한 콘텐츠가 무한 유통되는 정보사회의 매스미디어가 충분히 발달하면 선택될 상품들이 더 다양하고 세밀하게 전시된다. 따라서 수평이동신자들은 교회들에 대해 더 많고 깊은 정보를 가지고 주체적으로 판단하여 선택하게 된다. 이때 주목할 것은 이런 정보 능력은 사회적 지식을 더 많이 활용할 수 있는 능력과 비례한다는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의 떠돌이신자들 가운데 사회 엘리트가 상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 p.51~52
 

출판사 리뷰

선발대형교회와 후발대형교회

대형교회(Megachurch)는 일요일 대예배에 출석한 성인 신자가 2,000명 이상인 교회를 가리키는데, 이에 따르면 한국의 대형교회는 대략 900개소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즉 전체 교회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7%밖에 되지 않는데도 대형교회가 한국 개신교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막강하다. 대형교회 목회사역자는 각 교단에서 교단정치의 핵이며 교회 연합기관들에서도 압도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다. 또 대형교회 담임목사의 리더십 스타일은 거의 모든 목사들의 사역 표준이 되고, 대부분 교회의 예배 양식이나 프로그램 및 담론 등도 대형교회의 모범을 따르고 있다. 한국 사회가 한국 교회를 바라보는 시선 역시 대형교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요컨대 대형교회는 한국 개신교를 과잉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개신교 신자 수가 정체/감소 추세로 변환된 19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대형교회에서 흥미로운 내적 분화가 일어나 특정한 계급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장이 형성되었다. 저자는 이전에 급성장한 대형교회 유형을 ‘선발대형교회’, 이후에 급성장한 대형교회 유형을 ‘후발대형교회’라고 부른다. 전자가 성장지상주의와 절대 1인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특징으로 한다면(대표적인 예로 영락교회와 순복음교회), 후자는 탈권위주의와 설득적 리더십에 기초하고 있다(대표적인 예로 사랑의교회, 온누리교회).

개신교 인구가 증가하던 시절 탄생한 선발대형교회는 새 신자의 유입이 중요한 변수였지만, 개신교 인구 정체/감소 시대에 등장한 후발대형교회는 수평이동신자의 유입이 더욱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새 신자가 담임목사에 대한 의존성이 강한 존재라면, 수평이동신자는 마치 상품을 구매하듯 교회를 선택하는 자라는 점에서, 목사에 대한 의존성이 훨씬 낮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새 신자 중심의 대형교회들은 전국의 대도시에 분산되어 있는 반면, 수평이동신자가 유입되어 대형교회가 된 교회들은 강남권(강남, 강동, 분당)에 집중되어 있다. 새 신자는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한 이농민들이 많았지만, 수평이동신자는 주로 비강남 지역에서 강남권으로 이주한 이들이다. 그들은 학력도 더 높고 자산도 더 많으며 상징자본도 더 많이 가진 이들이다. 이렇듯 한국 사회의 중상위계층이 강남권 후발대형교회에 집중되면서 그들 특유의 계급문화가 형성되었는데, 저자는 바로 그것을 웰빙보수주의라고 명명한다.

후발대형교회와 ‘주권신자’의 탄생

선발대형교회의 성장에 절대적이었던 새 신자들은 대개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하여 도시 빈민층을 형성한 이들이었기에, 교회에 유입될 때 목사의 권위에 자발적으로 순응하여 교회의 일방적인 훈육 대상이 되었다. 반면 후발대형교회의 주축을 이룬 수평이동신자들은 선교 상황의 변화와 맞물려 등장했다. 그 이전에는 이사나 결혼 등이 사회 유동성의 주된 요인이었던 반면, 이후에는 신념이나 취향의 선택과 맞물린 ‘경계 넘기’가 더 활발해졌다. 그것은 개신교 신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즉 신념이나 취향의 차이를 더 예민하게 느끼면서 속했던 교회를 떠나 이곳저곳 물색하며 떠도는 이가 크게 늘었다. 서울처럼 인구가 과잉 집중된 사회, 그리고 교통수단이 대단히 발달한 사회에서 교회는 일종의 종교시장의 상품처럼 전시되고 소비된다.

이때 디지털화한 콘텐츠가 무한 유통되는 정보사회의 매스미디어가 충분히 발달하면 선택될 상품들이 더 다양하고 세밀하게 전시된다. 따라서 수평이동신자들은 교회들에 대해 더 많고 깊은 정보를 가지고 주체적으로 판단하여 선택하게 된다. 이때 주목할 것은 이런 정보 능력은 사회적 지식을 더 많이 활용할 수 있는 능력과 비례한다는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의 떠돌이신자들 가운데 사회 엘리트가 상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물론 후발대형교회들에서도 1인의 카리스마적 리더가 모든 가용 자원을 독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리더의 성장 전략이 효과를 드러내려면 주체적인 신자들을 위한 선택지를 더 확대해야 한다. 즉 그런 신자들을 대대적으로 정착시키려면 담임목사가 디자인하는 교회나 목회가 그들의 신념과 기호에 잘 맞아야 한다. 하여 카리스마적 리더십보다는 ‘설득적 리더십’이 요구된다. 설득적 리더십은 떠돌이신자들을 재정착하도록 유인하는 데만 유효한 것이 아니다.

담임목사는 재정착한 신자들과 ‘함께’ 교회를 만들어간다. 이제 신자들은 담임목사에게 충성심을 갖는 추종자가 아니라 교회를 함께 만들어가는 ‘협력자’ 혹은 ‘동역자’가 된다. 그런 신자를 저자는 ‘주권신자’라고 명명한다. 이것은 민주국가의 제도적 주체를 ‘주권국민’ 또는 ‘주권시민’이라고 부르는 것에 병행되는 표현이다. 권위주의 체제가 1인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와 그에게 절대 충성하는 백성들의 수직적 네트워크가 제도화된 사회라면, 민주주의 체제는 설득적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와 주권국민/주권시민의 수평적 네트워크가 제도화된 사회다. 후발대형교회 유형의 교회로 성장하는 데는 설득적 리더십의 담임목사와 주권신자의 효과적인 조합이 중요하다. 이 조합이 잘 작동하는 후발대형교회 유형의 공동체들은 독특한 신앙문화를 발명해나갔는데, 그것이 바로 ‘웰빙 신앙’이다.

주권신자들을 위한 웰빙 장소로서의 교회

후발대형교회는 수평이동신자들의 신념과 취향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교회 개혁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신자들은 주권신자가 되어갔다. 그들이 교회를 선택하는 첫 번째 기준은 설교였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었다. 이 까다로운 신자들, 이 교회 저 교회를 다니면서 적극적 비평가가 된 이들을 유치하기 위해, 교회들은 설교 내용과 설교자의 테크닉에만 의존하지 않고, 예배 형식, 예배 음악, 예배당의 공간 배치, 음향·조명·시각 효과 등을 ‘캐릭터화’하는 데 큰 힘을 기울였다. 나아가 신자 프로그램이나 교회 건축물에서도 그 교회만의 개성을 추구했다. 바야흐로 이 시기에 성공한 교회가 되려면 자기만의 ‘캐릭터’를 갖는 것이 중요했다. 정착할 교회를 찾아 떠도는 이들은 이러한 캐릭터로 교회들을 바라보았고 그것을 재정착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다.

1990년대 후반 후발대형교회의 선두 주자인 사랑의교회와 온누리교회는 캐릭터화에 성공함으로써 주권신자들을 사로잡았다. 사랑의교회는 ‘제자훈련’이라는 캐릭터로, 그리고 온누리교회는 ‘귀족영성’이라는 캐릭터로 말이다. 선발대형교회의 성공 스토리에서 핵심 요소였던 목사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목사의 주도성에 초점이 있는 것이지만, 후발대형교회적인 ‘교회의 캐릭터화’는 신자들의 주도성에 방점이 찍힌다.

웰빙보수주의는 위기에 처한 교회가 산업화 시대의 낡은 보수주의에 대한 개혁과 쇄신의 요구를 적극 수용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후발대형교회들은 이제 빠른 도시화로 인해 가족과 이웃의 친밀성이 치명적으로 해체되고 있는 시기에 다른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친밀성의 공간이 되었고 또 거대한 인맥 공장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대형교회의 주권신자들은 대부분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교회를 귀족적 품격이 넘치는 웰빙의 장소로 만들고자 했다.

‘그들만의 리그’에서 벌어지는 웰빙보수주의의 맨얼굴

한국인 중 개신교 신자 비율은 아무리 많아도 20%를 넘지 못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파워엘리트 중 약 40%가 개신교 신자다. 그런데 후발대형교회에는 선발대형교회보다 파워엘리트의 비율이 훨씬 더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선발대형교회가 전국의 대도시에 산재해 있는 반면, 후발대형교회는 강남권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후발대형교회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대단히 막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정부와 정치권, 학계, 재계, 법조계, 군부를 망라한 사회 곳곳에 포진해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 때의 소망교회 인맥이 특권적 지위를 누렸던 것을 빗댄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 지역)’이나 박근혜 정부 시절의 ‘사미자’(사랑의교회·미래를경영하는연구모임)라는 표현은 그러한 영향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최근에는 ‘촛불정치’와 ‘태극기정치’로 양분된 진보와 보수의 정치 지형 아래서 적절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이 사회적 범주가 보수주의의 정치 어젠다를 추동하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한편 많은 교회들에서 주권신자의 범위를 둘러싼 갈등이 공공연히 혹은 은밀하게 벌어지고 있다. 즉 파워엘리트가 주도하는 교회(엘리트 정치)가 될 것인가, 모든 신자의 범위로 확장된 이들의 발언권이 강화된 교회(시민 정치)가 될 것인가를 둘러싸고 다양한 방식의 주권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주권신자라고 해서 모두가 평등한 권리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교회의 내부 정보, 가령 재정 운용이나 교회 정책 등에 대해 신자 일반은 거의 접근할 수 없다. 대개의 경우, 신자들은 단순히 박수부대에 지나지 않는다. 이른바 이너서클과 나머지 사이의 벽은 대단히 높다. 최근 법적 공방을 통해 재정 장부와 당회(목사와 장로들의 회의) 회의록의 열람권이 신자들에게 있다는 것이 인정되었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교회에 심각한 분쟁이 벌어지고 갈등이 극한까지 치달을 경우에나 그런 요구를 둘러싼 논란이 실체화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만큼 교회는 권위주의적 성격이 강한 사회 단위다. 선발대형교회의 경우에는 거의 모든 권력이 담임목사 1인에게 집중되었지만 후발대형교회에서는 목사와 당회, 그리고 일부 특권적 신자에게로 권력이 분산되었을 뿐이다. 주권신자는 여전히 소극적인 주권의 주체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쪽으로 무게 축이 이동하든, 여기서 고려되지 않은 것이 있다. 후발대형교회 유형의 교회들에서 벌어지고 있는 담론적 갈등 속에 그들의 외부, 즉 ‘주권 밖으로 내몰린 대중’에 대해서는 여전히 배타주의가 공공연히 혹은 은밀하게 작동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보수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다. 그 ‘바깥’에는 가난한 자, 이주노동자, 난민, 성소수자, ‘정상’ 가족 관계가 결핍된 자 등이 있다. 그런 이들이 교회로 들어오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권신자로서 교회의 비전을 만들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제도를 만드는 과정에서 제도와 담론 형성의 주체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런 이들은 하위 주체(노예적 주체)로서 가련한 표정을 짓고 교회에 스스로를 위탁하는 자일 뿐이다. ‘바깥에 대한 성찰이 없는 보수주의’가 웰빙적 주권신자 현상이 불러일으키는 교회 개혁 담론의 맨얼굴일지도 모른다. 강고하게 구축된 ‘그들만의 웰빙 리그’는 낡은 보수주의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여전히 차별과 혐오의 정치로 이어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이 후발대형교회에 대해 비판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주목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라고 저자는 경고한다.

신천지 현상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는 최근 코로나19 사태로 절대 악처럼 지탄받고 있는 신천지에 대한 메타적 분석이다. 후발대형교회 패러다임이 약진하자, 이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신앙적으로 위로받지 못하는 이들이 재결속하여 여러 유형의 종교사회적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데, 신천지 현상 또한 이런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후발대형교회적 신앙 양식이 성공을 거두면서 많은 교회들이 이 모델을 광적으로 모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성공하지 못했는데, 그 모델이 (강남권의 경우처럼) 물적 자본과 인적 자본이 충분해야만 달성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모방이 교회 성장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점 외에,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모방 과정에서 실패한 자들(교회 사역자와 신자 모두)을 위한 복음의 정신이 망각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가난한 신자들은 교회에서도 비존재가 되었고, 그들 중 일부는 무력감에 빠졌다. 신천지는 이렇게 소외되고 무력감에 빠진, 사회경제적으로 열악한 개신교 신자들을 집중 공략했다. 교회가 잊어버린 약한 자들을 향한 위로와 치유의 기능이 신천지에서는 매우 잘 발달되어 있는데, 그것이 2000년대 신천지의 광속 성장 비결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1997년 외환 위기와 2008년 금융 위기를 거치면서 한국 사회는 신자유주의의 격랑에 급속히 빨려들어갔다. 그것이 수반하는 가장 중요한 의미 중 하나는 경쟁 사회의 치열함이 훨씬 더 가혹해졌다는 점이다. 그런 변화는 무수한 이들에게 깊은 마음의 병을 안겨주었다. 하여 상처받은 이를 향한 위안과 치유가 오늘의 종교에 부여된 사회적 요구의 주요 항목이 되었다. 그런데 교회는 과연 이에 부응하고 있을까.”

신천지 현상은 오늘 우리 사회와 교회가 잊어버린 것과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