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한국근대사 연구 (독서>책소개)/1.한국근대사

독립협회 - 토론 공화국을 꿈꾸다

동방박사님 2023. 1. 28.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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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우리의 토론 문화는 아직 미성숙단계에 있다는 말을 많이 하곤 한다. 오랫동안 왕정 시대를 살았고 왕정이 붕괴된 후에는 식민지로 전락해 스스로 민주사회를 일굴 기회를 잃었었고 또 해방 후에는 전쟁과 냉전, 독재가 지배했던 역사 현실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 토론문화의 역사가 결코 짧다고만 말할수는 없다. 이미 19세기 후반 대한제국에는 자주적 독립과 근대화를 향한 민중의 열의가 짧지만 강하게 민주주의의 꽃을 피웠던 적이 있다. 협성회 토론회와 독립협회 토론회가 바로 그것이다.

비록 좌절된 시도이긴 하였으나 민중의 목소리를 규합하고 나아가 근대적 정치 원리의 실험장 역할을 했던 독립협회의 토론회 활동의 역사적 가치는 작지 않을 것이다. 한 망명객의 귀환으로부터 시작되는 이 책은 조선인이 품었던 자주적 근대화와 민주주의 열망을 담아내고자 노력했다. 남아있는 사료를 기초로 하되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이 세밀하게 개입되었다. 시대상황과 인물들의 내면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화 장면이 빛을 발하는 이유다. 첫 장에 나오는 서재필과 후쿠자와 유키치와의 대화 장면이나 귀국 후 서재필이 여러 사람들과 대면하는 장면은 연표와 사건들의 건조한 연결로 이루어진 역사를 좀더 생생하게 들어보도록 해줄 것이다.

 

목차

책머리에

1. 어느 망명객의 귀환
11년 만의 귀국|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나다

2. 신문으로 세상을 바꾸다
고종과의 재회|코무라 공사의 회유|유길준과 의기투합하다 |신문 간행을 위한 조건을 갖추다|주시경과 함께 한글 신문을 기획하다|조선인의 생활을 바꾼 독립신문

3. 토론공화국을 열다
배재학당과의 인연|독립협회를 결성하다|토론의 필요성을 강조하다|배재 학생들, 협성회를 결성하다|협성회의 첫 토론회|고종, 전제군주를 꿈꾸다|고종과 서재필, 갈등이 싹트다|협성회, 공개 토론회를 열다|독립협회도 토론회를 열다|서재필과 윤치호|고종,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다

4. 토론으로 제국에 맞서다
러시아에 맞선 독립협회, 1차 만민공동회를 열다|독립협회 토론의 재구성|서재필의 추방 공작|서재필이 떠난 독립협회|관민공동회와 만민공동회의 의회설립운동|42일간의 민중 투쟁|한성 코뮌의 종언|제국과 공화국

5. 끝나지 않은 이야기
간주곡|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책을 맺으며
자료
참고문헌
 

저자 소개

저자 : 이황직
충북 보은에서 나서 대전에서 자랐다. 연세대 행정학과에 입학했지만 인문학에 뜻을 둬 문학, 철학, 역사 수업을 더 열심히 들었다. 정현종 시인에게 시 창작을 배워 『세계문학』에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6월 항쟁 이후 운동과 학문 사회에서 번민하던 중 박영신 교수의 수업을 듣고 사회학자의 길을 선택한다. 「근대 한국의 윤리적 개인주의 사상과 문학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의사소통센터 ...
 

출판사 리뷰

독립협회 토론 110주년, 토론의 역사를 다시 쓰다
얼마 전 ‘100분 토론’에서 영화 <디워>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은 높은 시청률과 네티즌의 폭발적인 반응으로 한동안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그러나 이 논쟁은 전혀 생산적이지 못한 소모적인 비난으로 얼룩졌다. 우리 토론문화의 수준을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다. 비단 이 사건이 아니더라도 요즘 대선을 앞두고 벌어지는 후보들 간의 토론은 말이 ‘토론’이지 개인적 비방이 난무하는 끝장 토론의 전형을 보여준다. 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미국 민주당 예비경선의 토론 장면과 비교해 봐도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왜 우리 토론문화가 민주시민사회라는 이름에 걸맞게 성장하지 못했을까? 오랫동안 왕정 시대를 살았고 왕정이 붕괴된 후에는 식민지로 전락해 스스로 민주사회를 일굴 기회를 잃었던 것을 이유로 들 수 있겠다. 또 해방 후에는 전쟁과 냉전, 독재가 지배했던 역사 현실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 토론문화의 역사가 결코 짧다고는 할 수 없다.
이미 19세기 후반 대한제국에는 자주적 독립과 근대화를 향한 민중의 열의가 짧지만 강하게 민주주의의 꽃을 피웠던 적이 있다. 협성회 토론회와 독립협회 토론회가 그것이다. 올해는 독립협회 토론 110주년을 맞이하는 해다. 역사의 굴곡이 자생적인 토론문화를 계승하지 못하게 만들었지만 그 가치를 발굴하고 오늘의 모범으로 삼는다면 그 씨앗이 다시 새로운 싹을 틔울 것이다. 『독립협회, 토론공화국을 꿈꾸다』는 잊혀진 과거의 현장을 복원하고 재구성함으로서 우리 토론의 역사를 새롭게 기술한다.

민주주의 실험, 천 일의 꿈을 기록하다
이야기는 한 망명객의 귀환으로 시작된다. 1895년 겨울, 제물포 항에 도착한 한 남자. 갑신정변의 주모자로 11년간 타국을 떠돌던 서재필은 역모자의 신분에서 중추원 고문으로 다시 고국 땅을 밟았다. 그는 조국의 근대화를 이끌 민중의 계몽을 자신의 첫 번째 소임으로 삼을 것을 다짐한다. 외세를 등에 업고 벌인 무모한 정변에 대한 반성과 미국에서의 경험이 바탕이 된 결정이었다. 이후 3년간 그가 벌인 다양한 활동에 조선의 민중은 근대적 의식을 갖춘 시민으로 성장했다. 이것은 물론 서재필 한 사람만의 힘이 아니다. 민중의 요구가 있었고 뜻을 함께하는 동료가 있었다.
19세기 말 조선은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풍전등화의 처지에 있었다. 개혁파와 보수파, 친일파와 친러파 등으로 사분오열된 상태에서 국모가 시해되는 사건마저 벌어져 시국은 더욱 어수선했다. 한성에 도착한 서재필은 가장 먼저 민중의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는 언로를 확보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해 1896년 4월 7일 순 우리말 신문인 「독립신문」을 간행한다. 신문 간행에는 자금을 확보해준 유길준과 한글의 체계를 정리한 주시경 등 많은 사람의 노력이 들어갔다. 우승열패의 당시 상황에 시끄러운 논쟁이 국론을 분열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서재필은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 할 공론장 형성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독립신문이 가져온 변화는 컸다. 두 명의 기자가 관청과 시장을 누비며 국민에게 필요한 정보를 찾아 나섰고, 국민들은 신문이 주는 활력과 비판 기능에 주목했다. 길에는 신문을 파는 가판원이 등장했고, 길모퉁이마다 한 장의 신문을 펼치고 삼삼오오 둘러앉아 담소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워졌다. 수동적으로 정보를 얻기만 하던 사람들은 신문사로 투고문을 보내거나 사람들과의 논쟁을 통해 능동적인 독자가 되어갔다.
「독립신문」간행으로 ‘글’의 공론장을 확보한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결성하여 근대적 ‘회(會)’의 기반을 닦았다. 개혁 인사들로 구성된 독립협회는 독립문을 건립하고 토론회를 주최하는 등 서재필의 근대화 기획에 중심적 역할을 한다. 서재필은 곧이어 배재학당 학생들과 토론 모임인 협성회를 결성하여 ‘말’의 경연장을 열었다. 학생들의 토론회는 1897년 8월 독립협회 토론회로 이어졌으며 이듬해 3월에는 만민공동회라는 이름으로 민중에게까지 확대된다. 근대적 정치토론의 첫 시발점으로 기록되는 사건이다.
이 책은 이 3년 동안 조선인이 품었던 자주적 근대화와 민주주의 열망을 담아내고자 노력했다. 남아있는 사료를 기초로 하되 역사의 비워진 페이지는 저자의 상상력으로 촘촘히 채워 넣었다. 시대상황과 인물들의 내면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화 장면이 빛을 발하는 이유다. 첫 장에 나오는 서재필과 후쿠자와 유키치와의 대화 장면이나 귀국 후 서재필이 여러 사람들과 대면하는 장면은 연표와 사건들의 건조한 연결로 이루어진 역사를 좀더 생생하게 들어보도록 해줄 것이다.

제국 대 공화국, 좌절된 시도
34회에 걸친 토론회와 민중의 호응 그리고 토론이 밑바탕이 된 사회 변화의 희망은 그러나 한순간에 무너졌다. 서재필은 쫓기다시피 미국으로 돌아갔고 독립협회는 해산되었다. 그 때 대한제국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898년 10월 보수파 정권 퇴진을 외치는 시위가 중추원과 경운궁 앞에서 벌어졌다. 민중과 학생이 참여한 이 시위로 고종은 보수파 대신들을 해임하고 박정양, 민영환 등으로 구성된 중도개혁파 인사들로 내각을 구성했다. 그러나 곧이는 보수파 정권의 음모로 개혁파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고 고종은 독립협회를 비롯한 개혁 단체들을 혁파하려고 한다. 이에 민중들은 또다시 항의 시위를 시작했다. 42일간 계속된 민중 봉기의 서막이었다.
1898년 대한제국은 기로에 서 있었다. 열강의 위협 속에서 자주적 근대 개혁을 완성하기 위한 고종과 개혁파 사이의 갈등은 개혁의 중심이 황제인가 민중인가를 두고 심화된다. 아관파천을 계기로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고종은 러시아 황제를 자신의 모범으로 삼아 강력한 전제 군주제를 꿈꾼다. 그 반대편에는 서재필을 중심으로 한 독립협회와 민중들의 공화국에 대한 열망이 존재했다. 3년 전 서재필의 귀환으로부터 시작된 근대적 여론의 형성이 제국의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떠올랐다. 고종에게는 멀리 있는 열강의 야심보다 가까이 있는 개화파가 더 두려운 존재였다. 결국 고종은 친위 세력인 보부상과 군대를 동원 만민공동회를 해산하고 민회 불법화를 알리는 조칙을 선포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러일 전쟁 후 일본에 강제 병합되기 전까지 조선 땅에는 제국과 공화국이라는 두 워리의 경합 속에서 근대 민주주의의 맹아가 싹트고 있었다. 비록 좌절된 시도였지만 민중의 목소리를 규합하고 나아가 근대적 정치 원리의 실험장 역할을 했던 독립협회의 토론회 활동의 역사적 가치는 작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저자는 숙명여자대학교 의사소통센터에서 ‘발표와 토론’이라는 교과목을 담당하면서부터 토론회 활동에 주목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회학자로서 늘 머리로는 공론장이니 시민사회니 하면서 서구 이론을 외우고 다녔지만, 막상 그것을 어떻게 현실화할지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그는 센터에서 토론과 논증의 원리를 배우지 않았다면 토론을 통한 공론장 형성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또 이것을 계기로 근대 토론의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
구한말의 토론 수준은 현재의 토론 수준에 비추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지켜보는 방청객의 열의, 참여도, 규칙 수준 역시 현재의 정치 집회 수준을 월등히 뛰어넘는다. 이 책은 구한말의 척박한 토양에서 일궈낸 공론장의 전통을 확인하고 자긍심과 함께 발전적 계승의 방향을 가늠해 보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