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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공족 (2022 / 한국근대사) - 제국일본의 준황족

동방박사님 2023. 2. 5.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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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한일합방은 총 한 방 안 쏘고,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종이(조약) 위에서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대한제국 황실은 ‘가(家)의 제사의 보전’을 대가로 나라를 일본에 넘기고, 일본제국 황실에 ‘조선 왕공족’으로 편입되었다. 고종과 그 형, 순종과 그 후손들까지, 제국 일본의 신민(臣民)이 된 4대 26명은 일제 강점기를 어떻게 살아갔으며, 해방 후에는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목차

한국어판 서문
머리말
조선왕공족 가계도

서장 제국이란 무엇인가: 동아시아의 황제

제1장 한국 병합과 황제의 처우: 폐위됐지만 신하는 아니다

이토 히로부미의 대한(對韓) 정책
왕공족의 탄생: ‘대공(大公)’ 대신 ‘왕’
이왕 책립: 서구 근대의 규칙을 중시

제2장 제국 일본에 뿌리내리는 왕공족: 각자의 처세술

준황족 대우: 「왕공가궤범」을 둘러싼 분규
왕공족 26명의 민낯: 공순(恭順)인가 반항인가
I 이왕가: 대한제국의 적류(嫡流)와 황족 출신의 비
II 이강공가: 품행 불량한 초대 당주, 빈궁한 후계자
III 이희공가: 쿠데타를 계획한 음지의 계보
궁내성의 『왕공족보』 편찬

제3장 ‘황제’의 승하와 제국 일본의 고뇌

이례적인 ‘국장’ 선택: 조선인 회유를 위해
묘비와 만장에 ‘황제’ 기재 요구
이태왕과 이왕 실록 편수: 제국의 정통성을 위하여

제4장 쇼와 시대의 왕공족, 그들의 조국은

‘프린스 리’ 이은의 서양행
육군 장교의 생업과 충의: 왕공족 군인 3인
종전, 상실, 그리고 빈곤: 차디찬 눈길

종장 제국에 있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가

후기
참고문헌
옮긴이의 말
 

저자 소개 

저 : 신조 미치히코 (新城道彦)
 
1978년 일본 아이치(愛知)현에서 출생했다. 2009년 규슈(九州)대학교 비교사회문화학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같은 해 규슈대학교 한국연구센터 강사(연구원), 2011년 조교가 되었다. 2012년 니가타(新潟)대학교 대학원 현대사회문화연구과 조교를 거쳐 2015년부터 페리스 여학원대학교 국제교류학부 준교수, 2022년부터 교수로 있다. 전공은 동아시아 근대사이다. 지은 책으로 『천황의 한국 병합(天皇の韓國倂合...
 
역 : 이우연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에서 “조선시대-식민지기 산림소유제도와 임상의 변화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한국경제사 전공)를 받았다. 하버드 대학교 경제학과 방문연구원, 규슈대학교 한국학연구센터 교환교수를 지냈고 현재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있다. 지은 책으로 『한국의 산림소유제도와 정책의 역사 1600~1987』(2010), 『반일종족주의』(2019, 공저), 옮긴 책으로 『징용공 없는 징용공 문제』(2020), ...
 

책 속으로

일본의 대한제국 병합은 “군인 한 명 움직이지 않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루어졌다. 순종(純宗)은 자기 일족의 신분 보장과 맞바꿔 통치권을 천황에게 양여하였다. 대한제국 황실은 이후 일본 황족에 준하는 왕족·공족 신분이 되고, 때로는 황족을 능가하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게 된다. ‘일제 강점’이라는 말을 고집하는 한, 왕공족의 창설이나 그들에 대한 처우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항대립의 가치 기준을 벗어나 한국 병합을 동아시아에서 벌어진 하나의 역사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기쁨이겠다.
---「한국어판 서문」중에서

왕공족은 법적으로는 [일본] 황족으로 간주되지 않았지만, 예우 상으로는 황족으로 취급됐다. 예를 들면 경칭은 황족과 동일하게 ‘전하’였고, 왕족인 이태왕(고종)이나 이왕(순종)의 장례는 황족에도 좀처럼 내리지 않는 국장으로 치렀다. 공족인 이우(李?) 공이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 피폭으로 사망했을 때는 시종무관 요시나리 히로시 중좌가 자책하는 마음으로 자결했다. 종전 직전인 1945년 8월 12일에 천황이 황족을 고쿄(皇居)에 불러들여 포츠담 선언을 수락할 의사를 알리는 자리에는 왕공족도 동석했다. 왕공족과 황족의 경계는 이처럼 애매했다.
---「머리말」중에서

[헤이그 밀사사건 후] 이완용과 대한제국의 각료들은 양위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우선 농상공부대신 송병준이 황제는 지금까지 일본의 ‘신의’를 배반할 때마다 “짐은 관계없다”며 죄를 중신(重臣)에게 전가해 왔다고 비난하며 도쿄에 가서 사죄하라고 말했다. [1907년] 7월 17일에 각료 일동이 궁으로 들어갔을 때는 이완용이 황제에게 “사직이 중하고 임금은 가볍습니다”라고 말하고 왕위에서 물러나라고 재촉한다.
---「제1장 ‘한국 병합과 황제의 처우'」중에서

1917년 11월 10일, 창덕궁 전각의 대부분이 소실되는 대화재가 발생했다. 이왕[순종]이 피난할 때 가장 걱정한 것은 천황과 황후의 진영(眞影)들이었다. 진영은 흔적도 없이 다 타 버렸다. 이튿날 이왕직 직원과 경무부 직원의 입회 하에 그 재를 상자에 쓸어 담아 비원 내 가장 청정한 땅을 선정해 봉납했다. 이완용은 이태왕[고종]에게 문안을 드리면서 덕수궁으로 궁을 옮기는 게 어떨지 의논한다. 이왕은 불쾌감을 드러내며 “천황폐하로부터 받은 창덕궁이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겠다”(『이왕궁 비사』)며 이완용을 질책했다. 결국 이왕 부부는 덕수궁으로 옮기지 않고, 대조전을 복구하는 약 2년 동안 불편한 낙선재에서 생활했다.
---「제2장 ‘제국 일본에 뿌리내리는 왕공족'」중에서

이은, 이건공, 이우공은 어릴 때부터 일본인으로 지냈고, 성인이 되고 나서는 황족과 동일하게 군무(軍務)를 생업으로 삼고 있었다. 그들 왕공족 2세대는 1세대와 같이 안정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왕공족의 지위를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황족과 동일한 의무를 수행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예를 들면, 이은은 1940년경에 아들 이구를 서재로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들 왕족은 일본의 황족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남자는 특별한 신체 사정으로 폐하의 허락이 있는 경우 외에는 육·해군 어느 쪽인가의 길을 골라야 한다.” 전황이 악화됐을 때는 “폐하께 면목이 없다”고까지 말했다.
---「종장 ‘제국에 있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가’」중에서

조선-대한제국은 군주가 국가를 세습 재산으로 취급하던 가산제(家産制) 국가였다. 군주는 나라를 일본에 넘겼고, 그 대가로 자신과 그 직계는 왕족, 방계는 공족으로 일본 황실에 편입되었다. 조선 왕공족 제1 세대가 일본에 대해 적대 의식을 가지면서도 개인과 집안의 존속을 위해 불가피하게 일본에 협력하였다면, 그 후대는 왕공족의 지위를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고 일본 황족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였다.
---「옮긴이의 말」중에서
 

출판사 리뷰

가문 존속을 대가로 나라를 넘긴 임금,
일본 황실의 왕족·공족이 된 그 일가족―
조선 왕공족, 그들은 누구이며 무엇을 하였는가

총 한 방 안 쏘고 나라를 넘기다


조선은 왕이 국가를 사적인 세습 재산으로 취급하던 가산제(家産制) 국가였다. 나라가 원래 왕의 것인데, 그래서 왕이 나라를 팔겠다는데 뭐라 할 수 있겠는가? (옮긴이의 말, 321~322쪽)

1910년의 한일합방을 이보다 더 직설적으로 일갈할 수 있을까? 『조선 왕공족』(신조 미치히고 지음, 이우연 옮김)은 나라를 일본에 넘기고 그들 자신은 일본제국 황실에 ‘조선 왕공족’으로 편입된 고종과 그 형, 순종과 그 후손들까지, 제국 일본의 신민(臣民)이 된 4대 26명의 이후 행적을 파헤친 책이다.

한일합방 조약 조인 직후 연회에서, 당시 조선 통감이고 합방 후 초대 총독이 되는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무력으로 침입한 임진왜란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패퇴한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를 회상한다. 그의 감회처럼 한일합방은 “군인 한 명 움직이지 않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근대적 조약의 형식을 빌려 이뤄 낸 쾌거였다(한국어판 서문, 6~7쪽). 흔히 ‘을사오적’이라 지목하는 중신(重臣)들은 차치하고, 대한제국 황제는 어떻게 그토록 순순히 나라를 통째로 내줄 수 있었을까? 저자는 이씨 황실이란 ‘가(家)’의 제사의 보전이 그 대가였다고 지적한다. 조선은 물론 대한제국도 군주 1인만이 주권을 갖는 전제군주제 국체(國體)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왕공족 그들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

한일합방으로 대한제국 황제와 직계 및 그 배우자들은 일본의 왕족으로, 방계와 배우자들은 공족으로 편입되었다. 덴노(천황)를 정점으로 한 일본제국 황실 아래 편입된 이들 ‘조선 왕공족’의 면면을 보자. 아들에게 양위하고 ‘덕수궁 이태왕’으로 물러난 고종과 그 형인 흥왕 이희, 합방조약의 당사자인 ‘창덕궁 이왕’ 순종은 독립한 조선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순종의 형제자매들인 영왕(영친왕) 이은, 의왕(의친왕) 이강, 덕혜옹주와 2대 후손들까지, 책은 모두 4대 26명의 조선 왕공족을 조명한다. 망국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들 대부분은 철저히 일본 황족의 일원으로 스스로 자리매김하며 살아갔다. 저자가 일본인이기에 거침없이 쓸 수 있었으리라는 것을 감안해도, 일본제국에 대한 이들의 충성스러운 태도나 일부 인사들의 조신하지 못한 사생활은 같은 한국인이 읽기에 낯부끄러울 정도다.

‘망국의 임금’ 순종이 일본제국과 덴노를 대하는 마음가짐을 극명하게 말해 주는 것은 1917년 창덕궁에 대화재가 일어난 직후 순종이 한 발언이다. 이완용은 화재를 복구하기까지 잠시 덕수궁으로 이어(移御)할 것을 추진했으나, 막상 순종은 합병 때 덴노가 하사한 덴노와 황후의 진영(眞影)이 소실된 것을 안타까워하고, “천황폐하로부터 받은 창덕궁이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117~119쪽).

순종의 이복동생으로서 황태자에 책봉되고 이토 히로부미의 눈에 들어 어린 나이에 일본에 유학한 영왕 이은은 일본 황족과 마찬가지로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제국 군인의 길에 충실했다. 태평양전쟁 중 일본 항공대가 미국에 연전연패할 때는 아들 이구에게 “폐하께 면목이 없다”고 했고(252쪽), 도 “우리들 왕족은 일본의 황족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남자는 특별한 신체 사정으로 폐하의 허락이 있는 경우 외에는 육·해군 어느 쪽인가의 길을 골라야 한다”(288쪽)고 타일렀다. 책은 그 밖에 이은·이강보다 덜 알려진 그들의 2대 후손들까지의 일화로 그득하다.

한편 이은은 일본 덴노의 방계인 마사코 공주(이방자)와 결혼했고, 이복여동생 덕혜옹주는 쓰시마 번주(藩主)의 후손인 소 다케유키(宗武志) 백작과 결혼했다. 이런 일들은 조선 지배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일본의 계획에 따른 정략결혼 아닌가? 책은 그렇게만 볼 수 없다고 단언한다. 신분제도가 아직 공고하던 일본에서, 아무튼 황족에 편입된 조선 왕공족과 혼인으로 연결되는 것은 일본의 황족·왕족·지방귀족의 입장에서도 가문과 위세를 유지하는 데 확실히 보탬이 됐다는 말이다.

대한제국 황실, 쓸쓸한 말로

국권을 회복한 후 옛 황실을 다시 모시려는 복벽(復?)의 움직임은 없었을까? 철저히 일본 황실의 일원으로 살아간 이은 자신부터 뜻이 없었다. 결국 대한제국 황실의 적통(嫡統)은 이은의 외아들 이구(李玖)가 하필이면 이은의 도쿄 사저였던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에서 객사(2005)함으로서 끊기고, 제사는 이강의 손자가 이구의 양자로 입적해 계승하고 있다. 혈통으로 가장 적류(嫡流)에 가까운 인물은 이구 사망(2005) 당시 일본 가이세이(開成)고 교감으로 있던 모모야마 고야(桃山孝哉, 이강의 손자)이지만 그는 스스로 “백 퍼센트 일본인으로 생각한다”고 선언했고, 한국에서는 이강의 서녀(庶女)를 여제(女帝)로 선포하고 전주이씨대동종약원과 다투는 단체도 있다(282~283쪽).

한일 각자의 국가적, 민족적 자존심 문제를 넘어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시각이 아쉬운 부분들도 있다. 헤이그 밀사사건(1907) 후 고종의 황제 양위를 압박하며 “사직이 중하고 임금은 가볍다”고 한 이완용의 말(43쪽)에서 ‘사직’은 과연 황실의 가문만을 의미하고 나라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고종과 순종 인산(因山) 날의 3·1만세운동(1919)과 6·10만세운동(1926)을 한갓 ‘소요’로 치부할 수 있을까? 그리고 한국에는 음으로 양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한 거의 유일한 황실 인물로 알려진 의왕(의친왕) 이강을 반골·부랑아처럼만 기술한 것 등, 일본인의 입장에서 작심하고 쓴 만큼 향후 제대로 치열하고 따라서 더 생산적일 수 있는 논쟁거리도 책은 풍부하게 담아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