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역사이야기 (책소개)/8.제주이야기

제주 신화의 숲 (2022) - 문화소로 걷다

동방박사님 2023. 3. 30.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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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신화를 읽는 새로운 길
문화소로 걷는 제주신화의 숲


어느 곳보다 풍부하고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제주섬 곳곳의 신화를 새롭게 풀어가는 책이다. 저자는 제주신화를 살피는 실마리로 ‘문화소’를 가져왔다. 그 지역에만 있는 문화 조각을 이르는 문화소를 통해 신화에 담긴 또 다른 이야기들을 풀어나가는 것이다. 신화를 읽다 보면 의미가 깨어져 비문법적인 부분이 있는데, 저자는 신의 이야기와 문화질서 이야기가 겉으로 드러나려고 충돌하는 거기에 문화소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문화소를 배치한 원리인 문화 코드, 즉 문화가 서사에 담기도록 해주는 규칙을 통해 신화에 담긴 질서를 살핀다. 예를 들어 〈고내리당본풀이〉의 문화 코드는 ‘어업의 질서’이고, 〈원천강본풀이〉의 문화 코드는 ‘장례의 질서’라 본다.

1부 해석편 〈문화소로 걷다〉에서는 저자의 이러한 문화소 읽기를 통해 제주신화에 담긴 인간질서를 살핀다. 7편의 본풀이를 새롭게 읽어 나가는데, 그동안 신화의 한 조각으로만 넘겼던 요소들이 문화소라는 돋보기를 통해 지금 우리의 현실로 더욱 가깝게 다가온다. 2부 이론편 〈제주신화의 숲 탐방로〉는 이러한 문화소 읽기와 해석을 위한 개념과 방법을 정리했다. 제주신화와 본풀이, 문화소와 신화소, 문화 코드와 문화적 스토리 등을 통해 ‘문화소로 신화 읽기’의 길을 열고 있다. 저자는 이론서나 학술서의 형식을 취하지 않고, 친구와 함께 제주의 숲을 거닐며 본풀이를 함께 읽고 얘기를 나누며 의미를 확장하고 정리하는 이야기 구조로 구성했다. 편안한 대화와 질문, 시각적인 이해를 돕는 삽화를 배치하여 자연스럽고 쉽게 신화 읽기에 다가갈 수 있도록 하면서, 신화의 이야기가 결국 인간 삶의 이야기임을 보여준다.

목차

1부 문화소로 걷다

죽어서 돌아가는 길
〈원천강본풀이〉 오늘, 혼자서 갑니다 18
〈삼두구미본〉 땅귀의 이사 47
태어나 처음 오는 길
〈눈미불돗당본풀이〉 바위와 금쪽이 78
밥을 위한 여러 갈래 길
〈세경본풀이〉 밭의 여신, 사랑을 거두다 100
〈삼달리본향당본풀이〉 음매장군과 황소집사 192
〈고내리당본풀이〉 바다 장군 맞이하기 224
치유의 길
〈지장본풀이〉 새가 날자 병이 떨어져 256

2부 제주신화의 숲 탐방로

안내문 290
신화란 무엇인가
인간의 문화질서를 신의 서사로 드러낸 이야기, 신화 298
‘그때-거기-그들’과 ‘지금-여기-우리’ 사이의 간극 305
문화에 남아 있는 간극의 열쇠 308
제주신화, 본풀이
본풀이, 문화질서의 본을 풀다 314
문화질서의 의인화, 신 317
다양한 신, 다양한 제주 문화 325
신화의 두 층위
신의 얼굴, 인간의 마음 336
신화문법 342
심층의 의미 찾기 346
문화소와 신화소
신화에 나타난 문화소 356
신의 서사를 실어나르는 신화소 367
신화소와 문화소의 결합, 신화 374
문화 코드
소통의 필수요건, 코드 388
생활양식을 드러내는 규칙, 문화코드 397
신화의 문화코드 402
문화적 스토리
신화의 서사 409
문화적 스토리 419
문화적 스토리 구성하기 424
 

저자 소개 

저 : 강순희
 
20여 년간 제주중학교에서 국어교사로 학생들과 함께하며 생동감 넘치는 생활을 하고 있다. 제주대학교 대학원에서 제주신화를 연구하여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제주신화연구모임 회원으로 활동하며 제주신화 속에 담겨 있는 선조들의 정신문화를 이해하고 전승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제주 마을 곳곳에 남아 있는 신당을 답사하고 당신화를 연구하며 당올레의 아름다움과 매력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림 : 신지민

제주에서 태어났습니다. 문헌정보학과 일본어를 공부하며 틈틈이 그림을 그립니다.

 
 

책 속으로

오늘이는 처음에 장상도령을 만났어요. 왜 장상도령은 글만 읽어야 하고 성 밖으로 외출하지 못할까요. 우선 성 밖으로 외출하지 못함은 망자가 관(棺) 속에 갇혔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망자는 조문객이 올린 만서(輓書)를 읽어야 해요. 만서는 고인의 생전 업적과 명복을 비는 추모글이니까요. 별층당 높은 곳에 앉아 글만 읽어야 하는 장상도령의 모습은 관 앞에 쌓여가는 만서의 풍경과 겹쳐집니다.
--- pp.30~31

삼두구미는 첫째 딸에게 자기 양쪽 다리를 뽑아주면서 마실 갔다 오는 사이에 그걸 다 먹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다리를 먹히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아도 되지요. 이는 좋은 터를 잡아 육탈(肉脫)이 잘 진행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장례 후 3년 정도가 되면 육탈이 완결된대요. 명당에 모신 조상의 뼈는 기름기가 흐르고 누렇게 변하지만, 물속에 잠기거나 나무뿌리에 감긴 경우는 흉조(凶兆)라고 합니다. 장사 지내고 3년, 이사 가서 3년, 집 짓고 3년이란 말도 여기서 유래된 것이래요.
--- p.62

정수남이가 따로 점심을 들고 피해 가는 것은 파종 후 자청비가 품은 곡식을 함부로 마소가 먹게 해서는 안 됨을 뜻하지요. 자청비와 정수남이는 다른 곳에서 각각 다른 음식을 먹어야 해요. 밭이 품어서 키운 후 먹을 수 있게 되는 곡식과 마소가 먹어야 하는 곡식은 달라야 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 p.140

〈세경본풀이〉를 겉으로만 읽으면 자청비가 상세경이 되지 않고 문도령이 상세경이 된 점이 이상하게 생각됩니다. 자청비의 노력과 지혜로 사랑을 성취하게 되었으니 당연히 상세경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돼요. 그건 농경신마저도 서열화하려는 우리의 고정관념이지요. 농사짓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모두 중요했어요. 하지만 씨앗의 발아는 인간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영역이 있었지요. 맞아요. 비를 내리고 햇빛을 주는 하늘의 도움이 필요해요. 문도령은 사실 우유부단하고 우둔한 남자였지만 하늘의 원리로서 생명의 시작이잖아요. 이에 ‘그때-거기-그들’은 기꺼이 상세경으로 문도령을 모시며 위하게 된 것이지요.
--- p.190

김통정이 실존 인물이 아님을 알려주는 대목을 찾아보겠습니다. 김통정이 제주도에 오는 과정은 ‘대국 천자국에서 김통정을 제주로 보내고 상태를 알아서 오라고 하였다.’로 나타나지요. 역사적으로 보면 김통정과 삼별초는 여몽연합군에 반기를 들어 제주로 왔습니다. 김통정이 대국천자국에서 보내어 왔다고 기술하는 것은 다른 의미를 드러내려는 뜻이 아닐까요? 대국천자국은 제주에서 먼 곳, 중국과 같은 넓은 세상을 뜻합니다. 앞서 해석한 대어(大漁)와 결합하면 ‘먼 곳에서 오는 이동성 대어류’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 p.233

종합하면 발신자는 신화를 통해 현실을 환상처럼 그려내고, 수신자는 이를 신성시하며 수용한다. 이때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놓인 것은 메시지로서의 신화다. 메시지로서의 신화는 기본적으로 일반적 기호체계 안에서 이야기를 엮어나간다. 그런데 인간의 무질서한 문제를 신(神)의 말과 행동으로 질서 있게 그려내야 한다. 이때 신화의 메시지는 일반적 기호체계를 벗어난 은유의 전략을 사용하게 된다. 따라서 신화의 겉은 신(神)의 이야기이지만, 속은 인간의 문화질서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이다.
--- p.304
 

출판사 리뷰

가을 잎이 물들고 있습니다. 징검다리를 건너 하나둘 내게로 오는 중입니다. 〈세경본풀이〉를 읽었던 봄에는 자청비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무작정 걷기만 했습니다. 숲은 흥미롭고 아름다웠지만 낯선 단어와 문장으로 가득했습니다. 몇 번이고 걷다 보니 〈지장본풀이〉에서 지장아기씨를 만나고, 〈삼달리본향당본풀이〉에서 황서국서어모장군도 만났습니다. 초록의 여름, 무성한 잎들이 나무를 에워싸 하늘을 가리는 계절이었습니다. 숲이 창을 닫았습니다. 온전히 숲의 시간, 제주신화에 빠져 자청비의 행동을 이해하고, 지장아기씨의 슬픔을 알게 되었습니다. 야자수매트는 편히 걸으라고 길을 안내해 주었습니다만, 돌부리가 솟아난 부분을 일부러 골라 걸었습니다. 돌부리에 차여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날도 많았지만, 내가 밟은 돌부리가 다음 문맥의 징검돌이 되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듬성듬성, 띄엄띄엄 놓았던 때문일까요? 나의 징검다리는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비판인지 비난인지 모를 힐책으로 논문 심사장은 채워졌습니다. 꼭 두 해 전 오늘, 박사학위 청구 불합격의 날이었습니다. 그 겨울은 참 길었습니다. 어김없이 때죽나무는 하얀 종을 떼로 매달아 놓았습니다. 아기의 돌잔치, 아버지의 첫 제사를 치르듯 친구들 앞에서 일 년 치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습니다. 여름이 가고 겨울이 가는 동안 많은 손길이 상처를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종낭의 종소리가 숲으로 나를 불렀습니다. 먼지 쌓인 논문을 꺼내어 보니 모자란 것투성이지만, 징검돌 하나하나를 쓰다듬어 보았습니다. 울퉁불퉁 튀어나온 돌부리들은 이해할 수 없는 환상의 세계 이전에 사람의 길로 이어져 있음이 분명하였습니다. 〈세경본풀이〉의 자청비는 제주의 거친 밭이었습니다. 왜 자청비가 그토록 문도령을 위해 고군분투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문도령은 밭에 뿌려질 귀한 씨앗이었으니까요. 자청비를 괴롭히는 종놈, 정수남이는 밭을 일구도록 도와주는 마소였습니다. 이 셋은 없어서는 안 될 삶의 그릇, 문도령과 자청비와 정수남이가 하나로 어깨동무할 때 밥상은 풍요로워졌습니다. 그래서 〈세경본풀이〉는 상세경, 중세경, 하세경을 농경의 신으로 모셨던 겁니다.

문화소, 돌부리를 다듬어 만든 징검돌을 이 글에서 부르는 이름입니다. 맨 처음 박사학위청구논문의 제목도 ‘문화소 중심 해석을 통한 신화교육 연구’였습니다. 신화는 인간의 문화질서를 신의 서사로 드러낸 이야기라 생각합니다. 마땅히 신의 서사 안에 숨어 있는 인간의 문화를 찾아보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숲에 놓여 있던 삐죽삐죽한 비문법적인 문맥, 아무 생각 없이 걸을 땐 몰랐지만 문화소임을 인식하고 바라보니 현실의 문화행위를 암시함을 알았습니다.

2022년의 여름, 뜨거웠지만 제주신화의 숲을 친구와 거니는 행복을 누렸습니다. 야자수매트 길을 걸으며, 숲의 돌멩이를 느끼며, 한 마디 두 마디 새롭게 쓸 수 있었습니다. 동행한 친구의 딸이 그림도 그려 주었습니다. 제주를 떠났던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오고, 고향에 살던 이들도 심연의 고향을 찾고 싶어지는 가을, 오십 대의 시간이 흘러가는 중입니다. 그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함께 징검다리를 만들어준 김미영과 신지민 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름다운 표지로 책의 품격을 높여주신 부순영 님께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문화소의 길로 이끌어주신 스승 송문석 박사님께 큰 감사를 드립니다. 인생의 숲을 사랑으로 채워주시는 이현미, 고성효 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사랑하는 나의 가족, 모든 처음과 끝을 함께해주어 고맙습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책을 만들어주신 한그루의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 사이 숲에도 겨울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