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역사이야기 (책소개)/8.제주이야기

신정일의 신 택리지 - 제주 (2019)

동방박사님 2023. 3. 30. 08:06
728x90

책소개

문화사학자 신정일의 도보답사기
『신정일의 신新 택리지』 제주 편 출간!

세계에서 가장 붐비는 하늘 길은 어디일까? 무려 연간 8만여 편의 항공기가 운항하는 ‘서울 김포-제주’ 노선이 압도적인 1위다. 내외국인 합쳐 입도 관광객 수가 연간 1,400만 명을 훌쩍 넘는 자타공인 최고의 관광명소가 바로 제주다. 대한민국 도보답사의 선구자 신정일이 전국 방방곡곡을 직접 걸으며 완성한 도보답사기 『신정일의 신 택리지』 시리즈의 다섯 번째 책 ‘제주’ 편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은하를 당긴다는 뜻을 가진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 한라산부터 신령한 분화구 백록담, 설문대할망의 전설이 서린 영실, 삼남대로의 길목 조천포, 비양도, 산저포, 산굼부리 차귀도, 화북포, 산방산, 성산, 추자도, 혼인지, 존자암, 송악산 법화사 등 제주 곳곳을 사진과 함께 살펴보고, 각 지역의 역사적 사건, 설화, 전설도 소개한다. 또한 김정, 보우, 김상헌, 정온, 송시열, 추사 김정희, 임관주, 광해군 등 600년 유배객들의 이야기를 통해 제주의 역사, 문화, 사람들의 면면을 자세히 살펴본다.

목차

추천사 _ 강과 길에 대한 국토 입문서
머리말 _ 그리움으로 출렁이는 섬 제주도
개요 _ 바람이 빚은 섬 제주도 : 이어도의 꿈을 달래다

1 멀리 남해의 가운데 있는 섬 : 가 보고 싶고, 살아 보고 싶은
북쪽으로 큰 바다를 배고 남쪽으로 높은 산에 대하고 | 주호인이 살았던 제주도 | 제주 신화가 시작되다 | 제주목이었던 제주시 | 그 아름다운 제주도

2 어디에서나 우뚝 선 한라산 : 은하를 당기다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 한라산 | 삼신산의 하나인 한라산 | 산천단에서 산제를 지냈다 | 노인성이 보이는 한라산 | 신선이 사는 신령스런 산 | 신령한 분화구 백록담 | 고려 목종 때 화산재를 뿜었던 한라산 | 여름 제주는 온 섬이 시루 속 | 설문대할망의 전설이 서린 영실 | 꿈에 본 한라산 | 한라산을 노래한 문학 작품

3 바람이 많은 제주도 : 삼다삼무의 섬
돌이 많고, 바람이 많고, 여자가 많다 | 조난 사고가 많았던 제주 해협 | 유구국의 왕자가 떠밀려 도착한 제주도 | 『표해록』의 산실 제주도 | 여인국의 실체는 무엇인가 | 하멜이 표류한 제주도

4 육지와 매우 다른 제주도의 풍속 : 신들의 고향
풍속은 별나고 백성은 기쁘면 사람이요 성내면 짐승이다 | 부모가 죽어도 장사를 지내지 않았다 | 남자를 기다렸던 제주도 여자 | 방아 노래 원성처럼 들리네 | 삼촌, 폭삭 속았수다 | 방이왕과 쉐왕은 필수 | 신이 자리를 비우는 시간, 신구간 | 산담을 두른 죽은 사람이 사는 집 | 초파일에는 바다가 잔잔하길 | 영등할망 제주 오신다 | 이형상의 미신 타파 | 가시리 당나미 문씨아기당 | 토산리 여드렛당 | 세화리 본향당 | 한수리 영등당 | 추자도의 최영 장군 사당 | 김녕굴당 괴뇌깃도 | 없는 것은 까치뿐이다 | 제주의 마을과 우물 | 담 나라 제주

5 제주의 인물과 벼슬아치들 : 절해고도에서 꾸는 꿈
유배나 다름없는 제주 벼슬살이 | 반란군의 철수 조건은 최척경 | 탐라인 고득종 | 제주 명환들 | 글을 배우지 말라 | 탐학을 일삼았던 제주 목사 양호 | 하멜을 만난 목사 이원진 | 『산경표』의 저자 신경준 | 이규원보다 나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 조선 마지막 제주 군수 | 제주 큰손 김만덕 | 만덕의 두 얼굴 | 삼별초 항쟁의 마지막 현장 탐라 | 제주 민란 | 방성칠의 난 | 이재수의 난의 진원지 | 4·3항쟁의 현장

6 제주의 유적과 지명 : 생명과 평화의 땅
제주의 상징 관덕정 | 제주목 관아에 있던 홍화각 | 용담동의 제주향교 | 용연과 용두암 | 신선이 방문한다는 방선문 | 삼성혈에 얽힌 사연 | 김녕에 있는 김녕사굴과 만장굴 | 떠내려가다가 멎은 비양도 | 협재굴과 쌍룡굴 그리고 협재해수욕장 | 원나라 목호를 몰아낸 최영과 새별오름 | 한라산 자락의 오름들과 다랑쉬오름에 얽힌 사연 | 문주란과 수선화 | 제주항으로 바뀐 산저포 | 곽지리 사람 연근이 아내 김천덕 | 산굼부리와 환해장성 | 고유문의 효자비와 수월봉 | 차귀도와 절부암에 얽힌 내력 | 오현단에 서린 사연 | 벼를 실어 오는 포구 화북포 | 서불이 처음 도착한 조천 | 삼남대로의 길목이던 조천포 | 제주도에서 사라진 폐현 | 도근천의 숨은 내력 | 서미륵과 동미륵 | 제주의 한쪽이 떨어져서 생긴 소섬 | 제주의 섬 추자도

7 한국의 최남단에 있는 서귀포시 : 남국의 향연
한라산 남쪽 고을 | 지장샘에 얽힌 사연 | 서귀포의 제주 3대 폭포 | 삼매봉 봉수와 외돌개 | 제주도의 서쪽에 있던 대정현 | 가파도와 마라도 | 생김새가 호랑이를 닮은 호도 | 산방산의 산방굴사 | 광정당에 얽힌 사연 | 제주 동쪽에 있던 정의현 | 성산일출봉 | 세상에서 제일 키가 컸던 설문대할망 | 성산읍에 있던 고성 | 세 신인이 결혼한 혼인지 | 제주도의 전통이 그대로 남아 있는 성읍마을 | 한라산 남쪽에 솟은 송악산 | 서귀포의 존자암 | 존자암은 원래 영실에 있었다 | 번성했던 법화사 |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 영주십이경과 유채꽃 | 명월성과 명월진

8 한 많은 제주 유배지 : 600년 유배객들의 이야기
유배지로서 최적지였던 제주도 | 고려 유민이라고 칭했던 김만희 | 제주도에서 새로운 사랑을 만나다 | 기묘사화로 유배를 왔던 김정 | 불교의 부활을 꿈꾸었던 보우 | 기축옥사로 유배 온 소덕유와 길운절 | 제주에 파견되었던 김상헌 | 대정현에 남겨진 정온의 자취 | 비운의 왕 광해군의 자취 | 「제주풍토기」를 지은 이건 | 소현세자의 세 아들 | 송시열이 왔던 제주도 | 두 번 제주에 유배된 김춘택 | 이중환이 연루된 신임사화의 주인공들 | 임관주가 머물렀던 안덕의 창천리 | 유배객 조정철이 사랑한 제주 여자 | 천주교 박해로 유배 온 사람들 | 추사 김정희의 적거지 대정 |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유배

9 제주에 남은 역사의 자취들 : 섬에 남겨진 것들
이지함의 자취가 서린 제주도 | 출륙금지령이 있던 제주도 | 출륙금지령 이후에 발효된 풍선조선금지령 | 환상의 섬, 이어도 | 신선의 나라에서 나는 열매 | 귤을 독약 같이 보고 | 진상품을 맺던 귤나무는 대학나무가 되었고 | 오직 뱃일뿐 | 올레와 올래 | 곤밥과 고사리 | 제주말 | ?태조가 위화도에서 회군할 때 탔던 제주말 | 생선이 지천이니 | 제주도의 나무 | 숨비소리 | 세계지질공원으로 선정된 제주도의 아홉 곳
 

저자 소개)

저 : 신정일 (辛正一)
 
문화사학자로 역사와 문화 관련 저술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작가이자 도보여행가다. 1980년 10월, 2년 6개월의 제주도 생활을 청산하고 전주에 자리 잡았다. 1980년대 중반 황토현문화연구소를 발족해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을 재조명하기 위한 여러 가지 사업을 펼쳤고, 1989년부터 문화유산답사 프로그램을 만들어 현재까지 진행하고 있으며,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회에 참가했다. 한국의 10대 강...
 

책 속으로

한반도의 남쪽에 자리 잡은 제주도는 육지와는 전혀 다른 풍토와 풍속을 지녀 제주도를 찾는 사람들에겐 마치 이국의 어느 지방에 도착한 것과 같은 낯섦을 선사한다.(중략)

이렇듯 육지에서 살던 사람들에게 제주도에서의 삶은 유배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제주 사람들에게 제주도는 어떠했을까? 누구나 제주도에서의 탈출을 꿈꾸었다. 더러는 떠나서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더러는 금세 돌아와 제주에서의 삶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과거에는 유배지로, 오늘날에는 관광지로 조명받는 땅인 만큼 제주는 숱한 부침을 겪어 왔다.
--- p.10, '그리움으로 출렁이는 섬 제주도' 중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질곡의 세월 속에 살다간 제주도, 그 제주도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꾼 사람들이 있었다. 고려 때 강화도에서 진도를 거쳐 제주로 들어온 김통정을 비롯한 삼별초가 제주도에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려 했고, 조선 중기에는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라고 일컬어지는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된 길운절이 소덕유(정여립의 척분)를 찾아가 모반을 도모했다. 그 뒤를 이어 조선 후기에 일어난 제주 민란의 주동자들도 그러했다. 어디 그뿐인가. 1894년 요원의 불길처럼 치솟았던 동학 농민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뒤 동학도였던 방성칠과 그 일행들이 일으켰던 방성칠의 난과 외래 종교인 천주교와의 마찰로 일어났던 이재수의 난이 모두 조선 후기 제주도에서 일어난 민란이었다. 그 뒤 잠시 평화가 찾아온 듯했던 제주도에 불길한 바람이 불어오면서 전대미문의 큰 사건이 터졌다. 바로 제주도 민중 3분의 1이 희생된 4·3항쟁. 제주도 땅에서 피어난 이 모든 꿈은 무수한 희생자와 큰 상처만을 남기고 역사의 뒤편으로 몸을 숨겼다. 제주의 아름다움을 시샘해서 그런지 제주의 역사는 이처럼 절망과 슬픔의 역사다.
--- p.27, '바람이 빚은 섬 제주도' 중에서

한라산은 주 남쪽 20리에 있는 진산이다. ‘한라’라고 하는 것은 운한雲漢(은하)을 나인拏引(끌어당김)할 만하기 때문이다. 혹은 두무악이라 하니 봉우리마다 평평하기 때문이요, 혹은 원산이라고 하니 높고 둥글기 때문이다. 그 산꼭대기에 큰 못이 있는데, 사람이 떠들면 구름안개가 일어나서 지척을 구분할 수가 없다. 5월에도 눈이 있고 털옷을 입어야 한다.

산이 높은 지방에서 흔히 쓰는 말로 ‘하늘이 세 뼘밖에 안 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높은 곳이라는 뜻이다. 한라산이 영주산이라고 알려진 것은 중국 『사기史記』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중국 동쪽에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약초가 있어 신선들이 사는 삼신산으로 봉래산과 방장산, 영주산이 등장한다. 이는 곧 금강산과 지리산, 한라산의 다른 이름이다. 이 중 망망대해 바다 한가운데 솟아 있는 한라산에 기원전 200년경에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의 명을 받아 역사力士 서불徐市이 그 불로초를 캐러 왔다.
--- p.56, '삼신산의 하나인 한라산' 중에서

옛날에 설문대할망이 500명의 아들을 데리고 한라산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식구가 워낙 많다 보니 그날그날 구걸을 해 와야만 끼니를 마련할 수가 있었다. 하루는 아들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할망은 아들들을 먹일 죽을 큰 가마솥에 끓이다가 잘못하여 가마솥에 빠져 죽게 된다.

구걸한 쌀을 짊어지고 늦게야 돌아온 아들들은 배가 고파 어머니를 찾을 겨를도 없이 허겁지겁 죽을 떠먹었다. 그날따라 죽 맛이 좋다고 생각하면서 정신없이 먹고 있는데, 늦게 온 막내아들이 어머니의 행방을 찾았다. 그러다 가마솥을 죽젓개로 젓자 어머니가 그 안에 빠져 죽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막내아들은 크게 서러워하다 무심하게도 어머니가 빠져 죽은 죽을 먹은 형들을 원망하며 도망쳤다. 그러고는 고산 앞바다 차귀도 앞에 가서 어머니를 그리워하다가 그만 바위가 되어 버렸고, 499명의 형제는 그 자리(영실)에서 그대로 굳어져 바위가 되고 말았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에서 큰 소리를 지르면 삽시간에 구름이 덮이고 안개가 끼어 앞을 찾지 못하게 될 뿐만 아니라 심하면 비가 온다. 이는 설문대할망이 성이 나서 그런다고 한다
--- p.80, '설문대할망의 전설이 서린 영실' 중에서

제주도를 두고 ‘언어학의 보물 창고’라고 부르는 것은 이 지역에 사라진 옛말과 독특한 조어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새그릇(질그릇), 지새집(기와집), 비바리(처녀), 독새기(돌멩이), 가우리(지렁이), 오로(두더지), 덕세기(멍석), 베염고장(봉선화), 밥주리(참새), 폿자리(작은 매미), 물새(잠자리), 게염지(개미), 쟁이(호박), 수눌음(품앗이), 솟덕(부뚜막), 돗껭이(회오리바람), 황고지(무지개), 입바위(입술), 바릇(바다), 보제기(어부) 등과 같은 단어가 그렇다.

육지에서 온 사람들이 제주에 와서 듣고 황당해 하는 말이 ‘속다’이다. 속다는 ‘욕보다’, ‘수고하다’라는 뜻의 제주 말인데 말의 어휘상 그 말을 들으면 느닷없이 ‘왜 속았다고 하는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오래전 조선의 아홉 대로 중 한 곳인 ‘관동대로’ 촬영 차 방문했던 삼척에서도 그런 말을 들었다. 촬영이 다 끝나자 그곳 사람들이 “폭삭 속았수다” 하는 것이었다. 즉,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말인데, 강원도 삼척 부근에서도 흔히 쓰는 말이라고 한다. 해녀들이 삼척으로 전복을 따러 갔다가 육지 남자와 살게 되면서 옮긴 말이 아닌가 싶다.
--- p.131, '삼촌, 폭삭 속았수다' 중에서

텔레비전 드라마로 방영되어 전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성이 바로 김만덕金萬德이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에도 등장하는 김만덕의 삶을 「만덕전萬德傳」으로 기록한 사람이 정조 때 문신인 채제공蔡濟恭이다. 「만덕전」에 의하면 만덕의 본관은 김해 김씨이고, 아버지 김응열과 어머니 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양인이었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외삼촌 집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다가 기안妓案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는데 스물셋에 제주 목사의 허락을 받아 양인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만덕은 제주도 남자들을 촌스럽게 여겨 혼인하지 않고 지냈는데, 장사 수완이 뛰어나 수십 년 사이에 내로라하는 부자가 되었다.

당시 제주 목사가 만덕의 선행을 조정에 보고하자, 정조는 김만덕에게 내의원 의녀반수醫女班首의 벼슬을 내렸다. 김만덕은 나이 58세(정조 20, 1796)에 정조를 알현했다. ‘제주도 여자는 뭍(육지)에 오를 수 없다’는 금기를 깨뜨린 김만덕은 제주에서 서울로 오는 도중에 각 고을 역참의 융숭한 호위를 받는 특전을 누리며 서울에 입성했다.

서울에 도착한 만덕은 당시 좌의정이던 윤시동尹蓍東의 부인 처소에 머물렀다. 궁궐에 나가서 혜경궁 홍씨를 알현하기도 했다. 그때 혜경궁 홍씨는 “네가 여자의 몸으로 굶주린 수많은 백성을 의롭게 구했다니 참으로 기특하다”며 후한 상을 내렸다. 그리고 영의정 채제공과 선혜청의 배려로 금강산을 유람했다.
--- p.195, '만덕의 두 얼굴' 중에서

제주도와 진도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추자도는 상추자와 하추자 그리고 두 개의 유인도와 38개의 무인도를 포함한다. 맑은 날에는 섬들과 바다가 어우러지는 풍경이 장관이다. 이 추자도에는 다산 정약용의 조카 정난주丁蘭珠와 아들에 얽힌 사연이 서려 있다.

신유박해 때 다산의 조카사위인 황사영의 백서 사건이 발각되어 황사영은 참수당하고, 그의 부인 정난주는 관노가 되어 제주도로 유배를 가던 길이었다. 추자도 해안가에 잠시 머물 때 정난주는 아들까지 노비로 자라게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 이름과 태어난 날, 부모의 이름을 적어 젖을 먹고 잠든 두 살배기 아들 황경한黃景漢의 옷 안에 넣고 아이만 남겨 둔 채 홀로 제주도로 향했다. 정난주는 유배지 대정에서 살다 작고했고 추자도에 남겨진 아기는 오씨가 발견하여 잘 키워 주었다. 그런 연유로 추자도 오씨와 황씨는 결혼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기가 남겨졌던 바위에는 눈물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는데 태풍에 십자가가 꺾이고 말았다.
--- p.305, '제주의 섬 추자도' 중에서

제주도 사람들에게 출륙금지령을 내리면서 함께 시행했던 것이 풍선조선금지령風船造船禁止令이었다. 제주도에서 육지로 나갈 때 사용하던 풍선은 화살처럼 빠른 배다. 풍선은 선체 위에 세운 돛에 바람을 받게 해서 진행하는 배로 울릉도 개척 시기에 이주민들이 타고 온 나선(전라도 어선)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고종 19년(1882) 울릉도 검찰사 이규원의 『울릉도검찰일기鬱陵島檢察日記』를 보면 전라도와 강원도 사람들이 울릉도에 도항해서 채곽과 채어를 하여 조선이 끝나면 배에 싣고 귀향한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정조 11년(1787) 울릉도를 탐사한 라페주르 탐험대의 『세계탐험기』에는 선박 건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는 기록도 있다. 여러 기록으로 미루어 울릉도 개척 시기 이전부터 나라 곳곳에서 배가 만들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풍선의 길이는 대개 20~30미터가량 되며, 풍 돛은 1~3개 정도 달았다. 단순한 돛을 가진 작은 범선은 돛단배 또는 돛배라고 했다. 돛과 기관을 함께 갖춘 선반을 기범선機帆船이라고 했다. 풍선을 타고 항해할 때 그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밤에는 별의 방향을, 낮에는 바람의 방향을 이용했다.

제주도에 풍선조선금지령이 내려지면서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이용되던 ‘덕판배’라는 풍선을 못 만들게 하여 그때 등장한 배가 ‘테우’라고 한다. 풍선을 못 만들게 하면서 테우라는 느린 배로 인근만 오가게 했던 세월이 200여 년이었다. 중국의 당나라나 송나라가 왕조를 누리던 시간과 거의 같은 오랜 세월이었고, 다시 만들기 시작하여 전라도 일대에서 만들어진 풍선이 울릉도로 가게 되었다
--- p.454, '출륙금지령 이후에 발효된 풍선조선금지령' 중에서
 

출판사 리뷰

과거에는 유배지로, 현재는 관광지로 각광받는 제주,
돌?바람도 많고, 사건사고도 많은 제주의 흥미진진한 역사, 문화, 사람 이야기


한반도의 남쪽에 자리 잡은 제주도는 육지와는 전혀 다른 풍토와 풍속을 지녔다. 과거에는 유배지로, 오늘날에는 관광지로 조명받는 제주는 숱한 부침을 겪어왔다. 고려 때 강화도에서 진도를 거쳐 들어온 삼별초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려 했고, 조선 중기에는 제주도에 유배된 길운절이 모반을 도모했다. 조선 후기에 일어난 제주 민란, 방성칠의 난, 이재수의 난 등이 모두 제주도에서 일어난 민란이었다. 그 뒤 잠시 평화가 찾아온 듯했던 제주도에 불길한 바람이 불어오면서 전대미문의 큰 사건이 터졌다. 바로 제주도 민중 3분의 1이 희생된 4·3항쟁이었다. 이렇듯 제주는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슬프고도 고통스러운 사건도 많았고, 진귀하고 흥미진진한 설화와 전설도 많이 품은 곳이다.

이 책은 은하를 당긴다는 뜻을 가진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 한라산부터 신령한 분화구 백록담, 설문대할망의 전설이 서린 영실, 삼남대로의 길목 조천포, 비양도, 산저포, 산굼부리 차귀도, 화북포, 산방산, 성산, 추자도, 혼인지, 존자암, 송악산 법화사 등 제주 곳곳을 사진과 함께 살펴보고, 각 지역의 역사적 사건, 설화, 전설도 소개한다. 또한 김정, 보우, 김상헌, 정온, 송시열, 추사 김정희, 임관주, 광해군 등 600년 유배객들의 이야기를 통해 제주의 역사, 문화, 사람들의 면면을 자세히 살펴본다.

누구나 살아 보고 싶은 그리움과 환상의 섬
사연을 알면, 전혀 다른 제주가 보인다!


- 제주도는 삼별초 항쟁 이후 대략 100여 년 동안 원나라의 간접 지배를 받았다. 그때 원나라의 언어와 풍습 등이 제주도 사람들에게 크게 영향을 끼쳤다.
- 산방산은 독특한 돔 모양 때문에 얽힌 전설이 많은데 그중에는 원래 백록담의 정수리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 고려 때까지도 제주도 부근에서는 화산 운동이 그치지 않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화산 폭발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은 동굴로 몸을 피하거나 잠시 배를 타고 바다로 대피했다.
- 인조 3년 일본 나가사키를 향해 가던 중 태풍에 밀려 제주도 해안에 닿은 3명의 네덜란드인들은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무기를 제조하는 일을 담당했다.
- 제주도는 육지와 다른 풍속들이 많은데 어디를 가든 돌하르방과 집안의 안녕을 비는 미륵불을 만날 수 있다.
- 제주도를 두고 ‘언어학의 보물 창고’라고 부르는 것은 사라진 옛말과 독특한 조어가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제주어는 중국이나 일본, 몽골과도 연관이 있다.
- 제주도 사람들이 모시는 바람의 신 영등할망은 매년 음력 2월 초하루에 와서 미역이나 전복 등 해녀들이 채취하는 해산물의 씨를 뿌려 주고 보름날에 돌아간다고 한다.
- 김만덕은 나이 58세에 ‘제주도 여자는 뭍에 오를 수 없다’는 금기를 깨고 정조를 알현했다. 제주에서 서울로 오는 도중에 각 고을 역참의 융숭한 호위를 받는 특전을 누리며 서울에 입성했다.
- 키가 큰 설문대할망은 그 몸집이 얼마나 크고 또 힘은 얼마나 셌던지 삽으로 흙을 떠서 던지자 그것이 한라산이 되었다 한다. 설문대할망의 후예답게 제주 여자들은 강인하다.

저자 신정일은 30년 넘게 우리 땅 곳곳을 답사한 전문가로 각 지역 문화유적은 물론 400곳 이상의 산을 오르고, 금강·한강·낙동강·섬진강·영산강 5대 강과 압록강·두만강·대동강 기슭을 걸었으며, 우리나라 옛길인 영남대로·삼남대로·관동대로 등을 도보로 답사했다. 부산 오륙도에서 통일전망대까지 동해 바닷길을 걸은 후 문화체육관광부에 최장거리 도보답사 길을 제안하여 ‘해파랑길’로 조성되었고, 그 외에도 소백산자락길, 변산마실길, 전주 천년고도 옛길 등의 개발에 참여하였다. 이렇듯 두 발로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걸어온 신정일을 김용택 시인은 “현대판 김정호”라 했고, 도종환 전 문화관광부장관은 “길 위의 시인”이라고 했다. 김정호가 그랬듯 산천 곳곳에서 건져 올린 생생한 이야기를 담은 『신정일의 신 택리지』 시리즈는 우리 시대 대표적인 국토 인문서로 독자들에게 이 땅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추천평

신정일의 책은 사람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이 땅 구석구석을 누구보다도 많이 걸었던 그의 발이 쓴 국토 교과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 이덕일 (역사가)

『택리지』의 현장정신을 계승한 책이 신정일의 ‘두 발로 만나는 우리 땅 이야기’다. 이 책의 저자인 신정일 선생은 30년 넘게 전국의 산천을 답사한 전문가이다. 아마 이중환보다 더 다녔으면 다녔지 못 다닌 것 같지가 않다. 우리나라 방방곡곡 안 가본 산천이 없다.
- 조용헌 (강호동양학자)

우리가 사는 지금, 김정호 선생을 닮은 사내가 있다. 오래전부터 우리나라 산을 오르기 시작한 그가 다음은 강 길을 걷더니, 이제는 아예 우리나라 전 국토를 이 잡듯 뒤지며 걷고 또 걷는다. 나는 그를 보며 나는 '저 사내 틀림없이 김정호 귀신이 씌었지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저럴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생각한다. 현대판 김정호, 그가 바로 신정일이다.
- 김용택 (시인)

강과 길의 철학자인 신정일 저자의 이야기를 듣노라니 정말 걷고 싶었다.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으며 우리 땅에 깃든 문화를 되살리기 위해 애쓰는 신정일 저자는 우리 시대 또 하나의 희망으로 기억될 것이다.
- 박원순 (서울시장)

신정일 선생은 촌놈 같기도 하고 동학군 같기도 하여 어수룩해 보인다. 그런데 이 ‘촌놈’의 얘기가 왜 이렇게 재미있는지 절로 무릎을 치게 한다. 신정일은 무당처럼 답사를 한다. 이렇게 혼이 실리고 신명나는 답사의 궤적을 따라가 볼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행운이다.
- 이정만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

이 책은 발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산과 들, 강과 바다, 시간적 과거들과 인간의 미래에 대한 소망들을 책상물림이나 머리로 쥐어짜는 짱구들의 억지 글과는 판이하다. 그는 자기의 발이 도달한 산천 도처에서, 금강의 여러 구비에서 울고 웃는다. 나는 그를 '발로 쓰는 민족사상가'라고 부른다.
- 김지하 (사상가, 시인)

우리가 사는 이 땅을 구석구석 밟아보고, 그 땅의 자연과 물산과 그 땅에 심어 놓은 조상의 문화를 직업 체험하면서 죽도록 이 땅을 사랑해본 일이 있는가? 250년 전에 이중환은 불우한 가운데서 그런 일을 했고, 『택리지』라는 명저를 냈다. 150년 전의 김정호도 이 땅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아름다움을 『대동여지도』로 그려냈다. 그런데, 바로 지금 또 하나의 21세기 『택리지』가 나타났다. 세월이 변하고 국토가 변하고, 문화가 바뀐 이 시점에서 당연히 『택리지』는 다시 쓰여져야 할 것이고, 그 일을 신정일이라는 문화사학자가 일구어냈다. 비록 분단의 북쪽 땅을 샅샅이 밟아 보지 못하고 일부분만 보았으나 이 책은 왜 우리가 죽도록 이 땅을 사랑해야 하는지를 뜨거운 가슴으로 말하고 있다. 귀중한 현장 사진과 더불어 옛날과 지금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면서 땅과 사람의 대화를 그려낸다.
-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