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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종교개혁 당시,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허울만 남은 중세 가톨릭교회의 일곱 성례전을 비판하며, 로마교회의 타락을 지적한 대표적인 논문이다. 루터는 이 논문을 통해, 믿음 안에서만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인 성례전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터는 1520년 8월부터 11월까지 세 편의 기념비적인 논문을 통해 종교개혁의 진심을 잘 담아 내었다. 그 중 하나인 [교회의 바빌론 유수]는 이스라엘 민족의 바빌론 유수를 상기시키듯 교회의 바빌론 포로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가톨릭교회의 성례전을 주로 다루었다. 루터는 교회의 전통적인 7가지 성례전에 도전하면서 세례와 성만찬만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했다. 일곱 성례의 축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례를 받고 성찬에 기계적이고 수동적으로 참여하는 대신, 이 과정에서 참여자의 믿음의 역할이라고 루터는 강조했다.
루터는 1520년 8월부터 11월까지 세 편의 기념비적인 논문을 통해 종교개혁의 진심을 잘 담아 내었다. 그 중 하나인 [교회의 바빌론 유수]는 이스라엘 민족의 바빌론 유수를 상기시키듯 교회의 바빌론 포로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가톨릭교회의 성례전을 주로 다루었다. 루터는 교회의 전통적인 7가지 성례전에 도전하면서 세례와 성만찬만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했다. 일곱 성례의 축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례를 받고 성찬에 기계적이고 수동적으로 참여하는 대신, 이 과정에서 참여자의 믿음의 역할이라고 루터는 강조했다.
목차
서막(1520년) _ 8
성찬례(성체 성사) _ 24
세례 성사 _ 108
참회의 성사(고해 성사) _ 163
견진 성사 _ 185
혼인 성사 _ 190
성품 성사 _ 222
종부 성사(병자 성사) _ 245
마무리 _ 259
[에필로그]우리가 루터를 기억해야 할 이유 _김재현 _ 267
주요자료 _ 277
성찬례(성체 성사) _ 24
세례 성사 _ 108
참회의 성사(고해 성사) _ 163
견진 성사 _ 185
혼인 성사 _ 190
성품 성사 _ 222
종부 성사(병자 성사) _ 245
마무리 _ 259
[에필로그]우리가 루터를 기억해야 할 이유 _김재현 _ 267
주요자료 _ 277
출판사 리뷰
에필로그
우리가 루터를 기억해야 할 이유
루터의 종교개혁과 한국의 개신교
16세기 초에 독일의 작은 도시 비텐베르크(Wittenberg)를 중심으로 시작된 종교개혁은 500여 년 후 지구의 거의 반대편에 위치한 한국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16세기 다양한 흐름의 개신교 종교개혁이 왕성하게 일어났던 유럽 기독교가 21세기 들어 쇠퇴해진 반면에 20세기 기록적인 교회 성장을 보여준 한국기독교는 유독 강한 개신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기독교는 개신교의 대표주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와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 중에서 칼뱅의 영향력을 더 크게 보여주지만, 루터의 핵심교리와 칼뱅의 신학이 혼용되어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특히 루터가 주장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는 한국개신교 신앙의 핵심적인 지침이 되어 왔고, 심지어 고백적 믿음이 종종 삶의 행위를 능가해 작동할 때가 많았다. 매년 10월 마지막 주에 거의 모든 한국 교회가 기념하는 종교개혁주일에도 루터의 이름과 95개 조문과 '이신칭의'는 여전히 유효하게 간주되고 있다.
다만, 칼뱅주의가 강한 한국기독교가 16세기 종교개혁에 있어서 1세대 루터와 2세대 칼뱅의 시대적 역사적 차이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주어진 과제와 방법이 달랐고, 상황과 시급성과 기반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
루터가 보여준 응집된 변화의 힘
루터의 종교개혁을 단순히 16세기에 일어난 하나의 종교적인 사건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중세 말기에 고전연구로 시작된 인문주의와 새로운 세계관과 인식론을 문화로 꽃피운 르네상스에 기초해 일어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과 같은 종교 지평의 변혁 사건이었다. 보름스(Worms)공원에 자리한 루터의 동료 그룹 동상들이 보여주듯이, 새로운 세계관으로 무장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학자들의 축적된 연구와 협력이 없었더라면 루터의 종교개혁은 그처럼 강력한 시대의 무기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또한 독일의 역사적 운명과 민족성을 일깨우는 과정과 깊게 연결되었다. 독일은 당시 프랑스나 영국이나 스페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민족적 응집력과 정치력이 약했다. 이런 상황에 루터의 신학적 깃발은 로마교황이 독일을 재정적으로 어렵게 만드는 일에 반대할 명분을 제공했고, 그의 독일어 성경 번역은 독일 민족의 자의식을 깨우는 데 크게 일조했다. 이와 함께 중세독일교회의 출발점인 마인츠(Mainz)에서 발전된 구텐베르크의 활자술은 오늘날의 종이신문에서 SNS 매체로의 혁명적 충격만큼이나 큰 변화를 유럽 전체에 가져다주었다. 루터는 이런 시대적 매체의 힘을 가장 깊이 느끼고 활용한 인물이었다.
루터는 이처럼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인물이었고, 천년 이상을 지배하던 중세유럽기독교의 세계관을 뒤흔든 사람이었다. 루터는 시대 전환의 비등점을 가장 잘 표현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1517년 비텐베르크 95개조 반박문에서
1529년 슈페이어(Speyer)회의까지
16세기 종교개혁과 관련해 루터의 인생 중에 가장 급박하고 흥미진진한 시기를 본인은 1517년부터 1529년으로 보고 있다. 1517년에 교황 레오 10세(Leo X, 재위 1513-1521)가 성 베드로 성당의 건축기금을 위해 대사면을 선포했고, 면벌부의 남발로 인한 개혁가들의 주장은 그 해 10월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때 촉발된 긴장과 논란은 1529년 슈페이어(Speyer)회의에서 14개의 중요 도시들이 루터를 비롯한 개혁가들을 지지하면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는 명칭과 함께 종교개혁가들이 안정된 종교적 실체로 자리하게 되었다.
기간은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과 교황, 선제후 프레데릭 3세(Friedrich III)와 신성로마제국 황제들(막시밀리안과 샤를 5세) 사이에 긴장된 순간들이 쉼 없이 이어졌다. 각 진영을 대표한 최고의 학자와 수사학자와 정치가와 신학자들이 동원되었고, 시대와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논쟁과 투쟁이 지속되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이 그저 정쟁이나 논쟁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종교개혁가들은 머지않아 개신교라 불릴 자신들의 새로운 흐름에 정체성과 신학적 고백과 학문적 논리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1517년에 교황청의 대사면발표와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종교적 지형을 가져올 것이라고는 누구도 쉽게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루터와 필립 멜랑히톤(Phillipp Melanchton)과 요한 에크(Johann Eck)가 1519년에 벌인 라이프치히 논쟁(Leipzig Debate)은 서로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1520년 6월에 교황은 루터를 정죄했고, 루터는 3편의 논문으로 자신이 생각한 종교개혁의 원인과 핵심을 공개적으로 제안하고 발표했다. 1521년 카를 5세가 주재한 보름스의회에서 우리는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도우소서, 아멘!"(Ich stehe hier, helfe mir, Gott)이라는 유명한 구절 속에서 루터의 결기를 느낄 수 있다. 이후의 수많은 논쟁은 1529년 터키에 대적하기 위해 군주들의 도움을 요청해야 했던 황제가 소집한 슈페이어회의에서 주요 도시들이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을 지지하면서, 새로운 지평을 맞게 되었다. 이제 굳이 루터가 몸소 횃불을 들고 외롭게 외칠 필요가 없는 상황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1520년, 교황청의 정죄에서 루터의 책을 통한 본격적인 저항으로
1517년 만 34세의 나이에 95개 논제로 담대하게 횃불을 들고 난 후 3년 동안이 루터의 일생 중에 가장 분주했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교황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지역 군주들, 그리고 추기경들을 비롯한 교황청의 공식 라인을 통해 루터의 입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의도대로 되지 않자, 교황은 1520년 6월 15일에 루터를 정죄(Ex surge Domine)해 버렸다. 그리고 그해 8월부터 11월까지 루터는 세편의 기념비적인 논문을 통해 종교개혁의 진심을 잘 담아 내었다.
[독일의 그리스도인 귀족들에게](1520년 8월), 독일어
종교개혁 초기의 상황을 되돌아보면서 교회 내부의 타락, 교회 권위의 남용, 부패한 관행들을 로마교회가 개혁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이제 독일의 귀족과 군주들이 나서 줄 것을 요청하는 논문이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해야 할 이유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면서, 독일 귀족들이 교회개혁에 역할을 해 줄 것과 신성로마제국의 구조에 도전을 줄 것을 요청했다.
[교회의 바빌론 유수](1520년 10월), 독일어와 라틴어
이스라엘 민족의 바빌론 유수를 상기시키듯 교회의 바빌론 포로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가톨릭교회의 성례전을 주로 다루었다. 루터는 교회의 전통적인 7가지 성례전에 도전하면서 세례와 성만찬 만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했다. 7성례의 종류 축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례를 받고 성찬에 기계적이고 수동적으로 참여하는 대신, 이 과정에서 참여자의 믿음의 역할이라고 루터는 강조했다. 성례는 거룩한 약속이며, 믿음 안에서만 성례전에 참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1520년 11월), 독일어와 라틴어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장 잘 보여준 논문이다. 그리스도인은 행위나 공덕이 아니라 신앙에 의해 의로워지고, 이렇게 얻은 신앙이 사람을 자유롭게 만든다. 이 자유는 정치적 사회적 자유가 아니라 내면적이고 영적인 자유를 뜻한다. 믿음에 의한 자유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만물의 주이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고 모든 자를 섬겨야 하는 존재이다.
이처럼 이 세 편의 논문은 개신교 종교개혁을 위한 하나의 탄탄한 격문이다. 로마교회의 타락을 지적하면서 자국민의 올바른 리더십과 역할을 강조한 루터는, 중세가톨릭교회의 핵심인 7성례에 도전했고, 믿음과 자유만이 진정한 기독교인의 신앙과 삶을 형성할 수 있다는 새로운 그림과 해석학을 그려 내었다.
이 책의 의도
키아츠는 1520년 가을에 나온 루터의 세 논문에 대한 한국어 번역작업을 오래전부터 준비해왔다. 원래는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던 2017년에 이 책들을 발간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의미 있는 해에 종교개혁주일 직전에 한국의 대표적 대형교회인 명성교회가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담임목사직을 물려주는 일명 부자세습을 밝히면서 한국교회에 찬물을 끼얹었다.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의 단어를 빌리면, 부자세습은 성직매매, 즉 시모니(Simony)였다. 이후에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나 이번에 드디어 세권을 함께 발간하게 되었다.
우리는 독자들이 본문 안으로 들어가 이 글을 차분히 읽어 내려갔으면 한다. 라틴어로 쓰인 글을 포함해 루터의 글은 대게 내용을 길게 설명하는 만연체 스타일이다. 옆집 아저씨의 구수한 이야기처럼 들리는 루터의 설명은 어려운 주제도 술술, 쉽게 설명해 준다. 이 세 편의 논문은 중세가톨릭교회의 가르침과 16세기 종교개혁의 인식이 어떻게 다른지, 왜 루터가 변화와 개혁의 횃불을 들 수밖에 없었는지를 잘 보여줄 것이다.
그러면서 본인이 편집작업을 하면서 느꼈던 당시 상황과 21세기 한국기독교의 상황이 오버랩 되는 것을 독자들이 느끼기를 소망한다. 부자세습과 건축에의 몰두와 값싼 '입-종교'가 되어버린 한국기독교의 변화와 개혁의 전환점을 독자들이 마음과 양심 속 깊은 곳에서 느끼기를 소원한다. 하나님과 예수는 여전히 믿어야겠는데, 지금의 상황이 절망적이어서 고민하는 한국의 신실한 기독교인들이 당시와 같은 또 하나의 전환점을 이 책을 통해 만들어 가기를 가슴 깊이 절절히 바란다. 독자들이 한문단 한문단 자잘한 구절에 집착하기보다는 세 편이 크게 그려내는 시대 그림을 파악해 낼 수 있었으면 한다. 그래야만 이 책을 통해 후기 기독교사회에서 허우적거리는 한국교회에 대한 대안적 그림들이 솟아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루터의 입을 빌려, 중세에 한국교회에 도전하는 글 속으로 들어가 보자.
"그리스도인은 그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이웃 안에서 사는 사람이다. 신앙으로 주 안에서 살고 사랑으로 이웃 안에서 산다.
신앙을 통해 하나님에게 이르며, 사랑을 통해 하나님에게서 자신을 낮추어 이웃에게 이른다. 이것이 참된 영적인 그리스도의 자유이다."
2021년 3월
김재현 키아츠 원장
우리가 루터를 기억해야 할 이유
루터의 종교개혁과 한국의 개신교
16세기 초에 독일의 작은 도시 비텐베르크(Wittenberg)를 중심으로 시작된 종교개혁은 500여 년 후 지구의 거의 반대편에 위치한 한국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16세기 다양한 흐름의 개신교 종교개혁이 왕성하게 일어났던 유럽 기독교가 21세기 들어 쇠퇴해진 반면에 20세기 기록적인 교회 성장을 보여준 한국기독교는 유독 강한 개신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기독교는 개신교의 대표주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와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 중에서 칼뱅의 영향력을 더 크게 보여주지만, 루터의 핵심교리와 칼뱅의 신학이 혼용되어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특히 루터가 주장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는 한국개신교 신앙의 핵심적인 지침이 되어 왔고, 심지어 고백적 믿음이 종종 삶의 행위를 능가해 작동할 때가 많았다. 매년 10월 마지막 주에 거의 모든 한국 교회가 기념하는 종교개혁주일에도 루터의 이름과 95개 조문과 '이신칭의'는 여전히 유효하게 간주되고 있다.
다만, 칼뱅주의가 강한 한국기독교가 16세기 종교개혁에 있어서 1세대 루터와 2세대 칼뱅의 시대적 역사적 차이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주어진 과제와 방법이 달랐고, 상황과 시급성과 기반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
루터가 보여준 응집된 변화의 힘
루터의 종교개혁을 단순히 16세기에 일어난 하나의 종교적인 사건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중세 말기에 고전연구로 시작된 인문주의와 새로운 세계관과 인식론을 문화로 꽃피운 르네상스에 기초해 일어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과 같은 종교 지평의 변혁 사건이었다. 보름스(Worms)공원에 자리한 루터의 동료 그룹 동상들이 보여주듯이, 새로운 세계관으로 무장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학자들의 축적된 연구와 협력이 없었더라면 루터의 종교개혁은 그처럼 강력한 시대의 무기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또한 독일의 역사적 운명과 민족성을 일깨우는 과정과 깊게 연결되었다. 독일은 당시 프랑스나 영국이나 스페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민족적 응집력과 정치력이 약했다. 이런 상황에 루터의 신학적 깃발은 로마교황이 독일을 재정적으로 어렵게 만드는 일에 반대할 명분을 제공했고, 그의 독일어 성경 번역은 독일 민족의 자의식을 깨우는 데 크게 일조했다. 이와 함께 중세독일교회의 출발점인 마인츠(Mainz)에서 발전된 구텐베르크의 활자술은 오늘날의 종이신문에서 SNS 매체로의 혁명적 충격만큼이나 큰 변화를 유럽 전체에 가져다주었다. 루터는 이런 시대적 매체의 힘을 가장 깊이 느끼고 활용한 인물이었다.
루터는 이처럼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인물이었고, 천년 이상을 지배하던 중세유럽기독교의 세계관을 뒤흔든 사람이었다. 루터는 시대 전환의 비등점을 가장 잘 표현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1517년 비텐베르크 95개조 반박문에서
1529년 슈페이어(Speyer)회의까지
16세기 종교개혁과 관련해 루터의 인생 중에 가장 급박하고 흥미진진한 시기를 본인은 1517년부터 1529년으로 보고 있다. 1517년에 교황 레오 10세(Leo X, 재위 1513-1521)가 성 베드로 성당의 건축기금을 위해 대사면을 선포했고, 면벌부의 남발로 인한 개혁가들의 주장은 그 해 10월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때 촉발된 긴장과 논란은 1529년 슈페이어(Speyer)회의에서 14개의 중요 도시들이 루터를 비롯한 개혁가들을 지지하면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는 명칭과 함께 종교개혁가들이 안정된 종교적 실체로 자리하게 되었다.
기간은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과 교황, 선제후 프레데릭 3세(Friedrich III)와 신성로마제국 황제들(막시밀리안과 샤를 5세) 사이에 긴장된 순간들이 쉼 없이 이어졌다. 각 진영을 대표한 최고의 학자와 수사학자와 정치가와 신학자들이 동원되었고, 시대와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논쟁과 투쟁이 지속되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이 그저 정쟁이나 논쟁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종교개혁가들은 머지않아 개신교라 불릴 자신들의 새로운 흐름에 정체성과 신학적 고백과 학문적 논리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1517년에 교황청의 대사면발표와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종교적 지형을 가져올 것이라고는 누구도 쉽게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루터와 필립 멜랑히톤(Phillipp Melanchton)과 요한 에크(Johann Eck)가 1519년에 벌인 라이프치히 논쟁(Leipzig Debate)은 서로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1520년 6월에 교황은 루터를 정죄했고, 루터는 3편의 논문으로 자신이 생각한 종교개혁의 원인과 핵심을 공개적으로 제안하고 발표했다. 1521년 카를 5세가 주재한 보름스의회에서 우리는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도우소서, 아멘!"(Ich stehe hier, helfe mir, Gott)이라는 유명한 구절 속에서 루터의 결기를 느낄 수 있다. 이후의 수많은 논쟁은 1529년 터키에 대적하기 위해 군주들의 도움을 요청해야 했던 황제가 소집한 슈페이어회의에서 주요 도시들이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을 지지하면서, 새로운 지평을 맞게 되었다. 이제 굳이 루터가 몸소 횃불을 들고 외롭게 외칠 필요가 없는 상황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1520년, 교황청의 정죄에서 루터의 책을 통한 본격적인 저항으로
1517년 만 34세의 나이에 95개 논제로 담대하게 횃불을 들고 난 후 3년 동안이 루터의 일생 중에 가장 분주했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교황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지역 군주들, 그리고 추기경들을 비롯한 교황청의 공식 라인을 통해 루터의 입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의도대로 되지 않자, 교황은 1520년 6월 15일에 루터를 정죄(Ex surge Domine)해 버렸다. 그리고 그해 8월부터 11월까지 루터는 세편의 기념비적인 논문을 통해 종교개혁의 진심을 잘 담아 내었다.
[독일의 그리스도인 귀족들에게](1520년 8월), 독일어
종교개혁 초기의 상황을 되돌아보면서 교회 내부의 타락, 교회 권위의 남용, 부패한 관행들을 로마교회가 개혁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이제 독일의 귀족과 군주들이 나서 줄 것을 요청하는 논문이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해야 할 이유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면서, 독일 귀족들이 교회개혁에 역할을 해 줄 것과 신성로마제국의 구조에 도전을 줄 것을 요청했다.
[교회의 바빌론 유수](1520년 10월), 독일어와 라틴어
이스라엘 민족의 바빌론 유수를 상기시키듯 교회의 바빌론 포로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가톨릭교회의 성례전을 주로 다루었다. 루터는 교회의 전통적인 7가지 성례전에 도전하면서 세례와 성만찬 만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했다. 7성례의 종류 축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례를 받고 성찬에 기계적이고 수동적으로 참여하는 대신, 이 과정에서 참여자의 믿음의 역할이라고 루터는 강조했다. 성례는 거룩한 약속이며, 믿음 안에서만 성례전에 참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1520년 11월), 독일어와 라틴어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장 잘 보여준 논문이다. 그리스도인은 행위나 공덕이 아니라 신앙에 의해 의로워지고, 이렇게 얻은 신앙이 사람을 자유롭게 만든다. 이 자유는 정치적 사회적 자유가 아니라 내면적이고 영적인 자유를 뜻한다. 믿음에 의한 자유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만물의 주이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고 모든 자를 섬겨야 하는 존재이다.
이처럼 이 세 편의 논문은 개신교 종교개혁을 위한 하나의 탄탄한 격문이다. 로마교회의 타락을 지적하면서 자국민의 올바른 리더십과 역할을 강조한 루터는, 중세가톨릭교회의 핵심인 7성례에 도전했고, 믿음과 자유만이 진정한 기독교인의 신앙과 삶을 형성할 수 있다는 새로운 그림과 해석학을 그려 내었다.
이 책의 의도
키아츠는 1520년 가을에 나온 루터의 세 논문에 대한 한국어 번역작업을 오래전부터 준비해왔다. 원래는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던 2017년에 이 책들을 발간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의미 있는 해에 종교개혁주일 직전에 한국의 대표적 대형교회인 명성교회가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담임목사직을 물려주는 일명 부자세습을 밝히면서 한국교회에 찬물을 끼얹었다.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의 단어를 빌리면, 부자세습은 성직매매, 즉 시모니(Simony)였다. 이후에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나 이번에 드디어 세권을 함께 발간하게 되었다.
우리는 독자들이 본문 안으로 들어가 이 글을 차분히 읽어 내려갔으면 한다. 라틴어로 쓰인 글을 포함해 루터의 글은 대게 내용을 길게 설명하는 만연체 스타일이다. 옆집 아저씨의 구수한 이야기처럼 들리는 루터의 설명은 어려운 주제도 술술, 쉽게 설명해 준다. 이 세 편의 논문은 중세가톨릭교회의 가르침과 16세기 종교개혁의 인식이 어떻게 다른지, 왜 루터가 변화와 개혁의 횃불을 들 수밖에 없었는지를 잘 보여줄 것이다.
그러면서 본인이 편집작업을 하면서 느꼈던 당시 상황과 21세기 한국기독교의 상황이 오버랩 되는 것을 독자들이 느끼기를 소망한다. 부자세습과 건축에의 몰두와 값싼 '입-종교'가 되어버린 한국기독교의 변화와 개혁의 전환점을 독자들이 마음과 양심 속 깊은 곳에서 느끼기를 소원한다. 하나님과 예수는 여전히 믿어야겠는데, 지금의 상황이 절망적이어서 고민하는 한국의 신실한 기독교인들이 당시와 같은 또 하나의 전환점을 이 책을 통해 만들어 가기를 가슴 깊이 절절히 바란다. 독자들이 한문단 한문단 자잘한 구절에 집착하기보다는 세 편이 크게 그려내는 시대 그림을 파악해 낼 수 있었으면 한다. 그래야만 이 책을 통해 후기 기독교사회에서 허우적거리는 한국교회에 대한 대안적 그림들이 솟아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루터의 입을 빌려, 중세에 한국교회에 도전하는 글 속으로 들어가 보자.
"그리스도인은 그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이웃 안에서 사는 사람이다. 신앙으로 주 안에서 살고 사랑으로 이웃 안에서 산다.
신앙을 통해 하나님에게 이르며, 사랑을 통해 하나님에게서 자신을 낮추어 이웃에게 이른다. 이것이 참된 영적인 그리스도의 자유이다."
2021년 3월
김재현 키아츠 원장
'47.기독교역사 (연구>책소개) > 3.종교개혁의시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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