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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연암 박지원은 조선 정조 때 학자로 청나라를 다녀와서 열하일기를 저술하였다. 그가 주장한 북학론과 실학의 실용성이 이 열하일기에 유려한 필체와 거침 없는 문장으로 나타나 있다. 열하일기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한 여행기라기 보다는 당시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총망라한 백과사전의 축소판이라고 할 만한 지식의 결정체이다. 이러한 광범위한 지식의 결과가 정약용이라는 위대한 지식인의 오로지 부국강병에 대한 간절한 애국정신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당시 사회에서 그 내용의 파격성에 찬반의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에 처음부터 정본이 없이 다양한 필사본들이 유포되었다. 문집이 처음 초록형태로 발간된 것은 연암 사후 100년이 넘은 1900년대 초반 김만식 등에 의해서였다. 연암의 손자 박규수가 우의정을 지냈음에도 할아버지의 문집을 간행하지 못했다는 것은, 당시 사회에서 열하일기의 개혁성과 진보성을 짐작케한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당시 사회에서 그 내용의 파격성에 찬반의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에 처음부터 정본이 없이 다양한 필사본들이 유포되었다. 문집이 처음 초록형태로 발간된 것은 연암 사후 100년이 넘은 1900년대 초반 김만식 등에 의해서였다. 연암의 손자 박규수가 우의정을 지냈음에도 할아버지의 문집을 간행하지 못했다는 것은, 당시 사회에서 열하일기의 개혁성과 진보성을 짐작케한다.
목차
압록강을 건너며
심양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
말타고 지나가듯 쓴 수필
산해관에서 북경까지의 여행
만리장성 북쪽 변방을 가다
태학관에 묵으며
북경으로 되돌아오는 길에서의 견문
열하에서 만난 중국 벗들
라마교에 대한 문답
반선의 역사적 내력
활불 반선을 만남
열하에서의 이러저러한 기록
천하의 형세를 살피다
양고기 먹는 일조차 잊게 한 음악 이야기
곡정 왕민호와 나눈 필담
산장에서 쓴 여러 편의 글들
요술놀이 구경
더위를 식히며 시를 논하다
고북구 장성 밖에서 들은 기이한 이야기
여관 옥갑에서 묵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북경 관광
공자 사당을 참배하고
쪽지에 쓴 짧은 기록들
동란재에서 쓴 글
이러저러한 의약 처방 몇 가지
박지원의 생애와 사상
심양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
말타고 지나가듯 쓴 수필
산해관에서 북경까지의 여행
만리장성 북쪽 변방을 가다
태학관에 묵으며
북경으로 되돌아오는 길에서의 견문
열하에서 만난 중국 벗들
라마교에 대한 문답
반선의 역사적 내력
활불 반선을 만남
열하에서의 이러저러한 기록
천하의 형세를 살피다
양고기 먹는 일조차 잊게 한 음악 이야기
곡정 왕민호와 나눈 필담
산장에서 쓴 여러 편의 글들
요술놀이 구경
더위를 식히며 시를 논하다
고북구 장성 밖에서 들은 기이한 이야기
여관 옥갑에서 묵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북경 관광
공자 사당을 참배하고
쪽지에 쓴 짧은 기록들
동란재에서 쓴 글
이러저러한 의약 처방 몇 가지
박지원의 생애와 사상
출판사 리뷰
연경 기행문학의 백미: 한국고전의 명저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조선 정조 때 학자로 청나라를 다녀와서 기행문집 열하일기를 저술하였다. 그는 이 열하일기에서 유려한 문장과 진보적 사상으로 이름을 널리 떨쳤으며, 북학론을 주장하고 이용후생의 실학을 강조하였다.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제목만 얼핏 보아 일종의 여행일기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 책은 결코 흔히 쓰는 개념으로서의 일기나 기행문이 아니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단지 기행문체를 이용하여 자신의 작품들을 종합하는 편성 체계로 삼았을 뿐이기 때문이다. 연암이 이 열하일기 속에 수록한 작품들의 형식은 오늘로 보아 기행, 평론, 소설, 시, 르포, 실화문학, 펠레톤, 수필, 스케치 등 동서고금의 여러 문학적 장르가 있는 대로 구사되고 있다. 또한 그 내용 역시 정치, 경제, 천문, 지리, 철학, 역사, 사회, 문화, 언어, 문학, 예술, 종교, 과학, 기술, 의학, 군사 등 백과사전의 축소판이라 할 정도로 광범위한 주제를 총망라하였다. 연암이 열하일기에서 다룬, 이처럼 다양한 형식과 광범위한 내용은 결코 세속적인 박물군자의 호기적 지식자랑이거나, 현학자의 문자놀음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우리나라를 문명하고 부강하게 만들려는 애국정신의 소산이었으며, 그러한 연암의 사상은 열하일기 전편에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이러한 열하일기는 여행지에서의 견문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신문물과 북학파의 실학을 소개하고 있어 수많은 조선시대 연경 기행문학의 백미로 꼽힌다.
한국 풍자문학의 진수 ‘열하일기’
연암은 당시 봉건관료들의 온갖 악덕과 유학자들의 사대주의, 그리고 그들의 위선 및 허례에 지독한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러한 양반사회의 부패한 현상과 고루한 학풍을 타파하기 위해 이 열하일기를 통해 이를 다양한 기법으로 폭로 비판한다. 그는 한낱 음풍영월이나 관능 만족의 도구로 일삼는 그즈음 유학자들의 조류에서 벗어나, 연암 자신의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문학예술적 재능으로써 사회 발전을 막고 있는 세력의 위선과 모순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비판했던 것이다. 연암의 이러한 성격은 양반전, 광문자전(廣文者傳)등 그의 한문소설에서도 구체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그의 소설들은 대개가 그 시절 역사적 현실과 연관시킨 것들이거나 인간의 내면 세계 또는 민족문학의 맥과 상통하는 것들로 이루어지면서도 강한 풍자성을 띠고 있어서 읽는 이로 하여금 통쾌함을 느끼게 한다.
북학파 실학문학의 집대성
연암은 청나라 건륭제 7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단의 사설수행원 자격으로 청국여행을 떠난다. 그는 열하의 문인들과 사귀고, 북경의 명사들과 교유하며, 그곳의 문물·제도를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이 열하일기에 기록했다. 이 책은 1780년 6월 24일 압록강 국경을 건너는 데서부터 시작해 요동, 성경, 산해관을 거쳐 북경에 도착하고 열하로 가서, 8월 20일 다시 북경으로 돌아오기까지 두 달간 겪은 일을 날짜 순서에 따라 항목별로 적고 있다.
이 여행에서 청나라 문물과의 접촉은 연암의 사상체계에 크나큰 영향을 주어, 이를 계기로 연암은 인륜 위주의 사고에서 이용후생 위주의 사고로 전환하게 된다. 특히 그는 이 열하일기를 통해 청국여행에서 보고들은 선진문화와 선진적 산업시설 및 근대적 과학이론을 상세히 소개하면서, 이를 우리나라에 적극 도입하여 백성들의 생활에 이바지할 것을 강력하게 호소하고 있다. 연암은 귀국한 뒤 이 열하일기 저술에 온 힘을 기울였다. 열하일기는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호질·허생전 등 한문소설과 함께 중국의 풍속·제도·문물에 대한 소개와 인상, 조선의 제도·문물에 대한 비판 등이 들어 있는 문명비평서이다. 연암은 1783년 무렵에 원고를 완성했으나, 그 뒤에도 여러 차례 개작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리하여 열하일기의 최종적인 수습은 연암이 죽은 뒤 1820년대 초반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구적인 연암문학
열하일기는 특히 자유분방하고도 세속적인 문체와, 그즈음 국내에 널리 퍼져 있던 반청의식 때문에 찬반의 수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고루하고 보수적인 소화의식(小華意識)에 젖어 있는 지식인들이 열하일기를 거세게 비난하자, 정조 임금도 1792년에는 연암에게 반성문을 지어 바치라는 처분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즈음 연암은 양반사회에 대한 비판과 부패의 폭로가 더욱더 원숙해졌고, 사회모순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여 드러냈으며, 이용후생의 실학을 대성하기에 이르렀다. 열하일기는 처음부터 명확한 정본 없이 여러 필사본들이 많이 유포되어 그 이본들이 다양하다. 열하일기를 비롯해 연암사상이 잘 반영되어 있는 저서들은 모두 그쟀 문집인 연암집에 수록되어 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그 시대의 사고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기에, 실제로 그의 문집이 초록 형태로 김만식 등에 의해 서울에서 공식적으로 처음 간행된 것은 1900년에 이르러서였다. 연암이 죽은 지 10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서야 연암집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 연암의 손자 박규수(1807~1876)가 우의정을 지냈으면서도, 할아버지의 문집을 간행하지 못했음은 그의 문집 내용이 그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는지 짐작케 한다. 그 뒤 열하일기의 전편 간행본으로는 1901년 김택영이 연암집 원집에 이어 간행한 연암집 속집(구활자본)에 처음 수록된다.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조선 정조 때 학자로 청나라를 다녀와서 기행문집 열하일기를 저술하였다. 그는 이 열하일기에서 유려한 문장과 진보적 사상으로 이름을 널리 떨쳤으며, 북학론을 주장하고 이용후생의 실학을 강조하였다.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제목만 얼핏 보아 일종의 여행일기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 책은 결코 흔히 쓰는 개념으로서의 일기나 기행문이 아니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단지 기행문체를 이용하여 자신의 작품들을 종합하는 편성 체계로 삼았을 뿐이기 때문이다. 연암이 이 열하일기 속에 수록한 작품들의 형식은 오늘로 보아 기행, 평론, 소설, 시, 르포, 실화문학, 펠레톤, 수필, 스케치 등 동서고금의 여러 문학적 장르가 있는 대로 구사되고 있다. 또한 그 내용 역시 정치, 경제, 천문, 지리, 철학, 역사, 사회, 문화, 언어, 문학, 예술, 종교, 과학, 기술, 의학, 군사 등 백과사전의 축소판이라 할 정도로 광범위한 주제를 총망라하였다. 연암이 열하일기에서 다룬, 이처럼 다양한 형식과 광범위한 내용은 결코 세속적인 박물군자의 호기적 지식자랑이거나, 현학자의 문자놀음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우리나라를 문명하고 부강하게 만들려는 애국정신의 소산이었으며, 그러한 연암의 사상은 열하일기 전편에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이러한 열하일기는 여행지에서의 견문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신문물과 북학파의 실학을 소개하고 있어 수많은 조선시대 연경 기행문학의 백미로 꼽힌다.
한국 풍자문학의 진수 ‘열하일기’
연암은 당시 봉건관료들의 온갖 악덕과 유학자들의 사대주의, 그리고 그들의 위선 및 허례에 지독한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러한 양반사회의 부패한 현상과 고루한 학풍을 타파하기 위해 이 열하일기를 통해 이를 다양한 기법으로 폭로 비판한다. 그는 한낱 음풍영월이나 관능 만족의 도구로 일삼는 그즈음 유학자들의 조류에서 벗어나, 연암 자신의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문학예술적 재능으로써 사회 발전을 막고 있는 세력의 위선과 모순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비판했던 것이다. 연암의 이러한 성격은 양반전, 광문자전(廣文者傳)등 그의 한문소설에서도 구체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그의 소설들은 대개가 그 시절 역사적 현실과 연관시킨 것들이거나 인간의 내면 세계 또는 민족문학의 맥과 상통하는 것들로 이루어지면서도 강한 풍자성을 띠고 있어서 읽는 이로 하여금 통쾌함을 느끼게 한다.
북학파 실학문학의 집대성
연암은 청나라 건륭제 7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단의 사설수행원 자격으로 청국여행을 떠난다. 그는 열하의 문인들과 사귀고, 북경의 명사들과 교유하며, 그곳의 문물·제도를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이 열하일기에 기록했다. 이 책은 1780년 6월 24일 압록강 국경을 건너는 데서부터 시작해 요동, 성경, 산해관을 거쳐 북경에 도착하고 열하로 가서, 8월 20일 다시 북경으로 돌아오기까지 두 달간 겪은 일을 날짜 순서에 따라 항목별로 적고 있다.
이 여행에서 청나라 문물과의 접촉은 연암의 사상체계에 크나큰 영향을 주어, 이를 계기로 연암은 인륜 위주의 사고에서 이용후생 위주의 사고로 전환하게 된다. 특히 그는 이 열하일기를 통해 청국여행에서 보고들은 선진문화와 선진적 산업시설 및 근대적 과학이론을 상세히 소개하면서, 이를 우리나라에 적극 도입하여 백성들의 생활에 이바지할 것을 강력하게 호소하고 있다. 연암은 귀국한 뒤 이 열하일기 저술에 온 힘을 기울였다. 열하일기는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호질·허생전 등 한문소설과 함께 중국의 풍속·제도·문물에 대한 소개와 인상, 조선의 제도·문물에 대한 비판 등이 들어 있는 문명비평서이다. 연암은 1783년 무렵에 원고를 완성했으나, 그 뒤에도 여러 차례 개작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리하여 열하일기의 최종적인 수습은 연암이 죽은 뒤 1820년대 초반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구적인 연암문학
열하일기는 특히 자유분방하고도 세속적인 문체와, 그즈음 국내에 널리 퍼져 있던 반청의식 때문에 찬반의 수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고루하고 보수적인 소화의식(小華意識)에 젖어 있는 지식인들이 열하일기를 거세게 비난하자, 정조 임금도 1792년에는 연암에게 반성문을 지어 바치라는 처분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즈음 연암은 양반사회에 대한 비판과 부패의 폭로가 더욱더 원숙해졌고, 사회모순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여 드러냈으며, 이용후생의 실학을 대성하기에 이르렀다. 열하일기는 처음부터 명확한 정본 없이 여러 필사본들이 많이 유포되어 그 이본들이 다양하다. 열하일기를 비롯해 연암사상이 잘 반영되어 있는 저서들은 모두 그쟀 문집인 연암집에 수록되어 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그 시대의 사고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기에, 실제로 그의 문집이 초록 형태로 김만식 등에 의해 서울에서 공식적으로 처음 간행된 것은 1900년에 이르러서였다. 연암이 죽은 지 10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서야 연암집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 연암의 손자 박규수(1807~1876)가 우의정을 지냈으면서도, 할아버지의 문집을 간행하지 못했음은 그의 문집 내용이 그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는지 짐작케 한다. 그 뒤 열하일기의 전편 간행본으로는 1901년 김택영이 연암집 원집에 이어 간행한 연암집 속집(구활자본)에 처음 수록된다.
'53.문학의 이해 (독서>책소개) > 4.한국고전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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