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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머리말
1부
1장 식민지/제국의 신흥 콘체른
2장 흥남의 발명
2부
3장 식민지/제국의 그라운드 제로란 무엇인가
4장 미나마타병의 식민주의적 원천
5장 자본의 도시, 노동의 도시
6장 “식민지는 천국이었다”
3부
7장 식민지/제국의 언어-법-미디어 체제에서 글쓰기―이북명의 노동소설들
8장 식민지/제국의 언더그라운드
9장 노동하는 신체의 해방 전/후
에필로그: 언더그라운드가 말하는 방식―정우상의 「목소리」를 통해
주
찾아보기
1부
1장 식민지/제국의 신흥 콘체른
2장 흥남의 발명
2부
3장 식민지/제국의 그라운드 제로란 무엇인가
4장 미나마타병의 식민주의적 원천
5장 자본의 도시, 노동의 도시
6장 “식민지는 천국이었다”
3부
7장 식민지/제국의 언어-법-미디어 체제에서 글쓰기―이북명의 노동소설들
8장 식민지/제국의 언더그라운드
9장 노동하는 신체의 해방 전/후
에필로그: 언더그라운드가 말하는 방식―정우상의 「목소리」를 통해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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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일본질소를 중핵으로 하는 ‘일질日窒콘체른’, 또는 그 창립자인 노구치 시타가우野口遵(1873~1944)의 이름을 따 ‘노구치 콘체른’으로 더 많이 알려진 이 식민지/제국 일본의 신흥재벌은 일본의 영토 확장과 더불어 비약적으로 성장해 간 전형적인 제국주의 기업이었다.
--- p.27
‘식민주의적 축적’이란 ‘식민지/제국 질서를 반복적으로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을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의 신흥재벌로서 노구치 콘체른이 형성되는 과정을 검토하되, 주로 제국주의적 자본-국가 복합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주목할 것이다. 이 복합체는 자기 재생산의 원천으로서 식민지 없이는 형성될 수도 지속될 수도 없으며, 또한 이 복합체의 자기 재생산은 그 자체로 식민지/제국 질서의 재생산이기도 하다.
--- p.28
일본질소로 통합된 1908년부터 발전소의 전력과 카바이드 제조를 결합해 사업을 전개했던 노구치는 더 많은 카바이드 생산을 위해 수력발전소를 추가하는 방식으로 기업 규모를 키워 가면서, 비료 제조사업에 뛰어들게 된다.
--- p.36
일본질소는 1926년 1월 자신들의 전액 출자(자본금 2,000만 엔)로 조선수전을 설립하고, 이듬해인 1927년 5월에 조선질소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조선 ‘개발’에 박차를 가했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라는 유리한 조건을 십분 활용하기 위해 생산근거지를 조선으로 옮기다시피 했다.
--- p.39
조선질소 공장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흥남이라는 지명을 갖지 않았던 이 지역(함흥군 운전면 복흥리, 호남리 일대)에는 농어업을 겸한 조선인 선주민들이 200여 호의 군락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중화학공장을 건설하고자 하는 식민자들의 눈에 이곳은 “미개의 처녀지”로 보일 뿐이었다.
--- p.41
식민 행정·치안 권력과 지역 유력자들의 힘을 빌린 일본질소는 1927년 초, 사택 부지 포함 전체 47만 평의 토지를 저렴하게 구입하고, 착공 후 2년 반 만인 1929년 말에 조선질소 흥남공장 1기 공사를 마무리했다. …… 1930년 1월 2일 조업 개시와 함께 본격적인 비료 생산에 돌입한다.
--- p.42
흥남은 수력발전소로부터 저렴하고 풍부한 전기를 송전받기에 상대적으로 가까운 위치에 있을 뿐만 아니라 동해를 통해 일본 및 해외로 비료의 수송 및 수출을 용이하게 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또한 관북의 산악 지방은 다양한 공업원료로 활용될 수 있는 지하자원의 풍부한 매장지이기도 했다.
--- p.45
일본질소는, 화학비료 생산을 통해 일제의 산미증식계획 실현에 기여했고, 전시기에는 화약과 항공기 연료 등 군수물품 생산에 집중하며 병참기지로서의 기능에 충실했을 뿐만 아니라, 인구 또는 노동력의 이동 및 관리의 주요 요인이자 장치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역시 그 ‘국책적 결합’의 성격을 강하게 드러낸다.
--- p.46
흥남면은 공장 설비 및 부지의 확장과 함께 1년 만에 흥남읍으로 승격되는데, 의미심장하게도 그 초대 읍장은 일본질소의 대표인 노구치 자신이었다. 노구치와 일본질소는 주재소가 경찰서로 확장·개편되는 데 개입했고, 조선질소의 간부들은 읍 의회와 학교조합 의원 등으로 배치되었다.
--- p.57
황산, 유안, 암모니아 등 공장 내부의 생산과정에서 파생되는 유독성 물질들은 노동자들의 신체를 파괴했고, 가공되고 버려지는, 연소되고 배출되는, ‘쓰레기’가 된 자연은 흥남 일대에 원인불명의 질병이 창궐하게 만들곤 했다.
--- p.62
‘조선수당’을 비롯해 각종 수당을 받는 내지인 노동자와 조선인 노동자 사이에 약 2배가량의 임금 격차가 있었으며, 조선인 노동자들이 기술적 노동으로부터 배제된 채 “일본인의 보완적 노동으로서 육체소모적인노동”에 종사당했다는 사실보다 더 의미심장한 것은, 작업장 내 직급에 따른 엄격한 서열구조와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일상적 ‘노무관리’가 민족의 계급화 또는 계급의 민족화를 고착시켜 갔다는 점이다.
--- p.63
조선질소공장의 노동자는 콘베이어 시스템을 도입해 인건비를 삭감하고자 하는 회사 측의 이른바 ‘산업합리화’라는 명분 아래 언제든 해고되어 공장으로부터 추방될 수 있었다. 특히 공장의 유해한 환경으로 인해 질병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력의 ‘정상적인 사용’이 불가능한 경우, 그리고 회사 측에 대항해 노동자들의 요구를 단합된 목소리로 수렴하려는 ‘불온한’ 조직활동을 도모한 경우는 우선적으로 ‘산업합리화’의 타깃이 되었다.
--- p.65
「질소비료공장」의 문길이 공장생활 4년의 대가로 폐결핵을 얻은 것처럼 「출근정지」의 창수도 3년 만에 폐결핵에 걸린다. 「암모니아 탕크」의 동제는 탱크 청소작업 중 질식하고, 「기초공사장」의 봉원은 기중기의 핸들에 가슴을 가격당하며, 「출근정지」의 창수, 응호, 성삼은 암모니아 탱크의 폭발로 형체도 없이 산화되고 만다. 이들은 “전쟁할 때의 하졸下卒과 같이 공포 속에서” 노동하고 있다.
--- p.67
유독가스와 각종 미세 화학물질들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호흡기 질환이 빈번히 발생한 것은 물론, 공업단지 형성 이후 5년여를 지난 시점부터 흥남 일대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과 전염병이 창궐하여 흥남은 “전염병 도시” 또는 “병마의 도시”로 불릴 정도였다.
--- p.68
인구의 거의 대부분이 노동자와 그 가족으로서 그들의 생계가 공장에 긴박되어 있는 도시, 기업이 노동자에게 ‘구매권’을 판매해 공장 내에서 쌀, 의복, 잡화 등 생필품을 구입하게 만드는 곳, 자본가가 출생과 사망신고서를 받는 곳, 경찰이 임금협상 테이블에서 자본가의 대리인을 자처하는 곳, 자본-국가 콤비나트가 구축된 흥남은 공장으로부터 발원하는 하나의 시선에 의해 포착된다.
--- p.69
이 책에서는 1920년대 중반 이후 제국 자본의 식민지 개발과 함께 형성된 ‘자본-국가 복합체’의 역사적·상징적 장소로서 흥남을 식민지/제국의 그라운드 제로로 명명하고자 한다.
--- p.81
함흥이 고향인 주인규는 나운규의 「아리랑」(1926)과 「풍운아」(1926), 심훈 제작의 「먼동이 틀 때」(1927) 등에 출현한 영화배우로 …… 1930년을 전후한 시점에 조선질소 흥남공장의 노동자가 되었고, 공장 내에서스트라이크를 조직하다 해고되었으며 …… 동생인 주선규, 주인선 등과 함께 「노동자신문」이라는 지하인쇄물을 제작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 프로핀테른 계열 태평양노동조합 비서부의 「10월 서신」을 비밀리에 반입하기도 한다.
--- p.82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본인 관리자로부터 언제나 ‘게으르다’, ‘책임감이 없다’, ‘향상심이 없다’는 평가를 받으며 비숙련 단순작업에 배치되곤 했다.
--- p.87
감옥 같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공장의 출입구는 주로 일본 헌병 출신자들로 이루어진 경비들이 감시하고 있었고, 작업장 내에서도 감독관의 폭력이 항존했지만, …… 적어도 중일전쟁 발발 이전까지는 매해 조직운동 사건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 p.89
일본질소는 ‘공장법’의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 식민지에 집중적으로 자본을 투여하고 ‘내지’보다 월등히 유리한 착취환경에서 과감한 기술 실험을 행함으로써, 흥남을 미나마타보다 뒤늦게 개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나마타병의 원천을 발견할 수 있는 장소로 만들었다. 질소비료공장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한 1930년 이후로 산업공해에 해당되거나 그로 의심되는 현상들이 부단히 나타난 바 있다.
--- p.101
함흥군수, 함흥경찰서장 등이 직접 나서 땅을 소유한 주민들을 호남리 구장 집으로 모이게 한 후 경찰 수십 명으로 집을 에워싼 채 토지 매매 계약을 강요하기도 했으며, 역시 경찰을 동원해 토지 매수조건에 강하게 반대하던 주민들을 폭행, 구금하는 등, 일본질소의 공장부지 매입과정에서 식민지 행정·치안 권력은 거의 행동대 역할을 수행했다.
--- p.103
고향과 삶의 터전에서 뿌리 뽑힌 이들은 일본질소가 지정해 놓은 구룡리로 이주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 구룡리는 저지대에 도로도 없고 어선이 정박할 만한 항구도 없으며 음료수도 구할 수 없는 곳이라며 주민들이 이주에 반대했을 때, 회사와 식민 행정 당국은 저지대를 매립해 주거 지역을 조성해 주고 500간 이상의 축항을 건설해 주고 6간 폭의 도로를 내고 우물 세 개를 제공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공장부지 매입 계약이 완료되자 이 약속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 p.104
한설야의 소설 『과도기』는 바로 이렇게 구룡리로 추방당한 이들의 삶이 그 후 어떤 형태로 전환되는가를 조명하고 있는데, 주인공 창선이 결국 “상투 짜고 감발 치고 부삽 들고 콘크리트 반죽하는” 노동자가 되어 자신들이 쫓겨 나온 고향 땅에 세워진 조선질소비료 흥남공장으로 들어가게 되는 결말은 의미심장하다.
--- p.104
조선질소 역시 일제 말 전시체제기에는 폭약, 항공연료 등의 생산에 더 비중을 둔 군수산업체로 전환되었다. 일본인 직공 다수가 징병되는 등의 사유로 노동력 부족 사태가 발생했을 때는 총독부가 노무동원령을 내려 전국에서 농민, 남녀 학생 등을 강제동원하기도 했으며, 전쟁 막바지에는 심지어 수감자와 전쟁포로까지 동원했다.
--- p.114
1931년 말 시점에 이루어진 조사에 따르면, 조선의 화학공업에 종사하는 ‘내지인’ 노동자가 조선 내 모든 산업 분야 ‘내지인’ 노동자 수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 이렇게 볼 때, 식민지/제국 ‘전기·화학공업의 유토피아’인 흥남은 ‘내지’가 연장된 장소였다고 할 수 있다. 공장 안에서는 일본어만을 사용해야 했고, 조선인과 중국인은 기술적 노동으로부터 배제된 채 “일본인의 보완적 노동으로서 육체소모적인 노동”에 배치되었다.
--- p.125
총독부와 식민 본국 행정권력의 인구통제 정책으로 인해 ‘내지’ 도항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흥남으로 일자리를 찾아오는 조선인들이 증가했고, 수요를 넘는 노동력들은 공장 주변에서 이른바 ‘산업예비군’을 형성하고 있었다.
--- p.130
전쟁이 말기에 접어듦에 따라 일본인 노동자만이 아니라 조선인 모집도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농촌에서 조선인을 강제적으로 공장에 끌고 오는 일이 행해졌다. 그리고 처음으로 행해진 것이 산업보국대産業報國隊였다. 약칭으로 산보대라고 말했다.
--- p.134
조선인 노동자를 소나 말처럼 생각하고 사용하라는 노구치의 전언과 함께, 노무관리라는 명목으로 일상적인 폭력이 구사되곤 했던 것이다.
--- p.137
조선질소비료공장 주변으로 사원, 준사원, 고원雇員 등 직급에 따라 구역이 분할된 사택과 기숙사, 합숙소 등이 배치되어 있던 흥남의 식민자 공간은 흡사 거대한 병영과도 같은 공동생활 공간을 구성하고 있었다. …… 흥남공장 설립 초창기에는 일본인 사택에 전기와 수도가 무료로 제공되었다. 조선질소의 간부들과 고급기술자들의 생활은 일반 공장 직공 및 고용 노동자들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윤택했다. 연구 및 작업환경, 급여, 복지 등 모든 측면에서 이들에게 흥남은 최고의 환경이었다.
--- p.149
보통 오후 5시가 되기 전에 근무를 끝냈고, 심지어 여름에는 오후 4시 이전에 퇴근할 수 있었다. …… 저녁 식사 전에도 테니스 등의 운동이나 독서를 즐길 수 있었고, 저녁 식사 후에는 각자 취미생활을 하거나 천기리나 함흥의 카페, 술집, 유곽 등을 찾기도 했다. 독신 사원은 대체로 기숙사에서 저렴하게 숙식을 해결했는데, 취사는 물론 청소, 세탁 등 가사와 관련된 모든 일을 고용된 하녀들에게 맡겼기에 특히 많은 여유시간을 누릴 수 있었다.
--- p.150
미나마타 공장에서 일급 1엔 60전을 받던 노동자가 흥남공장으로 오자마자 조선수당 등을 포함해 2엔 60전을 받았고, 물가까지 저렴해 “귀족생활大名暮らし”을 누릴 수 있었다. 연 2회 이루어진 승급에도 차별적 기준이 적용되어 일본인 노동자와 조선인 노동자 사이의 임금격차는 경력이 쌓일수록 더욱 벌어졌다.
--- p.163
이소가야 스에지는 1932년 이른바 ‘제2차 태평양노동조합 사건’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인물이다. 1931년의 ‘제1차 태평양노동조합 사건’ 때도 흥남공장 직공인 바바 마사오馬場正雄와 모리타 데쓰로守田哲?가 연루되어 각각 징역 4년과 2년에 처해졌던 것처럼,
--- p.167
함흥고등보통학교를 다니던 시절부터 조선과 일본의 좌익 작가들의 문학을 찾아 읽으며 작가에 뜻을 두고 있던 이북명은 1927년 졸업 후 조선질소 흥남공장 유안직장 노동자로 일하며 공장 경험을 투사한 소설을 습작하다가, 동향 출신의 카프 작가 한설야를 만나 그의 문학 지도를 받고 「질소비료공장」을 발표하며 “‘조선문단’의 말석”에 들어가게 되었다.
--- p.177
공장 가동이 시작된 1930년대 초반부터 흥남에서는 프로핀테른(적색노동조합 인터내셔널)과 범태평양노동조합의 영향하에 적색노조를 건설하려는 지하활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그중에서도 1932년 5월 메이데이를 대비한 일제 경찰의 예비검속으로 그 활동의 실마리가 드러나 전체 500여 명이 검거되며 식민지 미디어에 대서특필되었던 사건이 이른바 ‘제2차 태평양노조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때 검거된 인물 중에 주인규·주선규·주인선 남매가 있었다.
--- p.27
‘식민주의적 축적’이란 ‘식민지/제국 질서를 반복적으로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을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의 신흥재벌로서 노구치 콘체른이 형성되는 과정을 검토하되, 주로 제국주의적 자본-국가 복합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주목할 것이다. 이 복합체는 자기 재생산의 원천으로서 식민지 없이는 형성될 수도 지속될 수도 없으며, 또한 이 복합체의 자기 재생산은 그 자체로 식민지/제국 질서의 재생산이기도 하다.
--- p.28
일본질소로 통합된 1908년부터 발전소의 전력과 카바이드 제조를 결합해 사업을 전개했던 노구치는 더 많은 카바이드 생산을 위해 수력발전소를 추가하는 방식으로 기업 규모를 키워 가면서, 비료 제조사업에 뛰어들게 된다.
--- p.36
일본질소는 1926년 1월 자신들의 전액 출자(자본금 2,000만 엔)로 조선수전을 설립하고, 이듬해인 1927년 5월에 조선질소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조선 ‘개발’에 박차를 가했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라는 유리한 조건을 십분 활용하기 위해 생산근거지를 조선으로 옮기다시피 했다.
--- p.39
조선질소 공장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흥남이라는 지명을 갖지 않았던 이 지역(함흥군 운전면 복흥리, 호남리 일대)에는 농어업을 겸한 조선인 선주민들이 200여 호의 군락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중화학공장을 건설하고자 하는 식민자들의 눈에 이곳은 “미개의 처녀지”로 보일 뿐이었다.
--- p.41
식민 행정·치안 권력과 지역 유력자들의 힘을 빌린 일본질소는 1927년 초, 사택 부지 포함 전체 47만 평의 토지를 저렴하게 구입하고, 착공 후 2년 반 만인 1929년 말에 조선질소 흥남공장 1기 공사를 마무리했다. …… 1930년 1월 2일 조업 개시와 함께 본격적인 비료 생산에 돌입한다.
--- p.42
흥남은 수력발전소로부터 저렴하고 풍부한 전기를 송전받기에 상대적으로 가까운 위치에 있을 뿐만 아니라 동해를 통해 일본 및 해외로 비료의 수송 및 수출을 용이하게 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또한 관북의 산악 지방은 다양한 공업원료로 활용될 수 있는 지하자원의 풍부한 매장지이기도 했다.
--- p.45
일본질소는, 화학비료 생산을 통해 일제의 산미증식계획 실현에 기여했고, 전시기에는 화약과 항공기 연료 등 군수물품 생산에 집중하며 병참기지로서의 기능에 충실했을 뿐만 아니라, 인구 또는 노동력의 이동 및 관리의 주요 요인이자 장치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역시 그 ‘국책적 결합’의 성격을 강하게 드러낸다.
--- p.46
흥남면은 공장 설비 및 부지의 확장과 함께 1년 만에 흥남읍으로 승격되는데, 의미심장하게도 그 초대 읍장은 일본질소의 대표인 노구치 자신이었다. 노구치와 일본질소는 주재소가 경찰서로 확장·개편되는 데 개입했고, 조선질소의 간부들은 읍 의회와 학교조합 의원 등으로 배치되었다.
--- p.57
황산, 유안, 암모니아 등 공장 내부의 생산과정에서 파생되는 유독성 물질들은 노동자들의 신체를 파괴했고, 가공되고 버려지는, 연소되고 배출되는, ‘쓰레기’가 된 자연은 흥남 일대에 원인불명의 질병이 창궐하게 만들곤 했다.
--- p.62
‘조선수당’을 비롯해 각종 수당을 받는 내지인 노동자와 조선인 노동자 사이에 약 2배가량의 임금 격차가 있었으며, 조선인 노동자들이 기술적 노동으로부터 배제된 채 “일본인의 보완적 노동으로서 육체소모적인노동”에 종사당했다는 사실보다 더 의미심장한 것은, 작업장 내 직급에 따른 엄격한 서열구조와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일상적 ‘노무관리’가 민족의 계급화 또는 계급의 민족화를 고착시켜 갔다는 점이다.
--- p.63
조선질소공장의 노동자는 콘베이어 시스템을 도입해 인건비를 삭감하고자 하는 회사 측의 이른바 ‘산업합리화’라는 명분 아래 언제든 해고되어 공장으로부터 추방될 수 있었다. 특히 공장의 유해한 환경으로 인해 질병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력의 ‘정상적인 사용’이 불가능한 경우, 그리고 회사 측에 대항해 노동자들의 요구를 단합된 목소리로 수렴하려는 ‘불온한’ 조직활동을 도모한 경우는 우선적으로 ‘산업합리화’의 타깃이 되었다.
--- p.65
「질소비료공장」의 문길이 공장생활 4년의 대가로 폐결핵을 얻은 것처럼 「출근정지」의 창수도 3년 만에 폐결핵에 걸린다. 「암모니아 탕크」의 동제는 탱크 청소작업 중 질식하고, 「기초공사장」의 봉원은 기중기의 핸들에 가슴을 가격당하며, 「출근정지」의 창수, 응호, 성삼은 암모니아 탱크의 폭발로 형체도 없이 산화되고 만다. 이들은 “전쟁할 때의 하졸下卒과 같이 공포 속에서” 노동하고 있다.
--- p.67
유독가스와 각종 미세 화학물질들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호흡기 질환이 빈번히 발생한 것은 물론, 공업단지 형성 이후 5년여를 지난 시점부터 흥남 일대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과 전염병이 창궐하여 흥남은 “전염병 도시” 또는 “병마의 도시”로 불릴 정도였다.
--- p.68
인구의 거의 대부분이 노동자와 그 가족으로서 그들의 생계가 공장에 긴박되어 있는 도시, 기업이 노동자에게 ‘구매권’을 판매해 공장 내에서 쌀, 의복, 잡화 등 생필품을 구입하게 만드는 곳, 자본가가 출생과 사망신고서를 받는 곳, 경찰이 임금협상 테이블에서 자본가의 대리인을 자처하는 곳, 자본-국가 콤비나트가 구축된 흥남은 공장으로부터 발원하는 하나의 시선에 의해 포착된다.
--- p.69
이 책에서는 1920년대 중반 이후 제국 자본의 식민지 개발과 함께 형성된 ‘자본-국가 복합체’의 역사적·상징적 장소로서 흥남을 식민지/제국의 그라운드 제로로 명명하고자 한다.
--- p.81
함흥이 고향인 주인규는 나운규의 「아리랑」(1926)과 「풍운아」(1926), 심훈 제작의 「먼동이 틀 때」(1927) 등에 출현한 영화배우로 …… 1930년을 전후한 시점에 조선질소 흥남공장의 노동자가 되었고, 공장 내에서스트라이크를 조직하다 해고되었으며 …… 동생인 주선규, 주인선 등과 함께 「노동자신문」이라는 지하인쇄물을 제작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 프로핀테른 계열 태평양노동조합 비서부의 「10월 서신」을 비밀리에 반입하기도 한다.
--- p.82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본인 관리자로부터 언제나 ‘게으르다’, ‘책임감이 없다’, ‘향상심이 없다’는 평가를 받으며 비숙련 단순작업에 배치되곤 했다.
--- p.87
감옥 같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공장의 출입구는 주로 일본 헌병 출신자들로 이루어진 경비들이 감시하고 있었고, 작업장 내에서도 감독관의 폭력이 항존했지만, …… 적어도 중일전쟁 발발 이전까지는 매해 조직운동 사건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 p.89
일본질소는 ‘공장법’의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 식민지에 집중적으로 자본을 투여하고 ‘내지’보다 월등히 유리한 착취환경에서 과감한 기술 실험을 행함으로써, 흥남을 미나마타보다 뒤늦게 개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나마타병의 원천을 발견할 수 있는 장소로 만들었다. 질소비료공장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한 1930년 이후로 산업공해에 해당되거나 그로 의심되는 현상들이 부단히 나타난 바 있다.
--- p.101
함흥군수, 함흥경찰서장 등이 직접 나서 땅을 소유한 주민들을 호남리 구장 집으로 모이게 한 후 경찰 수십 명으로 집을 에워싼 채 토지 매매 계약을 강요하기도 했으며, 역시 경찰을 동원해 토지 매수조건에 강하게 반대하던 주민들을 폭행, 구금하는 등, 일본질소의 공장부지 매입과정에서 식민지 행정·치안 권력은 거의 행동대 역할을 수행했다.
--- p.103
고향과 삶의 터전에서 뿌리 뽑힌 이들은 일본질소가 지정해 놓은 구룡리로 이주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 구룡리는 저지대에 도로도 없고 어선이 정박할 만한 항구도 없으며 음료수도 구할 수 없는 곳이라며 주민들이 이주에 반대했을 때, 회사와 식민 행정 당국은 저지대를 매립해 주거 지역을 조성해 주고 500간 이상의 축항을 건설해 주고 6간 폭의 도로를 내고 우물 세 개를 제공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공장부지 매입 계약이 완료되자 이 약속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 p.104
한설야의 소설 『과도기』는 바로 이렇게 구룡리로 추방당한 이들의 삶이 그 후 어떤 형태로 전환되는가를 조명하고 있는데, 주인공 창선이 결국 “상투 짜고 감발 치고 부삽 들고 콘크리트 반죽하는” 노동자가 되어 자신들이 쫓겨 나온 고향 땅에 세워진 조선질소비료 흥남공장으로 들어가게 되는 결말은 의미심장하다.
--- p.104
조선질소 역시 일제 말 전시체제기에는 폭약, 항공연료 등의 생산에 더 비중을 둔 군수산업체로 전환되었다. 일본인 직공 다수가 징병되는 등의 사유로 노동력 부족 사태가 발생했을 때는 총독부가 노무동원령을 내려 전국에서 농민, 남녀 학생 등을 강제동원하기도 했으며, 전쟁 막바지에는 심지어 수감자와 전쟁포로까지 동원했다.
--- p.114
1931년 말 시점에 이루어진 조사에 따르면, 조선의 화학공업에 종사하는 ‘내지인’ 노동자가 조선 내 모든 산업 분야 ‘내지인’ 노동자 수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 이렇게 볼 때, 식민지/제국 ‘전기·화학공업의 유토피아’인 흥남은 ‘내지’가 연장된 장소였다고 할 수 있다. 공장 안에서는 일본어만을 사용해야 했고, 조선인과 중국인은 기술적 노동으로부터 배제된 채 “일본인의 보완적 노동으로서 육체소모적인 노동”에 배치되었다.
--- p.125
총독부와 식민 본국 행정권력의 인구통제 정책으로 인해 ‘내지’ 도항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흥남으로 일자리를 찾아오는 조선인들이 증가했고, 수요를 넘는 노동력들은 공장 주변에서 이른바 ‘산업예비군’을 형성하고 있었다.
--- p.130
전쟁이 말기에 접어듦에 따라 일본인 노동자만이 아니라 조선인 모집도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농촌에서 조선인을 강제적으로 공장에 끌고 오는 일이 행해졌다. 그리고 처음으로 행해진 것이 산업보국대産業報國隊였다. 약칭으로 산보대라고 말했다.
--- p.134
조선인 노동자를 소나 말처럼 생각하고 사용하라는 노구치의 전언과 함께, 노무관리라는 명목으로 일상적인 폭력이 구사되곤 했던 것이다.
--- p.137
조선질소비료공장 주변으로 사원, 준사원, 고원雇員 등 직급에 따라 구역이 분할된 사택과 기숙사, 합숙소 등이 배치되어 있던 흥남의 식민자 공간은 흡사 거대한 병영과도 같은 공동생활 공간을 구성하고 있었다. …… 흥남공장 설립 초창기에는 일본인 사택에 전기와 수도가 무료로 제공되었다. 조선질소의 간부들과 고급기술자들의 생활은 일반 공장 직공 및 고용 노동자들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윤택했다. 연구 및 작업환경, 급여, 복지 등 모든 측면에서 이들에게 흥남은 최고의 환경이었다.
--- p.149
보통 오후 5시가 되기 전에 근무를 끝냈고, 심지어 여름에는 오후 4시 이전에 퇴근할 수 있었다. …… 저녁 식사 전에도 테니스 등의 운동이나 독서를 즐길 수 있었고, 저녁 식사 후에는 각자 취미생활을 하거나 천기리나 함흥의 카페, 술집, 유곽 등을 찾기도 했다. 독신 사원은 대체로 기숙사에서 저렴하게 숙식을 해결했는데, 취사는 물론 청소, 세탁 등 가사와 관련된 모든 일을 고용된 하녀들에게 맡겼기에 특히 많은 여유시간을 누릴 수 있었다.
--- p.150
미나마타 공장에서 일급 1엔 60전을 받던 노동자가 흥남공장으로 오자마자 조선수당 등을 포함해 2엔 60전을 받았고, 물가까지 저렴해 “귀족생활大名暮らし”을 누릴 수 있었다. 연 2회 이루어진 승급에도 차별적 기준이 적용되어 일본인 노동자와 조선인 노동자 사이의 임금격차는 경력이 쌓일수록 더욱 벌어졌다.
--- p.163
이소가야 스에지는 1932년 이른바 ‘제2차 태평양노동조합 사건’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인물이다. 1931년의 ‘제1차 태평양노동조합 사건’ 때도 흥남공장 직공인 바바 마사오馬場正雄와 모리타 데쓰로守田哲?가 연루되어 각각 징역 4년과 2년에 처해졌던 것처럼,
--- p.167
함흥고등보통학교를 다니던 시절부터 조선과 일본의 좌익 작가들의 문학을 찾아 읽으며 작가에 뜻을 두고 있던 이북명은 1927년 졸업 후 조선질소 흥남공장 유안직장 노동자로 일하며 공장 경험을 투사한 소설을 습작하다가, 동향 출신의 카프 작가 한설야를 만나 그의 문학 지도를 받고 「질소비료공장」을 발표하며 “‘조선문단’의 말석”에 들어가게 되었다.
--- p.177
공장 가동이 시작된 1930년대 초반부터 흥남에서는 프로핀테른(적색노동조합 인터내셔널)과 범태평양노동조합의 영향하에 적색노조를 건설하려는 지하활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그중에서도 1932년 5월 메이데이를 대비한 일제 경찰의 예비검속으로 그 활동의 실마리가 드러나 전체 500여 명이 검거되며 식민지 미디어에 대서특필되었던 사건이 이른바 ‘제2차 태평양노조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때 검거된 인물 중에 주인규·주선규·주인선 남매가 있었다.
--- p.210
출판사 리뷰
도시사를 넘어 식민주의 본질 톺아보기
기업도시 흥남의 ‘발명’에서 ‘민낯’까지
흥남 하면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굳세어라 금순아」)와 함께 한국전쟁기 피난민들의 극적인 이산 장면을 떠올리기 십상이다. 이 강렬한 기억 때문에, 흥남이라는 도시가 일제시기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가 그곳에 ‘동양 최대 규모의 전기-화학 콤비나트’를 건설하면서 비로소 생겨났다는 사실은 기억되지 않는다.
약 200여 호가 터 잡았던 작은 어촌 마을은 제국 자본의 ‘개발’ 10여 년 만에 그곳은 인구 약 20만의 공업도시로 급변했다. 흥남의 전기-화학 콤비나트는 화학비료로 산미증식계획에 기여하고, 전시에는 화약, 항공기 연료 등 군수품 생산에 동원되며 일제의 식민지 통치와 국책에 깊이 개입했다. 조선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가 금강산, 소록도 나환자 수용시설과 함께 식민지 조선의 3대 자랑거리 중 하나로 내세울 만큼, 식민지 통치자에게 흥남은 ‘식민지 공업화’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였다.
조선대학교 국어국문학부 부교수인 지은이는 문헌 자료, 생존 일본인 노동자 인터뷰, 다양한 문학 텍스트 분석을 통해 흥남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역사적·경제적 의미는 무엇인지, 그곳에서 살아가던 조선인들은 어떤 삶을 영위했는지 촘촘히 드러낸다.
일제의 병참기지 역할을 한 ‘노구치 왕국’
기업도시 흥남은 일제에 의해 만들어졌다. 노구치 시타가우가 세운 ‘일질콘체른’은 1927년 조선질소를 설립하고 함흥군에서 1930년 본격적인 비료 생산을 시작한다. 이때까지 ‘흥남’은 없었다. 부전강 등의 값싼 수력전기를 받기 용이하고, 비료의 수송에 편리한 이점 때문에 선택된 곳, 함흥군의 복흥리와 호남리 일대가 공장지대로 선택되어 탄생한 곳이었다. 그렇게 ‘발명’된 흥남은 ‘노구치 왕국’이 되었다. 선주민의 토지 수용 때 공권력이 동원되고, 초대 흥남 읍장이 노구치 본인이었으며, 기업이 발행한 ‘구매권’이 화폐처럼 통용되고, 자본가가 출생과 사망신고를 받는 곳이었다. 그러면서 조선질소는 화학비료로 산미증식계획에 기여하고, 전시에는 화약, 항공기 연료 등 군수품 생산에 집중하며 일제의 식민지 개발, 전쟁, 점령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식민주의를 파악하는 새로운 틀
문학을 전공한 지은이가 흥남을 보는 눈은 독특하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제국 자본과 식민 권력이 일체화되어 선주민들을 추방하고 요새 같은 공장을 중심으로 주변 세계와 인간을 새로운 생산체제에 편입시켰다는 점에 주목해, 저자는 흥남을 식민지/제국의 그라운드 제로라 명명한다. 그라운드 제로란 우선 식민 질서의 재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적 장소를 뜻하며, 동시에 식민지를 장악하려는 식민주의적 폭력의 최전선을 뜻한다. 저자는 흥남을 세 가지 전선이 교차하는 곳으로 의미 부여를 하면서 식민주의 재생산의 구조를 입체적으로 성찰한다. 수은중독에 의한 미나마타병의 원천을 파악한 것이 그 사례라 할 수 있다. 지은이에 따르면 식민 본국의 ‘공장법’ 규제를 받지 않은 채 기술실험을 자행해 흥남이 미나마타보다 뒤늦게 개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30년 이후로 산업공해 또는 그로 의심되는 증상이 만연되었다.
내지인의 천국, 조선인 노동자의 무덤
지은이에 따르면 흥남은 두 얼굴을 지녔다. 비료공장에 일하러 온 내지인들에게는 ‘천국’이었다. 이른바 ‘조선수당’이 붙은 임금은 본토에서보다 두 배 가까이로 뛰었고, 사택과 기숙사, 합숙소가 제공되었다. 오후 5시가 되기 전에 퇴근해 각종 취미생활과 유흥을 즐길 수 있었으며, 물가까지 저렴해 ‘귀족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조선인들은 달랐다. 구룡리로 쫓겨간 선주민들은 마실 물조차 부족해 생존마저 위협받을 지경이었다. 유독물질과 각종 미세 화학물질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전쟁할 때의 하졸과 같이 공포 속에서” 일하느라 호흡기 질환을 앓아야 했으며 원인 미상의 질병과 전염병이 돌아 흥남은 ‘전염병 도시’ ‘병마의 도시’로 불릴 정도였다.
미처 몰랐던 그때 그곳의 인간과 문학
어쩌면 조금은 낯선 틀로 흥남을 바라본 이 책에 인간과 문학의 이야기가 더해져 풍성해졌다. 대표적 인물은 함흥 태생의 영화배우 주인규. 나운규 영화 [아리랑] 등에 출연했던 그는 조선질소 흥남공장의 노동자가 되어 노동운동을 벌이다 ‘제2차 태평양노조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르는 문제적 인물이다. 동생 주선규·주인선과 지하인쇄물을 제작하거나, 명태장수로 변장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불온문서’를 반입하는 등 그의 ‘활약’은 여느 역사책에서 좀처럼 만날 수 없는 이야기다.
그런가 하면 이 책은 문학에 적지 않게 의존하고 있다. 선주민의 애환을 다룬 한설야의 소설 『과도기』가 글 첫머리를 장식하거니와 그의 문학적 제자이자 흥남공장 노동자 출신인 이북명의 노동소설들에는 아예 한 장을 할애해 흥남의 실상을 생생히 보여준다. 김남천의 「공장신문」, 정우상의 「목소리」 등 우리 문학사에서 소홀히 다뤄진 작가·작품 이야기도 값지다.
읽고 나면 이 책이 과연 역사인지 문학인지 물을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역사가의 전유물이 아니며 역사는 하나의 틀로만 보아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사실을 어떻게 드러내고 거기에서 무슨 의미를 찾아내느냐 하는 것일 터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간과하고 있던 흥남의 ‘두 얼굴’을 그려낸 이 책은, 아프지만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의 단면을 담아낸 의미 있는 성과로 읽힌다.
기업도시 흥남의 ‘발명’에서 ‘민낯’까지
흥남 하면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굳세어라 금순아」)와 함께 한국전쟁기 피난민들의 극적인 이산 장면을 떠올리기 십상이다. 이 강렬한 기억 때문에, 흥남이라는 도시가 일제시기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가 그곳에 ‘동양 최대 규모의 전기-화학 콤비나트’를 건설하면서 비로소 생겨났다는 사실은 기억되지 않는다.
약 200여 호가 터 잡았던 작은 어촌 마을은 제국 자본의 ‘개발’ 10여 년 만에 그곳은 인구 약 20만의 공업도시로 급변했다. 흥남의 전기-화학 콤비나트는 화학비료로 산미증식계획에 기여하고, 전시에는 화약, 항공기 연료 등 군수품 생산에 동원되며 일제의 식민지 통치와 국책에 깊이 개입했다. 조선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가 금강산, 소록도 나환자 수용시설과 함께 식민지 조선의 3대 자랑거리 중 하나로 내세울 만큼, 식민지 통치자에게 흥남은 ‘식민지 공업화’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였다.
조선대학교 국어국문학부 부교수인 지은이는 문헌 자료, 생존 일본인 노동자 인터뷰, 다양한 문학 텍스트 분석을 통해 흥남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역사적·경제적 의미는 무엇인지, 그곳에서 살아가던 조선인들은 어떤 삶을 영위했는지 촘촘히 드러낸다.
일제의 병참기지 역할을 한 ‘노구치 왕국’
기업도시 흥남은 일제에 의해 만들어졌다. 노구치 시타가우가 세운 ‘일질콘체른’은 1927년 조선질소를 설립하고 함흥군에서 1930년 본격적인 비료 생산을 시작한다. 이때까지 ‘흥남’은 없었다. 부전강 등의 값싼 수력전기를 받기 용이하고, 비료의 수송에 편리한 이점 때문에 선택된 곳, 함흥군의 복흥리와 호남리 일대가 공장지대로 선택되어 탄생한 곳이었다. 그렇게 ‘발명’된 흥남은 ‘노구치 왕국’이 되었다. 선주민의 토지 수용 때 공권력이 동원되고, 초대 흥남 읍장이 노구치 본인이었으며, 기업이 발행한 ‘구매권’이 화폐처럼 통용되고, 자본가가 출생과 사망신고를 받는 곳이었다. 그러면서 조선질소는 화학비료로 산미증식계획에 기여하고, 전시에는 화약, 항공기 연료 등 군수품 생산에 집중하며 일제의 식민지 개발, 전쟁, 점령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식민주의를 파악하는 새로운 틀
문학을 전공한 지은이가 흥남을 보는 눈은 독특하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제국 자본과 식민 권력이 일체화되어 선주민들을 추방하고 요새 같은 공장을 중심으로 주변 세계와 인간을 새로운 생산체제에 편입시켰다는 점에 주목해, 저자는 흥남을 식민지/제국의 그라운드 제로라 명명한다. 그라운드 제로란 우선 식민 질서의 재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적 장소를 뜻하며, 동시에 식민지를 장악하려는 식민주의적 폭력의 최전선을 뜻한다. 저자는 흥남을 세 가지 전선이 교차하는 곳으로 의미 부여를 하면서 식민주의 재생산의 구조를 입체적으로 성찰한다. 수은중독에 의한 미나마타병의 원천을 파악한 것이 그 사례라 할 수 있다. 지은이에 따르면 식민 본국의 ‘공장법’ 규제를 받지 않은 채 기술실험을 자행해 흥남이 미나마타보다 뒤늦게 개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30년 이후로 산업공해 또는 그로 의심되는 증상이 만연되었다.
내지인의 천국, 조선인 노동자의 무덤
지은이에 따르면 흥남은 두 얼굴을 지녔다. 비료공장에 일하러 온 내지인들에게는 ‘천국’이었다. 이른바 ‘조선수당’이 붙은 임금은 본토에서보다 두 배 가까이로 뛰었고, 사택과 기숙사, 합숙소가 제공되었다. 오후 5시가 되기 전에 퇴근해 각종 취미생활과 유흥을 즐길 수 있었으며, 물가까지 저렴해 ‘귀족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조선인들은 달랐다. 구룡리로 쫓겨간 선주민들은 마실 물조차 부족해 생존마저 위협받을 지경이었다. 유독물질과 각종 미세 화학물질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전쟁할 때의 하졸과 같이 공포 속에서” 일하느라 호흡기 질환을 앓아야 했으며 원인 미상의 질병과 전염병이 돌아 흥남은 ‘전염병 도시’ ‘병마의 도시’로 불릴 정도였다.
미처 몰랐던 그때 그곳의 인간과 문학
어쩌면 조금은 낯선 틀로 흥남을 바라본 이 책에 인간과 문학의 이야기가 더해져 풍성해졌다. 대표적 인물은 함흥 태생의 영화배우 주인규. 나운규 영화 [아리랑] 등에 출연했던 그는 조선질소 흥남공장의 노동자가 되어 노동운동을 벌이다 ‘제2차 태평양노조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르는 문제적 인물이다. 동생 주선규·주인선과 지하인쇄물을 제작하거나, 명태장수로 변장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불온문서’를 반입하는 등 그의 ‘활약’은 여느 역사책에서 좀처럼 만날 수 없는 이야기다.
그런가 하면 이 책은 문학에 적지 않게 의존하고 있다. 선주민의 애환을 다룬 한설야의 소설 『과도기』가 글 첫머리를 장식하거니와 그의 문학적 제자이자 흥남공장 노동자 출신인 이북명의 노동소설들에는 아예 한 장을 할애해 흥남의 실상을 생생히 보여준다. 김남천의 「공장신문」, 정우상의 「목소리」 등 우리 문학사에서 소홀히 다뤄진 작가·작품 이야기도 값지다.
읽고 나면 이 책이 과연 역사인지 문학인지 물을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역사가의 전유물이 아니며 역사는 하나의 틀로만 보아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사실을 어떻게 드러내고 거기에서 무슨 의미를 찾아내느냐 하는 것일 터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간과하고 있던 흥남의 ‘두 얼굴’을 그려낸 이 책은, 아프지만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의 단면을 담아낸 의미 있는 성과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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