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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치의 회고와 비판 일본인이 쓴 [역(逆) 징비록] (2023)

동방박사님 2023. 9. 27.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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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일본인들이 직접 쓴 일제강점기 조선(한국) 이야기,
읽을수록 섬세하고 섬뜩한 이야기.
비판과 성찰이 아니라 주로 자화자찬식 회고!
그 속에 담긴 역사의 진실을 알기 위해 그래서 더욱 읽어야만 한다. 똑같은 역사를 반복할 수는 없기에, 그래서 이 책은 역(逆) 징비록이다.

고통스러운 번역, 꼭 알아야 하는 역사

이 책은 조선총독부가 조선(한국 통치 25주년을 맞이하여 1934년 무렵 조선신문에 90명이 쓴 90편의 글을 모아 1936년에 출판한 책이다.

짤막한 글모음이지만 90편이나 되므로 분량이 적지 않다. 학술적이지 않은 에세이 형식이라 편찬 의도도 분명하다. 두루두루 많이 읽게 하려고 만든 책이다. 그런 목적을 위해 글꼴 크기와 책값까지 세밀하게 고려한 책이다.

책 일러두기에서 “이 책을 6호 활자체(8pt)로 인쇄한 이유는, 수록된 자료가 조선 통치에 관한 문헌으로서 귀중하므로 풍부한 내용을, 될 수 있는 대로 가격을 높이지 않고 보편적으로 소개하려 고심한 끝에 준비한 때문이다.”라고 스스로 그런 점을 밝히고 있다. 풍부한 내용을 싼값에 많은 대중들이 보게 하겠다는 것이다. ‘조선통치 25주년’의 의미를 강조하고 홍보하려는 의도가 역력하다.

피지배 한국으로서는 피가 솟는 얘기들이지만 저들의 글에는 일본 우월주의에 의한 자부심과 자긍심이 넘쳐난다. 회고만 있고 당연히 식민 지배에 대한 비판과 반성은 없다. 비판이 있다면 통치 방식과 결과에 대한 일본 내부에서의 비판일 뿐이다. 가타야마 시게오의 회고에서 확인할 수 있듯, 결국 비판이 아니라 또 다른 방식의 통치 찬양이요 자화자찬의 연장이다.

목차

옮긴이의 글 1·····························14
이 책의 내용 구성에 대하여· ·····················26
옮긴이의 글 2·····························38
해설/역주 참고문헌··························58

서문································64
1. 합방의 회고와 한국 문제· ····················72
2. 내가 품었던 한국 반쪽 내기 계획· ················85
3.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일한병합··················91
4. 병합에 직면하여·························97
5. 병합 직후의 학제 개혁· ···················· 105
6. 교육제도의 혁신························ 112
7. 점진을 추구한 이토 공작의 치적················· 120
8. 일세의 위인 이토 공작을 생각하며················ 125
9. 독단과 전행으로 이루어진 경제 공적··············· 130
10. 지극히 어려운 화폐제도의 정리· ··············· 139
11. 메가타 남작을 생각한다···················· 147
12. 뛰어난 위인인 송병준 백작에 대하여· ············· 154
13. 조선 사법제도의 확립····················· 163
14. 통신 행정이 통일된 경위···················· 169
15. 사설 철도의 보호와 장려···················· 177
16. 지방 진흥회의 창설· ····················· 185
17. 조선의 사상 문제· ······················ 191
18. 위생 사상의 보급· ······················ 198
19. 감격에 충만했던 그때····················· ·205
20. 남대문역 앞 폭탄 사건과 미즈노 씨··············· 211
21. 추억 그대로· ························ 215
22. 그 당시의 남면 정책에 관한 회고담··············· 224
23. 인삼 정책의 개혁· ······················ 232
24. 획일주의의 배격과 차별적인 ‘일시동인’············· 245
25. 조선의 옛날과 지금· ····················· 250
26. 조선 반도의 발전에 힘쓰자··················· 253
27. 조선 거주 26년의 회고· ··················· 257
28. 협력하고 융합하여 복지를 도모하자· ············· 266
29. 이상향의 건설· ······················· 274
30. 눈을 떠가는 조선 민중에게··················· 287
31. 국제 관계에서 보는 조선 통치· ················ 296
32. 조선 청년은 실업계로 진출하라· ··············· 304
33. 본국의 인재를 배치하라···················· 314
34. 관민이 하나되는 협력의 효과·················· 322
35. 궤도에 오를 때까지· ····················· 328
36. 만주국의 성립과 조선····················· 338
37. 만주국 개발과 조선의 사명··················· 348
38. 우리 제국의 대륙 정책의 기초· ················ 355
39. 동아시아에 방향을 보여주는 조선 문제· ············ 360
40. 만주 경영의 기둥이 되어라··················· 367
41. 일본 만주를 대상으로 하는 조선 경제계의 진보· ········ 370
42. 경제적 발전을 원한다····················· 379
43. 본국의 자본을 활용하라···················· 385
44. 본국 관민의 이해를 바란다··················· 391
45. 외국 식민지와는 다른 우리의 조선 통치 정책· ········· 398
46. 합리적 관계를 확립하라···················· 403
47. 수입 초과 결제의 고심····················· 408
48. 반도 재계의 추억· ······················ 412
49. 경모하는 데라우치 백작···················· 427
50. 고(故) 시모오카 정무총감을 추모함· ·············· 433
51. 조선과 나의 감상· ······················ 440
52. 조선에 대한 회고· ······················ 449
53. 조선 재임 중의 추억······················ 454
54. 의기와 열정의 3년 반· ···················· 461
55. 꿈과 같은 조선에서의 25여 년················· 467
56. 변해 가는 조선의 모습····················· 473
57. 올바른 길에 눈을 뜨는 조선· ················· 484
58. 경찰제도의 확립· ······················ 489
59. 개혁 당시의 경찰관 훈련과 교육· ··············· 497
60. 문화정치와 학제 개편····················· 502
61. 경성대학의 설립 경위····················· 510
62. 최초의 조선 전문교육····················· 519
63. 조선 교육에 관한 관견····················· 525
64. 조선 지방제도 개정과 지방분권· ··············· 532
65. 총독정치와 민의 드높이기(창달················· 543
66. 사법관의 증원과 우대를 바란다· ··············· 551
67. 전매제도(專賣制度) 창설의 고심· ················ 556
68. 매우 어려웠던 치산치수 사업·················· 560
69. 조선 철도 이관(移管)의 공적··················· 567
70. 조선의 전력 통제· ······················ 570
71. 산업개발은 일본과 조선의 협력· ··············· 576
72. 조선의 사업이 빠르게 발전하기를 바란다············ 585
73. 조선 농사에 대한 견해····················· 590
74. 쌀 정책의 전환은?······················· 598
75. 조선의 증산 계획을 부활시켜라· ··············· 605
76. 조선의 자원을 개발하라···················· 609
77. 금 생산 사업의 발전을 바란다· ················ 614
78. 획일적 행정의 배제· ····················· 621
79. 조선인 인재의 배출을 바란다 · ················ 627
80. 일본과 조선 융화의 실현···················· 636
81. 일본과 조선의 융화는 통혼으로· ··············· 641
82. 일본과 조선 생활 경제의 생명선· ··············· 648
83. 재계 공황(패닉 당시의 회고··················· 655
84. 재계 공황 당시의 고충····················· 661
85. 황폐가 극에 달했던 조선···················· 665
86. 재정 파탄 지경에 이른 한국 정부················ 672
87. 부산 땅의 매립과 조선 철도의 창설··············· 680
88. 무인 들판을 개척한 목포 개항· ················ 688
89. 쌀 증산 계획을 수행하기 바란다· ··············· 694
90. 조선 사과를 맛있게 먹으면서·················· 700
[부록 1] 일본 연호 표· ······················704
[부록 2] 일본 측 연표: 일조관계연표(日朝?係年表)· ········ 708
 
역 : 신한준
 
일본 메이지대학교(Meiji Univ.) 산업경영학과를 졸업했다.
프린터, 반도체 등의 첨단 기술과 관련된 산업체에서 일본어와 관련된 번역과 통역을 주로 해왔다. (사단법인) 번역가협회 이사, 사법통역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일본어전문 번역가와 강사로서 일본과 한국 역사와 관련된 문헌을 주로 번역하고 있다. 일본과 관련된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과 일본의 문화와 역사를 비교하고 제대로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출판사 리뷰

일본의 양심 지식인의 눈으로 본, 이 책 번역의 필요성

이 책 번역이 끝나갈 무렵에 이 책이 1995년에 복간판이라는 이름으로 영인본이 출판된 것을 알았다. 한일병합사 총서 1권이다. 이 역시 순간 섬찟했다. 설마 한일병합에 대한 자긍심의 역사 재현을 위해 1권으로 낸 것일까, 자화자찬식 꿈과 과거에 대한 그리움인가? 다행히 복간본 책임자인 히사 겐타로(久 源太?)의 후기는 그런 우려를 벗어나게 했다. 그 후기를 그대로 옮기면 우리가 왜 괴롭고 아픈 역사를 알기 위해 번역의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그 논조를 그대로 따라가 보자.

“한일병합(일명‘통치’)이 일본 근대사 연구상 불법 수탈과 침략으로 가득 찬 정책이었음은 일찍부터 지적되어 왔다. 그것은 메이지 44년부터 다이쇼 원년에 걸쳐 당시 조선총독부 재직자들의 입에서도, 그 죄악성(일부에 한정되어 있기는 하나)을 이야기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야마베 겐타로의 일련의 논문, 발굴된 자료〈( 조선보호및병합〉,〈 독립운동 종식 후의 민족운동/대략〉) 등을 통해서도 그것은 선명하게 전해진다.

‘한일병합’은 불법 수탈과 침략의 역사임을 지적한 일본의 양심 지식인들의 논조2를 지지하고 있다. 곧 조선총독은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어 ‘소천황’이라 불리기까지 하는 존재였다. 또 경찰기구를 근간으로 하는 무단정치는 결코 ‘선의의 나쁜 정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수탈과 전횡의 정치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수록된 글들이 “직책의 쟁쟁한 직함으로 글을 쓰고 있으나, 그 대부분 의 내용은 반성과 참회가 부족하다고 해야 한다.(さらに本篇に及んで役職の錚?たる肩書で文章を書いているが、その殆どの?容は反省と懺悔に欠けるものといわなければならない。)”라고 했다.

여기서 양심 일본인의 한계가 드러난다. ‘부족한 것’이 아니라 반성과 참회는 거의 없다. 그러나 히사 겐타로는 이 책의 역사적 가치만은 정확히 짚고 있다.

이 책 전체가 근대사의 반면교사로서의 의미를 지니며 후세에 대한 자료로 버려서는 안 되는 것도 사실이다. 집필자의 전부라고 해도 좋은 사람이 당시 정계, 경제계, 관계 혹은 재야의 요직을 맡고 있었다는 점에서 증언력의 중요성은 상상된다. 즉, 야마베 겐타로의 일련의 연구와 표리를 이루는, 수탈하는 측의 논리가 정리 되어 있는 것이 본서의 특질이다. 특히 메이지 다이쇼 시대의 전형적 관료인 사카타니 요시로, ‘만코 내각’의 기요우라 게이고, 외교관 하야시 곤스케 등의 회고는 소위 통치하는 측의 논리로 가득 차 있고, 경찰 문제에 지면을 할애한 총독부 경무국장 마츠이 시게루의 글에는 3·1 독립 사건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는 등 불가해한 논조가 너무 많다. 그중 권두의 우익 우치다 료헤이(흑룡회 회장)의 글에 600여개를 할애하여 한일의 ‘합방’ 전후와 25년 후의 정치적 정황을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어, 오늘날의 조선사 연구에도 충분히 참고가 된다.

(然るに本書全?が近代史の反面?師としての意味を持ち、後世への資料として捨て去るべきではないことも事?である。執筆者のすべてといってよい者が、?時の政界·??界·官界
あるいは在野の要職に就いていたことからも?言力の重要性は想像される。すなわち、山?健太?の一連の?究と表裏をなす、?奪する側の論理が纏められているのが本書の特質である。とりわけ明治·大正の典型的官僚·阪谷芳?、 "鰻香?閣" の?浦奎吾、外交官·林?助などの回顧は、所謂統治する側の論理で?ちており、警察問題に費した?督府警務局長松井茂の文章には、三·一?立事件に一言も?れられていないなど不可解な論調が多過ぎる。その中で、?頭の右翼?田良平(?龍??長)の一文は六百余を割いて、日韓の「合邦」前後と二十五年後の政治情況を細く記しており、今日の朝鮮史?究にも充分?考になるものである)

바로 반면교사와 미시사로서의 가치다. ‘반면교사’의 의미는 명확하다. 일본은 이런 잘못을 다시 저지르지 않기 위해, 한국은 그런 피해를 더 입지 않기 위한, 우리에게는 또 다른 징비록인 셈이다.

조선의 심장부인 경복궁에 있던 조선총독부 건물을 김영삼 전 대통령이 경복궁에서 없앤 것은 잘한 일이지만, 그 건물을 다른 곳에 이전, 설치했어야 했다. 그보다 더한 반면교사의 역사가 어디 있겠는가? 미시사로서의 가치는 매우 섬세하고 자세한 이야기나 역사적 사실이 풍부하게 실려 있다는 점이다. 한국 역사 교과서는 상당 부분 거시사 위주로 가르치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1909년 12월 22일에 이재명 의사와 그 동지들이 이완용을 습격하여 “이완용은 겨우 목숨을 건졌다.”라고만 배운다. 그런데 이때 이완용의 목숨을 구한 일본의 명의의 회고담이 자세히 나온다. 열여덟 번째 글인 ‘위생 사상의 보급’이라는 모리야스 렌키치(森安連吉)의 회고담이다. 그는 전 조선총독부 의원, 내과부장, 의학박사였다.

“내가 부임한 다음 해의 1월쯤에 이완용 수상이 메이지 거리에 있는 프랑스 교회앞에서 자객의 기습을 받았다. 이완용 씨 피습 사건이다.3 이 씨는 곧 대한의원 외과에 입원하였다. 당시 외과 부장은 군의 총감 키쿠치 원장이 겸임하고 있었다. 따라서 외과에서는 가능한 치료를 모두 동원하였다. 고열이 계속되고 좀처럼 내리지 않았다.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어 내과 진단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씨의 부상은 앞에서 껴안고 흉기로 등을 찔렀기 때문에 상처가 가슴막(늑막)까지 도달하였다. 내가 진찰한 결과 가슴막에 많은 피와 물이 고여 있어 이것 때문에 높은 열이 계속되고 있었다. 당시 이완용 씨의 진찰에는 이윤용, 조중응, 송병준 씨 등이 입회하였다. 결국, 고인 피와 물을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였다. 나는 가슴막에 있는 물을 빼내려면 침을 놓아 빼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고 설명하였다. 아플 것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일시적 고통은 참고 이 방법으로 치료할 수밖에 없다고 다시 설명하였다. 마침내 침을 놓았다. 혈액성의 물이 나왔고, 치료를 마치자 열도 내렸으며, 점차 경과가 좋아져 퇴원하게 되었다. 내가 한국 정부로부터 2등훈장을 받은 것은 아마도 그런 관계(이완용씨때문가 아니었나 상상했다.”

그가 말한 자객은 우리에게는 독립투사였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이재명 독립투사는 사형당했지만, 이완용은 악착같이 살아 무려 16년을 더 살다가 1926년에 죽었다. 의사에게 아군과 적군의 구별은 필요 없지만, 그의 의사로서의 책무와 실력이 매국노를 살려 한국민에게는 또 다른 고통을 주었으니 그는 결국 일본인 의사였을 뿐인가? 이런 회고담이 주는 역사적 의미는 독자 각자에게 맡길 수밖에 없을 듯도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