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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특별작
한국 근현대사 연구의 거장 박찬승 교수의 역작
“100년 전, 세계를 울린 함성과 함께 대한민국이 태어났다”
올해는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30년간 한국 근현대사를 연구해온 역사학계의 거장이자, 지난 수십 년간 잘못 기념되던 임시정부 수립기념일을 4월 11일로 바로잡는 데 크게 기여한 박찬승 교수는 100년 전인 1919년을 “우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1년”으로 손꼽는다. 바로 그해, 한국인은 스스로의 힘으로 몰락한 식민지의 백성에서 세계 최초로 헌법에 ‘민주공화정’을 명기한 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 새롭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 책 『1919』는 우리 역사상 가장 뜨거웠던 그 시절의 풍경을 생생히 담아낸 역사 교양서다.
이 책의 가장 탁월한 점은 제목에서 드러나듯, 1919년 전체를 조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3·1운동과 임시정부에 관한 이야기는 많은 책과 영화, 드라마의 소재였다. 하지만 대개 단편적인 인물과 사건만 다룰 뿐, 그 모두를 하나로 연결해 시대 자체를 이해하는 데에는 소홀했다. 『1919』는 이런 한계를 뛰어넘어, 100년 전 역사를 마치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펼쳐놓는다.
100년 전 봄날, 우리 선조들이 외친 것은 ‘자주독립과 평화’ 그리고 ‘민주주의와 공화주의’, ‘자유와 평등’의 함성이었다. 『1919』는 그 메시지들이 담고 있는, 오늘날에도 유효한 역사적 의미와 시대정신을 온전히 발굴해낸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역사가 단순히 지나간 과거의 일, 또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단편적인 지식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보다 나은 내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훌륭한 지렛대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한국 근현대사 연구의 거장 박찬승 교수의 역작
“100년 전, 세계를 울린 함성과 함께 대한민국이 태어났다”
올해는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30년간 한국 근현대사를 연구해온 역사학계의 거장이자, 지난 수십 년간 잘못 기념되던 임시정부 수립기념일을 4월 11일로 바로잡는 데 크게 기여한 박찬승 교수는 100년 전인 1919년을 “우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1년”으로 손꼽는다. 바로 그해, 한국인은 스스로의 힘으로 몰락한 식민지의 백성에서 세계 최초로 헌법에 ‘민주공화정’을 명기한 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 새롭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 책 『1919』는 우리 역사상 가장 뜨거웠던 그 시절의 풍경을 생생히 담아낸 역사 교양서다.
이 책의 가장 탁월한 점은 제목에서 드러나듯, 1919년 전체를 조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3·1운동과 임시정부에 관한 이야기는 많은 책과 영화, 드라마의 소재였다. 하지만 대개 단편적인 인물과 사건만 다룰 뿐, 그 모두를 하나로 연결해 시대 자체를 이해하는 데에는 소홀했다. 『1919』는 이런 한계를 뛰어넘어, 100년 전 역사를 마치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펼쳐놓는다.
100년 전 봄날, 우리 선조들이 외친 것은 ‘자주독립과 평화’ 그리고 ‘민주주의와 공화주의’, ‘자유와 평등’의 함성이었다. 『1919』는 그 메시지들이 담고 있는, 오늘날에도 유효한 역사적 의미와 시대정신을 온전히 발굴해낸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역사가 단순히 지나간 과거의 일, 또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단편적인 지식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보다 나은 내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훌륭한 지렛대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목차
책을 펴내며 대한민국의 첫 번째 봄을 생각하다
들어가며 1919년의 진짜 주인공들
1장 희망의 씨앗을 마련하다
빼앗긴 조국 / 무단통치가 시작되다 / 민족자결주의라는 새로운 희망
2장 상하이와 도쿄에서 만세운동을 준비하다
상하이의 '터키청년'과 신한청년당 / 유학생들의 움직임 / 도쿄 한복판에서 독립을 외치다 / 2·8독립선언, 민족자결을 요구하다
3장 서울의 움직임, 민족대표와 학생단
천도교가 독립운동 논의를 시작하다 / 서울에 전해진 유학생들의 움직임 / 구체화되는 계획 / 선우혁의 활약 / 천도교와 기독교의 합작 논의 / 마침내 성사된 합작 / 서울의 학생들 / 민족대표 33인, 죽기를 각오하다
4장 독립선언서-독립과 자주를 세계에 선포하다
독립선언서의 집필자 / 인쇄와 배포 과정 / 독립, 자주, 평화를 선언하다
5장 마침내 울려 퍼진 3월의 만세 소리
“오늘 이 자리는 조선 독립의 기초가 될 것입니다” / 파고다공원을 가득 채운 만세 소리 / 시가지로 행진하는 시위대 / 다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다 / 노동자들의 봉기
6장 전국으로 확산된 만세의 함성
만세시위가 전국에 퍼지다 / 비폭력 원칙을 지키다: 평화 시위 유형 / 폭력에 당당히 맞서다: 항의 시위 유형 / 일본의 통치를 전면 거부하다: 공공기관 점거 및 공격 유형 / 일제의 대표적 만행: 제암리 학살 사건과 맹산 사건 / 만세시위 그 이후
7장 대한민국의 탄생
희망의 싹이 돋아나다 / 서울의 한성정부 / 상하이 임시정부의 수립 / 흩어진 임시정부들을 하나로 / 임시헌장에 담긴 민주공화국의 의미 /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태동
나가며 1919년의 의미를 되새기다
감사의 말
부록
주석
들어가며 1919년의 진짜 주인공들
1장 희망의 씨앗을 마련하다
빼앗긴 조국 / 무단통치가 시작되다 / 민족자결주의라는 새로운 희망
2장 상하이와 도쿄에서 만세운동을 준비하다
상하이의 '터키청년'과 신한청년당 / 유학생들의 움직임 / 도쿄 한복판에서 독립을 외치다 / 2·8독립선언, 민족자결을 요구하다
3장 서울의 움직임, 민족대표와 학생단
천도교가 독립운동 논의를 시작하다 / 서울에 전해진 유학생들의 움직임 / 구체화되는 계획 / 선우혁의 활약 / 천도교와 기독교의 합작 논의 / 마침내 성사된 합작 / 서울의 학생들 / 민족대표 33인, 죽기를 각오하다
4장 독립선언서-독립과 자주를 세계에 선포하다
독립선언서의 집필자 / 인쇄와 배포 과정 / 독립, 자주, 평화를 선언하다
5장 마침내 울려 퍼진 3월의 만세 소리
“오늘 이 자리는 조선 독립의 기초가 될 것입니다” / 파고다공원을 가득 채운 만세 소리 / 시가지로 행진하는 시위대 / 다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다 / 노동자들의 봉기
6장 전국으로 확산된 만세의 함성
만세시위가 전국에 퍼지다 / 비폭력 원칙을 지키다: 평화 시위 유형 / 폭력에 당당히 맞서다: 항의 시위 유형 / 일본의 통치를 전면 거부하다: 공공기관 점거 및 공격 유형 / 일제의 대표적 만행: 제암리 학살 사건과 맹산 사건 / 만세시위 그 이후
7장 대한민국의 탄생
희망의 싹이 돋아나다 / 서울의 한성정부 / 상하이 임시정부의 수립 / 흩어진 임시정부들을 하나로 / 임시헌장에 담긴 민주공화국의 의미 /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태동
나가며 1919년의 의미를 되새기다
감사의 말
부록
주석
책 속으로
3·1운동 이후 체포된 보성사 직원 인종익은 경찰이 “대체 왜 이러한 무모한 일을 시도했는가?”라고 묻자 이렇게 답한다. “우리는 전혀 무모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좋은 때가 왔기에, 그에 맞는 적절한 시도를 한 것뿐이다. 처음부터 성공을 기대하고 벌인 일도 아니다. 이번에 우리가 좌절하면 그 뒤를 이어서 또 다른 사람들이 나올 것이고, 100명을 죽이면 또 다른 100명이 나올 것이다. 당신들이 아무리 막으려 해도 한번 터진 물길은 계속해서 흘러넘칠 것이다.” --- p.23
이처럼 3·1운동을 준비한 이들 대부분은 민족자결주의가 한국에 곧바로 적용될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1919년 봄의 시점에 독립의 의지를 분명히 보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당장 그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할지라도, 비록 자신들이 큰 희생을 치른다고 할지라도, 훗날 독립이란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지금부터 살펴볼 장면은 바로 그렇게 온몸을 던져 희망의 씨앗을 뿌린 사람들의 이야기다. --- p.52~53
양전백을 만난 뒤, 선우혁은 자기 고향인 정주로 가서 성공한 사업가이자 교육자, 그리고 기독교 장로이기도 한 이승훈을 만난다. 그는 선우혁이 만나려 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선우혁의 고향 선배이자 105인 사건으로 같이 옥고를 치른 동지이기도 했다. 선우혁은 양전백에게 말했던 것과 같은 내용을 털어놓는다. 특히 그가 강조한 것은 세계에 보여주는 큰 시위운동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언제나 신문을 들여다보면서 이 소식이 오기만 기다렸소. 이제야 민족의 살길이 생겼구려.” 이승훈은 선우혁의 말을 듣고 몹시 기뻐하면서, 마침 오산학교 교사들의 봉급을 주기 위해 자신의 친형이 전답 25마지기를 팔아 마련해둔 돈 5,000원을 선뜻 그에게 내준다. (……) 이승훈, 양전백, 이명룡은 “우리는 105인 사건 때 한 차례씩 죽었다가 살아나온 목숨이므로, 그때 죽은 셈치고 다시 나라를 위해 일하자”라고 서로 맹세했다고 한다. --- p.109~111
‘신문관판’ 독립선언서는 ‘보성사판’과 함께 국가지정기록물로까지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신문관판은 보성사판과 활자가 전혀 다르다. 또 신문관판은 띄어쓰기도 되어 있고, 현대 문법에 가깝게 표기되어 있다. 보성사판에서 ‘업도다’라고 한 것을 ‘없도다’, ‘업스니’라고 한 것을 ‘없으니’ 등으로 표기했다. 그런데 『매일신보』 1919년 1월 1일 자에 최남선이 쓴 글을 보면, 독립선언서에서 쓴 표현과 동일한 ‘업슴’ 등의 표현이 나온다. 따라서 신문관판은 최남선이 현대 문법에 맞게 쓴 것이라는 주장은 성립하기 어렵다. 아마도 신문관판이라는 것은 해방 이후 누군가 이러한 오류를 바로잡고, 맞춤법에 맞춰 다시 조판해 인쇄한 것이 아닐까 한다. --- p.169~170
당시 민족대표는 독립선언식과 선언문의 배포를 통한 독립선언, 그리고 일본 정부, 조선총독부,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의견서와 독립청원서 전달을 무사히 마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 그러나 이 선택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손병희는 3년 형을 받고 복역하던 중 1919년 11월 뇌출혈로 쓰러졌다. 온몸이 마비되는 상황에서도 병보석은 줄곧 기각됐고, 1920년 10월이 되어서야 병보석으로 출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1922년 심장마비로 서거하고 만다. 양한묵은 투옥된 지 3달이 안 된 5월 26일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민족대표 33인에 들지 않았지만 도쿄에 가서 경시총감과 만난 뒤 체포된 안세환은 옥살이의 후유증으로 정신이상을 앓다가 죽었다. (……) 여러 고초를 겪고도 살아남은 민족대표는 대부분 계속해서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치거나 지조를 지키며 살았다. --- p.193~194
덕수궁에 돌입한 시위대에 있었던 유진혁에 따르면, 당시 세브란스의전 학생 1명이 앞장서고 200여 명의 군중이 그의 뒤를 따라 경찰 및 이왕직의 보병대와 육박전을 벌인 끝에 안으로 돌입했다. 그런데 덕수궁에 들어간 그들은 그곳의 너무나 호화로운 별세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왕세자 이은을 면회하고자 했으나 거절당했다. 같은 땅 위에서 똑같이 망국을 맞고 식민지 지배를 받는 처지였지만, 이왕가와 일반 민중이 처한 삶과 입장은 이렇게 달랐다. --- p.207
헌병대에 이르렀을 때, 군중의 수는 1,000명 정도로 늘어났다. 이들은 연이어 독립 만세를 외치며, 일제의 식민통치를 신랄하게 규탄했다. 서봉화는 이렇게 외쳤다. “이놈들아, 내 나라를 내놓아라!” 이에 헌병분대장은 태극기를 든 그의 어깨를 군도로 내리쳤다. 격노한 서봉화가 가슴을 헤치고 “찌를 테면 찔러 보아라”라고 외치자, 이번에는 군도가 서봉화의 배를 찔렀다. 서봉화는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숨졌다. 이 광경을 지켜 본 군중은 분에 못 이겨 헌병분대로 습격해 쳐들어갔다. 헌병들은 마구 총을 쏘았고 많은 사람들이 쓰러졌다. 다음 날, 전날의 참극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 p.217
유럽에서도 민주공화국이라는 용어가 헌법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 2월의 체코슬로바키아 헌법과 그해 10월의 오스트리아 연방헌법부터다. 1919년 8월 11일에 공포된 바이마르 헌법조차 “독일제국은 공화국이다”라고만 했을 뿐이다. 이처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19년 4월 임시헌장에서 민주공화국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세계사적으로 볼 때에도 선구적인 것이다. --- p.332
3·1운동 이후 여러 정부안이 나올 때마다 왜 멀리 미국에 있던 이승만이라는 이름이 빠지지 않고 집정관 총재나 국무총리 등으로 자주 거론된 걸까? (……) 그는 『황성신문』 등을 통해 이름을 알리는데, 이후 미국에 가서 불과 5~6년 만에 학사, 석사, 박사 과정을 마친다. 조지워싱턴·하버드·프린스턴대학교 같은 미국 명문대에서 국제정치학과 국제법을 전공한, 한국인 최초의 '박사'가 된 것이다. (……) 당대 한국인으로서 가장 지적 수준이 높고 성공한 사람, 거기다 독립협회 운동을 한 독립운동가, 문명개화에 매진하는 인물 등으로 소개됐다. 많은 사람의 신망을 얻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신문에 소개되지 않은 것이 한 가지 있었으니, 바로 이승만 개인의 성품이다. 이승만은 임시정부 최고 지도자이면서도 1919년 12월까지 상하이에 오지 않아 많은 원성을 샀다. 또한 상하이에 도착한 뒤에도 오래 머물지 않고, 1920년 6월 다시 자신의 활동지인 미국으로 돌아가 버린다. --- p.327~328.
서울에서 수백 킬로미터 기차를 타고 가서, 또 수십 킬로미터를 걸어가서 독립선언서를 전한 사람들, 장날의 만세시위에 쓰기 위해 어두운 골방에서 수백 장의 태극기를 그리고 또 그린 사람들, 격문을 등사하지 못해 먹지 몇 장을 놓고 골필로 눌러쓴 사람들, 장터까지 태극기와 선언서를 몰래 운반해온 사람들, 시위 현장에서 앞장서서 독립 만세를 부르고 시위 행렬을 이끈 사람들, 그리고 결국 군경의 총칼에 희생된 사람들. 그들은 1919년의 3~4월을 찬란한 봄으로 만든 영웅들입니다. 이 책은 오로지 그들을 위해서 쓴 책입니다.
이처럼 3·1운동을 준비한 이들 대부분은 민족자결주의가 한국에 곧바로 적용될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1919년 봄의 시점에 독립의 의지를 분명히 보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당장 그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할지라도, 비록 자신들이 큰 희생을 치른다고 할지라도, 훗날 독립이란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지금부터 살펴볼 장면은 바로 그렇게 온몸을 던져 희망의 씨앗을 뿌린 사람들의 이야기다. --- p.52~53
양전백을 만난 뒤, 선우혁은 자기 고향인 정주로 가서 성공한 사업가이자 교육자, 그리고 기독교 장로이기도 한 이승훈을 만난다. 그는 선우혁이 만나려 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선우혁의 고향 선배이자 105인 사건으로 같이 옥고를 치른 동지이기도 했다. 선우혁은 양전백에게 말했던 것과 같은 내용을 털어놓는다. 특히 그가 강조한 것은 세계에 보여주는 큰 시위운동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언제나 신문을 들여다보면서 이 소식이 오기만 기다렸소. 이제야 민족의 살길이 생겼구려.” 이승훈은 선우혁의 말을 듣고 몹시 기뻐하면서, 마침 오산학교 교사들의 봉급을 주기 위해 자신의 친형이 전답 25마지기를 팔아 마련해둔 돈 5,000원을 선뜻 그에게 내준다. (……) 이승훈, 양전백, 이명룡은 “우리는 105인 사건 때 한 차례씩 죽었다가 살아나온 목숨이므로, 그때 죽은 셈치고 다시 나라를 위해 일하자”라고 서로 맹세했다고 한다. --- p.109~111
‘신문관판’ 독립선언서는 ‘보성사판’과 함께 국가지정기록물로까지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신문관판은 보성사판과 활자가 전혀 다르다. 또 신문관판은 띄어쓰기도 되어 있고, 현대 문법에 가깝게 표기되어 있다. 보성사판에서 ‘업도다’라고 한 것을 ‘없도다’, ‘업스니’라고 한 것을 ‘없으니’ 등으로 표기했다. 그런데 『매일신보』 1919년 1월 1일 자에 최남선이 쓴 글을 보면, 독립선언서에서 쓴 표현과 동일한 ‘업슴’ 등의 표현이 나온다. 따라서 신문관판은 최남선이 현대 문법에 맞게 쓴 것이라는 주장은 성립하기 어렵다. 아마도 신문관판이라는 것은 해방 이후 누군가 이러한 오류를 바로잡고, 맞춤법에 맞춰 다시 조판해 인쇄한 것이 아닐까 한다. --- p.169~170
당시 민족대표는 독립선언식과 선언문의 배포를 통한 독립선언, 그리고 일본 정부, 조선총독부,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의견서와 독립청원서 전달을 무사히 마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 그러나 이 선택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손병희는 3년 형을 받고 복역하던 중 1919년 11월 뇌출혈로 쓰러졌다. 온몸이 마비되는 상황에서도 병보석은 줄곧 기각됐고, 1920년 10월이 되어서야 병보석으로 출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1922년 심장마비로 서거하고 만다. 양한묵은 투옥된 지 3달이 안 된 5월 26일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민족대표 33인에 들지 않았지만 도쿄에 가서 경시총감과 만난 뒤 체포된 안세환은 옥살이의 후유증으로 정신이상을 앓다가 죽었다. (……) 여러 고초를 겪고도 살아남은 민족대표는 대부분 계속해서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치거나 지조를 지키며 살았다. --- p.193~194
덕수궁에 돌입한 시위대에 있었던 유진혁에 따르면, 당시 세브란스의전 학생 1명이 앞장서고 200여 명의 군중이 그의 뒤를 따라 경찰 및 이왕직의 보병대와 육박전을 벌인 끝에 안으로 돌입했다. 그런데 덕수궁에 들어간 그들은 그곳의 너무나 호화로운 별세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왕세자 이은을 면회하고자 했으나 거절당했다. 같은 땅 위에서 똑같이 망국을 맞고 식민지 지배를 받는 처지였지만, 이왕가와 일반 민중이 처한 삶과 입장은 이렇게 달랐다. --- p.207
헌병대에 이르렀을 때, 군중의 수는 1,000명 정도로 늘어났다. 이들은 연이어 독립 만세를 외치며, 일제의 식민통치를 신랄하게 규탄했다. 서봉화는 이렇게 외쳤다. “이놈들아, 내 나라를 내놓아라!” 이에 헌병분대장은 태극기를 든 그의 어깨를 군도로 내리쳤다. 격노한 서봉화가 가슴을 헤치고 “찌를 테면 찔러 보아라”라고 외치자, 이번에는 군도가 서봉화의 배를 찔렀다. 서봉화는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숨졌다. 이 광경을 지켜 본 군중은 분에 못 이겨 헌병분대로 습격해 쳐들어갔다. 헌병들은 마구 총을 쏘았고 많은 사람들이 쓰러졌다. 다음 날, 전날의 참극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 p.217
유럽에서도 민주공화국이라는 용어가 헌법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 2월의 체코슬로바키아 헌법과 그해 10월의 오스트리아 연방헌법부터다. 1919년 8월 11일에 공포된 바이마르 헌법조차 “독일제국은 공화국이다”라고만 했을 뿐이다. 이처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19년 4월 임시헌장에서 민주공화국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세계사적으로 볼 때에도 선구적인 것이다. --- p.332
3·1운동 이후 여러 정부안이 나올 때마다 왜 멀리 미국에 있던 이승만이라는 이름이 빠지지 않고 집정관 총재나 국무총리 등으로 자주 거론된 걸까? (……) 그는 『황성신문』 등을 통해 이름을 알리는데, 이후 미국에 가서 불과 5~6년 만에 학사, 석사, 박사 과정을 마친다. 조지워싱턴·하버드·프린스턴대학교 같은 미국 명문대에서 국제정치학과 국제법을 전공한, 한국인 최초의 '박사'가 된 것이다. (……) 당대 한국인으로서 가장 지적 수준이 높고 성공한 사람, 거기다 독립협회 운동을 한 독립운동가, 문명개화에 매진하는 인물 등으로 소개됐다. 많은 사람의 신망을 얻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신문에 소개되지 않은 것이 한 가지 있었으니, 바로 이승만 개인의 성품이다. 이승만은 임시정부 최고 지도자이면서도 1919년 12월까지 상하이에 오지 않아 많은 원성을 샀다. 또한 상하이에 도착한 뒤에도 오래 머물지 않고, 1920년 6월 다시 자신의 활동지인 미국으로 돌아가 버린다. --- p.327~328.
서울에서 수백 킬로미터 기차를 타고 가서, 또 수십 킬로미터를 걸어가서 독립선언서를 전한 사람들, 장날의 만세시위에 쓰기 위해 어두운 골방에서 수백 장의 태극기를 그리고 또 그린 사람들, 격문을 등사하지 못해 먹지 몇 장을 놓고 골필로 눌러쓴 사람들, 장터까지 태극기와 선언서를 몰래 운반해온 사람들, 시위 현장에서 앞장서서 독립 만세를 부르고 시위 행렬을 이끈 사람들, 그리고 결국 군경의 총칼에 희생된 사람들. 그들은 1919년의 3~4월을 찬란한 봄으로 만든 영웅들입니다. 이 책은 오로지 그들을 위해서 쓴 책입니다.
--- p.355
출판사 리뷰
“대체 왜 이러한 무모한 일을 저질렀는가?”
“우리는 전혀 무모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성공을 기대하고 벌인 일도 아니다. 이번에 우리가 좌절하면 그 뒤를 이어서 또 다른 사람들이 나올 것이고, 100명을 죽이면 또 다른 100명이 나올 것이다. 당신들이 아무리 막으려 해도 한번 터진 물길은 계속해서 흘러넘칠 것이다.”
-본문 중에서
3월의 함성에서 임시정부의 탄생까지
모두가 주인공이었던 그 위대한 시절을 기록하다
1919년 3월 1일, 한국인은 일제의 억압에 맞서 맹렬하게 일어난다. 서울과 평양에서 시작된 만세의 함성은 이내 한반도 전역은 물론 만주, 연해주, 미국 필라델피아 등 세계 곳곳으로 번졌고, 그들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하나가 된 목소리로 자주와 독립, 그리고 평화를 당당히 외친다. 나라를 빼앗기고 식민지로 전락한 지 약 10년 만의 일이었다. 비록 그 염원이 곧바로 독립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1945년 해방의 그날까지 치열하게 이어진 독립운동의 시작점이 되었으며, 또한 그해 4월 11일 민주주의와 공화주의 그리고 자유와 평등을 기치로 내건 임시정부를 탄생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이 책 『1919』는 그 암울했던 시대, 한 걸음 한 걸음 새로운 길을 개척해나가며 희망을 쌓아 올린 보통 사람들의 뜨거운 1년을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여운형, 조소앙, 선우혁, 손병희, 최린 같은 독립운동가들부터 농민과 노동자, 유관순 같은 어린 학생들까지, 자유와 독립을 위해 목숨까지 기꺼이 내던진 이들의 행보는 곳곳에서 씨실과 날실처럼 엮여 마침내 전국적인 만세운동과 임시정부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1919』가 펼쳐놓는 그 감동의 드라마는,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 태동했던 첫 번째 봄날의 풍경들이다.
새롭게 밝혀진 1919년 봄날의 모든 것
한국인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우리의 역사!
『1919』의 저자 박찬승 교수는 30년간 한국 근현대사를 연구해온 단단한 내공으로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관련해 지금껏 왜곡된 채 잘못 알려졌거나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던 중요한 사실들을 새롭게 밝혀낸다. 예컨대 한 스타 강사가 낮술이나 마시고 대부분 변절한 사람들로 치부해버린 민족대표 33인이 실제로는 내란죄로 사형될 것까지 감수하고 일본에 독립을 간청하는 ‘독립청원’이 아닌 당당하게 독립했음을 통지한 ‘독립선언’을 택했다는 것과, ‘007 작전’을 방불케 하는 계획으로 전국 방방곡곡에 선언서를 전달함으로써 전국적인 만세시위를 성공시킨 과정을 치밀하게 추적한다.
또한 현재 국가지정기록물로 등록되어 있는 이른바 ‘신문관판’ 독립선언서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독립선언서 공약 3장의 집필자가 정말 한용운이 맞는지 아닌지, 민족대표가 선언식 장소를 바꾼 이유는 무엇이며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이 30년 만인 올해 4월 11일로 바로잡힌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고 세계 최초로 헌법(임시헌장)에 ‘민주공화국’을 명기한 나라가 다름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사실까지, 무수히 많은 역사적 진실이 이 책에서 새롭게 밝혀진다.
『1919』는 모두 7장으로 구성되어 1919년 전체를 조망한다. 1장 「희망의 씨앗을 마련하다」에서는 나라를 빼앗기고 무단통치가 자행되는 과정부터 당대의 세계사적 흐름을 되짚고, 2장 「상하이와 도쿄에서 만세운동을 준비하다」에서는 3·1운동을 불씨를 마련한 신한청년당과 도쿄 한복판에서 독립을 외친 조선청년독립단의 활약을 살펴본다. 3장 「서울의 움직임, 민족대표와 학생단」과 4장 「독립선언서, 독립과 자주를 세계에 선포하다」, 5장 「마침내 울려 퍼진 3월의 만세 소리」에서 3·1운동이 기획되고 준비되고 실행되는 다사다난한 과정은 그 자체로 완벽한 드라마다.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6장과 7장이다. 6장 「전국으로 확산된 만세의 함성」에서는 그동안 잘 다루어지지 않았던 전국 곳곳의 만세시위를 평화 시위, 항의 시위, 공공기관 점거 및 공격 시위 등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살펴본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관순을 비롯해 3·1운동의 진짜 주인공이었던 수많은 보통 사람들의 뜨거운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마지막 7장 「대한민국의 탄생」에서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탄생 과정과 그 의미를 상세하게 살핀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알아야 할 1919년의 역사가 이 책 한 권에 모두 담겨 있는 것이다.
“역사는 기억하는 사람들의 것이다”
100년 전 뜨거운 역사가 오늘의 우리에게 묻다
우리의 근현대사는 1919년 3·1운동과 임시정부 탄생을 출발점으로 식민지 지배, 자주 독립, 전쟁과 분단, 경제성장과 민주화, 자유와 평등 같은 현실의 과제를 끊임없이 극복하고 성취해온 역사다. 그 긴 여정은 결코 쉽지 않았고, 또 어떤 부분은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다. 우리가 다시 한번 100년 전 함성을 기억하고, 또 귀 기울여야 할 이유도 바로 여기 있다.
역사에는 힘이 있다. 그것을 거울이나 지렛대로 삼아 현재를 차분하게 돌아볼 때, 우리는 더 나은 내일을 전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올해만큼 대한민국의 출발점을 돌아보기에 적합한 때는 없다. 『1919』에 담긴,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몰락한 식민지의 백성에서 민주공화국으로 시민으로 새롭게 태어난 그 위대한 여정을 마주하고, ‘자유, 평화, 정의, 평등’을 외친 그들의 목소리에 제대로 응답한다면, 우리는 분명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전혀 무모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성공을 기대하고 벌인 일도 아니다. 이번에 우리가 좌절하면 그 뒤를 이어서 또 다른 사람들이 나올 것이고, 100명을 죽이면 또 다른 100명이 나올 것이다. 당신들이 아무리 막으려 해도 한번 터진 물길은 계속해서 흘러넘칠 것이다.”
-본문 중에서
3월의 함성에서 임시정부의 탄생까지
모두가 주인공이었던 그 위대한 시절을 기록하다
1919년 3월 1일, 한국인은 일제의 억압에 맞서 맹렬하게 일어난다. 서울과 평양에서 시작된 만세의 함성은 이내 한반도 전역은 물론 만주, 연해주, 미국 필라델피아 등 세계 곳곳으로 번졌고, 그들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하나가 된 목소리로 자주와 독립, 그리고 평화를 당당히 외친다. 나라를 빼앗기고 식민지로 전락한 지 약 10년 만의 일이었다. 비록 그 염원이 곧바로 독립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1945년 해방의 그날까지 치열하게 이어진 독립운동의 시작점이 되었으며, 또한 그해 4월 11일 민주주의와 공화주의 그리고 자유와 평등을 기치로 내건 임시정부를 탄생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이 책 『1919』는 그 암울했던 시대, 한 걸음 한 걸음 새로운 길을 개척해나가며 희망을 쌓아 올린 보통 사람들의 뜨거운 1년을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여운형, 조소앙, 선우혁, 손병희, 최린 같은 독립운동가들부터 농민과 노동자, 유관순 같은 어린 학생들까지, 자유와 독립을 위해 목숨까지 기꺼이 내던진 이들의 행보는 곳곳에서 씨실과 날실처럼 엮여 마침내 전국적인 만세운동과 임시정부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1919』가 펼쳐놓는 그 감동의 드라마는,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 태동했던 첫 번째 봄날의 풍경들이다.
새롭게 밝혀진 1919년 봄날의 모든 것
한국인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우리의 역사!
『1919』의 저자 박찬승 교수는 30년간 한국 근현대사를 연구해온 단단한 내공으로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관련해 지금껏 왜곡된 채 잘못 알려졌거나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던 중요한 사실들을 새롭게 밝혀낸다. 예컨대 한 스타 강사가 낮술이나 마시고 대부분 변절한 사람들로 치부해버린 민족대표 33인이 실제로는 내란죄로 사형될 것까지 감수하고 일본에 독립을 간청하는 ‘독립청원’이 아닌 당당하게 독립했음을 통지한 ‘독립선언’을 택했다는 것과, ‘007 작전’을 방불케 하는 계획으로 전국 방방곡곡에 선언서를 전달함으로써 전국적인 만세시위를 성공시킨 과정을 치밀하게 추적한다.
또한 현재 국가지정기록물로 등록되어 있는 이른바 ‘신문관판’ 독립선언서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독립선언서 공약 3장의 집필자가 정말 한용운이 맞는지 아닌지, 민족대표가 선언식 장소를 바꾼 이유는 무엇이며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이 30년 만인 올해 4월 11일로 바로잡힌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고 세계 최초로 헌법(임시헌장)에 ‘민주공화국’을 명기한 나라가 다름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사실까지, 무수히 많은 역사적 진실이 이 책에서 새롭게 밝혀진다.
『1919』는 모두 7장으로 구성되어 1919년 전체를 조망한다. 1장 「희망의 씨앗을 마련하다」에서는 나라를 빼앗기고 무단통치가 자행되는 과정부터 당대의 세계사적 흐름을 되짚고, 2장 「상하이와 도쿄에서 만세운동을 준비하다」에서는 3·1운동을 불씨를 마련한 신한청년당과 도쿄 한복판에서 독립을 외친 조선청년독립단의 활약을 살펴본다. 3장 「서울의 움직임, 민족대표와 학생단」과 4장 「독립선언서, 독립과 자주를 세계에 선포하다」, 5장 「마침내 울려 퍼진 3월의 만세 소리」에서 3·1운동이 기획되고 준비되고 실행되는 다사다난한 과정은 그 자체로 완벽한 드라마다.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6장과 7장이다. 6장 「전국으로 확산된 만세의 함성」에서는 그동안 잘 다루어지지 않았던 전국 곳곳의 만세시위를 평화 시위, 항의 시위, 공공기관 점거 및 공격 시위 등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살펴본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관순을 비롯해 3·1운동의 진짜 주인공이었던 수많은 보통 사람들의 뜨거운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마지막 7장 「대한민국의 탄생」에서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탄생 과정과 그 의미를 상세하게 살핀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알아야 할 1919년의 역사가 이 책 한 권에 모두 담겨 있는 것이다.
“역사는 기억하는 사람들의 것이다”
100년 전 뜨거운 역사가 오늘의 우리에게 묻다
우리의 근현대사는 1919년 3·1운동과 임시정부 탄생을 출발점으로 식민지 지배, 자주 독립, 전쟁과 분단, 경제성장과 민주화, 자유와 평등 같은 현실의 과제를 끊임없이 극복하고 성취해온 역사다. 그 긴 여정은 결코 쉽지 않았고, 또 어떤 부분은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다. 우리가 다시 한번 100년 전 함성을 기억하고, 또 귀 기울여야 할 이유도 바로 여기 있다.
역사에는 힘이 있다. 그것을 거울이나 지렛대로 삼아 현재를 차분하게 돌아볼 때, 우리는 더 나은 내일을 전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올해만큼 대한민국의 출발점을 돌아보기에 적합한 때는 없다. 『1919』에 담긴,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몰락한 식민지의 백성에서 민주공화국으로 시민으로 새롭게 태어난 그 위대한 여정을 마주하고, ‘자유, 평화, 정의, 평등’을 외친 그들의 목소리에 제대로 응답한다면, 우리는 분명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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