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인물사 연구 (독서)/2.한국인물평전

이상룡 평전 암흑기의 선각 (2023)

동방박사님 2024. 2. 19.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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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국가의 존립이 무너지는 절망의 시기, 사방이 어둠에 덮여 한 줄기 빛도 찾기 어려운 시국이었다. 긴 세월 호사를 누려온 양반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빼앗길 것이 두렵지만 나서길 꺼리고, 같은 세월 갖은 착취와 학대를 받아온 백성들은 이가(李哥)나 왜가(倭哥)나 “그놈이 그놈”이라는 체념으로 나서길 주저하였다.

조선왕조 500년의 국시라면 충(忠)과 효(孝)이다. 모든 사회적 가치, 덕목, 교육, 예의, 범절이 여기에 모아지고 두 글자로 압축되었다. 충은 특히 국가의 안위가 문제되었을 때 적용되는 예비용이지만 평상시에는 군주에 대한 경애심이고, 효는 나날에 쓰이는 상비약처럼 가정의 윤리관이었다. 그런데 왜적의 침입으로 나라의 명운이 경각에 놓이면서 충은 삼십육계하고 효는 조상들 묫자리에 주저 앉았다.

하지만, 이것은 일반론적이고 예외도 없지 않았다. ‘암흑기의 선각’ 또는 ‘호모 노마드’(homo nomad)라 불리어 마땅한 사람(가족)들이 있었다. 같은 물을 마시고도 양은 젖을 만들고 뱀은 독을 만든다 했듯이, 같은 전통 유학을 배우고도 보수 유림의 낡은 외투를 벗어던지고 혁신유림으로 갈아입었던 사람들이었다.

석주(石州) 이상룡(李相龍, 1858~1932) 선생은 붓 대신 무기를 들고 의병활동→ 애국계몽운동→ 친일파 송병준, 이용구 등 처단 상소→ 해외망명에 나섰다. 노마드의 개척정신이 아니고서는 실천이 어려운 도정이었다.

백면서생에게 의병이나 해외망명은 여간해선 감행이 어려운 결단이었다. 더욱이 단신이 아닌 가족, 친척이 함께하는 망명은 쉽지 않다. 누대에 걸쳐 전승된 명문가의 기득권을 내려놓았고, 떠나기 전 노비들을 해방시키며 노비문서를 불살랐다.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사표이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먼 이역에서 서거하였다. 유언으로 유해를 해방이 될 때까지 고국으로 옮기지 말 것을 당부할만큼 ‘조국해방’을 절체절명의 소명으로 삼았던 애국자였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선각자였다.

목차

감사의 말씀-이항증

1부 그는 누구인가

석주 이상룡 선생을 찾아서
국가 위난기에 임청각에서 태어나

2부 교육, 성장 시기

과거낙방, 일본침략 나날이 심화돼
대한협회 안동지회조직 일제에 구속
의병지원에서 계몽운동으로

3부 국치와 망명

국치로 절망, 해외망명길 찾아
만주 횡도천에 망명짐 풀다
만주에서 자치기관 경학사설립
척박한 환경, 경학사 중심의 한인사회 구축
경학사 부설 신흥강습소 설립

4부 만주에 세운 교육, 협동기관

광업사에 이어 자신계 조직
부여 옛 땅에 후예들이 부민단 창설
중국 정부 당국에 공한 보내
일제의 토지수탈, 만주이민 급속증가
이주동포 많아지자 활력 ‘만주기사’ 짓다

5부 신흥무관학교

신흥무관학교 창설, 주지사 허가받아
신흥무관학교 교장맡아 경영책임
병기 구하지 못해 이론 교육으로
추위와 혹한에도 학도들 의기충천
졸업 후에는 신흥학우단으로
3500명 배출 무장투쟁 지도자로 활동

6부 남만주 동포에게 메시지

단군 옛터에서 희망을 양식삼고
망국족이지만 사람의 권리를 갖자
제군! 단체 만들어 힘을 기르도록

7부 무오독립선언 참여

대표급 39인과 ‘대한독립선언서’ 발표
‘주권불멸론’, 독립운동의 적통 내세워
국민의 ‘육탄혈전’을 촉구

8부 3·1혁명기의 활동

한족회와 군정부조직 책임 맡아
‘군정부’ 조직중 임정수립되자 ‘서로군정서’ 창설
아들보내 군자금 모으고 체코제 무기구입
게릴라전으로 일제에 타격

9부 무장독립전쟁 시기

만주독립군 봉오동, 청산리대첩 이뤄
봉오동, 청산리대첩의 역사적 평가
목에는 거액 현상금, 보복전에서 재기

10부 이승만 탄핵 이후

이승만의 위임통치론 극력반대
임시정부 의정원, 이승만 대통령 탄핵
결렬, 그러나 의미 있는 국민대표회의
박은식, 고별사에서 ‘이상룡 협조 요망’

11부 베이징의 조선공화정부

‘조선공화정부’ 이상룡을 대통령 추대
대통령추대 거부, 만주로 귀환

12부 임시정부의 수반

박은식 대통령 하야, 이상룡 천거
상하이 삼일당에서 초대 국무령 취임
국무령 사임하고 다시 서간도로

13부 국무령 퇴임 이후

남만주로 돌아왔으나 체력 약화
고향에서 동생이 모시러 왔으나

14부 독립못본 채 눈을 감다

75세 서거, ‘국토 회복되기 전에는 이곳에 묻어라’
가족, 일가친족의 항일투쟁
풍채 의젓하고 도량은 크고 두터워

15부 면면히 흐르는 독립운동가의 집안

유고와 손부가 쓴 운명의 모습
3등급 훈격에 재심 신청했으나

저자 소개

저 : 김삼웅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 《대한매일신보》(현 서울신문) 주필을 거쳐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치문화론을 가르쳤으며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친일파 재산환수위원회’ 자문위원, ‘국립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바른 역사 찾기에 힘써왔고,...

책 속으로

* 1894년은 국내외적으로 격변의 해였다. 동학농민혁명에 이어 일본군이 수원 부근 풍도에서 청국군함을 선제공격함으로써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정부의 갑오개혁, 동학군 2차봉기 등이 계속되었다. 이 땅의 남반부에서는 일본군에 의해 동학농민군이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루고, 북반부에서는 청일 양국군의 사활을 건 전쟁으로 피바다를 만들었다.

*경술국치라는 미증유의 국난 속에서 이상룡은 단호했다. 많은 지식인과 민중들이 역사의 격변을 맞아 방향을 잡지 못한 채 우왕좌왕할 때 그는 추진해온 대로 해외 망명을 결행했다. 그동안 집안 일을 해온 머슴들을 모두 해방시키고 노비문서를 불태웠다. 그리고 가족들의 해외 이동과 정착에 소요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논밭과 집을 팔았다.

* 이상룡과 한인지도자들은 이주한인이 많아지면서 풍화시엔(通化縣)을 중심으로 서간도 일대에 본격적인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자 서둘렀다. 경학사가 해체된 이후 한인사회의 자치와 산업의 향상을 지도할 새로운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912년 가을 부민단(扶民?)이 조직되었다. “부여의 옛 영토에 부여의 후손들이 부흥결사를 세운다는 뜻”이 담겼다.

* 이상룡은 신흥무관학교 교장으로 재임할 때는 물론 퇴임 후에도 자신이 지은 『대동역사(大東歷史)』를 교재로 우리 역사를 강의하였다. “1913년 이상룡은 만주지역 독립운동계 만이 아니라 그곳으로 이주해 오는 동료들을 정신적으로 무장시키고자 역사서를 저술했는네, 이것이 바로 신흥무관학교의 교재로 사용된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인들의 압박을 견디면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氣)’를 살려야 했다. 그는 『대동역사』를 편찬하였는데 이는 민족교육의 지침을 마련한 것이었다.”

* 아아, 제군들이여! 측간의 구더기가 똥을 즐기는 것은 그 더러움을 편안히 여겨서입니다. 골짜기의 새가 교목으로 옮겨 가는 이유는 밝은 것을 취한 것입니다. 지난날 우리들은 문을 닫고 깊숙이 거처하면서 외인(外人)들을 접하지 않았기에 절로 이미 비루하고 열등하게 되었는데도, 아직도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 석주 어른께서는 당신의 450년 된 고택인 ‘임청각’을 매각해서 독립사업에 쓰려고 외아들인 나의 시아버님을 한국으로 들여보냈다. 아버님은 20누대의 종손으로서 가문도 내팽개치고 독립운동 한답시고 떠나갔던 사람이 독립달성도 못하고 고향에 다시 들어가려니 얼굴에 소가죽을 덮어 쓴 것 같더라고 나중에도 몇 번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종손은 가문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어느 집안도 종손이 망명을 떠나는 법은 없단다. 그런데 석주 어른께서는 종손이면서 집안일보다 국가안위가 더 우선이라 하며 떠났으니 문중에서 좋아할 리가 없었다.

* 만주의 무장전쟁 세력이 비록 ‘벽상조각’에 그쳤지만 조선공화정부를 조직하면서 이상룡을 대통령으로 추대할 만큼 그는 이 분야의 확고한 위상을 갖고 있었다. 북경군사통일회의는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되고, 임시정부 측이 개조파와 창조파로 갈리는 등 독립운동 진영이 극심한 분열과 대립을 거치면서 1924년 해체되고 말았다.

* 국무령은 명칭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많은 권력이 부여된 임시정부의 수반이다. 하지만 이상룡은 전임 박은식과 같이 권력이나 명예에 급급한 인물이 아니었다. 취임 당시 67세로 건강도 썩 좋은 편이 못되었다. 여생을 바쳐 임시정부를 발전시키고 이를 동력삼아 조국광복에 초석이 되고자 다짐한다.

* 53세의 늦은 나이에 망명하여 그야말로 풍찬노숙의 세월이 흘러 어느덧 70고개에 다달았다. 날이 갈수록 포악성이 더해가는 일제의 포위망은 드넓은 만주땅을 종횡하며 압박하였다. 위기감을 느낀 후배 독립운동가들이 안전을 위해 더 깊은 산중으로 거처를 옮기도록 하고 신변을 보호해 주었다. 그의 목에 걸린 거액의 현상금은 중국인들도 넘보았다.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존경하는 독립운동가 유가족 여러분! 경북 안동에 임청각이라는 유서 깊은 집이 있습니다. 임청각은 일제강점기 전 가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무장 독립운동의 토대를 만든 석주 이상룡의 본가입니다. 무려 아홉 분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산실이고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상징하는 공간입니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는 그집을 관통하도록 철도를 놓았습니다. 아흔 아홉 칸 대저택이었던 임청각은 지금도 반토막이 난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이상룡 선생의 손자 손녀는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 고아원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임청각의 모습이 바로 우리가 되돌아보아야 할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일제와 친일의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지 못했습니다. 역사를 잃으면 뿌리를 잃는 것입니다. 독립운동가들을 더 이상 잊혀진 영웅으로 남겨두지 말아야 합니다. 명예뿐인 보훈에 머물지도 말아야 합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사라져야 합니다. 친일 부역자와 독립운동가의 처자가 해방 후에도 달라지지 않더라도 경험이 불의와의 타협을 정당화하는 왜곡된 가치관을 만들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을 모시는 국가의 자세를 완전히 새롭게 하겠습니다. 최고의 존경과 예의로 보답하겠습니다.

- 2017년 8월 15일 문재인 대통령 경축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