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인물사 연구 (독서)/2.한국인물평전

차미리사 평전 (2008) - 일제강점기 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

동방박사님 2024. 4. 16.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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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일제의 폭압에도 굴하지 않고 순응과 타협이라는 선택을 거부한 차미리사의 꼿꼿한 삶을 담담하게, 그러나 세세하게 보여준다. 한평생을 가난하고 못 배운 조선의 여성들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왔던,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의 온전한 독립을 염원했던 차미리사의 고매한 의지를 망각의 저편에서 기억의 이편으로 이끌어내고자 하였다. 시간을 쪼개 가며 낮에는 배화학당 교사로, 밤에는 가정부인들을 위한 야학교사로 활동한 교육운동가적 면모와 여성이 인격적으로 존중받기 위해서는 남성처럼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던 여성·교육운동가적 면모,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뛰었던 모습들이 고스란히 실려있다.

목차

책을 내며 | 오래된 약속

1 쓰개치마를 벗어버리고 더 넓은 세상으로
여자로 태어나 ‘섭섭이’로 불리다|꽃다운 나이에 남편을 잃다|쓰개치마를 쓰고 예배당에 나가다|‘미리사’로 다시 태어나다|쓰개치마를 벗고 중국을 향하여|황금의 나라, 자유의 나라 미국으로|재미 한인사회의 첫 사회복지가가 되다|자선사업으로 여성 사회를 활성화시키다|“나라를 위하여 피 흘리는 것은 백성 된 의무다”|다시 그리운 조국으로

2 일천만 조선 여성이여 오라, 다 내게로 오라
우리는 죽더라도 독립을 해야 한다|배우자! 새로운 지식을 배우자|조선인 본위의 교육을 획득하자|여자의 해방이라 함은 곧 인격의 해방이라|조선 여성의 교육은 조선 여성의 손으로!|나는 학교에 갈 수 있는 사람을 인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꽃 같은 처녀의 불같은 혀|개조, 개조하라!|눈 뜨고 귀 열려서 나갈 때가 제일 기쁘다|폭풍과 파란을 헤치고 한줄기 빛이 되다

3 조선 방방곡곡을 누비는 만 리 대장정을 떠나다
백두에서 한라, 그리고 서해에서 동해까지|예배당이 강연장소로 되었다|결혼은 아내, 사랑은 첩|물을 들여 입어라 다듬이질을 멈추어라|얼굴을 내놓고 좀 다녀봅시다|충성과 정직으로 서로 사랑하라|수레는 외바퀴로 구르지 못한다|조선문화사상의 제일 기록이 되다

4 조선 사람의 뜨거운 사랑과 땀과 피의 결정, 근화
청진동 가옥에 핀 무궁화|암탉이 알을 품듯, 조선 여성을 품다|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보통교육을 받고 빵을 구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합니다|조선의 딸들과 같이 울다가 세상을 떠나겠습니다|실제적으로 실업지식을 넣어 주려는 것이 저에게 둘도 없는 큰 계획입니다|자아를 잃은 곳에 무슨 참된 아내가 있으며 진실한 어머니가 있겠습니까|현재 조선 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에 나갈 수 있는 기술교육입니다

5 한순간도 조선 민족을 잊은 적이 없다
만경창파 성난 물결을 일엽편주로 건너듯|물밀듯하는 구경꾼|혹한에 핀 천자만홍|실로 민족의 딸임을 잊지 말라|황국신민의 서사를 외지 못하니 교장 될 자격이 없다|온전한 독립을 못 보고 죽는 것이 한이로다|글을 마치며

주석
참고문헌
부록1 차미리사 연보
부록2 차미리사 관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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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 : 한상권 (韓相權)
 
1953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덕성100년사 편찬위원회 위원장. 덕성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부위원장, 덕성여자대학교 차미리사연구소 소장, 한국역사연구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18세기 말∼19세기 초 場市 發達에 관한 基礎 硏究:慶尙道 地方을 중심으로〉로 석사 학위를, 〈朝鮮 後期 社會 問題와 訴? 制度의 發達:正祖代 ...

출판사 리뷰

차미리사의 잊혀진 생애를 복원하다

‘실용’에 묻혀버린 과거
2008년 2월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이념의 시대’를 청산하고 ‘실용의 시대’로 나가겠다고 천명한 이후, ‘실용’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표준이 되어 사회 전반에서 위력을 떨치고 있다. 과거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이명박 정부의 든든한 이념적 후원자인 뉴라이트 진영에서는 이명박 정부의 출현을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현재’로 보고 그 출현의 토대를 ‘과거’의 실용에서 찾는다. 나아가 이 과거의 실용에 일제 강점기의 순응과 타협, 다시 말해 친일 행위까지 포함시켜 일정부분 정당화한다.
저자는 실용이라는 이름으로 친일 행위에 면죄부를 주는 이러한 움직임이 민족의 독립을 삶의 제1원칙으로 삼아 한평생 식민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저항정신을 무력화시킨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고 말한다. 일제의 폭력에 식민지 조선인이 정면으로 대항하기는 어려웠으며 어쩔 수 없이 굴종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의 전시공업화 정책으로 일자리가 늘어나 황국식민지 교육을 받은 한국의 학생들이 취업할 수 있었다는 등의 서술이 친일을 당대를 살아가는 지혜로운 처신으로 받아들여지도록 만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역사인식에서 독립운동가의 희생과 헌신은 설 자리가 없다. 그저 잊힐 뿐이다.
그러나 각종 억압과 차별, 폭력과 권위에 맞서는 힘, 그리하여 세상을 좀 더 사람 사는 곳으로 만드는 힘은 망각되어서는 안 되는 그러한 독립운동가의 삶에서 비롯된다. 여기 망각의 저편에 머물러 있는 독립운동가가 한 명 있다. 일제 강점기 여성해방과 조국독립을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녔던 차미리사車美理士(1879~1955)가 바로 그다.

망각의 저편에서 되살린 독립운동가 차미리사
2002년 정부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차미리사의 공적을 기려 그를 독립유공자(건국훈장 애족장)로 서훈했다.

(차미리사는) 일제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항일민족계몽운동을 전개한 여성독립운동가이다. 미국으로 건너가 1905~1910년까지 한인교육기관인 대동교육회·대동보국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대동신문 발간에 기여하였고, 귀국하여 배화학교 사감으로 3·1운동을 겪으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20년 조선여자교육회를 설립해 순회강연을 통한 민족의 실력 양성을 역설하였고, 1923년 근화학원을 설립해 민족교육과 무궁화사랑운동을 전개했으며, 1940년 조선총독부의 압력에 의해 덕성여자실업학교 교장직에서 물러났다.

『차미리사 평전-일제 강점기 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는 일제의 폭압에도 굴하지 않고 순응과 타협이라는 ‘불가피한 선택’을 거부한 차미리사의 꼿꼿한 삶을 담담하게, 그러나 세세하게 보여준다. 한평생을 가난하고 못 배운 조선의 여성들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왔던,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의 온전한 독립을 염원했던 차미리사의 고매한 의지를 망각의 저편에서 기억의 이편으로 이끌어낸다. 친일이냐 독립운동이냐가 더 이상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현 시점에서 이 같은 차미리사의 올곧은 삶은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의 참모습을 되살림으로써 우리에게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라는 삶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한 가지 유용한 답을 제시한다.


차미리사는 누구인가

소박떼기 하나라도 더 끌어다 가르치겠다
차미리사는 사회운동가였다. 조혼, 남편과의 사별, 상동교회 출입 등을 통해 조선 여성의 비참한 처지에 눈뜨게 된 그는 좀 더 넓은 세상에서 배우고 깨우쳐 조국의 운명과 조선 여성의 삶을 변화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오른 중국과 미국 유학길. 지독한 열병 덕분에 귀가 잘 들리지 않게 되는 등의 숫한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차미리사는 하와이에서 무작정 이주하는 한인들을 위해 직업 알선, 숙소 제공, 전도 활동에 매진한다. 명실공히 재미 한인사회의 첫 여성 사회복지가 겸 전도부인이 된 것이다. 또한 190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인들이 안정된 가정생활을 할 수 있게 돕기 위해 한국부인회를 창립,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본국에 고아원을 설립하는 운동에도 깊숙이 관여하는 등 어려움에 처한 동포를 외면하지 않는다.
학업을 마친 후에는 “외국에 있기보다는 차라리 고국에 돌아와서 여러 동지들과 손을 잡고 직접으로 사회의 일도 하며 청년 여성을 교육시켜서 우리의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귀국하여 시간을 쪼개 가며 낮에는 배화학당 교사로, 밤에는 가정부인들을 위한 야학교사로 활동한다. 이러한 야학 활동에 배화학당 선교사들의 불만이 제기되자 차미리사는 말한다.

당신들은 미국에서 선교사라는 사명을 받고 왔지만 나는 미국 선교부에서 병든 몸으로 하나님의 사명을 받아 조선에 가서 일을 하라, 삼천만 명의 여성과 같이 울고 같이 먹으며 살려고 우리나라에 왔오. 그래서 소박떼기 하나라도 더 끌어다 가르치려고 왔오.

자신의 일신 영달이 아닌 조국과 동포를 먼저 생각함으로써 개인의 영혼 구원에 제1의 목적을 둔 개인복음주의가 아닌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세상을 하늘나라로 만들자’는 사회복음주의를 온몸으로 보여준 것이다.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차미리사는 여성운동가였다. 차미리사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섭섭이’라 불렸던 데서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듯이, ‘못났어도 아들 잘났어도 딸’이라는 남존여비사상은 당시 사회를 지배하던 대표적인 풍조였다.
차미리사는 이러한 풍조에 과감하게 반기를 든다. 그는 여성들이 자유와 평등의 시대에 걸맞은 삶을 살려면 무엇보다도 인격적 자각이 필요하다는 신념하에 일생을 노예적 삶에서 신음하는 일천만 조선 여성들에게 새로운 삶을 주기 위해 조선여자교육회를 창립한다. 그리고 깊은 단잠에 빠진 일반 여성들을 향해 “여자도 배워야 산다! 장옷을 벗고 긴 치마를 짤라 버리고 첩첩이 닫힌 속에서 뛰쳐나오너라!”라고 부르짖는다.
나아가 학생들이 자기 삶에 대해 주인의식을 갖고 창의적이고 실천적인 삶을 살도록 가르친다. 이러한 주체성, 창의성 강조는 근화여학교 교훈에 집약되어 있다.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

삶의 주체성과 자율성, 사고의 독자성과 창의성, 지식의 실천성을 강조함으로써 여성의 권리신장과 남녀평등의 실현을 위해 모든 노력을 바쳤던 것이다.

눈 뜨고 귀 열려서 나갈 때가 제일 기쁘다
차미리사는 교육운동가였다. 여자도 사람인 이상 배워야 산다고 생각한 그는 여성이 인격적으로 존중받기 위해서는 남성처럼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조선 사람들에게는 “고등교육보다는 보통교육이 더 필요하다”며 보통교육론을 주창한다. 이는 시집살이에 쪼들리는 이들, 무식하다고 남편에게 구박받는 이들, 남편에게 소박맞은 이들, 교육받지 못한 설움에 울면서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이들 등 문맹 상태에 있는 대다수의 여성들을 위한 교육론이었다.
이와 함께 “이론교육보다 실천교육이 중요하다”며 실업교육론을 강조한다. 이 또한 가정에서는 차별대우를 받고 사회에서는 소외당하는 여성들의 설움을 풀어주려는 목적에서 주창된다. 차미리사는 여성이 경제적으로 열등한 지위에 있는 현실이 여성으로 하여금 굴욕적, 노예적 처지에 있게 만든다는 판단하에 실생활에 이용될 만한 기술교육에 매진한다.

밤과 낮으로 산간을 헤매어가면서 실현의 방법으로 짜내고 있는 나의 포부는 조선의 전문학교나 대학교를 설립하여 학사 박사를 양성하자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안방구석에서 남자의 노리개 노릇할 소위 현모양처를 기르고자 함도 아니라. 실지로 생활상에 필요한 기술을 가르쳐 여사로 하여금 상당한 직업을 가지게 함에 있습니다.

여성의 경제적 권리 확보를 도움으로써 여성이 각종 억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이 같은 차미리사의 지론은 말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고 근화여학교 내에 양복과, 사진과 등의 설치로 구체화된다. 앎과 행함의 합일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나라를 위하여 피 흘리는 것은 백성 된 의무다
차미리사는 독립운동가이며 통일운동가였다. 미국에서 귀국 후 배화학당에서 성경과 영어를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불어넣는다. “우리는 다 나가서 죽더라도 독립을 해야 한다.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나라 없는 설움 당해 봤지. 나 한 목숨이 죽고 나라를 찾으면 대대손손이 잘 살게 될 것이 아닌가”라며 조국독립의 소중함을 가르친 것이다. 또한 교육을 통해 나라를 되찾겠다는 취지하에 학생들에게도 “실로 민족의 딸임을 잊지 말라”고 외친다. 나라를 위해 피 흘리는 것이 백성 된 의무라는 평소 신념에서 비롯된 가르침이었다.

취하리라 취하리라 이혈보국 취하리라. 저 원수의 대포알이 우리 한국 독립 결과될 꽃봉이라. 이 내 몸은 대포알에 집이 될지라도 내 나라만 독립되면 나의 죽음 꽃이로다. 동포 동포여 내가 참으로 고하노니 나라를 위하여 피 흘리는 것은 백성된 의무요 동포를 위하여 피흘리는 것은 사람의 직책이라. 우리의 직책을 다하여 세상에 빛이 되고 나라에 꽃이 되옵시다.

아울러 해방 이후 남과 북으로 갈라져 단독선거 실시와 단독정부 수립이 기정사실화되자 남북협상을 통해 통일국가 수립을 달성하자는 지식인 108인 서명에 동참, 통일조국 완성을 염원한다. 임종하는 순간에도 “내게는 한 가지 한이 있다. 온전한 독립을 못 보고 죽는 것이 유한이로다”라고 하여, 통일정부 수립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친 민족주의자로서의 참모습을 눈 감는 순간까지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역사 망각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산증인, 차미리사

기억을 둘러싼 투쟁
새 천년이 시작되는 2000년, 덕성여대에서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강요된 하나의 기억, 즉 송금선이 덕성여대의 설립자이자 민족교육?여성교육의 선구자라는 기억을 거부하고 망각의 저편으로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었던 또 하나의 기억, 곧 교육운동가이며 독립운동가인 차미리사가 바로 덕성학원의 설립자라는 기억을 역사의 이편으로 되살리려는 노력 사이의 싸움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는 이 책을 통한 차미리사 복원이 두 가지 점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첫째, 과거 민족의 공기公器로 기능했던 사학의 제자리 찾기다. 사학은 해방 이후 사유화?세습화되면서 족벌세습, 친인척비리, 만성적인 학내분규로 얼룩져왔다. 이러한 현실에서 전국순회강연을 통해 모은 돈으로 순 조선적인 학교를 건립한 차미리사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작업은 대학사에 새로운 획을 긋는 이정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친일 잔재 청산이다. 해방된 지 벌써 60여년, 그러나 아직까지 이 땅의 역사 바로세우기는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에 매진하자는 실용 덕분에 망각이 힘을 얻고 있다. 송금선 또한 마찬가지다. 젊은이들의 학병 지원을 독려하고 일제의 침략전쟁을 옹호한 친일 인사가 민족 사학의 주인으로 둔갑한 어처구니없는 현실이 그저 잊히고 있을 뿐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차미리사 되살리기는 송금선, 나아가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는 친일 잔재 청산 작업의 일환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기억 되살리기
친일 행위자들은 말한다. 일제의 강압에 의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그러나 이러한 강변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만일 그랬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면, 해방 후 자신들의 민족반역 행위에 대해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상식이라고. 사죄는커녕 민족 지도자로 둔갑하여 여전히 화려함과 영광을 누리는 뻔뻔함, 한술 더 떠 친일 잔재를 청산하려는 움직임을 정치적 음모로 몰아붙이는 적반하장에 진정성을 찾을 수 있겠는가라고.
차미리사에 대한 기억의 복원이 유의미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여기에 있다. 저자는 말한다. 친일 행위는 민족적 업압과 차별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반민족적이며, 지극히 폭력적인 파시즘적 지배를 옹호했다는 점에서 반민주적이며, 일제의 전시총동원체제하에서 전쟁에 협력했다는 점에서 반평화적인 범죄 행위라고.
친일은 실용이라는 미명 하에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 망각되어서도 안 된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과 여성해방운동, 나보다는 동포를 위한 노력은 고루한 과거가 아닌 오늘 이 순간까지 영향을 미치는 생생한 현실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토대를 닦기 위해서 차미리사의 희생과 헌신은 차분히 되새길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