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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시인이기 전에 독립투사 (2024)

동방박사님 2024. 8. 15.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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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한국인에게 이육사는 매우 익숙한 이름이다. 교과서에서 지하철역 쉼터에 이르기까지 〈청포도〉나 〈광야〉와 같은 그의 시를 일상에서 여상히 접할 수 있으며 그의 일대기 역시 각종 매체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간 알려진 이육사의 생애는 문학적인 성취를 쫓아가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져 시인으로서만 설명될 뿐, 이육사의 다양한 모습과 격렬한 저항활동을 모두 담아내지는 못했다. 또한 그마저 잘못 알려진 것이 상당했다.

《이육사, 시인이기 전에 독립투사》는 언론인으로서의 삶과 무장투쟁에 이르기까지 40년간 다양한 활동을 전개한 이육사의 생애를 복원하여 이육사를 저항시를 쓴 시인이 아닌 자신의 저항시를 삶으로 실천한 독립운동가로 재조명한다. 그럼으로써 이육사를 매우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믿음이 잘못되었음을 알려준다. 지난 2010년 출간한 《이육사 평전》의 개정판으로, 이육사 탄생 120주년과 순국 80주기를 맞아 새로운 연구 성과를 보태고 도판을 일부 추가하고 판형을 좀 더 크게 하여 책을 새롭게 구성했다.

목차


책을 펴내며
이육사 연보
평전을 다시 쓰면서

육사가 사용한 이름, 264에서 戮史를 거쳐
‘이원삼’에서 ‘이활’로
이활과 대구 264
264에서 육사肉瀉?戮史를 거쳐 육사陸史로

육사의 고향, 원촌 마을 881번지
육사를 만나러 가는 길
〈계절의 오행〉에 담긴 원촌 마을

1904년, 육사의 출생과 집안 전통
육사를 둘러싼 ‘무서운 규모’
육사의 형제들

1909~1924년, 육사가 자라면서 받은 교육
한문을 배우며 자라나다
보문의숙寶文義塾을 거쳐 도산공립보통학교 다니다
혼인하고 대구로 이사하다
일본 유학

1925~1926년, 중국을 드나들며 민족의식을 키우다
대구 조양회관에서 문화 활동을 벌이다
베이징 나들이
베이징에서 ‘중국대학 상과’에 다니다

1927~1930년, 감옥을 드나들면서도 꺾이지 않다
장진홍 의거에 따른 수감 생활 1년 7개월
대구에서 기자 생활
‘대구 격문 사건’으로 2개월 구금되다
잦은 만주 나들이, 결국은 베이징으로
《중외일보》에서 《조선일보》로

1931~1933년, 초급 군사간부가 되다
윤세주尹世?가 권한 난징행
베이징을 거쳐 난징에 도착한 의열단
의열단,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열다
육사, 난징에서 의열단장 김원봉을 만나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다니다
졸업 기념으로 연극을 공연하다
육사가 맡은 임무
봄비 내리는 난징에서 국내 침투 준비
의열단에 가입하지 않았다는데

1933~1934년, 국내 근거지 확보하다가 체포되다
상하이에서 루쉰을 만나다
서대문 감옥에 갇히다

1930~1944년, 평론가·수필가·시인의 삶
본격적인 글쓰기와 사회 활동
〈청포도〉와 〈절정〉

1933~1936년, 시사평론에 보이는 그의 시대 인식
시사평론가로서의 육사
육사의 정세 인식

1943년, 친일의 물결 헤치고 투쟁의 길로
또다시 베이징으로 간 까닭은
충칭과 옌안을 연결하려 하다
베이징에서 순국하다
‘베이징 감옥’은 어디일까
고향에 묻히다

백마 타고 온 초인, 이육사

출판사 리뷰

시와 같은 저항, 저항과 같은 시
백마 타고 온 초인 이육사


탄생 120주년 순국 80주기, 이육사의 삶을 찾아

한국인에게 이육사는 매우 익숙한 이름이다. 교과서에서 지하철역 쉼터에 이르기까지 〈청포도〉나 〈광야〉와 같은 그의 시를 일상에서 여상히 접할 수 있으며 그의 일대기 역시 각종 매체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간 알려진 이육사의 생애는 문학적인 성취를 쫓아가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져 시인으로서만 설명될 뿐, 이육사의 다양한 모습과 격렬한 저항활동을 모두 담아내지는 못했다. 또한 그마저 잘못 알려진 것이 상당했다.
《이육사, 시인이기 전에 독립투사》는 언론인으로서의 삶과 무장투쟁에 이르기까지 40년간 다양한 활동을 전개한 이육사의 생애를 복원하여 이육사를 저항시를 쓴 시인이 아닌 자신의 저항시를 삶으로 실천한 독립운동가로 재조명한다. 그럼으로써 이육사를 매우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믿음이 잘못되었음을 알려준다. 지난 2010년 출간한 《이육사 평전》의 개정판으로, 이육사 탄생 120주년과 순국 80주기를 맞아 새로운 연구 성과를 보태고 도판을 일부 추가하고 판형을 좀 더 크게 하여 책을 새롭게 구성했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그러나 여전히 낯선

기존의 이육사의 삶을 소개한 많은 글들은 육사의 행적에 대한 정확한 자료 없이 전해지는 이야기를 정리하는 수준에 그친 경우가 많았다. 《이육사, 시인이기 전에 독립투사》는 이러한 한계에서 벗어나 독립운동사라는 새로운 시각과 치밀한 자료 조사 및 검증과정을 통해 이육사의 삶에 접근한다.
이 책은 당시 문인들이 남긴 자료에 일제 경?검찰 기록과 언론보도, 경북 안동에서 중국까지 아우르는 현장 답사 및 인터뷰 등을 추가하여 잘못된 사료는 바로잡고 널리 알려지지 않은 육사의 행적은 새롭게 소개한다. 여기에 2000년 첫 발간 이후 어문학과 역사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제기한 지적과 새로 발굴한 성과를 반영하여 초판을 수정?보완, 이육사 생애 복원의 완성도를 높였다.

‘264’에 숨겨진 뜻
《이육사, 시인이기 전에 독립투사》에서 이육사가 사용한 필명의 변천사를 정리한 것은 이러한 이육사 바로알기의 대표적인 예다. 이육사라는 필명이 그의 수인번호에서 유래했다는 에피소드는 제법 유명하다. 그러나 수인번호를 이름으로 택한 이유와 ‘육사’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 책은 육사의 한문 표기가 처음부터 ‘陸史’는 아니었음을 소개하며 이름의 변천과정과 각각의 의미를 밝힌다. ‘이육사’는 수인번호 ‘264二六四’에서 시작하여 세상에 대한 지독한 냉소가 담긴 ‘肉瀉’(고기를 먹고 설사하다)와 강렬한 혁명의지를 드러낸 ‘戮史’(역사를 죽이다)를 거치면서 이 모든 뜻을 품어 ‘陸史’로 자리 잡은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육사가 ‘육사’ 외의 필명으로도 활동했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육사는 시 못지않게 시사평론에도 힘을 기울여, 장제스 정책 비판과 중국 농촌의 몰락에서 국제무역주의에 이르기까지 세계정세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주는 비평을 다수 남긴 언론인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때 시사평론에는 대부분 육사가 아닌 ‘이활’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무인으로서의 이육사를 새롭개 소개하다
동해송도원에서 요양했기 때문에 그를 병약한 문인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육사는 항일무장투쟁을 위해 김원봉이 운영하는 조선혁명정치군사간부학교에 입교하여 보병전술에서 특수공작까지 군사훈련을 받은 군인이기도 했다. 단아한 시인으로만 알려진 통념과는 사뭇 다른 사실이다. 간부학교 동기이자 처남인 안병철 역시 육사가 권총명사수였다고 회고한다. 이러한 무인으로서의 기질을 바탕으로 육사는 순국 전까지 충칭과 옌안을 오가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조선독립동맹의 전선戰線 통일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국내에 무기를 반입하여 항일무력투쟁을 준비했었다.

잘못 알려진 ‘이육사’를 바로잡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풍부한 문서 자료를 근거로 제시하며 이육사에 대해 잘못 알려진 부분들을 하나하나 바로잡는다. 예를 들어 이육사가 의열단원으로 활동했다고 알려진 상식은 재고해야 한다고 밝힌다. 육사는 독립운동가로서 의열단장인 김원봉을 따르며 뜻을 함께했지만 동시에 레닌주의자로서 김원봉과 사상적으로 충돌하여 의열단 소조에서 배제되는 등 갈등을 빚었다. 따라서 저자는 이육사가 넓은 범위에서 의열단의 범주에 속할 수는 있지만 의열단원으로 활동했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이야기한다.

(코민테른의) 일국일당주의一國一黨主義에 위반하고 중국에서 조선인 자신이 조선의 혁명사업을 한다는 것은 그의 혁명적 정조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이육사가 김원봉을 비판하며

저자는 육사가 장진홍 의거에 직접 개입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근거가 희박함을 지적한다. 육사가 장진홍 의거에 대한 혐의로 수감된 것은 사실이나 이는 일제 경찰의 마구잡이식 수사로 육사뿐 아니라 대구에서 활동하던 상당수의 지식인들이 함께 받았던 고통이었다. 당시 육사는 폭탄상자에 적힌 필체가 동생인 이원일의 필체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검거되었다.
또한 육사가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현상공모를 했다고 알려진 이야기도 오류임을 밝힌다. 《조선일보》 1933년 9월 20일 자 〈현상소설 예선당선자 근황〉 기사에 ‘이활’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사실이나 여기서의 이활은 육사와 동명이인인 황해도 출신의 문인이다.

못다 푼 ‘이육사’를 공개하다
육사의 중국유학에 대해서는 여러 자료들의 시기가 엇갈리고 장소도 불분명하여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예를 들어 박훈신과 조지훈은 육사가 베이징대학을 다녔다고 언급하지만 일제에 의해 작성된 신문조서에서는 육사가 베이징의 쭝구어대학에서 공부했다고 나온다. 이에 저자는 중국 현지답사를 통해 2000년 초판에서는 쭝산대학에 재학했을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 후 십년간 축적된 여러 연구자들의 검증노력을 바탕으로 개정판에서는 베이징유학에 대한 새로운 견해들과 더불어 ‘쭝구어대학’의 실재를 함께 소개한다.
또한 육사가 순국한 베이징의 동창후뚱 1호에 일제의 문화특무기관인 동방문화사업위원회가 위치했음을 새롭게 밝힘으로써 육사의 죽음과 일제 기관의 연관성에 대한 의혹을 제기한다.

광야에 노래의 씨를 뿌린 초인, 이육사를 다시 바라보다
친일행위자들은 자신들의 친일행위가 일제의 강압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며 당시 한국인 거의 모두가 대일부역자였다고 변명한다. 그러나 일제라는 같은 시기를 감내하면서도 친일과 항일로 극명하게 대비되는 삶이 있다. 이육사는 야만 앞에서 대세를 부정하는 것만으로도 큰 용기가 필요했던 시절, 모든 것을 버리고 한 번 떠나온 항일투쟁의 대열에 다시 뛰어들어 자신이 노래한 시와 일치되는 삶을 살았으며 그러한 삶을 시로 남긴 진정한 시인이자 독립투사였다.
육사는 시를 통해 광야에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며 훗날 백마 탄 초인을 기다렸다. 2010년 《이육사 평전》 출간 이후 새로운 연구업적이 나왔듯이, 이번 개정판의 성과와 풀지 못한 숙제 모두가 새로운 추적과 연구의 디딤돌이 되어 육사가 뿌린 씨앗의 열매를 거두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