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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지 못한 독립운동가 이야기, 최명식 회고록 (2024)

동방박사님 2024. 8. 15.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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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대막리지 연개소문 정변부터 신군부 12.12 쿠데타까지 1300여 년간 우리나라 역사의 흐름을 바꾼 중대 변곡점이 된 20가지 결정적 장면을 선정해 원인과 결과, 당시 사회 및 후대에 미친 영향 등을 다각도로 조망한 책이다. 역사적 흥미와 지식을 모두 전달하고 있는 책으로 학생부터 일반인들까지 폭넓게 읽힐 역사교양서로 추천할 만하다.

목차

제1장
민족 반일·개화운동의 지역적 첫 봉화 ....................................................19

제2장
해외에서의 웅비의 꿈을 안고(1) 서간도의 시찰 여행(1909.10~1910.6)........43

제3장
‘안악사건’과 나 105인 사건의 불씨가 된 일명 ‘안명근 사건’.....................67

제4장
해외에서의 웅비의 꿈을 안고(2)
- 만주 경유, 연해주 지역의 시찰여행(1918.5.~9)...................................107

제5장
삼일운동과 내가 이바지한 것들 -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나.......................115

제6장
당시 상해임시정부 종횡으로 논평[縱橫談].............................................179

인물 찾기..........................................................................................191
 

저자 소개

저 : 최명식
편 : 이계형
국민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문학박사)를 받았다. 국민대학교, 중앙대학교, 가천대학교 등에서 강의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조사규명위원회·대한민국역사박물관건립추진단 전문위원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숫자조선연구, 식민지 조선인의 삶》(2014), 《한국 근대사》(2018), 《최현배(우리 말글을 목숨처럼 지킨)》(2019), 《한...

출판사 리뷰

독립운동의 조연, 최명식이
관찰자적 시점에서 바라본 김구와 안창호
긍허(兢虛) 최명식은 1880년 1월 15일(음) 황해도 안악군 용순면 장산리(長山


里)에서 해주 최씨 최영락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9세(1888)부터 25세(1904)까지 한학을 배웠고 1904년에 예수교 장로교회에 입교해 세례를 받았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계몽운동을 통한 구국운동에 동참하였다. 특히 그는 1907년 9월 안창호·양기탁·전덕기·김구 등이 조직한 신민회에 가입해 황해도 안악지회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당시 안악은 황해도 지역의 신문화 운동을 선도하던 곳이었다.

최명식은 고향 사람인 최광옥·김응제와 더불어 면학회(勉學會)를 조직하고 출판업, 면학서포[서점], 궐련공장, 방직공장 등을 운영하며 이를 통해 생긴 이윤으로 양산중학교를 설립, 운영하였다. 여름이면 양상중학교 내에 하기사범강습소를 개설하여 전국의 교사들을 모아 놓고 재교육을 실시하였다. 이외에도 운동회를 개최하는가 하면 김구 등과 뜻을 함께하여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를 조직하여 황해도 일대의 교육구국운동에 진력하였다. 무엇보다 그는 1909년에 신민회의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누구보다 앞장서 처음으로 서간도를 사전 답사하였다.

1910년 서간도에서 돌아온 뒤 새로운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김용진·김홍량·정달하 등과 함께 중국과의 무역업을 추진하고자 하였으나, 안중근의 이토 처단 이후 김구 등과 함께 일제가 조작한 ‘안명근 사건’으로 체포되는 바람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기존에 운영하였던 사업마저도 문을 닫게 되면서 계몽운동 사업도 큰 지장을 받았다. 그는 일제의 경무청총감부에서 3개월 동안 갖은 고초를 받은 뒤 경성재판소에서 ‘강도죄’로 7년 징역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시작하였다. 그 뒤 감형되어 4년 6개월 만에 출소하여 고향으로 내려가 김구와 함께 신천군 산천면 동산평 농장에서 추수감을 맡았다.

그러던 중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김구의 뒤를 이어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했다. 이때 이름을 최일(崔日)로 바꿨다. 이후 국내에 연통제 조직을 만들고자 애썼고, 국내와 상하이를 오가며 군사주비단(軍事籌備團)을 조직하여 군자금 모집,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등의 문서 배포, 독립사상 고취 등의 활동을 펼쳤다. 1922년에 안창호·김구 등과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했으며 임시정부가 창조파와 개조파 둘로 갈리고 재정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자 새로운 독립운동을 꿈꾸며 북간도로 향했다.

1923년 길림으로 이주해 농민호조사(農民助社)를 조직, 재무를 담당하였고, 1927년에는 안창호를 맞아 자신이 경영하는 정미공장 대동공사(大東公司)에서 연설회를 개최하여 일본 경찰에 붙잡혀 몇 달 동안 고초를 겪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 이후 일본 경찰에 의해 강제 귀국 후 거주 제한 조처를 당하였다.

1943년 다시 만주로 건너갔고 1945년 8월 해방을 맞자 임시정부 동북대표부(東北代表部) 주석에 임명되어 교포들의 권익 옹호 활동에 매진하였다. 1946년에는 동북한국교민회연합회(東北韓國僑民會聯合會)를 조직, 부회장으로 활동하였으며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동북특별당부의 특별위원으로도 활약하였다.

1948년 중국 내 국공내전 당시 만주가 중국공산당의 수중에 들어가자 교포 수천 명을 인솔하여 톈진을 거쳐 남한으로 귀국했다. 1949년 한국독립당 중앙당부 당원을 활동하면서도 김구·김규식 등이 추진하는 남북협상에 대해 “김일성에게 이용당할 것이다”라며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1950년에는 신익희가 주도하던 민주국민당에 입당해 중앙위원에 피선되었으며, 1955년 9월 자유당에 맞서 신익희 등이 창당한 민주당의 진해시 당부 고문으로서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맞서 싸웠다. 1961년 9월26일 진해에서 병사했다.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되었고, 1992년 그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됐다(독립유공자 1묘역-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