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기독교 근대유산 (2016~) (여행지)/5.철원.강원

한서남궁억 무궁화기념관

동방박사님 2016. 10. 16.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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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서 남궁억은 1863(철종 14년) 서울 종로방 정동 왜송골(倭松洞)에서 중추부도사(都事)를 지낸 남궁영(南宮泳)과 덕수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 시절에는 정식으로 수학하지 못하고 한문공부를 하다가 1883년(고종 20년) 미국인이 경영하는 영어학교에 다녔다. 1884년(고종 21)에는 영어학교 1학년 재학 중 해관(海關) 묄렌도르프(P.G. Von Möllendorff)의 견습생이 되었고, 1886년 내부주사(內部主事)로 특채되었다. 1887년초 영어학교를 졸업하고 고종의 어전통역관이 되었다.

  1887년 전권대신 조민희(趙民熙)의 수행서기관으로 상하이에도 갔다. 영국, 러시아, 독일 순방길을 계획하고 홍콩까지 갔으나 청나라의 간섭과 방해로 2년간 홍콩에서 머물다가 결국 다시 소환되어 돌아왔다. 이후 1889년 궁내부 별군직(宮內府別軍職), 1893년 칠곡부사를 역임하고, 1894년에는 갑오경장으로 내무부 토목국장에 발탁되어 서울 종로와 정동 일대 및 육조 앞과 남대문 사이의 도로를 정비하고 경성부 탑골공원(파고다 공원) 공사의 감독을 맡아 완공시켰다. 이후 흥화학교(興化學校)에서 교사로 영문법과 국사(國史)를 가르치고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1895년에는 주변 조정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성부의 민가를 정비, 허물고 도로를 정비하여 길을 닦았다. 그뒤 1896년 2월 관직을 사퇴하였다.



   1910년(융희 4년) 10월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자 배화학당(培花學堂) 의 한글, 역사, 가정 교사가 되고 1911년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배화학당 교사로 있으면서 《가정교육》 《신편언문체법(新編諺文體法)》 등 교과서를 지었고 '우리의 역사', '언문 체법', '가정 교육', '무궁화 지도', '육아법' 등의 책을 집필, 발간하고 시와 노래를 지었다. 1912년부터는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 원장을 겸하면서 독립사상 고취, 애국가사 보급, 한글서체 창안 및 보급에 힘썼다.

  1910년부터 배화학당과 상동청년학원 교사로 재직하다, 1918년 건강이 악화되면서, 친지들의 권고에 따라 울적함을 달래기 위해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 보리울로 낙향하여 1919년 9월 모곡(牟谷)에 교회와 모곡학교를 세웠다.

  낙향 초기에는 교회를 설립한다 하여 주민들의 편견과 비방에 시달리기도 했다. 문맹 개선이 필요하다고 본 그는 20대에서 30,40대의 학생들도 받아서 가르쳤다고 한다. 낮에는 학교 교사로 밤에는 부락의 마을 지도자로 활동하고 주말에는 교회에서 설교를 하였다. 또한 조선이야기 와 동사략 등을 집필, 간행하였다. 후에 모곡학교는 총독부 학제 개편에 의해 한서국민학교와 한서중학교로 분리되었다. 그는 홍천군 모곡리 유리산에 올라 매일 '불의의 일본을 이 땅에서 물리쳐 주소서.', '이 민족에게 불의에 굴하지 않는 힘을 주소서.'하고 매일과 같이 기도하였다 한다. 또한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로 시작하는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을 비롯한 몇몇 노래와 시 등을 직접 작사 작곡하였다. 그는 학교 안에 무궁화 묘포를 만들어 나라꽃인 무궁화를 전국에 보급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노동과 애국심을 주제로 한 찬송가와 시, 가사 등을 지어 전국의 교회와 기독교계 학교들에 보급하였다. 특히 그가 지은 창가(唱歌) 가사 무궁화동산, 기러기 노래, 조선의 노래, 운동가, 조선지리가(朝鮮地理歌) 등은 민간에 널리 유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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