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한국근대사 연구 (책소개)/1.한국근대사

청일전쟁 국민의 탄생

동방박사님 2022. 1. 21.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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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민중, ‘국민’이 되어 전쟁에 협력하다

청일전쟁 통사를 다룬 『청일전쟁, 국민의 탄생』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기존 청일전쟁 관련 책과 몇 가지 차별점이 있다. 그동안 국내에 출간된 책들은 주로 정치, 외교, 군사적 관점에서 청일전쟁을 다뤘지만, 이 책은 언론과 민중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다루며 청일전쟁의 전 과정을 다루고 있다. 그러면서 저자는 청일전쟁이 일본의 ‘국민’을 탄생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즉 근대적인 의미의 국민이 이 시기에 형성되었으며, 이 국민들의 적극적인 협력이 있었기에 전쟁이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청일전쟁은 근대 일본이 치른 첫 대외 전쟁이었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경제의 근대화와 함께 군국주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청일전쟁은 왜 시작되었던 것일까? 당시 일본의 민간인이자 지식인이었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청일전쟁을 가리켜 문명국인 일본과 야만국인 청의 전쟁, 즉 “문야文野의 전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언론을 통해 전쟁 지지를 표명함과 동시에 스스로 군사 헌금 조직화의 선두에 서는 등 적극적으로 전쟁에 협력했다. 국민도 이 주장들을 받아들였다. 곧 ‘문명 전쟁’론이나 ‘문야의 전쟁’론은 국민의 내셔널리즘과 전쟁 협력을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 저자는 이처럼 정치인, 지식인, 민간인이 하나가 되어 적극적으로 협력했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날 수 있었다고 말한다. 특히 민간인들은 ‘국민’이 되어 전쟁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전장에서 병사·군부로서 전쟁을 체험했고, 후방 지역 사회에 남은 압도적 다수는 다양한 언론 매체가 전하는 정보를 통해 전쟁을 ‘체험’했다. 이들의 전쟁 ‘체험’과 전후의 전몰자 추도, 또한 전쟁 중에 친숙해진 ‘군인 천황’상에 대한 숭배를 통해 근대 일본의 ‘국민’이 형성되어간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오타니 다다시 교수는 일본 근현대사, 그중에서도 미디어사를 전공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후반부에서 다루고 있는 일본 정부의 대외 언론 공작과 당대 일본 언론들의 모습, 국민들이 이런 언론을 어떻게 대하는지 등을 잘 묘사하고 있다.

또 당시 일본 정치를 책임지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나 무쓰 무네미쓰를 다른 관점에서 비판하고 있는 점도 이 책의 장점이다. 곧 이들이 당시 펼쳤던 정치와 외교가 어떤 것이었나를 살피면서, 과연 청일전쟁이 꼭 일어나야 했던 전쟁이었는지를 질문하고 있다. 정치인, 지식인, 민간인 등의 협력 관계를 살피면서 전쟁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도 질문하고 있다.

당시 일본 군인들의 모습들을 자세히 다루고 있는 점도 이 책의 장점이다. 일본군이 조선에 들어와 전투를 하고, 중국 대륙에 진출한 상황, 그리고 대만을 점령한 상황들이 세세하게 나와 있다. 일본군이 저지른 ‘조선 왕궁 점령 사건’이나 ‘뤼순 학살 사건’을 다루면서 일본의 ‘역사 위조’를 지적한 점도 다른 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일본은 1894년 7월 23일 조선 경복궁을 점령해 고종을 구속했다. 이 사건을 일본의 역사에서는 먼저 사격을 가한 조선군에 일본군이 반격해서 왕궁을 점령한 자위적·우발적 사건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저자는 이 견해가 명백한 ‘위조’라고 말하면서 일본 공사관과 혼성 여단이 사전에 계획해서 실행한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뤼순에서 저지른 학살 사건도 일본 역사에서는 부정되거나 규모를 축소하고 있는데, 이 사건을 상세히 다루면서 뤼순 학살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문제는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목차

머리말
청일전쟁 관련 연표

제1장 | 전쟁 전야의 동아시아

1. 조선의 근대와 톈진조약 체제
‘속국’과 ‘자주국’ | 개화 정책과 임오군란 | 청일의 대응 | 갑신정변-급진 개화파의 쿠데타 실패 | 조슈파와 사쓰마파의 대립 | 톈진조약과 일본, 청, 영국의 협조 체제 | 극동 러시아-이미지와 실상

2. 일본과 청의 군비 확장
청의 군비 근대화-회군의 팽창 | 북양 해군의 근대화 | 임오군란 이후 일본의 군비 근대화 | 우선시된 해군의 군비 확장 | 육군, 7개 사단 체제로 | 육해군 연합 대연습 | 참모본부의 대청 전쟁 구상의 형성

제2장 | 출병에서 전쟁으로

1. 갑오농민전쟁과 청일 양국의 출병
제2차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성립 | 이토 내각의 고난-조약 개정과 대외경파 | 갑오농민전쟁-동학의 확대와 봉기 | 조선 정부의 파병 요청 | 청과 일본의 출병

2. 갈피를 잡지 못하는 청일 정부
청일 양군의 조선 도착 | 이토 수상의 협조론, 무쓰 외상의 강경론 | 제1차 절교서와 영국·러시아의 간섭 | 청 정부 내의 주전론과 개전 회피론

3. 전쟁이 시작되다.
7월 19일의 개전 결정 | 풍도 해전 | 조선 왕궁 무력 점령 | 혼성 제9여단의 남진 | 성환 전투 | 선전 조서를 둘러싼 혼란-전쟁은 언제 시작되었나? | 개전에 대한 메이지 천황의 생각

제3장 | 한반도 점령

1. 평양 전투
전쟁 지도 체제 | 단기전에서 장기전으로 | 제5사단 본대, 조선으로 | 짐을 옮기는 병사의 부족-“수송의 한계” | 제3사단의 동원 | 노즈 제5사단장의 평양 공격 결의 | 청과 일본의 무기 차이 | 격전-혼성 제9여단의 정면 공격 | 평양 점령과 청군의 패주

2. 황해 해전과 일본 정세
9월 17일의 조우 | 승리-과도기의 군사 기술과 제해권 확보 | 메이지 천황과 히로시마 대본영 | 대본영 어전 회의 | 청일전쟁 와중의 총선거 | 히로시마에서 열린 제7 임시 의회

3. 갑오개혁과 동학 농민군 섬멸
갑오개혁-친일 개화파 정권의 시험 | 이노우에 가오루 공사 부임과 조선의 보호국화 | 제2차 농민전쟁-반일·반개화파 | 동학 농민군에 대한 제노사이드

제4장 | 중국 침공

1. 일본군의 대륙 침공
제1군의 북진과 청군의 요격 체제 | 압록강 도하 작전 | 가쓰라 사단장과 다쓰미 여단장의 독주 | 제2군 편성-뤼순반도 공략으로 | 무모한 뤼순 공략 계획

2. ‘문명 전쟁’과 뤼순 학살 사건
구미의 눈과 전시 국제법 | 뤼순 요새 공략 작전 | 11월 21일, 어둠 속의 뤼순 점령 | 학살-서로 다른 사건의 모습 | 왜 일본군은 학살 행위를 벌인 것인가?-병사의 종군 일기를 읽다 | 서양 각국에 대한 변명 공작

3. 동계 전투와 강화 제기
제1군과 대본영의 대립 | 야마가타 제1군 사령관 경질 | 제1군의 하이청 공략 작전 | 랴오허 평원의 전투 | 산둥 작전과 대만 점령 작전 | 산둥 작전으로 북양 해군 궤멸

제5장 | 전쟁 체험과 ‘국민’의 형성

1. 언론과 전쟁-신문, 신기술, 종군 기자
조선으로 향하는 신문 기자들 | 강화되는 언론 통제 | 국민의 전쟁 지지와 정보 개시 | 신기술 도입과 《아사히신문》의 전략 | 《아사히신문》의 취재 체제 | 고급지 《시사신보》의 전쟁 보도 | 아사이 주와 ‘화보대’ | 《국민신문》과 일본화가 구보타 베이센 부자 | 사진과 회화의 차이 | 가와사키 사부로의 《일청전사》 전 7권

2. 지역과 전쟁
의용병과 군부 | 군부 모집 | 병사의 동원과 환송 | 전장과 지역을 연결한 지방지 | 《후소신문》 기자 스즈키 게이쿤 | 성황이었던 전황 보고회 | 개선, 귀국과 사람들의 환영 | 추도와 위령-‘선별’과 도호쿠의 사정 | 후쿠시마 현청 문서가 남긴 ‘지역과 전쟁’ | 동원과 전시 사무-정·촌장들의 ‘근무 평정’ | 청일전쟁과 오키나와 | 그 후의 오키나와

제6장 | 시모노세키 강화조약과 대만 침공

1. 강화조약 조인과 삼국 간섭
직례 결전 준비 | 정청 대총독부의 이동 | 강화 전권 사절에 취임한 이홍장 | 교섭 개시와 이홍장에 대한 테러 | 청의 고뇌와 조약 조인 | 삼국 간섭-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랴오둥반도 환부 요구 | 랴오둥반도 반환과 ‘와신상담’

2. 대만의 항일 투쟁, 조선의 의병 투쟁
대만총독부와 ‘대만민주국’ | 증파되는 일본군 | 남진 작전 수행에 대한 격렬한 저항 | ‘대만 평정 선언’ 이후에도 끝나지 않은 전투 | 민비 살해 사건 | 항일 의병 투쟁과 아관파천

종장 | 청일전쟁이란 무엇이었을까?
전쟁의 규모 | 전쟁 상대국과 전쟁의 계속 기간 | 누가, 왜, 개전을 결단했는가? | 미숙한 전시 외교 | 곤란한 전쟁 지도 | 전비와 청일의 전후 경영

후기
참고 문헌
옮긴이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