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소개
왕과 왕세자들의 드라마틱한 사연
다양한 사료를 바탕으로 구성해낸 조선시대 왕위 계승사를 기록하였다. 통사를 통해 우리 역사에 관심이 생기고 나면, 다양한 역사 인물들, 곧 왕, 왕후, 신하, 궁녀, 환관 등의 삶이 궁금해지게 마련이다. 다양한 삶의 모습을 통해 한 시대의 역사를 재음미했다면, 이제 ‘왕과 그 아들’이라는 관계를 통해 역사 속 이야기를 제대로 파악해 보자. 다섯 부자 관계를 통하여 왕이라는 권력이 어떻게 유지 및 계승되었는지, 왕세자와 왕후, 관료들과 정세, 그리고 주변국들로부터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를 역사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왕과 아들』은 역사적 사실을 충실히 엮어내기 위해서 왕과 왕세자의 일생을 하나의 연표로 구성하여 제시하였고, 또 왕의 가계도를 통해 적장자 관계를 한눈에 알 수 있게 하였다. 또한 각종 역사 프로그램의 자문을 맡고 있는 저자들이 잘못 인식된 역사적 오류를 바로 잡아 설명해주고 각 인물들에 대한 다양한 평가들을 소개하여, 조선시대의 역사를 왕실 내부의 갈등 구조가 아닌 조선 정치사라는 커다란 틀에서 분석하고자 하였다. 사극이 가볍고 역사는 부담스러웠던 독자들에게 조선시대사 최고의 역사학자들이 풀어놓는 드라마틱한 ‘왕과 아들’ 이야기를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가계 계승 원리로서 적장자 계승의 원리가 정착된 것은 유교 사상이 보급된 삼국시대부터이다. 이처럼 일찌감치 장자상속의 원칙이 확립되었지만, 그 시행에 있어서는 복잡하고 다양한 정치적 요소들로 인하여 제대로 적용되기가 어려웠다. 조공관계에 있던 중국에서 명·청이 교체되던 시기에는 조선의 정치도 크게 영향을 받았다. 왕권과 신권의 대립 갈등, 왕이자 아버지라는 존재에 기인하는 딜레마도 조선의 왕들을 끊임없이 괴롭하는 요인 중 하나였다. 이처럼『왕과 아들』은 ‘왕과 아들의 특수한 관계’에서 시작하여 조선시대사의 굵직한 장면들을 풍부하게 그려내고 있다.
다양한 사료를 바탕으로 구성해낸 조선시대 왕위 계승사를 기록하였다. 통사를 통해 우리 역사에 관심이 생기고 나면, 다양한 역사 인물들, 곧 왕, 왕후, 신하, 궁녀, 환관 등의 삶이 궁금해지게 마련이다. 다양한 삶의 모습을 통해 한 시대의 역사를 재음미했다면, 이제 ‘왕과 그 아들’이라는 관계를 통해 역사 속 이야기를 제대로 파악해 보자. 다섯 부자 관계를 통하여 왕이라는 권력이 어떻게 유지 및 계승되었는지, 왕세자와 왕후, 관료들과 정세, 그리고 주변국들로부터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를 역사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왕과 아들』은 역사적 사실을 충실히 엮어내기 위해서 왕과 왕세자의 일생을 하나의 연표로 구성하여 제시하였고, 또 왕의 가계도를 통해 적장자 관계를 한눈에 알 수 있게 하였다. 또한 각종 역사 프로그램의 자문을 맡고 있는 저자들이 잘못 인식된 역사적 오류를 바로 잡아 설명해주고 각 인물들에 대한 다양한 평가들을 소개하여, 조선시대의 역사를 왕실 내부의 갈등 구조가 아닌 조선 정치사라는 커다란 틀에서 분석하고자 하였다. 사극이 가볍고 역사는 부담스러웠던 독자들에게 조선시대사 최고의 역사학자들이 풀어놓는 드라마틱한 ‘왕과 아들’ 이야기를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가계 계승 원리로서 적장자 계승의 원리가 정착된 것은 유교 사상이 보급된 삼국시대부터이다. 이처럼 일찌감치 장자상속의 원칙이 확립되었지만, 그 시행에 있어서는 복잡하고 다양한 정치적 요소들로 인하여 제대로 적용되기가 어려웠다. 조공관계에 있던 중국에서 명·청이 교체되던 시기에는 조선의 정치도 크게 영향을 받았다. 왕권과 신권의 대립 갈등, 왕이자 아버지라는 존재에 기인하는 딜레마도 조선의 왕들을 끊임없이 괴롭하는 요인 중 하나였다. 이처럼『왕과 아들』은 ‘왕과 아들의 특수한 관계’에서 시작하여 조선시대사의 굵직한 장면들을 풍부하게 그려내고 있다.
목차
글을 시작하며_문제적 아버지와 문제적 아들들
1장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다_태조와 태종
이방원, 아버지의 소망을 이루어준 아들
아버지를 왕으로 세운 킹메이커
부자간 갈등의 서막, 정몽주 살해 사건
권력에서 소외된 7년의 설움
갈등의 폭발, 제1차 왕자의 난
태조의 반격, 조사의의 난
모두 하늘이 시키는 것
2장 서로에게 등을 돌린 아버지와 아들_태종과 양녕대군
세자의 조건, 적장자와 능력
공부를 싫어하는 세자 양녕
‘세자에게 활쏘기를 가르쳐라’ vs. ‘활쏘기는 학업에 방해가 됩니다’
반성의 기회를 주는 아버지 태종
형세가 장차 가르치기 어렵게 되다
3장 아비로부터 버림받지 않기 위하여_선조와 광해군
전쟁이 가져다준 ‘행운’
분조를 이끌어 아버지에게 인정받다
부자간 균열이 시작되다
아들에게 드리운 아버지의 빛과 그림자
4장 상처 입은 아버지와 새 세상을 본 아들_인조와 소현세자
왕이 된 아버지, 왕세자가 된 아들
분조를 이끌며 정치를 배우다
무릎 꿇은 아버지, 인질이 된 아들
서울의 아비와 심양의 아들
입조론에 틀어지는 부자 관계
새 세상을 목격한 아들을 버린 아버지
5장 조선 왕실 최대 비극_영조와 사도세자
마흔둘에 다시 얻은 귀한 아들
1749년, 세자의 대리청정을 명하다
계속되는 부자의 갈등
부왕에 대한 공포심과 사도세자의 병
세자의 비밀 관서행과 영조의 분노
왕실 최대의 비극, 1762년 임오화변
글을 마치며_권력은 어떻게 계속되는가―조선의 왕과 아들
1장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다_태조와 태종
이방원, 아버지의 소망을 이루어준 아들
아버지를 왕으로 세운 킹메이커
부자간 갈등의 서막, 정몽주 살해 사건
권력에서 소외된 7년의 설움
갈등의 폭발, 제1차 왕자의 난
태조의 반격, 조사의의 난
모두 하늘이 시키는 것
2장 서로에게 등을 돌린 아버지와 아들_태종과 양녕대군
세자의 조건, 적장자와 능력
공부를 싫어하는 세자 양녕
‘세자에게 활쏘기를 가르쳐라’ vs. ‘활쏘기는 학업에 방해가 됩니다’
반성의 기회를 주는 아버지 태종
형세가 장차 가르치기 어렵게 되다
3장 아비로부터 버림받지 않기 위하여_선조와 광해군
전쟁이 가져다준 ‘행운’
분조를 이끌어 아버지에게 인정받다
부자간 균열이 시작되다
아들에게 드리운 아버지의 빛과 그림자
4장 상처 입은 아버지와 새 세상을 본 아들_인조와 소현세자
왕이 된 아버지, 왕세자가 된 아들
분조를 이끌며 정치를 배우다
무릎 꿇은 아버지, 인질이 된 아들
서울의 아비와 심양의 아들
입조론에 틀어지는 부자 관계
새 세상을 목격한 아들을 버린 아버지
5장 조선 왕실 최대 비극_영조와 사도세자
마흔둘에 다시 얻은 귀한 아들
1749년, 세자의 대리청정을 명하다
계속되는 부자의 갈등
부왕에 대한 공포심과 사도세자의 병
세자의 비밀 관서행과 영조의 분노
왕실 최대의 비극, 1762년 임오화변
글을 마치며_권력은 어떻게 계속되는가―조선의 왕과 아들
책 속으로
여러 정황과 조건으로 볼 때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현실화됐다면, 이는 그 배후에 좀 더 본질적인 이유가 따로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방원이 낙마하게 된 본질적 이유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이는 이방원을 낙마시킨 주체인 태조에게서 찾아야 한다. 태조에게 가장 믿음직한 아들이던 이방원. 그랬던 그가 조선 개국 후 세자 책봉이나 개국공신 책록(策綠) 등에서 배제됐다는 사실은 태조가 이방원에 대해 전과 같은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즉 태조의 마음에서 이미 이방원의 존재가 멀어져 있었던 것이다.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다: 태조와 태종」
결국 이방원은 정몽주라는 최대의 정적을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에만 빠져 정몽주가 이성계에게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를 간과하였다. 또 이성계의 승인 없는 독단적 행동이 정치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 결과 이방원은 지금까지 쌓아온 아버지의 신뢰를 한
순간에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조선 건국 후 정치적 실권에서 철저히 배제되는 시련을 맞게 되었다.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다: 태조와 태종」
군왕의 학문은 미래의 군왕인 세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어찌 보면 단순해 보이지만, 끊임없는 자기 단속과 절제가 필요한, 쉽지 않은 길이었다. 이처럼 어려운 과정인 세자 교육이 조선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언제였을까? 조선이 건국된 직후에 태조의 막내아들 방석이 세자로 책봉됐고 정도전이 그의 교육을 담당했으므로, 조선의 세자 교육은 태조 대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세자 교육에 관한 제도들이 아직 마련되지 못했고, 따라서 체계적인 교육이 시행되지는 못했다. 세자 교육과 관련된 각종 제도를 정비하고 본격적으로 추진한 것은 태종 대에 들어서이다. 따라서 조선 건국 이후 체계적인 세자 교육을 가장 처음 받은 이는 바로 양녕대군이었다. ---「서로에게 등을 돌린 아버지와 아들: 태종과 양녕대군」
“매일 해가 뜰 때에 세자가 당(堂)에 나와 앉으면 서연관들이 차례로 돌아가며 진강(進講)하는데, 경서와 역사서를 2~3장씩 10차례 강한다. 오후에도 5~10차례 정도 강하고, 또 배운 것의 복습을 신시(申\時, 오후 3~5시)까지 하고 마친다. 세자궁의 내관(內官)과 사약(司?)은 세자의 출입 상황을 매일 서연과 경승부에 보고한다. 보고하지 않으면 대간에서 죄를 청한다. 세자궁의 담장이 낮으므로, 높고 두텁게 개축하도록 한다.”(《태종실록》권26, 태종 13년 9월 9일) ---「서로에게 등을 돌린 아버지와 아들: 태종과 양녕대군」
하지만 태종과 양녕대군은 서로의 마음을 읽는 데는 실패했다. 태종은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정작 아들을 대할 때는 사랑과 격려보다 질책이 앞섰다. 양녕대군은 자신을 나무라는 아버지를 보며 억울하게만 생각했을 뿐, 아버지의 질책에 담긴 진심은 느끼지 못했다. 이처럼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실행과 반성, 질책과 용서를 되풀이하였고, 그러는 가운데 두 사람 사이의 불신과 서운한 감정의 골은 점차 깊어져 갔다. 그리고 어느덧 시간은 운명의 1418년을 맞이하였다. ---「서로에게 등을 돌린 아버지와 아들: 태종과 양녕대군」
분조를 이끌도록 명을 받은 첫날, 광해군은 운산(雲山)에서 잤다. 6월 17일, 희천(熙川)에 머물고 있을 때 애초 중전과 빈궁을 모시고 함흥으로 가던 최황(崔滉)이 빈궁을 모시고 왔다. 광해군 부부가 다시 상봉한 날이었다. 18일에는 우의정 유홍(兪泓)도 분조에 합류했다. 그는 왕세자를 따라가라는 선조의 명이 없었음에도 자청하여 광해군을 따라왔다. 그가 분조를 따라가겠다고 선조에게 하직 인사를 할 때 선조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여러 차례 아뢰어도 선조는 침묵을 지켰다. 그것은 노여움의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유홍은 왜 자청하여 광해군을 따르려 했을까? 최악의 경우에 나라 밖 요동으로 갈지도 모르는 ‘현재 권력’보다 국내에 머물 ‘미래 권력’을 택하는 것이 낫다고 여긴 것은 아니었을까? 실제로 이때 광해군을 선택한 유홍의 아들 유대조(兪大造)는 뒤에 광해군에게 총애를 받게 된다. ---「아비로부터 버림받지 않기 위하여: 선조와 광해군」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무군사에 대한 선조의 태도였다. 선조는 12월 초, 비망기(備忘記)를 내렸다. 문관 1인을 광해군에게 보내 무군사의 명령 출납과 책응(策應)에 대한 제반 사항을 날마다 기록하여 보고하라는 지시를 담고 있었다. 광해군이 떠나던 무렵, 왕위에서 물러나겠다고 고집한 선조가 아니던가? 물러난다는 것은 결국 모든 권력을 다 넘겨주겠다는 것을 뜻할진대, 무군사의 활동에 대한 여러 사항을 매일 기록하여 보고하라는 지시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결국 광해군을 견제한다는 것이다. 선조의 양위 파동이 결국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꼼수’였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비로부터 버림받지 않기 위하여: 선조와 광해군」
권력은 비정한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도 공유될 수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재 권력’인왕과 ‘미래 권력’인 왕세자 사이에는 늘 미묘한 견제 심리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전란을 맞아 외세까지 개입하여 양자를 흔들어대면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첩의 몸에서 난 둘째’ 광해군은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을 만나 위기에 처한 아버지로부터 낙점을 받는 행운을 누린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사실상 주도한 외세 명은 사실상 ‘갑’의 위치에서 ‘을’의 처지인 선조와 조선 조정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선조와 광해군을 흔들어 자신들에게 충성 경쟁을 시켰다. 곤경에 처한 아버지는 살아남기 위해 ‘양위 파동’을 남발했고, 본래 소심하고 효심이 깊던 아들은 그런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올랐을 때, 광해군은 오로지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집착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도 아버지의 빛과 그림자는 여전했다. 아버지에게 ‘배우고 학습한’ 것이 외교에서 ‘빛’으로 나타났지만, 아버지에게 ‘버림받지 않으려 했던’ 조바심은 내정의 ‘그림자’가 되어 드리워졌다. 선조와광해군의 관계는 그런 모습이었다. ---「아비로부터 버림받지 않기 위하여: 선조와 광해군」
청이 입조론과 왕위교체론을 흘리면서 압박하자, 인조와 소현세자의 관계에 미묘한 파장이 미칠 수밖에 없었다.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청이 입조를 명목으로 자신을 심양으로 끌고 가고, 그 대신 소현세자를 왕위에 앉힌다면? 인조로서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시나리오였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인조는 이제 청이 소현세자를 어떻게 대하는지, 또 심양에 있는 세자가 어떤 언동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한층 더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사실은 인조가 1639년 3월 무렵부터 심양에 왕래하는 내관들이 올리는 장계를 뜯어보지 말라고 지시한 점이다. 당시 심양에 머무는 세자시강원의 신료들이 올리는 장계는 일단 승정원에서 개탁(開坼, 편지를 뜯어 봄)한 뒤 왕에게 보고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내관의 보고서를 뜯어보지 말라고 한 것은 인조가 내관을 보내 심관 안팎을 정탐하기 위한 감시망을 별도로 구축했다는 것, 또 내관이 자신에게 올리는 비밀 보고의 내용이 승정원에 알려지는 것을 피하려 했음을 암시한다. ---「상처 입은 아버지와 새 세상을 본 아들: 인조와 소현세자」
애초에 청은 심관에 식량을 직접 공급하다가 나중에는 은을 주고 사먹거나 직접 경작해서 해결하라고 했다. 그러한 상황에 의해 소현이 직접 경작 등을 통해 식량 자급은 물론 ‘재물 축적’의 단계에까지 이르고 모은 재물을 바탕으로 청나라 인사들과 교제하거나 조선인 포로를 사들이는 자금으로까지 사용하게 된 것이다. 소현과 강빈은 볼모이자 인질로서의 수동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심양의 ‘현실’에 적응하고 나아가 적극적으로 순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인조에게 대단히 잘못되고 위험한 행동으로 비칠 개연성이 높았다. 이미 언급했듯이 인조는 소현이 심양에서 소무(蘇武)처럼 행동해주기를 바랐다. 소무는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흉노의 추장이 위협하여 항복을 받아내려 했으나 끝까지 저항한 인물이다. 그는 음식마저 끊긴 상황에서도 끝내 항복하지 않고 19년만에 귀환했다. 인조는 소현이 소무처럼 청의 압박에 맞서 자신과 본국의 방패막이가 되어주기를 기대한 것이다. ---「상처 입은 아버지와 새 세상을 본 아들: 인조와 소현세자」
영조는 사도세자가 경연에서 어떻게 공부를 하는지를 늘 점검했다. 서연에 참여한 신하들을 따로 만나 그들에게 세자의 학습 상태를 물어보곤 하였다. 매번 세자의 차대 뒤에 입대(入對, 궁중에 들어가 임금을 뵙고 자문에 응하는 일)한 여러 신하들을 불러들여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를 물었다. 사도세자는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감시를 당하는 상태까지 몰린 것이다. 1756년 2월 16일, 영조는 사도세자가 비록 비답(批答, 국왕의 답변을 말함)을 내리더라도 바로 반포하지 말 것을 지시하였다. 대리청정을 명했으면서도 실제 주요한 안건은 자신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뜻이었다. 정신적으로 황폐해진 세자는 1756년 11월에 천연두 증세로 고생하기도 하였다. 다행히 병은 1주일 만에 회복되었다. ---「조선 왕실 최대 비극: 영조와 사도세자」
영조가 돌아간 뒤에 혜경궁이 부자 사이가 나아지겠느냐고 묻자, 세자는 “자네가 아버님께서 사랑하는 며느리기에 그 말씀을 곧이 다 듣는가? 일부러 그리하신 말씀이니 믿을 것이 없네. 필경 내가 죽고 말 것이네”라고 하면서 부친에 대한 불신을 그대로 내보였다. 혜경궁은 ‘무릇 하늘이 부자 두 분 사이를 그토록 나쁘게 하여 아버님께서는 말아야지 하다가도 누가 시킨 듯이 도로 미운 마음이 나고, 아드님은 뵙는 때마다 속이는 일 없이 당신 과실을 숨기는 일이 없었다. ……하늘의 뜻이 어찌하여 조선국에 만고에도 없는 슬픔을 끼쳤는지 애통할 뿐이다’라면서 악화 일로의 부자 관계를 안타까워하였다. ---「조선 왕실 최대 비극: 영조와 사도세자」
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전대미문의 사건. 이 사건은 1762년에 일어나서 ‘임오화변’이라고 부른다. 당시 세자가 죽은 뒤에 영조는 곧 세자의 죽음을 안타까이 여겨 시호를 직접 지어주고 묘지문도 친히 지어주었지만, 이 일을 절대 거론하지 말 것을 엄명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후의 정국
에서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영조의 처분을 지지하는 벽파(僻派)와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는 시파(時派)로 당파가 나누어지기도 했다. 영조 후반 사도세자의 죽음에 깊이 관여한 노론 벽파 세력은 정조의 즉위를 결사적으로 막았지만, 위기 끝에 왕위에 오른 정조는 부친에 대한 본격적인 추숭 작업을 함으로써 반대 세력을 무력화시키는 방안을 강구하게 된다. 11세의 어린 나이로 할아버지에 의해 아버지가 처참하게 죽는 광경을 지켜본 정조의 뇌리에서 그날의 기억이 결코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이방원은 정몽주라는 최대의 정적을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에만 빠져 정몽주가 이성계에게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를 간과하였다. 또 이성계의 승인 없는 독단적 행동이 정치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 결과 이방원은 지금까지 쌓아온 아버지의 신뢰를 한
순간에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조선 건국 후 정치적 실권에서 철저히 배제되는 시련을 맞게 되었다.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다: 태조와 태종」
군왕의 학문은 미래의 군왕인 세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어찌 보면 단순해 보이지만, 끊임없는 자기 단속과 절제가 필요한, 쉽지 않은 길이었다. 이처럼 어려운 과정인 세자 교육이 조선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언제였을까? 조선이 건국된 직후에 태조의 막내아들 방석이 세자로 책봉됐고 정도전이 그의 교육을 담당했으므로, 조선의 세자 교육은 태조 대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세자 교육에 관한 제도들이 아직 마련되지 못했고, 따라서 체계적인 교육이 시행되지는 못했다. 세자 교육과 관련된 각종 제도를 정비하고 본격적으로 추진한 것은 태종 대에 들어서이다. 따라서 조선 건국 이후 체계적인 세자 교육을 가장 처음 받은 이는 바로 양녕대군이었다. ---「서로에게 등을 돌린 아버지와 아들: 태종과 양녕대군」
“매일 해가 뜰 때에 세자가 당(堂)에 나와 앉으면 서연관들이 차례로 돌아가며 진강(進講)하는데, 경서와 역사서를 2~3장씩 10차례 강한다. 오후에도 5~10차례 정도 강하고, 또 배운 것의 복습을 신시(申\時, 오후 3~5시)까지 하고 마친다. 세자궁의 내관(內官)과 사약(司?)은 세자의 출입 상황을 매일 서연과 경승부에 보고한다. 보고하지 않으면 대간에서 죄를 청한다. 세자궁의 담장이 낮으므로, 높고 두텁게 개축하도록 한다.”(《태종실록》권26, 태종 13년 9월 9일) ---「서로에게 등을 돌린 아버지와 아들: 태종과 양녕대군」
하지만 태종과 양녕대군은 서로의 마음을 읽는 데는 실패했다. 태종은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정작 아들을 대할 때는 사랑과 격려보다 질책이 앞섰다. 양녕대군은 자신을 나무라는 아버지를 보며 억울하게만 생각했을 뿐, 아버지의 질책에 담긴 진심은 느끼지 못했다. 이처럼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실행과 반성, 질책과 용서를 되풀이하였고, 그러는 가운데 두 사람 사이의 불신과 서운한 감정의 골은 점차 깊어져 갔다. 그리고 어느덧 시간은 운명의 1418년을 맞이하였다. ---「서로에게 등을 돌린 아버지와 아들: 태종과 양녕대군」
분조를 이끌도록 명을 받은 첫날, 광해군은 운산(雲山)에서 잤다. 6월 17일, 희천(熙川)에 머물고 있을 때 애초 중전과 빈궁을 모시고 함흥으로 가던 최황(崔滉)이 빈궁을 모시고 왔다. 광해군 부부가 다시 상봉한 날이었다. 18일에는 우의정 유홍(兪泓)도 분조에 합류했다. 그는 왕세자를 따라가라는 선조의 명이 없었음에도 자청하여 광해군을 따라왔다. 그가 분조를 따라가겠다고 선조에게 하직 인사를 할 때 선조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여러 차례 아뢰어도 선조는 침묵을 지켰다. 그것은 노여움의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유홍은 왜 자청하여 광해군을 따르려 했을까? 최악의 경우에 나라 밖 요동으로 갈지도 모르는 ‘현재 권력’보다 국내에 머물 ‘미래 권력’을 택하는 것이 낫다고 여긴 것은 아니었을까? 실제로 이때 광해군을 선택한 유홍의 아들 유대조(兪大造)는 뒤에 광해군에게 총애를 받게 된다. ---「아비로부터 버림받지 않기 위하여: 선조와 광해군」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무군사에 대한 선조의 태도였다. 선조는 12월 초, 비망기(備忘記)를 내렸다. 문관 1인을 광해군에게 보내 무군사의 명령 출납과 책응(策應)에 대한 제반 사항을 날마다 기록하여 보고하라는 지시를 담고 있었다. 광해군이 떠나던 무렵, 왕위에서 물러나겠다고 고집한 선조가 아니던가? 물러난다는 것은 결국 모든 권력을 다 넘겨주겠다는 것을 뜻할진대, 무군사의 활동에 대한 여러 사항을 매일 기록하여 보고하라는 지시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결국 광해군을 견제한다는 것이다. 선조의 양위 파동이 결국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꼼수’였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비로부터 버림받지 않기 위하여: 선조와 광해군」
권력은 비정한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도 공유될 수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재 권력’인왕과 ‘미래 권력’인 왕세자 사이에는 늘 미묘한 견제 심리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전란을 맞아 외세까지 개입하여 양자를 흔들어대면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첩의 몸에서 난 둘째’ 광해군은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을 만나 위기에 처한 아버지로부터 낙점을 받는 행운을 누린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사실상 주도한 외세 명은 사실상 ‘갑’의 위치에서 ‘을’의 처지인 선조와 조선 조정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선조와 광해군을 흔들어 자신들에게 충성 경쟁을 시켰다. 곤경에 처한 아버지는 살아남기 위해 ‘양위 파동’을 남발했고, 본래 소심하고 효심이 깊던 아들은 그런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올랐을 때, 광해군은 오로지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집착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도 아버지의 빛과 그림자는 여전했다. 아버지에게 ‘배우고 학습한’ 것이 외교에서 ‘빛’으로 나타났지만, 아버지에게 ‘버림받지 않으려 했던’ 조바심은 내정의 ‘그림자’가 되어 드리워졌다. 선조와광해군의 관계는 그런 모습이었다. ---「아비로부터 버림받지 않기 위하여: 선조와 광해군」
청이 입조론과 왕위교체론을 흘리면서 압박하자, 인조와 소현세자의 관계에 미묘한 파장이 미칠 수밖에 없었다.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청이 입조를 명목으로 자신을 심양으로 끌고 가고, 그 대신 소현세자를 왕위에 앉힌다면? 인조로서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시나리오였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인조는 이제 청이 소현세자를 어떻게 대하는지, 또 심양에 있는 세자가 어떤 언동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한층 더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사실은 인조가 1639년 3월 무렵부터 심양에 왕래하는 내관들이 올리는 장계를 뜯어보지 말라고 지시한 점이다. 당시 심양에 머무는 세자시강원의 신료들이 올리는 장계는 일단 승정원에서 개탁(開坼, 편지를 뜯어 봄)한 뒤 왕에게 보고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내관의 보고서를 뜯어보지 말라고 한 것은 인조가 내관을 보내 심관 안팎을 정탐하기 위한 감시망을 별도로 구축했다는 것, 또 내관이 자신에게 올리는 비밀 보고의 내용이 승정원에 알려지는 것을 피하려 했음을 암시한다. ---「상처 입은 아버지와 새 세상을 본 아들: 인조와 소현세자」
애초에 청은 심관에 식량을 직접 공급하다가 나중에는 은을 주고 사먹거나 직접 경작해서 해결하라고 했다. 그러한 상황에 의해 소현이 직접 경작 등을 통해 식량 자급은 물론 ‘재물 축적’의 단계에까지 이르고 모은 재물을 바탕으로 청나라 인사들과 교제하거나 조선인 포로를 사들이는 자금으로까지 사용하게 된 것이다. 소현과 강빈은 볼모이자 인질로서의 수동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심양의 ‘현실’에 적응하고 나아가 적극적으로 순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인조에게 대단히 잘못되고 위험한 행동으로 비칠 개연성이 높았다. 이미 언급했듯이 인조는 소현이 심양에서 소무(蘇武)처럼 행동해주기를 바랐다. 소무는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흉노의 추장이 위협하여 항복을 받아내려 했으나 끝까지 저항한 인물이다. 그는 음식마저 끊긴 상황에서도 끝내 항복하지 않고 19년만에 귀환했다. 인조는 소현이 소무처럼 청의 압박에 맞서 자신과 본국의 방패막이가 되어주기를 기대한 것이다. ---「상처 입은 아버지와 새 세상을 본 아들: 인조와 소현세자」
영조는 사도세자가 경연에서 어떻게 공부를 하는지를 늘 점검했다. 서연에 참여한 신하들을 따로 만나 그들에게 세자의 학습 상태를 물어보곤 하였다. 매번 세자의 차대 뒤에 입대(入對, 궁중에 들어가 임금을 뵙고 자문에 응하는 일)한 여러 신하들을 불러들여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를 물었다. 사도세자는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감시를 당하는 상태까지 몰린 것이다. 1756년 2월 16일, 영조는 사도세자가 비록 비답(批答, 국왕의 답변을 말함)을 내리더라도 바로 반포하지 말 것을 지시하였다. 대리청정을 명했으면서도 실제 주요한 안건은 자신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뜻이었다. 정신적으로 황폐해진 세자는 1756년 11월에 천연두 증세로 고생하기도 하였다. 다행히 병은 1주일 만에 회복되었다. ---「조선 왕실 최대 비극: 영조와 사도세자」
영조가 돌아간 뒤에 혜경궁이 부자 사이가 나아지겠느냐고 묻자, 세자는 “자네가 아버님께서 사랑하는 며느리기에 그 말씀을 곧이 다 듣는가? 일부러 그리하신 말씀이니 믿을 것이 없네. 필경 내가 죽고 말 것이네”라고 하면서 부친에 대한 불신을 그대로 내보였다. 혜경궁은 ‘무릇 하늘이 부자 두 분 사이를 그토록 나쁘게 하여 아버님께서는 말아야지 하다가도 누가 시킨 듯이 도로 미운 마음이 나고, 아드님은 뵙는 때마다 속이는 일 없이 당신 과실을 숨기는 일이 없었다. ……하늘의 뜻이 어찌하여 조선국에 만고에도 없는 슬픔을 끼쳤는지 애통할 뿐이다’라면서 악화 일로의 부자 관계를 안타까워하였다. ---「조선 왕실 최대 비극: 영조와 사도세자」
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전대미문의 사건. 이 사건은 1762년에 일어나서 ‘임오화변’이라고 부른다. 당시 세자가 죽은 뒤에 영조는 곧 세자의 죽음을 안타까이 여겨 시호를 직접 지어주고 묘지문도 친히 지어주었지만, 이 일을 절대 거론하지 말 것을 엄명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후의 정국
에서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영조의 처분을 지지하는 벽파(僻派)와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는 시파(時派)로 당파가 나누어지기도 했다. 영조 후반 사도세자의 죽음에 깊이 관여한 노론 벽파 세력은 정조의 즉위를 결사적으로 막았지만, 위기 끝에 왕위에 오른 정조는 부친에 대한 본격적인 추숭 작업을 함으로써 반대 세력을 무력화시키는 방안을 강구하게 된다. 11세의 어린 나이로 할아버지에 의해 아버지가 처참하게 죽는 광경을 지켜본 정조의 뇌리에서 그날의 기억이 결코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 왕실 최대 비극: 영조와 사도세자」
출판사 리뷰
한 나라 왕이 되기 어렵고, 아들과 친한 아버지 되기는 더 어렵다
조선 왕조 514년간 군림한 27명의 왕 중 정통성에 문제의 소지가 없었던 왕은 10명뿐
통사를 통해 우리 역사에 관심이 생기고 나면, 다양한 역사 인물들, 곧 왕, 왕후, 신하, 궁녀, 환관 등의 삶이 궁금해진다. 다양한 삶의 모습을 통해 한 시대의 역사를 재음미했다면, ‘왕과 그 아들’이라는 관계를 통해 역사 속 사람 이야기, 사람이 살아 있는 역사 이야기를 읽을 차례다.
도서출판 책과함께의 신간 ≪왕과 아들≫은 강문식, 한명기, 신병주 세 저자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다양한 사료를 바탕으로 구성해낸 조선시대 왕위 계승사이다. 다섯 부자 관계를 통하여 왕이라는 권력이 어떻게 유지, 계승되었는지, 왕세자와 왕후, 관료들과 정세, 그리고 주변국들로부터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를 역사적으로 구성하였다.
가계 계승 원리로서 적장자 계승의 원리가 정착된 것은 유교 사상이 보급된 삼국시대부터이다. 이처럼 일찌감치 장자상속의 원칙이 확립되었지만, 그 시행에 있어서는 복잡하고 다양한 정치적 요소들로 인하여 제대로 적용되기가 어려웠다. 조공관계에 있던 중국에서 명?청이 교체되던 시기에는 조선의 정치도 크게 영향을 받았다. 명이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문제 삼아 내정을 간섭하고자 했으며, 청이 소현세자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자 인조와의 갈등이 초래되기도 하였다. 또한 왕권과 신권의 대립 갈등 또한 정치사의 중요한 요소로서, 반정과 사화 등으로 왕권 승계에 영향을 미쳤다. 이와 더불어 조선의 왕들은 왕이자 아버지라는 존재에 기인하는 딜레마를 안고 있었다. 2인자를 용납하지 않는 권력의 속성과 자식을 후계자로 세워 왕실의 근간을 유지하려는 부정(父情)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심해야 했다.
이 책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충실히 엮어내기 위해서 왕과 왕세자의 일생을 하나의 연표로 구성하여 제시하였으며, 왕의 가계도를 통해 적장자 관계를 한눈에 알 수 있게 하였고, 책의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판과 설명을 배치하였다. 각종 역사 프로그램의 자문을 맡고 있는 저자들이 잘못 인식된 역사적 오류를 바로 잡아 설명해주고 각 인물들에 대한 다양한 평가들을 소개하여, 조선시대의 역사를 왕실 내부의 갈등 구조가 아닌 조선 정치사라는 커다란 틀에서 분석하였다. 이로써 독자들은 ‘왕과 아들의 특수한 관계’에서 시작하여 조선시대사의 굵직한 장면들을 풍부하게 그려내는 한 편의 역사극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사극이 가볍고 역사는 부담스러웠던 독자들에게 조선시대사 최고의 역사학자들이 풀어놓는 드라마틱한 ‘왕과 아들’ 이야기를 권한다.
왕세자 각각의 사연__필경 내가 죽고 말 것이네
태종은 왕의 아들로 태어나지 않았다.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의 왕으로 만들었고, 1, 2차 왕자의 난을 거쳐 비로소 왕이 될 수 있었다. 또한 소현세자는 아버지 능양군이 일으킨 거사가 성공함으로써 왕의 아들이 되었다.
왕의 아들로 태어난다 하더라도, 많을 때는 십수 명에 이르는 왕의 아들 중에서 ‘진정한 왕재(王才)’로 인정받아 왕세자가 되는 길은 험난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일본군이 승승장구하면서 한양으로 북상해오는 상황은 뜻밖에도 첩의 자식이자 그나마 둘째인 광해군이 왕세자가 되는 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어렵사리 왕세자가 되어도, 양녕대군, 소현세자, 사도세자 모두가 끝내는 왕의 자리에 올라보지 못하고 중간에 물러나야 했다. 양녕대군은 즉위를 눈앞에 두고 낙마했고, 소현세자와 사도세자는 왕이 되기는커녕 천수를 누리지도 못했다. 병자호란 직후 심양에 인질로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은 소현세자는 귀국 직후에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사도세자는 궁궐 한복판에서 아버지 영조가 건네준 칼로써 자결을 시도해야 했고, 그것이 여의치 않자 끝내는 스스로 뒤주 속에 들어가 짧은 인생을 마감했다.
왕이라는 권력__바늘방석과 숯불에 앉은 심정
태조는 고려의 무장이자 신하의 처지에서 몸을 일으켜 조선을 개창했다. 태종은 고려의 마지막 보루 정몽주를 척살하고 아버지 이성계를 왕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 왕 자리를 꿰차고 새 왕조의 수성(守成) 기반을 다졌다. 선조는 일찍이 없던 7년의 대전란을 맞아 도성을 버리고 파천길에 오르는 등 갖은 간난신고를 겪었지만, 그래도 어렵사리 종사를 보전했다. 인조는 위기에 처한 종사를 살린다는 명목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숙부 광해군을 몰아내고 지존의 자리에 올랐지만, 병자호란을 만나 ‘오랑캐 추장’에게 무릎을 꿇고 치욕의 항복을 한 인물이다. 영조는 신하들의 지긋지긋한 당쟁을 끝장내고 왕권을 다잡기 위해 노심초사했던 군주였다. 조선의 임금 가
운데 가장 오래 왕 자리에 있었던 그는 탕평책을 통해 신하들을 다잡으려고 분투했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손으로 아들 사도세자를 죽여야 했던 비운의 군주이기도 하다.
조선 왕조를 창업한 이후 조선의 왕들은 이처럼 어려운 수성이라는 역사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 아들을 제대로 된 후계자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덧붙여 일인자로서 혈육인 아들을 경계해야 하는 딜레마까지 왕들을 괴롭혔다. 인조는 청의 이간책에 넘어가서 아들 소현세자를 경쟁자이자 정적으로 여기기까지 한다. 그리하여 1644년에 명이 멸망하고 청이 북경을 차지하자 타국에 볼모로 잡혀 있던 아들이 돌아왔으나, 인조는 병을 핑계로 만남조차 피하고 말았다.
왕세자의 경영수업__세자궁의 담장을 더욱 높여라
왕세자는 다음 보위를 이어나갈 종사의 계승자이자 만백성을 다스리는 지존의 후계자이다. 따라서 왕세자에 대한 교육은 무엇보다 우선하는 국가적 대사였다. 왕의 아들을 수태한 모친은 정성을 다해 태교를 행하고, 출산 이후에도 양육을 위해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다. 까다로운 절차를 걸쳐 유모를 선발하고, 보양청과 강학청을 두어 유아기, 유년기의 인성 교육에 정성을 기울였다. 정식으로 왕세자로 책봉된 뒤에는 관례, 입학례, 가례를 거행하고 학문을 연마하기 위해 매진했다. 왕세자의 교육을 전담하는 기구로 시강원을 두고, 명망과 학식, 경륜을 두루 갖춘 문관들을 스승으로 임명하여 개인 교습을 실시했다.
왕세자의 학문 수련 과정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아침에 거행하는 조강, 낮에 거행하는 주강, 저녁에 거행하는 석강 말고도, 한밤중에 진행되는 야대까지 왕세자의 하루는 학습과 교습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거기에 스승들은 왕세자의 학습 성취도를 측정하기 위해 수시로 구술시험까지 실시했다. 이처럼 빡빡하고 힘든 일과를 견뎌내지 못하고 태만한 자세를 보이거나 조금이라도 학업 성취도가 떨어지면 당장 비판이 날아들었다. 세자가 부왕으로부터의 질타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 왕세자의 교육 책임을 맡은 사부와 시강원의 관원들, 왕세자 주변의 환관 등도 조정 신료들로부터 공격을 받거나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왕세자가 받는 스트레스는 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힘들고 고된 교육 과정을 마련한 것은 물론 왕세자를 장차 현철한 군주로 키워내기 위한 포석이었다. 종사를 보전하고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해 만기(萬機)를 친람해야 하는 군주에게는 학문적 소양과 풍부한 지식, 그리고 명철한 판단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학문적 능력과 판단력을 키우려면 왕세자 시절부터 면학에 정진하는 것이 절실했다. 현존하는 국왕에 버금가는 권력자인 왕세자 주변에는 곳곳에 여색과 유희의 대상들이 널려 있었다. 자칫 방심을 통해 일탈에 빠질 수 있는 왕세자의 마음을 다잡고, 학문으로 교화시켜 장차 왕도정치를 실현할 수 있는 현군(賢君)이자 성군(聖君)으로 키우는 것이 왕세자 교육의 최종 목표였던 것이다.
왕도 자식 앞에서는 작아지는…__차라리 발광을 하라 해라
아버지 태조와의 갈등과 그로 인한 형제간의 골육상쟁을 겪으면서 태종은 가족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꼈고, 자신은 자식에게 그런 아픔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양녕대군에게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경전과 역사서를 공부하도록 하고, 인재를 판별할 수 있는 안목을 키울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양녕은 공부와 서연이 체질에 맞지 않았다. 그리하여 갈수록 서연을 더욱 기피하면서 잡희와 여색에 빠졌다. 그럼에도 태종은 적장자 양녕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지 못하고 거듭 반성의 기회를 주지만, 양녕이 동생이 죽었을 때조차 궁궐에서 활을 쏘자 결국은 자식을 포기한다. 그러나 태종은 종사를 위해 왕세자를 바꾼 뒤에도 양녕에 대한 부정(父情)은 끝내 거두지 못한다.
영조는 마흔둘에야 얻은 늦둥이 외아들 사도세자를 ‘성군의 길’로 밀어붙였지만, 아들은 몰아붙이는 아버지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감정을 느끼기 어려웠고, 걸핏하면 꾸짖으면서도 양위 전교를 남발하는 아버지를 보면 경기를 일으키게 되었다. 아들은 ‘날씨가 나쁜 것마저 아들을 탓하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나 밖으로 돌기 시작했다. 아들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면서 고민하던 아버지는, 신하들이 아들의 비행을 잇달아 전하자 1762년에 마음을 접는다.
자신을 폐위시킨 뒤에도 “만약 양녕에게 병이 있어 위급하면 반드시 나에게 알려야 한다”고 당부한 태종의 마음을 양녕대군이 조금이라도 깨달았다면, 이역만리에서 새 세상에 눈을 뜬 아들을 감싸안을 넉넉한 품이 인조에게 있었다면 어땠을까? 이 책을 통해 하나의 관계로 묶인 상대와 소통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왕조 514년간 군림한 27명의 왕 중 정통성에 문제의 소지가 없었던 왕은 10명뿐
통사를 통해 우리 역사에 관심이 생기고 나면, 다양한 역사 인물들, 곧 왕, 왕후, 신하, 궁녀, 환관 등의 삶이 궁금해진다. 다양한 삶의 모습을 통해 한 시대의 역사를 재음미했다면, ‘왕과 그 아들’이라는 관계를 통해 역사 속 사람 이야기, 사람이 살아 있는 역사 이야기를 읽을 차례다.
도서출판 책과함께의 신간 ≪왕과 아들≫은 강문식, 한명기, 신병주 세 저자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다양한 사료를 바탕으로 구성해낸 조선시대 왕위 계승사이다. 다섯 부자 관계를 통하여 왕이라는 권력이 어떻게 유지, 계승되었는지, 왕세자와 왕후, 관료들과 정세, 그리고 주변국들로부터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를 역사적으로 구성하였다.
가계 계승 원리로서 적장자 계승의 원리가 정착된 것은 유교 사상이 보급된 삼국시대부터이다. 이처럼 일찌감치 장자상속의 원칙이 확립되었지만, 그 시행에 있어서는 복잡하고 다양한 정치적 요소들로 인하여 제대로 적용되기가 어려웠다. 조공관계에 있던 중국에서 명?청이 교체되던 시기에는 조선의 정치도 크게 영향을 받았다. 명이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문제 삼아 내정을 간섭하고자 했으며, 청이 소현세자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자 인조와의 갈등이 초래되기도 하였다. 또한 왕권과 신권의 대립 갈등 또한 정치사의 중요한 요소로서, 반정과 사화 등으로 왕권 승계에 영향을 미쳤다. 이와 더불어 조선의 왕들은 왕이자 아버지라는 존재에 기인하는 딜레마를 안고 있었다. 2인자를 용납하지 않는 권력의 속성과 자식을 후계자로 세워 왕실의 근간을 유지하려는 부정(父情)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심해야 했다.
이 책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충실히 엮어내기 위해서 왕과 왕세자의 일생을 하나의 연표로 구성하여 제시하였으며, 왕의 가계도를 통해 적장자 관계를 한눈에 알 수 있게 하였고, 책의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판과 설명을 배치하였다. 각종 역사 프로그램의 자문을 맡고 있는 저자들이 잘못 인식된 역사적 오류를 바로 잡아 설명해주고 각 인물들에 대한 다양한 평가들을 소개하여, 조선시대의 역사를 왕실 내부의 갈등 구조가 아닌 조선 정치사라는 커다란 틀에서 분석하였다. 이로써 독자들은 ‘왕과 아들의 특수한 관계’에서 시작하여 조선시대사의 굵직한 장면들을 풍부하게 그려내는 한 편의 역사극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사극이 가볍고 역사는 부담스러웠던 독자들에게 조선시대사 최고의 역사학자들이 풀어놓는 드라마틱한 ‘왕과 아들’ 이야기를 권한다.
왕세자 각각의 사연__필경 내가 죽고 말 것이네
태종은 왕의 아들로 태어나지 않았다.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의 왕으로 만들었고, 1, 2차 왕자의 난을 거쳐 비로소 왕이 될 수 있었다. 또한 소현세자는 아버지 능양군이 일으킨 거사가 성공함으로써 왕의 아들이 되었다.
왕의 아들로 태어난다 하더라도, 많을 때는 십수 명에 이르는 왕의 아들 중에서 ‘진정한 왕재(王才)’로 인정받아 왕세자가 되는 길은 험난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일본군이 승승장구하면서 한양으로 북상해오는 상황은 뜻밖에도 첩의 자식이자 그나마 둘째인 광해군이 왕세자가 되는 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어렵사리 왕세자가 되어도, 양녕대군, 소현세자, 사도세자 모두가 끝내는 왕의 자리에 올라보지 못하고 중간에 물러나야 했다. 양녕대군은 즉위를 눈앞에 두고 낙마했고, 소현세자와 사도세자는 왕이 되기는커녕 천수를 누리지도 못했다. 병자호란 직후 심양에 인질로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은 소현세자는 귀국 직후에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사도세자는 궁궐 한복판에서 아버지 영조가 건네준 칼로써 자결을 시도해야 했고, 그것이 여의치 않자 끝내는 스스로 뒤주 속에 들어가 짧은 인생을 마감했다.
왕이라는 권력__바늘방석과 숯불에 앉은 심정
태조는 고려의 무장이자 신하의 처지에서 몸을 일으켜 조선을 개창했다. 태종은 고려의 마지막 보루 정몽주를 척살하고 아버지 이성계를 왕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 왕 자리를 꿰차고 새 왕조의 수성(守成) 기반을 다졌다. 선조는 일찍이 없던 7년의 대전란을 맞아 도성을 버리고 파천길에 오르는 등 갖은 간난신고를 겪었지만, 그래도 어렵사리 종사를 보전했다. 인조는 위기에 처한 종사를 살린다는 명목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숙부 광해군을 몰아내고 지존의 자리에 올랐지만, 병자호란을 만나 ‘오랑캐 추장’에게 무릎을 꿇고 치욕의 항복을 한 인물이다. 영조는 신하들의 지긋지긋한 당쟁을 끝장내고 왕권을 다잡기 위해 노심초사했던 군주였다. 조선의 임금 가
운데 가장 오래 왕 자리에 있었던 그는 탕평책을 통해 신하들을 다잡으려고 분투했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손으로 아들 사도세자를 죽여야 했던 비운의 군주이기도 하다.
조선 왕조를 창업한 이후 조선의 왕들은 이처럼 어려운 수성이라는 역사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 아들을 제대로 된 후계자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덧붙여 일인자로서 혈육인 아들을 경계해야 하는 딜레마까지 왕들을 괴롭혔다. 인조는 청의 이간책에 넘어가서 아들 소현세자를 경쟁자이자 정적으로 여기기까지 한다. 그리하여 1644년에 명이 멸망하고 청이 북경을 차지하자 타국에 볼모로 잡혀 있던 아들이 돌아왔으나, 인조는 병을 핑계로 만남조차 피하고 말았다.
왕세자의 경영수업__세자궁의 담장을 더욱 높여라
왕세자는 다음 보위를 이어나갈 종사의 계승자이자 만백성을 다스리는 지존의 후계자이다. 따라서 왕세자에 대한 교육은 무엇보다 우선하는 국가적 대사였다. 왕의 아들을 수태한 모친은 정성을 다해 태교를 행하고, 출산 이후에도 양육을 위해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다. 까다로운 절차를 걸쳐 유모를 선발하고, 보양청과 강학청을 두어 유아기, 유년기의 인성 교육에 정성을 기울였다. 정식으로 왕세자로 책봉된 뒤에는 관례, 입학례, 가례를 거행하고 학문을 연마하기 위해 매진했다. 왕세자의 교육을 전담하는 기구로 시강원을 두고, 명망과 학식, 경륜을 두루 갖춘 문관들을 스승으로 임명하여 개인 교습을 실시했다.
왕세자의 학문 수련 과정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아침에 거행하는 조강, 낮에 거행하는 주강, 저녁에 거행하는 석강 말고도, 한밤중에 진행되는 야대까지 왕세자의 하루는 학습과 교습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거기에 스승들은 왕세자의 학습 성취도를 측정하기 위해 수시로 구술시험까지 실시했다. 이처럼 빡빡하고 힘든 일과를 견뎌내지 못하고 태만한 자세를 보이거나 조금이라도 학업 성취도가 떨어지면 당장 비판이 날아들었다. 세자가 부왕으로부터의 질타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 왕세자의 교육 책임을 맡은 사부와 시강원의 관원들, 왕세자 주변의 환관 등도 조정 신료들로부터 공격을 받거나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왕세자가 받는 스트레스는 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힘들고 고된 교육 과정을 마련한 것은 물론 왕세자를 장차 현철한 군주로 키워내기 위한 포석이었다. 종사를 보전하고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해 만기(萬機)를 친람해야 하는 군주에게는 학문적 소양과 풍부한 지식, 그리고 명철한 판단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학문적 능력과 판단력을 키우려면 왕세자 시절부터 면학에 정진하는 것이 절실했다. 현존하는 국왕에 버금가는 권력자인 왕세자 주변에는 곳곳에 여색과 유희의 대상들이 널려 있었다. 자칫 방심을 통해 일탈에 빠질 수 있는 왕세자의 마음을 다잡고, 학문으로 교화시켜 장차 왕도정치를 실현할 수 있는 현군(賢君)이자 성군(聖君)으로 키우는 것이 왕세자 교육의 최종 목표였던 것이다.
왕도 자식 앞에서는 작아지는…__차라리 발광을 하라 해라
아버지 태조와의 갈등과 그로 인한 형제간의 골육상쟁을 겪으면서 태종은 가족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꼈고, 자신은 자식에게 그런 아픔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양녕대군에게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경전과 역사서를 공부하도록 하고, 인재를 판별할 수 있는 안목을 키울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양녕은 공부와 서연이 체질에 맞지 않았다. 그리하여 갈수록 서연을 더욱 기피하면서 잡희와 여색에 빠졌다. 그럼에도 태종은 적장자 양녕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지 못하고 거듭 반성의 기회를 주지만, 양녕이 동생이 죽었을 때조차 궁궐에서 활을 쏘자 결국은 자식을 포기한다. 그러나 태종은 종사를 위해 왕세자를 바꾼 뒤에도 양녕에 대한 부정(父情)은 끝내 거두지 못한다.
영조는 마흔둘에야 얻은 늦둥이 외아들 사도세자를 ‘성군의 길’로 밀어붙였지만, 아들은 몰아붙이는 아버지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감정을 느끼기 어려웠고, 걸핏하면 꾸짖으면서도 양위 전교를 남발하는 아버지를 보면 경기를 일으키게 되었다. 아들은 ‘날씨가 나쁜 것마저 아들을 탓하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나 밖으로 돌기 시작했다. 아들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면서 고민하던 아버지는, 신하들이 아들의 비행을 잇달아 전하자 1762년에 마음을 접는다.
자신을 폐위시킨 뒤에도 “만약 양녕에게 병이 있어 위급하면 반드시 나에게 알려야 한다”고 당부한 태종의 마음을 양녕대군이 조금이라도 깨달았다면, 이역만리에서 새 세상에 눈을 뜬 아들을 감싸안을 넉넉한 품이 인조에게 있었다면 어땠을까? 이 책을 통해 하나의 관계로 묶인 상대와 소통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35.조선시대사 이해 (독서>책소개) > 1.조선왕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 왕조의 기원 (0) | 2022.02.15 |
---|---|
광해군: 그 위험한 겨울 (0) | 2022.02.15 |
이성계와 이방언 (0) | 2022.02.07 |
조선왕조실록1(태조)2(정종.태종)3(세종.문종.단종)4(세조.에종.성종) (0) | 2022.02.07 |
영조 그리고 정조 두리더 (0) | 2022.0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