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좌진
조선한민족총연합회 회장 겸 총재
임기 1929년 2월 15일 ~ 1929년 11월 1일 / 주석 이동녕 대한 임정 수반 / 총리 김구 대한 임정 총리 / 장관 김구 대한 임정 내무총장 / 차관 이유필 대한 임정 내무차장
이름
별명 자(字)는 명여(明汝)
호(號)는 백야(白冶)
신상정보
출생일 1889년 12월 16일 / 출생지 조선 충청도 홍주목 / 사망일 1930년 1월 24일(40세) / 사망지 중화민국 만저우 지방 베이젠다오 하이린시
국적 대한제국 / 경력 군인 . 독립운동가 . 시인 . 저술가 . 문장가 / 정당 무소속
부모 김형규(부), 한산 이씨 부인(모) / 형제자매 김경진(형), 김옥출(누나), 김동진(남동생) / 배우자 초배 부인 오숙근 / 계배 부인 나혜국 / 측실 김계월(일명 박계숙) / 측실 이씨 / 자녀 2남 2녀 / (서장남 김두한, 서장녀 김석출, / 적차남 김철한, 적차녀 김강석) / 친인척 김옥균(9촌 숙부) / 김종진(족제) / 김을동(손녀) / 송일국(외증손자) / 송송이(외증손녀)
종교 유교(성리학) → 대종교
군사 경력
복무 대한독립군 참장(參將)] 전역
주요 참전 청산리 전투
상훈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제1급(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김좌진(金佐鎭, 1889년 12월 16일 (음력 11월 24일)~1930년 1월 24일)은 대한제국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기의 군인이다.
그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現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휘관이었으며, 김동삼, 오동진 등과 3대 맹장(猛將)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1930년 공산주의자 박상실[3]에 의해 피살되었다. 본관은 신 안동. 김상용의 11대손이며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이다.
나이 17세(1906년)에 그는 집안의 가노를 해방 및 땅을 분배하였고 민족적 자립을 위한 무장 독립 운동의 선봉에도 서는 동시에 국가의 미래를 위한 교육사업도 활발히 펼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대한제국 교육 사회 사업 르네상스 혁신 선구자 인물 중 한 명이기도 하다.형평사 운동에도 관여했다.
생애 / 출생과 성장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출생하였다. 흔히 청산리 대첩의 대표 장군으로 나온다. 만3살 때(1892년) 아버지 김형규를 여의었으나 넉넉한 살림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일은 없었다. 하지만,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손가락질하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모친인 한산 이씨에 의해 엄하게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1904년 해주 오씨 오숙근과 혼인하였다.
애국의 길을 선택하다
1905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고 같은 해, 가노 해방 및 전답을 무상 분배한 뒤 1907년 호서(충청도) 지방을 밝게 한다는 즉 개화한다는 뜻인 호명학교를 설립하였다. 가산을 정리한 뒤 학교 운영에 충당하게 하고 90여 칸으로 된 자신의 집을 학교 교사로 제공했다. 홍성에 대한협회 지부와 기호흥학회를 조직하여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기호흥학회 장학재단을 설립하였고 한성신보 이사를 역임하였다. 안창호·이갑 등과 서북학회를 세우고 산하 교육기관으로 오성학교를 설립하여 교감을 역임하는 한편, 청년학우회 설립에도 협력하였다.
항일투쟁의 길을 걷다
1911년 동간도에 독립군 사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하여 자금조달자 돈의동에 사는 족질 김종근을 찾아간 것이 원인이 되어, 2년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복역 중 김구와도 조우한다. 1913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소한 김좌진은 “사나이가 실수하면 용납하기 어렵고 지사가 살려고 하면 다시 때를 기다려야 한다.”라는 시를 지었다. 1917년 대한광복단을 조직하여 박상진 등과 활동하다 1918년 만주 길림으로 망명하면서 “칼 머리 바람에 센데 관산 달은 밝구나 칼끝에 서릿발 차가워 고국이 그립도다 삼천리 무궁화 동산에 왜적이 웬 말이냐 진정 내가 님의조국을 찾고야 말것이다.”라는 시를 지었다. 대한정의단에 합류한 군사부문 책임자가 되었고 동 단체를 군정부로 개편한 후 사령관으로 추천되었다. 한편, 1918년 박상진이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박상진을 구하기 위해 파옥계획을 세웠으나 실현은 하지 못했다.
1918년 길림에서 무오 독립선언에 서명하였다. 1919년 북로군정서 사단장과 사관연성소 소장을 겸임했다. 1920년 10월 21일 청산리 전투를 지휘하여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김좌진은 1921년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했다. 1921년 우수리강을 넘어 이만까지 갔다가, 다시 북만주로 돌아왔기 때문에 자유시참변은 겪지 않았다.
1925년 군사위원장 겸 사령관직 겸임한 신민부를 창건하였다. 또한 북간도 목릉현에 성동사관학교를 세워 부교장으로서 정예사관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무위원으로 임명했으나, 취임하지 않고 독립군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최후
1928년 한국유일독립당을 조직하였고 1929년 한족총연합회 주석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민족주의 계열과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사이에 갈등이 격화되었고, 공산주의 선동에 방해되는 이유로 1930년 1월 24일 북간도 중동선 해림현 산시역에서 김일성(金一星, 본명 김봉환)의 사주를 받은 고려공산청년회 회원 박상실(朴尙實, 일명: 尙範, 金信俊)에게 피살되었다. 김일성은 사건 직후 이붕해(李鵬海, 1899~1950)에게 살해되었으며, 박기봉(朴奇峰)에 의하면 만주공산주의 단체의 기관지인 「적기(赤旗)」지(誌) 1930년 3월호에 암살 교사범 김일성(金一星·김봉환)의 죽음을 추도하는 기사가 실렸다고 한다.
한편 중외일보 1930년 2월 24일자 기사 「배후(背後)에서 권총(拳銃)으로 김좌진(金佐鎭)에 하수(下手)한 김일성(金一星)」에 나오는 김일성은 단순한 성행 불량자로 김봉환과 다른 인물로 보이며, 그가 단독으로 암살을 실행한 것으로 나온다. 또 암살범 박상실(朴尙實, 일명 崔永錫)이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집행을 위해 봉천으로 이송 중이라는 1931년 9월 11일자 동아일보 기사가 있고, 『삼천리』 1932년 3월호 기사 《남편 김좌진의 초혼, 미망인 나혜국여사의 방문기 (男便 金佐鎭의 招魂, 未亡人 羅惠國女史의 訪問記)》에도 "박상실을 잡아서 봉천(奉天)에 보내어 사형(死刑)에까지 처(處)하게 만들었다"고 했으므로,[17] 그도 무사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월간조선이 입수한 1931년 3월에 작성된 일본 하얼빈총영사관의 문서 「공산주의 선인(鮮人)의 행동개황」에는 「공산계통 불령선인단(不逞鮮人團) 조선인 주중국청년총맹원(駐中國靑年總盟員) 김신준(金信俊)은 24세로 (1930년) 1월24일 북간도 산시참(山市站) 남방 조선인 부락에서 민족계 불령단 한족(韓族)총연합회 수뇌 김좌진(金佐鎭)을 살해했다」고 적혀 있다.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김신준」과 「박상실」을 동일인물로 간주해왔지만 이에 대한 명백한 근거는 없으며 암살범 김신준은 전혀 다른 인물일 가능성도 있다.
日本 외무성 외교사료관 문서 입수 / 최종확인 : 김좌진 암살범은 고려공산청년회 金信俊 월간조선 2007년 10월호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의 배후조종說」은 확인 안
근래에 중국 연변 학계에서는 김좌진 암살범은 『조선공산당 아성(阿城)총국에서 파견한 무장공작대원 공도진(公道珍)』이라고 말한다.공도진은 이복림(李福林,1907 ~1937)의 본명이며,[20] 그는 중국공산당 만주성위 산하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사령 자오상즈(趙尙志, 1908~1942)의 신임을 받던 최측근 인사였는데, 1937년 전사했다. 박상실이 공도진(이복림)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또한 연변에서는 암살범이 김동식(가명·이성림)이라는 주장도 나와 있다.
김좌진은 사망하기 직전 “할 일이…. 할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란 말을 남겼다. 사후 3년 뒤, 아내 오숙근이 유해를 수습하여 고향 홍성에 임시로 매장하였다가 해방 후 김두한에 의해 정식으로 안장되었다.
사후
한족총연합회에서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그의 장례에 참석한 중국 사람들은 고려의 왕이 죽었다고 애도하였다.
1933년 경성에 있던 부인 오숙근이 일제를 피해 만주로 다시 가서 상자에 김좌진의 유해를 위장하여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밀장한 뒤 1957년 김두한에 의해 지금의 장소로 이장되었다. 이듬해 사망한 부인 오숙근은 남편 김좌진과 함께 합장되었다.
1947년 김좌진을 추모하는 추모회가 열렸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헌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974년 보령시에서 김좌진의 성역화사업을 추진하고, 이와 동시에 그의 업적과 정신을 후세에 계승코자 매년 10월 22일에 행사가 개최되고 있다.
생가터(안채, 사랑채, 광이 따로 있고 앞면 8칸 옆면 3칸의 기와집으로 서쪽을 향하고 있음)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76호로 지정되었다.
1999년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2013년 8월, 대한민국 해군 손원일급 잠수함 4번함이 '김좌진함'으로 명명되었다.
평가
“ 그이(김좌진)는 몸이 뚱뚱하면서도 후리후리한 키가 구척 장신인 거인인 만큼 힘도 큰 장사이였습니다. 옛날 우리 집에 ‘놋두멍’은 얼마나 무거웠든지 빈 것이라도 칠팔명 장정이 들어야 땅김이라도 하는 것을 그이는 혼자서 힘드리지 않고 물이 반독이나 들어잇는 것을 능큼능큼 들곤 하였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먹는 것도 대음(大飮) 대식(大食)이였습니다. 술도 그랫거니와 밥 한 두 그릇은 맛이나 보고 고기 근이란 량에 차지도 아니하였답니다. ”
— 동아일보 1930년 2월 13일자
“ 당신도 총에 맞고 나도 총에 맞았는데, 왜 나 혼자 살아서 오늘날 이 꼴을 본단 말이오. 당신은 영혼이 되시어 우리 동포를 이끌어가는 나를 보호해 주시오. 그리고 땅 밑에서 당신과 만날 때 우리 둘이서 그 옛날 서대문감옥에서 하던 말 다시 말해 봅시다. ”
— 1947년 김구의 김좌진 장군 추도사 中
“ 김좌진 장군은 칠 척 거구에 만인을 위압하는 태산과 같은 위엄과 형형한 안광 그리고 도도한 웅변력을 가진 진정한 영웅호걸이었다. ”
— 철기 이범석의 회고록 中
“ 중국은 청일 전쟁 당시 일본에 패배하였습니다. 이것은 일본에 대한 저항의 자신감을 잃게 했습니다. 청산리 전투의 승리로 중국 사람들의 항일 정신을 고무시켰습니다. 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중국인들이 일본 제국주의를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을 바꿔놓았습니다. ”
— 장완린 작가
기타
공산 진영에서 김좌진이 친일로 변질했다며 비판하나 이는 자유시 참변으로 민족 진영과 공산 진영의 대립으로 깎아내리기 위한 나온 말이며[26] 실제로 김좌진은 좌우가 협력해 독립운동해야 한다고 주장한 민족주의자였다.
신민부가 해체되는 대표적인 사건 '빈주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한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김좌진 장군의 막빈(비서이자 참모)이었던 이정(李楨, 1895 ~ 1943)이 일제의 밀정이 되어 그와 관련된 정보를 일제에 넘겼던 것으로 밝혀졌다.
공산주의 반대한 탓? '이달의 독립운동가' 김좌진 제외 논란 중앙일보 2019.10.14 : 대상에 올라 있던 김좌진을 제외하고, 없던 인물인 공산주의자 이동휘를 넣었다. 출처 위키피디아
어록
“ 적막한 달밤에 칼머리의 바람은 세찬데 칼끝에 찬서리가 고국생각을 돋구누나 삼천리 금수강산에 왜놈이 웬말인가 단장의 아픈마음 쓰러버릴 길 없구나 ”
— 《독립기념관 〈단장지통〉어록비》
“ 칼 머리 바람에 센데 관산 달은 밝구나 칼끝에 서릿발 차가워 고국이 그립도다 삼천리 무궁화 동산에 왜적이 웬 말이냐 진정 내가 님의조국을 찾고야 말것이다. ”
— 《1918년 만주 길림으로 망명하면서》
“ 사나이가 실수하면 용납하기 어렵고 지사가 살려고 하면 다시 때를 기다려야 한다. ”
— 《1913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소하면서》
“ 할 일이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 ”
— 《1930년 1월 24일 북간도 산시역에서 사망하기 직전에 남긴 말》
“ 본년 8월 이래로 적의 독균이 간도에 파급되어 슬프다! 우리 무고한 양민이 적의 독봉 아래 원혼이 된 자 얼마며
그 많은 재물과 양곡이 화염 속에 사라진 것이 얼마며 이렇게 땅은 얼고 찬 기운이 뼈를 깎는데 옷 없고 집 없이 길에서 굶어 죽는 자 얼마인가.
종이조각에 대한 두 글자만 나타나도 그 집은 잿더미가 되고 탄피의 빈 껍질 하나라도 들어나면 그 사람은 죽임을 당하니 모든 사람이 입을 봉하고 서로 눈 질만하고 있다. 교회당에 불을 지르고 학교를 헐어 문명을 박멸하니 천인이 공노하고 있는도다.
우리 군정서는 죽을힘을 다하여 혈전 4,5일에 적의 연대장 이하 수십 명의 장교와 1천2백 명의 병졸 을 죽였다. 그러나 부득이 험악한 산중으로 물러나 스스로를 지키면서 재기의 그날을 기약할 것이다.
이에 아래와 같은 격문을 포고한다. 정의를 보고 용감한 것이 우리 독립군의 정신이요 싸움에 임하여 물러서지 않는 것은 우리 독립군의 기백이니 어찌 공로를 계산하고 이익을 도모하여 대의를 저바릴 것인가. 이 격문이 이르는 날부터 각기 정의를 분발하여 성패를 불문하고 다 함께 함몰되어 가는 민족과 조국을 건져내어서 대한 광복의 대업을 조속히 완성합시다.”
— 《간도 참변 이후 김좌진의 군정서 격고문》
세계(世系)
시조부터 본인까지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1세 습돈(習敦) → 2세 여기(呂基) → 3세 남수(南秀) → 4세 희(熙) → 5세 자(資) → 6세 근중(斤重) → 7세 득우(得雨) → 8세 혁(革) → 9세 삼근(三近) → 10세 계권(係權) → 11세 영수(永銖) → 12세 번(番) → 13세 생해(生海) → 14세 극효(克孝) → 15세 상용(尚容) → 16세 광현(光玄) → 17세 수빈(壽賓) → 18세 성익(盛益) → 19세 시눌(時訥) → 20세 락행(樂行) → 21세 이진(履鎮) → 22세 장순(章淳) → 23세 윤근(潤根) → 24세 병호(炳皓) → 25세 형규(衡圭) → 26세 좌진(佐鎮) → 27세 두한(斗漢)
책소개
목차
1 안동 김씨 명문가에서 태어나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다
안동 김씨 명문가에서 태어나다
노비를 해방시키고 교육구국운동을 펼치다
민족운동가들과 교류하며 기호흥학회에 참여하다
2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서간도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추진하다
독립전쟁을 위해 광복회에 참여하다
광복회 만주 책임자가 되어 파견되다
3 청산리 독립전쟁을 준비하다
대한독립선언서 대표가 되다
서일과의 만남, 대한정의단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청산리대첩의 영웅들을 길러내다
4 만주 항일투쟁의 금자탑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다
결전의 장소 청산리
첫 승전 백운평전투
일본군 기마부대를 전멸시킨 천수평전투
최대의 승전 어랑촌전투
맹개골전투, 만기구전투, 쉬구전투, 천보산전투
국제연대를 위해 노령으로
5 다시 조국의 광복을 위해 매진하다
대한독립군단, 흩어진 동지들을 모으다
신민부 창립의 주역이 되다
무장투쟁을 주장하며 신민부를 이끌다
6 민족유일당운동을 펼치고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다
뭉쳐야 산다. 3부통합에 힘쓰다
혁신의회를 조직하다
아나키즘을 받아들이다
이루지 못한 꿈, 한족총연합회
7 아직도 조국을 위해 할 일이 많은데…
믿을 수 없는 비보, 김좌진의 순국
영웅의 마지막 길
김좌진의 삶과 자취
출판사 리뷰
김좌진은 무장투쟁을 중시했지만 한인사회 안정화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교육 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항일무장투쟁의 기반은 재만 한인사회였고, 한인사회의 안정 없이는 무장투쟁도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결과였다. 김좌진은 재만 동포들의 생활기반 마련을 위해 생활 개선·영농방법 개선·실업 장려 등 동포들의 경제적 부흥을 위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한족총연합회 시절 동포들로 하여금 자치조직을 결성케 하고 경제적 이익을 증진시키고자 했던 것도 재만 동포들의 생활 안정을 가장 시급한 문제로 여겼기 때문이다.
김좌진은 교육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민족운동이 호명학교 설립에서 출발했듯이 교육사업에 대한 열정은 남달랐다. 김좌진은 신민부와 한족총연합회 시절, 50여 개의 학교를 세워 한인자제들을 교육했다. 교육사업은 한인자제들에게 항일의식과 민족의식을 심어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고, 동포들의 바람이기도 했다.
만주 항일무장투쟁의 최전선에 서다
김좌진은 1920년대 만주 항일투쟁의 현장에 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이 되어 상해로 떠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만주를 고집했다. 조국의 독립은 독립군 양성을 토대로 일제와의 전쟁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으며, 독립군을 양성해 국내로 진격할 수 있는 최적지를 만주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김좌진이 항상 ‘독립군 양성과 항일무장투쟁’을 최고의 목표로 삼았던 것도 같은 이유이다. 때론 무장투쟁론이 갈등을 빚기도 했다. 대한군정서가 일본군의 간도 출병으로 근거지를 이동해야 했을 때, 총재 서일은 ‘아직 일제와 독립전쟁을 벌일 시기가 아니며, 북만 오지( ??로 이동해 후일을 도모하자’고 했다. 하지만 김좌진은 독립전쟁에 대한 뜻을 굽히지 않고 사령부를 이끌고 청산리로 이동해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일제에 의해 신민부 간부들이 체포되었을 때도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주장하며 ‘군정파’를 이끌었다. 북만지역에 공산주의세력이 확대되면서 동포들이 신민부에서 이탈할 때도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신념에는 변화가 없었다. 김좌진은 독립군 양성, 군비확충, 국내진격작전 등을 끊임없이 추진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평생 노력한 김좌진. 1920년대 만주 항일투쟁의 중심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책소개
이에 필자는 역사학계의 연구 업적을 바탕으로 하여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김좌진 장군의 민족운동과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밝혀보고자 한다. 특히 본서에서는 김좌진 장군의 항일투쟁적 면모와 더불어 일반 대중들의 대중적·민족적 지도자로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하며 자신의 삶의 노선과 방향을 수정해가는 ‘청년’ 김좌진의 모습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 김좌진의 진면목이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김좌진 장군이 민족지도자 로서 대중의 강력한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항일영웅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항상 시대의 변화와 일반 대중의 아픔에 민감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는 마음자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서에서 필자는 백야 김좌진의 삶과 노선을 올바로 파악하기 위해 그동안 이뤄진 수많은 연구 성과들과 새로운 자료들을 재검토하였다. 이를 통해 그의 참 모습에 보다 가까이 접근하고자 했다. 아울러 독자들이 그에게 다가가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질 수 있도록 쉬운 문체로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했으며 다수의 사진 자료를 제공하고자 하였다.
본서는 기본적으로 기존에 필자가 간행한 『김좌진 평전』(선인, 2010)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책머리에」중에서
목차
1. 항일운동과 사상
2. 역사적 위상
제2장 유가족, 장례, 그리고 그를 기리는 마음들
1. 김좌진 장군이 순국한 이후 가족들은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2. 장군의 장례와 추모
제3장 어린시절은 어땠을까?
1. 명문가 집안·혁명가 집안 출생
2. 풍운아로의 성장
제4장 고향에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다
1. 김좌진의 민족의식은 어떻게 형성되었나
2. 계몽운동을 시작하다
제5장 서울에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다
1. 서울에서도 여전히 풍운아
2. 치열했던 군자금 마련 운동
3. 출옥 후 대한광복회 부사령관으로 활동
제6장 만주벌 호랑이가 되다-청산리독립전쟁
1. 청산리독립전쟁을 위한 준비운동
2. 청산리독립전쟁과 김좌진
제7장 북만주에서 대중의 중요성을 깨닫다
1. 대한독립군단 활동
2. 신민부 활동
3. 한족총연합회 활동
제8장 어떠한 국가건설을 꿈꾸었나?
1. 대종교적 민족주의
2. 대종교적 공화주의
3. 대종교적 무정부주의사회의 추구
제9장 김좌진 장군 ‘암살’의 진실은?
1. 누가 김좌진 장군을 죽였는가?
2. 김좌진 장군 암살의 숨은 배경 찾기
3. 신문들, 김좌진 장군의 서거를 전하다
'04.근현대한국사 (2024~) [해설서] > 4.근현대사 (인물평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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