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근현대한국사 (2024~) [해설서]/4.근현대사 (인물평전)

[웹북] 손기정 (1912~2002) - 1936 베를린 올림픽 대회 마라톤 우승)

동방박사님 2024. 8. 9.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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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  孫基禎

1936년 하계 올림픽 육상 남자 마라톤에서 2시간 2919.2초의 기록으로 들어오는 손기정

신상정보

출생 1912829일 /  일제강점기 평안북도 의주부 / 사망 20021115(90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성별 남성 / 국적 대한민국 / 직업 육상 선수.스포츠 행정가.스포츠 사회 운동가 / 종교 천주교(세례명: 아우구스티노) / 부모 손인석(), 김복녀() / 배우자 강복신(사별), 김원봉(사별) / 자녀 손문영(), 손정인(아들) / 친척 강용석(장인), 김태규(장인), 김원룡, 김원권(처남)

활동 정보

활동 기간 1933~ 2002년 / 소속 전직 대한체육회 고문 / 상훈 1936년 하계 올림픽대회 육상 남자 마라톤 금메달 / 1957년 대한민국 체육상 / 1963년 혁명정부 문화공로상 / 1967년 바킬라아베베상 / 1967년 서울신문사 체육상 / 1968년 국제육상경기연맹 공로상 / 1970년 국민훈장 모란장 / 1982년 국제육상경기연맹 창립 70주년 특별기념상 / 사후 2002년 체육훈장 청룡장 추서

손기정 ( 孫基禎)  기본 정보

로마자 표기 Sohn Kee-chung / Son Kitei / 국적 일본 제국대한민국 / 출생일 1912829일 / 출생지 일제강점기 평안북도 의주부 / 사망일 20021115(90) / 사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170cm / 

스포츠/ 국가 일본 / 종목 육상

세부종목 마라톤 /  최고기록 마라톤 2시간 2919.2(1936) / 메달 기록 일본의 기 일본의 선수 / 남자 육상 / 올림픽 1936 베를린 마라톤

손기정 / 한글 표기: 손기정 / 한자 표기: 孫基禎 / 개정 로마자 표기: Son Gijeong / 매큔-라이샤워 표기: Son Kichŏng / 예일 표기: Son Kiceng /공식 로마자 표기: Sohn Kee-chung

손기정(孫基禎, 1912109[1]~20021115)은 대한민국의 체육인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육상 선수로 활동했으며 주 종목은 마라톤이다. 1936년 하계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한국인 선수로는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 그는 한국인이었으나 당시 대한민국은 일제강점기 시기였기 때문에 일본어 이름인 손 기테이(일본어: 孫 基禎, そん きてい)라는 이름을 쓰고 일본 국가대표 선수로 출전해야 했다. 그는 이 대회에서 2시간 2919.2초를 기록하여 마라톤 올림픽 신기록을 수립했다.

해방 후에는 육상 감독과 체육 행정가로 나서서 대한체육회 부회장, 대한민국 마라톤 국가대표팀 감독, 대한육상경기연맹 부회장 등 여러 직책을 역임했으며, 1952년 하계 올림픽에 대한민국 마라톤 국가대표팀 감독 자격으로 대한민국 선수단 기수를 맡았다. 대한민국 서울에서 개최된 1988년 하계 올림픽 개막식 당시 첫번째 성화 봉송 주자를 맡았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올림픽 마라톤 참가, 그리고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 열린 1986년 아시안 게임/1988년 하계 올림픽/2002FIFA 월드컵/2002년 아시안 게임을 모두 본 후 생애를 마쳤다.

생애 / 소년기

일제 강점기 조선 평안북도 의주부 광성면 민포리에서 출생(1938년 평안북도 신의주부 남민포동으로 편입)하여 성장한 그는 신의주의 학교를 다녔다. 1926(보통학교 5학년 때) 초봄에 해일이 일어나 오늘날의 신의주부 남민포동(南敏浦洞) 일대가 바닷물에 잠겨 학업을 중단하고 장사에 나섰다. 14세의 나이로 철따라 물건을 바꿔가며 참외장사, 각설탕 장사, 군밤장사 등을 했다. 덕분에 2학기부터 약죽(若竹)보통학교에 다시 다닐 수 있었으나, 6학년 졸업을 할 때까지 낮에는 학교에 가고 저녁에는 장사해야 하였다. 손기정은 집에서 학교까지 약 2킬로미터의 자갈길을 항상 뛰어다녔다.

손기정은 양정고등보통학교에서 공부하였는데, 개신교 사상가인 김교신 선생이 교사로 일한 학교였으므로 김교신 선생과 교사와 제자로서의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6년 하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후 인촌 김성수의 권유로 보성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했지만, 일제의 감시 탓에 자퇴한 후 다시는 육상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일본으로 건너가 1940년에 일본의 메이지 대학에 입학하여 법학부를 졸업했다. 그는 중학교 시절부터 육상 선수로 활약했으며, 1933년부터 1936년까지 마라톤 대회 13개에 참가했고 그 중 10개에서 우승했다. 그는 1935113일에 2시간 2642초의 비공인 세계 신기록을 세웠으며, 이 기록은 1947년까지 유지되었다. 개인 최고 기록은 이보다 더 좋은데, 표준 마라톤보다 더 긴 코스(42.715 km)에서는 2시간 2514, 더 짧은 코스에서는 2시간 2451초를 기록했다.

1936년 하계 올림픽 마라톤과 일장기 말소 사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하이라이트인 마라톤 경기(193689)는 우승 후보로 꼽히던 아르헨티나의 후안 사발라와 손기정의 다툼이었다. 처절한 사투는 후반의 막바지 코스인 비스마르크 언덕에서 손기정이 앞서 가던 사발라를 추월하면서 결판이 났다.이로 인하여 손기정은 마라톤에서 우승하였다. 아돌프 히틀러는 경기 다음 날 손기정을 면담하고 격려하였다.

손기정은 42.195km2시간 2919.2초에 주파해 당시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땄다. 이 때 손기정과 함께 출전했던 남승룡이 동메달을 차지하였다. 1936년 당시에는 대한제국이 일본의 지배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일본 국가대표로 뛰어야 했고, 이름의 로마자 표기도 일본식으로 읽은 손 기테이(Son Kitei, そん きてい)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하지만 손기정은 한국어 이름으로만 서명했으며 그 옆에 한반도를 그려 넣기도 했다. 인터뷰에서도 그는 자신의 모국이 대한민국이라고 밝혔다. 시상식 때도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가 올라오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그는 경기 후 일본 선수단이 여는 축하 파티에 참석하지 않고, 베를린에 있는 조선인 두부공장에서 열린 우승을 축하하는 모임에 참석하였다.

당시 중국 상해에 한반도를 영토로 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었다. 일제의 식민통치 하였지만 한민족을 대표하는 정부가 존재했었다. 비록 그 모습은 완전하지는 못했다.

당시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가 그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말소한 후 기사를 게재한 일장기 말소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 사회부장이었던 현진건이 1년 간 감옥에서 복역하는 등 언론 종사자들이 탄압을 당했으며, 당시 체육계에서 나름 입김이 있었던 인사이자 손기정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여운형 조선중앙일보 사장도 고초를 겪어야 했다. 손기정도 조선으로 귀국할 당시 환영 대신 경찰들로부터 연행 마냥 대우받았고, 전차를 타는 것조차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이 여파로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일제의 감시가 강화된 탓에 중퇴하고 말았다.

손기정은 유럽 여러 나라와 인도를 거쳐 싱가포르에 도착했을 때 그는 선배로부터 주의하라. 본국에서 사고가 나서 일본인들이 너희를 감시하라는 전문이 선수단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동아일보가 손기정이 입은 옷에 있는 가슴 부위의 일장기를 지워서 기사로 게재한 사실 때문이라고 했다. 자신의 사진 때문에 신문이 정간되고 많은 기자가 복역을 하는 등 고초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손기정은 다시는 마라톤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재차 다짐했다. 예상대로 가는 곳마다 일본 경찰이 손기정을 감시했다. 마치 사상범을 다루듯 몸을 검색하기도 했다. 그는 마라톤 우승을 반납하고 싶다고까지 말했다.

사회 활동

보성전문학교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 대학을 졸업한 후, 1944년까지 조선저축은행에서 은행원으로 잠깐 일했다. 일제강점기 말기 19453월에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여운형을 만나서 경기도 주안 조병창이 채병덕 중좌에게 전갈을 보내는 연락담당 역할을 했다. 1947719일에 여운형이 극우 인사 한지근의 총격으로 살해당하자, 동년 83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인민장 영결식에 참석하여 역도선수 김성집 등의 체육인들과 함께 여운형의 관을 운구하였다.

광복 이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한체육회 부회장, 1963년에 대한육상경기연맹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1966년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 대표단장으로 참가하였다. 1971년에는 올림픽 위원회(KOC) 위원, 1981년부터 1988년까지는 서울 올림픽 조직 위원을 역임하였고, 1988년 서울 올림픽 개회식에서 성화 봉송 최종 주자로 나서 전 세계인의 안목을 집중시켰다. 각각 1947년과 1950년에 코치로 활동하여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한 마라토너 서윤복과 함기용의 전담 코치를 맡아 이들을 훈련시켰고,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황영조는 손기정이 자신의 정신적 지주였다고 밝혔다. 1983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자서전을 통해 당시 상황과 심정을 밝혔다. 보성전문학교의 후신인 고려대학교에서 경영학과 명예 졸업장을 전달한다.

말년

1990년대 이후 간혹 방송과 인터뷰에 참여하였다. 20021115일에 지병이던 만성 신부전증과 폐렴으로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향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사후 체육훈장 청룡장이 추서되었다. 모교 양정고등학교가 서울특별시 양천구 목동으로 이전한 후, 서울역 서부 출구(서부역)에서 멀지 않은 만리동2가에 있었던 옛 양정고등학교 자리에 손기정공원과 손기정 기념관이 만들어졌다. 손기정 기념관은 나라를 잃은 어려운 시절, 세계를 재패해 우리 민족의 긍지를 높여준 손기정 선수(1936년 하계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의 뜻을 기리고, 국제적인 스포츠 관광 자원으로 개발하고자 1918년 만리동에 건립된 손기정 선수(21회 졸업)의 모교인 양정의숙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손기정 탄생 100주년인 20121014일에 개관하였다.

기타 이력

숭실대학교 체육교육학과 특임초빙교수 / 고려대학교 체육교육학과 특임초빙교수 / 한양대학교 체육교육학과 특임초빙교수

기타 비고 사안

손기정의 베를린 마라톤 우승 소식이 알려지자, 윤치호는 광의로 보아 황인종의 자랑이며 백인의 종의 우월성을 타파한 일이라며 칭송하였다.

수상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육상 남자 마라톤 금메달 /  1957년 대한민국 체육상 / 1963년 혁명정부 문화공로상 / 1967년 바킬라아베베상 / 1967년 서울신문사 체육상 / 1968년 국제육상경기연맹 공로상 / 1970년 국민훈장 모란장 / 1982년 국제육상경기연맹 창립 70주년 특별기념상 / 2002년 체육훈장 청룡장

손기정 투구 (보물 904호)

한일간 국적 귀속 분쟁

올림픽 공식 기록에는 손기정의 국적이 우승 당시 시점의 일본으로 되어 있다.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에 세워진 기념비에 쓰여진 국적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한 번 바뀌었다가, 다시 일본으로 바뀌었다. 손기정은 일본 올림픽 위원회가 국제 올림픽 위원회에 국적 변경을 신청하면 공식 기록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일본 올림픽 위원회가 이를 수용하지 않아서 공식 기록은 경기 당시의 국적인 일본으로 남아 있다. 또한 국제 올림픽 위원회의 홈페이지에도 손기정의 국적을 일본(Japan)으로 표기하고 있고 이름도 손 기테이(Kitei SON)라고 표기하고 있지만 손기정의 일대기에 대한 자료에서는 국적이 한국(대한민국, Korea(South Korea))라고 밝히고 있고, 일제강점기 시절 어쩔 수 없이 일본 국적을 달고 경기에 나오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그의 다른 이름을 손기정(SOHN, Kee-Chung)으로 표기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올림픽 역대 마라톤 우승자 기념비나 올림픽 기록집 등에는 손기정의 국적이 대한민국으로 기재되어 있다.

손기정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할 당시 상해에는 한반도를 영토로 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었다. 아울러 1948815일에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계승하여 세워진 정부이다. 또한 대한민국 정부는 19481212일 국제적인 승인을 받았다.

관련 문화재

손기정투구 /  고대 그리스 청동 투구 / 손기정 투구 (보물 제904) / 보물 제 904(지정년월일: 198737) /시대: 기원전 7~8세기 / 1875년 발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손기정 투구로 알려진 이 투구는 그리스 아테네 브라드니 신문사가 1936년 하계 올림픽 당시 육상 남자 마라톤 우승자에게 씌워 주려 했으나 전달되지 못하고 50년 간 베를린의 샤로텐부르크 박물관에 보관되어 오다가, 1986년 손기정에게 전달되었다. 손기정은 이를 지난 1994년 국가에 기증했으며, 정부는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을 기념하기 위해 서양 유물로는 처음으로 보물 904호로 지정했다.

광고 출연

1984년 공익광고협의회 서울 올림픽 공익광고 / 1990년 팔도일보 / 1992KT&G 홍삼정 / 1998년 삼성 기업 PR. 출처 위키피디아

책소개

1936년 8월 9일 독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 일본 선수로 출전한 손기정 선수는 세계를 제패하는 대 파란을 일으켰다. 당시 민간지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는 손기정 선수의 소식을 대서특필하고 다양한 지면으로 편집해 널리 알렸다. 이 두신문은 일장기를 지워 신문을 발행해서 탄압을 받게 되었다. 저자는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한국와 일본을 오가면서 모은 자료들을 가지고 일장기 말소사건의 역사적 진실을 이 책에서 파헤친다.

목차

머리말

1장 손기정과 함께 달린 한국의 신문들
2장 손기정, 남승룡 가슴의 일장기를 지우다
3장 일장기 말소 사진의 원본은 어디서 온 것인가
4장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 그 새로운 사실들
5장 아직도 끝나지 않은 베를린의 역주

저자 소개 

저 : 최인진
 
한양대학교 문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동아일보 편집국 사진부 부장, 동아일보 사진부장 '88올림픽', 동아일보 사진담당 편집위원, 98사진영상의 해 조직위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으며 한국사진사연구소를 설립했다. 학교법인 명지학원 사진박물관 개설 추진본부장, 신낙균선생 기념사업회 사진역사연구소장 등을 지냈다. 논문으로는 「사진수용단계에 있어서 다게레오타입 전래 유무에 관한 연구」, 「한국사진기원에 관한 연구」,...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3495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since 2010):티스토리]

책소개

슬픈 마라토너’에서 평화의 전령으로
한국인 최초 세계적 스포츠인 손기정을 만나다
-‘슬픈 우승자’라는 이미지를 넘어 세계가 추앙한 한국 스포츠인 손기정을 조망하다
-민족의 영웅이 된 식민지 청년의 고뇌와 투쟁을 엿보다
-해방 후 한국 마라톤과 체육계를 이끈 뛰어난 지도자·체육인으로서의 면모를 발견하다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은 불행한 시대를 산 슬픈 마라토너로만 기억될 존재가 아니다. 1935년 11월에 2시간 26분 42초의 세계 공인 신기록을 세우고, 1936년 올림픽에서는 2시간 29분 19초 2라는 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했다. 이 기록은 1947년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서윤복이 2시간 25분 39초로 신기록을 세울 때까지 11년 동안 깨어지지 않았다. 또 해방 직후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1947년 보스턴마라톤대회 우승자 서윤복을 배출한 대단한 지도자였다. 아시아와 조선 최초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손기정의 자서전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은 이처럼 세계 마라톤계에서 주목하고 추앙하는 한국인 최초의 세계적 스포츠인 손기정의 면면은 물론, 식민지 청년으로 나라를 대표하는 위치에 오른 그의 고뇌와 갈등, 그리고 투쟁의 시간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 책에는 1936년 베를린에서의 손기정 이야기뿐 아니라, 탈출구조차 보이지 않던 어두운 시대에 달리고 또 달려야 했던 이유와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하기까지 험난했던 과정, 그리고 올림픽 우승 이후의 행적 등 솔직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당당히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한국 마라톤의 기적을 일으킨 해방 이후의 이야기들을 통해 뛰어난 지도자로서의 면모, 나이가 들어서도 절대 놓지 않았던 마라톤에 대한 열정 등 단편적인 이야기만으로 알 수 없었던 진정한 스포츠 영웅의 모든 것을 만날 수 있다. 다시는 자신과 같은 ‘슬픈 우승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며, 평생 평화의 가치를 소중히 간직하고 살아온 손기정의 생의 드라마를 만나보자.

목차

책을 펴내며

프롤로그
어린 시절의 추억
마라톤과의 대면
어두운 시절
조선의 올림피언
마라토너 손기정
운명을 건 승부
정상에 서서
반도를 흔든 마라톤 충격
전운에 휩싸인 세계 스포츠
날은 밝아오다
보스턴에 휘날린 태극기
시련과 영광의 한국 마라톤
동족상쟁의 비극
급변하는 세계 마라톤
재생
노병의 소망
에필로그

1984년 그 이후 · 이준승
겨레와 함께 달린 민족사상의 큰 승리 · 안춘생
손기정 선수의 자서전을 추천하며 · 홍종인
중학생 티를 벗지 못했던 우리의 영웅 · 최정희

손기정 연보
본문의 주

저자 소개 

저 : 손기정
 
1912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어릴 때부터 일하며 압록강변을 뛰었다. 스무 살 때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후 장거리 경주와 마라톤에서 두각을 보이며 각종 대회에서 우승, 신기록 수립의 행진을 이어나갔다.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2시간 29분 19초 2의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며 우승했다. 일제 강점 아래에서 비록 일본 대표선수로 출전했지만, 조선인들에게 ...

책 속으로

어떻게 하면 운동 시간을 벌 수 있을까. 이 궁리 저 궁리 끝에 꾀를 내었다. 이웃 이발소에서 일하는 일본인 친구에게 새벽에 나를 깨워달라고 부탁했다. … 밤 12시에 일을 끝내는 나로서는 지쳐서 도저히 혼자 일어날 수 없었다. 나는 일본인 친구와 상의 끝에 소란 떨지 않고 조용히 집을 빠져나가기 위한 방법을 마련했다. 발목에다 끈을 묶고 한쪽 끝을 창밖으로 늘여놓는 것이었다. 그 친구가 끈을 잡아당기기만 하면 내 발목이 당겨져 잠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어린 시절의 추억」중에서

전국의 내로라하는 명선수들이 모두 모인 조선신궁경기대회에서 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라톤이라는 희한한 종목이 있다는 것이었다. … 놀라운 일이었다. 이제껏 겨우 20여 리를 뛰어다녔는데 105리라면 거의 다섯 배나 되는 거리였다. … 신의주에 돌아온 나는 마라톤이라는 새로운 레이스의 매력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이왕이면 제일 긴 레이스를 해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마라톤과의 대면」중에서

동서남북으로 옮겨 다니며 잠자리는 마련했으나 배고픔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허기가 져서 제대로 달릴 수가 없었다. 배부르면 이기고, 배고프면 지는 게 나의 달리기였다. … 굶주림을 혼자 안고 끙끙거리던 나는 체육 담당 교사인 김수기 선생님을 … 붙잡고 늘어졌다. “형님! 배가 고파서 못 뛰겠습니다.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이 당돌하고도 어처구니없는 내 요청을 선생님은 나무라지 않고 선뜻 받아주셨다. 선생님은 그날부터 매달 박봉을 쪼개어 2원을 나의 특별 급식비로 떼어주셨다.
---「어두운 시절」중에서

나의 우승이 결정된 순간, 일본 신문들은 국제전화를 통해 마라톤 우승자의 소감을 녹음하려 들었다. 그러나 시큰둥한 내 답변에 적잖이 김이 빠졌을 것이다. … 곧이어 [조선일보]가 국제전화를 걸어왔다. “손 선수! 우승 소감을 말해 주십시오.”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어라 말해야 좋을 것인가. 우승의 감격, 나라를 빼앗긴 슬픔으로 응어리진 가슴, 모든 게 뒤범벅되면서 간신히 참고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나는 전화기를 붙잡은 채 엉엉 울었다.
---「정상에 서서」중에서

나는 그때까지도 내 우승의 표지로 일장기가 오르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올림픽 출전 때까지 승리국의 기를 게양하고 국가를 연주하는 의식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 시상대에서 일장기를 쳐다보며 일본 국가를 듣는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곤욕이었다. … 두 번 다시는 일장기 아래서 뛰지 않으리라. 그러나 더 많은 조선인에게 이 쓰라림을 알리리라.
---「정상에 서서」중에서

서윤복 군은 질척거리는 신발을 끌고 달려 마침내 결승 테이프를 끊었다. 2시간 25분 39초. 세계 신기록이었다. 물론 내가 가진 세계 최고 기록보다도 훨씬 앞선 것이었다. 보스턴 하늘 높이 태극기가 올랐다. 시상대 위에 선 서윤복 군도, 관중석에 있던 나도 북받쳐오르는 감격에 못 이겨 눈물을 흘렸다. 태극기를 달고 이룬 최초의 승리였다. 잃었던 조국을 되찾고, 잃었던 태극기를 되찾고, 그리고 잃었던 코리아의 이름을 되찾아 만방에 조국의 건재를 알린 것이다. 보스턴에, 전 세계 마라톤계에 한국, 코리아의 이름을 떨친 것이다.
---「보스턴에 휘날린 태극기」중에서

1950년 4월 19일, 또 다시 보스턴마라톤대회에 출전했다. 나는 코치로 최윤칠, 함기용, 송길윤 등 세 선수를 인솔했다. … 함경북도 도민회에서 손기정이 인솔하는 한 최윤칠은 이길 수 없다고 아우성이었다. “내가 코치로 가는 데에 많은 분이 불안해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끼리만 패가 다르다느니, 누가 누구 편이라느니 하고 있을 뿐입니다. 미국에서야 한국 선수 세 명이 오는 것만 알지 한국 어느 지역 출신인지는 관심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국 선수들 중 누구든 우승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 만약 세 사람이 먼저 싸워야 한다면 무엇 때문에 큰돈 들여서 세 명씩이나 보스턴에 보내겠습니까?” 런던에서의 참패로 우리는 서로 헐뜯고 싸울 여유도 없었다.

우리 마라톤의 낙후에 대해 말들이 많다. 많은 젊은이가 돈과 인기를 좇아 다른 종목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는 탓도 있다. 스스로 고행에 나선 마라토너들조차도 더러는 어떻게 하면 쉽고 편하게 밥을 먹고 사느냐에 더 관심을 쏟는 것 같다. 마라톤 중흥을 위해 일부에서는 신기록을 내면 1억 원을 주겠다느니 하는 모험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 승리는 결과보다 과정이 더욱 중요한 법이다. 공식 대입과 어려운 산술 과정을 거치지 않고 정답이 나올 수는 없지 않은가. ‘미친 사람의 집념과 고집이 없었던들 어찌 식민지의 배고픈 젊은이가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을 제패할 수 있었으리오.’ 나의 마지막 소망은 후배 마라토너들의 힘찬 승전가를 들으며 눈을 감는 것뿐이다.
---「정상에 서서」중에서

출판사 리뷰

손기정의 삶으로 만나는
20세기 한국과 세계의 역사
-일제강점기부터 현대까지, 히틀러에서 김구까지, 근현대사와 함께 펼쳐지는 손기정의 생애
-한눈에 살피는 근현대 한국 체육, 그 성장 과정의 기록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한국전쟁, 분단, 그리고 올림픽 주최국으로 위상이 드높아진 현대 대한민국까지 거센 역사의 풍랑을 온몸으로 헤쳐온 그의 삶은 20세기 한국 근현대사를 한 개인의 일대기를 통해 돌아보게 한다. 나아가 세계적 스포츠인이었던 만큼 그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세계사의 주요 사건들과도 마주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 이 책은 개인의 삶과 역사의 연관성을 여실히 보여주며, 한 개인의 생애에 대한 단순한 기록을 넘어 역사 기록으로서의 가치를 드러내 보인다.

이 책에는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는데, 역사책이나 교과서에서만 보던 이름들이 종종 튀어나오기도 한다. 양정고등보통학교에 다닐 때는 조선어학자 지석영에게 배웠고, 베를린 올림픽 우승 후 베를린에 살던 안중근 의사의 사촌 안봉근 씨를 만나 처음으로 태극기로 보았으며, 이후 해외 곳곳의 교민들을 만나며 시야를 넓혀간다. 당대 정치·사회적 명사들과도 인연이 깊었다. 여운형, 김구, 이승만 등이 그들이다. ‘조선 체육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여운형은 조선체육회와 서울육상경기연맹 회장을 맡을 정도로 체육 활동에 힘쓰며 손기정과 인연은 맺었고, 김구와 이승만은 해방 후 손기정의 베를린 마라톤 우승 기념행사 등에 빠짐없이 참여해 격려와 축하를 해주었다. 격변기 해방정국에서 손기정은 김구와 이승만의 관계 호전을 위해 노력하거나 여운형, 김구의 죽음을 비통해하기도 한다. 이처럼 수많은 당대 인물들과 교류한 일화들로, 민족의식 형성에서부터 민족적 자긍심을 지키고 마지막까지 자신의 이름과 국적을 바로 알리고자 한 손기정의 삶을 행적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했던 만큼 히틀러를 대면해 축하 인사를 받은 일, [올림피아]의 감독 레니 리펜슈탈과 오랜 우정을 나눈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그 외에 올림픽과 여러 세계대회에 참가하며 교류한 에밀 자토펙, 제시 오언스, 아베베 비킬라 등 유명 세계 마라톤 선수들과의 일화도 소개한다. 또 이 책에는 1983년 초판에 실렸던 당시 안재홍 독립기념관건립추진위원장의 서문과 홍종인 조선일보 기자, 최정희 소설가가 쓴 추천의 글을 그대로 실어 동시대 인물들이 손기정을 어떻게 기억했는지 살펴볼 수 있게 했다. 특히 베를린 올림픽 당시 손 선수와의 전화 인터뷰와 우승 소식을 전하는 호외 발간과 과정을 들려주는 홍종인 기자의 글은 마치 눈앞에 당시의 신문사 풍경이 펼쳐지는 듯 매우 생생하고 흥미롭다.

마라톤 선수의 자서전인 만큼 근현대 한국의 체육사도 당연히 빠질 수 없다. 손기정이 활약하던 시절 함께 달리며 손기정을 마라톤으로 이끈 선배들(권태하, 김은배, 남승룡 등)을 물론이고 이후 지도자로서 함께한 후배들(서윤복, 최윤칠, 이창훈 등)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 마라톤의 역사를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또 육상 외에도 축구, 농구, 권투 등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던 조선인 선수들도 빠짐없이 기록해 소개하고 있다. 해방 후 한국 마라톤의 성장과 올림픽 및 세계대회 참가를 위한 노력, 최초의 남북체육회담, 1988년 서울 울림픽 유치 과정 등 불모지에서 한국 체육계가 성장해가는 과정을 상세히 담고 있어 근대 한국 스포츠사 기록으로도 값지다.

비극의 시대였다. 희망도 꿈도 없는 길고 긴 암흑의 터널이었다. 절망만이 가득하던 그 시대에 내가 택한 것이 마라톤이었다. 희망을 향한 탈출구라도 좋았고 파멸로 향한 길이라도 좋았다. 한시라도 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 마침내 올라선 마라톤 세계 정상에서 맛본 것은 끝없는 좌절감뿐이었다. 마라톤의 우승은 나의 슬픔, 우리 민족의 슬픔을 뼈저리도록 되새겨주었다. 나라가 없는 놈에게는 우승의 영광도 가당치 않은 허사일 뿐이었다.---「책을 펴내며」중에서 p.4~5

조선 선수들은 여러 가지로 불리하고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일본 선수들과 겨뤄 여러 종목에서 뛰어난 실력으로 일본 선수들의 기를 꺾었다. … 운동이야말로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남은 마지막 숨통이었다. 조선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거나 대일본제국을 비방할 어떠한 활동도 허락되지 않던 때였다. 일본 사람들은 몸으로 뛰고 달리는 운동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조선의 젊은이가 운동을 통해 일본을 누르고 쾌재를 부르며 조선 민족의 생존을 자각하게 되었는지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 ---「마라톤과의 대면」중에서 p.60~61

나는 점차 마라톤 선수로서의 길을 닦기 시작했다. … 목표는 권태하, 김은배 선배에 이어 조선 제일, 아니 세계 제일의 마라토너가 되는 것이었다. 선배들이 도전하다 실패한 올림픽 마라톤 우승이 내 꿈이었다. ‘1936년 다음 올림픽까지는 겨우 3년이 남았다. 그동안 우선 조선에서 최고, 전 일본에서 최고의 선수가 되어야 한다.’ 나는 선배들이 겪었던 혹독한 시련과 민족 차별을 머릿속에 되새겼다. … 누구도 시비를 걸 수 없도록 완전한 승리를 거두어야만 했다. ---「마라토너 손기정」중에서 p.107~108

우리는 베를린에 살고 있는 안봉근(安鳳根) 씨의 초대를 받아 그 댁에 가 있었다. … 안봉근 씨는 독립투사 안중근 의사의 사촌이었다. 안봉근 씨 댁에서 나는 난생 처음 태극기를 보았다. 선명한 색깔로 나뉜 음과 양, 그리고 태극을 감싼 괘. ‘이것이 태극기로구나. 이것이 우리의 깃발이로구나.’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듯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잃어버린 조국, 죽은 조국의 얼굴을 대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정상에 서서」중에서 p.181

광복과 함께 체육계는 체육계대로 활기찬 하루하루를 맞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주도하던 조선체육협회도 체육진흥회도 모두 없어지자 체육인들은 해당 종목 단체를 결성하느라 바빴다. … (그러나) 모두 정치운동에 가담해 저마다 제 편의 주장을 내세워 싸우느라 평화스러운 날이 없었다. 스포츠는 끊임없이 정치에 오염되고 이용당하지만 때로 정치적 화합의 장을 열어주는 위력을 가졌다. … 재건된 조선체육회는 자유해방을 기념하는 전국종합경기대회를 열었다. 광복된 조국 땅에서 처음으로 조선의 체육인들이 모두 모였다. 조국 광복과 함께 체육 활동도 부활한 것이었다. ---「날이 밝아오다」중에서 p.252~253

김구 선생의 축사는 지금까지 내 귓속을 맴돌고 있다. “나는 오늘까지 세계를 제패한 손기정, 남승룡 군으로 인해 세 번 울었다. 10년 전 난징의 컴컴한 방 안에서 나라 없는 청년이 세계 열강의 젊은이들과 겨뤄 우승했으나 조선 사람이면서도 가슴에 일장기를 붙이고 조선 사람 행세를 못 하는 모습을 신문으로 보면서 가슴 아파 울었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났을 때 충칭에서는 조선 청년 손기정이 일본군에 지원해 필리핀 군도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원통해서 울었다. 또 오늘은 죽었다던 손 군을 광복된 조국 땅에서 다시 만나 이렇듯 뜻깊은 자리에 함께했으니 감격해서 울지 않을 수 없다.”---「날이 밝아오다」중에서 p.261~262

8월 9일 승리의 그날,
1983년 초판본이 새 옷을 입고 독자 앞에 서다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일을 기념해 2022년 8월 9일 개정판 선보여
-100여 장의 사진 수록, 1984년 이후 회고록 증보
-서양화가 강형구 화백의 「우리의 손」을 표지화로


이 책은 1983년 한국일보사에서 출간한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의 개정증보판으로,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을 기념하여 2022년 8월 9일 출간한다. 마침 2022년은 손기정 선수 탄생 110주년, 서거 20주기이기도 하다. 또 현재, 지도자 손기정을 담은 영화 [보스턴 1947]중에서감독 강제규, 주연 하정우·배성우·임시완)이 개봉을 앞두고 있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의 손기정을 조명하는 영화가 준비 중에 있는 등 최초의 한류 스포츠 영웅 손기정에 주목하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손기정 평전까지 출간되며 손기정에 대한 연구와 조명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데 반해 국내에서는 이렇다 할 연구가 진행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에 손기정과 그의 시대에 대한 국내의 관심을 환기하고, 새로운 연구를 촉발하는 의미로 손기정 자서전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을 재출간한다.

이번에 출간하는 증보판에는 손기정기념관 소장 사진 외에도 유물과 역사 사진 100여 장을 실었고, 1984년 자서전 출간 이후 그리스 청동 투구 반환과 1988년 서울 올림픽 성화 봉송, 2002년 타계에 이르기까지 손기정 선수의 외손자인 이준승 손기정기념재단 사무총장의 회고를 더해 손기정의 삶을 더욱 입체적이고 풍부하게 담아냈다.

눈길을 사로잡는 표지의 그림은 강형구 화백 「우리의 손(Our Son)」이다. 거대한 캔버스에 역사와 시대의 표정을 머금은 인물의 얼굴을 세밀하게 묘사한 그림으로 유명한 강형구 화백은, 베를린 올림픽 당시 손기정의 표정에 매료되어 1990년대부터 손기정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며 손기정의 얼굴을 그려왔다. 현재 손기정기념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우리의 손」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우승 후 시상식에서의 손기정으로, 기쁨과 영광보다는 슬픔과 비장하고 억눌린 마음이 얼굴 곳곳에 묘사되어 있다. 실제 그림에서는 우승의 영광이 황금색 빛으로 손기정의 얼굴에 쏟아지지만 한 켠으로 어두운 명암이 드리워져 있어 나라를 잃은 슬픔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베를린 올림픽 50주년 되는 해인 1986년 서독올림픽위원회는 청동 투구를 손기정에게 되돌려 주었다. 이렇게 할아버지는 자신에게, 그리고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두 번째 금메달, 또 하나의 영광의 상징을 되찾았다고 기뻐했다. 올림픽 개최 예정국이 되면서 1980년대 중반 대한민국의 국격이 높아져 투구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할아버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청동 투구가 “나만의 것이 아닌 우리 민족의 것”이라며 독립기념관에 의탁했다. 1994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되어 모든 국민이 볼 수 있도록 전시되고 있다. ---「1984년 이후의 손기정」중에서 p.391~392

1987년 나는 상계동 주공아파트에서 할아버지와 둘이 살기 시작했다. 거실과 방은 각종 사진과 자료가 담긴 액자와 올림픽 관련 기념품 등으로 빼곡했다. 수집한 자료에 대한 할아버지의 애착이 워낙 크기도 했지만 서울 올림픽에 따른 해외 언론과의 인터뷰를 대비한 것이기도 했다. 서울 올림픽 개막까지 1년도 더 남은 어느 날, 할아버지는 나에게 이제부터 새벽에 같이 달리기를 하자고 하셨다. 자신이 올림픽 개막식의 성화 봉송 주자가 될 것을 예상하고, 전 세계인에게 당당한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한국인 손기정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1984년 이후의 손기정」중에서 p.392

2005년 손기정을 좋아하는 몇몇이 모여 손기정기념재단을 설립했다. 강형구 화백의 그림 22점을 기본자산으로 하고 손기정 선수의 유족은 유품을 기증했다. … 재단 설립 첫해부터 손기정평화마라톤대회를 매년 개최하고 있으며 손기정평화음악회를 통해 다양하게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알리고자 했다. 마라톤대회나 음악회 이름을 지으면서 ‘손기정’과 어울리는 단어를 떠올려보았다. 도전, 극복, 나라 사랑… 그러다 할아버지의 삶에서 가장 필요했던 게 무엇이었을지 생각했다. 그건 ‘평화’였다. 일제강점기가 아니었다면 손기정은 ‘슬픈 우승자’가 아니라 다른 올림픽 우승자와 같이 기쁜 모습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을 것이다. 또 남북이 전쟁하지 않고 분단되지 않았더라면 한반도 한민족의 영웅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1984년 이후의 손기정」중에서 p.405~406

추천평

아무리 숨이 가빠도 멈출 수 없었던 그의 마라톤처럼 우리에게 이런 멋진 선배 스포츠인이 있다는 사실에 벅차 책을 놓을 수 없었다.
- 이봉주 (국민마라토너)

세계에 한국을 알린 최초의 글로벌 스포츠 스타 손기정, 한국인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마라톤 영웅의 일대기다.
- 안정환 (전 국가대표 축구선수)

마라토너이자 스포츠인으로서 한국 스포츠계에 쏟은 그의 열정은 물론, 조국과 민족을 향한 그의 뜨거운 애정에 가슴이 떨려온다.
- 김연경 (배구선수)

이 책은 한 편의 영화다. 활자가 펼쳐내는 청년 손기정의 삶에 손이 떨리고 무언가 자꾸 가슴 속에서 울컥 치밀어 오른다. 나라 잃은 슬픔과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서 희망을 찾아 달려야 했던 청년 손기정, 그 가슴 떨리고 경이로운 이야기에 빠져 어느새 나는 그가 되어 있었다.
- 하정우 (영화배우)

영화 [보스턴 1947]을 촬영한 이후로 러닝은 내 취미다. 내가 달리고 싶을 때 달릴 수 있고 함께 달리고 싶은 사람, 달리고 싶은 장소도 내 맘대로 정할 수 있는, 이토록 자유로운 취미라니 축복이 따로 없다. 그러나 지금의 나와 달리 ‘달려야만 하는’ 누군가도 있었다. 고된 삶 속에서 자신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한 줄기 희망도 없던 시대에 자신과 민족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혼자 달리는 고독 속에서도 자유에 대한 염원을 지켜내기 위해. 손기정 선수의 얘기다. 지금 내가,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달린 마라토너, 손기정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 임시완 (영화배우)

인간의 몸이 갖는 한계 그 이상을 해내는 것은 마음과 정신의 영역이라 한 손기정의 말이 떠오른다. 그 말은 손기정의 마라톤 경기뿐 아니라 그의 삶 곳곳을 관통하고 있다. 잃어버린 자신의 이름과 조국을 되찾기 위해 한평생을 달려온 그의 투지가 경이롭다.
- 강제규 (영화감독)

우리는 손기정을 제대로 아는가? 일제강점기 일장기를 달고 올림픽에 출전해 마라톤 금메달을 딴 비운의 마라토너? [보스턴 1947]을 제작하며 미약하나마 선생님에 대해 알게 되었다. 가슴이 뭉클해지고 삶의 용기가 샘솟았다. 이 책은 손기정을 제대로 알기 위한 필독서이자, 그를 통해 당신의 일생을 깨울 최적의 안내서이다.
- 장원석 (영화제작자)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3497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since 2010):티스토리]

손기정 기념관 (2023 /1 /3) 

손기정 기념관은 나라를 잃은 어려운 시절 세계를 재패해 우리 민족의 긍지를 높여준 손기정 선수(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의 뜻을 기리고, 1918년 만리동에 건립된 손기정 선수(21회 졸업)의 모교인 양정의숙 건물을 리모델링 하여 손기정 탄생 100주년인 2012년 10월 14일에 개관하였습니다.

주소 / 관람시간 / 휴관일

서울시 중구 손기정로 101
동절기: 10:00~17:00
하절기: 10:00~18:00
*관람 종료 1시간 전까지 입장가능
1월 1일, 설날, 추석, 매주 월요일 (단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그 다음날), 기타 별도로 정하는 휴관일

손기정은 달리는 사람으로서 기원전 490년 전 마라톤 평야를 처음 내달려간 필리피데스의 벗이었고, 1936년 베를린에서는 한국인으로서 첫 세계인이었고, 그 날 이후 살아있는 동안 내내, 그뒤로 세계인들과. 무엇보다도 한국인들과 여전히 달리고 있다. 손기정은 어제 달렸지만 늘 오늘을 넘어 내일을 향해 달리고 있다. 근 과거로서 현재이고, 동시에 늘 가슴 뛰는 미래다. 필리피데스 조각상을 여기에 배치하는 이유이다. '첫번째 세계인, 전시관에서는 마라토너 인간 손기정을 만날 수 있다.

 

양정과 함께 이뤄간 꿈

19세 손기정은 집안 살림을 도우면서 달리글 하며 운동선수의 꿈을 키워나갔다. 이윽고 다양한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평안도 대표 선수로 뽑히긱도 하였다.

1931년 10월, 양정고보에 입학하기 몇개월 전,  서울에서 열린 조선신궁대회에 평안북도 대표로 출전하게 되면서 그는 마라톤이라는 종목을 접하게 된다. 5,000m가 가장 긴 경주라고 생각했던 손기정은 1932년 동아일보에서 주최하는 마라톤대회에 처음으로 출전하여 2위 성적을 거둔다. 이는 손기정 마라톤의 시작이었고, 이 대회를 기점으로 그는 장거리 경주에 필요한 실력을 길러나간다. 

 

베를린 올림픽을 향하여

"나능 좋은 기록을 위해 매일 정해진 10km 또는 20km 코스에서 실전과 다름 없는 강훈을 쌓았다. 또한 하루하루 달리는 시간을 단축 시킴으로써 강도를 높여 나가며 매 순간 베를린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었다.

 

50년 만에 손기정의 품으로 돌아온 고대 그리스 청동투구

청동 투구는 1936년 제11회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자에게 주는 부상품 이었지만 손기정은 당시에 투구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투구 반환의 노력은 1946년 양정고등학교의 후배가 손기정에게 투구 기사에 대해 이야기하며 시작 되었다. 조사 끝에  그리스 브라디니 신문사가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에게 소장품인 기원전 6세기의 청동 투구를 기증하겠다.'는 기사를 발견했다. 이후 '손기정이 청동 투구를 찾고 있다.'는 기사가 널리 전파되었고 이를 본 베를린 교민 노수웅씨가 1년 반 동안 찾은 결과, 베를린 샤로텐부르크(Chariotten - burg)박물관에서 투구를 발견했다. 손기정은 대한 체육회, 한국-그리스 친선협회 회장, 마이니치 신문 체육부장 등과 함께 반환을 강력히 요구 했다.

처음에 독일 올림픽위우너회는 규정을 내세워 반환하지 않다가 제24회 서울 올림픽 개최가 확정된 후 세계의 여론이 ' 투구는 손기정에게 넘겨주어야 한다.'로 뜻이 모이자 1986년 반환했다. 이듬해, 투구는 민족의 긍지를 높이고,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의 부상품이라는 가치를 높게 평가받아 서양 유물로는 최초로 보물 (제904호)로 지정되었다. 1994년. ' 이 투구는 나의 것이 아니라, 우리민족의 것" 이라는 손기정의 뜻에 따라 국가에 기증 되었다. 

레니 리펜슈탈과의 인연

1936년 제11회 베를린 올림픽의 개최를 준비한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1989~1945)는 올림픽을 기록영화로 남기고자 했다. 당시 유능한 영화제작자로 신임을 받던 독일 베를린 태생의 레니 리팬슈탈 ( Leni Riefenstahl,1902~2003)을 감독으로 내세워 촬영하였다. 베를린 올림픽을 담은 <올림피아>의  <민족의 제전> 부분에는 손기정의 마라톤 완주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손기정을 촬영하여 감명을 받은 레니는 노년에 이를 때 까지 손기정과 작품황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엽서를 보내는 등 친분을 유지했다. 스포츠 기록영화로서 <민족의 제전>은 표현력, 기술, 예술성 등 다양한 부분에서 세계의 주목을 모았다.

 

세계인 손기정

손기정은 기록자였다. 마라톤 기록을 세운 기록자일 뿐 아니라, 자기 삶 또한 마라톤 기록처럼 꼼꼼하게 남겼다. 나라 안팎에서 숱한 사람들이 보낸 편지, 메모지, 우표 한까지 차곡차곡 수집하고 정리를 해왔다. 그의 삶은 마라톤을 떠나서 말할 수 없지만 기록, 수집자로서 면모도 충분히 평가 받을 만하다. 손기정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서 성장하였고, 해방공간에서 우리 사회 갈등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생생한 증인이자. 이후에도 현대사의 중요한 국면들과 함께 해왔다. 그의 인생자체가 긴 마라톤이자 시대상을 대표할 수 있는 궤적을 남기고 있다. 그 장구한 노정에서 손기정은 한번도 중심을 흐트리지 않았다. '세계인 손기정'은 손기정의 기록을 통해 '과거에서 현재'를, '현재에서 후대'를 잇는 공간이자 거점이다

 

기사와 편지를 직접 모으다

손기정은 양정고등보통학교 학생 시절인 30년대부터 본인 또는 한국 체육과 관련된 기사, 사진, 편지 엽서 등 다양한 자료들을 스크랩하였다. 신문스크랩북 43권, 서한 스크랩북은 29권이며 부착되어 있는 기사와 서한의 총 량은 3,398점에 이른다. 신문 기사는 기사를 오려 자신만의 방법으로 배치하여 부착하였으며, 편지, 연하장 등의 서한은 발송인의 이름을 적어 보관하였다.

 

일장기 말소사건

손기정의 금메달은 세계적인 사건이었다. 국내외 신문사들은 앞다퉈 손기정의 승리에 대해 특집기사와 호외를 쏟아냈다. 동아일보의 사회부 체육주임 이길용 기자는 동아일보의 12면중 5~6면을 손기정, 남승룡에 대한 특보 기사로 채웠다. 조선의 체육과 손기정, 남승룡의 베를린올림픽출전에 대해서 남다른 애정을 보이던 기자였다. 1936년 8월 24일 오사카 아사히 스포츠지를 구독하던 이길용 기자는 기사에 실린 손기정의 시상식 사진과 선명한 일장기를 발견하게 된다. 이길용기자는 사회부 현진건 기자에게 "손기정 선수의 가슴 쪽을 엷게, 잘 보이지 않게 보도하는 편이 좋겠다."고 하며 일장기 말소를 계획하였다. 손기정 가슴의 일장기를 지워 일본의 승리가 아닌 인간 손기정 그리고 한국인의 승리로 기억 되고자 하였다. 동아일보 사진과장 신낙균, 화백 이상범 등과 의논하여 동판 사진중 일장기 부분을 청산가리액으로 말소 한 뒤 8월25일 동아일보 석간에 게재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일장기 말소에 대한 책임을 물어 관련인 8명을 약 40일간 고문하였으며, 8월27일 동아일보는 무기 정간처분을 받았다

여의도 비행장 귀국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 후 조국으로 돌아온 손기정은 경비행기를 타고 여의도 비행장에 내렸다. 1936년 10월17일이었다. 일본경찰의 삼엄한 감시 속에 양정고보의 안종원 교장, 서봉훈교감, 조선일보의 고봉오기자 그리고 그의 형 손기만이 마중 나와 있었다. 일본 경찰은 환영행사를 일절 금지하고 손기정이 비행기에서 내리자 마자 연행하여 남산에 있던 조선 신궁으로 데려갔다. 

"손기정의 베를린에서의 행적은 슬픈결과를 초래했다. 그가 한국인임을 세계가 알게되고, 자신들이 정복한 나라가 영광을 얻는 것을 원치 않던 일본인 군인 총독은 귀국한 그를 심하게 응징했다. 하지만 이를 통해 그가 한국이라는 것을 다시한번 알려지게 되었다.

지도자 손기정

손기정은 자신의 경험과 능력을 전달할 수 있는 지도자였다. 자신의 시대와 역사의 고난을 뚫고 세계의 중심에 우둑 선 것 처럼 후배들을 이끌어 세상의 중심에 서게 했다. 손기정은 민족에게서 받은 사랑을 고스란히 물려주고 배풀고자 하였다.

손기정의 도전과 승리

손기정이 1936년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2시간 29분 19초 2라는 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하며 수여받은 메달, 상장, 월계관이다. 손기정의 삶과 우리나라의 올림픽 역사연구에 매우 소중한 자료로서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우승 유물을 통해 손기정의 도전에 대한 강인한 정신력과 승리가 선사한 자긍심을 느껴볼 수 있다.

 

오오, 조선의 남아요!  

베를인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남승룡 양군에게   (심훈 1901-1936)

승리의 월계관

손기정은 그 날 승리하였다. 그는, 우리 겨럐 모두와 함께 우승하였고, 도든 약자들과 함께 우승하였고, 모든  식민지인들과 우승하였고, 모든 이름 없는 자들에게 월계관에게 쓰어주었다. 다시 쓰는 그 월계관 이름은 < 2시간 29분 19초 2>다.

손기정의 우승이 깃든  양정고등보통학교 

손기정은 달리기에 재능을 보이며 전국 최고 육상 명문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여 달리기 기술과 전문성을 키우고 싶어 했습니다. 1932년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후, 단거리부터 장거리까지 다양한 경기에서 우승하여 양정의 이름을 알렸습니다. 양정고등 보통학교 5학년이던 1936년, 제11회 베를린올림픽 마라톤경기에 출전하여 세계제패를 이루며 역사적인 우승을 합니다. 이듬해인 1937년 봄, 손기정은 제21회 졸업생으로 양정의 문을 나섰지만 졸업 후에도 학교를 방문하여 후배들과 함께 달렸습니다.

손기정 (孫基禎)

손기정은 1912년 8월29일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출생했으며 1932년 양정 고등 보통학교에 진학하면서 마라톤에 입문했다. 이후1935년 11월3일 2시간 26분 32초로 세계공인신기록을 수립하고 1936년 5월21일 최종 선발전을 거쳐 베를린올림픽에 출전하여 2시간 29분 19초 2라는 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했다. 하지만 손기정은 당시 한국이 일제강점기 하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 국적으로 참가할 수 밖에 없었다. 1945년 8월15일 대한민국이 해방 된 후, 손기정은 후진 양성과 대한체육회 부회장, 대한육상경기연맹 회장, 대한올림픽위원회 상임위원 등을 역임하며 대한민국 체육계를 위해 공헌했고 2002년 11월15일 타계했다.

1936년 제 11회 베를린올림픽의 마라톤 우승자는 한국인 손기정이었다. 그러나 시상식에서 호명된 그의 이름은 " 야판 키타이 손!" 이었다. 시상대에 선 손기정의 감슴에는 일장기가 세겨저 있었고, 스타디움에는 일본 국가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조선인으로 태어나 일본 국적의 마라토너로서 42.195km를 달려야 했던 비운의 러너, 슬픈 우승자가 바로 손기정이다. 베를린올림픽 이루 손기정의 삶은 또 다른 마라톤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이 마라톤은 새로운 기록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인 한국인 손기정을 희복하는 여정이었다. 그러나 이 마라톤은 새로운 기록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인 '한국인 손기정'을 희복하는 여정이었다 이 여정은 애국가가 울려 퍼자는 시상대에 태극기를 가슴에 새기고 서있는 ' 하눅의 마라토너 손기정'을 되찾는 레이스였다. 이곳에 설치된 손기정의 동상은 이 길고 긴 마라톤의 완주를 상징하는 것이다. 진정한 체육인으로서 손기정은 민족간의 갈등을 넘어서 평화와 공존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한국의 마라토너로 영원히 기억 될 것이다.

손기정을 위한 선물

스물 네 살, 청년 손기정은 베를린에서 한국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제국주의하에서 공식적일 수 없었다. 손기정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최후까지 분투하겠다는 마음으로 전력질주 하였고, 올림픽 마라톤 2시간30분대 기록을 깬 첫 번째 선수였다. 손기정의 우승은 단순한 마라톤 우승이 아닌 인조. 국가, 인체의 한계와 차별을 뛰어넘은 승리였다. 그에게 온전한 조국이 있었다면 분명 기쁜 우승자이자 당당한 우승자로 고개를 든 채 청동 투구를 들고 우리나라에 돌아왔을 것이다. 이 동상은 세계를 무대로 승리하여 절망 속에서 살아가던 한국인 들에게 자긍심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해준 손기정에게 주는 선물이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와 자라나는 미래 세대에게 국가의 소중함과 나라 사랑 정신을 새겨볼 수 있도록 손기정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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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4058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since 2010):티스토리]

책소개

한 권으로 보는 한국육상경기 100년의 생생한 기록

한국 육상 경기의 100년 역사를 되짚어본 연감. 기록상 이 땅에서 근대적 의미의 한국 육상경기대회가 개최된 시기는 1910년이다. 이를 전후한 시기를 한국 육상경기의 태동기로 보고 대략 100년간의 한국 육상경기의 발자취와 성과를 조명했다. 이를 통해 88년 서울올림픽대회, 2002년 부산아시아경기대회, 2011년 대구세계육상경기선수권대회 등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며 세계적인 스포츠 강국으로 부상한 한국스포츠계에 발전적이고 희망적인 미래의 비전을 제시한다.

목차

■ 발간사 오동진·대한육상경기연맹 회장
■ 축사 라민 디악·국제육상경기연맹 회장
슈레시 칼마디·아시아육상경기연맹 회장
■ 서문 스포츠의 꽃 육상경기·김화성 동아일보 스포츠 전문기자

1부 사진으로 보는 한국 육상경기 100년

2부 한국 육상경기 100년의 역사

1장 운동회로 싹 틔운 한국 육상경기

1. 근대 올림픽대회와 조선의 운동회
2. 근대 육상경기의 시작, 운동회 전성시대
3. 한일 강제병합과 근대 체육의 암흑기

2장 조선체육회 출범과 육상경기대회의 확립
1. 조선체육회 닻을 올리다
2. 전국 규모의 육상경기대회 열리다
3. 극동올림픽대회와 첫 해외 원정
4. 현대식 운동장과 조선신기록 작성의 시대
5. 우리 힘으로 개최한 육상경기대회
6. 지역 체육단체의 활성화
7. 여성 육상경기대회 참가하다

3장 국제 무대에 진출하다
1. 역전경주대회와 육상경기 명문의 탄생
2. 떠오르는 마라톤 강국
3. 국제 무대에 진출하다

4장 한국 마라톤, 세계를 제패하다
1. 마라톤의 신기원을 연 손기정
2. 준비된 마라토너 손기정
3. 한국 육상경기의 좌절과 공백기

5장 한국 육상경기의 숨겨진 영웅들
1. 의지의 사나이 권태하
2. 영원한 2인자 남승룡
3. 만능 투척 왕 유약한
4. 장거리의 왕자 유장춘
5. 전설의 점퍼 김원권

6장 광복의 감격과 한국 육상경기의 부활
1. 자유해방 경축 전국종합경기대회
2. 광복 후 첫 올림픽대회 준비
3. 한국 마라톤 전성시대
4. 광복 후 서윤복 첫 국제대회 우승

7장 한국 육상경기와 올림픽대회
1. 태극기 앞세운 첫 올림픽대회
2. 올림픽대회 첫 참가
3. 한국전쟁의 포연 속에서도 달리다
4. 아시아의 스포츠 강국으로 부상
5. 1950년대 스타 최윤칠과 이창훈

8장 스포츠 내셔널리즘 시대
1. 올림픽대회 메달 획득 실패
2. 한국 육상경기의 중흥과 기록 향상
3. 스포츠의 과학화와 시설 투자
4. 체력은 국력이다
5. 아시아경기대회 개최권 반납

9장 스포츠 열풍과 올림픽대회
1. 서울 올림픽대회 유치 막전막후
2. 서울에서 열린 국제육상경기대회
3. 최고의 성과 거둔 서울 아시아경기대회
4. 서울 올림픽대회를 향하여

10장 한국 마라톤 제2의 전성기
1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와 뜨는 별, 지는 별
2 한국 마라톤 10분 벽을 깨다
3 56년 한 푼 마라톤 금메달
4 아시아 무적이 된 한국 마라톤
5 더 빨리 더 높이 신예들의 등장

11장 올림픽대회 마라톤 2연패의 꿈
1.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의 등장
2. 한국 마라톤 2시간 7분대 진입
3. 스타 제조기 정봉수 감독
4. 기록의 산실 동아마라톤대회
5. 마라톤 중흥을 이끈 대회들
조선일보 마라톤, 한국일보 부산∼서울 대역전경주대회, 중앙서울마라톤,
경향신문 전국통일역전경주대회

12장 한국 육상경기 새로운 도약을 향하여
1. 육상경기 꿈나무 발굴
2. 아시아경기대회 마라톤 4연패
3. 점점 높아지는 세계의 벽
4. 2011년 대구 세계육상경기선수권대회 유치 성공
5. 대구 국제육상경기대회 열리다
6. 31년을 기다린 100m 한국신기록
7. 대구 세계육상경기선수권대회 열리다
8. 대구 세계육상경기선수권대회 성과와 과제
9. 대한육상경기연맹 22대 집행부가 걸어온 길
10. 한국 육상경기 중흥의 날개 펴다

3부 한국 육상경기 100년의 산 증인

서윤복 1947년 보스턴마라톤대회 1위
함기용 1950년 보스턴마라톤대회 1위
최윤칠 1954년 마닐라 아시아경기대회 1500m 1위
최충식 1954년 마닐라 아시아경기대회 1만m 1위
임종우 1957년 보스턴마라톤대회 3위
한승철 1958년 도쿄 아시아경기대회 5000m 2위
주형결 1964년 도쿄 올림픽대회 마라톤 참가
양재성 육상경기 최초 방송 해설자
홍상표 아시아경기대회 장대높이뛰기 2회 연속 3위
백옥자 아시아경기대회 포환던지기 2회 연속 1위
황규훈 전국선수권대회 1500m 1위
서말구 1979년 남자 100m 한국기록 보유
김양곤 1982년 뉴델리 아시아경기대회 마라톤 1위
김복주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대회 800m 1위
김종윤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대회 5000m 1위
장재근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대회 200m 1위
김재룡 1994년 보스턴마라톤대회 2위
김봉유 1990년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 800m 1위
백승도 1998년 후쿠오카 아시아육상경기선수권대회 1만m 1위
임춘애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대회 중·장거리 3관왕
황영조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대회 마라톤 1위
이봉주 2001년 보스턴마라톤대회 1위
이진택 아시아경기대회 남자 높이뛰기 2회 연속 1위
이진일 아시아경기대회 800m 2회 연속 1위
이영선 아시아경기대회 창던지기 2회 연속 1위
박재명 2006년 도하 아시아경기대회 창던지기 1위

4부 육상경기 연보(국내·국제)

출판사 리뷰

한 권으로 보는 한국육상경기 100년의 생생한 기록
“한국육상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다”

한국 육상경기 100년의 발자취와 성과를 최초로 조명!


기록상 이 땅에서 최초의 운동회가 열린 1895년 이후 근대적 의미의 한국육상경기대회가 개최된 시기는 1910년. 이 책은 그 전후한 시기를 한국 육상경기의 태동기로 보고 대략 100년의 역사를 짚어보고자 했습니다.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와 함께 한 한국육상경기의 발자취와 성과를 처음으로 한데 모아 조명한 이 책은 88년 서울올림픽대회, 2002년 부산아시아경기대회, 2011년 대구세계육상경기선수권대회 등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며 세계적인 스포츠 강국으로 부상한 한국스포츠계에 발전적이고 희망적인 미래 지표를 제시하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3710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since 2010):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