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인간과 건강 (독서>책소개)/2.백세시대

나는 평온하게 죽고 싶습니다 (2024) - 호스피스 의사와 의료인류학자의 말기 돌봄과 죽음의 현실에 관한 깊은 대화

동방박사님 2024. 11. 29. 0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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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왜 우리의 죽음은 갈수록 궁색해져가는가
호스피스에서 발견한 ‘평온한 죽음’의 방식

EBS 다큐프라임 ‘내 마지막 집은 어디인가’ 자문 및 출연
최진영 소설가, 장일호 기자 강력 추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생애 끝자락은 안정과 편안함보다는 불안, 심지어 공포를 자아내기까지 한다. 

많은 사람들은 무의미한 연명의료와 급진적인 안락사 사이에서 길을 잃고 비틀거리기 일쑤이다. 

의료인류학자 송병기와 호스피스 의사 김호성, 두 젊은 지성은 이 책에서 이러한 어지러운 현실을 차분한 시선으로 응시한다. 

책의 중심에 호스피스를 놓고, 한국 사회가 직면한 말기 돌봄과 죽음의 현실을 다각도로 짚어나간다.

여섯 개의 키워드(공간, 음식, 말기 진단, 증상, 돌봄, 애도)를 선정하여 2년여에 걸쳐 여러 차례 대담을 나누었으며, 녹취록을 바탕으로 새로운 글과 다수의 자료들을 치밀하게 보완했다. 

생생한 현장 경험과 에피소드는 물론, 제도 분석, 비교문화적 관점, 역사적 검토, 인류학적 탐구 등 입체적 시선으로 호스피스와 죽음이라는 주제를 가로지른다. 

호스피스의 실천들을 풍부한 맥락 아래 제시하며, 치료 중심의 패러다임을 넘어선 죽음의 대안을 모색한다.

목차
머리말

제1부 다시 삶의 세계에서

1장 공간
호스피스 속으로
삶과 죽음이 부드럽게 연결된
1인실이 항상 좋기만 할까
병원에서 결혼식을 열다
사진, 카페, 그리고 삶
정원으로 소풍 가는 환자들
호스피스에는 벽시계가 없다
계속되는 삶의 이야기
다채로운 공간이 늘어나기를
호스피스라는 다른 삶의 방식

2장 음식
어디까지 먹을 수 있는가
음식의 기억, 기억의 음식
잘 먹어야 낫는다는 오해
왜 수액과 영양제에 집착하는가
콧줄의 딜레마
선의는 때로 신중함을 요한다
못 먹는 자를 위한 환대

제2부 고통을 통하여

3장 말기 진단
선 긋기의 어려움
유랑하는 비암성 환자들
의료기술 진보의 역설
말기에 대한 법의 몽상
법 조항 너머의 현실을 보라
누가 감히 말기를 고지하는가
환자도 일상을 사는 존재

4장 증상
아픔이란 무엇인가
최우선의 일, 통증 완화
마약성 진통제를 쓴다는 것
몰려오는 의미의 폭풍
건강한 거리 두기
돌봄에도 다 계획이 있다
섬망에 관하여
완화적 진정과 윤리
고통을 보는 세 관점
고통에서 연대로

제3부 죽음을 다시 만들기

5장 돌봄
돌봄이 없는 일상은 없다
목욕, 돌봄의 정점
사람으로 대우하다
환자의 편안한 기분을 위하여
감각과 마음의 공간을 넓히다
호스피스 간호사의 일
그렇게 돌봄은 작아져간다
돈은 없고 돌만 가득한 외딴섬
나이 듦이 민폐가 되는 나라
무엇이 돌봄을 가능하게 하는가

6장 애도
어떤 삶의 마지막 풍경
환자의 몸을 따라간다는 것
돌보는 사람을 돌보는
왜 호스피스행은 그토록 어려울까
죽음 이후에 일어나는 일들
무엇이 진정 좋은 죽음인가
삶과 죽음을 잇는 돌봄의 순환
호스피스, 죽음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

저자 소개 
저 : 송병기
의료의료인류학자. 파리대학교병원(AP-HP) 의료윤리센터와 서울대학교병원 의생명연구원에서 생애 말기 돌봄을 연구했다. 

프랑스와 모로코의 노인요양원, 일본의 노인요양원·호스피스, 한국의 대학병원·호스피스·노인요양원·노인요양병원에서 현장 연구를 수행했다. 

우리의 일상과 공동체를 ‘죽음’이라는 렌즈로 들여다본 《각자도사 사회》를 집필했으며, 동료들과 함께 《죽는 게 참 어렵습니다》를 썼다. 또한 죽음을 앞둔 이들에게 ...

저 : 김호성 
호스피스 의사. 2007년 한양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삼성서울병원에서 2015년에 핵의학 전문의를 취득했다. 그 후 샘물 호스피스, 보바스 기념병원, 연세 메디람 호스피스 완화의료 센터에서 근무했다. 

현재 용인에 있는 동백 성루카병원의 진료 과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매일 말기 돌봄 현실에서 마주하는 고민들을 시민들과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이 책을 집필하게 되었다. 《죽는 게 참 어렵습니다》 《한편 ...

책 속으로
[송병기] 입구에 도착했는데 예상치 못한 장면과 마주쳤습니다. 사람들이 신발을 벗더군요. 

기분이 묘했습니다. 위생 때문에 신발을 벗나 싶다가도, 누군가의 집에 들어가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널찍한 현관에 놓여 있는 다양한 형태의 신발을 보면서 어떤 사람들이 여기 있을까 궁금증도 생겼습니다. 

저도 신발을 벗는데, 웬걸, 마음이 조금 편해지더군요.
--- p.35

[김호성] 기본적으로 1인실이 쾌적하고 편안합니다. 다만 모든 환자들에게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심지어 1인실로 갔다가 다시 2인실로 옮기기도 합니다. 

그곳만의 특수성이 있거든요. 가령 2인실에서 한 환자는 거동이 여의치 않으나 다른 환자는 나쁘지 않은 체력일 수 있는데, 그러면 상태가 괜찮은 환자가 옆의 환자를 챙겨줍니다. 

“간호사님, 이 환자가 아파요. 와서 좀 봐주세요” 하는 식으로요.
--- p.43

[송병기] 여기 병실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큰 창문입니다. 햇빛이 잘 들고, 풍경은 잡힐 듯 빤히 눈에 들어옵니다. 

호스피스 앞에 있는 작은 산도 보이고, 그 옆으로 도로와 아파트도 보입니다. 

1층 정원에서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는 모습도 보이고요. (중략) 즉, 호스피스 공간은 집과 일상으로 대표되는 환자의 관계망과 연결되고자 한다는 겁니다. 

삶과 죽음이 부드럽게 연결된 공간으로서 말이죠. 환자는 병실에 있지만 관계가 단절된 존재가 아닙니다.
--- p.44~45

[김호성] 프로그램실은 다학제팀의 회의 공간이자 환자들이 음악·미술 치료 등의 다양한 요법을 받고, 더불어 이벤트가 일어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이벤트란 일상을 사는 우리에겐 ‘특별한 일’이란 의미지만, 호스피스에 입원한 환자에겐 ‘이전 일상의 회복’을 뜻합니다. 이를테면 환자나 보호자의 생일 축하 같은 것들이 그렇죠. 

언젠가 한번은 작은 결혼식을 연 적도 있습니다. 

침상에 누워 있는 어머니 앞에 딸과 아버지가 각기 드레스와 턱시도를 차려입고 신랑이 입장했죠. 

하객들도 오고 간호사들도 다 모여서 박수를 쳤어요. 감동적인 장면이었지요.
--- p.47

[송병기] 저는 파리에서 퇴행성 신경질환을 겪고 있는 노인들이 모여 있는 요양원에서 현장연구를 했습니다. (중략) 

이들에게 하루의 시작은 어떤 옷을 입는 것, 어떤 속도로 움직이는 것, 어떤 장소에 가는 것, 어떤 소리를 듣는 것, 어떤 이와 만나는 것, 즉 총체적 감각에 달려 있었습니다. 

이들이 기억을 잘 못한다고,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고, 배회한다고,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그 삶의 가치가 없어지는 걸까요? 이들을 제정신이냐 아니냐로 판단하는 게 맞을까요? 

오히려 이들은 다른 감각으로 자기 삶을 살아간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 p.64~65

[김호성] 물론 병원에서는 술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중독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환자에게 여러 약물들이 투입되기 때문에 간 기능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니까요. (중략) 

하지만 그 환자는 다른 장기가 아닌 뇌에 암이 있는 환자였고 간 기능도 괜찮았습니다. 또 술을 먹는다 해도 소량만 마실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허락을 했습니다. 삶이 얼마 남지 않은 환자한테 의미가 있고 명백한 해가 되지 않으면 소량의 술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p.82~83

[송병기] 음식은 삶의 서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비오는 날 파전에 막걸리가 ‘당긴다’고 말하는 건 우연이 아니죠. 

그 경험을 해서 좋았거나, 그 경험이 좋았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나, 그 경험이 좋을 것 같다고 느껴야 가능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먹기에 관한 경험, 기억, 지식이 ‘머리’가 아니라 ‘몸’에 각인된다고 여깁니다. (중략) 음식은 삶의 연속성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일과 맞닿아 있습니다.
--- p.87~88

[김호성] 환자나 보호자들에게는 암이 눈에 안 보이기 때문에, 기력이 떨어진 원인을 음식으로 돌리게 됩니다. 

그분들이 보기에는 먹는 양이 줄어든 것이 체력 저하의 가장 큰 이유인 거죠. 

그래서 환자의 능력보다 더 먹거나, 더 먹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폐렴이 생기거나 복통이 유발되죠. 그래서 의료진이 면담을 하면서 반드시 강조를 합니다. 호스피스에서는 기력 회복이 아니라 삶의 질을 위해 음식을 먹는다고.
--- p.93

[송병기] 며느리가 의료인이고 간병을 담당하더라도 환자의 인공 영양 공급에 대해 솔직한 의견을 내기는 어려웠습니다. 괜히 그 이야기 꺼냈다가 “시부모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냐”는 도덕적 비난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 사정을 아는 의료진은 ‘중요한 의료 결정’을 할 때 ‘아들’을 찾았습니다. 

호스피스 내 의료 결정이 가족 문제, 젠더 문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 p.114

[김호성] 스콧 니어링이나 선승 같은 사람들이 자발적 단식을 통해 편안하게 삶을 마무리했다는 이야기가 ‘이상적’인 사례로 회자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문헌을 찾아보면 단식의 과정도 순탄치만은 않습니다. 

환자의 갈증, 섬망 같은 육체적 고통이 만만치 않고, 더불어 그것을 바라보는 의료진의 윤리적 죄책감도 많이 유발된다는 보고들이 있거든요. 

더구나 한국의 경우 연명의료를 거부하더라도, 기본적인 수분과 영양 공급은 해야 하는 것으로 연명의료결정법에 규정되어 있습니다.
--- p.119

[송병기] 환자는 가족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시설에 간다고 말하고, 가족은 환자의 안전을 위해 여러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다고 하고, 의료진은 위급한 상황을 예방하고 대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마치 각개격파를 하듯이, 각자 맡은 바 그때그때 책임을 다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바로 그 ‘윤리성’ 속에서 환자를 취약한 존재이자 탈역사적 존재로 만드는 기존의 구조는 공고히 유지됩니다. 

가족, 돌봄 제공자, 의료진도 취약한 조건 아래 어떤 방식으로든 돌봄을 지속하며 지쳐갑니다. 우리는 왜 이런 방식으로 돌봄을 경험할 수밖에 없을까요?
--- p.132

[송병기] 호스피스에 들어가지 못한 말기 환자들의 경우는 임종기에 진입했다는 의사 2인 이상의 판정이 있어야만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앞서 살펴봤듯이 말기와 임종기라는 구분이 임상적으로 매우 어렵다는 점입니다. 

연명의료결정법은 임종기를 ‘사망에 임박한 상태’라고 명시하고 있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얼마나 죽음에 임박하였는가’를 규정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사망하기 1분 전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1시간 전이나 24시간 전이라고 해야 할까요? 

1년 전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무엇보다 생의 끝자락을 이렇게 수량적으로 파악하는 게 타당한지 의문이 듭니다.
--- p.148

[김호성] 외국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든 법입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말기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관련되어서는 현장 의료진의 판단과 환자와의 관계성에 맡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국은 법적인 여러 사건을 거치면서 의사와 환자의 자율적 상호 관계보다는, 까다롭고 번거로운 ‘법’을 만들어 제한적으로 승인하고 있는 것이죠. 

이러한 법이 만들어지게 된 역사적 맥락도 있고, 그것이 ‘저신뢰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합니다.
--- p.153

[송병기] 다양한 형태의 삶의 방식이 존재하고, 가족의 형태도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이제 4인가구가 아니라 1인가구가 ‘정상가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대입니다.

 외동도 많고, 사별하고 홀로 지내는 분들도 많죠. 또 비혼 1인가구, 동성 커플, 동거 관계 등의 형태로 지내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 평소 환자와 깊은 관계였다고 해도, 그를 대리해 연명의료결정에 참여하긴 어렵습니다.
--- p.158

[김호성] 당연히 의사는 환자의 육체적 어려움을 줄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인생의 관점에서 보면, 의사가 제일 중요한지 저는 잘 모르겠거든요. (중략)

급성기가 아닌, 만성기 질환이나 말기 환자에게는 의사의 역할이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습니다.

이 경우에는 의학적 치료보다 돌봄의 질이 상대적으로 더 중요합니다.

‘여든이 넘으면 수술을 해야 될까’, ‘아흔에 암 검진을 꼭 해야 할까’ 같은 질문이 필요합니다.
--- p.176

[송병기] 아픔을 질병으로 요약할 수 없습니다.

 환자가 몸으로 경험하는 ‘앓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간병사와 요양보호사가 겪는 근골격계 질환을 생의학적 체계로만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앓음은 환자 및 보호자와의 관계, 혹독한 노동 조건, 돌봄에 대한 사회적 인식, 건강보험 및 노인장기요양보험 체계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

 요컨대 ‘아픔’에는 생물학적 질서와 사회적 질서가 교차합니다.
--- p.183

[김호성] 의료진은 이 통증을 빨리 조절해줘야 합니다. 그래야 호스피스의 다음 일이 시작될 수 있거든요.

 통증 조절이 안 되면 환자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 “하루라도 빨리 죽고 싶다”라고 말합니다. 

우선 환자의 통증이 조절되지 않으면, 호스피스 다학제팀의 접근조차 어렵습니다. 

환자의 심리적 어려움, 삶의 실존적 의미, 가족 간의 관계 등이 모두 통증 앞에서는 부차적인 이야기가 되죠. 그래서 통증 조절은 다학제팀의 역할을 시작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전제입니다.
--- p.184

[송병기] 저는 환자가 아픈 이유가 질병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환자와 의료진의 ‘급한’ 만남, 환자의 몸에 ‘쉽게’ 손을 대는 행동, 환자의 이야기가 ‘초라하게’ 취급되는 상황 등도 환자를 아프게 하는 요소가 아닐까요? 돌봄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환자와 의료진이 이야기할 시간, 서로에 대해 알 수 있는 시간 말입니다.
--- p.196~197

[김호성] 대개 통증이 줄어들면 그간 숨겨져 있던 예전 삶의 고통이 등장하며, 곧 ‘의미’의 폭풍을 맞게 됩니다. 

이제 삶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남은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야 한다는 명제가 갑자기 대두되는 거죠. 

하지만 문제는 많은 분들이 그런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될지 잘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 의미 있게 남은 시간을 보내야지. 그런데 내가 뭘 해야 돼?”
--- p.201

[송병기] 오랫동안 ‘건강해야 한다’는 당위에 따라 살아왔다면 호스피스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울 것 같아요. 

그런 측면에서 호스피스는 일종의 어학원이란 생각이 듭니다. 

다학제팀은 환자와 보호자의 언어를 연구하고, 환자와 보호자는 또 다른 삶의 언어를 익히고요. 

무엇보다 환자, 보호자, 다학제팀 서로 대화를 ‘연습’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p.201~202

[김호성] 현장에서 보다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환자의 피할 길 없는 필연적인 고통을 최대한 완화시키고 그 과정에서 우연과 찰나가 빚어내는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간병인과 건조한 대화 토막을 주고받다가 우연히 나누게 된 즐거운 옛날이야기, 아무도 병원으로 찾아오지 않는 쓸쓸한 삶이지만 순간 그 사실을 잊게 하는 찰나의 그윽한 커피향 같은 것들 말입니다.
--- p.206

[송병기] 환자, 보호자, 다학제팀 간에 적정한 소통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완화적 진정은 ‘느린 안락사’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앞서 언급했듯이, 안락사와 완화적 진정의 목적은 분명히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화적 진정이 설령 환자의 죽음을 앞당기지는 않더라도, 환자를 마치 죽은 사람처럼 보이게 할 수는 있으니까요. 

이런 맥락에서 환자, 보호자, 의료진의 불안과 고민을 짐작하게 됩니다.
--- p.228

[김호성] 오랫동안 힘들게 투병한 환자들의 얼굴이 목욕 후 깨끗하게 변하고, 머리카락도 기름기가 없어져 산뜻해집니다. 회진할 때 보면 환자가 보송보송하죠. 어떤 환자는 약간 노곤해져서 잠들어 있기도 하고요. 

환자들이 호스피스에서 환대받는다는 느낌은 아마 목욕을 하고 나서 가장 많이 받을 겁니다. 

봉사자들은 그러한 환자들의 모습을 보며 기뻐하죠. 

우리는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삶의 의미와 희열을 느끼는 존재이기도 하니까요.
--- p.258~259

[송병기] 최근 어느 대학병원의 진료실 복도를 지나가다가 우연히 본 장면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한 의사가 진료실 문을 활짝 열어놓고 환자를 진료하더군요. 

그런데 환자가 진료실에 들어가자마자 의사가 야단을 치듯 말을 하는 겁니다. 피검사 결과가 안 좋다, 

살을 빼야 한다,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등등 말입니다. 중년으로 보이는 환자는 마치 죄 지은 사람처럼 가만히 있었습니다. 의사의 말은 의학적으로 옳았을 겁니다. 

의사는 환자를 위해 애정 어린 충고를 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는 진료실 문을 열어놓은 상태에서 그런 이야기를 해야만 했을까요? 

게다가 의사는 환자와 그런 종류의 말을 통해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을까요? 많은 의문이 들었습니다.
--- p.269

[김호성]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죠. 한 환자가 “삶에 의미를 못 느끼겠어요. 빨리 죽고 싶습니다”라고 했을 때, 과연 누가 “당신 삶의 의미는 이것입니다”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의 인생이잖아요.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을 찾아서 약간 도움을 줄 수는 있겠지만, 결국 환자 본인이 생각하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학제팀은 환자 곁에 있는 사람들이죠. ‘어디까지 도와줄 것인가’, 혹은 환자 입장에서 말하자면 ‘어디까지 의존해야 할 것인가’, 그 경계가 항상 고민스럽습니다. 저희의 한계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영적인 것은 신부님과 수녀님에게 의지하고 도움을 구하게 됩니다.
--- p.282~283

[송병기] 주목할 점은 병원의 이윤극대화 추구와 환자의 첨단기술 선호가 맞물린다는 겁니다. 

대중매체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듯이 환자들에게 인기 있는 병원은 진단과 치료를 잘하는 ‘명의’와 최첨단 의료장비를 갖춘 곳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호스피스가 환자들에게 인기가 없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돌봄은 의료의 변두리를 맴돌고 있습니다. 상품성이 떨어지는 일, 효과를 측정하기 어려운 일, 부차적인 일, 개인이 알아서 하는 일로 치부됩니다.
--- p.296

[김호성] 얼마 전 〈플랜 75〉라는 일본 영화를 봤습니다. 노인들이 75세를 넘어 죽음을 약속하면 국가에서 돈을 지급하며, 안락사와 화장까지 시켜준다는 줄거리입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한국의 말기 돌봄 현실이 생각나서 마음이 복잡했죠. 

더불어 제가 놀랐던 것은 영화의 감독이 각본을 쓰면서 일본 노인 열다섯 명을 만나 인터뷰하면서 들었던 이야기였습니다. 

예상 외로 많은 노인들이 “그런 제도가 있었으면 좋겠다”, “실제로 있으면 안심이 될 것 같다”고 답해서 감독이 놀랐다고 합니다. 늙는다는 것은 비참한 일이며, 가족에게, 사회에 폐를 끼치는 것이라고 노인들은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 p.306~307

[송병기] 죽음에 대한 의학지식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고, 사람들은 각종 매체를 통해서 어렵지 않게 그 지식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죽음에 대한 지식의 양과 접근성이 아니라 그 내용과 형태입니다. 

오늘날 죽음에 대한 담론은 죽음에 대항하는 담론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죽음을 ‘앞당기는’ 생활방식, 증상, 질환 등에 대한 의학적 지식은 죽음을 ‘지연시키는’ 데 활용됩니다. 

그러한 앎의 방식이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다만 그 특정한 앎의 방식이 역설적으로 죽음에 대한 이해의 폭을 좁힐 수 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 p.321

[김호성] 호스피스 전원 시점은 환자 삶의 질에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여러 번 언급했지만, 말기 암 환자의 체력 저하는 거의 대부분 급격하게 일어납니다. 

그래서 환자가 불안정기 후반이나 임종기에 전원을 하게 되면 호스피스에서 삶의 질 향상을 거의 느낄 수 없게 됩니다. 그저 초점이 보호자 돌봄에 집중될 뿐이죠.

 가끔 상급병원에서 환자를 너무 늦게 보내는 상황이 반복될 때가 있습니다. 

그건 정말 호스피스를 이른바 ‘임종을 맞는 장소’로 생각하는 것과 다름없어요. 

환자·보호자만이 아니라 다학제팀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아직 임종 준비가 채 되지 않은 보호자들을 돌보느라 다학제팀의 소진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환자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는 것의 의미죠.
--- p.329~330

[송병기] 2021년 통계를 보면, 호스피스의 대상이 되는 질환의 사망자 수는 8만 9,000명인데, 그중 약 1만 9,000명만이 호스피스를 이용했습니다. 

이용률이 21퍼센트 정도밖에 안 되는 겁니다.

 (중략) 전국 호스피스 병동의 수는 총 88개소인데, 그중 35개가 수도권에 몰려 있는 반면 울산광역시와 제주도에 1개소, 세종시에는 단 한 곳도 없는 실정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사람들이 왜 호스피스로 안 가는지 혹은 그곳에 가길 꺼리는지에 대해 말하는 게 부조리 연극처럼 느껴집니다.
--- p.334~335

[김호성] 가끔 정말 주무시듯 임종하는 환자들이 있는데, 그런 분들에게 옷을 갈아 입히면 정말 주무시는 것 같아요. 원래 입던 옷을 입으니 그냥 침대에서 잠을 자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면 보호자들이 환자에 대한 마지막 인상을 단지 상실로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죠. 

‘아직까지 나한테는 살아 있다’, ‘이게 끝이 아니다’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는 향후 애도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 사람의 마지막 모습을 평소 입던 대로의 모습으로 기억하게 되니까요.
--- p.342

[송병기] 동백 성루카병원 1층 입구 앞에 성전이 있고, 성전 옆 벽에 죽은 이들의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호스피스에 들어오고 나가면서 죽은 이들의 이름과 만납니다. 

그렇게 죽은 이들의 이름을 보며, 이들이 단지 ‘말기 환자’가 아니라 개성을 지닌 존재였음을 깨닫지 않을까요?

 요컨대 그러한 사물, 의례, 기억, 상상의 얽힘은 죽음을 개인적 사건이나 개인의 내밀한 경험으로 내버려두는 게 아니라, 죽어가는 자와 돌보는 자, 죽은 자와 산 자, 그 모두가 참여하는 사회적 관계로 보도록 요청합니다.
--- p.358

[김호성] 호스피스 완화의료의 가치를 정확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어떤 유용함이 있는지 적극적으로 알려야 합니다. (중략) 

아직까지는 한국에 기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준비하지 않으면 정말 큰 위기가 올 것 같습니다. 세계에서 보기 드문 고령화의 파고를, 각종 질환과 말기 환자의 밀려드는 물결을 면밀한 준비 없이 직격으로 맞을 때, 유례없는 고통이 한국 사회에 넘실댈 것입니다. 호스피스 완화의료의 가치를 이해하고 현실을 정비해야 합니다.
--- p.366

출판사 리뷰
무의미한 연명의료와 급진적인 안락사 담론을 넘어
오늘날 죽음의 대안을 모색하다

“어떻게 사람을 사람으로 대우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보여준다.”
_최진영(소설가, 『구의 증명』 저자)

죽음도 고통스럽지만, 죽음의 과정은 더 고통스럽다. 병원에서 겪는 죽음의 과정이 그리 녹록치 않기 때문이다.

 큰 병원에서 집중적인 치료를 위해 일상을 희생하는 것도 만만치 않지만,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을 지난하게 오가며 삶을 느릿하게 잠식해나가는 암울함을 견디는 것도 쉽지 않다.

 한국 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 “깔끔하게 죽고 싶다는 바람”(9쪽)에 휩싸이곤 한다. 

이른바 안락사 찬성 의견이 여론조사에서 80% 내외로 나타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그런 것밖에 없을까? 편리한, 그러기에 섣부를 위험이 있는 선택에 앞서 다른 대안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어쩌면 죽음에 대해서도 효율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의 두 저자는 오늘날 죽음의 모습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에 십분 공감하면서도, 급한 대안이 아닌 좀더 느리고 섬세한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환자의 고통을 덜어내는 동시에, 보호자에게도 병원 관계자에게도 온전하게 여겨지는 그런 죽음의 과정 말이다. 단순하고 이른바 깔끔한 수단은 그 후에 고민해도 늦지 않다.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저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바로 ‘호스피스’이다.

이 책은 호스피스를 중심으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말기 돌봄과 죽음의 현실을 치열하게 성찰한다. 호스피스는 흔히 말기 암 환자가 생애 마지막을 보내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의료인류학자 송병기와 호스피스 의사 김호성은 이런 단순한 인상을 넘어 호스피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 제도와 시스템적인 특성은 무엇인지 등을 각자의 전문성에 바탕하여 꼼꼼하게 뜯어본다. 

생생한 현장 경험과 에피소드는 물론, 제도 분석, 비교문화적 관점, 역사적 검토, 인류학적 탐구 등 입체적 시선으로 호스피스와 죽음이라는 주제를 가로지른다.

저자들은 여섯 개의 키워드(공간, 음식, 말기 진단, 증상, 돌봄, 애도)를 선정하여 2년여에 걸쳐 여러 차례 대담을 나누었으며, 녹취록을 바탕으로 새로운 글과 다수의 자료들을 치밀하게 보완했다. 

이를 서술체의 산문이 아닌 대화체 형식으로 제시하여 저자들의 상호 교감이 잘 드러나도록 하는 한편, 독자들의 쉬운 이해를 도모했다. 

특히 한국의 실정, 한국의 질문들을 다루는 호스피스 이야기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책은 환자를 “죽게 하지도, 죽게 내버려두지도 않겠다는 응답”(369쪽)으로서 호스피스의 실천들을 풍부한 맥락 아래 제시하며, 치료 중심의 패러다임을 넘어선 죽음의 대안을 모색한다.

“현대의학이 놓친 죽음의 살풍경 속에서
미래를 위한 힌트의 조각들을 성실하게 줍는다.”
_장일호(기자, 『슬픔의 방문』 저자)

왜 ‘평온한 죽음’인가

호스피스의 중요한 목적은 환자의 육체적, 심리적, 사회적 ‘편안함’이다. 환자의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약물을 투여하고, 영양을 공급하고, 상담을 하고, 갖가지 요법을 시행한다. 

호스피스에서 이루어지는 돌봄의 밑바탕에 환자의 편안함이라는 가치가 핵심적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제목에서는 그러한 지향을 담아 ‘평온한 죽음’이라는 키워드를 제시했다. 

그런데 왜 ‘편안한’ 죽음이 아니라, ‘평온한’ 죽음일까? 

호스피스에서 ‘환자가 편안한 상태’라고 말할 때, 이는 “‘고통이 없다’는 의미보다는 ‘힘들지만 하루의 일상생활이 지낼 만하다’는 전반적인 느낌의 표현”(273쪽)이다. 

또 환자의 편안함은 “신체적 편안함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며, 비유컨대 ‘환자 마음의 공간이 넓어지는 것’(284쪽)이라고 볼 수도 있다.

 별다른 맥락 없이 제시되었을 때 자칫 신체적인 의미로 쏠리기 쉬운 ‘편안한 죽음’보다는, 현실적인 고통을 배제하지 않고 환자의 내면과 그 관계성에 초점을 맞춘 ‘평온한 죽음’이라는 키워드로 이 책의 취지를 드러내려 했다. 각 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장별 내용을 ‘머리말’에서 발췌함).

1부는 ‘공간’(1장)과 ‘음식’(2장)을 통해 호스피스의 개괄적인 상을 그린다. 

먼저 1장에서 동백 성루카병원의 정원, 카페, 기도실, 병실, 목욕실, 프로그램실 등을 둘러보면서, 호스피스라는 공간이 어떤 가치를 중심으로 디자인되고 작동하는지 살펴본다. 

2장 ‘음식’은 삶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인 먹는다는 것을 통해 호스피스 돌봄의 특징을 첨예하게 드러낸다

호스피스에서 음식은 단지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닌,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실존적, 사회적인 것임을 깨닫게 된다.

2부에서는 ‘말기 진단’(3장)과 ‘증상’(4장)이라는 주제 아래 호스피스에서 행해지는 의료를 본격적으로 다룬다. 한국에서는 법적, 제도적, 사회적, 의료적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암 환자에게 말기를 선언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3장 ‘말기 진단’에서는 이러한 곤란한 현실에 대해 자세하게 짚어본다. 

이어서 4장 ‘증상’은 환자의 아픔에 대한 호스피스의 접근 방식과, 그로부터 발생되는 윤리적인 난점들을 알아본다. 특히 호스피스에서 통증(pain)과 고통(suffering)을 어떻게 다루는지 조명한다.

3부에서는 ‘돌봄’(5장)과 ‘애도’(6장)를 키워드로 호스피스 돌봄의 특징을 부각시킨다. 5장 ‘돌봄’에서 주목하는 것은, 일반 병원에서 보기 힘든 세심한 돌봄과 이를 실현해나가는 다학제팀의 일하는 방식이다. 

돌봄이 호스피스의 핵심임을 선명하게 밝힌다. 끝으로 6장 ‘애도’는 환자가 임종할 때의 임종실 모습과 사별 이후의 풍경을 두루 전한다. 

임종기 환자의 신체 증상부터 그 시기에 다학제팀 구성원들이 하는 일, 그리고 사별가족 돌봄에 이르기까지, 호스피스가 지향하는 총체적 돌봄의 상(像)을 보여준다.

이렇게 집필된 내용을 각계 전문가 10인이 촘촘하게 검토했다. 기본적인 사실 관계, 논리 구조, 담론의 적절성, 내용 구성 등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있었고, 이를 충실하게 반영하여 최종 완성되었다. 

전문가 10인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동백 성루카병원 정극규 진료원장, 이정애 진료과장, 서울대학교 혈액종양내과 김범석 교수, 순천향대학교 간호학과 김형숙 교수,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의료인문·의학교육학교실 최은경 교수, 강지연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김현철 교수, 스기야마 조가쿠엔 대학교 정보사회학부 가부모토 치즈루 교수,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이현정 교수, EBS 다큐프라임 ‘내 마지막 집은 어디인가’ 김서윤 취재 작가.

추천평
“삶을 너무 사랑하다 보면 죽음을 보이지 않는 곳에 치워두고 싶다. 

그러나 병들고 아프고 죽는 것 또한 삶이다. 호스피스는 말기 환자를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대우하는 존엄과 환대의 장소다. 환자의 병명이나 치료에만 몰두하기보다 한 사람의 서사와 개성에 집중하는, 그리하여 내가 나로서 나답게 죽을 수 있는 공간. 

이 책에 담긴 두 저자의 깊고 넓은 대화는 호스피스 완화의료의 필요를 알려주는 동시에 ‘어떻게 사람을 사람으로 대우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보여준다.”
- 최진영 (소설가, 『구의 증명』 저자)


“우리는 모두 가까운 사람을 잃어본 적 있는 유가족이다. 현대의학이 죽음을 궁지로 내몬다는 걸 경험으로 안다. 두 저자는 ‘살리는’ 일에만 매진하는 현대의학이 놓친 죽음의 살풍경 속에서 미래를 위한 힌트의 조각들을 성실하게 줍는다. 공간과 음식, 돌봄과 애도를 가로지르는 깊고 섬세한 대화는 오염된 존엄의 의미를 새로 쓰는 작업이기도 하다. 죽음을 사유하면 삶의 해상도가 높아진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당신의 삶 역시 일정 부분 해명될 것이다.”
- 장일호 (기자, 『슬픔의 방문』 저자)

* 출처 : 예스2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39639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