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인간과 건강 (독서>책소개)/2.백세시대

혼자 살면서 99세 (2024) - 한번 맛보면 빠져나올 수 없는 생활 방식

동방박사님 2024. 11. 4.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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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99세의 이비인후과 의사가 제멋대로 살아온 인생이었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마음대로 사는 ‘맛있는 생활’
나이가 많아도 당당하게 살아간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정신을 차려보니 99세다. ‘내가 이 나이까지 살아있을 줄이야…’ 내가 생각해도 정말 놀랍다. 몸은 아흔아홉이지만 마음은 서른이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하겠지만 여러분도 내 나이가 되어보면 그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나는 98세까지 이비인후과 병원장으로서 주5일 환자를 보았고 지금은 매일 예전 환자들의 전화 상담을 받고 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아왔는데 내가 20대일 때는 결혼하지 않는 경우가 드물었으므로 “왜 결혼하지 않아요?”라는 질문을 몇 번을 받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몇 살이 되든(99세라도) 혼자 사는 삶은 즐겁다고 말이다. 혼자 사는 삶에는 중독성이 있다. 한번 맛을 보면 그만둘 수 없다.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서 밥을 먹고 자기 자신만 생각하면 되니까 얼마나 편하겠어요. 부러워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면 나는 “그럼요. 그 말이 맞아요”라고 답할 것이다. 누구에게도 속박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다. 나는 내 의지로 이런 인생을 선택했으며, 그에 대해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죽을 고비도 여러 번이었다.

나는 꽤 오래 살고 있지만, 건강에 신경 쓰며 살진 않았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이 있듯이 정기적인 건강검진을 받은 적도 없고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왔다. 그야말로 ‘어떤 이유에서인지 죽지 않는’ 상황이다. 99살이라고 하면 필연적으로 죽음이 눈앞에 와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전혀 죽을 것 같지 않다. 주위의 친구나 지인들이 저승의 명부에 이름을 올려도 나는 아직 끄떡없다는 묘한 자신감이 있다.

아흔을 넘긴 나를 보고 어릴 적부터 건강했을 것이라고들 생각하지만 사실 나는 병약했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가, 그때 림프선염이라는 병에 걸렸다. 폐에 있는 림프샘에 염증이 생기는 것으로 아이들이 잘 걸리는 병이었다. 증상은 식욕부진, 발열 등인데 증상이 없는 아이도 있다. 그 후 열여덟 살에는 숨을 쉴 수 없게 되어 죽을뻔한 적이 있었다. 의식은 또렷한데 숨을 쉴 수가 없어서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입술도 보라색이 되었다고 한다. 아무리 숨을 들이마시려 해도 산소가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그때 곁을 지키던 소아과 의사 어머니가 순간적으로 캠퍼제를 가슴에 직접 주사해서 숨을 돌려놓았다고 한다. 팔에 주사를 놓으면 늦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때 죽었더라면 불과 열여덟이라는 짧은 생이었다. 하지만 99세까지 살아있으니 인생은 알 수 없다. 여러분 중에서도 큰 병을 앓아서 ‘나는 오래 살 수 없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겠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병약했던 사람일수록 오래 사는 것 같으니 아무쪼록 안심하자.

매일이 청춘
마음은 20대인 것

나는 어리광부리기를 좋아하고 지금도 질투를 한다. ‘매일이 청춘’이다. 마음은 20대인 것이다. “그 나이에 혼자 살다가 병에 걸리거나 더 늙어서 거동이 불편해지면 어쩌려고 그래요?” 어떤 이는 이렇게 묻지만, 앞날을 미리 걱정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무책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도록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매일 실천하고 있다. 남편이 있다 한들 남성은 여성보다 평균수명이 짧으므로 의지할 수 없다. 자식이 있다 한들 그들은 그들의 삶이 있다. 오해하지 않도록 여기서 중요한 점을 말해두겠다. 나는 단 한 번도 ‘오래 살고 싶다’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건강의 지키기 위해’ 건강보조식품을 복용한 적도 없다. 식사도 ‘먹고 싶은 음식을 먹는 것’이 나의 소신이며 건강을 위해 억지로 몸에 좋은 음식을 먹은 적이 없다. 하지만 기왕 먹을 거니까 맛있게 먹자고 생각해 방법을 궁리하긴 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장수로 이어졌을 수도 있겠다. 이 부분은 이 책에서 자세히 다루어보겠다.


목차
들어가며
제멋대로 살아온 인생이었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제1장 불운이 행운이 되는 발상의 전환

병약했던 사람일수록 오래 사는 현실
뒤로 넘어져 10일간 입원 생활
역 정류장에서 넘어져 코피가 펑펑
미국 정부 관계자의 차에 치이다
나이를 먹어도 뼈가 튼튼한 이유

제2장 마음대로 사는 ‘맛있는 생활’

국내산 자투리 쇠고기가 삶의 활력
닭고기나 돼지고기가 더 잘 어울리는 요리도 있다
냉장고에 가득한 채소, 생으로 먹고 데쳐서 먹고
생선은 가시가 걸릴까 봐 먹지 못한다
따끈따끈한 밥에 버터를 얹으면 맛있는 한끼
껍질을 벗기는 과일은 귀찮아서 먹지 않는다
꽤 쓸만한 마트 할인 코너
밤에 잘 때는 입에 눈깔사탕을
규칙적인 생활은 한 적이 없다
담배와 술은 적당히 즐긴다

제3장 몸의 이상은 그만두라는 신호

시대에 맞서지 않고 스트레스를 흘려보낸다
엄지발가락에 내성 발톱이 생겨 괴로워한 날
98세이지만 혈액 검사를 하면 ‘이상 없음’
변비와 다리에 나는 쥐는 한약으로 고친다
급하게 먹으면 복통이 일어난다
건강보조식품은 절대 먹지 않는다
피부 보습을 소홀히 하면 후회한다
아무도 만나지 않는 날에도 화장을 한다
욕조는 노인의 사형집행대

제4장 99세에도 인생은 꽃길

결혼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
좋아하는 사람이 없으면 사는 의미가 없다
나이가 많아도 당당하게 살아간다
밥솥을 한 번도 씻지 않아도 죽지 않는다
물건 찾기에 지쳐 ‘벽에 고정’하는 방법을 생각해 내다
죽은 뒤에 할 일을 정하니 살 기운이 넘친다
외로워서 죽을 것 같다던 친구가 다른 사람이 된 이유
100세에 이루고 싶은 꿈이 눈앞에 다가왔다

제5장 스트레스는 씩씩하게 피한다

속마음을 감추고 그 자리를 넘긴다
“야, 이 나쁜 놈아!”하고 외치며 스트레스를 발산한다
말과 고양이로 힐링한다
안 좋은 일이 있는 날은 사극을 보며 시름을 잊는다
좋아하는 책과 만화로 기분 전환한다
혼자 떠나는 작은 여행이 좋다

제6장 그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을 뿐

의사와 연극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한 이유
병원 진료에도 연기가 도움이 된다
여의사를 싫어하는 환자도 있다
때로는 시어머니의 비위도 맞춰준다
인생은 예상치 못한 사건의 연속
화재경보기에 도움받는 날들
연극을 위해서라면 다이어트도 불사한다

제7장 전쟁만은 저세상에서도 반대한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전쟁의 추억
전쟁 중에 목격한 끔찍한 현실
전쟁 중에는 매일 ‘폭탄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했다
연극으로 원자폭탄의 참혹함을 표현하다
전쟁은 인간을 미치게 한다

저자 소개 
저 : 산조 미와 (三條三輪) 
1925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도쿄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984년, 고탄다역 근처에 산조이비인후과 클리닉을 개업했다. 40년 가까이 원장으로 일해왔지만 2022년 어쩔 수 없이 병원 문을 닫았다. 지금은 예전 환자들과 전화 상담을 하며 하루를 보낸다. 애칭은 ‘마녀’. 인생 모토는 ‘먹고 싶은 것을 먹는다’이다.
역 : 오시연 관심작가 알림신청 작가 파일
동국대학교 회계학과를 졸업했으며 일본 외국어전문학교 일한통역과를 수료했다. 번역 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에서 출판기획 및 일본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인체 구조 교과서』, 『한 번 보고 바로 써먹는 마케팅용어 480』, 『한 번 보고 바로 써먹는 경제용어 460』, 『케톤 혁명』, 『무엇을 아끼고 어디에 투자할 것인가』, 『말하는 법만 바꿔도 영업의 고수가 된다』, 『아프다면 만성염증 때문입...

책 속으로
종종 고령자가 넘어지면 뼈가 잘 부러지니까 조심하라고 하는데, 내 뼈는 무척 튼튼한 것 같다. 80세 정도에 백화점 행사매장에서 골밀도를 측정한 적이 있는데 ‘60세 정도네요’라는 말을 들었다. 이 정도는 자랑해도 되지 않을까? 칼슘이 풍부하게 함유된 우유는 어쩌다 한 번 마시고 칼슘 보충제를 챙겨 먹지도 않는다. 하지만 뼈는 튼튼한 모양이다. 어릴 적에 부모님이 우유를 질리도록 마시게 한 덕분에 골밀도가 높아져 ‘뼈 저축’이 된 게 아닐까? 나는 채소를 무척 좋아해서 시판 도시락을 먹을 때도 채소가 듬뿍 들어간 된장국을 끓여서 곁들인다. 된장국 재료로 넣는 소송채와 연근은 칼슘이 풍부하므로, 이런 채소를 매일 먹으면 칼슘이 부족할 일은 없을 것이다. 또 뼈를 튼튼하게 하려면 운동이 꼭 필요하다.
--- p.038

그래도 채소가 냉장고에 얼마 없으면 불안해지고 슈퍼에 가면 필요 이상으로 사버린다. 좋지 않은 버릇이다. 채소는 샐러드를 만들어 생으로 먹는데, 그때는 철저하게 씻는다. 요즘 채소는 농약을 뿌려서 재배하기 때문에 신경이 많이 쓰인다. 예전에는 양배추나 배추에 벌레가 붙어 있기도 했는데, 지금은 한 마리도 찾아볼 수 없다. 그만큼 농약을 뿌린다는 증거다. 벌레가 붙어 있는 것도 싫지만 농약도 몸에 해가 되기 때문에 수돗물을 틀어둔 채로 꼼꼼하게 씻는다. 인간은 벌레처럼 농약으로 바로 죽진 않지만 ‘티끌 모아 태산’이기 때문이다. 잎채소는 샐러드를 만들어서 먹는데, 무나 단호박과 같은 뿌리채소는 조림으로 먹는다. 맛은 간장과 설탕으로 조절한다. 나의 단골 양념이다. 가지는 생으로, 세로로 이등분하고 그것을 더 잘게 찢어서 조미료와 간장으로 버무린다.
--- p.051

버터와 마가린이 건강에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99세나 되어서 굳이 버터와 마가린을 끊을 생각은 없다. 한 번에 몇백 그램을 섭취하는 것도 아니니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도 않다. 병원 문을 닫기 전까지는 근처에 있는 밥집에서 점심을 먹곤 했다. 지금은 병원을 운영하지 않으므로 하루에 두 끼만 먹는다. 나는 저녁에만 음식을 만든다. 그게 습관이지만 극단 공연일이 가까워지거나 연극이나 의학 관련 잡지의 원고 마감일이 닥쳐올 때, 그리고 대본을 써야 할 때 등 시간이 없을 때는 무리해서 요리하지 않는다.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사 오거나 컵라면을 먹을 때도 있다. 시판 도시락을 먹을 때는 반드시 된장국을 끓여서 함께 먹는다. 건강을 위해라기보다는 도시락만 먹으면 어딘지 모르게 허전하기 때문이다.
--- p.060

술은 20대에는 약간 마셨다. 의사가 막 되었을 무렵에는 병원에서 소독에 사용하는 에탄올이라는 알코올을 탈지면에 적셔서 쪽쪽 빨았다. 마녀가 아니라 흡혈귀처럼 말이다.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여성이 술을 직접 사는 것이 손가락질당하는 시대여서가 아닐까? 지금은 여성 혼자서 술집에 들어가도 아무렇지도 않으니 좋은 시대다. 평소 내가 교류하는 극단원들은 하나같이 애주가다. 술자리에서 신나게 마시지만 나는 컵에 1센티미터 정도만 마셔도 취해버린다. 한 번은 큰일 날뻔한 적이 있다. 단원 중 장난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술을 마시고 있을 때 ‘달콤하고 맛있을 거예요’라고 하면서 내게 잔을 건네주었다.
--- p.076

즉, 98세인 나는 무조건 백내장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까지 용케 수술을 받지 않고 살 수 있었구나, 놀랍기만 하다. 나는 이비인후과 의사로서 부비강염 환자 수술을 많이 해왔지만, 막상 내가 수술을 받을 처지자 되자 두려움이 앞서 좀처럼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결국 사물이 보이지 않고 원고지에 글씨를 쓰는 것도 힘들어졌다. 이러면 원고도 쓸 수 없고 책도 읽을 수 없고 사물이 뿌옇게 보여 안개 속을 걷는 느낌이라 위험하다. 그런 이유로 마침내 버티기를 그만두었다. 그래도 모르는 병원의 의사에게 수술을 받는 게 무서워서 지인에게 부탁해 백내장 수술 전문가가 있는 병원을 소개받았다. 수술 전에 전신 검사를 한다고 해서 혈액 검사를 받았다. 그런 검사는 수십 년 만이었다.
--- p.087

그런데 이렇게 하다 보니 얼굴에 주름이 생겼고 ‘이건 좀 문제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스킨 케어’에 의문을 느끼게 된 것이다. 계속 혼자 살아서 누구한테 피부 관리를 하는 방법을 배운 적도 없고 내 방식대로 해왔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젊었을 때는 피부에 유분이 있고 탄력도 있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피부가 건조해지고 주름이 생겼다. 그래서 지금은 클렌징 크림으로 화장을 닦고 일반 비누로 세안을 하고 토너를 바른 다음 나이트 크림으로 마사지를 한다. 마사지는 세게 문지르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가볍게 마사지한 후 티슈로 닦아준다. 그 후에는 피부를 건강하게 해준다는 에센스를 바른다. 98세에 백내장 수술을 했다고 앞에서 이야기했는데, 수술 후에는 사물이 또렷하게 보이게 되었다. 탁한 수정체를 제거하고 인공 렌즈를 삽입하기 때문이다.
--- p.099

나는 한 번 연애를 시작하면 꽤 오래 가는데 가장 짧을 때도 몇 년간 관계를 이어나갔던 것 같다. 하지만 직장 동료인 의사와는 연애하지 않기로 했다. 의사는 대부분 경제적 여유가 있어서 간호사 등 취향에 따라 고를 수 있고 유혹이 많아 노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물론 성실한 의사도 있다). 나는 의사와 진지한 관계가 되면 마지막에는 배신당하고 슬퍼할 것이라고 자신을 타일렀다. 항상 사랑을 했지만, 결혼을 하고 싶진 않았다. 이상이 너무 높았던 건지 어쩌다 보니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한 건지 잘 모르겠지만 경제적으로 독립해 있어서 결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사람은 하고 싶은 일, 열중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마음이 채워지고 외로움도 느끼지 않는 것 같다.
--- p.111

나는 휴대폰도 스마트폰이 아닌 폴더폰을 사용한다. 언젠가는 폴더폰이 판매 종료될 것이라고 하니 은근히 걱정이다. 이처럼 나는 극단적인 ‘기계치’이므로 컴퓨터도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해서 나를 도와주는 극단원이 원고를 대신 입력해준다. 불편하다고 하면 불편하지만 이제 와서 배우려는 마음은 없다. 젊은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스마트폰이 존재했고 컴퓨터도 흔해서 자연스럽게 IT 기기를 사용할 수 있는 것 같다. 나처럼 90살이 넘은 노인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들에 비하면 완전 초보나 다름없다. 오히려 마음을 편히 갖고 내 길을 간다고 생각하는 편이 이런저런 고민 없이 끝난다. 고령자가 기계치가 되는 것은 세상에 흔히 있으며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늙음’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이런 세상이 되었구나, 놀랍다’하고 감탄하면 되는 것이다.
--- p.119

내가 죽을 때의 일은 전혀 상상할 수 없지만, 괴로워하다가 죽고 싶지는 않다. 병상에 누워서 주변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는 것도 사양하고 싶다. 편안하게 어느 날 덜컥 가는 게 이상적이다. 흔히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죽고 싶다’라고들 하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면 다른 사람들에게 큰 폐를 끼치게 되니 그것도 곤란하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두렵다. 나는 저세상이나 천국을 믿지 않는다. 그저 나라는 육체가 사라지는 거로 생각한다. 이 세상에서 사라져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정말 두려운 일이다. 나이를 생각하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지만 지금 죽음을 생각한들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까.
--- p.134

요즘 사람들에게 등화관제가 무슨 말인지 모를 것이다. 전시 중에는 적의 공습 목표가 되지 않도록 전등을 검은 천으로 덮는 규정이 있었다. 빛이 밖으로 새지 않도록 한 것이다. 검은 천을 걷어내니 집안이 갑자기 환해지고 전쟁이 정말 끝났음을 실감했다. 동시에 마당에 파놓은 방공호에서 ‘여기에 소이탄을 떨어뜨리지 마세요’라고 기도할 필요가 없어져 안심했다. 그때 우리 집에는 고양이 한 마리를 키웠다. 쿠리라는 이름이었다. 새하얀 고양이지만 전쟁 중에는 검은 옷을 입혔다. 몸이 흰색이면 미군의 전투기에 발견되어 기관총으로 사살된다는 이유로 흰 개나 고양이는 키우면 안 된다고 알려져 있었다.
--- p.197

출판사 리뷰
시대에 맞서지 않고
스트레스를 흘려보낸다

어릴 적에는 병약해서 죽을뻔할 적도 있었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는 큰 병을 앓은 적이 없다. 의사라는 직업에 종사하면서 연극을 병행하며 전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위궤양이 생긴 적도 없고 만성적인 컨디션 악화에 시달린 적도 없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만사에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하는 내 성품이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인턴 시절에는 남자 선배 의사들이 종종 악담을 하거나 속 좁은 심술을 부렸다. 하지만 그때그때 스트레스를 흘려버리면서 살았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를 잘했던 것 같다. 끙끙거리며 곱씹었더라면 스트레스가 쌓여서 위에 구멍이 났을 것이다. 지금도 일본에서 여성의 지위는 높다고 할 수 없지만, 옛날에는 남존여비가 무척 심했다.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존재로 대하지 않았다. 분하고 억울했다. 하지만 시대에 맞서지 않고 살아온 것이 오히려 잘한 일 같다. 속으로는 이를 갈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어디 두고 봐라’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의사와 연극이라는 일을 양립해왔다. 두 가지를 동시에 해온 것도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둘 중 하나만 했다면 숨 쉴 구멍이 없었을 것이다. 의사와 연극이라는 두 바퀴가 함께 굴러가 적당히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었다.

죽을 때까지 연극을 하기 위해서라도
다리와 허리를 단련해야 한다
그리고 규칙적인 생활은 한 적이 없다

병원을 운영할 때는 새벽 2시쯤에 잠들고 아침 7시에 일어났지만, 연극 연습을 시작하거나 원고 마감일이 다가오면 새벽 서너 시까지 못 자는 날도 있었다. 지금은 일찍 일어날 필요가 없어졌으므로 새벽 4시까지 독서를 하거나 원고와 극본을 쓰기도 한다. 그렇게 하고 아침 9시나 10시쯤 일어난다. 젊었을 때부터 의사와 연극을 병행해왔으므로 1년 365일 수면 부족이었을지도 모른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진료를 하는 틈틈이 졸기도 했다. 간호사도 이런 나를 한두 번 본 것이 아니라서 환자가 진료실에 들어오는 순간 나를 쿡 찔러서 깨워주었다. 긴 세월 이런 생활을 해와서인지 5분만 자면 머리가 맑아진다. 굉장히 쉽게 잠드는 것이다. 불면증으로 고생하는 분들에게는 죄송한 마음이지만 빨리 잠들 수 있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지금은 시간이 있으므로 두 시간 정도 낮잠을 자기도 한다. 그래도 밤에 잠을 설치지 않는다. 새벽녘까지 깨어 있으므로 낮잠을 자서 수면시간을 보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수면 다음에는 운동이다. 다리가 약해지면 몸 전체가 약해지므로 가능한 한 걸어 다니려 한다. 집에서 병원까지는 도보 20분 정도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아침 걸어 다녔다. 지금은 진료를 보지 않으므로 되도록 직접 마트를 다니며 가는 김에 산책도 하고 온다. 극단 공연을 하게 되면 계속 서 있어야 한다. 죽을 때까지 연극을 하기 위해서라도 다리와 허리를 단련해야 한다. 이런 목표가 있어서 걷는 게 힘들지 않다. ‘넘어지기 전의 지팡이’라는 일본 속담이 있는데 유비무환이라는 뜻이다. 나는 밖을 걸을 때는 맑은 날이어도 우산을 지팡이 대신 짚고 걷는데 비가 내리면 우산을 쓸 수 있어서 편리하다. 일부러 지팡이를 살 필요는 없다. 있는 것을 활용하면 된다. 최근에는 달리는 연습도 한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달린다기보다 빨리 걷고 있는 듯이 보이겠지만 나로서는 달리기 연습이다.

좋아하는 책과 만화로 기분 전환
머리를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나는 무대 여배우지만 극작가이기도 해서 책을 자주 읽는다. 대본을 쓸 때는 그 이야기의 역사적 배경과 인물상, 상황 등을 조사한다. 그것을 모르면 정확한 장면을 묘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의상 하나만 해도 시대에 따라 디자인이 다르므로 확인이 필요하다. 그럴 때는 어려운 책을 몇 권이나 읽어야 한다. 일로써 읽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 머리가 띵해진다. 좀 쉬고 싶을 때는 단것을 먹거나 낮잠을 자기도 하는데 다른 책을 읽는 것도 휴식이 될 수 있다. 머리를 쉬게 하기 위한 독서이므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을 선택한다. 예를 들어 역사소설은 몇 번이나 읽는 편이다. 내용이 너무 재미있어서 술술 읽힌다. 머리를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읽기 편하다. 옛날부터 역사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 연장선상에서 역사소설에 푹 빠진 것 같다. 역사소설 외에 만화책도 머리를 식혀준다. “만화책도 보세요?”라고 놀라는 사람도 있지만 99세도 만화책을 즐길 수 있다. 더욱이 나는 훈훈한 내용보다는 《북두의 권》이나 《고르고 13》 같은 하드보일드나 액션물을 선호한다. 모두 남성을 대상으로 한 만화이지만 이렇게 투쟁심을 불러일으키는 만화책을 보면 왠지 기운이 솟는다.

속마음을 감추고
그 자리를 넘긴다

내가 살아온 시대는 남녀평등이 아니어서 지금은 성희롱에 해당하는 언행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다. 병원에서 일했을 때는 항상 술자리에서 술을 따르도록 했는데, 당시에는 싫다고 거부할 수 없었다. 그런 말을 하면 ‘여자가 건방지다’는 말을 들을 뿐만 아니라 병원에서 일하는 데도 지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저는 눈치가 없어서 술을 잘못 따라요. 죄송합니다”라고 어찌어찌 그 자리를 넘기곤 했다. 그렇다고 할까, 나는 정말로 눈치가 없어서 옆 사람의 잔이 비어도 멍하니 있을 뿐 빈 잔에 재빨리 술을 따라주지 못했다. 그렇게 해서 ‘눈치 없는 여의사’라는 이미지를 확립했다고 할 수도 있다. 일단 그런 이미지가 생기면 끈질기게 술을 따르라고 하지 않는다. ‘술도 못 따르는 바보’라며 쥐어박혀도 ‘하하하’하고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내심은 ‘바보 같으니, 누가 따라 준대?’하고 생각했다. 그럴 때는 술도 못 따르는 눈치 없는 여자를 연기하는 것이다. 극단에서는 여배우로서 연기 연습을 하고 있었으니 하나도 어렵지 않다. 모든 일에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필요는 없다. 술자리에서는 “산죠, 너 글래머구나”라고 지금이라면 성희롱으로 고소당할 만한 말도 일상다반사였지만, 그것도 웃으며 받아넘겼다. 당시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 더 이상했던 시절이라 어쩔 수 없었다. 병원에서도 여의사가 주도적으로 일하면 ‘건방지다’는 말을 들었다. 실제로 그런 여의사도 있었는데, 그러면 일이 잘 돌아가지 않았다. 못되게 구는 남자 의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
죽은 뒤에 할 일을 정하니
살 기운이 넘친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죽은 후의 일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즉, 세간에서 말하는 종활을 하려고 한 적이 없었다. 지금으로써는 죽을 것 같지 않고 해야 할 일도 많아서 미래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한 지인이 자식들에게 ‘장남에게는 집과 땅’을 주고, ‘차남한테는 예·적금’을 주겠다는 상속 이야기를 하더니 갑자기 병이 나서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종활이 그 사람의 죽음을 앞당긴 건 아닐까. 그래서 종활은 아직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쓰면서 세상 사람들은 99세라고 하면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자식이 없으므로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99년간 살면서 처음으로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마침 예전 환자 중에 사망 후 여러 가지 절차를 밟아주는 회사 직원이 있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아파트 등 재산 처분과 죽은 후에는 수목장으로 해달라고 부탁하며 비용도 냈다. 이제 한시름 놓았다. 나머지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

* 출처 : 예스2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36556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