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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 책은 수많은 책문 가운데 주로 양란兩亂 이전 조선의 자연과학, 인문과학, 사회과학을 주제로 한 것들을 뽑아 엮은 것이다.
근대과학의 세례를 받은 현대인은 조선 시대 과학의 수준을 폄하하기 쉽다.
그러나 조선의 학자들은 나름대로 자연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그 노력의 흔적을 책문에서 볼 수 있다.
사람은 나를 중심으로 세계를 구성한다. 시간과 공간이 나를 중심으로 얽혀 있다.
내가 살아가는 목적은 내 삶을 잘 사는 것이다. 내 삶을 잘 살기 위해 역사를 공부하고 문학작품을 읽고 과학기술과 문명의 원리를 이해하고 활용한다.
내 삶을 잘 살기 위해 인간 일반의 심리 현상을 연구하고 내 내면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자기 삶을 잘 살려고 하는 개인이 모인 공동체가 사회와 국가다.
공동체에서 일어난 모든 삶의 자취는 시간의 검증을 거쳐 문화가 된다.
일정한 형태를 띤 문화는 공동체에 속한 개개인의 삶을 규정하며 새로운 문화 양상의 도전을 받고 변증법적으로 지양해 간다.
조선 시대 사람들도 자기 삶을 잘 살려고 했다.
우리가 조선의 문화를 들여다보는 까닭은 조선의 문화를 거울로 삼아 우리 문화를 해석하는 데 있다.
책문에는 조선 시대 사람들이 일구어 낸 문화가 있다.
목차
1. 자연의 이치
천하의 이치...... 임운
천도책, 조선의 자연과학...... 이이
역학이란 무엇인가....... 이이
삶과 죽음, 귀신에 관해...... 이이
절기는 어떻게 생겼나...... 이이
봄의 의미를 묻다...... 윤선도
2. 사람과 문화
스승의 길...... 기준
가치판단의 기준...... 김의정
인간의 근본을 노래한 시인...... 이황/송기수
역사를 기록하는 마음가짐...... 황준량/박승임
선비의 기풍을 바로잡는 방법...... 정철
3. 정치와 사회
역사의 진보는 결정되어 있는가...... 이곡
백성을 잘 살게 하는 방법...... 채수
재상이 갖춰야 할 것...... 이자
사치하는 풍조를 검소한 풍조로 바꾸려면...... 나세찬
적폐를 개혁하는 방법...... 황준량
기술자를 불러 모아 나라가 잘되게 하려면...... 양응정
인재를 어떻게 기르는가...... 홍성민
화폐제도의 장단점...... 권득기
저자 소개
저 : 김태완
경북 봉화에서 태어나 초·중고를 나오고 숭실대에서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율곡 이이의 책문을 텍스트로 삼아 실리사상을 연구해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숭실대, 경원대 등에서 동양철학, 한국철학 등을 강의했다.
현재 광주광역시 소재 대안학교인 지혜학교에서 철학교육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책문, 조선의 인문 토론』, 『우화로 떠나는 고전산책』, 『나의 외국어 학습기』 등의 ...
책 속으로
1. 자연의 이치
“천지간 사물의 이치가 만 가지로 흩어지면 하나로 모이지 못할 듯하지만, 한 근본에 뿌리를 두면 그 오묘함을 끝까지 추구할 수 있습니다.
혼돈해서 개벽하기 전에는 천지가 분화하지 않고 사람과 사물이 생기지 않았으며 모든 것이 혼연히 응결되어 있고 맑음과 탁함이 분화하지 않았으니 그 이치가 갖춰지지 않은 듯하지만, 실은 갖춰지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천지가 천지인 까닭, 사람과 사물이 사람과 사물인 까닭은 모두 음이 되었다가 양이 되었다가 하는 오묘한 이치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천하의 이치, 임운의 대책 중에서
“수많은 자연 변화의 근본은 오직 음과 양으로 운동하는 한 기운일 뿐입니다.
기의 움직임은 양이 되고 고요함은 음이 됩니다.
움직임과 고요함을 번갈아 하는 것은 기운, 이런 작용을 일으키는 원리는 이치입니다.
천지 사이에 나타나는 모든 자연현상 중에는 오행의 바른 기가 모여 이루어진 것도 있고, 천지의 어그러진 기를 받아 이루어진 것도 있습니다.
또는 음과 양이 서로 충돌한 데서 생겨난 현상도 있고, 두 기가 발산한 데서 생겨난 현상도 있습니다.
그래서 해·달·별과 별자리는 하늘에 매달려 있고, 비·눈·서리·이슬은 땅으로 내리며 바람과 구름이 일어나고 우레와 번개가 치는데, 이 모든 자연현상은 기운이며 이 모든 자연현상의 원인은 이치입니다.
-천도책, 조선의 자연과학, 이이의 대책 중에서
“만물은 오행으로 이루어져 있고 오행은 음양일 뿐이며 음양은 태극입니다.
태극도 억지로 붙인 이름입니다. 만상의 원리가 형체를 띤 것을 역이라 하고, 그 원리가 드러나는 이치를 도라 하며, 그 원리의 작용을 신이라 합니다.
이런 까닭에 천지자연의 역이 있고, 복희씨의 역이 있으며, 문왕과 주공의 역과 공자의 역이 있는 것입니다.……
역이란 길흉을 결정하고 대업을 만들어내는 원리입니다.
길흉의 징조는 반드시 점을 쳐서 상고하는데, 대체로 사람의 계책에는 의도가 있지 않을 수 없고, 의도가 있으면 사사로움이 생기는 것을 면하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옛날 성왕은 제왕의 궁극 법도를 세우고도 감히 스스로 옳다 하지 않고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귀신의 뜻을 참작해서 의심스러운 일을 결단했습니다.
반드시 점치는 사람을 세워서 점치게 한 까닭은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해서 하늘의 명령을 들으려는 것입니다.”
-역학이란 무엇인가, 이이의 대책 중에서
“사람의 몸은 혼과 백의 성곽입니다. 혼은 기의 신이고 백은 정의 신입니다.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펼쳐져서 신이 되고 죽으면 물러나서 귀가 됩니다.
혼기가 하늘로 오르고 정백이 땅으로 돌아가면 그 기는 흩어집니다.……천하의 모든 사물이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것이지만, 오직 사람이 죽어서 된 귀신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정성이 있으면 그에 따라 신이 나타나니 있다고 말할 수 있고, 정성이 없으면 그 신이 나타나지 않으니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신이 있고 없는 기틀이 어찌 사람에게 있지 않겠습니까?”
-삶과 죽음, 귀신에 관해, 이이의 대책 중에서
“한 원기가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하면서 양의 원리로 만물을 생겨나게 하고 음의 원리로 만물을 성숙하게 하는 것은 하늘의 이치입니다.
하늘의 명을 본받아 음양의 작용에 순응하며 위로 천문과 아래로 지리를 관찰해서 묵묵히 자연의 조화에 부합하는 것은 사람의 도리입니다.
그래서 성인은 천도를 계승하고 인도의 표준을 세워서 사계절의 질서를 규정하고 계절에 따른 절기를 나누었습니다. 율력에 관한 서적과 명절의 이름이 이렇게 생겼습니다.”
-절기는 어떻게 생겼나, 이이의 대책 중에서
“사람이 하늘을 본받는 도리를 말하자면, 다른 데서 구할 수 없고 인에서만 구할 수 있습니다.
일원이 흘러서 때에 부여된 것을 봄이라 하고 사람에게 부여된 것을 인이라 하는데, 때에서 봄이 곧 사람에게서는 인이고 사람에게서 인이 곧 때에서는 봄입니다.
인을 얻으면 봄과 부합하고 인을 잃어버리면 봄과 상반되니, 봄과 부합하면 온화한 기운이 이르러서 만물이 자라나고 봄과 상반되면 사나운 기운이 응해서 온갖 재앙이 일어납니다.”
-봄의 의미를 묻다, 윤선도의 대책 중에서
2. 사람과 문화
“하늘이 백성을 낳을 때 누구에게나 인의예지의 본성을 부여했으며 군주와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의 윤리가 거기 들어 있습니다. 고유한 본성을 다 발휘하고 당위의 준칙을 따를 수 있는 사람은 선각자입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은 그렇지 못해 부여받은 기질에 얽매이고 물질의 욕망에 가렸기에, 본성은 본래 갖춰져 있는 것이며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직분이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사사로운 생각으로 멋대로 행동해 짐승의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는 사람이 드뭅니다.
이런 까닭에 선각자에게 배운 뒤에야 본래의 총명한 자질을 개발하고 천리로 되돌아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승의 도가 일어난 까닭입니다.
이끌어서 부축하고 가르쳐서 인도하며 열어 주고 깨우쳐서 성취하게 하되 효도할 줄 모르는 사람을 효도하게하고 충성할 줄 모르는 사람을 충성하게 한다면,
스승의 도가 쌓은 공적으로 어찌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겠습니까?”
-스승의 길, 기준의 대책 중에서
“옛날부터 조정에서 공도가 행해지면 선과 악이 변별되어 상벌을 순리대로 시행할 수 있습니다.
조정에서 공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공론이 막히고 여론이 수렴되지 않아서 결국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의 가치판단이 어지러워집니다.
천하 국가의 형세가 이런 지경에 이르면 그 환란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치판단의 기준, 김의정의 대책 중에서
“시의 본질은 성정에 근본을 두고 언어로 표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탕이 돈후한 사람은 그 표현이 온화하며 바릅니다.
마음이 경박하고 조급한 사람은 그 표현이 들뜨고 겉만 화려합니다.
뿌리가 깊으면 가지도 무성하고, 체형이 크면 음성도 우렁찹니다.”
인간의 근본을 노래한 시인, 이황의 대책 중에서
“시란 사람의 소리가 문장을 이루어서 밖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하늘이 만물의 법칙을 내리면서부터 가치와 판단의 이치가 있고, 사람이 성품을 타고났으니 희로애락의 감정이 있습니다.
대상에 접촉해서 마음에 반응이 일어나면 저마다 생각하는 바가 있게 되고,
생각이 쌓이면 반드시 저절로 소리와 가락이 생겨 일상생활의 언어에서 흘러나옵니다.”
인간의 근본을 노래한 시인, 송기수의 대책 중에서
“붓을 잡은 관리가 위임받은 일의 중요성을 모르고 지극히 공정한 길을 잃어버려서, 말을 기록할 때는 혹 사실을 기록하지 않고 일을 기록할 때는 혹 진실을 없애 버렸습니다.
이렇게 가치판단이 실상을 반영하지 못하니, 지극히 공정한 역사책의 본질을 잃어버렸습니다.”
역사를 기록하는 마음가짐, 황준량의 대책 중에서
“사관이 된 자는 재능이 없으면 안 되고, 재능이 있어도 그 도를 곧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도가 곧으면 어찌 사람을 두려워하고 하늘을 두려워하며 그 책임을 회피하고 그 직분을 비우겠습니까?
군주와 신하의 언행 중 은미한 것까지도 사관의 기록을 피할 수 없고,
여항의 풍속이 그 사정을 모두 곧이곧대로 드러내며, 대의와 공론이 무궁한 우주와 유구한 천지에서 해와 별처럼 빛날 것입니다.”
역사를 기록하는 마음가짐, 박승임의 대책 중에서
“전하께서는 학문을 강론해서 마음을 바르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해서 정치를 하십시오.
강직하고 분명하며 정직한 사람을 취해 보좌하게 하고, 순후하고 염치 있는 사람을 표창해 풍속을 장려하며, 글재주를 중히 여겨 기량과 식견을 중시하십시오.
그러면 지조와 절개가 있고 의기가 넘치는 선비들이 조정에 줄지어 모여들어서, 임금님이 밝은 덕을 베풀고 교육하는 근본을 튼튼히 하도록 돕고 군주와 스승이 백성을 이끌어서 교화를 이루도록 도울 것입니다.”
선비의 기풍을 바로잡는 방법, 정철의 대책 중에서
3. 정치와 사회
“마음에 덕을 터득하고 덕행으로 정치해야 합니다. 마음에 덕을 터득하지 않은 채 정치에 적용할 수 있는 자는 아직 없습니다. 옛날 임금은 그 까닭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천하를 평화롭게 하기 위해 먼저 나라를 다스렸고,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먼저 집안을 다스렸으며, 집안을 다스리기 위해 먼저 자기 몸을 닦고, 몸을 닦기 위해 먼저 자기 마음을 바르게 했습니다. 이 과정에 잠깐이라도 마음을 쓰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역사의 진보는 결정되어 있는가, 이곡의 대책 중에서
“백성이 먹을거리가 풍족하고 공물과 세금이 고르며 도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 이 세 가지는 모두 백성이 시골에서 편안히 살 수 있는 조건입니다.
그리고 그 요점은 수령의 유능함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마음이 모든 변화의 근원이며 정치의 근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나라가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는 것, 백성의 기쁨과 근심이 어찌 임금의 한 마음 바깥에 따로 있겠습니까?”
백성을 잘 살게 하는 방법, 채수의 대책 중에서
“사구(형법 장관)가 된 사람은 마땅히 명확하게 판결하는 데 성실해야 합니다.
전악(문화 장관)이 된 사람은 마땅히 정직하고 온화한 기풍을 이루는 데 성실해야 합니다.
후직(농업 장관)은 마땅히 때에 맞게 농사를 장려하는 데 성실해야 합니다.
백성의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은 마땅히 오륜의 가르침을 넉넉하게 펼치는 데 성실해야 합니다.
사방의 오랑캐가 복종하지 않으면 그들이 스스로 찾아오게 할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추위에 떨고 굶주린 백성이 있으면 그들을 입히고 먹일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재상이 갖춰야 할 것, 이자의 대책 중에서
“예란 민심에서 생겨나고 공손과 검소에서 형성되며 절도와 꾸밈을 통해 드러나고 사치와 분수를 넘는 데서 훼손됩니다.
이른바 공손과 검소는 본성에 뿌리를 둔 고유한 덕성으로 천리를 담고 있습니다.
이른바 사치와 분수에 넘침은 대상 사물로 생겨난 욕망으로서 인욕이 외부와 감응한 것입니다.
외부와 감응해서 생기는 욕구는 도리를 해치기 쉽기 때문에, 성인은 반드시 절도와 꾸밈을 예의 실천 도구로 삼아 인민의 마음을 단속하며 규범을 정했습니다.……
그러나 검소에서 사치로 흐르기는 쉬워도 사치에서 검소로 흐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윗사람이 반드시 먼저 교화의 근본을 몸소 실천해 세상 사람의 마음을 착하게 해야 민심이 저절로 본연의 성품을 회복합니다.”
사치하는 풍조를 검소한 풍조로 바꾸려면, 나세찬의 대책 중에서
“지금은 염치의 도리를 잃어버려 뇌물로 벼슬살이를 하기에, 임명하는 문서가 채 내려지기도 전에 사람을 찾아냅니다. 그러니 먼저 정령을 내는 바탕을 엄격하게 해 관리 선발의 길을 맑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옛 기풍이 사라지자 사제의 도리를 잃어버려 의리의 학문은 강론하지 않고 공리의 설이 날로 치성하며 선비는 경전을 연구해 질문하지 않고 스승은 곳간만 축낸다는 놀림이 있습니다.
그러니 먼저 정령을 내는 근원을 바르게 해 군사의 책임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공도가 엄폐되어 소멸하고 채수가 풍조를 이루어 병사의 고혈과 군사의 기력이 권문의 뇌물 때문에 꼼짝달싹 못합니다.
그러니 먼저 정령을 내는 근본을 맑게 해 뇌물 주고받는 길을 막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적폐를 개혁하는 방법, 황준량
“기술자의 처지를 알아주는 것은 윗사람에게 달려 있고, 복무에 충실한 것은 아랫사람의 책임입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사정을 잘 살펴 주면 아랫사람은 윗사람이 시키는 일을 충실히 받들 것입니다.
아랫사람의 사정을 알아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대가를 충분히 주어 생계를 여유 있게 하며 노역을 절도에 맞게 시켜 수고를 더는 것입니다.”
기술자를 불러 모아 나라가 잘되게 하려면, 양응정의 대책 중에서
“큰 집을 지으려면 반드시 좋은 재목을 써야 하고, 정치제도를 정비하려면 반드시 훌륭한 인재를 써야 합니다.
위에서 하늘을 대신해 백성을 다스리는 것도 사람이요, 여러 정사를 함께 다스리는 것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인재를 어떻게 기르는가, 홍성민의 대책 중에서
“중국 인민은 동전과 화폐를 유통해서 사람마다 생필품을 공급받고 집집마다 풍족합니다.
우리나라 어리석은 백성은 화폐를 유통하지 못해 마침내 누추하고 가난하게 삽니다.
한쪽은 부유하고 한쪽은 가난한 것은 땅이 다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세금을 부과하고 거두는 데 부지런하고 계으른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반드시 재화를 관리하고 백성을 풍족하게 하는 도리를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화폐제도의 장단점, 권득기의 대책 중에서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책문, 조선의 문화를 들여다보는 거울
책문은 원래 과거시험의 답안으로 제출하는 글인 만큼 정치의 현안을 해결할 대책을 원론적으로 모색하고 제안하는 글이다.
그러므로 책문이라 하면 으레 정치적 문제를 묻고 논하는 글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인간세의 삶이 어찌 정치의 영역 아닌 곳이 있으랴! 하물며 학문과 권력과 정치가 서로 맞물려 있던 조선시대에는 더욱 더 사회의 모든 문제,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학자가 탐구하고 해석하고 해명하고 대안을 모색해야만 하였다.
조선은 전근대사회로서는 드물게 관료제의 수준이 매우 높았다.
왕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절대 권력을 휘두르지 않았고, 객관적인 선발 기준을 통과한 뒤 능력과 경륜을 인정받아 행정 기구의 상층에 오른 고급 관료들과 협의 하에 정치를 했다.
과거가 바로 공정하게 관료를 선발하는 시험이다.
신분이 공인되고 학식과 교양을 갖춘 남자 지식인은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자격이 있었으며 과거를 통해 출사해서 국가 사회에 자기 역량을 펼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어떤 제도든 운용에 따른 폐해는 면할 수 없는 만큼 과거제도 시행 과정에 수많은 부작용과 비리의 온상이 되었지만, 체계적인 시행규칙과 객관적이며 공정한 선발 기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제도 자체는 상당히 근대적이었다.
과거는 공무원을 선발하는 시험이다. 따라서 시험을 통해 평가하는 내용은 응시자가 공무원으로서 지녀야 할 자질이다. 조선은 학문의 나라였기 때문에, 관료의 중요한 자질은 무엇보다도 뛰어난 학식이었다.
학문을 익히는 주목적도 국가에 복무하는 것이었다. 조선 시대의 국제 관계는 사대교린事大交?을 그 이념으로 삼았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언어의 맥락에서 ‘사대’는 굴욕적인 의미가 있지만, 원래 『맹자』에 강대국과 맺는 외교를 가리키는 말로 나온다. 그리고 ‘교린’이란 이웃과 사귄다는 뜻이다.
결국 조선 시대 외교 정책의 골격은, 정치?문화?경제의 모든 분야에서 조선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중국을 중심에 놓고 몽고?여진?왜?유구琉球 등과 선린 교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급 관료는 중국에 사신으로 가거나 중국에서 오는 사신을 접견하는 데 필요한 국제적 감각과 교양, 다른 나라들의 정세를 읽는 안목을 갖춰야 했다.
또한 조선의 기간산업은 농업이었다. 산업 정책의 중심이 농민을 보호하고 농업 생산을 장려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관료가 되면 누구나 한 차례 이상 지방행정을 맡아 농민의 생계를 돌보고 농업을 일으키는 실적을 쌓아야 하였다.
책문은 이런 관료의 필수 자질을 객관적으로 검증하는 데 가장 유효한 방법은 아니라도 잠재적 역량을 가늠하기에 가장 유용한 수단이었다.
그래서 과거의 종장終場에서는 대체로 책문으로 시험했고, 이를 통해 응시자는 자기가 갈고닦은 학식과 한문 문장력과 정치적 당면 과제를 분석하는 안목과 국가의 원대한 전망을 제시하는 경륜을 펼쳐 보일 수 있었다.
이 책은 수많은 책문 가운데 주로 양란兩亂 이전 조선의 자연과학, 인문과학, 사회과학을 주제로 한 것들을 뽑아 엮은 것이다.
근대과학의 세례를 받은 현대인은 조선 시대 과학의 수준을 폄하하기 쉽다.
그러나 조선의 학자들은 나름대로 자연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그 노력의 흔적을 책문에서 볼 수 있다.
사람은 나를 중심으로 세계를 구성한다. 시간과 공간이 나를 중심으로 얽혀 있다.
내가 살아가는 목적은 내 삶을 잘 사는 것이다. 내 삶을 잘 살기 위해 역사를 공부하고 문학작품을 읽고 과학기술과 문명의 원리를 이해하고 활용한다.
내 삶을 잘 살기 위해 인간 일반의 심리 현상을 연구하고 내 내면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자기 삶을 잘 살려고 하는 개인이 모인 공동체가 사회와 국가다. 공동체에서 일어난 모든 삶의 자취는 시간의 검증을 거쳐 문화가 된다.
일정한 형태를 띤 문화는 공동체에 속한 개개인의 삶을 규정하며 새로운 문화 양상의 도전을 받고 변증법적으로 지양해 간다. 조선 시대 사람들도 자기 삶을 잘 살려고 했다.
우리가 조선의 문화를 들여다보는 까닭은 조선의 문화를 거울로 삼아 우리 문화를 해석하는 데 있다. 책문에는 조선 시대 사람들이 일구어 낸 문화가 있다.
『책문, 조선의 인문 토론』, 조선시대 선비들의 세계관과 우주관 그리고 정치사회 문화에 대한 인식의 수준을 보여주다.
『책문, 조선의 인문 토론』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과거 답안인 책문 가운데에서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과학을 주제로 한 글들을 가려 뽑아서 엮은 책이다.
책문을 소개한 첫 책이 주로 정치개혁과 당면 과제의 해결책을 묻는 책문을 다루었다면, 이 책은 책문의 다양성을 보여 주려고 했다.
기술, 산업, 문학, 역사, 교육, 치안, 국방 등 사회의 거의 모든 문제가 담긴 책문에서 우리는 왕정이라는 체제의 한계 속에서도 사회를 올바르게 이끌면서 정의를 실현하고 공공의 이익을 키우려고 노력한 학자 관료의 열정과 포부를 읽을 수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적폐 청산이 화두다.
조선 시대의 문집을 보면 책문뿐만 아니라 상소, 경연 강의 등 정치적 견해를 밝힌 글에 법구폐생法久弊生이라는 말이 아주 많이 나온다.
법구폐생은, 아무리 좋은 법(제도)이라도 오래되면 반드시 폐단이 생긴다는 뜻이다.
당시 학자 관료들은 ‘지금 법에 폐단이 생겼으니 빨리 바꾸라’고 호소하기 위해 법구폐생을 말했다.
법을 만든 이나 법을 운용하면서 폐단을 쌓은 이나 같은 부류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법을 만든 국회의원이 법을 어기고, 법에 따라 공익을 위해 복무하는 공무원이 사익을 챙긴다.
법을 통해 이권을 누리는 자에게는 그 법이 폐단일 리 없다.
적폐를 만드는 사람은 자기가 적폐를 만든다는 생각을 손톱만큼도 하지 않는다.
공익을 위해, 사회정의를 위해 헌신한다는 자기암시로 자기 자신을 속인다.
그러나 손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
스스로 정화하지 못하면 남의 손에 청산될 수밖에 없다.
어느 사회든 광야에서라도 법구폐생을 외치는 사람이 있으면 그나마 명맥이 이어지지만, 나 몰라라 하면 결국 망할 수밖에 없다.
시험을 대비해 예비로 작성한 것이든 실제 시험에서 제출한 답안이든 고시관으로서 만들어 본 모범 답안이든 책문을 작성하는 마음은 같았으리라.
적폐를 청산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시대적 과제를 떠안은 책임감 말이다. 언제 어디서나 개혁은 늘 들숨과 날숨처럼 필요하다.
개혁 의식을 놓쳐 버리면 정체하고 퇴보하게 마련이다. 책문이 출제되고 대책이 제출될 때마다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서 토론과 논쟁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개혁은 늘 타자의 시선이 필요하다.
이해관계를 떠난 객관적 판단 때문이다.
책문을 제출하는 응시자는 조선 관료 사회에서 타자였다.
이 책은 오늘 우리 사회를 보는 조선이라는 타자의 시선이다.
* 출처 : 예스2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57574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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