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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철학의 왕국 (2018) - 호락논쟁 이야기

동방박사님 2024. 10. 12.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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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세속화의 도도한 흐름, 동아시아의 변화 소용돌이 속에서
이상을 좇았던 조선 선비들 이야기

조선을 읽는 새로운 틀-정치사 제도사 중심을 벗어난 사상사

책은 한마디로 전환기에 처한 왕국에서의 철학 논쟁을 다룬 것이다. 17세기가 저물고 18세기가 시작되던 시점은, 안으로 주자학으로 국가를 재건했던 시기가 끝나고 바야흐로 세속화가 진전하는 시기였다. 밖에서는 오랑캐로 멸시했던 청나라의 융성이 확연했다. 일본, 베트남 등도 신국神國, 남제南帝를 자처하기 시작했다. 안에서는 양반·남성에 비해 열등하다고 보았던 중인?서민?여성 등의 역량이 신장되었다. 오랑캐가 문명에 다가설수록 화이華夷 질서는 흔들렸고, 서민·여성이 성인이 될 가능성이 커질수록 명분 질서는 요동쳤다.

이에 대응해 조선의 선비들은 주작학적 질서와 명분으로 조선의 재건과 동아시아 변화에 적응하려 했다. 기존의 사단칠정 논쟁을 계승하면서도 좀 더 현실적이고 사회적인 주제, 즉 마음, 타자, 사람 일반의 문제에 매달렸다. 숙종 후반부터 순조 초반 붕당정치에서 탕평정치를 거쳐 세도정치가 정립되는 시기, 철학과 사회의 문제는 정치와 얽히면서 한 번 더 꼬였다. 논쟁의 최종 승자가 된 노론은 영조 대부터 북당北黨과 남당南黨, 시파時派, 벽파僻派 등으로 다양하게 분화하면서 학파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크고 작은 정치적 분쟁이 일어났다. 철학적 다툼이 조선의 정치?사회 흐름의 숨은 추동력으로 작동했던 것이다. 이처럼 조선 후기를 정치적 이해가 아니라 사상 중심으로 파악하기에 이 책은 조선의 역사를 이해하는 새로운 실마리를 제공한다.

목차

들어가며

서장_호락논쟁 이모저모
조선의 3대 논쟁|송시열의 후예들, 시대의 물음에 답하다|핵심 주제들|또 다른 명칭, ‘인성물성人性物性 논쟁’

1장_논쟁 시작

1. 권상하와 제자들
송시열과 권상하|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한산사의 봄을 기약하다
2. 한산사 논쟁
한산사 가는 길|한산사의 첫날|둘째 날 이후, 귀향
3. 논쟁은 서울에서도
김창협?김창흡 형제|남산처사 조성기|서울의 편지논쟁

2장_논쟁 주제

1. 성리학은 무엇인가
유학과 성리학|주자학의 성립|사단칠정논쟁
2. 호락논쟁의 3대 주제
미발未發, 마음의 정체|인성과 물성, 인간과 외물의 관계|성인과 범인, 인간의 변화와 평등
3. 논쟁 아래 맥락과 현실
관점과 맥락|이론은 이론, 현실은 현실

3장_학파의 형성

1. 정변의 소용돌이
병신처분|경종과 신축환국?임인옥사|낙향하는 호론, 쑥대밭이 된 낙론
2. 영조, 새 판을 짜다
탕평 선포|학學-정政 체제를 분리하라!|한원진의 기대와 좌절|영조와 낙론의 인연
3. 만남과 논쟁
이재, 내일을 준비하다|비래암 강학회|한천시 논쟁

4장_빛과 그늘

1. 호론의 최고봉 한원진
정학正學의 수호자|제2의 송시열을 꿈꾸며|《주자언론동이고》, 완전무결한 주자학
2. 낙론을 부흥시킨 김원행
서울 명문가의 후예|일상에서 찾는 진실한 마음|학문공동체 석실서원
3. 삼무분설三無分說, 호론의 날카로운 칼
변화의 기로에서|호론의 디스토피아|보편 사상의 가능성과 한계

5장_복잡해진 지형

1. 안팎에서 부는 바람
청, 제국이 되다|김창업의 《연행일기》|오랑캐들의 부상|이익과 유행, 조선을 흔들다|떠오르는 계층들
2. 철학 논쟁 변질하다
윤봉구와 화양서원 묘정비|묘정비 사건?송시열 영정 사건|북당, 남당과 얽히다
3. 분열하는 학파들
정조 초반의 파란|갈등하고, 오고가고|시파, 벽파와 다시 얽히다

6장_반성과 성찰

1. ‘공담 비판’에서 실학까지
혈전血戰에서 벗어나기|영조와 정조, ‘한 쪽을 편들면 다툼이 생긴다’|남인과 소론, ‘학문으로 후세를 죽이지 말라’|실實을 향하여
2. 호락논쟁을 뛰어넘은 홍대용
공관병수公觀?受, 공평하게 보고 두루 받아들이기|‘저들’에 대한 이해|차별이 사라진 범애汎愛의 세계
3. 타자 담론 파고들기
동양의 고귀한 야만인|동서고금의 타자들

7장_철학 왕국의 황혼

1. 파국
정순왕후의 수렴청정|반동의 여파|호론과 낙론의 악수惡手
2. 세도世道에서 세도勢道로
또 바뀐 정국|이야기 만들기|잃은 것과 지킨 것
3. 세 가지 유산
집마다 학설, 사람마다 의견|위군자僞君子의 가짜 도학|새로 움트는 싹들

맺으며_‘지금 여기’에서의 호락논쟁
철학과 이념|역사 이야기와 소통|마음의 참 모습|타자에 대한 성찰

부록
연표
학맥?관계도

저자 소개

저 : 이경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등에 재직하면서 17~19세기의 정치.사상.지식인에 대해 공부하고, 글을 썼다. 2018년 현재 한림대학교 인문한국HK 교수로서, 한림과학원 부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는 『원문역주 각사수교各司受敎』(공역), 『조선후기 안동김문 연구』, 『17세기 조선 지식인 지도』, 『조선 후기 사상...

책 속으로

충청도의 노론 학자들은 당시에 호학湖學, 호론湖論, 호당湖黨, 아니면 그냥 호湖로 불렸다. 충청도의 다른 이름이 ‘호서湖西’이기 때문이었다. 서울에 속했던 학자들은 낙학洛學, 낙론洛論, 낙당洛黨, 아니면 낙洛으로 불렸다. 서울에 ‘낙洛’이 붙은 것은 중국의 도시 낙양洛陽이 수도의 보통명사처럼 쓰였기 때문이었다. …… 사실 ‘논쟁’이란 말도 후대에 붙은 것이다. 당시에는 호락시비湖洛是非, 호락변湖洛辨, 호락이학湖洛二學, 호락본말湖洛本末 등으로 불렸다(21쪽).

18세기 조선의 지역, 학문, 국제정세라는 세 가지 지표는 바야흐로 ‘상황이 바뀌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나 호론은 기존의 지향을 그대로 밀고 나갔다. 송시열의 정신은 여전히 유효했고, 남인과 소론은 배척의 대상이었으며, 청은 오랑캐이자 타도할 적이었다. 그에 비해 낙론은 달라진 상황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다른 학파와 정파의 주장에 귀를 열었고, 청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보면 호락논쟁은 변화된 상황에 대한 원칙론자와 수정론자 사이의 인식과 대응의 차이였다(26쪽).

권상하의 호는 ‘수암’ 또는 ‘한수재’였으나, 사람들은 그가 살았던 황강촌을 따 그를 ‘황강 선생’으로도 불렀다. 권상하의 제자들도 자연스레 ‘황강 선생의 문하’가 되었으니, 그 말을 줄이면 ‘강문江門’이 된다. 세간에서는 강문의 선비들 가운데 빼어난 여덟 명을 ‘강문팔학사’라고 불렀다. 권상하 문하의 빼어난 여덟 선비, 호락논쟁의 첫 번째 주역이 바로 그들이었다(38쪽).

시詩는 마땅히 당나라 시를 배워야 한다지만 반드시 닮을 필요는 없다. 당나라 시는 인간의 성정性情에서 우러나는 흥취를 위주로 했고 실증이나 의론에 치우치지 않으니 이것은 본받을 만하다. 그러나 당나라 사람은 당나라 사람이고 지금 사람은 지금 사람이다(63쪽).

권상하에서 한원진으로 이어지는 호론의 주류 이론과, 김창협?김창흡에서 박필주?어유봉으로 이어지는 낙론의 주류 이론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간과 이현익은 두 학파에서 비주류로 남게 되었다(68쪽).

《중용》에서는 희로애락과 같은 감정이 ‘드러나지 않음’을 미발未發로 표현했다. 여기서 미발은 감각이 발동하기 전의 마음, 따라서 순수한 본연지성이 존재하는 마음을 뜻하게 되었다. 정확히 표현하면 ‘미발지심未發之心’일 터이나 그냥 미발로 많이 쓰였다(92쪽).

호론은 미발과 관련해서, 이기의 일원성을 강조한 이이의 관점을 충실히 고수했다. 미발 상태의 마음에서도 기질지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미발의 마음에 선악이 함께 있다고 했다. 낙론은 미발 시에 마음에 대해 이理의 순수성을 강조했고 선만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들은 대개 본연지성의 주도권을 인정하는 편이었다. 이것은 이황과 이이를 절충하는 편이었다(93쪽).

‘성인과 범인은 기질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한 번 마음의 온전함을 경험했다 해서 이를 성인의 경지라고 한다면 참으로 편안한 논리이다’ 정도가 될 것이다. 나태하지 말라는 격려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기질의 차이를 원천적으로 증명하는 의도가 더 두드러져 보인다. 변화를 향한 노력에 엄격한 한계를 그어버린 셈이다. 이것은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성인을 향한 의지를 허무하게 만들고 나아가 성선性善의 보편성을 허물 수 있기 때문이다. 낙론은 이 점을 파고들었다(103쪽).

주희 또한 이 대목에 ‘성인도 또한 사람일 뿐이고 사람의 본성은 누구나 선하다’고 했고, ‘성인은 먼저 알고 먼저 깨달은 자’ 곧 선지先知, 선각先覺한 사람이라 했다. 보통사람에 대한 이 같은 격려야말로 유학을 개방적이고 보편적이게 만들지 않았던가. 낙론은 호론이 맹자의 주장에서 벗어났다고 비판했다(104쪽).

영조 중반 탕평의 무게추가 소론에서 노론으로 옮겨간 데에는 박필주와 같은 낙론 학자들의 힘이 컸다. 그들은 영조 초 소론과 노론의 절충은 어쩔 수 없으나, 명분을 차츰 확보한다면 언젠가 주도권을 잡을 것으로 생각했다. 낙관이 가능했던 데는 영조와 낙론의 인연도 무시 못했다. 앞서 보았듯 영조는 김창집 집안 출신인 영빈 김씨를 각별히 모셨다. 어릴 적에는 낙론 학자 이현익에게도 배웠다(146쪽).

낙론 계열의 학자들이 유속을 심각한 문제로 꼽았다는 사실은 호론과 매우 다른 진단이었다. 호론 학자들에게는 이단이 가장 문제였고, 이단을 용인하고 여러 사상을 기웃거리는 이들은 주자학 내부의 적이었다. 그들의 차이는 왜 생겨났을까. 호론은 17세기 이래 지속한 청에 대한 적대심과 주자학의 정신을 지키겠다는 책임감이 여전했다. 그러나 낙론은 서울을 중심으로 도시화가 가속화하고 경제가 활성화되고 세태가 달라짐을 실감했다. 그들은 관료, 학자들마저 이익사회에 동조하는 현상을 새삼 경계했다(180쪽).

호론의 지도자 한원진의 진단 방식은 여전했다. 사상이 불분명하니 정치에서 탕평이 나타났고, 정치의 기강이 풀리니 사회의 사치풍조가 혼탁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청에 대한 경계심마저 풀렸다. 세태를 인정하는 듯한 낙론에 대해서도 그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193쪽).

호론에게서 삼무분설이란 경고장을 받았던 낙론은 유학의 또 다른 근본정신을 불러내 대응했다. 성인聖人과 범인凡人의 마음이 동일하다고 강조한 것이다. 성인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누구나 가지고 있는 착한 본성을 앞서 깨우친 사람, 곧 선각자일 뿐이었다. 인간의 보편 평등을 강조하며, 성인을 차별화된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이 같은 논리는 위계, 신분, 중심-주변으로 이루어진 세계의 차별성을 파괴함과 동시에, 다양한 존재들의 개별성을 승인하는 방향을 향해 있었다(199쪽).

청의 융성을 목도한 일부 지식인들은 고민에 빠졌고 사고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수정론자들은 청이 유교의 덕치德治를 실현하고 명을 뛰어넘는 성세盛世를 누린다면, 그들도 유교의 적자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청에 대한 긍정은 더 깊숙한 철학적 질문, 즉 오랑캐로 분류되는 인간에 대한 수정도 동반했다. 인간은 누구나 윤리를 가진 존재이고 금수와 같은 오랑캐조차 예외가 아니라는 논리이다. 수정 견해는 오랑캐를 멸시하는 기성의 견해와 대립하며 호락논쟁의 주요 논쟁거리가 되었다(209쪽).

정조는 호론 인사들을 완전히 소외시키지도 않았다. 노론 중에서 호론-남당 계열은 정조 초반에 많이 숙청되었다. 하지만 서울의 호론 이른바 ‘낙중호’는 건재했다. 대표적인 이가 민우수 학맥에 속하는 김종수와 유언호였다. 그들은 정조와 일정하게 타협하며 또 다른 정파인 벽파를 구성했다. 정계는 다시 낙론-시파, 호론-벽파로 갈라진 것이다(247쪽).

학문 시비가 감정 대립으로 불똥이 튀고 이해타산이 얽히자 풀기 힘든 실타래처럼 꼬여버렸다. 이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반성과 원인 규명이 먼저였다. 당사자였던 노론 학계에서 가장 먼저 비판이 싹텄음은 물론이었다. 김창협의 조카 김용겸은 이 논쟁은 도학道學의 근본을 알지 못하고 ‘말꼬리만을 흉내 내어 빚어진 일’이라고 분석했다(256쪽).

옛 사람이 ‘재물로 자손을 죽이지 말고 학술로 천하 후세를 죽이지 말라’고 했다. 이야말로 정론이다. 재물을 축적한 집안에 패망하는 자손들이 많은 이치는 참으로 알기 쉽다. 반면 학술은 그 시대의 군주를 보좌해 백성을 통치하는 도리가 아니겠는가(267쪽).

헛된 공담에 매달리는 풍조를 벗어나 자기 성찰과 실천에 힘쓰자고 했다. 많은 학자들이 진실眞實, 현실現實, 실천實踐, 무실務實 등을 외쳤는데 모두 ‘실實’이 들어가 있다. 호락논쟁이 성리학의 극단적인 폐해를 드러내고 쇠락하고 있었다면, 그 폐단을 거름 삼아 ‘실의 정신’이 싹트고 있었다(268쪽).

(홍대용의) 학문은 크고 넓어 공평하게 보고 두루 받아들였고, 한쪽에 얽매이는 편견이 없었다. …… (홍대용이 말하길) “호론과 낙론은 모두주자의 학설에 의거했다. 그런데 주자의 견해는 젊을 때와 늙었을 때가 다르고, 저술에도 서로 어긋나는 곳이 종종 있다. 논쟁은 이 차이에서 발단했는데 큰 사단으로 번진 것은 한결같이 이기는 데만 힘썼기 때문이다(277쪽).

어찌 철학만을 탓할 수 있으랴. 종교, 신화, 인류학, 사회학, 과학 등 이성과 문명이 이룩한 학문들도 타자라는 대상을 마주하면 자신들의 정체성이나 욕망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전락하기 십상이었다. 이들의 독선이 이익과 결합하면 결과는 가장 끔찍했다. 정말로 ‘진정한 야만스러움’이 있다면 그에 진짜 어울리는 이름은 우리 안의 배타성일 것이다(297쪽).

전통적인 학파와 별다른 인연을 강조하지 않았던 ‘화서학파’의 출현은 유학 전체의 새 판도를 의미했다. 사회 변화와 외부 충격 앞에서 그들은 조선 성리학의 자산을 종합했고, 의리와 유학 수호의 기치 아래 실천을 앞세웠다. 비록 학맥은 낙론과 가까웠지만, 그들의 출신과 지향은 호론과 상통했다(329쪽).

낙론은 유연함을 지녔지만 세파를 따르고 명분을 이용하다 스스로 소멸했다. 호론은 차별주의에 사로잡혔지만, 적어도 이중적으로 처신하지는 않았다. 명분을 체화한 호론의 생존은 보수의 생명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보여준다. 비록 시의에 뒤떨어질지라도 언행이 일치했던 그들은 보수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331쪽).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호락논쟁이란-호락호락하지 않는 호락논쟁

학자 외에 국왕, 정치인, 남인과 소론 학자, 때론 중인까지 왕성하게 참여한 호락논쟁湖洛論爭은 호론湖論(충청도의 노론 학자)과 낙론洛論(서울의 노론 학자) 사이의 논쟁이므로 이렇게 불린다. 이황, 이이가 주역이었던 사단칠정四端七情논쟁, 서인과 남인 사이에 벌어졌던 예송禮訟과 함께 조선의 3대 철학논쟁으로 꼽히지만 일반인에게는 생소하다.
가장 큰 이유는 호락논쟁의 주제들이 꽤 난해하기 때문이다. 논쟁의 주제는 보통 세 가지로 간추려진다. 첫째, 미발未發에서의 마음의 본질에 대한 논쟁. 미발은 감각이 발동하지 전의 마음의 상태이니, 이 주제는 간단히 말해 인간과 마음[心]의 정체에 대한 논쟁이다. 둘째,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은지 다른지에 대한 논쟁. 여기서 물성은 인간을 둘러싼 외물外物로서 타자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셋째, 성인聖人과 범인凡人의 마음이 같은지 다른지에 대한 논쟁이 그것이다.
인성물성논쟁은 청나라로 대표되는 오랑캐에 대한 인정 여부와, 성인과 범인의 이동異同을 둘러싼 다툼은 서민?여성에 대한 인정 여부와 연결되기에 논쟁은 치열하고 그 파장은 클 수밖에 없었다.

왜, 지금 여기서 호락논쟁인가-여전한 현재진행형

호락논쟁의 주제와 그 속에서 활동했던 인간들의 모습은 지금 우리의 고민과 관련해서도 생각거리를 풍성하게 던진다.
논쟁의 첫 주제였던 마음을 보자. 근대 이후 우리는 인간의 정체를 두뇌와 신경의 작용에 연관해 설명하고 있다. 심학心學이 사라진 자리를 사이콜로지psychology 곧 심리학心理學이 채웠다고나 할까.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정신, 의지, 도덕, 감수성의 총체로서의 마음이 다시 주목받는 듯하다. 마음의 주재성과 외물에 대한 조정력을 중시했던 유학의 마음공부야말로 지금 충분히 재음미될 수 있다.
호락논쟁은 타자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관련해서 중요한 성찰을 제공한다. 지금 우리가 겪는 다문화, 남녀, 장애인, 난민 등의 문제 또한 타자에 대한 이해가 해결의 고리다. 앞으로는 로봇, 인공지능과 같은 새로운 타자에 대한 인정 문제가 부상할 것이다. 호락논쟁의 여러 장면을 보며 우리는 스스로를 성찰하고 타자를 이해하며 공존하는 노력에 대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독특한 구성, 풍성한 읽을거리

굳이 분류하자면 사상사 관련 서술인 이 책은 몇 가지 장치를 통해 딱딱한 이론 소개를 넘어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구성하는 데 성공했다.
첫째 지은이는 전형적인 ‘철학사’ 서술을 우회해 철학사 서술에서는 보통 간과되기 마련인 주변 정보들을 활용해 ‘이야기’라는 색채를 입혔다. 지금은 매우 낯설어진 사유방식인 성리학에 그들의 마음과 일상, 정치?사회 이론, 활동과 관계망 등을 복원해 정치?사회적 요인까지 복잡하게 얽힌 이 문제를 입체적으로 풀어나갔다. 결국 이 책은 부제에서 ‘호락논쟁 이야기’에서 보듯 이상을 향한 철학과 세속 질서로 움직인 사회 속에 있었던 조선 철학자들의 이야기다.
둘째 이를 위해 역사 이야기와 철학 이론 설명이 교차되는 독특한 구성을 택해 독자들의 편의를 도모했다. 서장에서는 호락논쟁을 개괄적으로 소개했다. 사전적인 정리이므로 처음에 읽어도 되고, 나중에 읽어도 된다. 본문의 1장?3장?5장?7장은 역사 이야기가 뼈대고, 2장?4장?6장?결론은 철학이나 이론에 대한 소개가 뼈대다. 관심에 따라 이 장들만 떼서 연결해 읽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이 책의 세 번째 미덕은 여느 철학이론서 또는 사상사에서 만나기 힘든 풍부한 도설圖說이다. 각 장마다 7컷 정도의 그림과 사진을 실어 본문에 생동감을 더했다. 소재는 등장인물의 초상, 유적지가 기본이고 당시 생활을 상상케 하는 회화 자료 또한 풍부하다. 그림 가운데는 중국, 일본은 물론 서양화가의 작품까지 있다. 그림 설명에서도 가급적 자세한 정보를 더하여 깊이 있는 해석을 도왔다. 부록에 실린 연표와 학맥?관계도 역시 주목할 사항. 덕분에 책을 수시로 뒤적이거나 다른 정보를 찾는 수고가 줄어 진지한 독자들이 반길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