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히텐슈타인 왕가의 도자기와 식기
리히텐슈타인 왕가의 다양한 예술품 중에서도 도자기는 왕실의 생활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수집대상이었다. 리히텐슈타인 왕가는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를 수입하여 사용하였다가, 1718년 사업가 클라디우스 인노켄티우스 두파퀴어 (1679-1781)가 오스트리아 빈에 도자기공장을 설립한 뒤에는 이곳에서 제작한 도자기를 주로 구입 하였다. 유럽에서 두번째로 설립된 빈 도자기공장은 깨끗한 색채와 도금, 유려한 기형의 도자기를 생산하였는데, 1744년 마리아 테레지나 황후가 공장을 인수한 뒤로 1864년까지 합스브루크 황실의 소유로 운영되었다.공장은 1784년부터 콘라트 폰 조르겐탈 (1733-1805)이 경영하였다.
그는 장인의 기술 향상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빈 도자기는 특유의 양식을 정립하여 유럽 최초의 도자기 마이센을 능가하는 명성을 얻었다.
리히텐슈타인 왕가는 조르겐탈이 경영자로 있던 시기에 빈 도자기공장의 생산품을 다량으로 수집하였다. 정물화, 역사화, 풍경화와 같은 회화 작품이 장인의 섬세한 솜씨로 모사된 도자기는 그 자체로 예술품이 되었으며, 리히텐 슈타인 왕가의 화려한 생활문화를 보여준다.
리히텐슈타인 왕가의 이마리도자기
'이마리"는 일본 큐슈에서 만든 아리타 도자기를 수출하던 사가현의 항구였다. 아리타 도자기는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글려간 이삼평(李參平)이 1616년 이곳에서 가마를 열고 도자기를 구우면서 시작되었는데, 1659년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가 유럽지역으로 아리도자기를 수출하기 시작하면서 항구의 이름이 붙여져 '이마리도자기"로 알려지게 되었다.
유럽에 수출된 이마리 도자기는 주로 부채나 쪽지, 화첩이나 비단 두루마리 모양으로 창을 내어 장식하였다. 유럽의 수집가들은 장식이 풍부하면서도 익살스러운 이마리 도자기의 매력을 높이 샀다. 유럽에서 이마리 도자기는 방의 벽면에 진열하거나 귀중한 식기로 사용되었는데, 17~18세기 리히텐슈타인 왕가에서도 이마리 도자기 수집에 열을 올렸다.
18세기 리히텐슈타인 궁전에서 작성된 물품 목록을 보면 " 빈의 제과주방과 "식료품저장실"의 "귀한 일본 도자기 항목에 "크고 휼륭한 원형 접시 16개"를 비롯하여 이마리 도자기가 240개 이상 기록되어 있다.
유럽 귀족 사회의 식사 문화
근세 유럽 귀족 사회의 식사문화는 프랑스식을 기본으로 하였고 이에 맞추어 식기를 제작하였다. 본래 프랑스식 정찬은 한데 차려 낸 음식을 각자 덜어 먹는 것이었으나, 18세기에 러시아의 영향을 받으면서 러시아식 서비스, 즉 차례대로 음식을 차려내는 "코스요리"가 주류문화로 자리 잡게 되었다. 또한 코스에 다라 나오는 음료의 종류에 맞게 다른 모양의 유리잔을 사용하였다.
순서대로 제공되는 요리에는 그에 맞는 음료가 짝지어졌다. 예를 들어 세리주는 언제나 수푸와 함께, 샴페인은 보통 첫 번째 율류 요리 다음에 나왔다. 그 다음에 나오는 구이 요리에는 레드와인이 함께 나왔다. 물 잔과 유리병들, 레드와인용 유리잔과 화이트와인용 유리잔은 식탁위에 미리 놓여졌으며, 다른 음료는 사이드보드에서 따라 자리에 내었다. 20세기 초까지는 입 안을 헹궈내기 위한 그릇과 미커도 음료용 식기 세트에 포함되었다. 손을 씻는 핑거볼은 19세기에 영국과 프랑스에서 오스트리아로 전해 졌으며, 접시나 도자기 접시에 담긴 디저트 코스 전에 식탁에 놓여졌다. 모든 코스마다 각 자리 사이에 냅킨을 두어 음료를 마시기전에 입을 닥을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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