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기가마 유래
서울에서 1990년대 초까지 가장 최후에 옹기점이 남아있던 지역은 신내동, 망우리 이며 중화초등학교와 능산길을 중심으로 번창 하였고 이일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약 200여명이 넘었다.
산림녹화 차원의 입산금지령에 의해 땔감 구하기 등 어려움을 겪다가 양은 플라스틱 뿐 아니라 최근 속속들이 출시되는 신소재 제품의 빠른 유통으로 생활의 뒷전으로 밀려났고, 옹기가마들이 있던 지역에서는 지속적으로 옹기점을 유지하기가 곤란하여 페점되거나 1990년대 초 경기도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본 전통옹기가마는 신내동에 거주하는 서울시 무형문화제 제30호 옹기장 배요섭씨 (1926년생)의 자문을 받아 전통옹기가마를 복원 하였으며 옹기가마 유형은 중부지역의 특징인 용가마 형태이다.
부엌 한켠에서 혹은 널찍한 뒤뜰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옹기는 어떤 도자기 보다도 친숙함과 여유로움 속에서 질긴 생명력을 이어 왔습니다. - 무형문화재 제30호 옹기장 배요섭-
1990년대 초까지 신내동, 망우동 옹기점이 남아있던 지역
화약고를 옹기공원으로
이곳은 총포, 화약류 도매업체가 1971년 산림과 과수원 이었던 1만 5천여 제곱미터의 부지를 화약류 판매 저장소로 사용하여 사용하여 일명" 봉화산 화약고'로 불리던 곳으로, 폭약과 도화선, 불꽃류 등 약 10톤의 화약류가 6개동 건물에 저장되어 있어 인근주민들은 불안감을 호소하였고 이전을 요구하는 민원이 끊이지 않았던 지역이다. 이제 중랑구와 지역주민들은 힘을 합쳐 20녀 년간 주민은 안전을 위협해 오던 봉화산 화약고를 2014년 10월 이전 완료하였도, 과거 신내동 일대에 옹기 가마가 8개나 있어 옹기제작이 번창하였다는 점에 착안하여 2017년 3월 서울시 최초로 옹기공원을 조성하였다.
옹기란..
옹기란 선사시대 질그릇이 발전. 변화된 용기로 잿물을 입히지 않고 구워낸 질그릇과 잿물을 입혀서 1200도가 넘는 고온에서 구워 윤이나고 강도가 있는 오지그릇을 총칭하는 말로, 질그릇, 푸레독, 오지, 반오지, 항아리로 불린다. 근대이후 질그릇의 사용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오지그릇을 옹기라고 지칭하게 되었다.한국전쟁이후 옹기점이 한때 번창 하였으나 플라스틱 제품과 생활환경의 변화로 위기를 맞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만들어 사용해온 옹기는 세게에서 우리 한민족만이 가지는 독특한 음식저장용기"로 우리민족의 삶과 함게 해온 역사적 증거물로 가치의 재발견과 육성이 필요하다.
장 담그는 날" 옹기와 관련된 전통문화"
우리나라의 장 담그는 기술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뛰어납니다. 선조들은 정성껏 담근 장을 옹기에 보관하였습니다. 이모습을 장담그기에서 대표적인 장면인 물 긷기, 메주 넣기, 간보기 등을 보여 줍니다.
콩쥐와 팥쥐 - 동화속 옹기 이야기
마을 잔치가 있던날, 새엄마는 팥쥐만 데리고 잔치에 가면서 콩쥐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워 놓으라고 하였습니다. 콩쥐가 밑 빠진 항아리에 물을 채우지 못하고 울고 있을때 두꺼비 한 마리가 나타내서 구멍난 부분을 몸으로 막으면서 물을 가득 채울수 있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평소에 착한 마음씨를 지녔던 콩쥐는 어려울때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렁각시 - 동화속 옹기 이야기
가난한 총각이 항아리 속에 넣어둔 우렁이에서 예쁜 처녀가 나와 총각을 몰래 도와주다가 서로 사랑에 바진 이야기입니다.요즘에는 우렁각시를 '남몰래 도와주는 착한 사람"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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