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한일관계사 연구 (책소개)/5.전후한일관계

박정희와 일본1

동방박사님 2022. 6. 20.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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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필자가 박정희와 일본의 관계에서 주제로 삼으려 했던 대상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1961년 5·16 쿠데타 후 일본으로부터 엄청난 뒷돈을 받고 한일회담을 벌여 1965년 한일협정을 체결하기까지의 다사다난했던 시기였다. 둘째는 일제 치하에서 일본화한 박정희가 어떻게 살아남았으며 1972년 10·17 유신쿠데타 후 어떻게 대한민국의 일본화를 시도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집필 과정에서 한일회담과 한일협정에 관련한 첫째 주제에 대한 내용이 많아져, 두 번째 주제는 별도의 책(『박정희와 일본 II』)에서 다루게 되었다.

목차

책을 펴내며

제1부 무솔리니와 박정희

프롤로그: 지도자를 어떻게 볼 것인가
제1장 무솔리니
1. 파시즘이란 무엇인가
2. 무솔리니의 부활: “무솔리니는 우리가 밥 굶지 않게 해 줬다.”
3. 무솔리니의 변신
4. 파시즘의 탄생과 ‘로마 진군’ 쿠데타
5. 무솔리니의 20년 집권①: ‘이탈리아 파시스트 제국’ 선포
6. 무솔리니의 20년 집권②: 히틀러의 등장과 제2차 세계대전
1) 무솔리니와 히틀러/ 2) 제2차 세계대전①_독일의 소련 침공/ 3) 제2차 세계대전②_일본의 진주만 기습
7. 무솔리니의 20년 집권③: 이탈리아 내전(內戰)
제2장 박정희
1. 박정희의 부활: “박정희는 우리가 밥 굶지 않게 해 줬다.”
2. 박정희의 변신①: 교사 → 만주군
3. 박정희의 변신②: 만주군 → 해방 후 광복군 → 남조선경비대원
4. 박정희의 변신③: 남조선경비대원 → 공산주의자
5. 박정희의 변신④: 공산주의자 → 극우 반공주의자
제3장 박정희의 쿠데타와 18년 집권
1. 제1차 쿠데타 미수: 1952년 5월, 이승만 제거 미수
2. 제2차 쿠데타 미수: 1960년 5월 8일, 이승만 제거 미수
3. 제3차 쿠데타 미수: 1961년 4월 19일, 장면 제거 미수
4. 제4차 쿠데타 미수: 1961년 5월 12일, 장면 제거 미수
5. 5·16 쿠데타: 1961년 5월 16일, 장면 제거 성공
1) 5·16 쿠데타 성공/ 2) 제3공화국 약사(略史): 1961~1970년/
6. ‘유신(維新)’ 쿠데타: 1972년 10월 17일, 오직 한 사람을 위한 날
1) 1971년의 대한민국_(1) 1971년 4월: 교련 철폐 시위와 언론 화형식/ (2)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 (3) 1971년 8월 10일: 광주대단지(廣州大團地) 사건/ (4) 1971년 10월 15일: 위수령 발동
2) 유신(維新) 전사(前史): 1971년 10~12월_(1) 학생 세력 소탕: 강제 징집과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 (2) 1971년 12월 6일: 유신 쿠데타 전주곡 ‘국가비상사태’ 선포
3) 유신(維新) 쿠데타: 1972년 10월 17일_(1) 공작명 ‘풍년사업’/ (2) 유신 쿠데타,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야만 시대의 시작/ (3) 수적천석(水滴穿石),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 이세규라는 물방울 이야기

제2부 박정희와 한일회담

제1장 박정희 군정(軍政)_1961.5.16.~1963.12.16.
1. 5·16 쿠데타와 미국 그리고 일본
1) ‘혁명공약’과 ‘빨갱이 만들기’/ 2) 케네디와 박정희/ 3) 케네디와 이케다 하야토/ 4) 기시 노부스케, 스기 미치스케 그리고 박정희/ 5) 박정희의 일본 방문: “요시다 쇼인을 존경합니다”/ 6) 박정희의 미국 방문: “대한민국은 언론의 자유를 향유하고 있음을 선언한다”
2. 5·16 쿠데타와 군정
1) 절대 권력기관 중앙정보부_(1) “권력이란 부패하기 쉽고,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2) “집은 구했어·”/ (3) ‘부패’와 ‘억압’의 총본산 중앙정보부
2) 정치자금 ‘만들어 쓰기’_(1) 중앙정보부와 4대 의혹 사건/ (2) 4대 의혹 사건①: 증권파동 사건/ (3) 4대 의혹 사건②: 워커힐 사건/ (4) 4대 의혹 사건③: 새나라자동차 사건/ (5) 4대 의혹 사건④: 파친코 사건
3) 일본 정치자금 ‘받아 쓰기’_(1) CIA 『특별보고서』: ‘6천 6백만 달러’ 또는 어림잡아 ‘37조 원’/ (2) ‘민정 이양(民政移讓)’과 혁명공약 ‘제6항’의 변조 및 삭제/ (3) 민주공화당의 전신 ‘재건동지회’/ (4) 박정희의 번의(·意) 쇼: 2·18 성명→2·27 선서→3·16 성명→4·8 성명
4) 박정희, 김종필 그리고 일본_(1) 김종필-오히라 메모/ (2)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 인맥
3. 제5대 대통령 선거
1) 윤보선은 왜 패배했는가_(1) 박정희의 ‘민족적 민주주의’/ (2) 윤보선의 ‘사상논쟁’/ (3)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선거 공작/ (4) ‘YTP’ 공격, ‘청사회’의 활약
2) YTP의 정체: KKP → MTP → YTP_(1) ‘KKP’와 윤재욱, 이범석, 조경규: 1960년 8월 6일~1961년 5·16 쿠데타/ (2) MTP와 박정희, 박창암, 이용택, 김종필: 1961년 5·16 쿠데타 이후~1963년 7월 24일/ (3) 민주공화당 청년조직, 청사회=YTP
제2장 한일회담과 6·3 항쟁
1. 군정기(軍政期)의 학생운동
1) 한미행정협정 체결 촉구 시위(1962.6.6.~6.9.)
2) 자유수호 궐기대회(1963.3.29.)와 군정 연장 반대 시위(1963.4.19.)
2. 6·3 세대는 누구인가
3. 학생운동의 동력(動力): 이념 서클_1) 서울대의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 2) 고려대의 민족사상연구회(민사회)와 민주정치사상연구회(민정회)/ 3) 연세대학교의 한국문제연구회(한연회)
4. 6·3 항쟁①: 한일회담 반대운동(1964.3.24.~4.23.)
1) 1964년 3월의 학생운동(1964.3.24.~28.)_(1) 한일회담 반대 투쟁의 봉화가 오르다: 1964년 3월 24일/ (2) 학생데모 전국으로 파급: 1964년 3월 25~28일
2) 박정희 정권의 부정부패와 학원 공작_(1) “박정희 정권은 일본으로부터 1억 3천만 달러를 받았다”: 김준연 의원 폭로 / (2) 국(國)·공유지(公有地) 부정 불하 사건: 만주국과 박정희 그리고 황종률/ (3) 김형욱 중앙정보부의 학원 공작①: 학원 사찰/ (4) 김형욱 중앙정보부의 학원 공작②: 괴소포 사건과 YTP의 재등장
3) 1964년 4월의 학생운동(1964.4.17.~23.)_(1) 4·19혁명 4주년과 학생시위/ (2) 「학원사찰 및 학원분열에 대한 보고서」 작성/ (3) 학원사찰 성토대회
5. 6·3 항쟁②: 박정희 정권 퇴진운동(1964.5.20.~6.3.)
1)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1964.5.20.)/ 2) ‘무장군인 법원 난입 사건’과 ‘송철원 린치 사건’(1964.5.21.)/3) ‘난국타개 학생총궐기대회’(1964.5.25.~26.)와 집단 단식농성(1964.5.30.)/ 4) “주관적인 애국충정은 객관적인 망국행위임을 직시하고 박 정권은 하야하라”(1964. 6.2.)
6. 6·3 항쟁③: 비상계엄(1964.6.3.~7.29.)
1) 1964년 6월 3일_(1) 학생시위와 비상계엄 선포/ (2) 이윤식(李允植)의 죽음/ (3) 「현 시국에 관한 대통령 특별교서(特別敎書)」
2) 1964년의 구속 학생 명단 및 재판과정

제3부 박정희와 한일협정

제1장 한일협정 조인 반대 운동_1965년 2월 18일~6월 22일
1. 1965년 1월: 다카스기 신이치(高杉晉一)의 망언(1월 7일)
2. 1965년 2월: 시나(椎名) 외상의 방한(2월 17일)과 한일기본조약 가조인(2월 20일)
3. 1965년 3월: ‘3·24 제2선언문’과 ‘격문(檄文)’ 작성
4. 1965년 4월: 한일협정 가조인 무효투쟁
1) 3대 현안(懸案) 요강(要綱) 가조인(4월 3일), 평화선과 학생데모/ 2) 서울법대 시위(4월 10일)와 동국대생 김중배 사망(4월 15일)
5. 1965년 5~6월: 한일협정 조인 반대 투쟁_1) 박정희의 방미(5월 16일)와 한일협정 조인(6월 22일)
제2장 한일협정 비준 반대 및 무효화 운동_1965년 6월 23일~8월 14일 이후
1. 1965년 6~7월: 한일협정 비준 반대 투쟁①_1) 여대생과 의대생도 투쟁에 나서다/ 2) 고등학생도 투쟁에 나서다
2. 1965년 7~8월: 한일협정 비준 반대투쟁②_1) 한비연 결성과 비준 반대 투쟁(7월 13일~8월 13일)
3. 1965년 8월: 한일협정 무효화 투쟁과 위수령 발동_1) 한일협정 비준(8월 14일)과 학생들의 성토·시위(8월 15~25일)/ 2) 무장군인 고려대 난입(8월 25일)과 위수령 발동(8월 26일)/ 3) 무장군인 재차 난입(8월 26일)과 학원방위 총궐기대회(8월 27일)
4. 1965년 9월: 6·3 항쟁의 종언_1) 서울대 상대 ‘군화 화형식’과 고려대 ‘학원방위총궐기대회’(9월 6일)/ 2)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 해체(9월 11일)와 2차 민비연 사건(9월 15일)
·자료: 민비연 사건 공소장
제3장 한일협정의 문제점
1. 한일병합과 일본_1) ‘유효정당론’, ‘유효부당론’, ‘무효부당론’/ 2) 샌프란시스코 대일강화조약과 독도
2. 한일협정, 무엇이 문제였나_1) 한일회담과 한일협정/ 2) 한일협정의 문제점①: 기본조약의 문제점/ 3) 한일협정의 문제점②: 재산청구권·경제협력 협정의 문제점
3. 한일협정, 한국 그리고 일본: 박정희의 ‘승부 조작’과 일본의 ‘먹칠’

책을 마치며

참고문헌
인명 색인
 

저자 소개

저 : 송철원 (宋哲元)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건국대학교 교수, 대한교과서(주) 상임고문, (주)에듀티브이 회장을 역임했다. 지금은 (사)현대사기록연구원 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출판사 리뷰

필자와 박정희의 악연

책의 내용을 소개하기에 앞서 밝히고 싶은 것은, 이 책의 내용이 나의 경험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는 1961년 대학에 입학했고 바로 그해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런 인연(?)이 악연으로 변하여 한일협정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과정에서 박정희 정권과 충돌하게 되었고, 악연은 대학 졸업 후 사회생활까지 연결되어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 영향은 지금까지도 미치고 있다.

이런 까닭에 이 시기에 대한 자료가 많다. 특히 필자의 부친은 국가기록원에 기증할 정도로 엄청난 자료를 남겨 이 책의 내용을 풍성하게 하는 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자료가 집필에 크게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내용의 객관성 확보를 위해 수많은 다른 자료를 활용했음을 강조하고 싶다. 학술논문이 아님에도 일일이 각주를 붙인 것은 이런 까닭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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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에게 제국주의 일본은 무엇이었을까?
단지 살아남기 위해 복종해야 하는 거대 권력이었을까, 아니면 도달하고자 염원한 이상적인 목표였을까


필자가 박정희와 일본의 관계에서 주제로 삼으려 했던 대상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1961년 5?16 쿠데타 후 일본으로부터 엄청난 뒷돈을 받고 한일회담을 벌여 1965년 한일협정을 체결하기까지의 다사다난했던 시기였다. 둘째는 일제 치하에서 일본화한 박정희가 어떻게 살아남았으며 1972년 10?17 유신쿠데타 후 어떻게 대한민국의 일본화를 시도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집필 과정에서 한일회담과 한일협정에 관련한 첫째 주제에 대한 내용이 많아져, 두 번째 주제는 별도의 책(『박정희와 일본 II』)에서 다루게 되었다.

5?16 쿠데타 당시 주모자의 이름과 사진이 일본의 각 신문 1면에 보도되자 “만주군 출신 박정희… 그는 특등(特等) 일본인(日本人)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가 아닌가”라며 무릎을 치며 환호성을 울린 일본 사람이 적잖이 있었다. 일본인에게도 ‘특등 일본인’으로 평가받는 박정희! 박정희는 겉만 한국인이었을 뿐 속속들이 일본색으로 물든 인물이었다. 친일 행위를 무시한 미군정의 방침에 따라 만주군 즉 일본군에서 국군으로 옷을 갈아입고 별까지 달고는, 일본 황도파 장교들이 반란을 일으킨 2?26 사건을 본뜬 5?16 쿠데타로 한국을 군인 공화국으로 만들어 그 여파가 전두환까지 미치게 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1972년 10월 17일 유신쿠데타를 일으켜 한국을 일본화하려고 시도했다. 박정희의 참모습은 독자 스스로 판단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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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은 비애국적이고, 언론인은 무책임하며, 지식인은 옹졸하다.”

1965년 5월 2일, 박정희가 즉석연설에서 한 말이다. 학생, 언론인, 지식인. 이 세 부류는 박정희 시대의 3대 적이었다. 이들 가운데 특히 “비애국적”인 학생들이야말로 박정희 최대의 적이었다. 군사 쿠데타 초기부터 박정희 세력과 불편한 관계였던 학생집단은 군사정권이 사활을 걸다시피 하며 진행한 한일협정의 조인?비준 과정에서 그 문제점을 지적하며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당연히 박정희 군사정권은 학생집단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한일협정 과정에서 박정희 정권과 치열한 공방을 벌인 이들이 바로 ‘6?3 세대’다. 이 책은 어떤 의미에서 ‘6?3 세대’의 활동 보고서이기도 하다. 군사정권에 대해 학생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요구했으며 어떻게 행동했는지가 생생하게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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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정치자금 만들기, 그리고 일본 자금 받아 쓰기


쿠데타로 절대 권력을 장악한 후 박정희가 가장 먼저 파기한 것이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한다는 ‘혁명공약’ 제3항이었다. 권력을 잡고 나서 돈이 필요하게 되자 국내에서는 중앙정보부를 창설하여 4대 의혹 사건 등을 통해 정치자금을 조달하는가 하면, 부패와 구악을 일소한다며 기업을 협박하거나또는 특정 기업과 밀착하여 돈을 뜯어냈다. 무엇보다도 일본으로부터 엄청난 돈을 받아먹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쿠데타 세력의 정치자금 조달방식은 대체로 세 단계의 변화를 겪었다. 제1단계는 5?16 쿠데타 이후 군정 기간을 거쳐 1965년 한일회담이 타결되는 무렵까지의 기간으로 개별적인 각개 약진으로 정치자금을 조달했다. 초기에는 ‘만들어 쓰는’ 길을 택하다가 ‘얻어 쓰는’ 방식으로 전환했다(이 책에서는 제1단계만 다룬다). 그러나 만들었든 얻었든 간에 상대방은 돈을 뜯긴 것이다. 이렇게 뜯어낸 돈은 어떻게 사용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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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협정의 문제점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1966년 3월 18일 자 미국 CIA 『특별보고서(SPECIAL REPORT)』에는 “한일협상을 추진시킨 대가로(for promoting the Korea-Japan negotiations)” 박정희 정권이 일본 기업으로부터 6,600만 달러라는 엄청난 돈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한일협상이란 36년간의 일제 폭압에 대한 책임을 묻고 그 피해를 배상받기 위해 일본을 상대로 논의하는 것이었다. 이런 중요하기 짝이 없는 협상을 하는 마당에 엄청난 돈, 그것도 당사자인 일본으로부터 받았다니 그 협상이 제대로 될 수 있었겠는가? 이 책의 제3부 제3장에서는 굴욕적 자세로 졸속으로 처리된 한일협정의 내용과 문제점을 속속들이 파헤쳐 자세하게 검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