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조선시대사 이해 (독서>책소개)/3.조선의전쟁

임진왜란 비겁한 승리

동방박사님 2022. 6. 27.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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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외세 극복의 역사 임진왜란, 과연 자랑스러운 역사인가

임진왜란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인가? 《조선 지식인의 위선》을 통해,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은둔하던 ‘사림’ 세력이 중기 들어서 어떻게 조선의 정치질서를 뒤집고 ‘주류’로 우뚝 서게 됐는지, 또 그들이 어떻게 조선을 바꾸었는지를 힘 있게 그려내 호평 받은 저자가 던지는 두 번째 질문이다. 그는 우리의 상식이나 믿음과는 다르게, 임진왜란은 부끄러운 역사였다고 주장한다. 당시 조선의 임금과 조정, 지배층과 일반 백성은 모두 일본이 곧 쳐들어올 것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아무도 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조선은 왜 아무런 방비도 없이 앉아서 외세의 침략을 당했을까?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전시동원체제로 들어가야 하고, 그것은 바로 조선의 전면적 개혁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배층의 특권을 제한하고, 주자학적 패러다임도 바꾸어야 했다. 그러나 조선의 어느 누구도 이 같은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낼 자신이 없었다. 세상을 바꾸는 개혁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준비 없이 침략을 당할 것인가? 조선 지배층은 후자를 선택했다. 나라와 백성이 아닌, 손에 쥔 권력을 지키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이순신의 수군도 조정의 지원으로 건설한 군사가 아니라, 이순신이 스스로 마련한 돈으로 건설한 군사였다. 패몰한 조선 수군을 재건하여 남해에서 일본군을 쳐부수고 제해권을 되찾는 기적을 일구어낸 이순신 장군을 보면서 임금과 조정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목차

머리말 _ 부도덕하고 무능한 정권이 가져오는 불행

1장 전쟁을 불러들이는 조선
남해안에 나타난 이상한 적선│신국神國 일본의 환상│전쟁광 도요토미│어찌 왜적이 올 리가 있겠는가│
조선을 시험하는 일본│일본 정보조직의 서울 상주│130년간 잊고 지내온 나라│정여립 역모 사건│
선전포고를 들고 온 통신사│침묵하는 조정│임진년 봄, 왜관에 일본인들이 하나도 없었다

2장 임진년의 패주
1592년 4월 13일 부산 앞바다에는 척후선도 없었다│부산 앞바다를 가득 메운 일본군│
오르지 않은 남산의 봉화│용렬한 장군 신립│200년 선비의 나라에 충신은 없고│
왕과 사대부의 비겁함이 나라를 구하다│누구를 섬긴들 왕이 아니랴│어가에 날아드는 분노의 돌팔매│
파천을 주장한 이산해를 죽여라│백성을 버리는 임금, 임금을 버리는 신하│
“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이 어떠한가?”│궁지에 몰린 임금이 세자와 권력을 나누다

3장 일본의 좌절
서울에서 길을 잃다│6만 조선군이 1600 일본군에 무너지다│개전 3개월 만에 찾아온 불안│
여진의 누르하치를 시험하다│승리의 환상에 들뜬 일본│초야에서 일어난 충절│호남 진출 공방전│
금산성 전투, 장엄한 패배│적진 속에 남하한 광해군의 조정│조선도 몰랐던 조선 수군의 위력│
오직 이순신만이 준비를 마치다│한산도 앞바다에 펼쳐진 학익진│수렁에 빠져드는 일본군│장하다, 진주성

4장 전쟁은 동아시아 국제전으로
‘순망치한’ 논리에 떠밀린 명│청병을 둘러싼 군신 간의 갈등│조선이 먼저 무너질까 걱정하다│
곳곳에서 제동이 걸린 일본군

5장 일본군의 패퇴
공수 주도권을 바꾼 평양성 싸움│벽제관에서 전의를 잃은 명군│행주산성에서 다시 확인한 패배│
서울로 쫓겨 온 일본군 5만│도요토미, 전쟁에 이길 수 없음을 한탄하다

6장 정치가 전쟁을 대체하다
손안에 든 고기를 놓아주다│패배한 적군의 희한한 철수│적에 속아 진주성 6만 백성을 죽이다│
남해안에 굴을 파고 웅크린 일본군│조선반도 남쪽을 요구하다

7장 또 하나의 전선
시신으로 뒤덮힌 참혹한 서울│백성이 무서워 돌아오지 못하는 임금│전란 중에도 기생을 끼고│
이몽학의 난│장수 하나쯤 무슨 대수인가

8장 정유년, 일본군이 되돌아오다
물러나기를 거부하는 일본│임금 다음의 권력, 삼도수군통제사│조정과 수군의 갈등│
이순신을 죽이라는 임금│중국, 또다시 내키지 않는 전쟁에 개입하다│
자강책이 전란 중에도 실현되지 못하고│조선을 병합할까 두려워하다│매맞는 삼도수군절도사 원균│
1만 수군이 몰살된 칠천량 전투│전라도로 밀려드는 일본군│또다시 도주하는 왕실과 사대부│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조선 수군 명량에서 되살아나다│조명연합군의 반격│
울산성 전투│총공세

9장 전쟁의 끝
도요토미의 죽음│이순신 최후의 싸움│장군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모든 책임을 유성룡에게 씌우다

10장 모든 것을 전쟁 전으로 되돌리다
개혁을 거부하는 임금│조선군보다 중국군이 더 미더운 임금│부끄러운 공신 책봉 논란│
새로운 흐름에 눈뜰 기회였으나│절호의 기회를 놓치다│이미 망했어야 할 나라가 300년을 잇다
 

 

저자 소개 

저 : 김연수
 
영남대학교와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한국전력에서 경영, 교육 컨설팅 분야에서 일하다 처장으로 퇴직하고, 이후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인가》와 《조선 지식인의 위선》이 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는 말에 공감하여, 역사 자료를 수집하고 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출판사 리뷰

임진왜란은 ‘자랑스러운’ 역사인가?
오늘날 이순신과 거북선, 의병과 한산도·행주·진주의 ‘3대 대첩’으로 기억되는 ‘자랑스러운’ 외세 극복의 역사 임진왜란. 과연 임진왜란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인가?
2011년 《조선 지식인의 위선》을 통해,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은둔하던 ‘사림’ 세력이 중기 들어서 어떻게 조선의 정치질서를 뒤집고 ‘주류’로 우뚝 서게 됐는지, 또 그들이 어떻게 조선을 바꾸었는지를 힘 있게 그려내 호평 받은 저자의 두 번째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제목에서 밝혔듯이, 저자는 우리의 상식 내지 믿음과 달리 임진왜란은 부끄러운 역사라고 말한다. 전작에서 조선 최고의 사상가이자 큰 스승으로 존경받는 퇴계와 율곡 등 유학자들이 조선의 정치를 어떻게 망쳤는지를 보여 주었다면, 이 책 《임진왜란 비겁한 승리》에서는 그 참혹한 결과물이 바로 임진왜란임을 제시한다.

전쟁이 일어날 줄 모두 알았다
흔히 ‘임진왜란’ 하면 당시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건너간 황윤길과 김성일의 엇갈린 보고를 먼저 떠올린다. 황윤길은 “필시 병화가 있을 것”이라고 한 반면에, 김성일은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했다”며 전쟁 발발 가능성을 일축했다. 그런데 황윤길은 광해군을 세자로 추천하여 선조의 미움을 받은 서인西人이고, 김성일은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동인東人이었기 때문에 김성일의 의견만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결국 16세기 말 조선이 무방비 상태로 왜란을 당하게 된 원인을 ‘당쟁’에서 찾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이것이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당시 조선의 임금과 조정, 지배층과 일반 백성은 모두 일본이 곧 쳐들어올 것임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은 왜 아무런 방비도 없이 앉아서 외세의 침략을 당했을까?

주자학이 조선에 불러온 폐해
이것이 바로 저자가 전작에서부터 줄기차게 제기한 ‘주자학이 조선에 불러온 폐해’이다. 조선 중기에 은둔하던 사림이 조선 정치의 전면에 나서면서, 그들이 신봉하는 주자학적 대의명분에 따라 조선의 사회 분위기는 더 보수화되고 중국 중심의 사대주의가 심화되었다. 천하대의天下大義와 명분을 앞세운 공허한 정치 행태, ‘충절과 의리’를 관념화하고 개인적인 차원으로 끌어내려 결국엔 회피하는 위선, ‘요순시대의 정치’를 이상화하여 국가의 권위와 기능을 축소한 어리석음, 그리고 신분제의 꼭대기를 차지한 왕실과 사대부의 탐욕….
그 변화의 기점이 선조 시대(1552~1608)였고, 선조 25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선조 이후 조선의 정치체제가 의존한 성리학적 패러다임이 불러온 참화라는 것이다.

권력을 위해 백성을 버리다
전쟁이 일어날 줄 모두 알았지만, 아무도 안다고 말하지 않았다. 안다고 하는 순간, 전시동원체제로 들어가야 하고, 그것은 바로 조선의 전면적 개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지배층의 특권을 제한하고, 주자학적 패러다임도 바꾸어야 했다. 그러나 조선의 어느 누구도 이 같은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낼 자신이 없었다. 조선을 지배하는 사림의 반대를 극복할 자신이 없었다. 제아무리 임금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세상을 바꾸는 개혁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준비 없이 침략을 당할 것인가? 조선 지배층은 후자를 선택했다. 나라와 백성이 아닌, 손에 쥔 권력을 지키는 쪽을 선택했다.

항복한 일본 군사로 조선 백성을 죽이라는 임금
전쟁이 7년이나 계속되었지만, 조선군은 전쟁이 일어날 때도 없었고 전쟁이 끝날 때도 없었다. 전쟁이 일어났으나 조선 어디에도 군사가 없었다. 군사를 가지려면 돈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돈을 내려고 하지 않았다. 전쟁 전에도 그랬고, 전쟁 중에도 그랬다. 임금은 제 백성이 두려웠고, 제 나라 군사가 두려워 군사를 기르지 않았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졌을 때 자강책을 세워 조선군을 건설하자고 했으나, 임금은 따르지 않았다. 그러면서 굶주린 백성이 도적이 되자, 임금은 항복한 적군을 시켜 제 나라 백성을 죽이라고 했다.

중국의 ‘울며 겨자 먹기’
적군이 나라의 반 이상을 점령하여 나라가 곧 망하게 생겼는데도, 임금과 사대부 어느 누구도 자기가 가진 것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조선은 군사를 만들 수 없었다. 나라가 망하든지, 누군가가 도와주든지 해야 했다. 조선은 중국에 기댔다. 중국은 그런 조선의 행태가 미웠지만, 일본군을 그대로 두었다간 중원이 위태로웠다. 조선의 앵벌이식 안보전략이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중국군이 조선반도에 들어오자, 조선 조정은 의병마저도 해산해 버린다. 의병이라는 무장 세력이 백성의 손에 있다는 것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선은 제 나라 안보를 완전히 중국에 의존해 버린다.

이순신을 바라보는 불편한 눈초리
그런 조선에 예외적인 군사가 있었다. 바로 이순신의 수군이었다. 이순신의 군사는 조정의 지원으로 건설한 군사가 아니라, 이순신이 스스로 마련한 돈으로 건설한 군사였다. 그렇게 하여 이순신은 전체 조선군의 반이 넘는 최정예 군사를 거느렸다. 그런데 이순신은 서울에 붙잡혀와 고문을 받고 죽기 직전에 풀려났다. 그런 사람이 감옥에서 풀려난 지 40일 만에 완전히 패몰한 조선 수군을 재건하여 남해에서 일본군을 쳐부수고 제해권을 되찾는 기적을 이루어냈다. 조선의 온 백성이 ‘장군’을 우러렀다. 그런 이순신을 보면서 임금과 조정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순신이 남해에서 거둔 승리를 기꺼운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