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한국근대사 연구 (독서>책소개)/2.개항기.구한말

김옥균과 그들의 모험 : 조선 엘리트 파워 김옥균

동방박사님 2022. 7. 24.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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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조선 개혁파들 실체 벗기기와 김옥균을 다시 이야기하는 이유

역사적 사례로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조선 엘리트 파워 급진 개혁파 김옥균과 젊은 그들의 모험적인 행동과 치열한 삶을 재조명하고 있다. 아울러 저자는 제도권에서 조국의 앞날을 위해 분골쇄신한 김홍집, 어윤중 등 온건 개화파들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시선을 보낸다. 기존의 김옥균 관련 저작과 비교해서 다음과 같은 차별성을 가지고 기술함으로써 동시대에 대한 인식의 지평과 관련 인물들에 대한 스펙트럼을 넓혀주고 있다.

특히 김옥균의 실체를 소상하게 벗김으로써 인간 김옥균의 장점과 단점, 그에 대한 맹목적인 편애나 편견, 그리고 오해를 가급적 불식하고자 하였다. 저자는 역사적 ‘큰 일’을 도모하는 데 있어서 ‘젊은 그들’의 스케일은 원대하고 이상은 숭고했으나 디테일, 즉 치밀함이 부족한데다가 민심을 간과한 채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일을 성급하게 추진하였으며, 특히 리더인 김옥균은 작전을 지휘, 수행하는 데 있어서 유능한 참모를 두지 못한 점이 패인이었다고 분석하였다.

냉엄한 국제질서에서 볼 때 외교에서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 한국과 미국의 관계, 북한과 중국의 관계가 단기간에 이렇게 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지금까지의 대미 우호관계를 견고히 하되, 초강대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중국에 대해서는 물론 인접 러시아에 대해서도 실리적이고도 세련된 등거리 외교전략을 강구해 나가야 할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점들이 김옥균과 그 시대를 타산지석과 반면교사로 삼고 김옥균을 다시 이야기하는 이유의 하나라고 강조하고 있다.

 

목차

프롤로그
격동이 시대 격정적인 삶을 살다 간 '젊은 그들'의 꿈과 좌절

제1장 새 물결 새 바람, 그 이름 개화사상
개화의 선각자, 서울 '북촌'박규수와 그의 집 '사랑방 손님들'
개화사상의 원류 실학파의 '북학'과 박제가의 북학사상

제2장 역사의 전면에 나선 '젊은 그들'
총체적 난국에 빠진 후기 조선왕조
김옥균, 운명의 마을 서울 '북촌'에서 뜨다
젊은 그들, '불온서적'을 탐독하고 '불온서클'을 조직하다
대원군의 집권과 이에 맞서 이긴 민비의 세 불리기
일본의 조선 침탈 신호탄 운요호 사건
갑신정변의 전주곡 임오군란
고종과 개화파, 일본 미국을 벤치마킹하다

제3장 '3일 천하'로 끝난 허무한 꿈
난관에 부닥친 1단계 '거사'계획
심기일전 '거사' 세부계획을 재수립하다
정변 가담자 포섭 및 행동대원 동원 준비
'운명의 난' 1884년 12월 4일, '정변'을 결행하다
신정부 조각과 정강 공포
신정부, 청국 군 개입으로 3일 만에 무너지다
수구파의 반격과 잔혹한 보복
예견된 실패-디테일이 부족한 스케일
잃은 것돠 얻은 것

제4장 참담한 망명 생활-그 '잃어버린 10년'
후쿠자와 유키치를 다시 만나다
박영효의 김옥균 콤플렉스
거듭되는 신변위협과 재기의 몸부림
절해고도 오가사와라 섬으로 추방되다
두 번째 추방지 훗카이도에서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좌절 속에서의 문란한 사생활
피할 수 없는 ?ㄴ택, 거부할 수 없는 유혹-상하이 행

제5장 혜성처럼 떠오르다 운석처럼 떨어지다
더욱 암담해진 조국의 현실
동학농민군 진압과 청일전쟁 승리로 조선 지배권을 선점한 일본
상하이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다
김옥균 암살은 조중일 '3국 합작 모살'
암살자 홍종우의 그 뒤 행적

제6장 망국의 길에서 다시 만난 '북촌'개화파들의 험난한 행로
재기와 좌절을 반복하며 친일파로 전락한 박영효
정계 복귀 후 미국에 재 망명하여 쓸쓸히 생을 마감한 서광범
자기실현과 조국의 독립을 꿈꾸며 다채로운 삶을 살다간 서재필
전통과 근대화를 아우른 중도 개화 주창자 유길준
죽음 앞에서도 의연했던 '조선의 마지막 개호파'김홍집
도피 중 전설같은 죽음을 당한 올곧은 재정 전문가 어윤중
망국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천수를 다한 현실주의자 김윤식

에필로그
인간 김옥균의 빛과 그림자-왜 이 시대에 김옥균을 다시 이야기하는가?
 

저자 소개

저자 : 안승일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와 동 대학원에서 수학하였으며, 한국은행에서 근무했다. 현재는 자유기고가로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 『열정의 천재들 광기의 천재들』(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추천도서, 을유문화사, 2000), 『혁명에 배반당한 비운의 혁명가들』(KBS 화제의 책 선정, 도서출판 선인, 2004)이 있으며, 연구 논문으로 「소외의식의 극복」, 번역문으로 고트프리트 뷔르거의 담시 『레노레Lenore』 등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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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당시 박규수 집에 가장 빈번히 출입하는 사람은 중인 출신 역관 오경석과 같은 역관이며 한의사인 유대치(본명 유홍기)인데 이들은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 소위 새 물결·새 바람 개화사상의 선각자들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해서 만나고 만나야만 했는가? 박규수가 처음 만난 사람은 역관 오경석이었다. 오경석은 박규수를 만나기 전인 1853년부터 10여 차례 역관 자격으로 사신을 따라 북경을 왕래하며 서양 문물의 눈부신 발전상에 큰 자극을 받고 각종 신학문 자료를 입수하거나 필사筆寫하여 국내에 가지고 들어왔다. 이 과정에서 오경석은 서양의 발전상과 선진문물에 관심이 많은 박규수를 접하게 되었으며,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만나 뜻을 같이한 시기는 대략 1869년 4월 박규수가 상경한 이후부터였다. 이무렵 오경석은 자신과 동년배(1831년?)이며 신분이 같은 역관이자 한의학자인 유대치를 자주 만나 그에게 신학문을 소개하였다. 두 사람은 중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정치일선에 나설 수 없었으므로 오경석은 유대치와 함께 박규수를 만나 개화의 필요성을 건의하였으며, 세 사람은 만남이 거듭되면서 자연스럽게 의기투합하였다. 첫 상면부터 유대치의 인품에 매료된 박규수는 그 뒤부터 두 사람을 자기 집 사랑채로 자주 불러 이들과 밀회를 거듭하고 위기에 처한 조선의 참담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개화가 절실하다는 인식을 함께하게 되었다.---p.18 

조선 왕국과 조선 민족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는데, 이 위기는 일차적으로 서양열강의 동양침탈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고, 이러한 사태가 조선에도 곧 불어 닥칠 것이다. 이러한 민족적 대 위기 속에서 조선의 정치는 부패해 있고 조선의 사회와 경제는 세계의 대세 속에서 매우 낙후되어 있다. 따라서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일대 혁신을 단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일대 혁신은 조선 왕조의 부분적인 개혁이 아니라 사회전반에 걸친 일대 경장·개혁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개화사상은 기존 체제를 유지하며 위기를 타개하려는 위정척사파들의 사상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대 혁신은 반드시 자주적으로 단행해야 하며 붕괴해가는 중국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일대 혁신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혁신 정치세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또한 조선도 세계 대세에 보조를 함께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선진 과학 기술을 도입하고 근대 시민사회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조선 왕국의 고질적인 병폐인 양반 신분제도를 폐지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나라 안의 각계각층에서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해서 적재적소에 배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이들은 국방력 강화의 필요성에 인식을 같이하였는데 박규수의 관서지방 해안 방위책과 오경석의 화륜선(군함) 개발 역설은 국방력 강화에 대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들은 대원군과 위정척사파의 쇄국정책이 시대착오적인 맹목적 국수주의에 기인한다고 판단하고 하루속히 자주적 실력을 배양한 후 개항·개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밖에 이들은 오경석이 주장한 바와 같이 외국과 통상을 하되 중국처럼 외세의 압력에 속아 넘어가 일방적인 교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균형무역을 해야 하며 조선의 금은을 외국의 물품과 교역하는 어리석음을 피해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p.34 

임오군란 후 청국의 태도가 더욱 노골적으로 조선을 얕잡아보며 사사건건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자 급진 개화파는 이에 반발, 일본에 더 적극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조선 정부에서는 1882년 8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일환으로 박영효를 특명전권대사로 하여 일본에 사절단을 파견하는데, 종사관 서광범과 김옥균이 고문 자격으로 동행하였다. 여기에는 실세인 민영익도 끼여 있었는데 그는 사실상 사절단 감시자 역할이었다. 사절단이 일본을 방문한 이때 처음으로 국기인 태극기를 만들어 게양함으로써 우리나라 국기의 효시를 이루었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이견이 있기도 하다. 그런데 당시 조선의 사절단은 말이 사절단이지 너무도 초라한 모습이었다. 출장비도 부족한데다가 당초 목적인 배상금 탕감을 놓고 비굴한 협상을 진행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사절단은 외무성 이노우에와 협상하여 앞서 언급한 배상금 50만 원에 대한 상환 기한을 당초 5년에서 5년 더 연장하여 10년으로 하고 매년 5만 원씩 분할 납입키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차관 교섭을 벌인 끝에 17만 원을 받았지만, 그 가운데 5만 원은 앞서 약속한 일본인 관리 유족 피해 보상금조로 공제하고 나머지 12만 원을 받았으나, 이 역시 사절단 경비와 유학생 학비 지원 등에 충당해버렸다. 이렇게 볼 때 말이 차관 도입이지 실속이 없는 빈손 차관 도퓀이었다.
---p.87
일이 이렇게 되자 더욱 불안해진 왕과 왕비는 더 적극적으로 청덕궁 환궁을 고집했다. 그러나 ‘거사’ 주도세력은 경우궁에서의 불미스러운 일도 불식하고 경우궁보다 넓으며 지대가 높아 소수 병력으로 적을 방어하기 편리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오전 10시경 고종을 계동 이재원 집 계동궁桂洞宮으로 이어移御시켰다. 그러나 그 곳에서도 민비는 좁다고 투정을 하며 창덕궁으로의 환궁을 더 드세게 주장하였다. 김옥균이 다른 계책을 꾸미고 점검하기 위하여 홍영식·이재원 등과 함께 잠시 외청外廳으로 나간 틈을 타 민비의 부추김을 받은 고종은 일본 공사에게 환궁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일본 공사는 처음에는 난색을 표했으나 왕의 뜻이 워낙 완강한지라 김옥균과 사전 상의도 없이 왕을 창덕궁 내 관물헌觀物軒으로 옮기기로 하고 박영효로 하여금 창덕궁 궁내 동정을 살피도록 요청했다. 말이 요청이지 사실상 지시였다. 이쯤 되면 정변의 주도권은 일본  으로 넘어간 셈이었다. 오후 5시경 마침내 왕은 관물헌으로 옮겼다. 그런 뒤 밤이 늦어 창덕궁 문을 닫으려 하자 때마침 청국 진영으로부터 문을 잠그지 말라는 통보가 왔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 터질 것이 터지게 된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기까지는 개화당원으로 가장한 경기감사 심상훈의 역할이 지대했다.---p.122 

무릇 혁명이나 모반은 성공하면 역사의 주인이 되지만, 실패하면 반역이라는 족쇄가 채워져 가혹한 징벌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고종이 위안스카이의 병영으로 옮긴 10월 20일(양력 12월 7일) 아침, 수구파 대신들은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신하들의 불찰이라며 머리를 조아리고 사후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 조치로 이들은 지난 3일간의 사태에서 일본군이 보인 무례한 행동에 대해서 항의하는 서한을 작성, 공식 사과할 것을 일본 정부에 요청하기로 하였다. 이어서 다음날에는 김옥균·박영효·서광범·홍영식·서재필을 ‘5대 역적’으로 규정하고 이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림과 동시에 지난 3일간 정변 주동세력이 왕의 재가를 받아 내린 일체의 정강과 제반 조치도 모두 무효임을 선포하고, 정변 세력에 의해 관직이 박탈되었거나 강등된 대신들의 직책을 원상복구하거나 새로 임명하는 인사 조치를 단행하였다.---p.131 

망명객 김옥균 일행을 태운 우편선 치도세마루가 포말을 일으키며 검푸른 현해탄을 건널 때, 몸과 마음이 지쳐버린 김옥균과 망명객 일행은 지난 일을 되돌아볼 생각도 없이 깊은 잠속에 빠져버렸다. 생각해보면 그들은 문사였지 무사가 아니었고 전략가는 더 더욱 아니었다. 삶의 나이테가 켜켜이 쌓인 경륜이나 경험도 없이 나름대로의 좋은 환경에서 사서삼경 등을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한 후 그런대로 출세가도를 걸어온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론과 현실은 너무 달랐다. 이론은 실제를 실현시키기 위한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었다. 이런 그들이었기에 개혁도 아닌 혁명적 변혁을 성공시키기에는 경험이나 경륜이 너무도 부족했고, 의욕과 열정만 넘쳐흘렀다. 명분은 훌륭했고 발상도 좋았다. 하지만 모든 크고 작은 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인 세밀함 즉 디테일이 부족한 상태에서 변혁이라는 거창한 스케일만 가지고 중대한 대사를 감행했다. 기업 경영에서 ‘디테일(detail)이 없으면 스케일(scale)도 없다’는 말이 있다. 즉 아무리 사업 목표가 거창해도 사전에 세밀한 준비와 전략이 없으면, 그 사업은 필패하게 마련이다. 하물며 목숨을 건 ‘큰일’을 결행함에 있어서 사전에 치밀한 준비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다만 때를 놓칠 정도의 머뭇거림이 지나치게 지속된다면 문제가 있지만 말이다. 김옥균이 죽기 바로 전 상하이에서 읽고 있던『자치통감』은 정변 실패에 대한 회한을 곱씹으며 읽은 책일 것이다. 정변의 실패 원인을 놓고 관련 학계와 전문가들은 다양한 분석을 하고 있다. 그러나 사건 당사자들에게 그 당시 시점에서 왜 그렇게 했느냐고 물어본다면 그들 나름대로의 이유와 답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후 ‘약방문’격이라도 분석은 분석으로서 필요하다.---p.141 

정변은 비록 단기적으로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장기적인 역사적 관점으로 볼 때 매우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제국주의 열강들이 한반도에 대한 침략 기색이 점차 노골화하자 시대를 앞서가는 신진 엘리트 파워 ‘김옥균과 젊은 그들’은 민족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위로부터의 자주 근대화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를 행동으로 옮겼다. 당시 집권 실세인 민비 척족들의 시대착오적인 대외 인식과 민중에 대한 수탈을 강 건너 불구경처럼 좌시하기에는 그들의 피는 너무 뜨거웠다. 역사에서는 모순에 찬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분연히 일어서는 젊은 그들이 있었기에 그 나라 그 역사슴 그래도 발전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갑신정변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현실의 모순을 혁파하려는 젊은 엘리트들의 ‘행동하는 양심’, ‘행동하는 지성’의 선례를 보여줌으로써 특히 후세의 젊은 세대에 대한 민족적 자각의식과 조국이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그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었고, 방법론에서의 잘못은 하나의 ‘반면교사’ 역할도 했다고 볼 수 있다.---p.157 

김옥균·박영효와의 불화는 그 뒤에 더욱 심해져 1890년 초부터 극도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망명객들 사이에서도 김옥균파와 박영효파로 나뉘는 불미스러운 결과가 빚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유혁로를 비롯한 상당수의 행동대원들은 도량과 인간미가 있는 김옥균을 더 좋아하는 분위기였다. 당시 김옥균 곁에서 가장 큰 힘이 되어준 사람은 유혁로였다. 유혁로는 그가 스물다섯이던 1876년 무과에 급제하여 1881년경부터 김옥균과 동지가 되어 박영효와 함께 일본을 방문할 때에도 그들을 수행, 경호했다. 정변 준비 때에도 그는 탑골 승방 모임 등에 참여하여 중간참모 역할을 했으며, 정변 당일 안동별궁 방화 소식을 김옥균에 상세히 보고하고 민영익 처단 시도에도 앞장섰다. 정변 후 김옥균과 함께 일본에 망명하여 그를 항시 곁에서 호위했으며, 김옥균이 절해고도 오가사와라 섬으로 유배될 때에도 그를 수행하려 했으나 일본 당국의 저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후에 은밀히 김옥균을 가끔 찾아가 시국 돌아가는 이야기도 나누며 시간을 함께하기도 했다. 그 무렵 박영효 집 청지기였던 이규완도 김옥균이 홋카이도에서 농장을 개척할 때 그 곳에 찾아가 체류하며 김옥균의 농장 일을 거들기도 했다. 박영효는 이런 이규완이 못마땅하여 그를 불러들였다. 이런 저런 일로 박영효는 1892년 그를 찾아온 김옥균과 절교를 선언했다.---p.170 

갑신정변 후 조선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었을까? 한마디로 말해서 더 나빠졌으면 나빠졌지 나아진 것이 없었다. 우선 정변 실패 후 다시 개편된 조선 정부의 조각組閣 내용을 보자. 고종은 영의정에 심순택, 좌의정 김홍집, 우의정 김병시, 전영사 겸 해상공국당상 이교헌, 후영사 이봉구, 좌영사 이규석, 우영사 민영익, 독판교섭 통상사무 조병호, 한성판윤 민종묵, 이조판서 이재원, 예조판서 김만식, 병조판서 겸 강화유수 김윤식, 호조판서 김영수등을 임명하였다. 신 조각 인물들은 대부분 고종친인척과 민비의 측근들로 채워졌으며 한마디로 ‘그 얼굴에 그 얼굴’, ‘그 물에 그물’, ‘회전문 인사’이며 ‘땜질 인사’로 국정쇄신 의지가 전혀 없는 구태의연한 조각 내용이었다. 수구세력들은 정변 주동세력들의 거사를 ‘철없는 젊은 것들의 분별없는 소행’으로 규정하고 집안 단속과 내부 결집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제 한동안 개혁이나 개화라는 말은 조선 정치권에서 입 밖에도 꺼낼 수 없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그들 수구세력들은 왜 정변이라는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으며 앞으로 이런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자기성찰과 자기반성은커녕 차제에 개혁의 싹과 뿌리가 더 이상 자라나지 않도록 잔존 개화세력과 관련자들은 물론 그 가족 일가 친척까지 색출하여 처단해버렸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청국과 일본은 ‘톈진 조약天津條約’을 체결하여 자신들의 숨고르기 작전으로 일단 조선에서 철수하자 순진한 조선 정부는 잔소리 많은 두 시어미가 일거에 퇴거하여 한시름 놓게 된 며느리처럼 쾌재를 부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당시의 국제 정세는 그렇게 녹록지 않았다. 민비와 그들 수구세력들은 지금부터 산 넘어 산이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p.203 

한편 아침부터 한복으로 갈아입고 옆방에서 김옥균의 동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던 홍종우는 일각이 여삼추, 초조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매시각 비장한 각오로 기회를 엿보며 와다가 잠시라도 방에서 나가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그는 오른  호주머니에 탄환을 장전한 권총을 집어넣고 방안을 서성거리며 갖가지 상념에 사로잡혔다. 권총을 쥔 오른손은 땀에 촉촉이 젖어 있었으며, 목은 바싹바싹 타올랐다. 그 순간이었다. 김옥균의 방문이 열리고 와다가 계단으로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김옥균이 와다를 시켜 이 여관 사무장도 함께 시내 관광에 동행하자고 내려 보낸 것이다. 마침내 홍종우가 그토록 기다리던 때가 온 것이다. 홍종우는 심호흡을 한번 한 후 방문을 살며시 열고 곧장 노크도 없이 김옥균 방문을 열어젖혔다. 김옥균은 무방비 상태로 책을 손에 쥔 채 불시의 침입자를 쳐다봤다. 이때 홍종우는 김옥균과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권총을 허리춤에서 꺼내들고 첫발을 김옥균의 얼굴을 향해 쏘았다. 총탄은 김옥균의 왼  볼을 뚫고 머리에 박혀 들어갔다. 김옥균은 본능적으로 벌떡 일어나 홍종우에게 달려들 기세였으나 곧바로 주저앉았다. 홍종우는 뒤로 멈칫하다가 두 번째 총탄을 가슴에 쏘았다. 김옥균이 비틀거리며 등을 돌리는 순간, 홍종우는 확인 사살이라도 하려는 듯 이번에는 마음 놓고 세 번째 총탄을 쏘았다. 그러고 나서 홍종우는 황급히 나가버렸다. 그래도 김옥균은 그 자리에서 절명하지 않고 방밖으로 기어 나와 건너 방 8호실 앞 복도에 쓰러져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p.220 

일본 정부의 입장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당시 일본은 조선 정부를 자극하지 않고 청국과 일전을 벌일 준비를 은밀히 진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김옥균 신병문제로 골치를 썩일 필요가 없었다. 또한 당시 김옥균은 일본의 의도와는 달리 ‘삼화주의’와 ‘삼국평화주의’ 등을 제시하였으며, 러시아·미국 등과도 협력을 모색하려는 발언을 함으로써 일본 정부의 신경을 계속 건드렸다. 따라서 그들로서는 김옥균을 자체적으로 매정하게 처리하기에는 여론상 한계가 있기 때문에, 가장 무난한 방법으로서는 조선과 청국이 알아서 처치해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실제로 일본 정부는 각종 경로를 통해서 조선 정부에서 암살범을 보낸 정보를 입수하고도 적극적으로 수사하지 않았고, 한걸음 더 나아가 이대로 가면 김옥균이 암살당할 것이 분명한데도 살해당하도록 함으로써 소위 ‘미필적未畢的 고의故意’ 또는 교사敎唆에 의한 살인행위에 가담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를 입증하는 증거로 일본 정부는 암살범이 김옥균 측근에 잡힐 때 증거가 확실함에도 미온적인 수사를 하거나 형식적인 신분조사만 마친 후 범인을 추방하는 선에서 사건을 흐지부지 마무리하곤 하였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조선·청국과 동조하여 모살하였다는 여론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서도 교활한 일본 정부는 김옥균 암살과 시체인도, 조선 정부의 잔인한 사후 처리와 관련하여 청국과 조선의 협조 관계를 크게 부각, 반청·반조선 여론을 고조시킴으로써 조선 침략과 청일전쟁의 명분을 차근차근 쌓아갔다. 그런 점에서 김옥균 암살은 조·중·일 3국 합작에 의한 희대의 모살작전이었다.---p.225 

서광범이 힘겹게 미국 생활을 하고 있는 가운데 그에게 희소식이 들어왔다. 1894년 갑오동학농민전쟁을 계기로 발발한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돌아가자 일본은 청국의 간섭을 받지 않고 노골적으로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새로 부임한 이노우에 공사는 김홍집 총리에게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는 서광범·서재필 등에게 사면 조치하고 재기용할 것을 요구하는 한편, 외부대신 김윤식에게 주미 일본 공사 구리노를 통해 그 취지를 본인들에게 통보토록 하였다. 서재필은 미국에 터를 잡은 만큼 귀국할 의사가 없었고, 서광범은 반갑고 기쁜 마음 금할 수 없었으나 귀국할 여비가 문제였다. 우여곡절 끝에 서광범은 일본 정부로부터의 대여형식으로 여비를 마련하여 10년간의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1894년 9월 8일 감격스런 귀국길에 올랐다. 그때까지도 조선 정부에서는 정식으로 특사령을 내리지는 않았기 때문에 서광범은 정난교·신응희와 함께 9월 말 일본에 도착, 도쿄에 머물면서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고 있었다.---p.248 

미국에 돌아온 후 그는 다시 의료 활동을 하다가 한국동란 발발 이듬해 인 1951년 1월 5일 펜실베이니아 주 노리스타운 소재 몽고메리 병원에서 88세를 일기로 길고, 다채로운 삶을 마감하였다. 윤치호가 그의 『일기』에서 “서재필은 갑신정변으로 천민이 되어 자살한 전처의 무덤을 찾아보지 않아 비난을 받았다. 그는 냉혹하고 거만한 사람이었다”고 혹평한 바 있다. 그러나 한 인물에 대한 평가를 한 면만 보고 간단히 평가할 수는 없다고 본다. 단순히 인간적인 측면에서만 보면, 그는 냉정하고 이기주의적인 면이 강했다. 그러나 조국의 독립이라는 큰일을 위해서라면 때로는 생업을 중단하고 분골쇄신 앞장섰다. 이 점이 그의 약점이면서도 강점이었다. 그런 점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발을 빼고 약게 살아간 윤치호는 인간 서재필을 혹평만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p.259 

유길준은 다른 신진 엘리트들과는 달리 출세의 지름길인 과거를 포기하고 신학문을 익히는 데 골몰하였다. 그 이유는 과거시험이 입신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나 경세지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판단에서였다. 민영익 등이 그에게 과거시험을 강력히 권유하였지만, 그는 이에 대한 반론으로「과문폐론科文弊論」을 지어 과거의 폐단을 적시하였다. 그는 이 글에서 명분을 중시하고 실리를 경시하는 과거시험으로 나라가 피폐하게 되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과거시험이 의미가 없다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서양 선진국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데, 집안싸움만 하며 잠자고 있는 조국의 현실에서 속된 말로 출세하기 위해 ‘공자 왈 맹자 왈’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뜻이었다. 그의 이러한 논리는 박규수 집 사랑방에서 신학문을 읽히며 더욱 굳어졌다. 젊은 유길준으로서는 박규수가 건네준 『해국도지』 등 각종 신학문 서적을 읽고 너무나 충격을 받은 것이다.---p.261 

김홍집은 조선 왕조 말 정권의 중심부에 있었지만 권력에 연연하지는 않았으며, 제도권에 참여하여 개혁을 펴나가되 온건 개화를 실현하려 하였으나 주변 여건상 때로는 자의반 타의반, 때로는 타율에 의해서 개혁 드라이브 정책을 펴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정치가로서 일본통이었지만 맹목적인 친일은 하지 않았으며 때로는 청국을 의식하였으나 그렇다고 친청 입장을 취한 것도 아니었다. 정치가로서의 그의 정치철학은 등거리 외교와 합리적 개화노선이었으며, 이러한 정치적 노선에서의 그의 인간적인 고뇌와 결단은 그가 걸어 온 행적에서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p.279 

1919년 3·1운동 직전 김윤식은 최남선으로부터 독립선언 참여 제의를 받고 ‘독립선언’은 독립 이후에 하는 것이 옳다며 ‘독립청원서’ 제출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때 일본측은 파리강화회담에 제출하려던 ‘독립불원증명서’에 그가 이완용, 송병준 등과 함께 유림 대표로 서명했다고 발표하자, 이에 놀란 김윤식은 즉각 이를 부인할 목적으로 ‘대일본장서對日本長書’를 만들어 3월 28일 조선총독과 일본 총리대신 앞으로 탄원서를 보냈다. 이로 인해 그는 투옥되었으나 85세의 고령이라는 이유로 풀려나고 대신에 그의 손자가 옥고를 치르는 해프닝이 일어났다. 그런 뒤 그는 이전에 고종과 순종의 권유로 자의반 타의반 받은 작위는 물론 경학원 대제학 자리도 박탈당하였다. 그리고 1922년 1월 28일 88세를 일기로 긴 삶을 마감하였다.---p.297 

김옥균은 문사文士로서 학문적으로 뛰어나고 인간적으로 매력이 있는 사나이였지만, 자신의 목숨과 국가의 명운을 좌우하는 ‘큰일’에서 때를 선택하는 데 너무 성급했고 뛰어난 작전참모를 두지 못한 것이 그로서는 결정적인 불운이었다. 즉 김옥균은 혁명가로서 이상은 숭고했고 행동도 과감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상황 판단과 이에 수반된 전략·전술이 부족했고, 혁명 수행 과정에서 레온 트로츠키·체게바라·보구엔 지압 같은 유능한 작전지휘관을 두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김옥균은 정치적·혁명적 이상주의자요 로맨티스트였으나 전술적·전략적 리얼리스트가 아니었다. 이 점이 혁명가로서의 그의 약점이요 한계였다.
---p.301
 

출판사 리뷰

나는 원한다, 조국이 나를 이해하게 되길,
조국이 원치 않는다면, 그땐…
그냥 조국을 지나가는 수밖에, 비스듬히 내리는 비처럼!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

조선 개혁파들 실체 벗기기와 김옥균을 다시 이야기하는 이유

어느 시대 어느 국가든 그 시대가 요구하는 시대정신이 있으며, 지도층이 그 정신을 솔선수범 실천에 옮길 때만이 그 나라 그 역사가 바로 설 것이다. 그렇지 못하고 이들이 수사학적 언어유희나 반복하며 ‘그들만의 리그, 그들만의 파라다이스’로 재미를 독점한다면 그 나라의 미래는 어찌 되겠는가? 저자는 이 책에서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할 때 소용돌이치는 그 역사의 현장에는 언제나 ‘젊은 그들’이 있었다고 말하며, 그 역사적 사례로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조선 엘리트 파워 급진 개혁파 김옥균과 젊은 그들의 모험적인 행동과 치열한 삶을 재조명하고 있다. 아울러 저자는 제도권에서 조국의 앞날을 위해 분골쇄신한 김홍집, 어윤중 등 온건 개화파들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시선을 보내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과거사에 대한 이해와 반성 및 재인식, 그리고 내일을 향한 지혜와 슬기를 모으고자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책은 기존의 김옥균 관련 저작과 비교해서 다음과 같은 차별성을 가지고 기술함으로써 동시대에 대한 인식의 지평과 관련 인물들에 대한 스펙트럼을 넓혀주고 있다. 즉 저자는 김옥균과 주요 등장인물들의 활동과 당시의 긴박한 시대상황을 날줄과 씨줄로 촘촘하게 직조하여 독자들의 이해와 흥미를 더해주고 있으며, 각 인물들의 실상과 허상, 특히 김옥균의 실체를 소상하게 벗김으로써 인간 김옥균의 장점과 단점, 그에 대한 맹목적인 편애나 편견, 그리고 오해를 가급적 불식하고자 하였다. 저자는 역사적 ‘큰 일’을 도모하는 데 있어서 ‘젊은 그들’의 스케일은 원대하고 이상은 숭고했으나 디테일, 즉 치밀함이 부족한데다가 민심을 간과한 채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일을 성급하게 추진하였으며, 특히 리더인 김옥균은 작전을 지휘, 수행하는 데 있어서 유능한 참모를 두지 못한 점이 패인이었다고 분석하였다. 이에 대한 이론적 근거로 저자는 『주역』의 다음 말을 상기시키고 있다. “용이 때에 이르지 않았다면 성급히 뜻을 펴지 말고, 용이 때가 왔을 때는 큰 조력자를 만나야 하며, 용이 하늘을 나를 때도 이 역시 큰 조력자를 만나야 한다(潛龍勿用, 見龍在田 利見大人, 飛龍在天 利見大人).” 레닌의 러시아 혁명은 냉철한 작전 참모 레온 트르츠키,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은 명 지휘관 체 게바라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며, 호치민의 베트남전도 보구엔 지압 같은 명장이 있었기 때문에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그러나 무사가 아닌 문사로서의 천재인 김옥균은 무릇 천재들이 범하기 쉬운 독단적인 상황인식과 매사를 자기 식대로 유리하게 판단하는 낙관론의 함정에 빠져 ‘큰일’을 그르치고 말았다. 그런 점에서 김옥균은 정치적 이상주의자이며 혁명적 로맨티스트였지만 전술적 리얼리스트가 되지는 못하였다. 인간적으로는 다재다능하고 흡인력이 강한 사나이였지만, 위와 겉은 약점들이 혁명가로서 그의 한계요,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특히 작전 수행에서 별 도움도 되지 못한 소수 일본 병력지원 요청과 청국군 개입의 단초를 제공함으로써 외세의존에 따른 후유증과 후세의 일부 부정적인 평가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실패로 끝났지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현실의 모순을 혁파하려는 젊은 엘리트들의 모험정신은 ‘행동하는 지성’의 선례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하다.

저자는 왜 이 시대에 김옥균을 다시 이야기하는가? 김옥균은 임오군란을 통해서 경험한 바와 같이 외세의존이 후에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충분히 알았음에도 그 자신도 그런 우행을 답습하였다. 그리고 그런 우행을 그 뒤 조선 당국자들도 갑오동학농민전쟁 때 또다시 반복하였으며, 분단시대의 남한과 북한도 그때와 다를 바 없다. 포스트 김정일 체제 이후 한반도에서의 정세변화를 예측하기 어려운 예민한 시점에서 남북관계는 어떤 패러다임으로 개선되어야 하며, 21세기 ‘조선책략’은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인가? 남북은 역사적 아픔을 거울로 삼아 상호간 명분도 실리도 없는 기 싸움을 버리고 낡은 이대올로기의 미망에서 벗어나 대승적 차원에서 화해와 협력체제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남쪽의 한국은 소득의 양극화로 더욱 심화되고 있는 계층 간의 갈등구조를 최소화하고 분열된 국론을 하나로 결집하여 북한에 대한 포용정책을 복원, 상호 소모적인 대결구도를 조속히 탈피해야 한다. 그것만이 외세의존의 폐단을 줄이고 민족의 동질성과 자주권을 회복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냉엄한 국제질서에서 볼 때 외교에서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 “한 겨울의 얼음 석자가 하루 사이에 굳어진 것은 아니다(氷凍三尺 非一日之寒)”라는 말처럼 한국과 미국의 관계, 북한과 중국의 관계가 단기간에 이렇게 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지금까지의 대미 우호관계를 견고히 하되, 초강대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중국에 대해서는 물론 인접 러시아에 대해서도 실리적이고도 세련된 등거리 외교전략을 강구해 나가야 할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점들이 김옥균과 그 시대를 타산지석과 반면교사로 삼고 김옥균을 다시 이야기하는 이유의 하나라고 강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