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한국근대사 연구 (책소개)/1.한국근대사

조선 최초의 근대식 병원 제중원

동방박사님 2022. 7. 27.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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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조선 최초의 근대식 병원, '제중원'
'제중원'을 조명한다!


프랑스의 저명한 사상가 푸코는 근대를 규율 권력이 사회 전반으로 확장되는 시기라고 밝힌다. 푸코가 대표적인 기관으로 꼽은 것이 학교, 군대 그리고 '병원'이었다. 비록 외세에 의해 강압적으로 근대로 전환되기는 했지만, 우리 사회가 근대로 전환하면서 생긴 것이 '병원'이다. 푸코의 논지처럼 병원을 감시와 훈육의 기제로 볼 수 있겠지만 당시 병원은 발전된 서양 의술을 사회 전반에 전파하는 등의 긍정적인 역할도 수행했다.

『제중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제중원의 역사를 탐구한 저술이다. 그간 서양의술이 한국에 전파되는 과정에 깊은 관심을 표명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제중원의 모습을 재구성한다. 책은 연대기적 서술을 채택하여 제중원의 설립에서부터 알렌과 헤론 시기의 제중원, 에비슨 시기의 제중원을 차례로 탐구한다.

 

목차

머리말 조선 최초의 근대식 병원 제중원의 탄생

제1장 서양 의학과의 접촉
조선의 전통적인 의료 체계
국교확대 이전 서양의학과의 접촉
국교확대와 서양의학에 대한 관심 고조
미국의 해외 기독교 전도

제2장 제중원의 설립
알렌의 입국과 갑신정변
병원 설립안 제출과 제중원의 개원
재동 제중원의 규모와 의학적 기능

제3장 알렌과 헤론 시기의 제중원
진료활동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의학교육
제중원의 주사와 재정
선교사
전도사업
제중원의 이전

제4장 에비슨 시기의 제중원
빈턴 시기의 제중원
에비슨 입국
제중원의 선교부 이관
진료활동
에비슨에 의한 의학교육 재개
진료활동과 운영
전도사업
세브란스 병원으로의 도약
제중원 대지 및 건물의 반환

맺음말

부록[표]
제중원과 관련된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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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 : 박형우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모교에서 인체해부학(발생학)을 전공하여 1985년 의학박사의 학위를 취득하였다. 1992년 4월부터 2년 6개월 동안 미국 워싱턴 주 시애틀의 워싱턴 대학교 소아과학교실(Dr. Thomas H. Shepard)에서 발생학과 기형학 분야의 연수를 받았고, 관련 외국 전문 학술지에 다수의 연구 논문을 발표하고 귀국하였다. 1996년 2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신설된 의사학과의 초...
 

책 속으로

호러스 앨런만큼 한국 근대사에 큰 영향을 미친 외국인은 드물 것이다. 그는 당초 선교의사로 조선에 왔으나 그보다 훨씬 오랜 기간을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앨런이 조선에서 의사로 일한 기간은 3년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의사로서 조선에 서양 의학을 도입해 정착시킨 공적은 이후 화려했던 외교관으로서의 활동보다도 더 크게 남아 있다.
--- p.33

병원에서 실제로 치료를 시작한 것은 4월 9일이다. 『앨런의 일기』 1885년 4월 10일자에 의하면 “병원은 어제(4월 9일) 개원했다. 외래환자는 20명이었다. 절단수술이 필요한 환자는 아직까지 수술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고 돼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이 ‘공식적으로 개원한 것’은 1885년 4월 10일이었다. 그동안 광혜원의 정확한 개원일에 관해 논란이 있었지만 「제중원 일차년도 보고서」「한국 선교계」 미국 공사의 「미국 국무성에 대한 보고」 등이 기록된 대로 1885년 4월 10일 특별한 의식 없이 개원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
--- p.64

거기서 아기들의 심장과 눈을 잘라내 외국 관리와 선교사들의 요리상에 진미로 바쳐진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병원 부근에는 커다란 소요가 있었다. 자기 아이를 데리고 가던 한 사람은 아기를 훔쳐가는 것으로 오인 받아 아무런 죄 없이 죽음을 당했다. 성난 군중들은 병원을 에워쌌다. 나의 가마꾼들은 나를 다시 병원에 데려다주기만 하면 죽게 될 것이라고 협박받았다. 내가 다음날 말을 타고 병원에 가겠다고 우긴 것이 아주 어리석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동양은 나에게 아주 낯선 곳이었다. 최소한 경험 면에서 볼 때도 나는 무척 어렸었다. 언더우즈는 나를 혼자 가게 내버려둘 수 없다 하여 나와 동행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다. 아마 우리 가마꾼들이 우리들이 마술을 부린다는 이야기를 퍼뜨려, 그들은 우리와 싸우는 것이 아주 위험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 p.211
 

출판사 리뷰

“내가 드라마 「제중원」을 집필할 때 제일 먼저 펼쳐본 책이고 가장 많이 참고한 책이다.”
-이기원(드라마 「제중원」작가)

긴박했던 갑신정변의 와중에
민비의 조카인 민영익은 전신에 칼을 맞고 쓰러졌는데…….


조선 최초의 근대식 병원 제중원은 1884년 12월 4일 저녁 우정국 개설 축하 만찬에서 벌어진 갑신정변의 와중에 탄생하게 된다.
당시 급진개화파였던 우정국 총판 홍영식, 금릉위,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등이 개화 정책 추진에 방해가 된다고 여긴 온건개화파 인사들을 제거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민비의 조카였던 민영익이 앞뜰에 나갔다가 전신에 자상을 입고 피투성이가 된 채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주조선 미국 공사 푸트와 조선해관 총세무사 파울 묄렌도르프가 민영익을 응급 치료했다. 묄렌도르프는 사태가 위급함을 느끼고 집으로 옮겼다.

조선 최고의 한의사 13명이 모여 민영익을 치료하기 위해 애썼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미국 공사 푸트는 조선 최초의 선교 의사 앨런을 급히 불렀다. 앨런은 밤 12시가 넘어서 묄렌도르프의 집에 도착했다. 당시의 긴박했던 순간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앨런도 환자를 살려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모든 걸 하나님께 맡기고 치료를 시작했다. 제일 먼저 찢어진 머리를 명주실로 봉합하고 다른 부위의 상처는 소독하고 붕대를 감았다. 그는 모두 27군데를 꿰매고 한 군데는 혈관을 경색시켜 잡아매고 심을 넣어 반창고를 붙인 다음 상처 난 곳마다 거즈와 붕대를 감았다. 이전까지 조선에서 이루어지던 그 어떤 한방 치료와도 구별되는 전혀 다른 형태의 의술이었다. 결국 앨런은 민영익을 3개월 정도 치료해서 완쾌시켰다.

앨런의 제안으로 조선 정부 근대식 병원을 설립하다

앨런은 민영익을 치료하면서 왕실과 친하게 지내게 됐다. 조선 사람들은 서양 의학에 관심이 많았다. 앨런은 조선 정부에 서양 의학을 시술하면 병원 설립을 건의했다. 그렇게 해서 갑신정변의 주모자로 처형당한 홍영식의 저택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 건물로 내정됐다. 1885년 4월 10일 개원했다. 고종은 4월 12일 광혜원이란 공식 명칭을 하사했다. 널리 은혜를 베푸는 집이란 뜻이다. 광혜원의 개원은 한국 근대사의 중요한 한 쪽이다. 또한 의학사, 교회사, 근대 교육사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 사건이었다.

광혜원은 4월 12일부터 26일까지 2주 동안 사용됐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광혜원은 제중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제중원은 사람을 구제하는 집이란 뜻이다. 제중원은 개원 후 1년 동안 1년 동안 발진티푸스를 포함한 전염성 질병에 걸린 외래 환자 19명을 치료했고 사실열에 시달리는 713명을 포함해 말라리아 환자 1,061명을 치료했다.

아기들의 심장과 눈을 잘라서 요리를 한다는 소문이 나다
제중원을 찾는 환자들도 많았고 고종의 신임도 컸다. 하지만 일반 시민 모두가 우호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반감의 대표적인 예로 ‘영아소동’이 흔히 거론된다.
영아소동은 1888년 6월 10일 서울에서 표면화돼 지방으로 확산됐다. 외국인 선교사들이 어린아이들을 납치해 삶아먹고 눈은 빼내 약이나 사진 자료로 사용한다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심지어는 어린아이들을 외국으로 보내 노예로 팔고 있다는 것도 있었다. 소문은 민중을 분노시키기에 충분했고 일부 과격한 대중들의 폭력사태로 이어졌다.
조선 정부와 외국 공관들이 적극 나서 조속한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곧 영아소동은 끝났다.

앨런-헤론-에비슨으로 이어지며 한국의학사의 씨앗이 되다

조선 정부는 갑오개혁을 단행하는 와중에 재정 부족으로 제중원의 운영권을 미국 선교부에 완전히 넘긴다. 그로써 마침내 제중원은 민간병원의 성격을 갖게 됐다.
제중원 의사들은 전염병의 구료(救療) 사업에도 관여했다. 1886년 콜레라가 창궐했을 때는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열성적으로 방역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특히 종두 접종에 있어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여성 진료에 있어서도 부녀과를 설립하는 등 활발한 진료활동을 펼쳤다.

1886년 3월 경쟁을 거쳐 학생을 선발하고 제중원 의학당을 개교했다. 이는 우리나라 의학교육의 효시였으며, 교수로는 알렌, 헤론 및 언더우드가 있었다. 이후 에비슨의 지도로 김필순, 홍석후, 홍종은 등 조선인 의학생들이 우리말로 된 의학교과서를 편찬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곳을 통해 배출된 졸업생들에게는 우리나라 최초의 의술 개업 인허장이 수여됐다. 즉 민간 차원에서 이루어진 의학교육에 국가적인 공인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에비슨은 제중원을 여러 교파가 참여하는 연합병원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는 이 일이 선교사들의 결집과 의료사업을 효율적으로 진행시키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는 1900년 뉴욕에서 열린 만국선교대회에 참석해 '의료선교에서의 우의'라는 내용의 강연을 했고 이 연설에 감동한 클리블랜드의 부호 세브란스가 병원 건립기금으로 1만 달러를 희사했다.
그러나 병원 설립은 평양의 선교사들의 반대와 조선정부의 비협조 때문에 순탄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1903년 말에는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건축자재 값이 폭등해 시공자가 계약을 포기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세브란스가 추가 비용을 기꺼이 부담하면서 문제는 해결되었고, 마침내 조선 최초의 현대식 종합병원이 문을 열었다. 병원 이름은 기증자 이름을 따서 '세브란스기념병원'으로 정해졌고 정식 개원식은 그 해 11월 16일 열렸다. 병원 이름은 바뀌었지만 민중들은 여전히 이 병원을 제중원이라고 불렀다. 건물과 위치가 바뀌었어도 제중원의 역할과 성격은 세브란스병원으로 계승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