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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칼 바르트의 『로마서』가 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책, 러시아 대문호의 문학과 신학이 하나로 융해되는 거대한 용광로, 고통과 용서와 희망의 변증법을 치열한 언어로 짚어낸 현대신학의 고전.
1921년 스위스의 목회신학자 투르나이젠은 신과 인간의 경계를 지우려는 신학이 야기한 위기를 극복할 가능성을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속에서 찾았다. 이 저작은 당시 독일어권 신학에서 아직 낯선 이름이었던 도스토옙스키를 발견케 했으며, 칼 바르트의 『로마서』가 타오르게 하는 불쏘시개가 되었다. 이 책의 메시지는 『로마서』 제2판의 중요한 갈피마다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또한 『로마서』의 방대한 사유와 해석이 이 얇은 책에 오롯이 담겨 있다.
인간의 종교심·문화·역사·윤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으로부터 시작하는 신학, 죄와 용서의 긴장을 잃지 않는 신학을 통해 지옥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진실된 위로를 전하며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커다란 울림을 전한다. 도스토옙스키를 읽었던 독자라면 깊이 있는 신학적 관점에서 작품을 재해석하는 재미를 느낄 것이고, 소설을 읽지 않았던 독자라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핵심부터 맛보게 될 것이다.
1921년 스위스의 목회신학자 투르나이젠은 신과 인간의 경계를 지우려는 신학이 야기한 위기를 극복할 가능성을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속에서 찾았다. 이 저작은 당시 독일어권 신학에서 아직 낯선 이름이었던 도스토옙스키를 발견케 했으며, 칼 바르트의 『로마서』가 타오르게 하는 불쏘시개가 되었다. 이 책의 메시지는 『로마서』 제2판의 중요한 갈피마다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또한 『로마서』의 방대한 사유와 해석이 이 얇은 책에 오롯이 담겨 있다.
인간의 종교심·문화·역사·윤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으로부터 시작하는 신학, 죄와 용서의 긴장을 잃지 않는 신학을 통해 지옥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진실된 위로를 전하며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커다란 울림을 전한다. 도스토옙스키를 읽었던 독자라면 깊이 있는 신학적 관점에서 작품을 재해석하는 재미를 느낄 것이고, 소설을 읽지 않았던 독자라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핵심부터 맛보게 될 것이다.
목차
제1장 인간이란 무엇인가
제2장 도스토옙스키의 사람들
제3장 도스토옙스키의 관점
제4장 이반 카라마조프, 대심문관, 그리고 악마
제5장 하나님을 아는 지식
* 옮긴이의 글
* 해제
* 투르나이젠 연보
제2장 도스토옙스키의 사람들
제3장 도스토옙스키의 관점
제4장 이반 카라마조프, 대심문관, 그리고 악마
제5장 하나님을 아는 지식
* 옮긴이의 글
* 해제
* 투르나이젠 연보
책 속으로
도스토옙스키가 그려낸 인물들은 하나같이 질문을 던지는 존재로 묘사된다. 그들은 모두 자기 자신 너머의 어떤 것을 가리키는 존재다.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격정 속에서, 난마처럼 뒤엉킨 생각 속에서, 치열한 대화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거대한 것, 멀고도 가까운 것, 죽음 너머에 있지만 죽음 이편에 있는 그것에 사로잡힌 존재다. 하지만 이 점에서 그들은?본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바로 그것을 전하는 존재다. 또한 목숨을 걸고 그것을 증언하는 사람이며, 그것에 사로잡힌 채 그것을 가리켜 보이는 존재다. 그들은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있으나 스스로 답을 준다. 스스로 찾아 헤매고 있으나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 헤맨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위대한 것을 지시하고 암시하면서, 바로 그것이 현존한다는 사실의 증거이자 표징이 된다. _68~69쪽
우리는 그런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은 것이다.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극단적인 인물들, 언제라도 하늘로 솟구치거나 지옥으로 추락하는 존재들, 허황된 형이상학적 고민에 사로잡혀 휘청거리며 괴로워하는 인간들과 우리는 완전히 다르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 어쩌면 바로 그 양극성이야말로 도스토옙스키 인간관의 총체적인 의미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려 섞인 눈빛으로 도스토옙스키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그의 작품에서 드러난 비인간적이고 탈속적인 특성 때문에 싫어하기도 하지만,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특성 때문에 싫어하기도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 둘이 동전의 양면과 같기 때문이다. _70~71쪽
미시킨 공작은 왜 백치 취급을 받는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세계관과 인생관, 인간의 모든 지혜라는 것이 결국에는 하나님에 대한 질문을 (질문으로써!) 회피하려는 시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백치는 그 질문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한다. 이것이야말로 백치의 신적인 어리석음이다. _83쪽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겠어? 그건 나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일이야. 나는 고작해야 이 세상의 유클리드적인 지성을 가진 거야. 어떻게 인간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에 대해 판단을 내릴 수 있겠어?” 이것이 무신론자 이반의 질문이다. 참된 하나님에 대해 무언가 말한다고 할 때, 이 무신론자의 질문보다 강력하고 진실한 말이 가능할까? … 이러한 무신론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무신론이 공격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두 번째 시험에 넘어가 버린) 교회다. 손가락으로 하나님을 가리키고는 있으되 인생의 불가사의함에 대한 질문을 잠재워 버리는 교회다. 그 불가사의함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음으로써 하나님을 증언한다. 이반과 같은 무신론자는 열정적으로 거짓 신을 부정하는데, 이로써 참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그는 하나님과 그분의 영원한 세계가 인간의 유한한 생각으로 인해 “유클리드적인 지성, 이 세상의 지성”으로 파악 가능한 신으로 전락하는 것에 저항한다. 그런 신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인생의 불가사의함을 풀어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증거물 혹은 얄팍한 위안에 불과하다. 인간은 스스로를 속여가면서 그 불가사의함을 외면하려고 한다. _108~109쪽
톨스토이의 경우 이런 장면은 거의 대부분 인간이 새로운 인생으로 진입하는 데 필요한 마지막 단계로,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최고의 위업이 달성되는 곳이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다르다. 치열한 몸부림은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안간힘을 쓰지는 않는다. “회심”이라 부를 만한 일이 일어나기는 하지만 아주 자유롭고 세상적이고 긍정적인 방식으로 일어난다. 이는 복음서에 나오는 세리와 죄인의 “회심”을 떠올리게 한다. 반면 톨스토이의 작품에서는 필연적으로 경건주의적인 참회의 노력을 떠올리게 된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도 그런 결단과 전환의 순간이 있지만 그것이 회심자와 비회심자의 구분,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의 구분, 하나님의 자녀와 세상의 자녀로의 구분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_145~146쪽
그 변화는 어디에서도 목적이나 의도대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을 원하거나 요구할 수도 없다. 그저 길가에 피어 있는 꽃처럼 가만히 서 있다. 게다가 그 길은 특별한 성인이 걸어가는 길이 아니다. 애쓰며 노력하는 사람의 길도 아니다. 누가 봐도 이 세상의 자녀인 이들, 심지어 죄인과 창녀와 살인자, 불안하고 절망적인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 언저리에서 피어난다. 용서의 나라로 인도하는 길은 의인의 길이 아니라 죄인의 길이기 때문이다. _147~148쪽
우리는 도스토옙스키의 결백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의 사상에서 이렇듯 엄청나게 돌출되어 있는 비정상적인 모습도 고스란히 그의 것이다. 우리가 인정하고 싶은 것은, 도스토옙스키 스스로가 모든 인간 안에 있는 반항적인 요소를 아주 많이 지닌 채로 살았으며 그것을 그토록 탁월하게 드러내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도스토옙스키 본인이 자신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문제적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성자가 아니다. 금욕주의자도 아니다. 고상한 사람도 아니고 오히려 악마적인 영혼이다. 그는 톨스토이가 아니다. 도스토옙스키다. 그는 이 세상의 이름을 가지고 있고 이 세상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는 인간으로서 우리 앞에 서 있다. 그 역시 자신의 인간성을 통한 굴절 속에서만, 오로지 간접적인 방식으로만 우리의 도스토옙스키이다._155~156쪽
결국 모두의 논문과 무관하지만, 또 동시에 모두에게 도움이 될 만한 투르나이젠의 《도스토옙스키》를 읽기로 했다. 박사과정생의 고된 일상에 부담이 되지 않는 얇은 분량이 모두의 동의를 끌어내는 데 무엇보다도 크게 기여했다. 그런데 별로 기대하지 않고 시작된 책 읽기 모임이 진행될수록 모두가 점점 투르나이젠에게 설득되어갔다. 결국 모임을 마무리할 때, 한 친구가 무릎을 탁 치며 “그래, 이게 바로 신학이지!”라고 외쳤다. 정교하고 치밀한 학술적 신학에 지치고 불안한 미래 때문에 중압감에 눌려 있던 젊은 신학도들에게 이 책은 신학이 무엇이고 신학은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감각을 다시 일깨워줬다. _183~184쪽, 해제 중
우리는 그런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은 것이다.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극단적인 인물들, 언제라도 하늘로 솟구치거나 지옥으로 추락하는 존재들, 허황된 형이상학적 고민에 사로잡혀 휘청거리며 괴로워하는 인간들과 우리는 완전히 다르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 어쩌면 바로 그 양극성이야말로 도스토옙스키 인간관의 총체적인 의미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려 섞인 눈빛으로 도스토옙스키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그의 작품에서 드러난 비인간적이고 탈속적인 특성 때문에 싫어하기도 하지만,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특성 때문에 싫어하기도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 둘이 동전의 양면과 같기 때문이다. _70~71쪽
미시킨 공작은 왜 백치 취급을 받는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세계관과 인생관, 인간의 모든 지혜라는 것이 결국에는 하나님에 대한 질문을 (질문으로써!) 회피하려는 시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백치는 그 질문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한다. 이것이야말로 백치의 신적인 어리석음이다. _83쪽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겠어? 그건 나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일이야. 나는 고작해야 이 세상의 유클리드적인 지성을 가진 거야. 어떻게 인간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에 대해 판단을 내릴 수 있겠어?” 이것이 무신론자 이반의 질문이다. 참된 하나님에 대해 무언가 말한다고 할 때, 이 무신론자의 질문보다 강력하고 진실한 말이 가능할까? … 이러한 무신론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무신론이 공격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두 번째 시험에 넘어가 버린) 교회다. 손가락으로 하나님을 가리키고는 있으되 인생의 불가사의함에 대한 질문을 잠재워 버리는 교회다. 그 불가사의함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음으로써 하나님을 증언한다. 이반과 같은 무신론자는 열정적으로 거짓 신을 부정하는데, 이로써 참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그는 하나님과 그분의 영원한 세계가 인간의 유한한 생각으로 인해 “유클리드적인 지성, 이 세상의 지성”으로 파악 가능한 신으로 전락하는 것에 저항한다. 그런 신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인생의 불가사의함을 풀어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증거물 혹은 얄팍한 위안에 불과하다. 인간은 스스로를 속여가면서 그 불가사의함을 외면하려고 한다. _108~109쪽
톨스토이의 경우 이런 장면은 거의 대부분 인간이 새로운 인생으로 진입하는 데 필요한 마지막 단계로,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최고의 위업이 달성되는 곳이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다르다. 치열한 몸부림은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안간힘을 쓰지는 않는다. “회심”이라 부를 만한 일이 일어나기는 하지만 아주 자유롭고 세상적이고 긍정적인 방식으로 일어난다. 이는 복음서에 나오는 세리와 죄인의 “회심”을 떠올리게 한다. 반면 톨스토이의 작품에서는 필연적으로 경건주의적인 참회의 노력을 떠올리게 된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도 그런 결단과 전환의 순간이 있지만 그것이 회심자와 비회심자의 구분,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의 구분, 하나님의 자녀와 세상의 자녀로의 구분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_145~146쪽
그 변화는 어디에서도 목적이나 의도대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을 원하거나 요구할 수도 없다. 그저 길가에 피어 있는 꽃처럼 가만히 서 있다. 게다가 그 길은 특별한 성인이 걸어가는 길이 아니다. 애쓰며 노력하는 사람의 길도 아니다. 누가 봐도 이 세상의 자녀인 이들, 심지어 죄인과 창녀와 살인자, 불안하고 절망적인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 언저리에서 피어난다. 용서의 나라로 인도하는 길은 의인의 길이 아니라 죄인의 길이기 때문이다. _147~148쪽
우리는 도스토옙스키의 결백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의 사상에서 이렇듯 엄청나게 돌출되어 있는 비정상적인 모습도 고스란히 그의 것이다. 우리가 인정하고 싶은 것은, 도스토옙스키 스스로가 모든 인간 안에 있는 반항적인 요소를 아주 많이 지닌 채로 살았으며 그것을 그토록 탁월하게 드러내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도스토옙스키 본인이 자신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문제적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성자가 아니다. 금욕주의자도 아니다. 고상한 사람도 아니고 오히려 악마적인 영혼이다. 그는 톨스토이가 아니다. 도스토옙스키다. 그는 이 세상의 이름을 가지고 있고 이 세상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는 인간으로서 우리 앞에 서 있다. 그 역시 자신의 인간성을 통한 굴절 속에서만, 오로지 간접적인 방식으로만 우리의 도스토옙스키이다._155~156쪽
결국 모두의 논문과 무관하지만, 또 동시에 모두에게 도움이 될 만한 투르나이젠의 《도스토옙스키》를 읽기로 했다. 박사과정생의 고된 일상에 부담이 되지 않는 얇은 분량이 모두의 동의를 끌어내는 데 무엇보다도 크게 기여했다. 그런데 별로 기대하지 않고 시작된 책 읽기 모임이 진행될수록 모두가 점점 투르나이젠에게 설득되어갔다. 결국 모임을 마무리할 때, 한 친구가 무릎을 탁 치며 “그래, 이게 바로 신학이지!”라고 외쳤다. 정교하고 치밀한 학술적 신학에 지치고 불안한 미래 때문에 중압감에 눌려 있던 젊은 신학도들에게 이 책은 신학이 무엇이고 신학은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감각을 다시 일깨워줬다. _183~184쪽, 해제 중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울어라, 위안을 찾지 말고!
죄인·광인·백치만이 볼 수 있는 빛, 절망이라는 구원에 관하여
“투르나이젠의 발견이 없었다면 나는 《로마서》의 초고를 쓸 수 없었을 것이다.” _칼 바르트
칼 바르트의 《로마서》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바로 그 책
도스토옙스키 소설 속에서 찾은 새로운 신학의 가능성
고통과 용서와 희망의 변증법을 치열한 언어로 짚어낸 현대신학의 고전
러시아 대문호의 문학과 신학이 하나로 융해되는 거대한 용광로를 보여주는 투르나이젠의 책 《도스토옙스키, 지옥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위한 신학》이 포이에마에서 출간되었다. 현대신학의 흐름을 바꾸는 데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기여했던 이 책은 1921년 스위스의 목회신학자 투르나이젠이 아라우 대학생 총회에서 발표했던 내용을 정리하여 같은 해에 독일에서 출간한 것이다.
당시 30대 초반의 젊은 목사였던 투르나이젠은 신과 인간의 경계를 지우려는 신학이 야기한 위기를 극복할 가능성을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속에서 찾았다. 이 저작은 당시 독일어권 신학에서 아직 낯선 이름이었던 도스토옙스키를 발견케 했으며, 현대신학의 이정표가 된 칼 바르트의 《로마서》가 타오르게 하는 불쏘시개가 되었다. 이 책의 메시지는 《로마서》 제2판의 중요한 갈피마다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또한 《로마서》의 방대한 사유와 해석이 이 얇은 책에 오롯이 담겨 있다.
인간의 종교심·문화·역사·윤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으로부터 시작하는 신학, 죄와 용서의 긴장을 잃지 않는 신학을 통해 지옥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진실된 위로를 전하며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커다란 울림을 전한다. 도스토옙스키를 읽었던 독자라면 깊이 있는 신학적 관점에서 작품을 재해석하는 재미를 느낄 것이고, 소설을 읽지 않았던 독자라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핵심부터 맛보게 될 것이다.
《죄와 벌》, 《백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속 뒤틀린 인물들의 역설
죄인들의 세상, 어린아이 같은 삶이 주는 자유
문학적인 언어로 쓰인 이 ‘문학-신학’은 쉽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우리를 도스토옙스키라는, 불가사의한 원시의 영역으로 인도한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도스토옙스키 작품에 등장하는 살인자, 창녀, 주정뱅이, 백치, 죽음을 앞둔 사람과 같이 예외적이고 극단적인 인물들을 만나면서 어느새 베일 아래 감추어져 있는, 수수께끼 같은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도스토옙스키 소설의 인물들은 영원에 대한 갈망을 지니고 있으나 평범한 인간에도 미치지 못해 파멸하고, 절망 속에서 고통스러워한다. 하지만 바로 이런 과도한 불완전함 때문에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를 알아차리며, 자신도 모른 채 저 너머에 있는 완전한 무언가를 가리키는 존재가 된다. 이렇게 죄 안에서 자신을 재발견하고 다른 사람들과 ‘죄의 연대’를 이룰 때 죄 안에서, 죄와 더불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이 임한다. 도스토옙스키 소설 속 인물들의 서사와 함께 이루어지는 투르나이젠의 논증을 따라가다 보면 저 멀리서 형형히 비추어 오는 구원의 빛이 보인다.
인간이 지닌 역설성과 복잡성을 이해하는 투르나이젠의 신학은 단순하고 거짓된 희망의 언어로 위로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가 세속적인 만족뿐만 아니라 정신적 실존의 확실함, ‘기적의 하나님’까지도 포기하고 인생의 짐을 진 채 고통 속에 머물러야 함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금욕적인 순교자의 삶이 아니라 인생이 매 순간 보여주는 것에 대해 온전히, 열정적으로 자신을 내던지며 분노와 부끄러움과 환호성으로 대응하는 어린아이 같은 삶을 살 것을 요청한다.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기꺼이 죄인이 되고 어린아이가 되어,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워질 것이다.
20세기 유럽에서 탄생한 ‘우정의 저작’
21세기 한국에서 두 신학자의 우정으로 다시 태어나다
아직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1888~1974)은 현대신학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스위스의 목회신학자이다. 그는 칼 바르트와 절친한 벗이자 신학적 동지로 함께하며 변증법적 신학을 발전시켰는데, 바로 이 책이 바르트와의 우정 속에서 탄생한 저작이다.
20세기 초, 젊은 목사였던 투르나이젠과 바르트는 종교사회주의를 통해 부르주아적인 신학에서 벗어날 일차적인 돌파구를 찾긴 했지만 허물어져가는 옛 세계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줄 변혁적인 사상은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예기치 않게 접하게 된 19세기 러시아인의 글이 이들의 사상적 도약을 가능하게 하는 발판이 되어주었다. 이들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을 비롯하여 루터와 칼뱅, 키르케고르를 읽고 토론하며 이전 세대와 구별되는 신학적 사고를 발전시키게 된다.
투르나이젠은 약 5년간의 연구와 토론과 글쓰기를 거쳐 1921년에 현대신학의 최첨단 주제를 발표하는 스위스 아라우 대학생 총회에서 도스토옙스키에 관한 강연을 한다. 같은 해에 바르트는 《로마서》 2판을 탈고하는데, 서문에서 그는 자신의 새로운 성서 해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상가로 도스토옙스키와 키르케고르를 먼저 언급한다. 1933년에 처음 출간된 영어판의 색인을 기준으로 볼 때 《로마서》에서 언급되는 빈도가 가장 높은 인물은 루터도, 칼뱅도, 키르케고르도 아닌 도스토옙스키이다.
이처럼 20세기에 두 신학자의 우정 속에서 탄생했던 책이 백 년이 지난 지금 한국에서 손성현 목사와 김진혁 교수의 우정을 통해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김진혁 교수는 유학 시절 이 책을 처음 읽은 이후로 그 감동과 깨달음을 한국의 그리스도인도 맛보았으면 하는 마음을 계속 품고 있다가, 때가 무르익었을 때 손성현 목사에게 이 책을 소개했다. 칼 바르트의 《로마서》를 번역하기도 했던 손성현 목사는 이번에 1922년에 출간되었던 독일어판을 소리 내어 읽으며 백 년 전 투르나이젠의 강렬한 문체까지 우리말로 옮겼다. 김진혁 교수는 해제에서 이 저작이 탄생한 개인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을 풍부하게 짚어줌으로써 우리에게는 비교적 낯선 신학자를 우리 앞에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죄인·광인·백치만이 볼 수 있는 빛, 절망이라는 구원에 관하여
“투르나이젠의 발견이 없었다면 나는 《로마서》의 초고를 쓸 수 없었을 것이다.” _칼 바르트
칼 바르트의 《로마서》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바로 그 책
도스토옙스키 소설 속에서 찾은 새로운 신학의 가능성
고통과 용서와 희망의 변증법을 치열한 언어로 짚어낸 현대신학의 고전
러시아 대문호의 문학과 신학이 하나로 융해되는 거대한 용광로를 보여주는 투르나이젠의 책 《도스토옙스키, 지옥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위한 신학》이 포이에마에서 출간되었다. 현대신학의 흐름을 바꾸는 데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기여했던 이 책은 1921년 스위스의 목회신학자 투르나이젠이 아라우 대학생 총회에서 발표했던 내용을 정리하여 같은 해에 독일에서 출간한 것이다.
당시 30대 초반의 젊은 목사였던 투르나이젠은 신과 인간의 경계를 지우려는 신학이 야기한 위기를 극복할 가능성을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속에서 찾았다. 이 저작은 당시 독일어권 신학에서 아직 낯선 이름이었던 도스토옙스키를 발견케 했으며, 현대신학의 이정표가 된 칼 바르트의 《로마서》가 타오르게 하는 불쏘시개가 되었다. 이 책의 메시지는 《로마서》 제2판의 중요한 갈피마다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또한 《로마서》의 방대한 사유와 해석이 이 얇은 책에 오롯이 담겨 있다.
인간의 종교심·문화·역사·윤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으로부터 시작하는 신학, 죄와 용서의 긴장을 잃지 않는 신학을 통해 지옥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진실된 위로를 전하며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커다란 울림을 전한다. 도스토옙스키를 읽었던 독자라면 깊이 있는 신학적 관점에서 작품을 재해석하는 재미를 느낄 것이고, 소설을 읽지 않았던 독자라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핵심부터 맛보게 될 것이다.
《죄와 벌》, 《백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속 뒤틀린 인물들의 역설
죄인들의 세상, 어린아이 같은 삶이 주는 자유
문학적인 언어로 쓰인 이 ‘문학-신학’은 쉽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우리를 도스토옙스키라는, 불가사의한 원시의 영역으로 인도한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도스토옙스키 작품에 등장하는 살인자, 창녀, 주정뱅이, 백치, 죽음을 앞둔 사람과 같이 예외적이고 극단적인 인물들을 만나면서 어느새 베일 아래 감추어져 있는, 수수께끼 같은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도스토옙스키 소설의 인물들은 영원에 대한 갈망을 지니고 있으나 평범한 인간에도 미치지 못해 파멸하고, 절망 속에서 고통스러워한다. 하지만 바로 이런 과도한 불완전함 때문에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를 알아차리며, 자신도 모른 채 저 너머에 있는 완전한 무언가를 가리키는 존재가 된다. 이렇게 죄 안에서 자신을 재발견하고 다른 사람들과 ‘죄의 연대’를 이룰 때 죄 안에서, 죄와 더불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이 임한다. 도스토옙스키 소설 속 인물들의 서사와 함께 이루어지는 투르나이젠의 논증을 따라가다 보면 저 멀리서 형형히 비추어 오는 구원의 빛이 보인다.
인간이 지닌 역설성과 복잡성을 이해하는 투르나이젠의 신학은 단순하고 거짓된 희망의 언어로 위로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가 세속적인 만족뿐만 아니라 정신적 실존의 확실함, ‘기적의 하나님’까지도 포기하고 인생의 짐을 진 채 고통 속에 머물러야 함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금욕적인 순교자의 삶이 아니라 인생이 매 순간 보여주는 것에 대해 온전히, 열정적으로 자신을 내던지며 분노와 부끄러움과 환호성으로 대응하는 어린아이 같은 삶을 살 것을 요청한다.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기꺼이 죄인이 되고 어린아이가 되어,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워질 것이다.
20세기 유럽에서 탄생한 ‘우정의 저작’
21세기 한국에서 두 신학자의 우정으로 다시 태어나다
아직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1888~1974)은 현대신학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스위스의 목회신학자이다. 그는 칼 바르트와 절친한 벗이자 신학적 동지로 함께하며 변증법적 신학을 발전시켰는데, 바로 이 책이 바르트와의 우정 속에서 탄생한 저작이다.
20세기 초, 젊은 목사였던 투르나이젠과 바르트는 종교사회주의를 통해 부르주아적인 신학에서 벗어날 일차적인 돌파구를 찾긴 했지만 허물어져가는 옛 세계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줄 변혁적인 사상은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예기치 않게 접하게 된 19세기 러시아인의 글이 이들의 사상적 도약을 가능하게 하는 발판이 되어주었다. 이들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을 비롯하여 루터와 칼뱅, 키르케고르를 읽고 토론하며 이전 세대와 구별되는 신학적 사고를 발전시키게 된다.
투르나이젠은 약 5년간의 연구와 토론과 글쓰기를 거쳐 1921년에 현대신학의 최첨단 주제를 발표하는 스위스 아라우 대학생 총회에서 도스토옙스키에 관한 강연을 한다. 같은 해에 바르트는 《로마서》 2판을 탈고하는데, 서문에서 그는 자신의 새로운 성서 해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상가로 도스토옙스키와 키르케고르를 먼저 언급한다. 1933년에 처음 출간된 영어판의 색인을 기준으로 볼 때 《로마서》에서 언급되는 빈도가 가장 높은 인물은 루터도, 칼뱅도, 키르케고르도 아닌 도스토옙스키이다.
이처럼 20세기에 두 신학자의 우정 속에서 탄생했던 책이 백 년이 지난 지금 한국에서 손성현 목사와 김진혁 교수의 우정을 통해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김진혁 교수는 유학 시절 이 책을 처음 읽은 이후로 그 감동과 깨달음을 한국의 그리스도인도 맛보았으면 하는 마음을 계속 품고 있다가, 때가 무르익었을 때 손성현 목사에게 이 책을 소개했다. 칼 바르트의 《로마서》를 번역하기도 했던 손성현 목사는 이번에 1922년에 출간되었던 독일어판을 소리 내어 읽으며 백 년 전 투르나이젠의 강렬한 문체까지 우리말로 옮겼다. 김진혁 교수는 해제에서 이 저작이 탄생한 개인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을 풍부하게 짚어줌으로써 우리에게는 비교적 낯선 신학자를 우리 앞에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추천평
이 책은 러시아 대문호의 문학과 신학이 하나로 융해되는 거대한 용광로를 보여준다. 구원에 이르는 고통과 용서와 희망의 변증법을 치열한 언어로 짚어낸 저자의 통찰력이 놀랍다. ‘신의 감각’에 다가선 인간의 모습을 간접적으로나마 그려볼 수 있는 것은 이 책의 독자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다. 원전의 깊이에 번역자의 깊이가 더해진 이 우아한 번역본에 경의를 표한다. _석영중(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
혼란하고 좌절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인간됨의 역설을 끌어안으면서 희망을 품는 법을 가르쳐줬고, 현대신학의 흐름을 바꾸는 데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기여했던 책이 우리에게 선물처럼 주어졌다. 이 책을 통해 많은 이가 깨달음과 영감을 얻기를 바라지만, 그 전에 한 위대한 러시아 작가를 기가 막히게 해석해낸 창조적인 작품을 읽는 즐거움부터 만끽하기 바란다. _김진혁(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조교수)
나를 도스토옙스키라는 길로 처음 인도한 사람은 투르나이젠이다. 그의 발견이 없었다면 나는 《로마서》의 초고를 쓸 수 없었을 것이다. _칼 바르트
혼란하고 좌절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인간됨의 역설을 끌어안으면서 희망을 품는 법을 가르쳐줬고, 현대신학의 흐름을 바꾸는 데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기여했던 책이 우리에게 선물처럼 주어졌다. 이 책을 통해 많은 이가 깨달음과 영감을 얻기를 바라지만, 그 전에 한 위대한 러시아 작가를 기가 막히게 해석해낸 창조적인 작품을 읽는 즐거움부터 만끽하기 바란다. _김진혁(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조교수)
나를 도스토옙스키라는 길로 처음 인도한 사람은 투르나이젠이다. 그의 발견이 없었다면 나는 《로마서》의 초고를 쓸 수 없었을 것이다. _칼 바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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