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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유대인 바로보기』는 1세기 예수님의 승천 이후 20세기 현대 이스라엘 국가의 건국까지 ‘디아스포라’로 불리는 2000년의 역사적 간격을 메우려는 노력에서 시작되었다. 유대인은 아브라함 이후 4000년간 민족의 정체성을 수호하며 세계 역사에 타의 추종을 불허할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그런데 이런 유대인들에 대해서 우리는 주변에서 과장된 신화, 근거 없는 비난, 흥미 위주의 단편 정보들만을 접하곤 했다. 저자는 10년의 세월 동안 이스라엘에서 사역자로 살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유대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진지한 고민에서 출발한 입체적이고 종합적인 정보들을 전하고 있다.
목차
프롤로그/ 지난 2000년 동안 유대인은 어떻게 살았을까?
CHAPTER.1. 유대인들에게는 관용을 보인 로마가 왜 기독교는 잔인하게 핍박했을까?
-유대교와 기독교의 ‘마이웨이’ 선언
CHAPTER.2. 사도 바울은 정말 이방인의 사도였는가?
-로마제국의 디아스포라 유대인
CHAPTER.3.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왜 기독교를 공인했을까?
-나사렛파 유대인이 거대한 로마를 집어삼키다
CHAPTER.4. 중세 암흑시대에서 유대인들은 어떻게 황금기를 누릴 수 있었을까?
-봉건제도의 취약점을 해결해 준 사회적 ‘윤활유’
CHAPTER.5. 십자군 운동이 왜 유대인 공동체를 파멸로 몰아갔을까?
-십자군 운동으로 기독교인과 유대인의 희비가 교차되다
CHAPTER.6. 루터는 왜 반유대주의자가 되었을까?
-유대인, 종교개혁 시대의 캐스팅보드
CHAPTER.7. 흑사병은 유대인들이 우물에 병균을 타서 퍼진 것일까?
-중세의 반유대주의 악령들
CHAPTER.8. 유대인은 악랄한 고리대금업자였나?
-근대 자본주의 탄생과 유대인
CHAPTER.9. 유대인과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스페인에서 유대인의 추방과 신대륙 발견
CHAPTER.10.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탄생은 유대인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네덜란드와 영국의 부상
CHAPTER.11. 프랑스 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대인들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프랑스 대혁명, 나폴레옹 그리고 유대인
CHAPTER.12. 헤르쩰은 왜 플레이보이에서 시온주의자가 되었나?
-드레퓌스 사건과 현대 시오니즘의 탄생
CHAPTER.13. 소련의 유대인들은 왜 공산주의자가 되었을까?
-로마노프 왕조의 전제정치, 트로츠키, 볼셰비키 혁명
CHAPTER.14. 미국은 왜 전 세계 여론과 달리 이스라엘을 계속 지지할까?
-미국의 유대인
CHAPTER.15. 영국은 왜 1차 대전 중 이스라엘 건국 지지 선언을 했을까?
-최초의 이스라엘 건국 지지 선언, 발포어 선언
CHAPTER.16. 히틀러의 600만 유대인 학살은 기독교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2차 대전과 유대인
에필로그/ 유대 민족이 주께 돌아올 그날을 기다리며
참고문헌
CHAPTER.1. 유대인들에게는 관용을 보인 로마가 왜 기독교는 잔인하게 핍박했을까?
-유대교와 기독교의 ‘마이웨이’ 선언
CHAPTER.2. 사도 바울은 정말 이방인의 사도였는가?
-로마제국의 디아스포라 유대인
CHAPTER.3.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왜 기독교를 공인했을까?
-나사렛파 유대인이 거대한 로마를 집어삼키다
CHAPTER.4. 중세 암흑시대에서 유대인들은 어떻게 황금기를 누릴 수 있었을까?
-봉건제도의 취약점을 해결해 준 사회적 ‘윤활유’
CHAPTER.5. 십자군 운동이 왜 유대인 공동체를 파멸로 몰아갔을까?
-십자군 운동으로 기독교인과 유대인의 희비가 교차되다
CHAPTER.6. 루터는 왜 반유대주의자가 되었을까?
-유대인, 종교개혁 시대의 캐스팅보드
CHAPTER.7. 흑사병은 유대인들이 우물에 병균을 타서 퍼진 것일까?
-중세의 반유대주의 악령들
CHAPTER.8. 유대인은 악랄한 고리대금업자였나?
-근대 자본주의 탄생과 유대인
CHAPTER.9. 유대인과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스페인에서 유대인의 추방과 신대륙 발견
CHAPTER.10.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탄생은 유대인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네덜란드와 영국의 부상
CHAPTER.11. 프랑스 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대인들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프랑스 대혁명, 나폴레옹 그리고 유대인
CHAPTER.12. 헤르쩰은 왜 플레이보이에서 시온주의자가 되었나?
-드레퓌스 사건과 현대 시오니즘의 탄생
CHAPTER.13. 소련의 유대인들은 왜 공산주의자가 되었을까?
-로마노프 왕조의 전제정치, 트로츠키, 볼셰비키 혁명
CHAPTER.14. 미국은 왜 전 세계 여론과 달리 이스라엘을 계속 지지할까?
-미국의 유대인
CHAPTER.15. 영국은 왜 1차 대전 중 이스라엘 건국 지지 선언을 했을까?
-최초의 이스라엘 건국 지지 선언, 발포어 선언
CHAPTER.16. 히틀러의 600만 유대인 학살은 기독교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2차 대전과 유대인
에필로그/ 유대 민족이 주께 돌아올 그날을 기다리며
참고문헌
책 속으로
역사적 예수 = 유대인 예수
2000년 전 이 땅에 오신 역사적 예수는 분명 ‘유대인 예수’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그분은 이방 땅에 거한 디아스포라 유대인도 아니었고, 헬라 문화에 젖은 헬라파 유대인은 더욱 아니었다. 자기 땅에서 태어나 조상들의 관습을 좇아 살아간 순수 히브리파 유대인이었다.
그분은 나신 지 8일 만에 할례를 했으며 안식일마다 회당에 갔고 명절에는 가족과 함께 어김없이 예루살렘 성전을 올라가는 순례의 길에 동참했다. 그분은 온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육신으로는 유대인으로 나셨고 유대인으로 죽으셨다.
유럽의 교회사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교회가 예수님의 골육친척인 유대 민족을 핍박한 ‘역사의 아이러니’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지만, 이들이 기록한 공식적인 교회사 책에는 이런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역사는 ‘승자의 주관적인 기록’이라고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 유대인 방랑의 역사는 ‘예수’에 대한 철저한 적대감을 그 기저에 깔고 있다. 하지만 이를 역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이 유대 민족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로 자리 잡고 있는가를 반증하는 현상이기도 하다. ‘유대인 예수’의 존재는 유대 민족의 독특한 역사의 수수께끼를 풀어 주는 열쇠요 종착점일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반유대 감정을 조장하기 위함이 아닌, 유대인과 온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대속적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 pp.14-16
로마는 왜 기독교를 박해했는가?
기독교가 유대교의 울타리 안에 있던 초기에는 로마 당국자들도 기독교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로마제국은 유대인의 독특하고 오래된 신앙을 이미 인정하고 있던 터라 그 분파에 불과한 기독교에까지 관심을 보일 만한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로마 당국이 보인 기독교에 대한 소극적인 관용은 사도들을 통한 초기 기독교 전파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인들의 활동은 로마 당국의 레이더 망에 수시로 포착되었고, 결국 국가와 본격적으로 충돌하기에 이르렀다. 유대교와 달리 기독교만 불쑥 튀어 나와 국가와 충돌하게 된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기독교인의 급작스런 증가로 인한 존재감의 부각이다. 유대인과 달리 기독교인들은 이방인 선교에 열정이 많았고, 다양한 지역에서 상당한 개종자들을 얻으면서 존재감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유대교는 유대 민족의 한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아 민족 종교로서의 특수성을 인정받았지만, 기독교는 이방인 세계로 급속히 전파되면서 ‘국적 불명’의 종교로 인식된 것이다.
둘째, 로마에 대항한 유대인의 봉기로 인한 불똥이 기독교인들에게까지 튄 것이다. 유대 땅에서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유대인들의 봉기는 진압되었지만 너무 시간을 오래 끈 탓에 세계 최강으로 알려진 로마군의 자존심은 상당히 구겨졌다. 유대 민족주의가 확산되면서 로마제국 곳곳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었다. 이런 살벌한 분위기에서 예수를 메시아로 전하는 기독교인들은 또 다른 반역을 선동하는 무리로 의심받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추종하는 예수가 공식적으로는 로마법상 십자가 처형을 당한 반역자였기 때문이다.
셋째, 유대교에서 분리된 독자적인 기독교가 로마인들에게 부도덕하고 경건하지 못한 사교 집단으로 보인 것이다. 이것은 주로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는 용어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신자들이 서로를 향해 ‘형제, 자매’로 부르는 초대교회 관습은 로마인들에게 기독교인들이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당시 이집트에서 이런 호칭은 성관계 파트너를 부를 때 사용되었다. 예배 후 ‘평안의 키스’를 나눈다는 표현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예수의 몸과 피를 마신다’는 애찬식의 표현은 말 그대로 기독교인들이 식인 풍습이 있는 것으로 와전되었다. --- pp.44-45
유대인들은 왜 저항하지 않았을까?
나치의 야만적인 조치들 앞에서도 유대인들이 저항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들은 왜 마지막까지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가스실로 들어간 것일까?
첫째, 유대인들은 2000년 가까운 방랑 세월의 경험을 통해 저항이 자신들의 생명을 구하기보다는 오히려 생명을 빼앗는 결과를 초래했음을 잘 알았다. 유대인들의 역사, 신학, 민간전승, 어휘 등 그 어디에도 적들과 협상하고 값을 지불하며 청원하는 법만을 가르쳤지 싸우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다.
둘째, 유대인들도 다른 세계 시민들처럼 ‘최종 해결’이란 것이 있다고 믿지 않았다. 1942년 초 두 명의 유대인들이 천신만고 끝에 수용소에서 탈출해 수용소 내부의 실상을 알렸지만, 단지 종교적 체험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 것으로 무시되었다. 유대인들뫀 지금까지 ‘소수’ 또는 ‘다수’의 생명이 아닌 ‘전부’를 요구하는 대적자를 결코 대면한 적도, 상상한 적도 없었다. 상상 속에나 나올 법한 악마가 인간의 모습을 취할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셋째, 당시 유럽에 남아 희생된 유대인들의 성향 때문이다. 유대인들 가운데 야망이 있는 자들은 미국으로 이주했고, 가장 정력적이고 진취적이며 호전적인 유대인들은 이미 황무지와 같은 팔레스타인으로 향했다. 유럽 내 유대인들 가운데 최고의 인물과 두뇌의 유출은 이처럼 전쟁 전까지 지속되었다. 유대인 가운데 호전적인 무장 그룹이 있었지만 이들 역시 자신들에게 기회를 줄 유대 국가 팔레스타인에서 싸우길 원했지 소망 없는 유럽에서 싸우기를 원치 않았다. 결국 유럽 대륙에는 힘없고 가난한 유대인들만 남게 된 것이다.
넷째, 독일인들은 이런 유대인들의 사회학과 심리학을 냉혹하게 이용했다. 남은 유대인들의 지도층은 소심하고 고분고분했으며 심지어 아첨하는 경향까지 있었다. 수용소 이주 명령도 이들의 지도 아래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졌다. 아인자츠 부대는 ‘가스실’로 들어가는 동안 수용소 내 오케스트라가 음악을 연주하도록 했다. 이들은 열차를 타고 오랜 여행 후 수용소에 도착했고 가스실 입구는 ‘샤워실’이란 팻말이 적혀 있었으며 저마다 비누와 수건을 받았다. 그런 상황에서 누가 감히 그런 끔찍한 일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 pp.245-246
유대인들은 왜 예수님을 믿지 않을까?
이스라엘의 사역자로 있으면서 많은 분들로부터 받는 질문이 있다.
“유대인들은 왜 예수님을 믿지 않지요?”
나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 역시 요셉의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었다. 요셉과 형제들의 극적인 만남의 순간, 요셉은 형들을 즉시 알아보았지만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요셉과 달리 형들이 요셉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이것에 대한 해답이 오늘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유와 동일하다고 믿는다.
“형들이 왜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라고 물으면 다양한 대답이 나온다.
개중에 가장 많은 대답이 “요셉이 이집트 총리가 되었을 것이라고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어서……”이다. 한번은 독일에서 세미나를 하다가 상당히 그럴듯한 이유를 들었다. 형들은 이집트 총리 앞에 불려나가 감히 얼굴을 들지 못했고 그래서 요셉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일리가 있지만 정확한 대답은 아니다. 형들이 요셉을 한눈에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요셉의 모습이 유대인이 아닌 이집트인, 즉 이방인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형들 앞에 서 있는 요셉은 완전한 이집트인이었다. 의상도 헤어스타일도 완벽한 이집트인이었다.
오늘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도 동일하다. 1세기에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땅에서 살다 가신 예수님은 분명 ‘유대인 예수’였지만, 이 예수가 4세기 로마로부터 시작해 유럽, 영국, 미국, 한국을 거치면서 완전히 ‘이방인 예수’가 된 것이다.
유대인들이 어떻게 예수님께 돌아올 수 있을까?
그러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그분께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가? 간단치 않은 이 질문에 대한 해답 역시 요셉의 이야기 속에숨어 있다. 처음에는 요셉의 형제들이 자신의 동생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된 것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결국 요셉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그들은 뜨겁게 상봉했고 이후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이산가족 상봉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는가? 바로 요셉 자신이 형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은?
그러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 우리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는 날이 속히 오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것처럼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 즉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이 부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요셉과 형들 사이에 일어난 극적인 이산가족 상봉의 이면에는 이집트인의 적극적인 ‘중재와 사랑’이 있었다는 것이다. 요셉을 통해 기근으로부터 생명을 건짐 받은 이집트인들은 요셉과 형들의 관계 회복을 위해 중요한 중재자가 되었다. 예수님을 통해 영원한 심판에서 건짐 받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역시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관계 회복을 위해 뜨거운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인 중재를 해야 할 것이다.
2000년 전 이 땅에 오신 역사적 예수는 분명 ‘유대인 예수’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그분은 이방 땅에 거한 디아스포라 유대인도 아니었고, 헬라 문화에 젖은 헬라파 유대인은 더욱 아니었다. 자기 땅에서 태어나 조상들의 관습을 좇아 살아간 순수 히브리파 유대인이었다.
그분은 나신 지 8일 만에 할례를 했으며 안식일마다 회당에 갔고 명절에는 가족과 함께 어김없이 예루살렘 성전을 올라가는 순례의 길에 동참했다. 그분은 온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육신으로는 유대인으로 나셨고 유대인으로 죽으셨다.
유럽의 교회사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교회가 예수님의 골육친척인 유대 민족을 핍박한 ‘역사의 아이러니’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지만, 이들이 기록한 공식적인 교회사 책에는 이런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역사는 ‘승자의 주관적인 기록’이라고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 유대인 방랑의 역사는 ‘예수’에 대한 철저한 적대감을 그 기저에 깔고 있다. 하지만 이를 역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이 유대 민족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로 자리 잡고 있는가를 반증하는 현상이기도 하다. ‘유대인 예수’의 존재는 유대 민족의 독특한 역사의 수수께끼를 풀어 주는 열쇠요 종착점일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반유대 감정을 조장하기 위함이 아닌, 유대인과 온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대속적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 pp.14-16
로마는 왜 기독교를 박해했는가?
기독교가 유대교의 울타리 안에 있던 초기에는 로마 당국자들도 기독교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로마제국은 유대인의 독특하고 오래된 신앙을 이미 인정하고 있던 터라 그 분파에 불과한 기독교에까지 관심을 보일 만한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로마 당국이 보인 기독교에 대한 소극적인 관용은 사도들을 통한 초기 기독교 전파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인들의 활동은 로마 당국의 레이더 망에 수시로 포착되었고, 결국 국가와 본격적으로 충돌하기에 이르렀다. 유대교와 달리 기독교만 불쑥 튀어 나와 국가와 충돌하게 된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기독교인의 급작스런 증가로 인한 존재감의 부각이다. 유대인과 달리 기독교인들은 이방인 선교에 열정이 많았고, 다양한 지역에서 상당한 개종자들을 얻으면서 존재감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유대교는 유대 민족의 한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아 민족 종교로서의 특수성을 인정받았지만, 기독교는 이방인 세계로 급속히 전파되면서 ‘국적 불명’의 종교로 인식된 것이다.
둘째, 로마에 대항한 유대인의 봉기로 인한 불똥이 기독교인들에게까지 튄 것이다. 유대 땅에서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유대인들의 봉기는 진압되었지만 너무 시간을 오래 끈 탓에 세계 최강으로 알려진 로마군의 자존심은 상당히 구겨졌다. 유대 민족주의가 확산되면서 로마제국 곳곳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었다. 이런 살벌한 분위기에서 예수를 메시아로 전하는 기독교인들은 또 다른 반역을 선동하는 무리로 의심받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추종하는 예수가 공식적으로는 로마법상 십자가 처형을 당한 반역자였기 때문이다.
셋째, 유대교에서 분리된 독자적인 기독교가 로마인들에게 부도덕하고 경건하지 못한 사교 집단으로 보인 것이다. 이것은 주로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는 용어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신자들이 서로를 향해 ‘형제, 자매’로 부르는 초대교회 관습은 로마인들에게 기독교인들이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당시 이집트에서 이런 호칭은 성관계 파트너를 부를 때 사용되었다. 예배 후 ‘평안의 키스’를 나눈다는 표현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예수의 몸과 피를 마신다’는 애찬식의 표현은 말 그대로 기독교인들이 식인 풍습이 있는 것으로 와전되었다. --- pp.44-45
유대인들은 왜 저항하지 않았을까?
나치의 야만적인 조치들 앞에서도 유대인들이 저항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들은 왜 마지막까지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가스실로 들어간 것일까?
첫째, 유대인들은 2000년 가까운 방랑 세월의 경험을 통해 저항이 자신들의 생명을 구하기보다는 오히려 생명을 빼앗는 결과를 초래했음을 잘 알았다. 유대인들의 역사, 신학, 민간전승, 어휘 등 그 어디에도 적들과 협상하고 값을 지불하며 청원하는 법만을 가르쳤지 싸우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다.
둘째, 유대인들도 다른 세계 시민들처럼 ‘최종 해결’이란 것이 있다고 믿지 않았다. 1942년 초 두 명의 유대인들이 천신만고 끝에 수용소에서 탈출해 수용소 내부의 실상을 알렸지만, 단지 종교적 체험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 것으로 무시되었다. 유대인들뫀 지금까지 ‘소수’ 또는 ‘다수’의 생명이 아닌 ‘전부’를 요구하는 대적자를 결코 대면한 적도, 상상한 적도 없었다. 상상 속에나 나올 법한 악마가 인간의 모습을 취할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셋째, 당시 유럽에 남아 희생된 유대인들의 성향 때문이다. 유대인들 가운데 야망이 있는 자들은 미국으로 이주했고, 가장 정력적이고 진취적이며 호전적인 유대인들은 이미 황무지와 같은 팔레스타인으로 향했다. 유럽 내 유대인들 가운데 최고의 인물과 두뇌의 유출은 이처럼 전쟁 전까지 지속되었다. 유대인 가운데 호전적인 무장 그룹이 있었지만 이들 역시 자신들에게 기회를 줄 유대 국가 팔레스타인에서 싸우길 원했지 소망 없는 유럽에서 싸우기를 원치 않았다. 결국 유럽 대륙에는 힘없고 가난한 유대인들만 남게 된 것이다.
넷째, 독일인들은 이런 유대인들의 사회학과 심리학을 냉혹하게 이용했다. 남은 유대인들의 지도층은 소심하고 고분고분했으며 심지어 아첨하는 경향까지 있었다. 수용소 이주 명령도 이들의 지도 아래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졌다. 아인자츠 부대는 ‘가스실’로 들어가는 동안 수용소 내 오케스트라가 음악을 연주하도록 했다. 이들은 열차를 타고 오랜 여행 후 수용소에 도착했고 가스실 입구는 ‘샤워실’이란 팻말이 적혀 있었으며 저마다 비누와 수건을 받았다. 그런 상황에서 누가 감히 그런 끔찍한 일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 pp.245-246
유대인들은 왜 예수님을 믿지 않을까?
이스라엘의 사역자로 있으면서 많은 분들로부터 받는 질문이 있다.
“유대인들은 왜 예수님을 믿지 않지요?”
나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 역시 요셉의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었다. 요셉과 형제들의 극적인 만남의 순간, 요셉은 형들을 즉시 알아보았지만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요셉과 달리 형들이 요셉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이것에 대한 해답이 오늘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유와 동일하다고 믿는다.
“형들이 왜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라고 물으면 다양한 대답이 나온다.
개중에 가장 많은 대답이 “요셉이 이집트 총리가 되었을 것이라고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어서……”이다. 한번은 독일에서 세미나를 하다가 상당히 그럴듯한 이유를 들었다. 형들은 이집트 총리 앞에 불려나가 감히 얼굴을 들지 못했고 그래서 요셉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일리가 있지만 정확한 대답은 아니다. 형들이 요셉을 한눈에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요셉의 모습이 유대인이 아닌 이집트인, 즉 이방인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형들 앞에 서 있는 요셉은 완전한 이집트인이었다. 의상도 헤어스타일도 완벽한 이집트인이었다.
오늘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도 동일하다. 1세기에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땅에서 살다 가신 예수님은 분명 ‘유대인 예수’였지만, 이 예수가 4세기 로마로부터 시작해 유럽, 영국, 미국, 한국을 거치면서 완전히 ‘이방인 예수’가 된 것이다.
유대인들이 어떻게 예수님께 돌아올 수 있을까?
그러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그분께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가? 간단치 않은 이 질문에 대한 해답 역시 요셉의 이야기 속에숨어 있다. 처음에는 요셉의 형제들이 자신의 동생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된 것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결국 요셉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그들은 뜨겁게 상봉했고 이후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이산가족 상봉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는가? 바로 요셉 자신이 형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은?
그러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 우리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는 날이 속히 오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것처럼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 즉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이 부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요셉과 형들 사이에 일어난 극적인 이산가족 상봉의 이면에는 이집트인의 적극적인 ‘중재와 사랑’이 있었다는 것이다. 요셉을 통해 기근으로부터 생명을 건짐 받은 이집트인들은 요셉과 형들의 관계 회복을 위해 중요한 중재자가 되었다. 예수님을 통해 영원한 심판에서 건짐 받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역시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관계 회복을 위해 뜨거운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인 중재를 해야 할 것이다.
--- p.260
출판사 리뷰
예수님 승천 이후 2000년 동안 유대인은 어떻게 살아왔을까?
유대인은 왜 숱한 핍박을 받고 살아왔을까?
유대인은 어떻게 굵직한 세계사에 개입되었을까?
오랜 방랑 민족은 자연스럽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거나 소수민족으로 전락하는 것이 역사적 현실이지만, 유대인은 아브라함 이후 4000년간 민족의 정체성을 수호하며 세계 역사에 타의 추종을 불허할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우리는 세계사와 교회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 예를 들어 십자군운동, 르네상스, 종교개혁, 신대륙 발견, 대영 제국의 탄생, 초강대국 미국의 부상, 홀로코스트 등 수많은 사건들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대규모 이동’과 직간접적인 연관이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없다면 유대 역사는 그야말로 ‘우연 중의 우연’에 불과하겠지만, 하나님의 선택과 이에 대한 순종, 거역, 고집으로 나타난 유대 민족의 응전, 그리고 이로써 결정지어진 유대 민족의 독특성은 실로 하나님이 인류 역사를 철저히 간섭하고 관리하신다는 뚜렷한 증거를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웅장하게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주변에서 유대인에 대한 과장된 신화, 근거 없는 비난, 흥미 위주의 단편 정보들을 접하곤 한다. 하지만 ‘유대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진지한 고민에서 출발한 입체적이고 종합적인 정보들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유대인 바로보기』는 7월에 출간된 『이슬람 바로보기』와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유대인에 대한 입체적이고 종합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일정 부분 ‘중동’이라고 하는 지역을 공통분모로 하는 이슬람에 대한 선이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스라엘의 건국 이후 부각된 중동 전쟁, 9·11 테러 등과 같은 중동의 ‘현대사’에 이르러서는 유대인과 이슬람이라고 하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추적해야만 한다. 마치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지금부터 펼쳐질 유대인들의 이야기는,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의 세월 동안 이스라엘에서 사역자로 살면서 ‘까칠한’ 유대인들의 가시에 찔려 아파하고 고민하면서 차곡차곡 모아 둔 자료들이다. 이것들을 하나씩 풀어 독자들과 나눈다고 생각할 때 내 마음속에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과 흥분이 넘친다. 그것은 복음이 시작되었지만 복음의 가장 열악한 불모지로 남아 있는 이스라엘 땅과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와 같은 이 땅의 문제들을 함께 풀어 나갈 수 있는 동역자와 중보자들을 만날 수 있다는 설렘 때문이다.
『유대인 바로보기』는 1세기 예수님의 승천 이후 20세기 현대 이스라엘 국가의 건국까지 ‘디아스포라’로 불리는 2000년의 역사적 간격을 메우는 작업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제 함께 ‘감추어진 유대인 2000년 역사’를 향한 대장정의 첫발을 내디뎌 보자.
유대인은 왜 숱한 핍박을 받고 살아왔을까?
유대인은 어떻게 굵직한 세계사에 개입되었을까?
오랜 방랑 민족은 자연스럽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거나 소수민족으로 전락하는 것이 역사적 현실이지만, 유대인은 아브라함 이후 4000년간 민족의 정체성을 수호하며 세계 역사에 타의 추종을 불허할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우리는 세계사와 교회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 예를 들어 십자군운동, 르네상스, 종교개혁, 신대륙 발견, 대영 제국의 탄생, 초강대국 미국의 부상, 홀로코스트 등 수많은 사건들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대규모 이동’과 직간접적인 연관이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없다면 유대 역사는 그야말로 ‘우연 중의 우연’에 불과하겠지만, 하나님의 선택과 이에 대한 순종, 거역, 고집으로 나타난 유대 민족의 응전, 그리고 이로써 결정지어진 유대 민족의 독특성은 실로 하나님이 인류 역사를 철저히 간섭하고 관리하신다는 뚜렷한 증거를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웅장하게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주변에서 유대인에 대한 과장된 신화, 근거 없는 비난, 흥미 위주의 단편 정보들을 접하곤 한다. 하지만 ‘유대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진지한 고민에서 출발한 입체적이고 종합적인 정보들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유대인 바로보기』는 7월에 출간된 『이슬람 바로보기』와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유대인에 대한 입체적이고 종합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일정 부분 ‘중동’이라고 하는 지역을 공통분모로 하는 이슬람에 대한 선이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스라엘의 건국 이후 부각된 중동 전쟁, 9·11 테러 등과 같은 중동의 ‘현대사’에 이르러서는 유대인과 이슬람이라고 하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추적해야만 한다. 마치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지금부터 펼쳐질 유대인들의 이야기는,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의 세월 동안 이스라엘에서 사역자로 살면서 ‘까칠한’ 유대인들의 가시에 찔려 아파하고 고민하면서 차곡차곡 모아 둔 자료들이다. 이것들을 하나씩 풀어 독자들과 나눈다고 생각할 때 내 마음속에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과 흥분이 넘친다. 그것은 복음이 시작되었지만 복음의 가장 열악한 불모지로 남아 있는 이스라엘 땅과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와 같은 이 땅의 문제들을 함께 풀어 나갈 수 있는 동역자와 중보자들을 만날 수 있다는 설렘 때문이다.
『유대인 바로보기』는 1세기 예수님의 승천 이후 20세기 현대 이스라엘 국가의 건국까지 ‘디아스포라’로 불리는 2000년의 역사적 간격을 메우는 작업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제 함께 ‘감추어진 유대인 2000년 역사’를 향한 대장정의 첫발을 내디뎌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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