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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조선 선교에 일생을 바친 리델 주교가 남긴 「서한문」을 엮어낸 일대기.
조선 말기 천주교 박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 책은 죽음을 무릅쓴 리델 신부의 선교 발자취이자 그의 일대기다. 리델의 서한과 동료 신부들의 언행을 바탕으로 한 저술한 이 책은 한 권의 위인전으로도 손색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당시 한반도는 중국·일본·러시아·프랑스·영국 등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장이었다. 리델과 그의 동료 신부, 그리고 로마 교황청과 오간 「서한」에는 국제 정세와 조선 말기 조정 움직임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 담겨 있어 학술 연구에 도움이 될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밖에도 조선의 생활풍습·기후·지리에 대한 이야기도 자료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조선 말기 천주교 박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 책은 죽음을 무릅쓴 리델 신부의 선교 발자취이자 그의 일대기다. 리델의 서한과 동료 신부들의 언행을 바탕으로 한 저술한 이 책은 한 권의 위인전으로도 손색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당시 한반도는 중국·일본·러시아·프랑스·영국 등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장이었다. 리델과 그의 동료 신부, 그리고 로마 교황청과 오간 「서한」에는 국제 정세와 조선 말기 조정 움직임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 담겨 있어 학술 연구에 도움이 될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밖에도 조선의 생활풍습·기후·지리에 대한 이야기도 자료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목차
제1권
제1장
펠릭스 리델의 어린 시절 --- 소명을 받다 --- 어머니의 죽음 --- 첫 영성체, 그리고 중학교 시절 --- 드 쿠르송 신부의 예견 --- 낭트 신학교 시절의 펠릭스 --- 반에서 보낸 휴가 --- 선교 소명에 대한 시험을 받다 --- 외방전교회 신학교 --- 리델 신부, 조선 선교사로 파견되다
제2장
항구 도시 마르세유 --- 조국 프랑스와 작별하다 --- 마르세유에서 알렉산드리아까지 --- 카이로 체류 --- 카이로~수에즈 기차여행 --- 인도양에서 --- 홍콩에 도착하다 --- 로마에서 들려온 소식 --- 프랑스 만세! --- 훈장은 받았으나 정부지원은 못 받는 선교사 --- 상하이에서 체푸까지 --- 사도로서의 삶을 시작하다
제3장
조선 왕이 방어 자세를 취하다 --- 리델 신부 중국을 떠나다 --- 푸사 여신 --- 중국 선원들 --- 조선 선박 --- 조선 땅에 상륙하다 --- 베르뇌 주교의 영접 --- 주교관
제4장
조선의 인구와 지형 --- 조선의 기후와 특산물 --- 조선의 학자들 --- 중국을 섬기는 조선 --- 일본과의 관계 --- 유럽 열강과의 관계 --- 천주교의 조선 국내 현황 소개 --- 리델 신부의 교구 --- 로마 교황에게 보내는 선교사들의 「서한」
제5장
상복으로 변장하다 --- 리델 신부 교구 부임 --- 성 요셉 신학교 --- 조선 가옥의 내부 --- 어학 선생 --- 조선의 학사(學士)
제6장
리델 신부 담당교구에서 사역 개시 --- 봉후마가 죽었다! --- 선교사의 헌신 --- 내포로 향한 길 --- 브르타뉴의 이교도들! --- 조선인 명의 --- 진밭 마을에 몰아친 폭풍우 --- 조선과 브르타뉴 사이의 연결고리 --- 조선인의 개종
제7장
조선의 정권 교체 --- 선교사들이 처한 상황 --- 서울 입성 --- 조선에서의 첫 영성체 --- 선교사 일기 --- 위독한 리델 신부
제8장
피비린내 나는 박해 --- 베르뇌, 다블뤼 주교, 그리고 일곱 선교사의 죽음 --- 이안드레아 --- 리델 신부가 처한 위험 --- 작은 초가집에서의 은신 --- 순교를 준비하는 어린이들 --- 가족에게 영원한 이별을 고하는 안드레아 - 리델 신부, 페롱 신부와 합류하다 --- 사람은 무서우나 호랑이는 무섭지 않다 --- 보릿고개 --- 칼래 신부
제9장
리델 신부, 중국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다 --- 조선인 선원들 --- 조선 정크선 --- 체푸 도착 --- 조선인의 놀라움 --- 리델 주교가 로즈 제독에게 선교사 학살을 알림
제10장
프랑스의 조선 원정 --- 처음으로 자유롭게 미사를 드리다 --- 서울 근교의 풍경 --- 공식적인 이야기 --- 진실 목격자의 증언 --- 원정의 결과 --- 리델 주교, 선교지를 떠나다 --- 박해사건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전해지다
제11장
리델 신부의 상하이 체류 --- 추억과 소망 --- 유배지에서 짊어진 선교사의 과업 --- 일본 여행 나가사키 --- 상하이 귀환 --- 조선인이 증기선을 만들다
제12장
조선 귀환 시도 --- 선교지의 우두머리 리델 신부 --- 노트르담 데 네주의 직책 --- 리델 신부, 조선을 향해 떠나다 --- 원정 실패 --- 리델 신부, 조선 대목교구장으로 임명되다
제2권
제1장
비오 9세의 영접 --- 리델 신부의 서품식 --- 로마 체류 --- 무류성(無謬性) 교리에 대한 정의 --- 브르타뉴로 귀환
제2장
다시 또 이별 --- 이스마일리아를 위하여 --- 실론에서의 또 다른 이별 --- 다이아몬드 곶 --- 사이공 --- 파라셀 군도(西砂群島) --- 조선 해안의 미국 선박들
제3장
리델 주교의 체푸 체류 --- 상하이 귀환 --- 선교사의 일기
제4장
조선인들의 귀국 --- 작별인사 리델 주교의 작업 --- 노트르담 데 네쥬로 출발 --- 개선한 베롤 주교의 마차 --- 발레-푸르쉬 잠깐 둘러보기
제5장
리델 주교의 베이징 여행 --- 드 조프루아와 중국 대신들 --- 만주로 귀환 --- 산적 떼를 리델 주교가 쫓아내다 --- 조선 선교지 소식
제6장
중대한 결정 --- 조선 주교의 신중한 망설임 --- 파리와 로마에서 승인을 얻다 --- 마르티노 신부의 사망 --- 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 리델 주교, 선교지 귀환을 가족에게 고함 --- 첫 번째 시도 --- 두 번째 원정 --- 블랑 신부와 드게트 신부의 조선 잠입
제7장
프랑스 공사와 함께 쓴 리델 주교의 보고서 --- 비오 9세의 회신 --- 선교사들의 전략 --- 조선 선교의 현황 --- 리델 주교, 무사히 선교지에 상륙하다 ---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제8장
리델 주교, 서울에 숙소를 건립하다 --- 국경에서 우편물 발각되다 --- 주교가 발각되어 투옥되다 --- 제1차 심문 --- 차꼬를 찬 죄수
제9장
포교의 위세 --- 고문을 받는 교우들 --- 비눗 방울 --- 서울에서 쇠는 음력설 --- 조선 병사 교도 방법 --- 옥졸들 --- 망나니들 --- 감옥의 규율
제10장
리델 주교에 대한 제2차 문초 --- 절도범 감방에 수감된 리델 주교 --- 장엄한 부활대축일 --- 스스로 감옥에 들어온 젊은 천주교도 --- 감옥은 기나긴 순교의 길 --- 리델 주교의 서품 기념일
제11장
리델 주교의 석방 중국으로 출발 --- 선교사 행렬 --- 유럽인은 백성 때리는 걸 원치 않는다 --- 옛 도읍 송도를 지나다 ---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구간 --- 주교관 --- 어느 선한 노인 --- 노트르담 데 네주 도착
제12장
중국·일본이 리델 주교 석방을 위해 취한 조치 --- 새로2운 어려움 --- 리델 주교의 신중함 --- 일본 여행 --- 일본 정부의 우호적인 환영
제13장
조선의 최근 현황 --- 드게트 신부의 수감 --- 조선 왕과 왕비의 심경 --- 외교관은 항상 외교만을 한다 --- 리델 주교의 고통스러운 어려움들 --- 그 아래 악마가 있다 --- 블랑 신부와 동료는 교우를 포기 않는다 --- 시메오니 추기경에게 보내는 리델 주교의 「서한」
제14장
리델 주교, 조선 선교사를 격려하다 --- 수감자 석방 작전 --- 조선 신학교 창립 --- 블랑 신부의 후원 요청 --- 리샤르 신부의 선종 리델 신부의 편지 --- 뮈텔·리우빌 신부, 조선을 향해 출발하다 --- 조선의 교회재판소 --- 8학년 교사를 맡은 리델 주교
제15장
『한불자전(韓佛字典)』 나오다 --- 『한어문전』 출간 --- “영어·독일어판 번역은 안 됩니다” - 선교지 소식
제3권
제1장
발병 홍콩 요양원 입원 --- 일본 여행 --- 뇌졸중 --- 병자성사(病者聖事) --- 홍콩으로 귀환 --- 블랑 신부의 부주교 임명 --- 프랑스로 출발
제2장
조선, 서양과 외교관계 수립하다 --- 조선 소요사태 --- 일본 정부의 강력한 요구 --- 조선 임금의 선포 --- 리델 주교, 마르세유에 도착 --- 루르드 성지 순례 --- 반 도착
제3장
반에서의 체류 --- 가난한 자들에 대한 리델 주교의 애정 --- 반의 고위 성직자 --- 반의 대신학교(大神學校) 방문 --- 생트 안 소신학교에서 --- 낭트에서 르 코크 주교의 영접을 받다 --- 마지막 「서한」들 --- 루르드 순례 --- 경건한 선고 --- 리델 주교의 마지막 순간들 --- 하느님께로 가다 --- 성대한 장례미사 --- 추모 설교
제1장
펠릭스 리델의 어린 시절 --- 소명을 받다 --- 어머니의 죽음 --- 첫 영성체, 그리고 중학교 시절 --- 드 쿠르송 신부의 예견 --- 낭트 신학교 시절의 펠릭스 --- 반에서 보낸 휴가 --- 선교 소명에 대한 시험을 받다 --- 외방전교회 신학교 --- 리델 신부, 조선 선교사로 파견되다
제2장
항구 도시 마르세유 --- 조국 프랑스와 작별하다 --- 마르세유에서 알렉산드리아까지 --- 카이로 체류 --- 카이로~수에즈 기차여행 --- 인도양에서 --- 홍콩에 도착하다 --- 로마에서 들려온 소식 --- 프랑스 만세! --- 훈장은 받았으나 정부지원은 못 받는 선교사 --- 상하이에서 체푸까지 --- 사도로서의 삶을 시작하다
제3장
조선 왕이 방어 자세를 취하다 --- 리델 신부 중국을 떠나다 --- 푸사 여신 --- 중국 선원들 --- 조선 선박 --- 조선 땅에 상륙하다 --- 베르뇌 주교의 영접 --- 주교관
제4장
조선의 인구와 지형 --- 조선의 기후와 특산물 --- 조선의 학자들 --- 중국을 섬기는 조선 --- 일본과의 관계 --- 유럽 열강과의 관계 --- 천주교의 조선 국내 현황 소개 --- 리델 신부의 교구 --- 로마 교황에게 보내는 선교사들의 「서한」
제5장
상복으로 변장하다 --- 리델 신부 교구 부임 --- 성 요셉 신학교 --- 조선 가옥의 내부 --- 어학 선생 --- 조선의 학사(學士)
제6장
리델 신부 담당교구에서 사역 개시 --- 봉후마가 죽었다! --- 선교사의 헌신 --- 내포로 향한 길 --- 브르타뉴의 이교도들! --- 조선인 명의 --- 진밭 마을에 몰아친 폭풍우 --- 조선과 브르타뉴 사이의 연결고리 --- 조선인의 개종
제7장
조선의 정권 교체 --- 선교사들이 처한 상황 --- 서울 입성 --- 조선에서의 첫 영성체 --- 선교사 일기 --- 위독한 리델 신부
제8장
피비린내 나는 박해 --- 베르뇌, 다블뤼 주교, 그리고 일곱 선교사의 죽음 --- 이안드레아 --- 리델 신부가 처한 위험 --- 작은 초가집에서의 은신 --- 순교를 준비하는 어린이들 --- 가족에게 영원한 이별을 고하는 안드레아 - 리델 신부, 페롱 신부와 합류하다 --- 사람은 무서우나 호랑이는 무섭지 않다 --- 보릿고개 --- 칼래 신부
제9장
리델 신부, 중국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다 --- 조선인 선원들 --- 조선 정크선 --- 체푸 도착 --- 조선인의 놀라움 --- 리델 주교가 로즈 제독에게 선교사 학살을 알림
제10장
프랑스의 조선 원정 --- 처음으로 자유롭게 미사를 드리다 --- 서울 근교의 풍경 --- 공식적인 이야기 --- 진실 목격자의 증언 --- 원정의 결과 --- 리델 주교, 선교지를 떠나다 --- 박해사건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전해지다
제11장
리델 신부의 상하이 체류 --- 추억과 소망 --- 유배지에서 짊어진 선교사의 과업 --- 일본 여행 나가사키 --- 상하이 귀환 --- 조선인이 증기선을 만들다
제12장
조선 귀환 시도 --- 선교지의 우두머리 리델 신부 --- 노트르담 데 네주의 직책 --- 리델 신부, 조선을 향해 떠나다 --- 원정 실패 --- 리델 신부, 조선 대목교구장으로 임명되다
제2권
제1장
비오 9세의 영접 --- 리델 신부의 서품식 --- 로마 체류 --- 무류성(無謬性) 교리에 대한 정의 --- 브르타뉴로 귀환
제2장
다시 또 이별 --- 이스마일리아를 위하여 --- 실론에서의 또 다른 이별 --- 다이아몬드 곶 --- 사이공 --- 파라셀 군도(西砂群島) --- 조선 해안의 미국 선박들
제3장
리델 주교의 체푸 체류 --- 상하이 귀환 --- 선교사의 일기
제4장
조선인들의 귀국 --- 작별인사 리델 주교의 작업 --- 노트르담 데 네쥬로 출발 --- 개선한 베롤 주교의 마차 --- 발레-푸르쉬 잠깐 둘러보기
제5장
리델 주교의 베이징 여행 --- 드 조프루아와 중국 대신들 --- 만주로 귀환 --- 산적 떼를 리델 주교가 쫓아내다 --- 조선 선교지 소식
제6장
중대한 결정 --- 조선 주교의 신중한 망설임 --- 파리와 로마에서 승인을 얻다 --- 마르티노 신부의 사망 --- 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 리델 주교, 선교지 귀환을 가족에게 고함 --- 첫 번째 시도 --- 두 번째 원정 --- 블랑 신부와 드게트 신부의 조선 잠입
제7장
프랑스 공사와 함께 쓴 리델 주교의 보고서 --- 비오 9세의 회신 --- 선교사들의 전략 --- 조선 선교의 현황 --- 리델 주교, 무사히 선교지에 상륙하다 ---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제8장
리델 주교, 서울에 숙소를 건립하다 --- 국경에서 우편물 발각되다 --- 주교가 발각되어 투옥되다 --- 제1차 심문 --- 차꼬를 찬 죄수
제9장
포교의 위세 --- 고문을 받는 교우들 --- 비눗 방울 --- 서울에서 쇠는 음력설 --- 조선 병사 교도 방법 --- 옥졸들 --- 망나니들 --- 감옥의 규율
제10장
리델 주교에 대한 제2차 문초 --- 절도범 감방에 수감된 리델 주교 --- 장엄한 부활대축일 --- 스스로 감옥에 들어온 젊은 천주교도 --- 감옥은 기나긴 순교의 길 --- 리델 주교의 서품 기념일
제11장
리델 주교의 석방 중국으로 출발 --- 선교사 행렬 --- 유럽인은 백성 때리는 걸 원치 않는다 --- 옛 도읍 송도를 지나다 ---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구간 --- 주교관 --- 어느 선한 노인 --- 노트르담 데 네주 도착
제12장
중국·일본이 리델 주교 석방을 위해 취한 조치 --- 새로2운 어려움 --- 리델 주교의 신중함 --- 일본 여행 --- 일본 정부의 우호적인 환영
제13장
조선의 최근 현황 --- 드게트 신부의 수감 --- 조선 왕과 왕비의 심경 --- 외교관은 항상 외교만을 한다 --- 리델 주교의 고통스러운 어려움들 --- 그 아래 악마가 있다 --- 블랑 신부와 동료는 교우를 포기 않는다 --- 시메오니 추기경에게 보내는 리델 주교의 「서한」
제14장
리델 주교, 조선 선교사를 격려하다 --- 수감자 석방 작전 --- 조선 신학교 창립 --- 블랑 신부의 후원 요청 --- 리샤르 신부의 선종 리델 신부의 편지 --- 뮈텔·리우빌 신부, 조선을 향해 출발하다 --- 조선의 교회재판소 --- 8학년 교사를 맡은 리델 주교
제15장
『한불자전(韓佛字典)』 나오다 --- 『한어문전』 출간 --- “영어·독일어판 번역은 안 됩니다” - 선교지 소식
제3권
제1장
발병 홍콩 요양원 입원 --- 일본 여행 --- 뇌졸중 --- 병자성사(病者聖事) --- 홍콩으로 귀환 --- 블랑 신부의 부주교 임명 --- 프랑스로 출발
제2장
조선, 서양과 외교관계 수립하다 --- 조선 소요사태 --- 일본 정부의 강력한 요구 --- 조선 임금의 선포 --- 리델 주교, 마르세유에 도착 --- 루르드 성지 순례 --- 반 도착
제3장
반에서의 체류 --- 가난한 자들에 대한 리델 주교의 애정 --- 반의 고위 성직자 --- 반의 대신학교(大神學校) 방문 --- 생트 안 소신학교에서 --- 낭트에서 르 코크 주교의 영접을 받다 --- 마지막 「서한」들 --- 루르드 순례 --- 경건한 선고 --- 리델 주교의 마지막 순간들 --- 하느님께로 가다 --- 성대한 장례미사 --- 추모 설교
책 속으로
리델의 청년 시절과 그의 성품
중학교에 입학하여 처음 두 해 동안 그는 보미에(Baumier) 신부의 가르침을 받았다. 보미에 신부는 설사 단체생활의 규율을 벗어나는 행동을 이따금씩 보여주는 학생을 보더라도 절대 인내심을 잃거나 쉽게 포기하지 않는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보미에 신부의 날카로운 눈은 머지않아 펠릭스의 아름다운 영혼에 담겨 있는 풍요로움을 발견해냈으며, 또한 거기서 미래를 위해 소중하게 쓰일 장점을 가려낼 줄도 알았다. 그는 생동감 넘치며 적극적인 성격을 가진 이 아이가 성장해가는 모습에 매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그래서 관용을 베푸는가 하면 명랑한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엄격하게 이 아이를 지도하였는데, 결국 이러한 교육방식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 이후로 선생과 제자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신뢰가 형성되었고, 이것이 어린 펠릭스에게 큰 도움으로 작용했다. 따라서 보미에 신부가 학교를 떠난 다음해는 펠릭스에게 상당히 힘든 시기일 수밖에 없었다. 별로 융통성이 없는 성격을 가진 아이에게, 자신을 그토록 배려해주던 훌륭한 스승의 현명한 지도를 더 이상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아직은 시기상조였던 것이다. 또한 과도한 열성, 그가 친구들과의 사이에 조성해놓은 유대감 등으로 인해, 약간 소극적으로 보였던 몇몇 교사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까지도 했다.
--- p.30~31
고난 속의 선교…… 숨어 지내는 선교사들
“조금만 더 자유가 주어진다면 선교는 매우 신장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박해의 위협 아래 이교도의 의심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더욱더 깊이 숨어 지내는 생활을 계속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부주의하면 당연히 모든 것을 그르치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목자와 신자들 사이에 성스러운 임무에 필요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 지장을 받고 있습니다. 신부들은 낮에 이동하기 불가능하고 교우들도 선교사의 은신처까지 가는 것이 힘듭니다. 게다가 배교자들과 배신자들에 대한 우려 역시 한몫을 하고 있습니다.”
---「리델 신부가 로마 추기경에게 보낸 서한」중에서
임무를 마치고 나서 선교사들은 다시 상복을 입는다. 조선사람은 상복을 입은 이는 죽은 자로 여긴다. 그는 고통을 잊게 할 가능성이 있는 아무것도 보거나 들을 권리가 없다. 여행을 할 때에는 평상시의 머리 모양과는 달리 어깨까지 챙이 내려오는 밀짚으로 된 모자를 쓴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해 두 막대기에 고정되어 있는 회색 헝겊으로 된 부채 같은 것을 손에 들고 있다. 상복은 누렇고 조직이 듬성듬성한 헝겊으로 만들어지는데, 평상복 위에 걸쳐 입기에 충분하도록 품이 넉넉하다. 상복을 입고 있는 사람은 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상복은 선교사에게는 쉽고도 완벽한 변장이고, 만일 상복이 없었다면 조선 체류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선교사는 이처럼 변장을 하고서 모든 사회생활에서 피해 다녀야 한다. 그저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볼 수 있는 게 고작이고 만일 누군가 질문을 해오면 될 수 있으면 대답을 안 하는 게 상책이다. 길에서, 그리고 주막에서는 독방에 칩거하거나 구석에 혼자 처박혀 아무하고도 말을 하지 않는다. 옷을 터는 솔이 아직 없는 이 나라에서 또 다른 하나의 중요한 장점이 있다. 상복을 입으면 진흙이 두렵지 않은데, 옷이나 진흙이나 둘 다 색이 같기 때문이다. 비 역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데, 머리에 쓴 모자가 진정한 지붕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 p.93~94
그해 10월께 거룩한 선교사는 담당 교구에 대한 사역을 재개했다. 그가 견뎌내야 했던 무수한 고통과 결핍에 대해 여기서는 다시 언급하지 않으려고 한다. 단지, 눈 속에 손발이 꽁꽁 언 채로 9~10리를 단숨에 가야 하는 일이 여러 번 있었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모든 에너지와 강철 같은 의지를 동원해야 했었다는 사실만을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 그러나 이와 같은 하루하루 희생의 삶으로 말미암아 그 보상으로 박해받던 사람들 위에 은총이 더욱 강하게 내리기 시작했고 사도의 일은 풍성한 결실을 맺어가고 있었다. 약 360리의 거리를 다니는 동안 3,229명의 영혼에게 사역을 통해 위로를 베풀었고 2,318차례 고해성사를 들었고, 성인 72명과 아동 177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는가 하면 44건의 혼배성사를 집례했음을 스스로 깨닫고 기뻐했다.
--- p.117
조선 재입국 놓고 프랑스 외교 당국과의 마찰
프랑스가 실패했던 조선 원정 이후 리델 신부는 상하이 교구로 돌아와 체류하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가 빨리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한편, 미국과 영국이 곧 조선 해안가에서 폭풍으로 인해 던져지고 현지 주민들에 의해 비겁하게 학살된 자국 선원들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해줄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가까운 미래에 유럽과의 무역을 개방하는 국제조약이 체결되어, 그에 따라 종교의 자유를 규정하는 것을 이미 그는 내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선교지에 돌아가 자신의 삶을 바치는 것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더 쉬워질 것이다. 그러나 그 목표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여러 해가 더 흘러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선교사의 이러한 생각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고, 유럽 국가들, 특히 프랑스와 영국은 현재까지도 이제 겨우 자 국을 위해 조선, 아니면 적어도 조선의 몇몇 항구에서라도 자유로운 무역을 할 권리를 얻어내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음에 놀라울 따름이다. 일본인은 좋은 결과를 얻어내었다. 왜 유럽 정부들은 조차지를 얻으려고 시도하지 않는 것일까? 조차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 틀림없을 터인데 말이다. 조선 백성도 외국인에게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들은 오히려 중국인보다 더 개방적이라고 할 수 있어, 조선인은 덜 뻔뻔하고 모든 종류의 개선과 발전에 대해 적개심도 덜 가지고 있으며, 지구상 나머지 땅 위에 살고 있는 오랑캐에 대해 그리 병적인 우월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단지 정부만 반기를 들고 있는데, 이는 국가를 유지하는 데에는 이러한 고립과 대중의 무지 상태가 필요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1867년 1월 리델 신부는 자신의 건강 상태로 인해 거의 두문불출을 해야 하는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휴식의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아직 울리지 않았다. 그 종은 하늘나라에 가서야 울리게 될 것이다. 그의 시간은 하느님과 선교지에 속해 있고 그중 작은 부분이라도 떼어내어 여유를 가질 권리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자신에게 맡겨진 영혼을 위해 긴 고통의 시간, 즉 그가 이르듯 여가시간을 사용했다.
--- p.200~201
프랑스 함대의 조선 원정과 병인양요
“제독님, 저는 프랑스인이며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입니다. 윗분의 명령으로 작은 쪽배를 타고 조선을 탈출했습니다. 조선 왕이 명령을 내려 아홉 명의 프랑스인, 저희 주교님, 보좌 신부님, 그리고 제 동료인 일곱 분의 신부님을 학살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유럽인이고 천주교인이라는 것뿐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제독님께 전하려고 이렇게 왔습니다. 조선 선교지에는 맹수처럼 쫓기고 있는 페롱 신부와 칼래 신부, 그리고 이런 고통스러운 소식을 가져온 저, 이렇게 세 사람만이 현재 남아 있을 뿐입니다.”
장교들은 선교사를 존경심과 관심을 보이며 둘러쌌다. 제독은 그를 극진하게 환대하고 죽음에 노출되어 있는 다른 두 프랑스 선교사를 즉시 구하러 갈 수 있도록 허락했다. 출발 준비가 다 되었을 무렵, 함대를 이끄는 드 라 그랑디에르 제독은 얼마 전 일어난 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가 있던 바스 코친 차이나에서 통지를 보냈다. 자신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긴 하지만 귀환하는 즉시 계획에 따라 원정을 떠날 것을 약속했다. (……)
가련한 선교사여! 그의 인생은 수면 위의 거품과 같이, 가을 바람이 밀고 또 밀어내는 마른 낙엽처럼 흔들렸다. 그는 중국 해안으로부터 다시 멀어져 얼마 후면 사랑하는 자신의 선교지를 다시 볼 것이다. 그리하여 마음이 흐뭇하고 기쁨에 젖어 흉내 낼 수 없는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 나의 조선이여! 축복의 땅이여! 순교자의 피로 얼룩진 땅이여! 내가 너를 잠시 하느님을 위해 떠났었는데 이제 다시 돌아간다, 다시 돌아간다. 이제는 내가 너를 위해 향기 가득한 희생제물이 될 수 있으려나!” 그러나 어찌하랴! 그는 다시 그곳에 들어가기 전에 여러 번 해변에 접근을 시도하며, 멀리서만 이 비호의적인 땅의 산에게 인사를 보내야만 했다.
--- p.173~175
리델의 선교 열정이 담긴 감동적인 글들
“제가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상상할 수 있을는지요. 저는 브르타뉴에도 조선에도 있지 않습니다. 브르타뉴와 조선은 둘 다 너무 사랑하는 곳인데, 브르타뉴를 떠난 것은 조선에 가기 위해서였고, 만일 조선을 떠난다면 그것은 하늘나라로 가기 위함인 것을……. 이제 저는 저의 모든 것을 바쳤던 땅에서 쫓겨났습니다. 그 땅은 저를 밀어내고 거부하지만 저의 눈길과 마음은 여전히 그곳을 향해 돌아갑니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싫증이 나서, 어려운 상황으로 인해 아직도 더 오래 기다려야 한다면 인내를 가지고 기다릴 것입니다. 하늘이 제게 맡긴 소임이 그곳에 있으니까요. 하느님이 제게 맡겨주신, 그리고 제 마음속에 늘 간직하고 있는 자녀들이 거기 있는데, 그들을 위로하지도 다시 보지도 못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가여운 자녀들, 오!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들 가운데 거하기 위해, 그들의 곤궁을 덜어주고 천국의 길을 가르쳐주기 위해 저는 기꺼이 제 피를 다 쏟을 것입니다.”
---「1867년 초, 상하이에서」중에서
“감옥이란 매일매일 걸어가는 기나긴 순교의 길과도 같다. 머리는 피로해지고 육체는 약해지며, 성격까지도 고약하게 변해간다. 생동하는 믿음과 한결같은 신심,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실한 겸허함만이 선하신 하느님의 은총과 더불어 나약함을 견디고 원수와 낙담 앞에 굴복하지 않게 후원해줄 수 있다. 시험이 고통스러워도 은총의 구원은 잘 감지할 수 있다. 나와 함께 있었던 천주교인들은 모두 기도 가운데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지켜나갔다. 그럼에도 가끔씩 다음과 같이 말하곤 한다. ‘대체 언제까지 우리가 이렇게 지내야만 하나. 어차피 사형을 내린다면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소.’”
---「1878년 옥중 서신 중에서」중에서
중국 땅에 발을 들여놓을 때 추방자의 마음은 울컥해졌다. 그는 말한다. “이 아름다운 나라, 나의 선교지를 다시 한 번 바라보려고 몸을 돌렸다. 어찌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장관인지! 강제로 떠날 수밖에 없는 나에게 조선이 미소를 짓고 있는 듯했다. 내 마음 저편에서는 이 나라 전체에 입맞추며 애정이 어린 축복을 보냈다. 그리고 ‘잘 있거라, 곧 다시 보자꾸나’라고 말했다.”
중학교에 입학하여 처음 두 해 동안 그는 보미에(Baumier) 신부의 가르침을 받았다. 보미에 신부는 설사 단체생활의 규율을 벗어나는 행동을 이따금씩 보여주는 학생을 보더라도 절대 인내심을 잃거나 쉽게 포기하지 않는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보미에 신부의 날카로운 눈은 머지않아 펠릭스의 아름다운 영혼에 담겨 있는 풍요로움을 발견해냈으며, 또한 거기서 미래를 위해 소중하게 쓰일 장점을 가려낼 줄도 알았다. 그는 생동감 넘치며 적극적인 성격을 가진 이 아이가 성장해가는 모습에 매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그래서 관용을 베푸는가 하면 명랑한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엄격하게 이 아이를 지도하였는데, 결국 이러한 교육방식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 이후로 선생과 제자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신뢰가 형성되었고, 이것이 어린 펠릭스에게 큰 도움으로 작용했다. 따라서 보미에 신부가 학교를 떠난 다음해는 펠릭스에게 상당히 힘든 시기일 수밖에 없었다. 별로 융통성이 없는 성격을 가진 아이에게, 자신을 그토록 배려해주던 훌륭한 스승의 현명한 지도를 더 이상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아직은 시기상조였던 것이다. 또한 과도한 열성, 그가 친구들과의 사이에 조성해놓은 유대감 등으로 인해, 약간 소극적으로 보였던 몇몇 교사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까지도 했다.
--- p.30~31
고난 속의 선교…… 숨어 지내는 선교사들
“조금만 더 자유가 주어진다면 선교는 매우 신장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박해의 위협 아래 이교도의 의심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더욱더 깊이 숨어 지내는 생활을 계속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부주의하면 당연히 모든 것을 그르치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목자와 신자들 사이에 성스러운 임무에 필요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 지장을 받고 있습니다. 신부들은 낮에 이동하기 불가능하고 교우들도 선교사의 은신처까지 가는 것이 힘듭니다. 게다가 배교자들과 배신자들에 대한 우려 역시 한몫을 하고 있습니다.”
---「리델 신부가 로마 추기경에게 보낸 서한」중에서
임무를 마치고 나서 선교사들은 다시 상복을 입는다. 조선사람은 상복을 입은 이는 죽은 자로 여긴다. 그는 고통을 잊게 할 가능성이 있는 아무것도 보거나 들을 권리가 없다. 여행을 할 때에는 평상시의 머리 모양과는 달리 어깨까지 챙이 내려오는 밀짚으로 된 모자를 쓴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해 두 막대기에 고정되어 있는 회색 헝겊으로 된 부채 같은 것을 손에 들고 있다. 상복은 누렇고 조직이 듬성듬성한 헝겊으로 만들어지는데, 평상복 위에 걸쳐 입기에 충분하도록 품이 넉넉하다. 상복을 입고 있는 사람은 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상복은 선교사에게는 쉽고도 완벽한 변장이고, 만일 상복이 없었다면 조선 체류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선교사는 이처럼 변장을 하고서 모든 사회생활에서 피해 다녀야 한다. 그저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볼 수 있는 게 고작이고 만일 누군가 질문을 해오면 될 수 있으면 대답을 안 하는 게 상책이다. 길에서, 그리고 주막에서는 독방에 칩거하거나 구석에 혼자 처박혀 아무하고도 말을 하지 않는다. 옷을 터는 솔이 아직 없는 이 나라에서 또 다른 하나의 중요한 장점이 있다. 상복을 입으면 진흙이 두렵지 않은데, 옷이나 진흙이나 둘 다 색이 같기 때문이다. 비 역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데, 머리에 쓴 모자가 진정한 지붕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 p.93~94
그해 10월께 거룩한 선교사는 담당 교구에 대한 사역을 재개했다. 그가 견뎌내야 했던 무수한 고통과 결핍에 대해 여기서는 다시 언급하지 않으려고 한다. 단지, 눈 속에 손발이 꽁꽁 언 채로 9~10리를 단숨에 가야 하는 일이 여러 번 있었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모든 에너지와 강철 같은 의지를 동원해야 했었다는 사실만을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 그러나 이와 같은 하루하루 희생의 삶으로 말미암아 그 보상으로 박해받던 사람들 위에 은총이 더욱 강하게 내리기 시작했고 사도의 일은 풍성한 결실을 맺어가고 있었다. 약 360리의 거리를 다니는 동안 3,229명의 영혼에게 사역을 통해 위로를 베풀었고 2,318차례 고해성사를 들었고, 성인 72명과 아동 177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는가 하면 44건의 혼배성사를 집례했음을 스스로 깨닫고 기뻐했다.
--- p.117
조선 재입국 놓고 프랑스 외교 당국과의 마찰
프랑스가 실패했던 조선 원정 이후 리델 신부는 상하이 교구로 돌아와 체류하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가 빨리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한편, 미국과 영국이 곧 조선 해안가에서 폭풍으로 인해 던져지고 현지 주민들에 의해 비겁하게 학살된 자국 선원들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해줄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가까운 미래에 유럽과의 무역을 개방하는 국제조약이 체결되어, 그에 따라 종교의 자유를 규정하는 것을 이미 그는 내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선교지에 돌아가 자신의 삶을 바치는 것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더 쉬워질 것이다. 그러나 그 목표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여러 해가 더 흘러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선교사의 이러한 생각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고, 유럽 국가들, 특히 프랑스와 영국은 현재까지도 이제 겨우 자 국을 위해 조선, 아니면 적어도 조선의 몇몇 항구에서라도 자유로운 무역을 할 권리를 얻어내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음에 놀라울 따름이다. 일본인은 좋은 결과를 얻어내었다. 왜 유럽 정부들은 조차지를 얻으려고 시도하지 않는 것일까? 조차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 틀림없을 터인데 말이다. 조선 백성도 외국인에게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들은 오히려 중국인보다 더 개방적이라고 할 수 있어, 조선인은 덜 뻔뻔하고 모든 종류의 개선과 발전에 대해 적개심도 덜 가지고 있으며, 지구상 나머지 땅 위에 살고 있는 오랑캐에 대해 그리 병적인 우월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단지 정부만 반기를 들고 있는데, 이는 국가를 유지하는 데에는 이러한 고립과 대중의 무지 상태가 필요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1867년 1월 리델 신부는 자신의 건강 상태로 인해 거의 두문불출을 해야 하는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휴식의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아직 울리지 않았다. 그 종은 하늘나라에 가서야 울리게 될 것이다. 그의 시간은 하느님과 선교지에 속해 있고 그중 작은 부분이라도 떼어내어 여유를 가질 권리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자신에게 맡겨진 영혼을 위해 긴 고통의 시간, 즉 그가 이르듯 여가시간을 사용했다.
--- p.200~201
프랑스 함대의 조선 원정과 병인양요
“제독님, 저는 프랑스인이며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입니다. 윗분의 명령으로 작은 쪽배를 타고 조선을 탈출했습니다. 조선 왕이 명령을 내려 아홉 명의 프랑스인, 저희 주교님, 보좌 신부님, 그리고 제 동료인 일곱 분의 신부님을 학살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유럽인이고 천주교인이라는 것뿐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제독님께 전하려고 이렇게 왔습니다. 조선 선교지에는 맹수처럼 쫓기고 있는 페롱 신부와 칼래 신부, 그리고 이런 고통스러운 소식을 가져온 저, 이렇게 세 사람만이 현재 남아 있을 뿐입니다.”
장교들은 선교사를 존경심과 관심을 보이며 둘러쌌다. 제독은 그를 극진하게 환대하고 죽음에 노출되어 있는 다른 두 프랑스 선교사를 즉시 구하러 갈 수 있도록 허락했다. 출발 준비가 다 되었을 무렵, 함대를 이끄는 드 라 그랑디에르 제독은 얼마 전 일어난 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가 있던 바스 코친 차이나에서 통지를 보냈다. 자신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긴 하지만 귀환하는 즉시 계획에 따라 원정을 떠날 것을 약속했다. (……)
가련한 선교사여! 그의 인생은 수면 위의 거품과 같이, 가을 바람이 밀고 또 밀어내는 마른 낙엽처럼 흔들렸다. 그는 중국 해안으로부터 다시 멀어져 얼마 후면 사랑하는 자신의 선교지를 다시 볼 것이다. 그리하여 마음이 흐뭇하고 기쁨에 젖어 흉내 낼 수 없는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 나의 조선이여! 축복의 땅이여! 순교자의 피로 얼룩진 땅이여! 내가 너를 잠시 하느님을 위해 떠났었는데 이제 다시 돌아간다, 다시 돌아간다. 이제는 내가 너를 위해 향기 가득한 희생제물이 될 수 있으려나!” 그러나 어찌하랴! 그는 다시 그곳에 들어가기 전에 여러 번 해변에 접근을 시도하며, 멀리서만 이 비호의적인 땅의 산에게 인사를 보내야만 했다.
--- p.173~175
리델의 선교 열정이 담긴 감동적인 글들
“제가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상상할 수 있을는지요. 저는 브르타뉴에도 조선에도 있지 않습니다. 브르타뉴와 조선은 둘 다 너무 사랑하는 곳인데, 브르타뉴를 떠난 것은 조선에 가기 위해서였고, 만일 조선을 떠난다면 그것은 하늘나라로 가기 위함인 것을……. 이제 저는 저의 모든 것을 바쳤던 땅에서 쫓겨났습니다. 그 땅은 저를 밀어내고 거부하지만 저의 눈길과 마음은 여전히 그곳을 향해 돌아갑니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싫증이 나서, 어려운 상황으로 인해 아직도 더 오래 기다려야 한다면 인내를 가지고 기다릴 것입니다. 하늘이 제게 맡긴 소임이 그곳에 있으니까요. 하느님이 제게 맡겨주신, 그리고 제 마음속에 늘 간직하고 있는 자녀들이 거기 있는데, 그들을 위로하지도 다시 보지도 못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가여운 자녀들, 오!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들 가운데 거하기 위해, 그들의 곤궁을 덜어주고 천국의 길을 가르쳐주기 위해 저는 기꺼이 제 피를 다 쏟을 것입니다.”
---「1867년 초, 상하이에서」중에서
“감옥이란 매일매일 걸어가는 기나긴 순교의 길과도 같다. 머리는 피로해지고 육체는 약해지며, 성격까지도 고약하게 변해간다. 생동하는 믿음과 한결같은 신심,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실한 겸허함만이 선하신 하느님의 은총과 더불어 나약함을 견디고 원수와 낙담 앞에 굴복하지 않게 후원해줄 수 있다. 시험이 고통스러워도 은총의 구원은 잘 감지할 수 있다. 나와 함께 있었던 천주교인들은 모두 기도 가운데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지켜나갔다. 그럼에도 가끔씩 다음과 같이 말하곤 한다. ‘대체 언제까지 우리가 이렇게 지내야만 하나. 어차피 사형을 내린다면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소.’”
---「1878년 옥중 서신 중에서」중에서
중국 땅에 발을 들여놓을 때 추방자의 마음은 울컥해졌다. 그는 말한다. “이 아름다운 나라, 나의 선교지를 다시 한 번 바라보려고 몸을 돌렸다. 어찌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장관인지! 강제로 떠날 수밖에 없는 나에게 조선이 미소를 짓고 있는 듯했다. 내 마음 저편에서는 이 나라 전체에 입맞추며 애정이 어린 축복을 보냈다. 그리고 ‘잘 있거라, 곧 다시 보자꾸나’라고 말했다.”
---「1878년 초, 중국으로 추방되었을 때」중에서
출판사 리뷰
병인박해에도 굴하지 않은 조선 선교 피어린 역사
조선의 풍습·기후·지리 희귀한 자료
한말 제국주의 열강의 동향 생생한 기록
그들이 본 우리(Korean Heritage Books) 총서
“총천연색으로 만나는 신선한 나라 조선”
“외국인들이 조선에 대해 남긴 기록이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것들이 우리에게 지난 과거를 돌이켜보게 하고, 현재 우리의 위상을 점검하게 하며,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미래의 이정표를 찾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외국인이 바라본 우리의 전근대 및 근대의 모습은 우리의 과거를 비춰주는 거울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미래를 위한 이정표 역할도 해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명지대-LG연암문고가 소장하고 있는 고서와 문서에서 한국문학번역원이 엄선해 출간해온 『그들이 본 우리』 총서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 - 김성곤 한국문학번역원 원장 「발간사」 중에서
『그들이 본 우리』 총서는 명지대-LG연암문고가 수집·소장하고 있는 자료 중에서 서양인이 남긴 조선의 기록만을 엄선하여 2008년부터 출간해온 국내 유일의 총서다. 발간·미발간본 포함 국내 다른 기관에 존재하지 않는 유일본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으며 일부는 지금까지 학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자료도 있다. 이런 희귀본들이 국내에서 빛을 보게 되어 동북아 지역과 관련된 인문·사회·과학 분야 및 한국학 전반에 걸쳐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세상에 단 한 종밖에 없는 도서를 찾아 전 세계 고서점을 뒤져 가격에 상관없이 수집했던 노력이 이제 결실을 맺어 우리 문화와 학문의 자양분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리델 신부는 누구인가
펠릭스-클레르 리델(Felix-Clair Ridel, 1830~1884)은 낭트 근교 작은 산업도시 샹트네(Chantenay)에서 독실한 신앙을 가진 가정에서 태어났다. 가톨릭 주교로서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6대 교구장을 지냈으며 한국 이름은 이복명(李福明)이다. 1857년에 사제 서품을 받고 1859년에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했으며, 1860년 7월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어 프랑스를 떠나 조선을 향해 출발했다. 1861년 3월께 랑드르 신부, 조아노 신부 등과 함께 조선에 입국해 충청도 공주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했고, 1866년 병인박해 때 살아남아 청나라로 탈출했다.
1869년 천주교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필리포폴리스(Philipopolis) 주교로서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했으며, 1877년에 조선에 입국했지만 7개월 만에 체포되면서 감옥에 갇혔다. 이때 자신의 수감 생활과 회고록을 담은 『나의 서울 감옥생활』(1878)을 저술했다. 이후 청나라의 주선으로 석방되어 만주로 추방되었다가 일본으로 건너가서 『한불자전(韓佛字典)』, 조선어 문법서 『한어문전(韓語文典)』 등을 저술하여 1880년 나가사키에서 간행했다.
“리델 주교, 그에게는 하느님이 전부였고, 모든 일에서 하느님을 믿고 의지한 사람이다. 인간을 무척이나 사랑했던 기독교인으로, 피곤함과 결핍한 환경, 그리고 극도의 위험과 죽음을 무릅쓰고 사랑이 이끄는 대로 영혼들의 가장 선두에 서서 전진했다. 하느님의 사람이고자 했던 그는 어떤 경우라도 자신의 의지를 주님의 뜻대로 맞추어간 성자이기도 하다”(「서문」). 그가 애타게 기다렸던 신앙의 자유는 그가 세상을 떠난 뒤 1886년에 조·불수호조약이 체결되어, 이때부터 조선에서도 가톨릭 신앙이 허용되었다.
『한불자전(韓佛字典)』·『한어문전(韓語文典)』 출간 ‘위대한 업적’
『한불자전』과 조선어문법 『한어문전』이 1880년 출판되었다. 리델 신부는 조선어 실력은 당시 모든 이가 알아줄 만큼 뛰어났다. 이를 바탕으로 사전을 출간한 것은 획기적이며 훌륭한 업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전이 나오자 만드는 데 들인 많은 공, 사전에 들어 있는 풍부한 정보는 학자·상인·외교관 등 한마디로 말해 조선에 관심을 가진 모든 이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일본·중국·미국·영국의 신문들은 그에 대해 크나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분야의 연구가 거의 없었음에도 15년이 넘는 기간 우리 선교사에게 그토록 많은 수고와 밤샘작업이 조용히 묻힌 채 지나간다면 그건 안 될 일이다. 이제까지 동양학자들은 조선 문학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었다. 『한불자전』은 조선어에 대한 진정한 첫 번째 저서다.
현학적인 고위 성직자의 이 저서는 사전학적 측면 이외에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흥미로움을 담고 있다. 즉 조선의 동물·어류·식물·과학·예술에 관하여 특별하고도 다채로운 인상을 조선만이 가진 색채감으로써 기술해놓았다. 외국인으로서 거의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미지의 새로운 것을 만나게 되는 한 나라의 관습과 제도에 대해 상세하고 진기한 내용을 알고자 한다면 이 책을 몇 장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더욱이 역사상 유례없이 유럽의 많은 눈길이 조선을 향하던 그 순간에 이 나라에 대한 지리 사전의 편찬은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시기적절한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리델 주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시대로서는 가장 최신의 지리적 약정에 따라, 조선 정부의 공식문서에 기초해 저술된 이 작업은 조선의 도(道)·도시·산·강 이름과 위치, 그리고 또한 군사·행정구역 표시를 포함하고 있다.”
글 속에 나오는 한·중·일 민족성에 대한 평가
“조선 백성은 외국인에게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들은 오히려 중국인보다 더 개방적이라고 할 수 있어, 조선인은 덜 뻔뻔하고 모든 종류의 개선과 발전에 대해 적개심도 덜 가지고 있으며, 지구상 나머지 땅 위에 살고 있는 오랑캐에 대해 그리 병적인 우월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중국인은 매우 영리하여서 외국 대사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롱했다. 특히 즐겁게 해주고 환대하는 척하면서 속이는 일에 능했다. 그런데 결국 그 이면에는 겨울이 오기까지 시간을 끌어보려는 속셈이 있었는데, 그렇게 되면 동맹국들이 철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여러 차례에 걸친 접촉이 있었다. 유럽인들은 항상 의기양양했다. 책략과 용기가 있다고 믿기에 앞으로도 여전히 그럴 것이다. 그러나 중국인 역시 그들만큼이나 지극히 영리하고 외교적이어서…….”
“일본인으로 말하자면 유럽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퍽이나 다르다! 아직도 어린아이, 특히 정신연령이 낮은 아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조선사람이 더 좋다. 아무도 내 의견에 동의하지는 않겠지만 그 누가 판단을 내릴 수 있으리오? 조선인은 일본인보다 더 강하고 청결하며 아마도 더 가난할지는 모르나 그렇다고 해서 덜 행복하지도 않은데, 일본인만큼 솜씨가 좋고 더 신중하며, 영리하기는 마찬가지여서 교만하기가 일본인보다 덜하지도 않다.”
조선 지식층의 ‘한글 천대-한문 중시’
“조선의 글은 25개의 글자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글자에 관한 한 이토록 큰 장점을 보유한 나라가, 순전히 자발적으로 그 어려운 중국의 상형문자 연구를 고집하며, 자국 언어에 대해서는 그리도 심한 경멸감을 가지고 있었을까 의문이 간다. 따라서 어느 정도 교육을 받은 사람은 서간문을 모두 한문으로 써서 통신하고 있다. 상점 간판과 경리장부 등 역시 한문으로 작성하는 것이 정상이다. 이 나라 지식인은 한글을 좋아하지도 않고 그 글로 책을 읽을 줄 알기를 꺼린다. 아이들이나 그렇게 하라고 하며, 이들이 읽는 책은 중국책이다. 공부를 하는 언어도 조선어가 아니라 한문이고, 추종자를 거느리는 철학과 학문의 체계 역시 중국 것이다. 이로 인한 당연한 결과로, 사본이 원본의 수준을 절대 넘어설 수 없는 법이라 조선의 학자는 중국 학자를 절대 따라갈 수 없는 처지다.”
조선인이 만든 증기선은 움직이지 않았다
조선인은 프랑스 함대의 증기선들을 보았다. 자신의 천재성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이들은 비슷한 배를 건조하고 심지어 유럽 시스템을 더 보강하기로 했다. 노동자들은 즉시 작업에 착수했다. 이들 눈에 너무도 쉬워 보였다. 증기선이 다른 선박들과 차별되는 점은 당연히 바퀴와 굴뚝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세 척의 배에는 굴뚝과 거대한 바퀴가 달려 있었고 내부에는 많은 손잡이와 핸들 등이 달린 장치를 설비해두었었다. 이 모든 장치를 작동시켜야 했는데 그러나 그건 어려운 문제였다. 첫 고동이 울려 퍼지자 선원들이 떼를 지어 배의 옆구리 쪽으로 몰려가 그 유명한 바퀴의 손잡이를 잡고 움직이려고 갖은 힘을 다 썼다. 증기선은 꼼짝하지 않았다. 힘에 부친 선원들은 다시 작업에 착수했는데 구슬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소리 지르고 살펴보고 기술자들이 제시하는 모든 방법을 써 본다. 꼼짝하지 않고 버티고 서 있는 선박은 웃음과 조롱을,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놀라움을 자아내었다. 망원정에 앉아 진수식을 거행한 대원군은 배가 몇 미터도 못 가서 주저앉는 망신을 당한 뒤 망연자실했다. 이 책에는 언급이 없지만 평양 대동강에서 불태운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의 잔해를 가져다가 한강변 망원정 앞에 대어 놓고 배를 만들었다고 한다.
조선의 풍습·기후·지리 희귀한 자료
한말 제국주의 열강의 동향 생생한 기록
그들이 본 우리(Korean Heritage Books) 총서
“총천연색으로 만나는 신선한 나라 조선”
“외국인들이 조선에 대해 남긴 기록이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것들이 우리에게 지난 과거를 돌이켜보게 하고, 현재 우리의 위상을 점검하게 하며,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미래의 이정표를 찾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외국인이 바라본 우리의 전근대 및 근대의 모습은 우리의 과거를 비춰주는 거울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미래를 위한 이정표 역할도 해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명지대-LG연암문고가 소장하고 있는 고서와 문서에서 한국문학번역원이 엄선해 출간해온 『그들이 본 우리』 총서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 - 김성곤 한국문학번역원 원장 「발간사」 중에서
『그들이 본 우리』 총서는 명지대-LG연암문고가 수집·소장하고 있는 자료 중에서 서양인이 남긴 조선의 기록만을 엄선하여 2008년부터 출간해온 국내 유일의 총서다. 발간·미발간본 포함 국내 다른 기관에 존재하지 않는 유일본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으며 일부는 지금까지 학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자료도 있다. 이런 희귀본들이 국내에서 빛을 보게 되어 동북아 지역과 관련된 인문·사회·과학 분야 및 한국학 전반에 걸쳐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세상에 단 한 종밖에 없는 도서를 찾아 전 세계 고서점을 뒤져 가격에 상관없이 수집했던 노력이 이제 결실을 맺어 우리 문화와 학문의 자양분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리델 신부는 누구인가
펠릭스-클레르 리델(Felix-Clair Ridel, 1830~1884)은 낭트 근교 작은 산업도시 샹트네(Chantenay)에서 독실한 신앙을 가진 가정에서 태어났다. 가톨릭 주교로서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6대 교구장을 지냈으며 한국 이름은 이복명(李福明)이다. 1857년에 사제 서품을 받고 1859년에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했으며, 1860년 7월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어 프랑스를 떠나 조선을 향해 출발했다. 1861년 3월께 랑드르 신부, 조아노 신부 등과 함께 조선에 입국해 충청도 공주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했고, 1866년 병인박해 때 살아남아 청나라로 탈출했다.
1869년 천주교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필리포폴리스(Philipopolis) 주교로서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했으며, 1877년에 조선에 입국했지만 7개월 만에 체포되면서 감옥에 갇혔다. 이때 자신의 수감 생활과 회고록을 담은 『나의 서울 감옥생활』(1878)을 저술했다. 이후 청나라의 주선으로 석방되어 만주로 추방되었다가 일본으로 건너가서 『한불자전(韓佛字典)』, 조선어 문법서 『한어문전(韓語文典)』 등을 저술하여 1880년 나가사키에서 간행했다.
“리델 주교, 그에게는 하느님이 전부였고, 모든 일에서 하느님을 믿고 의지한 사람이다. 인간을 무척이나 사랑했던 기독교인으로, 피곤함과 결핍한 환경, 그리고 극도의 위험과 죽음을 무릅쓰고 사랑이 이끄는 대로 영혼들의 가장 선두에 서서 전진했다. 하느님의 사람이고자 했던 그는 어떤 경우라도 자신의 의지를 주님의 뜻대로 맞추어간 성자이기도 하다”(「서문」). 그가 애타게 기다렸던 신앙의 자유는 그가 세상을 떠난 뒤 1886년에 조·불수호조약이 체결되어, 이때부터 조선에서도 가톨릭 신앙이 허용되었다.
『한불자전(韓佛字典)』·『한어문전(韓語文典)』 출간 ‘위대한 업적’
『한불자전』과 조선어문법 『한어문전』이 1880년 출판되었다. 리델 신부는 조선어 실력은 당시 모든 이가 알아줄 만큼 뛰어났다. 이를 바탕으로 사전을 출간한 것은 획기적이며 훌륭한 업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전이 나오자 만드는 데 들인 많은 공, 사전에 들어 있는 풍부한 정보는 학자·상인·외교관 등 한마디로 말해 조선에 관심을 가진 모든 이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일본·중국·미국·영국의 신문들은 그에 대해 크나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분야의 연구가 거의 없었음에도 15년이 넘는 기간 우리 선교사에게 그토록 많은 수고와 밤샘작업이 조용히 묻힌 채 지나간다면 그건 안 될 일이다. 이제까지 동양학자들은 조선 문학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었다. 『한불자전』은 조선어에 대한 진정한 첫 번째 저서다.
현학적인 고위 성직자의 이 저서는 사전학적 측면 이외에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흥미로움을 담고 있다. 즉 조선의 동물·어류·식물·과학·예술에 관하여 특별하고도 다채로운 인상을 조선만이 가진 색채감으로써 기술해놓았다. 외국인으로서 거의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미지의 새로운 것을 만나게 되는 한 나라의 관습과 제도에 대해 상세하고 진기한 내용을 알고자 한다면 이 책을 몇 장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더욱이 역사상 유례없이 유럽의 많은 눈길이 조선을 향하던 그 순간에 이 나라에 대한 지리 사전의 편찬은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시기적절한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리델 주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시대로서는 가장 최신의 지리적 약정에 따라, 조선 정부의 공식문서에 기초해 저술된 이 작업은 조선의 도(道)·도시·산·강 이름과 위치, 그리고 또한 군사·행정구역 표시를 포함하고 있다.”
글 속에 나오는 한·중·일 민족성에 대한 평가
“조선 백성은 외국인에게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들은 오히려 중국인보다 더 개방적이라고 할 수 있어, 조선인은 덜 뻔뻔하고 모든 종류의 개선과 발전에 대해 적개심도 덜 가지고 있으며, 지구상 나머지 땅 위에 살고 있는 오랑캐에 대해 그리 병적인 우월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중국인은 매우 영리하여서 외국 대사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롱했다. 특히 즐겁게 해주고 환대하는 척하면서 속이는 일에 능했다. 그런데 결국 그 이면에는 겨울이 오기까지 시간을 끌어보려는 속셈이 있었는데, 그렇게 되면 동맹국들이 철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여러 차례에 걸친 접촉이 있었다. 유럽인들은 항상 의기양양했다. 책략과 용기가 있다고 믿기에 앞으로도 여전히 그럴 것이다. 그러나 중국인 역시 그들만큼이나 지극히 영리하고 외교적이어서…….”
“일본인으로 말하자면 유럽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퍽이나 다르다! 아직도 어린아이, 특히 정신연령이 낮은 아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조선사람이 더 좋다. 아무도 내 의견에 동의하지는 않겠지만 그 누가 판단을 내릴 수 있으리오? 조선인은 일본인보다 더 강하고 청결하며 아마도 더 가난할지는 모르나 그렇다고 해서 덜 행복하지도 않은데, 일본인만큼 솜씨가 좋고 더 신중하며, 영리하기는 마찬가지여서 교만하기가 일본인보다 덜하지도 않다.”
조선 지식층의 ‘한글 천대-한문 중시’
“조선의 글은 25개의 글자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글자에 관한 한 이토록 큰 장점을 보유한 나라가, 순전히 자발적으로 그 어려운 중국의 상형문자 연구를 고집하며, 자국 언어에 대해서는 그리도 심한 경멸감을 가지고 있었을까 의문이 간다. 따라서 어느 정도 교육을 받은 사람은 서간문을 모두 한문으로 써서 통신하고 있다. 상점 간판과 경리장부 등 역시 한문으로 작성하는 것이 정상이다. 이 나라 지식인은 한글을 좋아하지도 않고 그 글로 책을 읽을 줄 알기를 꺼린다. 아이들이나 그렇게 하라고 하며, 이들이 읽는 책은 중국책이다. 공부를 하는 언어도 조선어가 아니라 한문이고, 추종자를 거느리는 철학과 학문의 체계 역시 중국 것이다. 이로 인한 당연한 결과로, 사본이 원본의 수준을 절대 넘어설 수 없는 법이라 조선의 학자는 중국 학자를 절대 따라갈 수 없는 처지다.”
조선인이 만든 증기선은 움직이지 않았다
조선인은 프랑스 함대의 증기선들을 보았다. 자신의 천재성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이들은 비슷한 배를 건조하고 심지어 유럽 시스템을 더 보강하기로 했다. 노동자들은 즉시 작업에 착수했다. 이들 눈에 너무도 쉬워 보였다. 증기선이 다른 선박들과 차별되는 점은 당연히 바퀴와 굴뚝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세 척의 배에는 굴뚝과 거대한 바퀴가 달려 있었고 내부에는 많은 손잡이와 핸들 등이 달린 장치를 설비해두었었다. 이 모든 장치를 작동시켜야 했는데 그러나 그건 어려운 문제였다. 첫 고동이 울려 퍼지자 선원들이 떼를 지어 배의 옆구리 쪽으로 몰려가 그 유명한 바퀴의 손잡이를 잡고 움직이려고 갖은 힘을 다 썼다. 증기선은 꼼짝하지 않았다. 힘에 부친 선원들은 다시 작업에 착수했는데 구슬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소리 지르고 살펴보고 기술자들이 제시하는 모든 방법을 써 본다. 꼼짝하지 않고 버티고 서 있는 선박은 웃음과 조롱을,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놀라움을 자아내었다. 망원정에 앉아 진수식을 거행한 대원군은 배가 몇 미터도 못 가서 주저앉는 망신을 당한 뒤 망연자실했다. 이 책에는 언급이 없지만 평양 대동강에서 불태운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의 잔해를 가져다가 한강변 망원정 앞에 대어 놓고 배를 만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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