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로마카톨릭-천주교 (책소개)/8.천주교신앙인물

선교사의 여행 - 남북한을 사랑한 메리놀회 함제도 신부 이야기 (2020)

동방박사님 2023. 11. 20.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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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선교사의 여행』은 한국에서 60년간 선교사로 살아 온 메리놀회 (미국 가톨릭 외방전교회) 함제도 신부(Fr. Gerard E. Hammond)의 생애를 기록한 것이다. 아일랜드계 미국인인 함 신부는 1960년에 한국에 와서 30년동안 청주교구 사제로 지내면서, 가난했던 남한사람들과 ‘함께’ 살았다. 1989년 이후 메리놀회 한국지부장으로 일하면서, 지난 30년 동안 가난하고 아픈 북한사람들을 위해 60여 차례 방북하는 등 지금은 그들과 ‘함께’ 한다. 평생 선교사로 산 그가 북한사람들을 대하는 삶의 태도는, 훗날 우리가 그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인도적 지원에 참여하는 그가 지금 북한에서 ‘선교’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관점은 북한 선교에서 정작 무엇이 중요한 지를 알려준다. 그리고 나아가 지난 60년 동안, 경제적으로 풍요해진 남한에서 우리가 정작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한다. 이 작업은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의 “한반도 평화를 위한 가톨릭 구술사 채록 2019” 프로젝트의 결과로, 2019년 8월부터 12월까지 20시간이 넘는 인터뷰 내용을 기초로 세 명의 연구자가 함신부의 구술내용을 재구성하여 정리하였다.

목차

추천사 (이기헌 주교)

프롤로그


1부 삶은 기차여행입니다
가족ㆍ월든 자비 학교ㆍ
메리놀 소신학교ㆍ
메리놀 신학교ㆍ선교지, 한국ㆍ
한국으로 가는 긴 여행

2부 선교사의 로맨스
도착ㆍ한국어 수업ㆍ첫 성탄ㆍ
청주교구 발령ㆍ5·16 군사쿠데타ㆍ
성심고아원ㆍ파 주교님ㆍ
북문로본당 주임신부ㆍ
수동본당 주임신부ㆍ
청주교구 총대리ㆍ
가정 방문ㆍ교황 훈장 서훈ㆍ
괴산본당 주임신부ㆍ
절망과 무력감ㆍ

3부 동무, 동지, 신부 선생, 할아버지
메리놀회 한국 지부장ㆍ북한 방문ㆍ
장충성당 미사ㆍ북한을 지원하는 마음가짐ㆍ유진벨 재단의 결핵 환자 지원 사업ㆍ
내가 만난 북한 사람들ㆍ
북한 선교의 소망

4부 선교사의 자리, 선교사의 마음
두려움ㆍ십자가ㆍ연민ㆍ떠남ㆍ
야전 병원ㆍ존엄과 존중ㆍ어머니ㆍ
남은 일

에필로그
당신은 진보입니까, 보수입니까ㆍ (이향규)ㆍ
미국인 선교사 할아버지의 마음을 가늠해 보다 (고민정)ㆍ
선교사의 발자취에 손을 얹어 보았다(김혜인)ㆍ
당신은 어떤 종류의 선교사입니까ㆍ (강주석신부)ㆍ

함제도 신부가 선교사로 살아온 길
 

저자 소개)

저 : 함제도 (Fr. Gerard E. Hammond,제라드 해먼드 신부)
 
가톨릭 외방선교회 가운데 하나인 메리놀회의 원로 선교사. 1933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아일랜드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메리놀 신학대학을 졸업한 뒤 뉴욕 메리놀 선교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60년 첫 선교지로 한국에 온 뒤 청주교구 북문로·수동·괴산 성당에서 주임 신부로 일하고 청주교구 총대리 신부로 오랫동안 활동했다. 1989년 메리놀회 한국 지부장에 임명된 뒤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 사업, 특히 결핵...
 
편 : 이향규
 
저술가, 사회활동가, 교육자.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교육학과에서 북한 교육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가청소년위원회 무지개청소년센터, 한국교육개발원 탈북청소년 교육지원센터, 북한대학원대학교, 한양대학교 글로벌다문화연구원 등에서 북한 출신 이주민, 다문화 청소년, 결혼 이주 여성 관련 연구자이자 활동가로 일했다. 2016년에 남편 토니, 두 딸 애린, 린아와 함께 영국으로 이주한 뒤로 영국과...

책 속으로

어디 선교지로 갈 지는 부제품을 받을 때 결정하고 신청할 수 있어요. 나는 한국에 지원했어요. 장익 주교님이 꼭 한국에 가야 한다고 강조했던 영향이 컸지요. 3지망까지 쓸 수 있었는데 1지망을 한국으로 썼어요. 선교지는 사제품을 받기 전에 알게 돼요. 나는 1960년 4월 17일에 한국 임명을 통보받았어요. 당시 그걸 집에 전화로 알려줄 수 있었는데 식구들이 모두 제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저는 한국으로 가요.” 하니 할머니 할아버지 모두 울었어요. “도대체 왜 거길 가니?”라고 하셨죠. 할머니는 한국 하면 전쟁만 생각났나 봐요. 전쟁 난 곳에 도대체 왜 가야 하냐고. 아버지는 아무 말씀 안 하셨어요.
--- pp.45-47, 「1부 삶은 기차여행입니다.」 중에서

“제가 최선을 다 해 보겠지만, 여기에 오래 있지는 못할 것 같아요. 아무래도 필라델피아 교구로 돌아가고 싶을 것 같아요. 제가 있을 곳은 거기라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코너신부님이 물었어요.“ 운전면허증이 있니?” “네” “그럼 내일 나를 장호원 성당에 좀 데려다 줄 수 있겠니?”
장호원본당에는 2층으로 된 사제관이 있었고 메리놀 신부님 세 분이 계셨어요. 코너 신부님은 제게 밖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어요. 그리고 혹시 사람들이 다가와서 말을 걸면 이야기를 나눠 보라고 했어요. 거기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아이들이 저한테 다가왔어요. 아이들이 아주 가깝게 다가오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이야기는 충분히 나눌 수 있는 거리였죠. 그때가 아마 아이들과 “눈을 먹을까? 코를 먹을까? 입도 먹을까? 왁!” 게임을 처음으로 했을 때일 겁니다. 아이들 모두 소리를 지르며 도망갔어요. 물론 얼굴에 함박웃음을 띤 채요. 그러고는 다시 제 곁으로 살금살금 다가왔어요. 나는 편안해졌어요.
코너 신부님과 트럭을 타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온통 흙길이어서 네 시간 넘게 걸렸어요. 차 안에서 신부님께 오늘 있었던 일을 말씀드렸어요. 코너 신부님이 저를 돌아보며 “신부님, 신부님은 이제 비로소 로맨스를 시작한 겁니다.” 하고 말씀하셨어요. “로맨스요?”
제 로맨스는 그렇게 시작되었답니다.
--- pp.174-175, 「4부 선교사의 자리, 선교사의 마음」 중에서

당시 성당에 주머니를 달아두거나 독을 달아두면 신자들이 쌀 한 숟가락 보리 한 숟가락을 아껴서 거기에 보탰어요. 그 자루나 독은 기적처럼 채워져서 꼭 필요한 사람에게로 돌아갔죠. 모든 사람들이 자기들 몫을 조금씩 조금씩 내놓은 거에요.
그 시절 저는 장례식이 제일 힘들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무력감을 느꼈거든요. 아이가 넷이나 되는 엄마가 이제 자기는 어ㄸ?ㅎ게 살아야 하느냐고 물었어요. “남편은 죽었고 쌀독은 비었어요. 신부님, 이제 뭘 해야 할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봅시다.” 하고 대답했지만 말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꼈어요. 제가 어ㄸ?ㅎ게 이 가족의 앞날을 책임지겠어요, 제가 어ㄸ?ㅎ게 이 아이들을 먹일 수 있겠어요. 정말 모르겠고 곤혹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가 뭔가 “하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어떤 일이 벌어져요. 가난한 사람들이 조금씩 쌀을 모으는 것처럼 말입니다.
--- p.198, 「4부 선교사의 자리, 선교사의 마음」 중에서

나는 북한 사람들한테 개인적인 걸 전혀 묻지 않았어요. 같이 차를 타고 가다 보면 그분들이 무엇을 물어볼 때도 있었는데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제가 같은 질문으로 되묻지는 않았어요. 그게 도움이 되는 소통방법인 것 같아요. 그들이 어디 사는지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묻지 않았지요. 그래도 시간이 지나 조금 친해지면 몇 명은 자기 가족사진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들 스스로 말하고 싶어 할 때 듣는 것,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 p.152, 「3부 동무, 동지, 신부 선생, 할아버지」 중에서

어느 날 제가 거기 사람들에게 “나중에 언제 기회가 되면 서울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 하고 초대했어요. 그랬더니 “신부님, 걱정하지 마세요. 꼭 찾아갈께요. 그때는 우리가 먹을 건 우리가 잘 챙겨갈께요.”하고 진심으로 대답했어요. 우리에게 폐가 되지 않으려고 그렇게 말한 거에요.
--- p.158, 「3부 동무, 동지, 신부 선생, 할아버지」 중에서

장충성당을 교회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건 무너지기 아주 쉬운 약한 교회이겠지요. 그렇다고 그게 그곳에 가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될까요? 지금 단계에서는 그게 교회인지 아닌지를 논리적으로 판단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이 사람들의 신앙이 살아날지 죽을지, 신자들이 어떤 종류의 신앙을 갖고 있는지, 뭐 이런 것들은 나중에 차차 드러나게 될 거에요. 그러나 지금처럼 막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자료나 증거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 (compassion)에 초점을 맞추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요?
--- p.180, 「4부 선교사의 자리, 선교사의 마음」 중에서

우리 청주교구에 북한에서 온 피란민 남자가 있었어요. 그분은 전쟁통에 가족들을 고생시키지 않으려고 혼자 내려왔다가 결국 돌아가지 못했지요.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재혼을 하고 싶다면서 주교님을 찾아왔답니다. 교회법상 한 번 교회에서 혼배성사를 한 사람은 재혼할 수 없지요. (......) 그때 파 주교님은 이 일을 교황청에 문의하지 않으셨어요. 그분은 언제나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신자들은 우리가 상식에 근거해서 판단하기를 기대해요”
상식에 근거해서 판단하는 것은 어떤 일이 “안되게 하기 위해서” 하지는 않아요. 어떤 일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하지요. 장충성당의 미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교회법에서만 근거를 찾거나 우리 체제에 맞춰서만 보지 말고 상식에 근거해서 방법을 찾아야죠. 우리는 북한 사람들이 처해 있는 상황에서 그곳 신자들의 영혼을 어ㄸ?ㅎ게 구원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하죠.
--- p.183, 「4부 선교사의 자리, 선교사의 마음」 중에서

제가 지금 북한에 가는 건 가톨릭을 전교하려고 가는 게 아니에요. 아픈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서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가는 것이죠. 북한에서 우리와 함께 다닌 수행원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어요. 그들은 사제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죠. 그들은 사제를 원하지 않았어요. 그때 제가 “나는 당신과 똑 같아요. 자 보세요, 당원으로서 당신 삶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인민을 섬기는 거 아닌가요? 똑 같아요. 저는 공산주의자는 아니에요. 하지만 인민을 위해서 봉사하지요. 사람들을 섬깁니다. 사실 우리는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거에요.” 실은 그분들 없이는 우리도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없고 우리 없이는 그분들도 마찬가지에요. 서로를 필요로 하는 거죠. 그래서 전 ‘함께’라는 표현을 주로 써요. “그러니까 함께 합시다.”
--- p.197, 「4부 선교사의 자리, 선교사의 마음」 중에서

삶은 기차여행 같습니다. 정차하는 역이 많고 행로가 자주 바뀌고 온갖 사건이 일어나는 그런 여행 말입니다. (......) 이 여행은 기쁨, 슬픔, 환상, 기대, 만남과 이별로 가득합니다. 기차에서 만난 승객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함께 가게 된다면, 서로 사랑하고 도와준다면, 그건 참 좋은 여행이 될 겁니다.
--- pp.53-54, 「1부 삶은 기차여행입니다.」 중에서
 

출판사 리뷰

이 책은 한국에서 60년간 선교사로 살아 온 메리놀회 (미국 가톨릭 외방전교회) 함제도 신부(Fr. Gerard E. Hammond)의 생애를 기록한 것이다.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의 “한반도 평화를 위한 가톨릭 구술사 채록 2019” 프로젝트로 2019년 8월부터 12월까지 9회에 걸쳐 진행된 인터뷰 내용을 이향규, 고민정, 김혜인 세 연구자가 정리하고 재구성한 것이다. 미국(1부), 한국(2부), 북한(3부)에서의 이야기 끝에 결국 노사제의 마음(4부)에 다다르는 긴 여행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1부 삶은 기차여행입니다.
1부는 아일랜드계 집안에서 성장한 함제도 신부가 유년 시절과 사제가 되는 과정, 그리고 선교사로 한국에 파견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넉넉하지 않았던 이민자 가족의 삶이었지만, 가족들 특히, 할머니의 기도 속에서 함 신부는 자연스럽게 가난한 이들을 연민하는 선교사로 성장해간다. 메리놀 소신학교 시절부터 단짝 친구였던 장익 주교와의 만남도 인상적으로 그려진다.

2부 선교사의 로맨스
2부는 1960년에 한국에 도착한 그가 1980년대 말까지 청주교구에서 사목했던 시기의 이야기이다. 웃음도 그리고 눈물도 많았던 함 신부가 가난했던 교우들과 ‘로맨스’를 나누는 장면은 양들의 목소리를 잘 듣는 착한 목자의 모습이다. 이 시절에 함 신부는 1930년대 평안도에서 사목했던 제임스 파르디 주교의 비서를 지내면서 ‘북한 선교’를 위해 기도했고, 또 외국인 선교사이자 교구 총대리로서 유신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3부 동무, 동지, 신부 선생, 할아버지
3부는 함제도 신부가 메리놀회의 한국 지부장으로 활동하면서 대북 인도적 협력사업에 참여했던 경험을 묘사한다. 1990년대 기근 이후 그가 방문했던 북한 사회는 사실 그가 젊은 사제로 사목했던 남한의 모습과 닮아있다. 처음에는 동무와 동지로 불리던 그가 신부 선생으로 그리고 마침내는 그들의 할아버지가 되는 과정은 한반도 전체의 복음화를 소망하는 한국 천주교회에게 그리스도교 선교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해준다.

4부 선교사의 자리, 선교사의 마음
4부는 한국 파견 60주년을 맞이하는 선교사 함 신부의 ‘떠남’에 대한 묵상을 담담하게 드러낸다. 한국전쟁 이후 오랜 세월 자리를 지켰던 메리놀회 한국지부 건물을 떠나야 하는 그는 한편으로는 젊은 시절 꿈꾸었던 것처럼 평양에 사목하러 갈 수 없다는 게 슬프다. 하지만, 선교사의 숙명을 차분하게 고백하는 함 신부는 그의 유산을 이어받은 한국교회가 이제 더 열린 마음으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봉사하는 모습에서 희망을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