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인문교양 (독서>책소개)/6.역사문화교양

간송 전형필 (2010) - 조선 제일의 수장가 간송의 삶과 문화재 수집 이야기

동방박사님 2024. 7. 29. 10:28
728x90

책소개

탁월한 심미안으로 한국美의 품격과 기준을 만든 선각자
간송 전형필의 우리 문화재 수집 이야기


우리 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를 복원하고, 위창 오세창에서 월탄 박종화, 청전 이상범 등 당대 서화가와 문사들을 후원하며, 암흑의 식민지 조선에 탐미와 매혹의 근대예술을 꽃피운 인물 간송. 억만금 재산과 젊음을 바쳐 모은 서화 전적, 골동들을 보존하기 위해 한국 최초의 개인 박물관 간송미술관을 세운 간송 전형필의 일대기를 한 권의 책에 담았다.

간송은 조선의 문화예술사 연구가 전무하던 시대, 탁월한 심미안으로 한국美의 품격과 기준을 만든 인물이다. 서울 종로 4가의 99칸 대가의 집 자손이었던 그는 '식민지 시대 조선 청년으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다 온 재산을 털어서라도 일제가 빼앗으려는 문화유산을 조선 땅에서 지켜내겠노라 결심하게 된다. 그 후 그는 억만금 재산과 젊음을 바쳐 일본으로 유출되는 서화, 도자기, 불상, 석조물, 서적들을 수집해서 이 땅에 남겼다. 일본으로 건너간 문화재 중에서도 꼭 찾아와야 할 가치가 있다는 판단이 서면, 값을 따지지 않고 조선 땅으로 돌아오게 했다.

일제강점기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았으나 편안히 유유자적 사는 대신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한 간송의 삶에 매료된 저자는, 집요한 자료 수집과 취재, 철저하고 세심한 고증을 바탕으로 간송의 삶과 시대를 되살려내었다. 개인적 치부가 아닌, 가치 있는 일에 재산을 사용하는 것이 부자의 진정한 소임이라고 깨달은 간송의 삶은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전해줄 것이다.

목차

서문_ 여기, 간송 선생이 있다

청잣빛 하늘, 천 마리의 학
무거운 짐을 진 식민지 소년
무엇을 할 것인가?
평생의 스승, 위창 오세창
하늘이 내린 재산
첫 수집품
세상의 눈에서 멀어져야 문화재를 지킨다
고서화 수집의 전진기지, 한남서림
황금광 시대의 꿈
우정과 헌신의 동지, 이순황과 신보
추사를 만나다
겸재와 진경시대
현해탄을 건너 혜원을 찾아오다
위기!
국보가 된 참기름병
기와집 400채의 승부
우리나라 최초 개인 박물관, 보화각
구제와 교육사업
훈민정음 해례본을 구하다
아, 전형필

해설_ 간송 전형필 수집품의 문화사적 의미
간송 수집품 중 지정 문화재 목록
간송 전형필 연보
참고 도서
수록 작품 찾아보기

저자 소개 

저 : 이충렬
한국 전기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전기 작가. 한국 문화·사회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의 삶을 되살리는 데 전념하고 있다. 치밀한 자료 조사와 탄탄한 스토리텔링으로 인물의 궤적과 시대정신을 담아내 독보적인 전기 작가의 길을 개척했다. 1994년 『실천문학』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 『간송 전형필』 『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 『아, 김수환 추기경』 『국제법학자, 그 사람 백충현』 『천년...

책 속으로

“젊은 분의 기백이 정말 대단하십니다. 제가 졌습니다. 저의 결례를 마음에 두지 말고 웃음으로 넘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무라카미는 청년 전형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전형필도 천학매병을 양보해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인사로 화답했다. 무라카미는 전형필에게 앞으로 ‘조선 제일의 수장가’가 되라고 덕담했다. 광복 후 국보 제68호로 지정된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은 이렇게 조선 땅에 남았다. --- p.33

오세창의 표정이 복잡했다. 세파에 시달려본 경험이 없는 저 맑은 청년이 어떻게 그 큰 재산을 꾸려갈 것인가.
“그래서 오늘은 어르신께 제 장래에 대해 상의 드리려고 찾아뵈었습니다. 재작년 여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이제부터 우리나라의 옛책과 서화가 이리저리 흩어지지 않도록 모아보고 싶습니다. 춘곡 선생님과 어르신께서 길을 인도해주신다면, 조선 땅에 꼭 남아야 할 서화 전적과 골동품을 지키는 데 미력한 힘이나마 보태겠습니다.”
오세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쉽지 않은 큰 결심을 했구먼. 그런데 서화 전적을 지키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전형필은 잠시 혼란스러웠다. 지극히 당연한 걸 묻는 의도가 뭘까? --- p.82

전형필은 먼저 《근역서화징》을 보았다. 신라시대 솔거부터 조선 말 철종 때까지 1,117명의 서화가에 대한 인명사전인 《근역서화징》에 소개된 옛 감식안들의 품평을 눈여겨보았다. 그중 훌륭한 품평을 받은 서화가가 보이면, 오세창이 빌려준 《근역화휘》에서 그림을 찾아보았다.
두 달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근역화휘》를 보면서, 자신이 이것을 능가하는 화첩을 꾸밀 수 있을지 생각했다. 때로는 자신이 생기다가도, 공민왕의 그림같이 지금은 구할 수 없는 작품을 보면 너무 늦은 것 같기도 했다. --- p.87

박물관! 오세창과 이순황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졌다. 오세창이 가슴을 진정시켜며 물었다.
“박물관이라면… 창경궁에 있는 이왕가 박물관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인가?”
당시 우리나라에는 이왕가 박물관과 1915년 경복궁 안에 만든 조선총독부 박물관 그리고 경주와 부여에 총독부 박물관 분관이 있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형필이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 박물관을 짓겠다고 하니, 오세창이나 이순황이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 p.156

전형필은 밤이 새도록 《훈민정음》을 읽고 또 읽었다. 만들어진 지 500년 만에 발굴된 보물 중의 보물이었고, 전형필이 수집을 시작한 지 13년 만에 성취한 대발굴이었기에, 눈물을 흘리다가는 웃었고, 웃다가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새벽 동이 틀 무렵 오동나무 상자에 넣어 집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갈무리했다.
전형필은 《훈민정음》을 자신이 수장하고 있는 수집품 중 최고의 보물로 여겼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을 갈 때도 품속에 품었고, 잘 때는 베개 속에 넣고 지켰다.
--- p.377

출판사 리뷰

지금까지 한번도 공개되지 않은 간송의 삶, 비밀의 수장고가 열린다!
성북동의 ‘간송미술관’ 전시가 열리는 봄, 가을이면 전국이 들썩인다. 관람자들은 적어도 한두 시간은 미술관 밖에서 기다려야 한다. 정선, 김홍도, 신윤복, 김정희 등 우리 예술의 명품과 진품을 보기 위해서, 매년 1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운집한다.
간송미술관의 소장품은, 질적인 면에서 국내 국·공·사립을 불문하고 명실 공히 최고이다. 삼국시대부터 조선말 근대에 이르기까지 전 시대에 걸쳐 있으며, 서화는 물론 조각과 공예 등 조형미술 모든 분야를 아우른다. 국보 12건, 보물 10건 등 22건의 국가 지정문화재와 뜰에 전시된 석탑, 부도, 불상 등 서울시 지정문화재 4건 외에 전체 규모를 알 수 없는 이곳은 ‘민족 문화유산의 보고’라 지칭된다. 그래서 간송미술관 소장품만으로 한국미술사를 서술할 수 있으며, 이를 제외한 한국회화사는 상상할 수 없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국내 최초 사립 미술관인 간송미술관의 설립자이자 조선 제일의 수장가 간송 전형필(1906-1962)의 삶과 문화재 수집 이야기 『간송 전형필』이 김영사에서 출간되었다. 조선의 문화예술사 연구가 전무하던 시대 탁월한 심미안으로 한국美의 품격과 기준을 만든 선각자, 일제강점기 절망의 시대 조선의 국보와 혼을 지킨 수문장 간송 전형필. 그는 왜 문화재 수집에 억만금을 쏟아부었는가? 그가 평생을 바쳐 이루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가 이 땅에 남긴 서화, 도자기, 불상, 석조물, 서적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10년의 연구조사, 100여 장의 원색사진, 간송가의 자료협조와 감수로 마침내 간송 전형필 일대기를 만난다!

간송家에서 감수하고 공인한 최초 평전
이 책은 간송 전형필의 선각자적이고 감동적인 삶에 대한 평전이다. 일제강점기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았으나 편안히 유유자적 사는 대신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한 간송의 삶에 매료된 저자는, 놀라우리만치 집요한 자료 수집과 취재, 철저하고 세심한 고증을 바탕으로 간송의 삶과 시대를 완벽하게 되살려내었다. 왜 간송이 문화재 수집에 모든 재산과 젊음을 바쳤는지, 그에게 어떤 번민과 고통이 있었는지, 그를 사로잡았던 한국의 미가 무엇이었는지를, 실제 간송의 마음을 들여다보듯 생생히 재현해내었다.
이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간송 전형필의 장자인 전성우 화백이 공인하고 감수를 했다. 초고를 읽은 간송家로부터 자료와 도판 협조를 받고 자문을 얻었다. 따라서 이 책은 간송 전형필의 실존적 삶 구석구석을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는 평전이자 정전이다. 그의 탄생 100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비로소 간송을 만나게 되었다!

한국의 미를 지킨 문화 국부國父 간송, 예술의 시대 심미의 시대를 꽃피우다!
우리 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를 복원하고, 위창 오세창에서 월탄 박종화, 청전 이상범 등 당대 서화가와 문사들을 후원하며, 암흑의 식민지 조선에 탐미와 매혹의 근대예술을 꽃피운 간송. 억만금 재산과 젊음을 바쳐 수장한 서화 전적, 골동들을 보존하기 위해 세운 한국 최초의 개인 박물관 간송미술관. 그는 한국의 미를 발굴하고 지킨 문화 국부였다!
서울 종로 4가의 99칸 대가의 집 자손이었던 전형필은 ‘식민지 시대 조선 청년으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였다. 도서 수집에 열정적이던 전형필은 독립투사이자 시대의 감식안이었던 오세창을 만나면서 삶에 큰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근역서화징』이라는 우리나라 역대 서화가들의 총서를 집필하고 있던 스승의 모습에 전형필은 큰 감동을 받았다. 그는 온 재산을 털어서라도 일제가 빼앗으려는 문화유산을 조선 땅에서 지켜내고자 결심하게 된다.
그 후 그는 억만금 재산과 젊음을 바쳐 일본으로 유출되는 서화, 도자기, 불상, 석조물, 서적들을 수집해서 이 땅에 남겼다. 일본으로 건너간 문화재 중에서도 꼭 찾아와야 할 가치가 있다는 판단이 서면, 값을 따지지 않고 조선 땅으로 돌아오게 했다.
또한 간송은 미술관을 세운 북단장에서 위창을 비롯한 고희동, 월탄 박종화, 청전 이상범, 심산 노수현 등 당대 서화가와 문사들과 교유하며, 이들의 후원자 역할을 한다. 암흑의 식민지 조선에 문화예술의 꽃을 피우며 근대를 열었다.
식민지 시대 조선 청년으로서 무엇을 할 것인지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던 소년 전형필이 어떻게 해서 조선 제일의 수장가로 한국미의 품격과 기준을 만든 선각자가 되었는지, 하늘이 내린 부를 시대와 민족을 위해 어떻게 가치 있게 활용하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게 되었는지, 차분하고도 설득력 있게 좇고 있는 이 책은 큰 감동을 안겨준다.
간송은 개인적 치부가 아닌, 가치 있는 일에 재산을 사용하는 것이 부자의 진정한 소임이라고 깨달은 사람으로서 가히 존경받므 만한 부자였다. 부자의 도덕적 의무를 이야기 할 만큼 사회가 안정적이지 않았지만 선각자로서 한 시대를 앞서 간 사람이었다.

천학매병에서 훈민정음까지,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다!
세기의 보물 『훈민정음』, 고려청자의 백미로 꼽히는 천학매병, 겸재, 현재, 단원, 혜원, 오원, 추사 등 거장의 최고 걸작 100점씩을 수집하기까지! 간송이 국보급 명품과 보물을 찾고 소장하기 위해 벌인 승부의 명장면들. 간송의 마음을 뒤흔든 최고의 보물은 무엇이었을까? 천하 명품들에 숨겨진, 드라마보다 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간송은 값의 고하를 따지지 않고 명품 위주로 수집했기 때문에 많은 국보급 문화재를 모을 수 있었다. 일본에 유출된 『혜원전신첩』(국보 제135호)을 파격적인 가격으로 되사왔고, 심사정이 타계 전해인 1768년 62세 때 그린 818센티미터에 이르는 발군의 대작 〈촉잔도〉는 보존 상태가 나빴음에도 불구하고 거금을 주고 샀을뿐더러 일본으로 보내 그림 가격만큼 많은 돈을 들여 보수했다.
청자 가운데 최고의 매병으로 꼽히는 국보 제68호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을 수장한 것은 1935년으로 간송의 나이 30세 때였고, 고려청자 최고 컬렉터로 일본 주재 영국인 변호사 존 개스비의 소장품 전체를 인수한 것이 1938년이다. (398쪽)

1943년 『훈민정음』을 입수한 것은 특히나 극적이었다. 『훈민정음』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전형필은 당시 집 열 채 값에 해당하는 1만원을 지불하고 입수했다. 한글 탄압을 일삼던 일제가 알면 문제가 될 것을 염려하여 비밀리에 보관하다가 1945년 광복 후에 이를 공개했다. 우리 역사상 최고의 발명품이자 그 창제 동기가 분명히 밝혀진 ‘훈민정음’이 세상에 빛을 본 것에는 전형필의 숨은 노력이 컸다.

전형필은 일본에까지 가서 우리의 문화유산을 찾아오기도 하였다. 지금도 조선시대 풍속화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신윤복의 그림이 담겨 있는 『혜원전신첩』(국보 135호)은 전형필이 일본에서 찾아온 작품이다. 이외에도 고려청자, 조선백자, 김홍도와 정선의 그림, 김정희의 서화 등 최고의 문화재들이 전형필의 손을 거쳐 현재는 간송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제 그의 유업은 장자인 전성우에 이어졌고, 1966년에는 전형필의 소장품을 정리, 연구하기 위하여 한국민족미술연구소와 간송미술관이 발족되었다. 현재 간송미술관에서는 1년에 두 차례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특별전시회를 개최하여 우리 문화재의 최고 걸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