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조선시대사 이해 (독서>책소개)/4.조선역사문화

해사일기 (2018)

동방박사님 2024. 9. 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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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일으킨 일본의 전쟁책임을 묻고,
260여 년 간의 선린우호의 길을 열어간 조선통신사의 생생한 기록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웃 나라. 사회 문화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진 한국과 일본. 지금도 우리는 일본을 너무 모르는 것이 아닐까? 역사의 흩어진 파편을 엮어 나가는 데 귀중한 디딤돌이 될 것이다. 조엄의 『해사일기』를 단순한 번역을 넘어 치밀한 고증과 사진을 담아 펴냈다. 이 책은 조선통신사 기록 중 손꼽히는 기록이다. 이 『해사일기』의 가치는 조엄의 해박한 지식을 통한 당대 조선 사대부 지식인이 가졌던 세계관을 살펴 볼 수 있으며, 또 외교관으로서 맡은 임무를 끝까지 완수하는 자세와 외교술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귀국길에 발생한 일행 ‘최천종의 피살사건’에 대해 그 과정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치밀하게 기록한 사실과 목민관의 본분을 잊지 않고 고구마의 재배방법을 기록하여 들여온 사실은 특히 눈여겨 볼만하다.

목차

옮긴이의 말
서序

사행길:에도를 향하여

1. 양재역良才驛 1763.8.3./ 2. 용인龍仁 1763.8.4./ 3. 죽산竹山 1763.8.5./ 4. 숭선崇善 1763.8.6./ 5. 충주忠州 1763.8.7./
6. 안보역安保驛 1763.8.8./ 7. 문경聞慶 1763.8.9./ 8. 유곡역幽谷驛 1763.8.10./ 9. 예천醴泉 1763.8.11./ 10. 안동安東 1763.8.12.~13/ 11. 의성義城 1763.8.14./ 12. 신녕新寧 1763.8.15./ 13. 영천永川 1763.8.16./ 14. 경주慶州 1763.8.17./ 15. 울산蔚山 1763.8.18./ 16. 용당창龍堂倉 1763.8.19./ 17. 동래東萊 1763.8.20.~21/ 18. 부산釜山 1763.8.22.~10.5/ 19. 사스우라佐須浦 1763.10.6.~10/ 20. 오우라大浦 1763.10.11.~18/ 21. 니시도마리우라西泊浦 1763.10.19.~25/ 22. 고토우라琴浦 1763.10.26./ 23. 쓰시마對馬島 1763.10.27./ 24. 세이잔지西山寺 1763.10.28.~11.12/25. 이키노시마壹岐島 1763.11.13.~12.2/ 26. 아이노시마藍島 1763.12.3.~25/ 27. 낭하쿠南泊 1763.12.26./ 28. 아카마가세키赤間關(下關)(시모노세키) 1763.12.27.~1764.1.1./ 29. 무로즈미室隅 1764.1.2./ 30. 가미노세키上關 1764.1.3.~4/ 31. 쓰와津和 1764.1.5./ 32. 가오도加老島 1764.1.6.~8/ 33. 가마가리蒲刈 1764.1.9./ 34. 타다노우미忠海島 1764.1.10./ 35. 도모노우라?1764.1.11./ 36. 히비日比 1764.1.12./ 37. 우시마도牛窓 1764.1.13./ 38. 무로쓰室津 1764.1.14.~18/ 39. 효고兵庫 1764.1.19./ 40. 오사카 성大坂城 1764.1.20.~24/ 41. 히라카타平方 1764.1.26./ 42. 요도우라淀浦 1764.1.27./ 43. 교토西京 1764.1.28./ 44. 모리야마森山 1764.1.29./ 45. 히코네 성彦根城 1764.1.30./ 46. 오가키大垣 1764.2.1.~2/ 47. 나고야名護屋 1764.2.3./ 48. 오카자키岡崎 1764.2.4./ 49. 요시다吉田 1764.2.5./ 50. 하마마쓰濱松 1764.2.6./ 51. 가케가와懸川 1764.2.7.~8/ 52. 후지에다藤枝 1764.2.9./ 53. 에지리江尻 1764.2.10./ 54. 요시하라吉原 1764.2.11./ 55. 미시마三島 1764.2.12./ 56. 오다와라小田原 1764.2.13./ 57. 후지사와藤澤 1764.2.14./ 58. 시나가와品川 1764.2.15./ 59. 도쿄江戶 1764.2.16.~3.10

귀국길/한양을 향하여

1. 시나가와品川 1764.3.11./ 2. 후지사와藤澤 1764.3.12./ 3. 오다와라小田原 1764.3.13./ 4. 미시마三島 1764.3.14.~16/
5. 요시하라吉原 1764.3.17.~19/ 6. 에지리江尻 1764.3.20./ 7. 후지에다藤枝 1764.3.21.~24/ 8. 가케가와懸川 1764.3.25./
9. 하마마쓰濱松 1764.3.26./ 10. 요시다吉田 1764.3.27./ 11. 오카자키岡崎 1764.3.28./ 12. 나고야鳴古屋 1764.3.29./
13. 오가키大垣 1764.3.30./ 14. 히코네 성彦根城 1764.4.1./ 15. 모리야마森山 1764.4.2./ 16. 니시하라西原 1764.4.3./
17. 히라카타(배)平方 1764.4.4./ 18. 오사카 성大坂城 1764.4.5.~5.5/ 19. 가와구치(배)河口 1764.5.6.~7/ 20. 효고兵庫 1764.5.8.~11/ 21. 효고(배)兵庫 1764.5.12.~13/ 22. 무로쓰室津 1764.5.14./ 23. 우시마도(배)牛窓 1764.5.15./ 24. 도모노우라(배)韜浦 1764.5.16./ 25. 다케하라(배)竹原 1764.5.17./ 26. 가마가리蒲刈 1764.5.18./ 27. 가미노세키上關 1764.5.19./ 28. 니시구치(배)西口 1764.5.20./ 29. 아카마가세키(배)赤間關 1764.5.21.~23/ 30. 낭하쿠(배)南泊 1764.5.24.~25/ 31. 아이노시마(배)藍島 1764.5.26./ 32. 아이노시마藍島 1764.5.27./ 33. 이키노시마(배)壹? 1764.5.28.~6.2/ 34. 이키노시마壹? 1764.6.3.~6/ 35. 이키노시마(배)壹? 1764.6.7.~8/ 36. 이키노시마壹? 1764.6.9.~12/ 37. 쓰시마 후츄對馬島 府中 1764.6.13./ 38. 세이잔지西山寺 1764.6.14.~18/ 39. 요시우라(배)芳浦 1764.6.19./ 40. 니시도마리우라(배)西泊浦 1764.6.20./ 41. 이즈미우라泉浦 1764.6.21./ 42. 부산釜山 1764.6.22.~24/ 43. 양산梁山 1764.6.25./ 44. 밀양密陽 1764.6.26./ 45. 청도淸道 1764.6.27./ 46. 대구大邱 1764.6.28.~29/ 47. 인동仁同 1764.6.30./ 48. 상주尙州 1764.7.1./ 49. 문경聞慶 1764.7.2./ 50. 괴산槐山 1764.7.3./ 51. 무극역無極驛 764.7.4./ 52. 이천利川 1764.7.5./ 53. 경안역慶安驛 1764.7.6./ 54. 광주廣州 1764.7.7./ 55. 경희궁慶熙宮 1764.7.8.

저자 소개 

저 : 조엄
1719년(숙종45)∼1777년(정조1). 본관은 풍양(豊壤), 호는 영호(永湖), 1752년(영조28) 정시 문과에 급제하고, 교리 등을 거쳐 동래부사를 역임하였다.이후 1758년(영조34)에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조창(漕倉)을 신설하고 세곡수동의 폐해를 시정하였다. 1763년(영조39) 부제학으로 있을 때, 조선통신사의 정사(正使)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귀국길에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가지고 와서 동래와 제주도...
 
역 : 박진형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졸업 후, 홍익대 한문교육 석사 졸업, 명지대 문예창작 석사를 졸업하였다. 대표 논문으로는 [미수 허목의 전쟁관련 시 연구]가 있으며, 공동 번역서로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1, 2, 3』(2012)와 『판본비교 징비록』(2016), 『해사일기』(2018), 『현판, 역사를 담다-懸板逸話』(2021)가 있다.
 
출판사 리뷰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일으킨 일본의 전쟁책임을 묻고,
260여 년 간의 선린우호의 길을 열어간 조선통신사의 생생한 기록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웃 나라.
사회 문화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진 한국과 일본.
지금도 우리는 일본을 너무 모르는 것이 아닐까?
역사의 흩어진 파편을 엮어 나가는 데 귀중한 디딤돌이 될 것이다.

올해는 조선통신사 기록물 유네스코 등재 1주년이다.
조엄의 『해사일기』를 단순한 번역을 넘어 치밀한 고증과 사진을 담아 펴냈다.
이 책은 조선통신사 기록 중 손꼽히는 기록이다.

불구대천지 원수 일본과의 평화공존을 모색하다

임진왜란은 조선시대 최대의 전쟁이었다. 그 이후 조선 사람에게 일본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가 되었다. 하지만 이 원수 관계를 두 나라는 오랫동안 지속할 수가 없었다. 비록 일본의 요청에 따라 사신단을 파견하는 교류가 시작되었지만, 전쟁의 후유증은 조선사회의 토대를 뒤흔들었다. 조선으로서도 마냥 원수 관계로 지내는 것은 매우 부담스러웠다. 또 피폐해진 나라살림은 다시 일어날지 모를 일본의 침략을 방어하기에 역부족 상태였다. 그래서 일본의 요청을 마지못해 승낙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조선통신사이다. 이 조선통신사 교류에 대한 두 나라의 목적이 초기에는 서로 달랐다. 조선은 전쟁 이후 피랍된 조선 포로를 데려오는 것과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일본의 사정을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한편, 일본도 에도막부가 세워진 초창기라 막부의 건재함을 과시하고자 한 것이었다. 동상이몽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조선통신사가 지속된 200여 년은 평화로운 관계가 유지되어 두 나라가 근대로 접어드는 밑받침이 되었다.

일본으로 가는 사행길은 정말 고생길이었나?

조선시대 외교관으로서 사행길은 말을 타고 북쪽으로 가거나, 배를 타고 남쪽으로 가는 두 개의 길이 있었다. 둘 다 쉬운 길은 아니었지만, 특히 배를 타고 남쪽, 즉 일본으로 가는 길은 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장장 1년을 넘나드는 오랜 기간에 걸쳐 다녀오는 험난한 고생길이었다.

그 당시, 중국(청)에 대해서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으며, 우리보다 나은 선진문화라는 인식이 있어 뽑혀 가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며 온갖 연줄을 동원하여 서로 가려고 경쟁이 치열했다. 반면에 일본으로 가는 외교사행은 죽음을 무릅쓰고 가는 험난한 여정이고, 일본에 대해 미개한 문화를 가진 무식한 오랑캐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자신의 출세에 도움 되지 않을 거라 생각하여 뽑히지 않으려고 온갖 핑계를 대었다. 조엄 또한 『해사일기』에서 무식한 오랑캐라는 표현을 10여 차례나 언급하였다. 조엄 자신도 일본으로 가는 사행길을 죽음을 무릅쓴 험난한 여정이었다고 기록하였다. 정말로 절체절명의 순간을 경험한 것이다.

아픈 가운데 놀라 일어나 창문에 기대어 보니, 뱃머리가 벌써 가로로 기울어져 있었다. 왼쪽으로 기울다가 오른쪽으로 기울고 앞이 낮아지고 뒤가 높아졌다 하면서, 흰 파도가 용솟음쳐서 마치 산과 언덕처럼 거대하였으며, 물이 배 바닥으로 새어 들어 와 작은 배를 띄울 만하였다. 파도가 배 안의 누각을 때려 사람들의 옷이 다 젖었다. 곁에서 따르는 배가 한 척도 없어, 일이 거의 위급한 지경에 이르고 배가 엎어질 위험이 숨 쉬는 순간만큼 빨리 닥쳤는데, 부기선(副騎船)이 20~30보를 사이에 두고 스쳐 지나가는데도 바람이 날쌔고 파도가 휘몰아쳐 형편상 배를 돌려 구해줄 수가 없었다. 포를 쏘고 기를 흔들었지만 각 배가 뚫고 들어올 방법이 없었다. 이러한 지경에서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서, 오직 죽음만이 있을 뿐이었다.(p. 160)

문화사절단 조선통신사는 과연 성공하였을까?

통신사는 문화사절단으로서의 성격도 띠었다. 그 규모가 500여 명에 달하였고, 조선의 시문·기예·회화·음악·의학 등의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를 뽑아 사행의 일행으로 선발하였다. 왜냐하면 일본을 글을 모르는 무식한 오랑캐라 여기고, 일본에게 당한 치욕을 문화의 우월감으로 되갚으려는 의도가 저변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즉 조선은 통신사를 통해 조선의 선진문화를 일본에 전파하려는 방식으로 우위의 외교 관계를 확립하려 했던 것이다.

『해사일기』의 주요관점

이 『해사일기』의 가치는 조엄의 해박한 지식을 통한 당대 조선 사대부 지식인이 가졌던 세계관을 살펴 볼 수 있으며, 또 외교관으로서 맡은 임무를 끝까지 완수하는 자세와 외교술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귀국길에 발생한 일행 ‘최천종의 피살사건’에 대해 그 과정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치밀하게 기록한 사실과 목민관의 본분을 잊지 않고 고구마의 재배방법을 기록하여 들여온 사실은 특히 눈여겨 볼만하다.

지난해 처음 사스나우라(左須奈浦)에 도착했을 때, 고구마를 보고 두 말 정도를 구해서 부산진에 보내 종자로 삼게 하였는데, 지금 돌아가는 길에 또 이것을 구하여 앞으로 동래(東萊)의 아전들에게 줄 예정이다.
일행 중에서 많은 사람들 역시 그것을 얻은 자가 있으니, 이것들을 과연 모두 살려서 우리나라에 널리 퍼뜨리기를 문익점(文益漸)이 목화를 퍼뜨린 것과 같이 한다면, 어찌 우리 백성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또 동래에 심은 것이 만약 덩굴을 잘 뻗는다면, 제주도 및 다른 섬에 옮겨 심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p.5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