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세계국가의 이해 (독서>책소개)/12.인도의모든것

힌두교사 깊이 읽기, 종교학이 아닌 역사학으로 (2021)

동방박사님 2024. 9. 19. 07:39
728x90

책소개

요가, 명상, 기세棄世, 비폭력…
왜곡된 채 소비되던 힌두교의 제자리를 찾다


1990년대 한국에서는 ‘인도 열풍’이 불었다. 한 시인에 의해 점화된 이 열풍에서 인도는 ‘낯선 사람도 반갑게 대해주는 좋은’ 나라, 인도인들은 ‘뭐든지 느리게 돌아가는 사회임에도 거기에 적응해 잘 사는 사람들’, ‘가난하지만 영적으로 충만하고 행복한 사람들’, 힌두교는 ‘세상을 버리고 떠나는 종교’였다. 인도와 인도인과 힌두교는 상상의 색으로 덧칠되었고 사람들은 그렇게 채색된 이미지에 경도되었다.

한국에서 힌두교에 대한 이 같은 이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서구 특히 미국에서 이루어진 오리엔탈리즘에 탈속 문화를 과도하게 강조한 일부 문필가들의 기행 수상문이 더해져 힌두교는 ‘요가, 명상, 사색, 비폭력, 속세를 떠나 초월한 태도 등을 특징으로 하는 인도의 종교’로만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인도사에 대한 왜곡을 불러와 여러 문제를 낳는 단초가 될 가능성이 있다. 이에 국내 유일의 힌두교사 전공자인 이광수 교수(부산외국어대학교 인도학과)는 “힌두교가 형성되고 변화해 온 모습과 성격을 인도사의 흐름에 따라 역사학적으로 분석”(11쪽)하여 상상의 색으로 그려진 힌두교에 힌두교 본연의 색을 입히고자 한다. 30여 년의 연구를 통해 “힌두교의 처음부터 현재까지의 변화와 성격을 통사적으로 개괄”(11쪽)한다.

목차

책머리에
인도 지도
인도 종교사 연표

1부 총론

1. 힌두교란 무엇인가
1―1. ’힌두교’ 명명의 문제
1―2. 힌두교 범주의 문제
2. 종교학과 종교사
2―1. 종교학 방법론
2―2. 역사학으로서의 종교사의 필요성
3. 힌두교에 대한 편견과 왜곡
3―1. 힌두교에 대한 유럽 낭만주의의 편견
3―2. 유럽 공리주의자의 힌두교 왜곡

2부 힌두교 형성사

1. 힌두교의 두 가지 원천
1―1. 역사적 배경(기원전 2500~기원전 500)
1―2. 하랍빠 시대의 종교
1―3. 베다 시대의 종교
1―4. 하랍빠 시대와 베다 시대 종교의 사회사적 의미
2. 베다후後 시기의 힌두교의 체계화와 불교의 발생
2―1. 역사적 배경(기원전 500~기원전 400)
2―2. 힌두교의 기본체계 형성
2―3. 불교의 발생
2―4. 베다후 시기 힌두교와 불교의 사회사적 의미
3. 서사시 시기의 종교의 대중화
3―1. 역사적 배경(기원전 400~500)
3―2. 서사시 시기의 힌두교 구조
3―3. 비슈누교의 발전
3―4. 쉬바교의 발전
3―5. 대승불교의 성립
3―6. 서사시 시기 대중화 종교의 사회사적 의미
4. 초기 중세의 종교
4―1. 역사적 배경(500~1200)
4―2. 뿌라나와 힌두교
4―3. 딴뜨라와 밀교
4―4. 초기 중세 시대 대중화 종교의 사회사적 의미
5. 후기 중세의 힌두교
5―1. 역사적 배경(1200~1700)
5―2. 박띠운동
5―3. 이슬람과의 만남과 시크교의 성립
5―4. 후기 중세 시대 박띠운동의 사회사적 의미
6. 근대 힌두교
6―1. 역사적 배경(18세기~현재)
6―2. 근대 종교·사회 개혁운동
6―3. 신新힌두교
6―4. 힌두 민족주의와 종교 공동체 폭력 정치
6―5. 근대 시기 힌두교 변화의 사회사적 의미

3부 힌두교의 성격과 의의

1. 여러 전통의 통합
1―1. 힌두교의 세 가지 전통
1―2. 흡수 통합의 성격
2. 구동 장치로서 바르나(카스트)
2―1. 다양성을 통일성으로 작동하는 세계
2―2. 의례 중심의 성격
2―3. 실천의 종교
3. 관용과 박해 그리고 개종
3―1. 관용의 범주
3―2. 개종과 카스트 체계
3―3. 불관용적인 성격
4. 범신론의 여러 층위
4―1. 단일신론적 성격
4―2. 일원론 위의 범신론과 다신교
5. 윤회의 시간과 역사로서의 신화
5―1. 베다 부회의 의미
5―2. 신화로서의 역사
5―3. 고대 인도인의 역사 인식

저자 소개

저 : 이광수
부산외국어대 교수. 역사학자(인도사). 시민운동가. 고대 종교사를 주전공으로 하고 인도 근현대사, 사진사, 정치, 외교, 사회, 종교, 법, 의식주 문화 등 인도의 여러 분야를 35년간 가르쳤다. 저술로는 《 인도에서 온 허왕후, 그 만들어진 신화》, 《 인도는 무엇으로 사는가》, 《 역사는 핵무기보다 무섭다》, 《 슬픈 붓다》, 《 카스트》, 《 현대 인도 저항 운동사》, 《 인도 수구 세력 난동사》 등이 있고...

책 속으로

힌두교란 무엇인가? 문자 그대로 하면, ‘힌두’의 종교다. …… 그렇다면 ‘힌두’란 무엇인가? ‘힌두’는 지금의 인더스Indus(산스끄리뜨어로는 신두Sindhu)강 유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712년 무함마드 이븐 카심Muhammad Ibn Qasim이 신드Sindh 지역을 정복한 후 아랍 사람들은 이 지역, 즉 인더스강 동쪽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힌두’, 그들의 종교를 ‘힌두교’라고 불렀다
--- p.29

결국 하랍빠 시대(기원전 3300~기원전 1300년경)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이슬람이나 기독교 같은 외래종교를 제외한 인도 아대륙의 모든 종교를 힌두교로 규정하는 게 가장 타당할 것이다. 물론 그 안에는 현대의 종교 분류에서 별개 종교로 간주하는 불교, 자이나교, 시크교 등이 들어 있다. 지금은 다른 종교로 분류되지만, 종교사의 관점에서 볼 때는 이들 종교도 하나의 종교 전통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그런 차원에서 이 책에서는 이들 종교를 힌두교와 함께 다루기로 한다
--- p.35~36

힌두교는 때에 따라서는 현실세계를 초월하고 세상을 버리고 떠나는 것을 설파하는 종교로, 때에 따라서는 고도의 깨달음과 지혜의 세계를 갖추고 있는 형이상학의 종교로, 때에 따라서는 미신과 야만 그리고 해괴한 의례로 가득찬 미신의 종교로, 때에 따라서는 다신과 이질적 요소들이 무질서하게 섞여 있는 미개한 종교로 그려져 왔다. 신에 관해서만 보아도, 3억 3천의 신을 가진 다신교이면서 그 신들이 브라흐마Brahma, 비슈누, 쉬바의 세 신으로 통합되고 이 세 신은 결국 하나라는 삼위일체 신학 속에서 다른 모든 신이 하나의 거대한 신이 된다. 힌두교가 때로는 다신교로 때로는 유일신교로 때로는 단일신교로 혹은 그보다 더 다양한 신학적 우주론으로 이해되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 p.39

고대 인도식 사유에 의하면, 종교란 어떤 스승이나 신의 말씀이 아니고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이 구성하는 공동체의 사상이나 신앙이다. 이러한 사유 방식으로 이해하면 종교는 역사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질 수 있고, 서로 다른 부분들이 상생하면서 사회 내에서 기능하고 관계를 맺는다. 궁극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이 같은 상생과 관계맺음 내에서 해석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요컨대 종교는 절대적으로 변화하는 것이고, 그 변화는 사회 안에서 이루어진다. 종교에 대한 연구는 이 같은 변화를 역사학적으로 살피는 방법론이어야 한다
--- p.42

힌두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엘리아데가 말하는 ‘역사로 환원할 수 없는 종교학’으로서의 종교사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물질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변화하는 종교의 역사’를 기술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역사로서의 종교사는 종교학은 물론이고 사상사, 교리사, 신학 등과는 전혀 다른 분과 학문이다. 특히 경전이 한정되어 있지 않고 절대론을 내세우지 않으며 모든 종교 전통을 흡수하면서 성격이 계속 변화해 나가는 힌두교나 불교와 같은 종교 연구에서는 역사학적 방법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 p.50

동양학자들의 눈으로 본 힌두교는 한편으로는 야만적인 것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의 변화를 겪지 않는 명상과 사색의 종교로 이해되었다. 그 영향 아래 인도의 사회개혁을 주장하는 인도인들조차 일부는 힌두교를 카스트나 우상 숭배 등 개혁해야 할 요소들이 많은 종교로, 다른 일부는 변하지 않는 본질을 담고 있어서 궁극적으로 돌아가야 할 본향의 진리로 이해했다. 이처럼 두 가지 상호 모순적 성격이 공존했기 때문에 서구인들은 힌두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들이 오해한 힌두교와 인도 문화는 서구 사회로 널리 퍼지면서 인도에 대한 편견과 오해의 밑바탕이 되었다. 식민주의 지배는 그 위에서 실행되었다. 이 같은 오리엔탈리즘의 원형은 크게 수정되지 않은 채 아직도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다
--- p.61

하랍빠 시대의 종교가 갖는 사회사적 의미를 확실하게 파악하기는 어렵다. …… 당시 이미 정착 농경생활이 광범위하게 퍼졌고 도시문명이 크게 발달했기 때문에 지모신 숭배, 남근 숭배 등이 어우러져 다산 숭배가 가장 대표적인 종교 현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모신 숭배와 남근 숭배는 모두 힌두교의 연원으로서 주요 종교적 특질들이 후대로 이어져 오늘날 힌두교의 중추가 되었다
--- p.95

지모신은 베다 시대의 전기인 기원전 1500년경부터 약 500년간의 목축 및 반半유목생활의 시기를 제외하고 오늘날의 힌두교에까지 내려오고 있다.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따라 형태를 달리하며 사람들의 숭배 대상이 된 지모신은 힌두교의 가장 중요한 요체 가운데 하나인 여신 숭배의 원형이다. 남근 숭배로 대표되는 남신 숭배 신앙은 후대의 쉬바 숭배로 이어지면서 하랍빠 시대 이후 이어지는 범신교의 아리야인 베다 종교와 통합되면서 다양한 문화 특질과 사회계층이 어우러지는 힌두교의 가장 큰 특징이 되었다
--- p.95

이 시기[베다후後 시기]에는 철제 무기의 발전과 영역국가의 성립으로 끄샤뜨리야 세력이 성장하면서 국가들 간의 전쟁이 끝없이 일어났다. 전대에서부터 이어져 온 베다 방식의 제사는 갈수록 규모가 커져 많은 소가 희생되었고 제사를 독점한 브라만은 막대한 부를 독차지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바이샤와 슈드라로 구성된 대부분의 평민들은 전쟁과 제사의 중단을 갈구하게 되었다. 이것이 베다 종교를 끝내고 힌두교와 전혀 새로운 방식의 불교가 시작되는 역사적 배경이다
--- p.101

붓다는 카스트가 존재하는 사회의 현실을 인정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철폐를 부르짖지는 않았다. 그저 사회의 현실을 묵인한 채 그의 이상사회를 사회 밖에서 승가로 실현하고자 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의 사회관은 당시는 물론 그 이후로도 인도 사회에 매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현실적으로는 자유와 평등과 박애에 대한 환상을 만들었을지라도 인도사에서 가장 막대한 영향력을 끼친 종교사회운동이었다
--- p.118

힌두교 체계를 가장 핵심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바르나-아슈라마-다르마’이다. 이는 곧 힌두교의 중심은 탈속적인 문화를 포용하여 힌두교의 근본인 세속적 삶 중심의 사회를 유지시켜 나가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 체계 안으로 들어가면 근본 변혁은 못 이루는 대신 전체의 부분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게 되고, 체계 안으로 편입되는 것을 거부하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버린다. 힌두교는 전자의 역사를 보여 준다
--- p.138~139

베다 시대가 끝난 후 당시의 많은 신들 가운데 사랑, 구원 등 소위 태양 계열의 특질을 갖춘 신들이 끄리슈나를 앞세운 비슈누에 통합되는 동안 죽음, 폭력, 징벌 등 소위 태음 계열의 신들은 쉬바를 중심으로 모였다. 베다 시대의 작은 신 비슈누가 끄리슈나 등과 합쳐지면서 만들어진 비슈누교가 구원 중심의 종교로 성장한 반면, 쉬바교는 베다 시대의 공포의 신 루드라가 여러 신들을 흡수하여 악마를 숭배하는 종교로 자리한다
--- p.157

힌두교에서 비슈누교와 쉬바교가 대중화의 확고한 기틀을 마련할 때 불교는 대승불교의 기틀을 닦았다. 제국이 성립되고 도시화가 진행되며 문명이 발생하고 확산되자 힌두교나 불교 모두 대중화가 촉진된 것이다. 불교의 경우, 제국의 팽창과 도시화는 불교 승가와 재가 사회의 접촉을 활발하게 만들었고 이것이 불교 대중화의 제1원인으로 작동했다
--- p.184~185

초기 중세의 사회 변화를 브라만 관점의 사회 위기로 인식 전환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신화집 뿌라나였다. 뿌라나는 문자 그대로는 ‘오래된’이라는 뜻인데, ‘옛이야기古談’라고 번역하면 가장 적절하다. 신화, 전설, 민담 등 여러 이야기를 임의로 모아 놓은 단순한 이야기집이 아니라 특정 신을 중심으로 선택적으로 모아 해설한 힌두 역사 인식과 종교에 관한 백과사전이다. …… 뿌라나에 담긴 힌두교의 모습은 완연한 범신교 그 자체다. 당시 사회가 고대의 네 바르나의 단순 위계구조에서 초기 중세의 복잡한 봉건체계로 변한 것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다
--- p.194~196

박띠는 기본적으로 구세주를 갈망하는 사상이다. …… 정치관계로 볼 때도 박띠가 표방하는 인간의 신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의 이데올로기가 왕과 봉건영주 그리고 봉건영주에 대한 백성들의 충성관계와 조화를 잘 이루었다. …… 박띠를 통한 사랑은 신과 인간 간의 상호적 관계가 아니라, 인간이 신에게 일방적으로 봉헌하는 행위다. …… 봉헌행위는 반드시 하나의 특정 화신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우상 숭배, 음악, 춤, 꽃, 시詩, 그림, 연극, 신의 이름 염송, 경전 송독 등의 봉헌행위는 고대와 중세 인도의 예술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 p.206~207

딴뜨라는 물질 중심의 종교 전통에 제사와 박띠 중심의 브라만 전통과 지혜와 깨달음 중심의 슈라만 전통이 통합된 것이다. 종교의 핵심은 직접적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고 은밀히 전한다. 딴뜨라교에 기초한 종교를 밀교密敎라 부르는 이유다. …… 딴뜨라의 원리는 매우 단순하다. 남성 원리와 여성 원리의 결합을 통해서만 종교의 궁극, 즉 지복至福이라는 물질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진리는 육체 안에 있고 육체를 벗어난 의례는 모두 허위다. 이 관념 안에서 카스트를 기초로 하는 불평등과 그것을 대변하는 법전은 무의미해진다. 이것이 바로 딴뜨라 세계관이다
--- p.212~3

밀교는 모든 요소와 체계가 서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만들어 사회가 보수화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남성 중심의 봉건사회는 근대화를 계기로 사라져 가거나 세력이 약화된다. 하지만 인도에서는 중세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큰 변화 없이 흔들림 없이 안정적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여기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이 딴뜨라 전통이다. 밀교를 제외하고 힌두교를 말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까닭이다
--- p.235

짜이따니야에 의해 전개된 박띠운동은 원래 끄리슈나와 그의 연인 라다와의 사랑을 신과 인간의 영혼의 사랑으로 비유하면서 신앙 차원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종교의 핵심을 신과 인간의 영혼 교접이라고 보았고 그것을 엑스터시로 만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그 둘 간의 사랑을 전파하는 수단으로 노래와 춤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 p.248

시크교는 카스트를 비롯한 힌두 사회를 개혁하는 데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독자적인 공동체 조직을 구축했고, 내적으로 성스러운 종교화 사업을 하고 외부로는 무갈 정부에 대한 저항을 통해 정체성을 다짐으로써 개인의 영적 생활이 아니라 단체로서의 공동체를 강화하여 결국 사회개혁이나 독자적 종교의 위치 정립에 성과를 거두게 된 것이다
--- p.268

당대의 종교정신은 힌두교와 이슬람의 공존과 조화였다. 그들이 평화를 사랑하고 인간을 존중했기 때문이 아니다. 지배와 피지배, 카스트 체계 내외에서의 여러 갈등이 역사 속에서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면서 상호 이익을 극대화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종교는 실제 역사에서 공동체 간의 이익 극대화를 위한 수단일 뿐 자치 영역은 아니었다
--- p.270~1

유럽의 사상과 교육제도, 언론과 문학이 널리 퍼지고, 유럽인들이 인도 역사를 왜곡하자 이에 대한 반발로서 고대 인도사를 재발견하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그로 인해 인도인들의 문화적 자긍심이 크게 고취되었는데 그 토대가 힌두교였다. 이는 인도 민족운동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인도의 민족운동은 본질적으로 종교와 떼려야 뗄 수 없었던 것이다. 인도 민족운동의 출발이 18세기 말에 일어난 종교·사회 개혁운동이었음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 p.273

고대 인도 문화 찬미는 당시 식민지 상태에 허덕이던 인도인에게 문화에 대한 긍지를 심어 주었고, 인도 민족운동가에게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여 자치운동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했다. 반면 힌두-무슬림의 대립을 불러일으켜 끝내 인도 아대륙이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갈라서는 비극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 p.289

인도 밖에서 크게 일어난 힌두 신흥종교운동은 대항 문화로서 뉴에이지New Age라는 새로운 서구 문화를 형성하는 데 일조한다. 그러면서 하타 요가hatha yoga와 같은 인도의 문화가 서구 사회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 p.298

근대 이후 힌두교에 두 가지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났다. 하나는 신힌두교이고 또 하나는 힌두뜨와 이데올로기다. 두 가지 변화는 모두 도시를 중심으로 일어난 현상으로, 인도를 변화가 없는 사회, 명상과 사색과 요가의 나라, 변하지 않는 본질을 가지고 있는 종교 등으로 표상하는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에서 나온 쌍생아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전자는 힌두교의 세계화에 힘입은 것으로 서양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져 인도로 역수입된 탈정치 세계관이고 후자는 인도인들이 식민주의에 저항하는 정치를 추동해 오면서 인도 국내에 엄청난 갈등을 야기시킨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이다
--- p.314

오늘날의 힌두교는 대체적으로 보면 18세기까지 변화하면서 형성되어 온 베다를 기본 경전으로 삼되, 스마르따 전통에 따른, 박띠 신앙을 기반으로 하는, 이슬람과 조화를 이루어 내면서 만들어진, 대중화된, 재가 사회 위주의, 물질 추구를 중심으로 삼되 기세, 명상 등 또 다른 축을 이루는 여러 이질적인 것들을 통합한 종교다
--- p.321

힌두 신앙의 일상은 힌두 신앙 구조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보편법인 다르마를 실천하는 것이다. 다르마는 카스트에 따라 삶 전체가 규정된다. 결혼을 하여 가족을 꾸리는 재가 중심의 물질적 삶을 사는 것을 이상으로 여기는 것은 동일하지만, 구체적인 종교적 삶은 카스트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 그것들이 어떻게 달리 나타나더라도 모두 고대사회에서 규정되어 오늘에 이르는 바르나-아슈라마-다르마 구조 안에서 작동한다
--- p.324

힌두교는 하나의 정해진 경전을 가지고 있지 않다. …… 서로 다른 이질적인 요소들이 모여 하나의 힌두교를 이룬다. 이질적인 요소는 크게 세 가지 종교 전통으로 나눌 수 있는데, 역사가 전개되면서 하나로 통합되었다. 하나는 베다에 뿌리를 두거나 그렇게 부회하는 전통이고, 다른 하나는 베다와 전혀 관계를 맺지 않는 전통이다. 전자를 브라만 전통이라고 하고 후자를 비非브라만 전통이라 한다. 비브라만 전통은 다시 슈라만 전통과 딴뜨라 전통으로 구분할 수 있다. 가정과 사회 중심의 브라만 전통, 기세 중심의 슈라만 전통, 물질과 기복 중심의 딴뜨라 전통, 이렇게 이 세 가지 큰 전통 각각에 들어 있는 여러 특질들이 서로 교차하고 통합되면서 오늘에 이른다
--- p.329

서로 다른 이질적인 전통을 하나로 통합하는 힌두교는 내용은 변화시킬지라도 구조는 절대로 변화를 허용하지 않는 관성을 유지했다. …… 13세기 이후 여러 이슬람 세력이 인도 전역에 자리잡고 상당한 뿌리를 내렸지만, 기존 구조 안에서 위치만 바꾸었을 뿐 바르나-아슈라마-다르마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했다
--- p.342

힌두교의 이질성을 가져온 결정적인 요소가 여러 전통의 통합이라면, 그 이질적 요소들을 하나의 구조 속에서 작동하도록 하는 장치는 바르나--- p.카스트) 체계다. 세상을 버리는 기세가 힌두교에서 사회 밖으로 나가려는 원심력으로 작동한 것이라면 바르나는 여러 이질적인 것들을 하나의 종교 안으로 잡아 놓는 구심력으로 작동한 것이다
--- p.346

힌두교가 각지의 신앙 형태를 흡수하면서 주변으로 펴져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브라만을 최고 정점으로 하는 바르나 체계의 위계질서를 유지하면서 불가촉민과 같은 또 하나의 카테고리를 통해 토착민을 흡수하여 사회질서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힌두교가 이질적인 요소들을 통합한 종교가 된 것은 바르나 체계 안으로 인도 전역에 있던 이질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사회질서 안으로 복속시키되, 그들의 신앙은 받아 주어 힌두교 사회 안에서 행할 수 있도록 해줌으로써 사회의 안정을 유지하는 지배 전략이다. 이단이 없는 포용은 궁극적으로 사회질서를 안정적으로 지키고자 하는 전술인 것이다
--- p.354

힌두교는 믿음보다는 실천을 중요한 가치를 지닌 덕목으로 삼기 때문에 실천은 공동체 차원에서의 의무가 된다. 원칙적으로 출생을 통해 하나의 카스트에 속하는 것이 정해지고 그에 따라 누구든 결혼을 비롯한 여러 법규를 반드시 따라야 한다. 사회적 의무가 종교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의미로서의 카스트 법규는 고중세 시대의 왕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다른 문화권에서와는 달리 왕 또한 힌두교가 규정하는 카스트 법규에 의해 강하게 구속된다
--- p.356

불교는 카스트를 부인했고 결국 성공해서 새로운 종교가 되었다. 하지만 끝내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자신들을 지지하는 신자들이 힌두사회의 카스트를 벗어나지 못해서, 즉 불교가 카스트 없는 독자 사회를 구축하지 못해서였다. 지지자들은 힌두 사회의 카스트에 포섭당해 힌두교 사회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는 정체성의 상실, 즉 불교의 쇠퇴와 소멸로 이어졌다
--- p.357

힌두교의 관용성은 이질적인 전통을 통합하여 힌두교라는 하나의 프레임 안에 집어넣음으로써 사회질서를 유지하려는 것이었을 뿐 그것이 사회질서를 해치려 할 경우 관용성은 발휘되지 않았다
--- p.370

신에 대한 관점이 모두 다르지만, 어떤 경우라도 힌두교 안에서 전지전능한 신의 존재는 없다. 심지어 지존위로 숭배되는 비슈누, 쉬바, 마하데위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모두 태어나고, 죽고, 윤회하는 유한한 존재, 힌두교를 관통하는 우주 보편의 절대적 이치인 다르마에 종속된 존재일 뿐이다. 다르마라는 보편 원리 안에서 궁극을 찾는 길은 정해진 바 없이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그중 하나가 신을 믿고 그를 숭배하여 복을 구하는 것일 뿐이다
--- p.371

힌두교는 베다 시대 이후 기원전 6세기부터 서사시 시대를 거치면서 현재의 틀을 마련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질적인 요소들을 통합하여 종교적으로 매우 관용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힌두교의 이 같은 세계관의 토대는 윤회와 업(까르마)의 시간관이다. 이는 초기 베다 때의 범신이 후기 베다 시기에 단일신으로 일체화되면서 힌두교의 근본구조가 만들어지고, 이후 그 구조를 토대로 힌두교가 인도 아대륙 곳곳으로 세력을 확장해 갈 때 온갖 잡다한 것들을 포섭한 결과다
--- p.384

베다는 모든 이질적인 것들을 통합하는 힌두 신학의 기본으로 자리잡는다. 베다는 힌두교 최고의 경전이 되고, 이후 힌두교의 모든 종교적 권위는 베다에 부회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베다의 절대적 권위 아래 경전의 저자/편찬자가 밝혀지지 않고 후대의 작품들이 베다에 부회되는 전통이 생겼다. 베다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강력한 절대적 권위가 되었다
--- p.384

부회의 전통과 이야기/신화의 창작 전통은 힌두교가 윤회라는 순환론적 시간관에 입각한 종교라서 크게 발달할 수 있었다. 윤회의 순환시간론은 ‘인간은 생에서 행한 행위에 의해 죽은 뒤 행선지가 결정된다’는 까르마 이론과 연결된다. 까르마는 힌두 사회의 기본구조인 다르마와 바르나의 기초가 되는 원리로서 주어진 바르나에 따라 정해진 다르마를 이행하는 바에 따라 자신의 까르마가 결정되어 다음 생으로 윤회한다는 힌두교 최고의 실천 신학의 기본이다
--- p.392

출판사 리뷰

연구되지 않은 힌두교를 연구하다

『힌두교사 깊이 읽기, 종교학이 아닌 역사학으로』는 힌두교라는 종교가 무엇인지를 총체적으로 알려주는 탁월한 개설서다. 세계의 유력 종교 가운데 힌두교만큼 알려지지 않거나 잘못 알려진 종교가 또 있을까 할 정도로 힌두교에 대한 관심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 책은 힌두교에 대한 저자의 30여 년 연구의 집대성이다. 1부 〈총론〉에서는 힌두교라는 명칭과 범주를 고찰하여 ‘힌두교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한다. 힌두교에 대한 유럽 낭만주의와 공리주의자들의 왜곡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살펴 잘못 알려진 힌두교의 제자리 찾기를 시도한다.

2부 〈힌두교 형성사〉에서는 힌두교 형성 과정의 역사를 통사적으로 아우른다. 먼저 힌두교의 원천을 고찰하고 하랍빠 시대(기원전 2750년경~기원전 1750년경)와 베다 시대(기원전 1500년경~기원전 500년경)의 종교 연구를 통해 힌두교 형성의 기원을 찾는다. 뒤이어 베다후後 시기(기원전 500년경~기원전 400년경) 힌두교가 체계화되고 불교가 발생하는 과정을 훑는다. 비슈누교와 쉬바교가 형성되고 대승불교가 성립되는 등 종교가 대중화되는 서사시 시기(기원전 400년경~500년경) 힌두교의 변화 모습을 그린 후 인민들이 브라만과 봉건영주에 철저하게 예속된 초기 중세(500년경~1200년경)에 비슈누교와 쉬바교가 발전하고 밀교가 융성하는 과정을 역사적으로 분석한다. 후기 중세(1200년경~1700년경)에는 영원한 희열의 추구, 즉 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남을 기본 목표로 삼는 박띠운동의 사회적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이슬람과의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시크교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등을 살핀다. 마지막으로 여러 종교 사회 개혁운동을 전개하고 민족주의와 결합하면서 다양한 모습을 띤 근대(18세기~현재) 힌두교의 변화 양상을 탐구한다.

3부 〈힌두교의 성격과 의의〉에서는 힌두교가 세 가지 전통을 흡수 통합하는 과정을 살피고, 힌두교의 구동 장치로서 바르나(카스트)를 분석한다. 뒤이어 힌두교의 특징 중 하나로 꼽히는 관용, 그리고 관용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박해, 개종이 힌두교에서 어떤 모습으로 전개되었는지를 구명한다. 나아가 힌두교의 단일신론적 성격과 범신론, 다신교적 측면을 아울러 파고든다. 마지막으로 윤회를 통해 힌두교의 시간관과 역사 인식을 고찰한다.

힌두교, 불교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의 첫걸음

이 책은 불교에 대한 이해를 더욱 높일 수 있는 연구서이기도 하다. 한국 문화의 보고인 불교는 인도의 역사에서 태어났고 변화해왔다. 주목할 것은 불교가 항상 힌두교와의 상호관계 속에서 변화를 겪었다는 점이다. 힌두교와 불교의 관계에 대한 이해 없이 불교에 대한 완전한 이해는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한국 불교를 이야기할 때 힌두교는 거의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등장 당시 불교는 급진적이고 탈사회적인 종교였다. 저자는 후기 베다 시대에 인도에서 새로운 종교 움직임이 일었으며, 불교가 그중 하나였다고 말한다. 당시 인도에서 제사장이었던 브라만은 제사를 통해 부를 축적했다. 하지만 농경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소는 제사를 위해 지속적으로 도살되었다. 유목을 대신해 새롭게 등장한 농업경제에서 소는 가장 중요한 요건이었다. 급진적인 종교운동을 전개하던 세력은 브라만 중심의 기존 제사 이데올로기에 반대하며 소의 축적을 주장했다. “바로 이것이 곧 붓다가 주장한 불살생不殺生(아힌사ahinsa)이다. 붓다는 소가 있어야 생산이 더 활발하게 일어나고 그래야 더 많은 인민들이 브라만에게 착취당하지 않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110쪽)

붓다는 세상을 고통으로 인식했다. 이 같은 고통의 윤회에서 해방되는 것이 바로 니르와나nirvana(열반)에 이르는 해탈이다. “‘니르와나’는 붓다가 독자적으로 고안하거나 발명한 개념이 아니라 당시 사회를 부인하고 수행에 전념하는 슈라만 전통에 널리 존재해 온 개념이었다.”(111쪽) 이는 부족 공동체에서 나고 자란 붓다가 새롭게 전개되는 화폐경제 기반의 첨예한 계급사회와 절대권력과 개인주의에서 받은 충격에서 비롯되었다. 기원전 6세기 화폐경제를 토대로 등장한 도시 문명은 이전의 원시생활로 되돌아가기를 갈망하게 했다. “기존 사회의 부인이 금욕과 무소유 정신, 즉 탈세속의 움직임으로 구체화된 것이다.”(111쪽) 붓다의 가장 핵심적인 세계관 중 하나인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차 있는 가치 없는 곳’,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해방된 삶’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붓다는 탈사회의 입장에서 궁극의 깨달음을 추구했으나 당시의 사회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카스트로 구분된 계급사회에 반대했고 계급 문화의 악을 개선하고자 했다. 그렇다고 카스트의 철폐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 사회의 현실을 묵인한 채 자신의 이상사회를 사회 밖에서 승가로 실현하고자 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의 사회관은 당시는 물론 그 이후로도 인도 사회에 매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118쪽).

종교, 역사로 읽다

서구의 동양학자들은 식민 지배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인도의 역사를 자신들의 세계관에 따라 재구성했다. 그들에 의해 인도는 종교의 나라로 채색되었다. 그들은 고대 힌두교의 몇몇 경전을 사료 삼아 자신들이 원하는 힌두교의 상像을 역사적 실체로 만들었다. 이에 따라 힌두교는 명상, 요가, 사색, 비폭력이라는 불변의 구성요소를 가진 종교로 변질되었다.

저자는 종교를 역사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종교를 사회변화에 따라 변화하는 역사의 산물이라고 본다. 종교가 교리나 가르침 혹은 불변의 진리라는 시각은 실재하지 않는 허상이라고 강조한다. 이 같은 관점에서 저자는 이른바 힌두교의 ‘본질’을 역사 속에서 고찰한다. 예컨대 저자는 힌두교에서 명상에 대한 중시가 후기 베다 시기에 형식 위주의 제사가 극도로 심화됨에 따라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났다는 점(69쪽), 요가가 단순한 “건강과 체형 관리용 운동”(298쪽)이 아니라 “구원을 얻기 위한 세 가지 길”(139쪽)로서 ‘행위’(까르마)와 ‘지혜’(쟈나)와 ‘신헌信獻’(박띠)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을 짚는다. 힌두교를 종교학이 아닌 역사학으로 읽으려는 시도다.
힌두교의 다원적?이질적?중층적 세계관

종교학자 오토Rudolph Otto가 제기한 후 엘리아데Mircea Eliade에 의해 깊이 있게 정리된 종교 이론에서는 종교를 “성聖과 속俗으로 나뉜 이분법 세계에 대한 담론”(402쪽)으로 본다. “성스러운 것은 경외하고 숭배하며 의지하고, 속된 것은 기피하고 터부시하고 배제하면서 그 둘로 이루어진 세계를 여러 가지 의례로 의미 부여하면서 만들어진 것”(402~3쪽)이 종교라는 관점이다. 기독교 세계관에 의거한 이 같은 성격 규정은 “세계를 항상 성과 속의 대립적인 개념으로 나누고”(403쪽), 성스러운 것이 세속적인 것을 배제하거나 회피하거나 극복하여 구원받거나 그렇게 하지 못해 심판받는 등의 행위들이 모여 종교를 이룬다고 말한다.

반면 힌두교의 세계는 다원적이고 이질적이며 중층적이다. 힌두교 역시 세계를 성과 속으로 나누지만, 기독교의 성과 속보다 훨씬 복합적이고 중층적으로 교차하면서 관계를 맺는다. 성聖의 영역에 속하지만 매우 부정적인 의미의 성도 있다. 성과 속이 나뉘는 상황에 따라 위치나 의미가 달라지기도 한다. 이것의 성이 저것의 속이 되기도 하고, 저것의 성이 이것의 속이 되기도 한다. 성과 속 그리고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이 섞여 나타나는 것이다.

이 같은 힌두교는 “개인보다는 공동체, 자유보다는 질서, 구원보다는 공동체 안에서 행해야 하는 사회적 실천 혹은 의무에 더 큰 의미를 둔다.”(403쪽) “믿음이 있지만 믿지 않음도 있고, 구원이 있지만 깨달음이나 해탈도 있고, 그저 그렇게 도덕에 따라 살아가는 보통의 삶도 있다. 옳고 그름의 관점이 있지만, 그걸 부인한다고 해서 단죄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13쪽) 서구식 이분법의 세계관에 익숙한 근대인의 사고에 파문을 던지는 세계관이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힌두교가 “‘성과 속의 세계 위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사회적 관계가 종교’라는 사회학자 뒤르켐의 의미 규정에 잘 들어맞는 종교”(403쪽)라고 말한다.

힌두교를 통한 인도사 이해, 과도한 유럽?중국 중심의 세계사에서 탈피

‘역사란 무엇인가?’ 이른바 역사학의 첫 번째 질문이다. 답은 모두 다를 수 있겠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은연중 시선을 유럽과 중국에 돌린다. 우리에게 세계사의 중심은 항상 유럽과 중국이었다. 문명과 야만이라는 도식 아래 과거 문명국에 속한 유럽과 중국을 중심으로 세계의 역사를 살핀다. 저자는 힌두교사를 통해 이 같은 통상적인 관점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힌두 세계의 신화와 역사에 대한 관점이 서구 세계 역사학 개념과 무엇이 다른지 고찰함으로써 왜 우리가 서구 세계의 역사관에 의한 ‘역사’만 ‘역사’로 생각해야 하는지 묻는다. 이를 통해 역사학계에 인도사를 연구하고 교육하는 것이 왜 필요한지를 제시한다.

성리학 유교라는 선이 굵은 종교에 많은 영향을 받고 기독교와 서구의 근대 과학주의 세계관에 압도당하고 민족주의 이분법적 사고에 경도되어 있는 지금 이 나라 대한민국의 시민들로 하여금 전혀 다른 아주 ‘이상한’ 종교의 역사를 통해 역사란 무엇이고 종교란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하고 싶었다. 우리가 아는 역사, 세계관, 종교, 설사 그것이 다수의 것일지라도, 그것이 힘센 자의 것일지라도, 그것이 지금 합리적이고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질지라도, 그것과 다른 전혀 이질적인 세계관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나 자신을 성찰하고 한국 사회를 돌아보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 믿는다(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