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조선시대사 이해 (독서>책소개)/1.조선왕실

정조가 만든 조선 최강군대 장용영

동방박사님 2022. 2. 5. 12:08
728x90

책소개

『정조가 만든 조선의 최강 군대 장용영』 저자 김준혁 교수
‘매력군주 정조, 그를 더 알고 싶다’를 주제로 JTBC ‘차이나는 클라스’ 1.24(수) 방송!


정조는 왜 친위부대이자 백성을 위한 군대인 장용영을 창설했는가!

1997년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우리 사회 전반에서 정조시대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 이러한 현상은 역사학계에도 영향을 주어 정조의 위민사상과 개혁정치, 그리고 그가 추진했던 자주적 국방개혁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지난 2017년 10월 27일, 『무예도보통지』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비록 북한이 단독으로 신청한 점이 아쉽긴 하지만, 이것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무예와 군사기록물에 대한 책 내용이 세계적으로 독창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무예도보통지』는 정조시대가 낳은 위대한 기록유산이고 남북 모두의 소중한 자산이다. 때문에 『무예도보통지』가 세계인들이 인정하는 기록유산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큰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그렇다면 정조는 왜 ‘장용영’이라는 친위 군대를 만들고, 『무예도보통지』를 만들었을까? 우리는 정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널리 알려진 정조의 8일간의 화성행차는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위한 것보다 사도세자로부터 시작하여 정조가 준비해온 군사적 능력을 마음껏 과시하는 게 숨겨진 주목적이었다. 장용영외영 군사들의 일사불란함을 보여줌과 동시에 신무기를 선보임으로써 화성유수부가 강력한 군사도시임을 입증했다. 또한 화성 내에 거주하는 백성들과 함께 훈련을 함으로써 민보(民堡), 즉 백성이 국방의 보루가 되는 새로운 개념을 보여주었다.

결국 정조가 화성행차에서 보여준 일련의 군사훈련은 다른 군영으로 하여금 장용영외영을 두렵게 만들었다. 더불어 이는 자연스럽게 정조가 추구하는 국방개혁에 대한 반대를 일소하고, 향후 외세에 대한 군사적 방어 및 공격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천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백성이 없는 군대는 의미가 없고, 군대가 없는 백성은 위태롭다. 그래서 백성과 군인은 하나가 되어야 하고,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 그러므로 백성과 군인, 그리고 관료들이 합동으로 하는 군사훈련은 가장 이상적이다. 이것이 정조가 화성에서 백성들과 함께 군사훈련을 한 진짜 이유다. 그리고 이는 장용영이 조선 최강의 군대로 평가받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목차

책을 펴내며 5

프롤로그 15

1부 『무예신보』를 편찬한 사도세자의 꿈 29

1. 사도세자는 무인세자인가? 31
2. 사도세자는 담대한 무인 기질이었다 38
3. 사도세자, 효종의 북벌론을 계승하다 47
4. 조선 최초의 무예서, 『무예제보』의 발견 63
5. 『무예신보』를 편찬한 사도세자의 꿈 73

2부 정조, 장용영에서 『무예도보통지』를 만들다 81

1. 정조가 사도세자 현양 사업을 추진한 목적 83
2. 『무예도보통지』 편찬과 사도세자 추숭 91
3. 『무예도보통지』를 만든 사람들 96
4. 『무예도보통지』의 시연자, 조선 최고의 협객 백동수 103
5. 『무예도보통지』의 24기 무예 112
■무예도보통지˙서武藝圖譜通志˙序 121
■ 진설進說(경과보고서) 123
3부 정조, 호위부대를 만들다 129

1. 정조의 즉위와 반대세력들의 견제 131
2. 정조의 군제개혁 의지 141
3. 정조 시해 음모와 숙위소 설치 151
4. 홍국영의 역모와 숙위소 혁파 159
5. 『정감록』을 신봉하는 홍국영 추종세력 역모사건 166
6. 새로운 호위기구 장용위 설치 175

4부 정조, 마침내 장용영을 설치하다 181

1. 성호의 친위군병론親衛軍兵論과 장용영 183
2. 구선복의 역모와 장용영 설치 188
3. 장용영 창설 목적?1 -친위군 강화 197
4. 장용영 창설 목적?2 -균역법 혁파를 통한 민생안정 205
5. 장용영 창설 목적?3 -북벌을 위한 군사력 증강 213
6. 장용영 대장의 지위와 성향 223

5부 장용영, 조선의 최정예 군대 237

1. 장용영의 직제 개편 239
2. 장용영의 직제 구성 247
3. 장용영의 확대와 수어청, 총융청의 합병 258
4. 백성과 함께하는 장용영 마을 265
5. 장용영에 대한 특혜 274
6. 장용영의 훈련 - 바람으로 머리 빗고, 빗물로 목욕하라! 281

6부 화성에 장용영외영을 설치하라! 291

1. 장용영외영은 왜 만들었는가? 293
2. 장용영외영의 정비 303
3. 정조의 만석거 축조와 대유둔 조성 311
4. 만년제?축만제 축조와 축만둔[서둔] 조성 319
5. 장용영외영의 화성 방어와 어가 호위 325
6. 장용영외영 협수군 체제 333
7. 1795년 윤2월 화성행차와 백성들과 함께한 군사훈련 340

에필로그 355

참고문헌 364

저자 소개

저 : 김준혁
 
한신대학교 교수. KBS '역사스페셜‘ JTBC ‘차이나는 클라스’를 비롯한 다양한 방송 및 저술 활동을 통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지도 높은 역사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역사의 대중화에 힘을 쏟고 있다. 정조正祖가 건설한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에서 태어나 초·중·고교를 다니고, 정조와의 인연을 바탕으로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조선 정조대 장용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수원시 학예연구사로 임용되어 화성의 복원과 ...
 

출판사 리뷰

무예를 발전시키기 위해 장용영을 만든 정조는 진정한 무인군주였다!

많은 사람들이 정조를 ‘학자군주(學子君主)’라고 부른다. 반면에 정조가 갖고 있는 무인의 기질과 능력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다. 정조는 규장각(奎章閣)을 통해 국가의 국정 이념을 정립하였고, 각종 연구와 출판사업을 통해 조선의 문화를 한 단계 끌어올리며 문예부흥 시대를 열었다.

동시에 정조는 무(武)에 대한 문(文)의 차별은 외세가 침략할 때 나라를 지킬 방어력을 약화시킨다는 경각심을 갖고 문무(文武)가 같이 발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정조는 학문을 육성하기 위해 규장각을 만들고, 무예를 발전시키기 위해 장용영(壯勇營)을 창설했다. 즉 ‘문치규장 무설장용(文治奎章 武設壯勇)’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문무를 병행 발전시키려고 하였다. 그리고 정조는 무의 발전을 통한 조선 국방개혁의 중심기관으로 장용영을 설치하였다. 그러므로 정조는 진정 ‘무인군주(武人君主)’이기도 했다.

정조는 조선의 국왕으로 단 하루도 편한 날 없이 날마다 치열하게 살았다. 당파로 갈라져 싸우지 않고 신분으로 인하여 차별받지 않는 세상, 힘이 없어 외세에 침략당해 고통 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재위 24년 내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1800년 6월 28일, 백성이 주인 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정조는 결국 꿈을 이루지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의 죽음의 원인에 대해서는 2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가 죽기 전까지 엄청나게 많은 일을 했다는 것이다.

정조가 쓰러지니 조선은 흔들렸다. 세상의 권력은 바뀌고 바뀐 권력의 주체들은 그의 개혁을 지우기 시작했다. 정순대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가장 강력하게 밀어붙인 것이 장용영의 혁파였다. 표면적인 이유는 장용영에 있는 엄청난 재원 때문이었지만, 정순대비를 비롯한 벽파에서는 정조와 연관된 정치세력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조의 친위군영인 장용영을 없애야 했을 것이다. 장용영 혁파는 철저한 정치적 논리에 의해 강제되었고, 장용영 창설을 통해 조선후기 군제개혁과 민생안정을 추구하고자 했던 정조의 개혁정책은 좌절되었다.

정조의 개혁정책이 완성되었더라면 조선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

만약 정조가 그렇게 빨리 급서하지 않았다면 조선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가 일관되게 추진하던 노비제도는 혁파되었을까? 1786년 박제가가 올린 상소 내용대로 서양 선교사들을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서양과 외교관계를 수립했을까? 혹은 그가 만든 장용영으로 국방을 강화시키고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대한제국 말기에 이르러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는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까? 결론을 말하라면, 아마 정조가 좀 더 오래 조선의 국왕으로 있었다면, 그래서 그의 개혁을 완성하였더라면 이후에 누가 왕이 되었더라도 안전하게 국정을 운영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을 것이다.

비록 민주주의 시대가 아닌 왕조사회였지만 정조의 개혁사상은 시대를 초월하여 계승해야 할 사상이고, 그의 인간존중과 소통의 정신은 오늘날 우리가 반드시 실천해야 할 것이기도 하다. 또한 정조가 추진했던 지역, 신분, 경제력으로 인한 차별없이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지는 사회 만들기는 우리가 반드시 계승하고 실현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잘못된 반민주주의를 없애고 새로운 민주사회를 만드는 데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상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분단국가에서 하나된 통일국가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사도세자와 정조가 꿈꾸었던 자주국가 건설이 실현될 것이다.
“조선의 백성들은 선대왕의 백성으로 살았던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정조가 죽고 난 후 『정조실록』에 사관이 쓴 글이다. 이런 지도자를 만난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일 것이다. 이제는 군주시대가 아니니 거꾸로 우리 스스로가 행복하고 기뻐할 지도자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정조의 국방개혁의 보루였던 ‘장용영’을 대중적인 관점에서 처음으로 연구한 이 책을 만나는 순간, 우리는 만주 벌판을 달리던 조상들의 기개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주적 국가 건설을 추구하던 사도세자와 정조에 대해 아는 것은 곧 남북의 평화시대를 여는 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