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조선시대사 이해 (책소개)/1.조선왕

정조, 어머니와 원행을 다녀오다

동방박사님 2022. 2. 5.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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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정조가 기획한 특별 이벤트의 전모, 『원행을묘 정리의궤』

『정조, 어머니와 원행을 다녀오다』는 조선 제22대 왕 정조가 환갑을 맞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부친 사도세자의 묘에 다녀온 기록, 즉 『원행을묘 정리의궤』의 내용을 일반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게 발췌, 편집한 책이다. ‘원행을묘 정리의궤’라는 말은 을묘년(1795년)에 원행(왕족의 묘에 성묘하러 감) 다녀온 것을 정리의궤청에서 기록하여 펴낸 의궤라는 뜻이다.

책 제목에는 성묘만 표현되었지만, 실제 을묘년 원행에는 다양한 행사가 함께 치러졌으며, 그 안에 정조의 여러 의도가 담겨 있었다. 우선, 정조는 화성행궁에서 이 행사를 치름으로써 자신이 건설한 신도시 화성에 활기를 불어넣고자 했다. 더불어 남편의 묘에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어머니를 모시고 성묘함으로써 어머니의 한을 풀어 드리고 아버지의 복권을 꾀했으며, 어머니의 회갑연을 열어 백성들과 함께 어머니의 장수를 기원했다. 한편, 자신이 창설한 장용영 군사 등 3,700여 명이 참여하는 군사훈련을 실시함으로써 자신의 위세를 떨쳤고, 특별 과거 시험을 실시하고 쌀을 나눠 주는 사미賜米 행사와 양로연 등을 열어 백성들에게 왕실의 은혜를 베풀었다.

8일 동안 진행된 이 행사의 기획, 준비 단계부터 행사 완료 후 의궤를 만들기까지, 이 모든 내용을 기록한 것이 바로 『원행을묘 정리의궤』이다. 『정조, 어머니와 원행을 다녀오다』는 『원행을묘 정리의궤』의 주요 내용을 가려 뽑아 쉽게 가다듬고, 어려운 말에 풀이를 달고, 각종 문서들을 날짜 순서로 재구성하고, 부속 자료들은 내용에 따라 재배치하고, 관련 그림을 설명과 함께 편집해 넣은 ‘오늘의 독자를 위한 원행을묘 정리의궤’라 할 수 있다.

목차

머리말

I. 의궤에 대하여

1. 의궤란 무엇인가?
2. 왜 의궤를 만들었을까?
3. 의궤의 종류는 참으로 다양하다
4. 의궤는 누가 만들었나?
5. 의궤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까?

II. 『원행을묘 정리의궤』에 대하여

1. 『원행을묘 정리의궤』는 어떤 의궤인가?
2. 『원행을묘 정리의궤』의 일정
3. 『원행을묘 정리의궤』의 주요 행사

III. 『원행을묘 정리의궤』 내용 읽기

읽기 전에
1. 2년 전부터 원행을 준비하다
1793년 1월 19일~1795년 윤2월 7일
2. 8일간의 원행을 다녀오다
1795년 윤2월 9일~1795년 윤2월 16일
3. 원행을 다녀와서 의궤를 만들기까지
1795년 윤2월 17일~1797년 3월 24일
 

저자 소개

편 : 김흥식
 
스물세 살에 평생 출판을 업으로 삼겠다고 다짐했고, 십 년 동안 돈을 모아 서른세 살에 출판사 등록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후 십년 동안 헤매면서 모은 돈을 소진한 뒤, 다른 일에 종사하며 다시 돈을 모아 마흔세 살에 재도전했다. 그 후 지금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약 30년 동안 출판의 길을 걷고 있다. 파주출판도시에서 운영하는 출판창업보육센터장으로 있으면서 출판에 첫발을 들여놓은 이들을 위해 여러 활동...
 

책 속으로

“의궤는 한자로 儀軌다. 한자 뜻은 ‘의식 의, 법도 궤’, 그러니까 ‘의식을 치르는 법도’라는 뜻이다.”
---「첫 문장」중에서

“내후년은 우리나라 초유의 큰 경사가 있는 해로, 내가 천재일우로 만나는 기회이다. 하賀, 호號, 연宴의 세 가지 의례는 국가가 마땅히 행해야 할 의식인데, 축하의 의식은 내년에 먼저 보령寶齡 예순에 대한 하례賀禮를 할 것이고, 호를 올리는 의식은 자전慈殿과 종묘에 삼가 나아가 올릴 것인데, 연회의 의식은 우리 자궁慈宮의 겸손한 덕으로 인해 옛 슬픔의 마음과 모든 백성들이 함께 즐기는 행사를 청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하여 내가 마음속에 생각해 둔 것이 있다. 이해가 거듭 돌아오는 것은 나의 풍수지감風樹之感만이 아니어서, 우리 자궁을 모시고 원침園寢을 참배하여 한편으로는 자궁의 마음을 위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들로서의 정성을 조금이나마 펼치려 하니, 이는 곧 하늘의 도리와 인정으로 그만둘 수 없는 바이다. 난여?輿가 돌아오는 길에 행궁行宮에 모시고 나아가 간략하게 진찬進饌의 예를 마련하여 장수를 기원하는 정성을 조금이나마 펼칠 것이다. 예는 의로써 일으키고, 정은 예를 인연으로 해서 펼쳐진다. 이해의 이러한 경사, 이곳의 이러한 예는 자궁의 마음을 감동시켜 돌릴 것이니, 어찌 일거양득의 도리를 얻는 것이 아니겠는가?”
--- p.57~58

“내년에 자궁의 수레가 원소에 나아갈 때 비록 의장儀章과 형식은 미미하나 반드시 정성을 들여 물건을 준비하고자 하는 까닭은 조금이나마 나의 정성을 다하기 위해서이다. 더구나 백 리 가까이 행행行幸함은 처음 있는 일이며, 가교를 새로 만든 것은 오로지 편안하게 받들어 모시기 위함일 뿐 새로 꾸민 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고자 함이 아니다. 이 가마를 보니 안이 넓고 밖이 가벼우며, 크기가 법도에 맞고 발과 휘장, 가마 덮개가 정교하고 매우 촘촘하니, 경등이 공장工匠을 감독한 수고로움이 가상하다 할 수 있다.”
--- p.68~70

“이것이 비록 정부 예산으로 쓸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공금이라는 면에서는 같은 것이다. 진실로 쓰고 남는 것이 있을 것이니 자연 나라에 도움이 있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자궁의 뜻이 일마다 반드시 절약할 것을 하교하신 것이 한두 번이 아니지 않는가. 여러 당상은 모름지기 우러러 본받을 방도를 생각하여 모든 일을 준비할 때 생략하고 절감하기에 힘써서 조금이라도 사치하게 하지 말라.”
--- p.81

“대체로 배다리의 제도는 한복판이 높고 양쪽은 차차 낮아야만 미관상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실용에도 합당하다(작은 배는 얕아야 하고 큰 배는 깊어야 한다). 높고 낮은 형세를 살피려면 먼저 선체의 높낮이를 산정해야 한다. 가령 중앙에 있는 ‘갑’이라는 배의 높이가 12자라면(2발로 계산한다) 좌우에 있는 ‘을’이라는 배의 높이는 11자 9치가 되며, 그 좌우 ‘병’과 ‘정’의 배 또한 각각 몇 푼 몇 치씩 점차 낮아지게 함으로써 층차가 현저히 다르게 하지 말아야 한다.”
--- p.110

“굶주린 백성의 죽과 쌀은 일제히 거행하되, 쌀부대를 먼저 수송하여 신풍루 아래에 두었다가 나누어 줄 때 가서 시끄럽지 않게 하고, 시간이 아직 이르니 혹시라도 미처 오지 못한 자가 있으면 차례차례 알리게 하여 한 사람이라도 누락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
--- p.223

“이번의 경우에는 의궤이면서 동시에 관련 사항을 모두 수집하는 유취類聚의 체제를 취하도록 하고, 활판인쇄로 넉넉히 만들어서 올리도록 하라. 그리고 책이 완성되면 사고史庫, 내각內閣, 홍문관, 호조, 예조, 병조, 각 군영, 화성, 경기 감영, 광주, 과천, 시흥에 각각 한 건씩 보관하도록 하고, 본 정리소의 당상과 낭청, 그리고 화성 유수 및 입직 승지와 사관에게는 각각 한 건씩 나누어 주도록 하라.”
--- p.257~258
 

출판사 리뷰

1795년 봄,
정조와 혜경궁 홍씨의 8일간의 특별한 나들이,
을묘년 원행을 ‘의궤’로 읽는다!

어머니를 위한 정조의 특별 이벤트,
수원화성에서 열린 성묘와 회갑연 그리고 다채로운 행사들
이 모든 것에 관한 『원행을묘 정리의궤』의 놀라운 기록!

처음 ‘읽는’ 의궤


조선왕조 기록문화의 꽃이자, 세계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기록인 ‘의궤’. 의궤儀軌는 ‘조선시대에 왕실이나 국가에 큰 행사가 있을 때 후세에 참고할 수 있도록 일체의 관련 사실을 그림과 문자로 기록해 놓은 책’을 말한다. 크게는 한 도시의 설계에서 완공에 이르는 기록부터, 작게는 나라에서 사용한 인장印章을 어떻게 제조했는지에 대한 기록까지, 의궤는 세계 어느 나라도 엄두 내지 못한 놀라운 내용을 품고 있다.

그러나 이토록 놀라우면서 재미있고, 과거의 일이면서 현재와 미래의 나침반이 되는 ‘의궤’를,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 실체를 접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그 중요성에만 공감하고 있었다. 이런 안타까운 현실을 극복하고자 기획한 것이 ‘처음 읽는 의궤’ 시리즈이다. 이 시리즈는 의궤의 방대한 기록에서 주요 내용을 가려 뽑고, 어려운 용어에 풀이를 달고, 관련 그림들을 풍성하게 편집하여, 일반 독자들이 의궤를 실제로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한 시도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 여러분께서는 ‘의궤’가 품고 있는 놀라운 내용과 의미를 한껏 음미하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감탄하실 것이다. 기록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 기록을 당대의 백성, 나아가 후대와 함께하고자 했던 조선의 지성을 확인할 수 있으므로.” ― 엮은이의 머리말 중에서

정조가 기획한 특별 이벤트의 전모, 『원행을묘 정리의궤』

『정조, 어머니와 원행을 다녀오다』는 조선 제22대 왕 정조가 환갑을 맞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부친 사도세자의 묘에 다녀온 기록, 즉 『원행을묘 정리의궤』의 내용을 일반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게 발췌, 편집한 책이다. ‘원행을묘 정리의궤’라는 말은 을묘년(1795년)에 원행(왕족의 묘에 성묘하러 감) 다녀온 것을 정리의궤청에서 기록하여 펴낸 의궤라는 뜻이다.

책 제목에는 성묘만 표현되었지만, 실제 을묘년 원행에는 다양한 행사가 함께 치러졌으며, 그 안에 정조의 여러 의도가 담겨 있었다. 우선, 정조는 화성행궁에서 이 행사를 치름으로써 자신이 건설한 신도시 화성에 활기를 불어넣고자 했다. 더불어 남편의 묘에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어머니를 모시고 성묘함으로써 어머니의 한을 풀어 드리고 아버지의 복권을 꾀했으며, 어머니의 회갑연을 열어 백성들과 함께 어머니의 장수를 기원했다. 한편, 자신이 창설한 장용영 군사 등 3,700여 명이 참여하는 군사훈련을 실시함으로써 자신의 위세를 떨쳤고, 특별 과거 시험을 실시하고 쌀을 나눠 주는 사미賜米 행사와 양로연 등을 열어 백성들에게 왕실의 은혜를 베풀었다.

8일 동안 진행된 이 행사의 기획, 준비 단계부터 행사 완료 후 의궤를 만들기까지, 이 모든 내용을 기록한 것이 바로 『원행을묘 정리의궤』이다. 『정조, 어머니와 원행을 다녀오다』는 『원행을묘 정리의궤』의 주요 내용을 가려 뽑아 쉽게 가다듬고, 어려운 말에 풀이를 달고, 각종 문서들을 날짜 순서로 재구성하고, 부속 자료들은 내용에 따라 재배치하고, 관련 그림을 설명과 함께 편집해 넣은 ‘오늘의 독자를 위한 원행을묘 정리의궤’라 할 수 있다.

‘을묘년 원행’의 행사 개요 및 주요 일정

행사 개요
·행사명: 을묘년 원행
·기획 및 총감독: 정조
·행사의 VIP: 혜경궁 홍씨
·실무 총책임: 채제공
·주관 관청: 정리소
·행사 참여 인원: 6,000여 명
·예산: 약 100,000냥
·기간: 1795년 윤2월 9일~16일 (8일간)
·장소: 화성행궁과 그 주변
·자료집 발간: 정리의궤청 편, 『원행을묘 정리의궤』

주요 일정
·사전 준비: 정리소(주관 관청) 설치, 행사 경비 마련, 특별 가마 두 대 제작, 한강을 건너기 위한 배다리 설치, 약 1,800명이 이동할 수 있는 시흥로 건설
·첫째 날: 창덕궁 출발 → 노량진에서 배다리로 한강 건너기 → 노량행궁에서 점심 식사 → 시흥행궁 도착
·둘째 날: 시흥행궁 출발 → 청천평(맑은내들)에서 휴식 → 사근참행궁에서 점심 식사 → 화성행궁 도착
·셋째 날: 성묘(聖廟, 화성향교의 공자 사당) 참배 → 낙남헌에서 특별 과거 시험 실시 → 봉수당에서 혜경궁 홍씨 회갑연 예행 연습 진행
·넷째 날: 현륭원(사도세자 묘) 참배 → 서장대에서 군사 3700여 명이 참여하는 주·야간 군사훈련 참관
·다섯째 날: 봉수당에서 혜경궁 홍씨 회갑 진찬 거행(헌선도, 몽금척, 하황은 공연)
·여섯째 날: 신풍루 앞에서 인근 백성들에게 쌀을 나눠 주는 사미(賜米) 행사 진행 → 낙남헌에서 노인 384명을 초청하여 양로연 개최 → 득중정에서 활쏘기 진행
·일곱째 날: 화성행궁 출발 → 사근참행궁에서 휴식 및 점심 식사 → 시흥행궁 도착
·여덟째 날: 시흥행궁 출발 → 노량행궁에서 휴식 및 점심 식사 → 한강을 건너 환궁

80일 같은 8일간의 이야기, 건축·회화·공예·복식·음식·춤 등
당시의 화려했던 문화를 생생히 엿볼 수 있는 놀라울 정도로 상세한 기록

『원행을묘 정리의궤』의 색다른 관전 포인트

한강을 건너기 위한 배다리 설치


한강에 다리가 없던 그 시절에, 말과 가마 등 수많은 물자를 포함한 대규모 행렬이 한강을 건너는 방법은 배를 이용해 임시 다리 즉 배다리(주교舟橋)를 설치하여 건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원행을묘 정리의궤』에는 배다리 설치 방법, 사용했던 배와 자재의 관리 방법에 관하여 정조가 직접 작성한 「어제주교지남(御製舟橋指南)」이 실려 있다. 이 방법에 따라 배다리 설치가 시작되어 11일 만에 마칠 수 있었다.

혜경궁 홍씨를 위한 특별 가마 제작

정조는 일평생 처음으로 가마를 타고 나들이를 하게 되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특별 가마 제작을 명령한다. 『원행을묘 정리의궤』에는 이 특별 가마 제작에 관한 상세한 내용이 담겨 있는데, 하나는 한양에서 화성까지 타고 갈 말이 끄는 가마로, 이를 제작하는 데 2,785냥의 비용이 들었다. 다른 하나는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 앞에 내려 무덤까지 올라갈 때 타는 사람이 메고 가는 가마로, 이 가마를 만드는 데는 732냥이 들었다.

이 두 대의 가마가 제작된 것을 보고 정조는 “이 가마를 보니 안이 넓고 밖이 가벼우며, 크기가 법도에 맞고 발과 휘장, 가마 덮개가 정교하고 매우 촘촘하니, 경등이 공장工匠을 감독한 수고로움이 가상하다 할 수 있다.”고 흡족해했으며, 원행 보름 전에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예행연습까지 진행했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 진찬 거행

혜경궁 홍씨의 정확한 회갑일은 1795년 6월 18일이다. 그러나 원행 일정에 맞추어 윤2월 13일 화성행궁에서 미리 회갑 진찬연을 거행하고, 실제 회갑일에도 다시 궁에서 잔치를 열었다. 진찬 의식은 매우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헌선도〉, 〈몽금척〉, 〈수명명〉, 〈하황은〉 등의 궁중무용 공연이 진행되었고, 축하의 잔을 올리는 내내 〈여민락〉, 〈낙양춘〉, 〈환환곡〉 등의 음악과 〈장악장〉, 〈관화장〉 등의 창이 연주되고, 의식에 참가한 이들의 ‘천세’, ‘만세’ 소리가 울려퍼졌다.

한편, 이날의 진찬을 위해 준비된 음식상 또한 매우 풍성하고 화려했다. 주인공인 혜경궁 홍씨께 올려진 메인 상차림은 각종 떡·다식·강정·과일·견과·정과·탕·육류·생선·만두 등 70가지나 됐고, 이 외에도 소별미 12가지가 추가되었다. 또한 잔칫상에 꽂아 놓는 조화인 각종 상화床花가 화려하게 장식되었으며, 잔치가 열리는 봉수당에는 장막을 비롯하여 각종 화려한 문양의 돗자리와 방석, 십장생 병풍과 주렴, 탁자, 수건, 조화, 초 등이 준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