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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구약성경은 고대 근동 문헌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고 보고, 앗수르 이전,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프톨레마이오스, 셀레우코스로 근동 문헌사의 시대를 구분하여 구약성경 전체 문헌의 역사를 추적하고 있다. 여타의 비평학과 다른 점은 역사 재구성을 단순 도식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거쳐 여러 전승이 지속적으로 상호 작용했을 것으로 전제한다는 점이다.
목차
추천사
한국어판 저자 서문
저자 서문
제1장 구약 문헌사의 목적, 역사 및 문제
제2장 앗수르 출현 이전 고대 이스라엘 문헌의 시작(주전 10-8세기)
제3장 앗수르 시대 문헌(주전 8-7세기)
제4장 바벨론 시대 문헌(주전 6세기)
제5장 페르시아 시대 문헌(주전 5-4세기)
제6장 프톨레마이오스 시대 문헌(주전 3세기)
제7장 셀레우코스 시대 문헌(주전 2세기)
제8장 성서의 생성과 정경의 기원
참고 문헌
4. 추천사
한국어판 저자 서문
저자 서문
제1장 구약 문헌사의 목적, 역사 및 문제
제2장 앗수르 출현 이전 고대 이스라엘 문헌의 시작(주전 10-8세기)
제3장 앗수르 시대 문헌(주전 8-7세기)
제4장 바벨론 시대 문헌(주전 6세기)
제5장 페르시아 시대 문헌(주전 5-4세기)
제6장 프톨레마이오스 시대 문헌(주전 3세기)
제7장 셀레우코스 시대 문헌(주전 2세기)
제8장 성서의 생성과 정경의 기원
참고 문헌
4. 추천사
책 속으로
구약에 대한 문헌사적 접근이 일반 개론서 체계에 비해 갖는 특별한 이점은 구약의 “수평적”이고 “수직적”인 연관성을 분명히 밝힐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아마도 당대 문헌의 대화로 형성된 본문의 문제(“수평적” 관계)뿐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개념과 입장을 다루는 시간적으로 순차적인 저작의 문제(“수직적” 관계)도 드러낸다.
따라서 구약의 책과 본문을 불연속적인 점만 아니라 그것과 구약의 대화 상대자와 고대 근동 안에 있는 기타 대상과의 문헌적·실질적 관련성 속에서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구약 본문이 다양한 방식으로 상호 작용하면서 서로 지지하거나 교정하거나 거부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호 작용은 결코 남김없이 다루어진 적이 없으며 예측 가능한 미래에도 계속해서 학자의 임무가 될 것이다.
우리는 특히 문헌 암시나 대체로 문헌 인용구 속에서 성서 내의 참조 구절을 (비록 그런 참조 구절은 거의 한 번도 그런 구절로 입증될 수 없지만) 관찰할 수 있다. 소수의 명백한 사례 중에는 다니엘 9장이 있다. 직접 도입되지는 않지만 단어와 주제의 선택을 통해 서기관인 독자가 식별할 수 있는 일반적인 암시 방법은 박식한 학자의 좁은 영역 안에서 다시 그 나름의 방식으로 본문의 산출과 수용 가능성을 입증한다.
게다가 고대 근동 문헌과의 기본적으로 실질적인 언어 관련성은 이 연구가 구약에만 제한될 수 없다는 점을 보여 준다. 구약 본문 내의 “수평적”, “수직적”인 참조 구절은 자연히 정경의 경계에 멈추지 않으며 정경은 어쨌든 구약이 존재한 뒤에 만들어졌다.
---p. 102
출애굽 전승의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성향은 창세기 족장 내러티브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정치적인 관점에서 족장 내러티브의 평화주의는 인상적이다. 조상들은 그 땅의 다른 , 집단과 평화롭게 공존하며 그들과 협정을 맺는데 이는 출애굽 내러티브에 따르면 엄격히 금지된 일이다.
그들의 포용주의도 인상적이다. 족장들은 방랑할 때와 여정 중에스스로 다양한 이름으로드러내는 일단의 귀인과 접촉하고 다양한 장소에서 그들에게 바치는 제의 사당을 세운다. 물론 족장 내러티브를 읽는 독자에게는 이런 신의 배후에는 항상 동일하신 한 하나님, 즉 여호와가 있다는 점이 분명히 보인다. 하지만 내러티브 속의 행위자에게도 이것이 그렇게 분명한 것은 아니며 그들의 반신반의에는분명히 역사적 배경이 있다.
조상 내러티브의 배후에는 원래 여호와만이 아니라 더 많은다른 신과 그 신의 성소에 대해 말하는 기억 내지 구두 전승이 있다. 조상들은 자신들의 여행길에서 전승 과정이 낳은 것과 똑같은 것, 즉 다양한 지역 신과 이스라엘의 한 하나님과의 동일시를선언한다. 조상 내러티브는 이스라엘의 기원을 이집트에서 찾고 그에따라 다른 민족-종교적 정체성에 맞서 이스라엘의 민족적 정체성을 격렬하고 배타적으로 옹호한 출애굽 전승과 함께 이스라엘의 동화적이고 토착적인 그 땅에서의 기원이라는독립적·대안적 개념을 반영한다.
---p. 242
구약 연구의 거의 모든 주제와 마찬가지로 성서화라는 문제에 관해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성서적 관점과 역사적 관점을 구별해야 한다. 구별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구약이 역사-비평적 측면이 아니라 결과-역사적 측면에서 추론하기 때문이다.
즉, 구약은 역사적 과정들을 일반적으로 동시대에 실시간으로 효과를 미치는 것으로 본다. 구약에서 과거에 대한 관심은 기능과 신화라는 측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약의 내러티브는 본질적으로 실존적인 문제를 기원의 문제로 다루려 한다.
거룩한 경전이라는 구약의 자기 표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성서에서 거룩한 경전은 미리 존재하거나 창조 때 주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라 내러티브의 전개 속에서 비교적 일찍 나타난다. 그것은 출애굽기 이후부터 단계적으로 생겨난다(참고. 출 17:14; 24:4; 34:27-28; 민 33:2; 신 31:9). 따라서 구약은 처음부터 이스라엘에 성서에 기반을 둔 종교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처음에는 율법이 주어졌고 모세의 지휘 아래 기록되었다.
창세기 족장은 율법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구약이 묘사하는 대로 모세의 율법은 금세 망각되었고 요시야가 다스리던 시대에 와서야 성전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다시 나타났다(왕하 22-23장). 유다와 예루살렘에 닥친 참화의 결과로 모세 율법은 다시 망각되었다가 유다에서 에스라의 지휘 아래 겨우 재도입되었다. 요컨대 모세는 이스라엘에 성서에 입각한 유대 종교를 제공했지만 그것은 에스라 시대에 이르러서야 겨우 효력을 발휘했다.
따라서 구약의 책과 본문을 불연속적인 점만 아니라 그것과 구약의 대화 상대자와 고대 근동 안에 있는 기타 대상과의 문헌적·실질적 관련성 속에서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구약 본문이 다양한 방식으로 상호 작용하면서 서로 지지하거나 교정하거나 거부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호 작용은 결코 남김없이 다루어진 적이 없으며 예측 가능한 미래에도 계속해서 학자의 임무가 될 것이다.
우리는 특히 문헌 암시나 대체로 문헌 인용구 속에서 성서 내의 참조 구절을 (비록 그런 참조 구절은 거의 한 번도 그런 구절로 입증될 수 없지만) 관찰할 수 있다. 소수의 명백한 사례 중에는 다니엘 9장이 있다. 직접 도입되지는 않지만 단어와 주제의 선택을 통해 서기관인 독자가 식별할 수 있는 일반적인 암시 방법은 박식한 학자의 좁은 영역 안에서 다시 그 나름의 방식으로 본문의 산출과 수용 가능성을 입증한다.
게다가 고대 근동 문헌과의 기본적으로 실질적인 언어 관련성은 이 연구가 구약에만 제한될 수 없다는 점을 보여 준다. 구약 본문 내의 “수평적”, “수직적”인 참조 구절은 자연히 정경의 경계에 멈추지 않으며 정경은 어쨌든 구약이 존재한 뒤에 만들어졌다.
---p. 102
출애굽 전승의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성향은 창세기 족장 내러티브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정치적인 관점에서 족장 내러티브의 평화주의는 인상적이다. 조상들은 그 땅의 다른 , 집단과 평화롭게 공존하며 그들과 협정을 맺는데 이는 출애굽 내러티브에 따르면 엄격히 금지된 일이다.
그들의 포용주의도 인상적이다. 족장들은 방랑할 때와 여정 중에스스로 다양한 이름으로드러내는 일단의 귀인과 접촉하고 다양한 장소에서 그들에게 바치는 제의 사당을 세운다. 물론 족장 내러티브를 읽는 독자에게는 이런 신의 배후에는 항상 동일하신 한 하나님, 즉 여호와가 있다는 점이 분명히 보인다. 하지만 내러티브 속의 행위자에게도 이것이 그렇게 분명한 것은 아니며 그들의 반신반의에는분명히 역사적 배경이 있다.
조상 내러티브의 배후에는 원래 여호와만이 아니라 더 많은다른 신과 그 신의 성소에 대해 말하는 기억 내지 구두 전승이 있다. 조상들은 자신들의 여행길에서 전승 과정이 낳은 것과 똑같은 것, 즉 다양한 지역 신과 이스라엘의 한 하나님과의 동일시를선언한다. 조상 내러티브는 이스라엘의 기원을 이집트에서 찾고 그에따라 다른 민족-종교적 정체성에 맞서 이스라엘의 민족적 정체성을 격렬하고 배타적으로 옹호한 출애굽 전승과 함께 이스라엘의 동화적이고 토착적인 그 땅에서의 기원이라는독립적·대안적 개념을 반영한다.
---p. 242
구약 연구의 거의 모든 주제와 마찬가지로 성서화라는 문제에 관해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성서적 관점과 역사적 관점을 구별해야 한다. 구별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구약이 역사-비평적 측면이 아니라 결과-역사적 측면에서 추론하기 때문이다.
즉, 구약은 역사적 과정들을 일반적으로 동시대에 실시간으로 효과를 미치는 것으로 본다. 구약에서 과거에 대한 관심은 기능과 신화라는 측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약의 내러티브는 본질적으로 실존적인 문제를 기원의 문제로 다루려 한다.
거룩한 경전이라는 구약의 자기 표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성서에서 거룩한 경전은 미리 존재하거나 창조 때 주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라 내러티브의 전개 속에서 비교적 일찍 나타난다. 그것은 출애굽기 이후부터 단계적으로 생겨난다(참고. 출 17:14; 24:4; 34:27-28; 민 33:2; 신 31:9). 따라서 구약은 처음부터 이스라엘에 성서에 기반을 둔 종교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처음에는 율법이 주어졌고 모세의 지휘 아래 기록되었다.
창세기 족장은 율법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구약이 묘사하는 대로 모세의 율법은 금세 망각되었고 요시야가 다스리던 시대에 와서야 성전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다시 나타났다(왕하 22-23장). 유다와 예루살렘에 닥친 참화의 결과로 모세 율법은 다시 망각되었다가 유다에서 에스라의 지휘 아래 겨우 재도입되었다. 요컨대 모세는 이스라엘에 성서에 입각한 유대 종교를 제공했지만 그것은 에스라 시대에 이르러서야 겨우 효력을 발휘했다.
---p. 414
추천평
우리 앞에 놓인 이 책은 전형적인 독일 학풍의 구약 문헌 역사 연구서다. 알다시피 우리가 구약이라 부르는 문헌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단행본” 문헌이 아니다. 수많은 인간 저자가 수세기에 걸쳐 생산해 낸 역사적 문헌이다. “역사적”이란 말은 각 권이 역사 속에서 특정한 시기에 생산되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각 권 안에 다양한 역사 층이 전승의 형태로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달리 말해 저마다 저자가 따로 있는 책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 다양한 전승이 녹아 있기에 그리 간단한 책이 아니라는 말이다.
또한 각 권마다 이름이 있고, 고유의 이름이 있는 각 권이 여러 권 모여 좀 더 큰 뭉치 문헌을 이루고, 큰 뭉치 문헌이 최종적으로 구약성서 혹은 히브리성서이라는 단일 문헌을 이루게 되었다는 사실은 구약 문헌을 전승사적 측면에서 다루어야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따라서 문헌에 대한 “역사적 연구”가 필수적이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고대 근동과 구약 문헌사』(Literaturgeschichte des Alten Testaments)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구약 문헌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살피려면 반드시 “문헌의 역사”를 살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헌 역사를 재구성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상당한 지적 추측과 유식한 가설 없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구약 문헌 안에 들어 있는 다양한 전승(예. 제의 및 지혜 전승, 서사 전승, 예언 전승, 율법 전승)을 찾아내는 일, 또한 다양한 전승이 어떻게 수정되고 보완되며 덧칠되었는지를 살피는 일, 각 본문이 가리키는 역사적 정황을 추측해 내는 일 등을 살펴보는 문헌 역사 연구는 치밀한 노력과 상당한 지적 상상력을 요구한다.
이 책의 저자인 콘라드 슈미트 박사는 독일 학풍의 특징인 역사적 치밀성을 갖고 구약 문헌의 역사를 나름 일관성 있게 제시한다. 이 점에 있어서 저자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구약성서 문헌 발전 역사는 역사적 배경과 다양한 문헌의 복잡한 상호 관계 속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저자의 말이 이 책의 목적을 잘 보여 준다. 그는 구약 문헌이 기원전 1세기 즈음에 거의 완성된 형태가 되었을 것이라는 가설 위에, 구약 문헌의 역사 시기를 크게 앗수르 이전 시대, 앗수르 시대, 바벨론 시대, 페르시아 시대, 프톨레마이오스 시대, 셀레우코스 시대 등 여섯 시대로 구분한다. 그리고 구약의 각 권을 해당 시대에 맞게 문헌 전승사적 차원에서 살핀다.
이 책의 유용성은 구약 문헌이 역사의 산물이라는 점을 알려줌으로써 사회 역사적 배경을 반영하고 있는 본문을 무역사적 비역사적으로 이해하지 않도록 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우리가 갖고 있는 구약성서가 어떻게 “자라오게” 되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아마 한국의 복음주의 권에 속한 신학생이라면 “불편한 성서관”을 만나게 되는 경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하여 서구 학자들이 구약을 역사비평적으로 연구하는 방식의 한 부분인 구약 문헌사 연구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이 구약이라는 문헌을 역사적으로(통시적) 살펴본 개론적 연구서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저술 목적을 인용함으로 추천의 글을 마치려 한다.
아무쪼록 이 책이 구약의 내적 역사적 형성 과정의 난해함과 함께 주제의 일관성을 효과적으로 설명했기를 바란다.
적어도 저자의 바람이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류호준(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구약학 교수)
또한 각 권마다 이름이 있고, 고유의 이름이 있는 각 권이 여러 권 모여 좀 더 큰 뭉치 문헌을 이루고, 큰 뭉치 문헌이 최종적으로 구약성서 혹은 히브리성서이라는 단일 문헌을 이루게 되었다는 사실은 구약 문헌을 전승사적 측면에서 다루어야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따라서 문헌에 대한 “역사적 연구”가 필수적이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고대 근동과 구약 문헌사』(Literaturgeschichte des Alten Testaments)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구약 문헌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살피려면 반드시 “문헌의 역사”를 살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헌 역사를 재구성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상당한 지적 추측과 유식한 가설 없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구약 문헌 안에 들어 있는 다양한 전승(예. 제의 및 지혜 전승, 서사 전승, 예언 전승, 율법 전승)을 찾아내는 일, 또한 다양한 전승이 어떻게 수정되고 보완되며 덧칠되었는지를 살피는 일, 각 본문이 가리키는 역사적 정황을 추측해 내는 일 등을 살펴보는 문헌 역사 연구는 치밀한 노력과 상당한 지적 상상력을 요구한다.
이 책의 저자인 콘라드 슈미트 박사는 독일 학풍의 특징인 역사적 치밀성을 갖고 구약 문헌의 역사를 나름 일관성 있게 제시한다. 이 점에 있어서 저자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구약성서 문헌 발전 역사는 역사적 배경과 다양한 문헌의 복잡한 상호 관계 속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저자의 말이 이 책의 목적을 잘 보여 준다. 그는 구약 문헌이 기원전 1세기 즈음에 거의 완성된 형태가 되었을 것이라는 가설 위에, 구약 문헌의 역사 시기를 크게 앗수르 이전 시대, 앗수르 시대, 바벨론 시대, 페르시아 시대, 프톨레마이오스 시대, 셀레우코스 시대 등 여섯 시대로 구분한다. 그리고 구약의 각 권을 해당 시대에 맞게 문헌 전승사적 차원에서 살핀다.
이 책의 유용성은 구약 문헌이 역사의 산물이라는 점을 알려줌으로써 사회 역사적 배경을 반영하고 있는 본문을 무역사적 비역사적으로 이해하지 않도록 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우리가 갖고 있는 구약성서가 어떻게 “자라오게” 되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아마 한국의 복음주의 권에 속한 신학생이라면 “불편한 성서관”을 만나게 되는 경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하여 서구 학자들이 구약을 역사비평적으로 연구하는 방식의 한 부분인 구약 문헌사 연구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이 구약이라는 문헌을 역사적으로(통시적) 살펴본 개론적 연구서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저술 목적을 인용함으로 추천의 글을 마치려 한다.
아무쪼록 이 책이 구약의 내적 역사적 형성 과정의 난해함과 함께 주제의 일관성을 효과적으로 설명했기를 바란다.
적어도 저자의 바람이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류호준(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구약학 교수)
구약성서 문헌사 연구의 필요성
구약성서에 대한 문헌사적 접근법은 성서의 지고한 권위에 대한 불온한 도전이 아니며, 더구나 구약성서를 고대 근동 문헌의 하나로 격하시키려는 반신학적 반동도 아니다. 이렇게 보는 것은 정말 커다란 오해다.
성서 각 권이 하늘에서 갑작스럽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떨어진 책이 아니라면, 다양한 성서 사본의 존재를 인정하고 본문의 원래 의미를 찾아가는 본문비평의 필요성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최소한 당신이 가지고 있는 구약성서의 기반이 되는 히브리어 성서, 그 표준인 마소라 본문을 읽어 보더라도 일부 단어와 표현은 “구전”(Qere)의 형태로 주어진 것과 “저술”(Ketiv)의 형태로 주어진 단어가 다르게 표기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신약성서를 펼쳐 마가복음 16:9-20에 달린 각주를 읽어 보라. 분명 가장 오래된 고대 사본에는 이 본문이 없다는 설명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이 본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부분이 어떻게 오늘날 개신교의 성서에 포함되었으며, 오랜 동안 어떠한 과정을 거쳐 당신의 책상에까지 오게 된 것일까?
이 책의 저자인 콘라드 슈미트가 언급했듯이, 성서의 참된 신적 권위는 “본문 그 자체에서” 찾을 수 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는 이렇게 굳건한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역사주의 비평학의 도전을 회피하려고만 한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는 아마도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성서의 무오성을 믿는다면 어떻게 성서의 본문을 비평하고 성서 형성 과정을 설명하려 할 수 있는가?”
하지만 이런 질문은 잘못된 가정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성서비평학을 공부하고 성서 문헌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무오성을 거부하는 것과 동일시 될 수는 없다. 왜 그럴까?
첫째, 서구 복음주의 교회는 본문비평을 거부한 적이 없다. “성서의 무오성에 대한 시카고 선언”(The Chicago Statement on Biblical Inerrancy)은 명백히 성서 최초의 원(Original) 텍스트를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으며 가질 수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실제 미국 복음주의 성서학자의 다수가 정경-문학비평을 따르고 있으나, 방법론에서 형식비평, 양식비평, 편집비평을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를 공부하고 거부할 부분은 거부하고 이용할 부분은 해석학에 활발히 적용하고 있다. 성서가 하나님의 변함없는 말씀임을 입증해야 하는 우리에게 비평학은 걸림돌이 아니라 오히려 성서의 역사성을 입증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된다.
둘째, 복음주의 신학은 “무오성”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피력해 왔으며 최근까지 “성서의 무오성에 대한 시카고 선언”을 재정의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해 왔다. 이 전통을 폐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성서의 신적 기원을 지키기 위한 절박함 때문이다. 따라서 아직도 무오성을 지키기 원하는 교회는 다음의 질문에 답할 준비를 해야 한다.
“교회가 가진 성서는 오류가 없는 완전한 텍스트이며 성서를 완전한 것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를 조금 다르게 질문해 보자.
“당신이 가지고 있는 텍스트가 오류가 없는 완전한 성서 판본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참으로 수많은 영어 번역본과 고대어 역본과 사본의 홍수 속에서, 특히나 쿰란 공동체에서 발견된 무수한 성서 원문, 다양화된 최종 형태의 본문 앞에서 우리가 가진 성서 번역이 최초의 원본과 얼마나 다른지 그리고 나아가 어떠한 과정으로 형성되어 왔는지 이해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이 책의 저자인 콘라드 슈미트는 “구약성서가 어떠한 문화적, 사회적, 역사적 배경에서 저술되고 발전되고 최종적인 정경의 형태를 가지게 되었는가”에 대한 광범위한 질문에 대답한다. 슈미트는 현재 스위스 취리히대학교(Universitat Zurich) 교수이지만, 독일에서 공부하고 하이델베르크대학교(Ruprecht-Karls Universitat Heidelberg)에서 교수직을 감당할 만큼 독일 구약신학에 정통한 학자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가 완전히 새로운 학설은 아닐지라도, 저자는 율리우스 벨하우젠(Julius Wellhausen), 헤르만 궁켈(Hermann Gunkel), 게르하르트 폰 라트(Gerhard von Rad)의 명맥을 이어 구약 문헌사를 수정, 보완, 집대성하여 정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이다.
만약 구약 문헌학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신학도라면 데이빗 카(David Carr), 토마스 뢰머(Thomas Romer), 에어하르트 블룸(Erhard Blum) 같은 학자의 책과 함께 이 책을 읽는다면 큰 유익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본 저술도 한계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첫째, 오경 신학의 오랜 문서설(Documentary Hypothesis)과 형식/편집비평은 최근 수십 년간 상당한 비판에 직면해 왔다. 또한, 여전히 J, E, JE, D, P와 같은 문헌의 도식을 구분하고 결합하는 가정을 사용할 수 있다 할지라도, 이와 같은 이론은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며 반드시 수정 과정이 필요하다. 구술 전승과 문헌 전승이 후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존재해 왔고 상호 영향을 주고받아 왔다면 도식적인 방식으로 문헌학의 역사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문제점을 노출할 수밖에 없게 된다.
둘째, 저자 스스로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서 각 권의 저술 연대를 지정하는데 이는 여러 가지 문제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 성서 각 권이 수세기에 걸쳐 저술과 제작을 반복해 왔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이는 더욱 분명해 진다. 예를 들어, 저자는 욥기의 대부분은 페르시아 시대에 저술되었지만, 욥기 28장과 32-37장은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에 저술된 것으로 본다. 상당수 편집비평가가 이러한 분석을 내놓고 있으며 비교적 크게 동의를 받고 있으나 어떠한 방식으로도 정확한 저술 연대를 추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페르시아와 헬라 시대를 정확히 구분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기계적인 방식으로 구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셋째, 저자는 자주 고대 근동 문헌을 언급하고 있지만, 이러한 비이스라엘 문헌이 정확히 구약성서의 어떤 텍스트와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한 언급은 회피되거나 자세히 다루어지지 않거나 정확성이 결여된 부분이 눈에 띈다.
콘라드 교수는 이 책의 한국어 출판을 결정하면서 “한국 교회에 이 책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느냐”고 나에게 의향을 물어 본 적이 있다. 나의 대답은 두말할 나위 없이 “Yes”였다. 고도로 조직화된 비평학을 공부하면 할 수록 점차 성서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나 삼위 하나님에 대한 사랑까지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속설이 오랫동안 한국 신학계에 있었다. 하지만 진정으로 “신학함”을 방해하는 것은 그 무엇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에 대한 “몰이해”와 “반지성적” 태도다. 따라서, 성서가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궁금함으로 이 책을 선택하게 될 독자에게 이렇게 호소하고 싶다.
“두려워하지 말고 읽어 보라. 그리고 할 수 있는 역량의 최대치로 이런 가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라.”
아무쪼록 구약성서의 형성에 대한 역사적 시각이 하나님의 변함없는 계시의 진실성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해 나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일독을 권한다.
2018년 4월
취리히 그로스뮌스터에서
권지성 박사(스위스 Universitat Zurich 리서치펠로우)
구약성서에 대한 문헌사적 접근법은 성서의 지고한 권위에 대한 불온한 도전이 아니며, 더구나 구약성서를 고대 근동 문헌의 하나로 격하시키려는 반신학적 반동도 아니다. 이렇게 보는 것은 정말 커다란 오해다.
성서 각 권이 하늘에서 갑작스럽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떨어진 책이 아니라면, 다양한 성서 사본의 존재를 인정하고 본문의 원래 의미를 찾아가는 본문비평의 필요성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최소한 당신이 가지고 있는 구약성서의 기반이 되는 히브리어 성서, 그 표준인 마소라 본문을 읽어 보더라도 일부 단어와 표현은 “구전”(Qere)의 형태로 주어진 것과 “저술”(Ketiv)의 형태로 주어진 단어가 다르게 표기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신약성서를 펼쳐 마가복음 16:9-20에 달린 각주를 읽어 보라. 분명 가장 오래된 고대 사본에는 이 본문이 없다는 설명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이 본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부분이 어떻게 오늘날 개신교의 성서에 포함되었으며, 오랜 동안 어떠한 과정을 거쳐 당신의 책상에까지 오게 된 것일까?
이 책의 저자인 콘라드 슈미트가 언급했듯이, 성서의 참된 신적 권위는 “본문 그 자체에서” 찾을 수 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는 이렇게 굳건한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역사주의 비평학의 도전을 회피하려고만 한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는 아마도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성서의 무오성을 믿는다면 어떻게 성서의 본문을 비평하고 성서 형성 과정을 설명하려 할 수 있는가?”
하지만 이런 질문은 잘못된 가정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성서비평학을 공부하고 성서 문헌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무오성을 거부하는 것과 동일시 될 수는 없다. 왜 그럴까?
첫째, 서구 복음주의 교회는 본문비평을 거부한 적이 없다. “성서의 무오성에 대한 시카고 선언”(The Chicago Statement on Biblical Inerrancy)은 명백히 성서 최초의 원(Original) 텍스트를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으며 가질 수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실제 미국 복음주의 성서학자의 다수가 정경-문학비평을 따르고 있으나, 방법론에서 형식비평, 양식비평, 편집비평을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를 공부하고 거부할 부분은 거부하고 이용할 부분은 해석학에 활발히 적용하고 있다. 성서가 하나님의 변함없는 말씀임을 입증해야 하는 우리에게 비평학은 걸림돌이 아니라 오히려 성서의 역사성을 입증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된다.
둘째, 복음주의 신학은 “무오성”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피력해 왔으며 최근까지 “성서의 무오성에 대한 시카고 선언”을 재정의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해 왔다. 이 전통을 폐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성서의 신적 기원을 지키기 위한 절박함 때문이다. 따라서 아직도 무오성을 지키기 원하는 교회는 다음의 질문에 답할 준비를 해야 한다.
“교회가 가진 성서는 오류가 없는 완전한 텍스트이며 성서를 완전한 것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를 조금 다르게 질문해 보자.
“당신이 가지고 있는 텍스트가 오류가 없는 완전한 성서 판본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참으로 수많은 영어 번역본과 고대어 역본과 사본의 홍수 속에서, 특히나 쿰란 공동체에서 발견된 무수한 성서 원문, 다양화된 최종 형태의 본문 앞에서 우리가 가진 성서 번역이 최초의 원본과 얼마나 다른지 그리고 나아가 어떠한 과정으로 형성되어 왔는지 이해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이 책의 저자인 콘라드 슈미트는 “구약성서가 어떠한 문화적, 사회적, 역사적 배경에서 저술되고 발전되고 최종적인 정경의 형태를 가지게 되었는가”에 대한 광범위한 질문에 대답한다. 슈미트는 현재 스위스 취리히대학교(Universitat Zurich) 교수이지만, 독일에서 공부하고 하이델베르크대학교(Ruprecht-Karls Universitat Heidelberg)에서 교수직을 감당할 만큼 독일 구약신학에 정통한 학자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가 완전히 새로운 학설은 아닐지라도, 저자는 율리우스 벨하우젠(Julius Wellhausen), 헤르만 궁켈(Hermann Gunkel), 게르하르트 폰 라트(Gerhard von Rad)의 명맥을 이어 구약 문헌사를 수정, 보완, 집대성하여 정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이다.
만약 구약 문헌학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신학도라면 데이빗 카(David Carr), 토마스 뢰머(Thomas Romer), 에어하르트 블룸(Erhard Blum) 같은 학자의 책과 함께 이 책을 읽는다면 큰 유익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본 저술도 한계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첫째, 오경 신학의 오랜 문서설(Documentary Hypothesis)과 형식/편집비평은 최근 수십 년간 상당한 비판에 직면해 왔다. 또한, 여전히 J, E, JE, D, P와 같은 문헌의 도식을 구분하고 결합하는 가정을 사용할 수 있다 할지라도, 이와 같은 이론은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며 반드시 수정 과정이 필요하다. 구술 전승과 문헌 전승이 후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존재해 왔고 상호 영향을 주고받아 왔다면 도식적인 방식으로 문헌학의 역사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문제점을 노출할 수밖에 없게 된다.
둘째, 저자 스스로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서 각 권의 저술 연대를 지정하는데 이는 여러 가지 문제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 성서 각 권이 수세기에 걸쳐 저술과 제작을 반복해 왔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이는 더욱 분명해 진다. 예를 들어, 저자는 욥기의 대부분은 페르시아 시대에 저술되었지만, 욥기 28장과 32-37장은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에 저술된 것으로 본다. 상당수 편집비평가가 이러한 분석을 내놓고 있으며 비교적 크게 동의를 받고 있으나 어떠한 방식으로도 정확한 저술 연대를 추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페르시아와 헬라 시대를 정확히 구분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기계적인 방식으로 구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셋째, 저자는 자주 고대 근동 문헌을 언급하고 있지만, 이러한 비이스라엘 문헌이 정확히 구약성서의 어떤 텍스트와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한 언급은 회피되거나 자세히 다루어지지 않거나 정확성이 결여된 부분이 눈에 띈다.
콘라드 교수는 이 책의 한국어 출판을 결정하면서 “한국 교회에 이 책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느냐”고 나에게 의향을 물어 본 적이 있다. 나의 대답은 두말할 나위 없이 “Yes”였다. 고도로 조직화된 비평학을 공부하면 할 수록 점차 성서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나 삼위 하나님에 대한 사랑까지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속설이 오랫동안 한국 신학계에 있었다. 하지만 진정으로 “신학함”을 방해하는 것은 그 무엇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에 대한 “몰이해”와 “반지성적” 태도다. 따라서, 성서가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궁금함으로 이 책을 선택하게 될 독자에게 이렇게 호소하고 싶다.
“두려워하지 말고 읽어 보라. 그리고 할 수 있는 역량의 최대치로 이런 가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라.”
아무쪼록 구약성서의 형성에 대한 역사적 시각이 하나님의 변함없는 계시의 진실성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해 나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일독을 권한다.
2018년 4월
취리히 그로스뮌스터에서
권지성 박사(스위스 Universitat Zurich 리서치펠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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