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성서신학 (연구>책소개)/1.교회사.성서고고학

토라의 잃어버린 세계

동방박사님 2022. 2. 19. 10:16
728x90

책소개

이 책은 토라가 고대 근동의 맥락에서 율법이나 법률로 기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언약 관계 안에서 합당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가르침 또는 교훈 모음집으로 기능했다고 주장한다. 우리 시대에 토라의 적절한 위치와 기능을 올바로 이해하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목차

서론

제1부 - 방법론
명제 1 - 구약성경은 고대 문서다
명제 2 - 오늘날 우리가 토라를 해석하는 방식은 법과 법률 작동 방식에 관한 우리의 사고에 영향을 받는다

제2부 - 고대 근동 법 모음집의 기능
명제 3 - 고대 세계의 법 모음집은 법률이 아니다
명제 4 - 고대 근동의 법 모음집은 지혜를 가르친다
명제 5 - 토라는 고대 근동의 법 모음집과 비슷하며, 따라서 법률이 아니라 지혜를 가르친다
명제 6 - 이스라엘의 언약은 사실상 고대 근동의 종주권조약 역할을 한다
명제 7 - 거룩은 목표가 아니라 지위다

제3부 - 제의와 토라
명제 8 - 고대 근동의 제의는 신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역할을 했다
명제 9 - 야웨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고대 이스라엘의 제의는 언약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제4부 - 토라의 맥락
명제 10 - 토라는 고대 근동의 법 모음집에 의존하기 때문이 아니라 동일한 문화적 맥락에 내장되어 있기 때문에 고대 근동의 법 모음집과 유사하다
명제 11 - 토라와 고대 근동의 법 모음집 사이의 차이는 법률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언약에서 세워진 질서에서 발견된다
명제 12 - 토라는 고대 세계의 맥락 안에 자리 잡고 있다
명제 13 - 토라는 언약의 맥락 안에 자리 잡고 있다
명제 14 - 토라는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는 야웨의 임재에 관한 이스라엘 신학의 맥락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제5부 - 토라의 지속적인 중요성
명제 15 - 신약에서의 율법에 관한 논의들은 우리에게 고대 세계의 맥락에서 구약의 토라에 관하여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명제 16 - 지금도 적실성이 있는 부분을 가려내기 위해 토라의 범주를 구분해서는 안된다
명제 17 - 토라는 결코 구원을 제공하도록 의도되지 않았다
명제 18 - 신적 가르침은 법의 은유가 아니라 건강의 은유로 이해될 수 있다
명제 19 - 맥락에서 토라를 읽고서 도출한 원칙을 바탕으로 도덕적 지식을 얻거나 윤리 체계를 구축할 수 없다
명제 20 - 토라는 오늘날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근거 텍스트를 제공할 수 없다
명제 21 -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토라를 신성한 도덕적 가르침을 제공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명제 22 - 윤리 신명론은 토라가 도덕적 가르침일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명제 23 - 토라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토라를 도덕법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아니라 토라가 무엇을 말하기 위하여 기록되었는지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들의 요약
부록 - 십계명
더 읽을 자료
성구 색인
 

저자 소개

저 : 존 H. 월튼 (John H. Walton)
 
미국 Muhlenberg College (A.B.), 미국 Wheaton Graduate School (M.A.), 이스라엘 Hebrew Union College-Jewish Institute of Religion (Ph.D.)를 거쳐 미국 Moody Bible Institute 구약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히브루유니언 칼리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무디 성경대학에서 20여 년간 가르쳤으며, 현재는 휘튼 칼리지에...

저 : J. 하비 월튼 (J. Harvey Walton)

 
휘튼 칼리지 대학원에서 M.A. 학위를 받았고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그는 성경 연구 분야의 연구원이며 『이스라엘 정복의 잃어버린 세계』의 공동 저자다.
역 : 안영미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B.A.)를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Div.)을 마친 후,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 히브리어학과와 성서학과에서 석사과정을 수학하였다. 다년간 계간지 「성서마당」의 “원어로 성경읽기-구약편”을 집필했고, 2011년부터 2017년까지 이스라엘문화원에서 현대히브리어와 성서히브리어 및 구약원전읽기 강좌를 가르쳤다. 현재 기독교 신앙 및 신학서적 번역가로 활동하면서, 예능교회에서 전도...
 

책 속으로

본서는 고대 세계는 법률 자체보다 질서에 더 관심이 있었고, 당국은 사회의 일상생활을 규제하기 위해서 우리가 법이라고 부르는 것을 만드는 경향이 없었다(비록 칙령은 흔했지만)는 이해를 논의의 핵심적인 기초로 삼는다. 질서는 법률(권위자에 의해 제정된 공식적인 성문법 체계)에 의존하는 대신에 사회를 다스리는 사람들의 지혜를 통하여 성취되었다. 이러한 이해는 텍스트 해석, 다양한 성경 모음집들의 상호관계에 대한 고려, 그리고 오늘을 위한 토라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에 크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마치 토라가 법률로 의도된 양 토라가 법률을 구성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만일 우리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토라가 결코 법률로 의도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잘못된 접근법이다. 만일 토라의 초점이 질서와 지혜라면 그것은 적어도 이스라엘의 맥락에서의 질서와 지혜에 대한 이해를 우리에게 제공해줄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는 오늘날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관련이 있는지 결정해야 할 것이다.
--- 서론 중에서

토라는 우리가 히브리 성경 또는 구약성경으로 알고 있는 고대 텍스트의 일부다. 그 성경은 우리를 위하여 쓰였지만(즉 우리는 그것의 신적 메시지로부터 유익을 얻게 되어 있고 그것이 우리를 변화시킴으로써 우리가 우리의 문화의 강의 흐름을 직면하도록 도와줄 것이라고 기대해야 한다), 우리에게 쓰인 것은 아니다(우리의 언어로 쓰이지도 않았고 우리 문화의 맥락에서 쓰이지도 않았다). 메시지는 문화를 초월하지만, 그것은 고대 이스라엘의 문화의 강에 완전히 잠겨 있는 형태로 주어진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 있는 메시지의 완전한 영향을 받기 위해서 성경을 해석하려면 우리의 문화의 강을 제쳐놓고 그 텍스트가 전달된 고대인의 문화의 강을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고대 이스라엘의 언어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쓰였다. 그러므로 성경의 메시지는 고대 이스라엘의 논리에
따라 작동한다
--- 「명제 1」 중에서

이 논리 사슬은 모두 토라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규범적이고 성문화된 법률의 계시를 나타낸다는 잘못된 가정에서 시작한다.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은 법과 도덕에 대한 좀 더 큰 질문부터 우리 시대의 문제들로부터 발생하는 특정한 질문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제에 “성경적인” 입장을 제공하는 하나님의 계시인 토라를 적용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만일 토라가 결코 규범적이고 성문화된 법률의 계시로 의도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잘못 이해한 것을 치우고, 토라는 무엇이며 토라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이해해야 한다. 어떤 대안이 있는가? 만일 토라의 의도된 기능이 법률이 아니라면 (그러므로 기대되는 반응이 순종이 아니라면), 그것의 의도된 기능과 기대되는 반응은 무엇인가? 토라의 계시는 무엇을 성취하기 위하여 의도되었는가? 그것은 어떤 종류의 화행인가? 그것의 계시는 무엇인가? 달리 말하자면 성경에 왜 그것이 존재하는가? 이런 질문들이 우리가 이제부터 다룰 주제들이다.
--- 「명제 2」 중에서

이와 대조적으로 고대 근동의 법 모음집들을 연구한 사람들에게는 그 모음집들이 포괄성을 담보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는 점이 명백해진다. 삶과 사회의 중요한 많은 측면이 다뤄지지 않은 채 남겨졌다. 함무라비 모음집은 대부분의 영역을 다루며 민사 문제와 형사 문제에 관한 구절들을 포함한다(결혼/가족, 상속, 재산, 노예, 빚, 세금/삯, 살인, 간음, 강간, 절도, 성적 일탈, 거짓 증거, 폭행, 책임). 다른 모음집들은 이 범주 중 몇 가지 또는 심지어 다수를 다루지 않는다. 우리는 몇몇 범주들은 어떤 모음집에도 나타나지 않으며, 또 다른 많은 범주는 모음집들에서 다뤄지는 정도가 고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예컨대 사법 조직, 재정 정책, 축산업). 우리는 이 문서들이 사회의 모든 측면을 규제하기 위한 성문화된 법률 역할을 할 수 없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 「명제 3」 중에서

마찬가지로 법조문 목록들은 그들의 마을에서 사건에 대해 판결을 내려야 하는 재판관들에게 지혜를 제공한다. 이 목록들은 정의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분별하는 왕의 지혜를 보여준다. 그것들은 그 땅의 법이 아니고, 입법적인 칙령도 아니며, 사회에서 강제되는 규범적인 법전도 아니다. 왕은 이것들을 법으로 공포하지 않았다. 신들에 의해 임명된 왕으로서 그의 책임은 그 신들을 위하여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왕은 자신의 지혜를 전달하기 위해서 그것들을 편집하도록 했다. 지혜는 질서를 인식하고 그것을 확립하는 능력이다.
--- 「명제 4」 중에서

이스라엘의 사법체계는 고대 근동 전역의 사법체계와 마찬가지로 법률이 아니라 재판관들의 지혜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것은 정적인 법전들보다는 관습, 신적 계시(신탁 포함), 직관의 역동적인 통합을 포함했다. 토라에서 발견되는 법 모음집들과 다른 법 모음집들은 후원자의 지혜를 나타내고, 재판관들을 지도하며, 백성이 사회 질서를 이해하도록 도움을 주었던 진술들의 특정 단면들을 제공함으로써 그 지혜를 구현한다. 백성들은 이 지혜에 “주의”해야 하고 그것을 “유지”해야 한다. 이 관점에서 토라에 대한 기대되는 반응은 법률에 대한 반응과는 딴판이다. 법률에는 “너는 해야만 한다”라는 의미가 있는 반면에 지시에는 “너는 알게 될 것이다”라는 의미가 있다
--- 「명제 5」 중에서

법적 지혜 텍스트와 조약은 모두 그것들을 만들어낸 왕의 명성을 확립하거나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법적 지혜의 경우 텍스트는 지혜와 정의를 확립하고 그럼으로써 왕이 지혜롭고 정의롭다는 것을 증명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조약의 경우 문서는 봉신들에 대한 처우에 기초하여 종주의 힘과 능력을 증명할 관계의 변수들을 설정한다. 두 장르를 함께 사용하는 것은 이스라엘 언약의 전반적인 목적이 야웨가 명성을 확립하는 것임을 강하게 나타낸다. 바로 이것이 ‘야웨가 언약을 사용해서 자신을 계시한다’는 말의 의미다. 그 목적은 이스라엘에게 무언가(즉 법, 도덕적 또는 사회적 계몽, 축복)를 주는 것도 아니고, 이스라엘로부터 무언가(즉 경배, 봉사, 도덕적 성과)를 받는 것도 아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의 자유 의지로 써 봉신의 지위를 수락하지만(출 24:1-8), 일단 그러고 나면 이스라엘이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간에 그들은 야웨가 그들을 통해 여러 방법으로 자신의 명성을 확립하는 매개체가 된다. 이스라엘이 그 합의로부터 혜택을 받을지 또는 고통을 당할지는 그들에게 달려 있다.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신 30:19). 이 점에 비추어볼 때 우리는 이스라엘의 언약 문서들의 메시지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려 할 때 야웨가 자신을 위하여 확립하려고 하는 명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측면에서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야웨가 우리에게 주기 원하는 것(법) 또는 그가 우리로부터 받으리라고 기대하는 것(도덕적 성과)의 측면에서 생각해서는 안 된다.
--- 「명제 6」 중에서

현대의 해석자 대다수는 거룩이 특정한 도덕적 성품과 관련이 있다고 가정한다. 구체적으로는 거룩이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을 가리키며 사람들은 율법에 대한 순종을 통하여 그 성품을 본받기로 되어 있다고 가정된다. 따라서 우리가 야웨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것은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그의 도덕적 성품을 반영하는 특별한 도덕적 성품을 함양하는 것을 수반한다고 가정하기가 쉬울 것이다. 그러나 텍스트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첫째, 우리는 토라의 조항들이 지켜야 할 규칙이 아님을 기억한다. 그것들은 기술적(descriptive)이다. 그것들을 읽는 목적은 어떤 행동을 하거나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아는 것이다. 둘째, 우리는 또한 거룩은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지위라는 것을 기억한다. 이스라엘은 그 민족이 언약을 지키든 그렇지 않든 똑같이 거룩하다. 거룩한 지위는 얻으려고 애써야 할 목표가 아니다. 세 번째 고려사항은 고대의 맥락에서 나온다. 고대 근동에서 사람들은 신들을 모방하려고 열망하지 않았으며, 신들은 그들의 숭배자들이 자기들을 모방하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인간은 인간이었고, 신은 신이었다. 그들의 기능과 본성은 달랐고, 그들은 다른 기준에 의해 평가되었다. 신들은 불가해하고 인간의 도덕 기준에 대해 책임지지 않았다. 그들의 동기와 행동은 신비롭고 인간에게는 이해될 수 없었다. 이스라엘은 야웨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헌에 있는 어떤 내용도 그들에게 자기들의 하나님에 관하여 달리 생각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지 않았다. 그들의 왕으로서의 야웨의 역할 때문에 섭정 봉신이 왕의 지혜와 정의를 모방하려고 열망했던 것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적어도 그들의 지도자들)도 하나님의 지혜와 정의를 모방하려고 열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모방은 주로 제의 문학의 맥락에서 등장하는 거룩이 가리키는 바가 아니다. 지혜와 정의로써 봉신 국가를 다스리는 것은 그것을 통해 야웨의 은총과 축복을 유지하는 수단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거룩을 성취하는 수단이 아니다.
--- 「명제 7」 중에서

신들은 인간들과 똑같이 의식주가 필요했다. 마침내 신들은 자기들의 생존을 확보하고 그들의 실존을 유쾌한 것으로 만들어줄 익숙한 편의를 제공하는 데 필요한 모든 노역에 지쳤다. 그 문제가 어떻게 임계점에 이르렀는가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가 유포되었지만, 결론은 신들이 자기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공급하는 종으로서 사람을 창조하기로 작정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체계가 작동하려면 그것이 단지 일방적인 관계일 수만은 없었다. 사람들이 신들의 필요를 성공적이고, 효과적이고, 지속적으로 충족시키려면 신들은 사람들이 농작물을 재배하기에 충분한 비를 내리고, 곡물이 자라게 하고, 동물들이 번식하게 하며, 사람들이 침략이나 기타 재앙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도록 보장해줘야 했다. 죽은 사람이나 빈곤한 사람은 신들을 부양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상호 필요에 의한 상호의존 체계가 확립되었다. 신들은 의식주가 필요했고, 그러한 편의를 신뢰할 수 있게 제공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보호와 공급이 필요했다.
--- 「명제 8」 중에서

이스라엘의 신학에서 야웨는 고대 세계의 다른 신들과 달리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고대 근동의 신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우주를(그리고 결국에는 사람을) 창조했다. 야웨는 자기의 필요를 충족시킬 사람들을 공급하기 위해 창조한 것이 아니라 피조물을 위해 창조했다. 야웨가 사람들을 돌보지만 위대한 공생을 견인하는 것과 동일한 이유로 그런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이 야웨께 보일 수 있는 많은 반응(예컨대 찬양, 영광, 예배, 질서)은 적절하지만, 야웨는 그것들이 필요하지 않으며 그것들을 얻기 위해 언약 관계에 들어간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야웨는 이스라엘에게 무언가(예컨대 축복, 깨우침, 행복, 번영, 구원 또는 도덕)를 주기 위하여 이 관계를 시작한 것이 아니다. 야웨는 그의 봉신인 이스라엘의 종주로서 자신의 명성을 선포하고 있다. 서로 주고받는 보상은 폐지되었다.
--- 「명제 9」 중에서

구약성경의 문헌 일반, 특히 토라를 고대 근동의 문서들과 비교해보면 이스라엘이 단순히 고대 세계에 소속되었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는 유사점들이 종종 친숙한 경향이 있었다(아마도 이는 문헌적 접근보다는 구전에 의한 확산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어떤 문화의 전통(구전 전통 또는 문헌 전통)이든지 더 넓은 문화의 강으로 흘러들어오며, 같은 문화의 강에 잠겨 있는 다른 사람들은 그 강으로부터 미묘하고 추적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 전통을 이용할 수 있다.
--- 「명제 10」 중에서

야웨에게 근원을 두고 있는 토라는 인간 사회에서 질서의 확립과 관련이 있다. 이 점이 고대 근동의 다른 문서들과 다르다. 통치하는 왕으로서의 야웨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인간의 영역에서 질서를 위한 토대 역할을 할 칙령들을 공표한다. 이것이 중요한 차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야웨가 토라를 제공할 때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행동했고, 따라서 이 칙령들이 고대 근동에서처럼 (비록 신적인 왕이지만) 왕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원천이 중요하지만 이스라엘을 고대 근동의 다른 지역과 차별화하는 주요 요소들은 거룩과 언약이라는 측면들이다.
--- 「명제 11」 중에서

만일 토라가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질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신성한 장소의 신성을 보전하는 것으로 정의된 언약 질서)를 유지하는 방법에 관한 실제 예를 제공한다면, 그것은모 두 문화적으로 상대적이다. 그렇지 않은가? 오직 이스라엘 사람들만 야웨와 언약 관계에 있었다. 오직 이스라엘 사람들만 야웨의 성막 또는 성전에서 그들 가운데 거주하는 야웨의 임재를 경험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토라가 이 언약 관계에 대한 정의를 제공하는 도구로서 완전히 고대 문화 안에 자리 잡고 있고, 완전히 언약 관계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완전히 성전 이데올로기 안에 자리 잡고 있다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현대의 성경 독자들은 토라가 하나님의 법이며, 도덕 체계와 동일시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이상을 반영한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그리고 토라가 성경(하나님의 모든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에 수록되어 있으므로 토라를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토라가 완전히 상황 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상대적이라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가? 우리는 그 질문을 다음과 같이 바꿔서 다룰 수 있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토라가 문화적으로 자리 잡고 있지 않다고 믿게 만드는가?

우선 우리는 기독교 세계에서 사실상 아무도 토라 전체를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한다. 따라서 우리는 단지 토라가 성경에 수록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보편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 「명제 12」 중에서

우리는 토라의 법 모음집들이 특정 사례 접근법을 사용해서 이스라엘에서 특히 정의와 관련하여 편만할 것으로 기대되었던 질서의 본질을 정의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지혜를 제공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스라엘의 특성이 하나님의 특성에 대한 공적인 정의를 내리기 때문에(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었을 때, 하나님이 거룩한 것처럼 그들도 거룩한 자들로 인식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적절히 반영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은총을 유지하기 위하여 고대 세계의 가치들에 따라 정의(正義)를 나타내야 한다. 비록 지혜로운 사람은 조약 조항들에 주의를 기울이겠지만 그 조항들이 지혜 자체를 제공하지 는 않으며 그 조항들은 또한 충실의 측면들을 다룬다. 즉 이스라엘의 특성이 하나님의 특성(거룩)을 공개적으로 정의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주권자를 반영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은총을 유지하기 위하여 고대 세계의 가치들에 따라 그들의 주권자(하나님)에게 충성스러운 섬김을 나타내야만 한다. 비록 그 조항들이 지혜 목록들은 아니지만 지혜 목록들이 조약 조항들 안에서 역할을 할 수 있는데, 우리는 그것이 토라에도 적용된다고 믿는다.
--- 「명제 13」 중에서

토라는 성소?야웨가 언약 관계 안에서 자신의 백성 가운데 거하고 그들을 다스리는 임재 장소?와 별도로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토라는 성막/성전?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의 하나님의 임재의 확립?을 조건으로 한다. 토라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야웨의 은총과 그들 가운데 거하는 그의 임재를 유지할 수 있게끔 해주는 방향으로 그들의 삶과 사회를 정돈하도록 주어졌다. 토라는 언약 질서의 예들을 제공하고, 그들이 거룩한 자들로 지정됨으로써 야웨와 동일시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들이 어떻게 야웨의 이름(즉 명성)에 수치가 아니라 영예를 가져올 수 있는지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고안되었다. 그들이 토라의 지혜에 주의함으로써 언약에 충실하면 그들은 자기들 가운데서의 하나님의 임재를 보존할 것이다. 그들이 언약 질서를 확립하지 못하면 야웨가 떠나갈 것이고 그것은 그들에게 큰 손실이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실패는 그들로 하여금 야웨가 그들을 징계하기 위해 보내는 적들로부터뿐만 아니라 반역하는 봉신들에 대해서 종주의 책임을 수행하는 야웨 자신으로부터도 해를 입게 할 것이다.
--- 「명제 14 」 중에서

신약성경 저자들은 그들 자신의 중요한 문제들을 다뤄야 했는데 그 문제들은 그들의 인지 환경과 그 시대의 신학적 논쟁에서 도출된다. 그들은 확실히 자신들의 담론을 위하여 그들이 자기들의 시대에 이해한 대로 구약성경으로부터 정보를 도출하기는 했지만, 구약성경 맥락의 신학적·문화적 문제들을 재구성하려고 시도하지는 않는다. 신약성경을 통해 여과된 오늘날의 토라에 관한 논의는 대체로 구원의 문제나 교회 또는 인간 일반을 위한 절대적인 도덕적 원리의 문제를 검토하려고 하는데 이는 신약성경의 질문이다. 이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토라를 맥락에 맞게 읽을 수 없다. 구약성경의 토라는 의나 칭의의 본질을 정의하려고 하지 않는다. 의(고대 근동의 기준에 의한 의)는 이스라엘이 토라를 고수하는 데서 비롯되는 결과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제공된 절대적인 의(신적 기준에 의한 의를 암시함)가 아니며, 구원과 관련된 의도 아니다. 더욱이 그것은 확실히 가치들에 대한 현대의 문화의 강의 정의에 일치하는 의(현대 기준에 의한 의)가 아니다. 구약성경의 맥락에서 토라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신약성경의 신학적 범주에서 생각하기를 멈춰야 한다.
--- 「명제 15」 중에서

토라는 제의법, 도덕법, 사회법의 범주들로 나눠질 수 없다. 토라 중 어느 한 부분을 신적 법률로 읽는다면, 우리는 토라 전부를 신적 법률로 읽어야 하며, 사회적 이상은 도덕적 이상과 동등한 위상을 지녀야 한다. 물론 몇몇 해석자들은 토라의 사회적 조항들을 아무튼 신적 이상으로 읽는 경향이 있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비판을 퍼붓는 회의론자들은 흔히 토라를 비웃는다. 만일 토라가 고대 세계의 이교 숭배를 변혁했고 모든 사람이 사랑과 조화 가운데 번영할 수 있는 체계를 제공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법이라면 왜 그것이 노예제도와 같은 결함이 있는 원시적인 제도, 강간의 용인(성읍에서, 신 22:23-24[성읍 안에서 일어난 강간은 규정되지 않았지만 법률에 처벌 조항이 없다면 처벌할 수 없다는 원칙을 적용할 경우 성읍안에서 자행된 강간은 용인하는 결과가 초래된다?편집자 주]), 그리고 여성 혐오적인 가부장제의 제도화로 특징지어지는가? 그런 것들은 모두 자유와 평등에 대한 기본적인 사회적 감성들을 무시하는데 말이다. 비판자들이 그들의 주장을 조목조목 들이대면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더듬거리며 야웨의 법이 그 당시의 다른 지역의 특징이었던 것보다 사람들을 더 잘 대우했다고 말한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것은 거의 위안이 되지 않으며?신자든 회의주의자든?누구의 마음속에서도 하나님이나 성경의 명성을 구해내지 못한다.
--- 「명제 16」 중에서

우리의 연구에 중요한 점은 토라가 구약성경의 맥락에서 결코 천국에 가는 길이나 죄에 대한 형벌을 완전하고도 최종적으로 지불하는 방법을 제공하도록 의도되지 않았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토라는 결코 예수가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취한 일을 하도록 의도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토라는 실패한 접근방법이 아니라 야웨가 그것을 통해 의도한 바로 그 일을 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토라가 구원의 수단임을 성경이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토라는 결코 구원의 수단으로서 의도된 적이 없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행한 일에 대한 성찰을 제공하는 것이다. 비유대인들은 토라가 그들에게 제공된 것이 아니기에 그것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거부할 수도 없다. 더욱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성경의 메타내러티브?그것의 큰 그림?가 구원 역사라고 배웠기 때문에 토라를 구원의 측면에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그 메타내러티브는 모두 자신의 타락한 백성에게 구속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구약성경이 그런 메타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토라가 결함이 있는 구원의 수단을 제시한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사고방식은 여러 면에서 문제가 있다.
--- 「명제 17」 중에서

토라의 의도는 복종이 아니라 지식을 낳는 것이다. 야웨가 이스라엘이 특별히 무언가를 행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토라가 주어진 것이 아니다. 토라가 제공하는 것은 명령이 아니라 선택이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신 30:15, 19). 토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거나 죽음과 멸망이 생명을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형벌이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야웨는 이스라엘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신의 명성을 확립하는 중이다. 야웨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자기를 반영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의 명성은 이스라엘이 어떻게 처신하는가와 상관없이 확립될 것이다(명제 6을 보라). 야웨가 그들에게 하는 말은 만일 그들이 은총과 축복을 바라기로 작정할 경우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은혜와 축복을 받기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미리 알게 한다. 이것은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언약적 불충실로 기소할 때 그들을 납득시켰던 요점이다. 야웨는 그들이 충실한 봉신이 되기를 원하며, 그들이 언약 관계의 축복을 누리기를 기대한다면 그들은 그렇게 해야 한다.
--- 「명제 18」 중에서

우리가 반드시 이해해야 할 주요 요점은 만일 우리가 도덕적 지침을 위하여 어떤 구절을 사용하고 어떤 구절을 거부할지 선별한다면, 그때 우리를 안내한다는 것은 성경이 아니라 옳고 그름에 관한 우리 자신의 선입견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의 옳고 그름에 관한 의식?우리는 그것을 사용해서 성경을 걸러내고 평가한다?을 만들어내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성경은 아니다. 만일 사실상 성경이 우리의 옳고 그름에 관한 의식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면 성경이 이론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대부분 탁상공론이며 성경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주장은(우리가 토라의 경우에 주장했던 것처럼) 학자들 사이의 전문적인 논의로 축소된다. 다른 한편으로 만일 우리가 어떤 구절이 도덕적이고 어떤 구절이 그렇지 않은지 걸러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든 구절이 도덕적이거나 어느 구절도 도덕적이지 않다고 말하거나 또는 텍스트 자체 내에서 (즉 텍스트의 내용과 맥락 안에서) 그 차이를 알 수 있다고 말할 필요가 있다. 이 마지막 경우에 내용과 맥락에 호소하기 위해서는 그 문서가 성경이며 따라서 우리가 등장인물의 행동을 모범적이라고 생각한다는 단순한 해석보다 훨씬 더 큰 입증을 요구한다.
--- 「명제 19」 중에서

근거 텍스트의 사용에 내재된 결함은 특정한 오류를 넘어 토라를 오인한다는 더 큰 개념으로 옮겨간다. 토라의 적실성을 찾기 위해 우리가 채택하는 절차들은 우리가 본서 전체에서 토라에 관하여 관찰한 내용을 인식해야만 한다. 토라의 적실성 및 적용에 관한 결정들은(어떤 성경 텍스트라도 그렇듯이) 장르(이 경우 입법화된 명령이 아닌 지혜 통찰이다), 맥락(언약과 성전의 맥락에서 이스라엘을 향해 기록되었다), 수사학적 전략(문학의 한 부분이 작품 전체에서 어떻게 기능하는가), 저자의 의도(저자가 그 의사소통을 통해 무엇을 성취하려고 하는가?기대되는 반응), 그리고 문화적 맥락의 배경(우리의 문화의 강이 아니라 고대의 문화의 강과 관련하여 이해된 배경)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오직 이러한 해석 및 방법론의 기준들이 일관성 있게 유지될 때에만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우리의 현대 맥락에 사용될 수 있다. 근거 텍스트를 추출하는 것은 결코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 「명제 20」 중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토라에 충실하다는 것은 그들이 사회의 모든 측면에서 특정한 질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들의 고대 세계와 그들의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맞이하는 호스트로서의 그들의 책임에 적합한 “도덕적 행동”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특징지어질 것이다. 그러나 토라는 그 도덕성을 우발적으로 그리고 부분적으로만 전달한다. 그러므로 토라는 신적인 기원을 갖는다는 점에서 “신성하다.” 토라는 그 단어의 본질에 있어서 또한 그 자료가 지혜를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가르침이다. 그러나 도덕이라는 단어는 토라가 어떻게 기능하는지 설명하기에는 너무 제한적인 용어이기 때문에 토라는 도덕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없다. 그 대신 토라는 가르침이며 그것에 대해 기대되는 반응은 토라가 명령한다(“너는 ~해야만 한다”)고 여겨지는 특정 규칙들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묘사하는(“너는 ~임을 알게 될 것이다”) 질서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다.
--- 「명제 21」 중에서

토라가 오늘날 우리를 위한 도덕이나 법률을 확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 구약성경이 약화되고 그것의 적실성이 부정된다고 반응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토라의 정확한 기능을 밝히려고 노력하면 토라가 우리에게 덜 중요해지고 적실성이 적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해진다. 토라의 한 가지 역할을 부인함으로써 우리는 그것에 다른 역할?우리는 그 역할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을 부여할 수 있다. 참으로 토라를 그것이 속해 있는 문학의 종류로 읽을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토라의 더 중요한 역할을 회복할 것이다. 확실히 우리가 토라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토라가 많은 사람이 부여하려고 하는 그런 종류의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고 말할 뿐이다. 토라에 그 문학의 특성과 일치하지 않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중하는 방법이 아니다. 우리는 토라를 그것이 제공하는 계시에 따라 이해해야 한다.
--- 「명제 22」 중에서

이스라엘 공동체는 여러 면에서 야웨의 계획과 목적에 참여하도록 선택되었다. 이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계시의 매개체가 되고 야웨의 임재를 맞이하는 호스트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이 역할들 속에서 그들은 열방에 빛을 비추는 역할도 했다. 민족들에게 빛을 비춘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민족들에 가서 그들에게 전도하거나 그들을 언약 관계 안으로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 대신에 민족들이 야웨가 이스라엘에서 한 일을 보고서 그의 이름에 영광을 돌릴 것이다. 새 언약의 목적은 다르다. 하나님은 더는 자기 백성을 사용해서 자신의 명성을 확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통해 이루어졌고 반복될 필요가 없다. 그것이 구약성경이 성경으로 보존된 이유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제 다른 계획과 다른 목적을 지니고 있다. 그가 이스라엘을 통해 자신의 계획과 목적을 수행했던 것처럼 그는 이제 교회를 통해 그것들을 수행하고 있다.
--- 「명제 23」 중에서

토라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야웨가 그들을 통해 그들의 시대와 그들의 문화에서 자신의 계획과 목적을 수행할 때 그들의 상호 동일시가 어떻게 보여야 할지 이해하도록 도와줄 지혜를 제공하고, 그들로 하여금 야웨의 임재에 적합한 호스트가 될 수 있게 해준다. 교회는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지 않으므로 토라가 교회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성에 합치하게 살 수 있게 해주지 못할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토라는 교회가 교회다워지도록 돕기 위한 하나님의 계시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토라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다워지도록 돕기 위해 주어졌다. 그렇다면 토라가 어떻게 오늘날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시로 남아 있을 수 있는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만일 우리가 토라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배웠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대한 그 이해를 사용해서 그 계획과 목적이 오늘날 새 언약을 통해 어떻게 실행되고 있는지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새 언약을 자신이 이스라엘을 통해 한 일의 관점에서 계시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새 언약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 한 일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 「결론들의 요약」 중에서
 

출판사 리뷰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뉜다. 흔히 구약성경을 율법으로, 신약성경을 복음으로 특징 짓는 것이 기독교 안에 널리 퍼져 있는 관행이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구약성경 시대에는 율법으로, 신약성경 시대에는 복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이는 심각한 오해다. 성경의 경륜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은혜로만 구원의 선물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구약 성경 전체가 복음이다. 하지만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은 과연 무슨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가?

예수는 구약성경에 대해 한마디로 요약하기를 “율법과 선지자”라고 하셨다(마 11:13). 즉 구약성경은 율법(서)과 예언서로 구성되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율법으로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토라’다. 그런데 토라를 율‘법’으로 번역한 데서 문제가 발생했다. ‘법’은 규범성, 강제성, 보편성, 그리고 일정한 항구성을 띤다. 토라를 율‘법’으로 번역한 까닭에 역사상 절대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의 토라를 법률적인 규정으로 이해했다. 그 결과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의 토라 규정을 현대 세계에서도 문자 그대로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덕목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구약의 토라 규정 안에 묘사된 수많은 규정들은 너무나도 시대착오적이어서 그것을 현대에 문자 그대로 실천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그리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토라를 의식법, 사회법, 도덕법 등으로 세분화한 다음 그중 도덕법만이 항구성을 지닌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구약성경의 토라에 담긴 진짜 의도일까?

저명한 복음주의 구약학자인 월튼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기를 꺼리지 않는다. 그는 야심찬 기획과 함께 지속적으로 출간하고 있는 ‘잃어버린 ㅇㅇ 시리즈’의 근본 모토인 ‘구약성경을 고대 근동의 문화적 배경’에서 살펴보기 방식을 어김없이 토라 연구에도 적용한다. 그가 고대 근동의 수많은 문서 및 법령들과 구약성경을 자세히 비교한 후 내린 결론은, 구약성경의 토라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특별한 종교적 규칙이 아닌 고대 근동 세계에서 일반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삶의 지혜로운 방식’에 대한 묘사라는 것이다. 따라서 토라는 법률이 아니라 지혜 모음집이다. 이런 발견은 구약성경의 토라를 시간과 장소를 초월한 진공 상태에 두는 것이 아니라 고대 근동이라고 하는 특정 시간과 장소에 위치시킨다. 하나님의 계시는 성경 저자의 문화와 조우하는 방식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한편, 고대 근동에서 법률 규정은 통치자(왕)들의 속성을 드러내는 수단이었다. 토라의 경우,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야웨의 거룩한 속성을 반영하는 삶의 질서 체계다. 하지만 그것은 이스라엘의 주변 문화가 공통으로 수긍하고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야웨의 속성을 드러낸다. 이렇듯 토라 안에 노예제도나 가부장제를 옹호하는 규정들이 다수 포함된 까닭은, 그것이 고대 근동의 세계관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화적 옷을 입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토라는 당시 주변 국가들의 법률 규정과 결정적인 차이를 보인다. 그것이 바로 야웨와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 관계다. 야웨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토라를 수여하신 목적은 단순히 이스라엘이 삶의 질서를 잘 지키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언약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을 풍성히 누리려면 토라를 충실히 준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야웨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 관계는 고대 근동의 종주와 봉신 사이에 체결된 종주권 조약과 궤를 같이한다. 종주권 조약에 따르면, 주인(야웨)과 봉신(이스라엘) 사이에는 상호 신실성의 의무가 발생한다. 곧 야웨는 이스라엘의 생존과 복지를 책임져야 하며, 이스라엘은 야웨의 속성을 주변 세계에 드러내는 동시에 야웨께 충성해야 한다. 이처럼 토라가 언약 관계의 틀 안에 자리한 까닭에 토라 안에는 다양한 제의 규정과 함께 거룩함의 의무가 수반되는 것이다. 토라는 이스라엘이 질서 있고 조화롭게 살아가는 삶의 방식일 뿐 아니라 자신의 주인인 야웨 하나님께 거룩하게 반응해야 하는 목표를 지시한다. 따라서 토라는 고대 근동이라고 하는 일반 문화와 함께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신성한 공간 안에 함께 이중으로 위치한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은 이스라엘의 토라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할까? 오늘날 우리는 소위 옛 관점과 새 관점의 대립이라고 하는, 구약성경과 제2성전기의 율법 이해에 대한 첨예한 논쟁을 잘 알고 있다. 본서의 저자들은 현대의 첨예한 논의와 별개로, 신약성경 시대에는 구약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토라 개념이 상당부분 희석되거나 변경되었음을 기꺼이 인정한다. 본서의 저자들이 판단할 때,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구약의 토라 개념을 구원의 길로도, 삶의 지혜로운 방식으로도 간주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오히려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당시 자신들의 문화적 옷인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규범과 삶의 질서 개념에 비춰 ‘그리스도인다움의 윤리’를 설파했다. 곧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하게 살아가는 방식은 당시 이방 문화 안에서도 기꺼이 인정받을 수 있는 도덕적 규범과 일정 부분 궤를 같이했다. 이 점에서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구약의 토라가 기능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자신들의 주변 문화의 옷을 입고 거룩한 생활 방식을 실천한 셈이다.

만약 저자들의 주장처럼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제시된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방식이 진공 상태의 (초월적) 윤리 규정이 아니라 자신들의 시대와 대화가 가능한 삶의 방식에 기초한 것이라면,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일상에서 거룩한 삶의 방식을 드러내는 방식 역시 21세기의 사람들이 이해하고 수긍할 수 있는 도덕-윤리 규범과 궤를 같이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토라를 문자 그대로 현대 사회에 적용하려는 노력이나, 토라 규정 중에서 도덕법만을 별도로 분리하여 실천하려는 태도 역시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다. 오히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태도는 성경의 근본 정신(거룩함)을 존중하되 그것을 현대 사회의 첨예하고 복잡한 이슈에 합리적으로 착근시키는 방식으로 교회의 윤리를 실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겠다. 왜냐하면 고대의 이스라엘이 주변 문화에서 납득할 수 있는 질서 있고 조화로운 삶의 방식을 통해 이방인들을 야웨의 구원의 영역 안으로 초대하는 호스트의 역할을 한 것처럼, 오늘날의 교회가 현대의 이방인들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 안으로 초청하기 위해서는 우리 시대의 상식 및 규범과 공명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본서는 시민 사회로부터 봉건적이고 전근대적이라는 비판(비난)에 노출된 채 길을 잃고 헤매는 현대 교회를 향해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성찰할 수 있게 해주는 의미심장한 나침반 역할을 하리라 본다.
 

추천평

저자들에게 있어서, 토라는 법률 제공보다는 사회에서 질서를 가져오기 위한 지혜 제공에 목적이 있으며, 토라의 가치는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대 근동의 렌즈를 통해 야웨 하나님이 스스로를 알리시고 드러내신 내용을 보게 하는 데 있다. 구약성경이 예수님과 바울의 유일한 성경이었음을 명심한다면, 구약 율법 이해를 설명하는 본서와 같은 책은 차근차근 조금씩 음미하며 읽어보아야 할 매우 중요한 책이다.
- 김근주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연구위원)

토라의 맥락을 차근차근 풀어주는 이 책에서 독자들은 한층 더 넓은 토라 이해의 세계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고대 사회의 맥락과 공유하면서도 하나님의 언약을 중심에 두는 토라의 성격에서 고유한 점을 읽어낸다면, 신약 세계를 거쳐 오늘에 이르는 의미를 파악하는 데 지혜를 얻게 될 것이다.
- 김정훈 (부산장신대학교 구약학 교수)

본서는 독자들에게 구약성경의 율법들을 생성시키고 전승케 했던 고대 이스라엘의 문화적 맥락을 주목하며 그 큰 맥락 안에서 구약의 율법들을 이치에 맞게 배치한다. 본서는 구약의 하나님을 전제적 율법으로 마구 채찍을 휘두르는 무서운 군주라고 오해하는 독자들에게 강력한 치료제가 될 것이다. 또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이라는 감동적 서사의 빛 아래서 구약의 율법들을 ‘선물’로 이해했던 유대교의 진면목을 발견하는 데 도움을 준다.
- 김회권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구약학 교수)

월튼의 핵심 주장은 토라가 현대적 시각에서의 법률/법규/도덕적 규범이 아니라, 고대 근동이라는 “문화적 강”의 문맥 안에서 지혜 교훈, 언약 규정, 제의 규정이라는 것이다. 월튼이 내놓은 명제들이 한국의 전통적 독자들에게는 때론 매우 생경하고 파격적인 주장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차근히 곱씹어 읽고 생각한다면 더 많은 궁금증과 함께 성경을 새롭게 보게 될지도 모르는 영적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류호준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구약학 교수(은퇴))

본서는 고대 근동 법령의 비교연구와 토라와 지혜의 접점을 찾는 근래의 연구들을 융합해 설득력 있는 해석모델을 제시해준다. 언약과 지혜의 렌즈를 통해 토라의 풍성한 세계를 발견하는 기쁨을 주는 해설서여서 일독을 권한다.
- 유선명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구약학 교수)

저자는 토라란 법률이나 구원의 수단으로 사용되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며, 질서 확립을 위하여 하나님이 자신의 봉신(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의 맥락에서 제공된 지혜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한다. 율법과 복음이라는 잘못된 대조적 명제로 토라의 본뜻을 잃어버린 세계에서 새롭게 진리의 참 빛을 비춰주는 책이 어찌 반갑지 아니하겠는가!
- 차준희 (한세대학교 구약학 교수)

이 신중하고 읽기 쉬운 연구는 구약 법과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그것의 적실성에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가치가 있을 것이다.
- 데이비드 L. 베이커 (올 네이션스 크리스천 칼리지)

저자들은 토라를 지혜라는 더 폭넓은 맥락에서 그리고 지혜의 표현으로 올바로 본다. 이것이 바로 신명기 4:6과 시편 19:7 같은 구절이 암시하는 바다.
- 케빈 첸 (유니온 대학교 성서학 부교수)

본서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건성으로 하는 해석들이 거의 필연적으로 틀리게 된다는 것을 용감하게 보여준다. 이런 저술이 오늘날 미국의 대다수 개신교 신자 사이에 창궐하는 순진하고 단순한 해석들을 둔화시키기 시작하기를 바랄 뿐이다.
- 브루스 웰스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 캠퍼스 중동학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