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한국역사의 이해 (독서)/8.우리문화재

약탈 문화재는 누구의 것인가

동방박사님 2022. 7. 14.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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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약탈 문화재 반환, ‘폭력의 시대’를 치유하고 ‘평화의 시대’를 여는 핵심 열쇠!
― 일제의 문화재 약탈에 대한 한 일본 지식인의 양심적 증언과 해법 모색

약탈 문화재를 원산국으로 반환하는 것은 당연한 상식으로 보인다. 문화재는 그것을 만들어 낸 민족의 혼이 담긴 신물神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문화재는 보편적 인류 문명으로 반드시 원산지에서 소장할 이유는 없다는 주장도 있다. 즉, 우수한 문화재는 특정 나라만의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가 감상할 권리가 있는 세계적 유산이라는 것이다. 전자의 관점을 ‘문화재 내셔널리즘’, 후자의 그것을 ‘문화재 국제주의’라 부른다. 이 책에서 저자는 문화재 반환을 식민주의를 극복하고 항구적인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보았다. 이것은 문화재 내셔널리즘이냐 국제주의냐 하는 이분적 대립을 넘어 전쟁 방지와 평화 정착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길이다. 대립과 폭력으로 점철된 지난 세기를 치유하고 공생의 가치를 정립하는 것은 우리 시대가 요청하는 소명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화재가 평화 정착에 핵심 고리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노학자의 목소리는 더욱 울림 있게 다가온다.

 

목차

한국의 독자들에게
서론

1장 제국화하는 일본과 문화재
1 최초의 문화재 약탈 무대, 강화도
2 청일전쟁과 문화재
3 왜 철도를 건설했을까?

2장 학술 조사라는 이름 아래
1 세키노 다다시의 고적 조사
2 한반도의 일본인들

3장 동화 정책과 만들어진 역사
1 한국병합 5주년 기념 이벤트, 공진회
2 새로운 버전의 동화 정책
3 금관총 스캔들
4 전쟁의 확대와 패전

4장 문화재는 누구에게 속하는가 ― 강화에서 한일교섭으로
1 전쟁 뒤처리
2 워너 전설의 파문
3 문화재 문제가 걸림돌이 된 한일교섭

5장 세계적으로 진행되는 식민주의 청산
1 국제법의 관점에서 본 문화재 반환 문제
2 식민주의 극복을 위하여
3 미국의 약탈 문화재 반환

6장 문화제 문제의 장래
1 문화제 문제의 동향
2 앞으로의 과제

주요 인물 소개
옮긴이의 말

저자 소개

저자 : 아라이 신이치
1926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1949년 도쿄대학 서양사학과를 졸업했으며, 이바라키대학 인문학부 교수와 스루가다이대학 현대문화학부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는 스루가다이대학교 명예교수와 일본 전쟁책임자료센터 공동 대표로 있다. 일본의 우경화를 비판하는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꼽힌다. 19세 때 제2차 세계대전에 학도병으로 참여한 경험이 그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쳐, 유럽의 홀로코스트 문제, 일본의 전쟁 범죄와 책임 ...
 
역자 : 이태진
1943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규장각 도서관리실장, 역사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고, 퇴임한 뒤에는 국사편찬회 위원장을 지냈다. 현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명예교수이자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으로 있다. 조선조 유교 정치 사회사와 고종 시대 한일 관계사에 관해 ...
 
역자 : 김은주
1985년 제주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서울대학교에 출강 중이다. 주요 논문으로 「농촌 진흥 운동기(1932~1937년) 조선총독부의 생활 개선 사업과 ‘국민’ 동원」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한국병합과 현대』(공역),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공역)이 있다.
 
 

책 속으로

나는 중의원 외무위원회에 참고인을 불려가 의견을 진술했다. 이때 나는 반환 문제는 식민지 지배 청산을 위한 기본 틀임을 전제했다. 구체적으로는 역사 자료 등의 문화재는 그것이 태어난 환경이나 배경에 두어야 그 가치를 이해할 수 있고, 『조선왕실의궤』도 조선왕조 문화의 상징으로서 원래 자리에 두는 쪽이 좋다고 했다. 또한 문화재는 민족이나 지역 고유의 것이지만 동시에 이를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림으로써 보편적인 가치를 획득하여 인류의 존경을 얻게 해야 한다고 했다. 문화재는 학술 연구를 위한 기본 자료로 어떤 형태로든 각국의 연구자가 이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관광 자원으로서의 국제성과 경제성도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공개하는 것이 기본이며, 관람자가 접근하거나 연구자가 자유롭게 이용하는 데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6쪽, ‘한국의 독자들에게’ 중)

한일 양국이 국교를 정상화하고 문화재(문화)협력협정을 맺은 지 20년이 지났다. 그러나 한국의 한적한 농촌에 있는 고분 하나가 고대 한일 관계사를 둘러싸고 뜨거운 논쟁의 방아쇠가 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 뜨거운 현실을 언제쯤 풀고 대상을 객관화할 수 있을 것인가? 역사 선생으로서 내가 직면한 과제는 이것이었다. 현지에서 살펴보며 간신히 얻어 낸 나의 답은 ‘현지주의’와 ‘실증주의’였다.(10쪽)

이 책은 문화재 자체의 역사뿐만 아니라, 문화재 문제를 야기한 식민지적 상황, 즉 식민주의의 구조를 주제로 한 셈이다. 특히 그러한 구조 안에서 통치자인 일본인들이 어떻게 느끼고 행동했는지에 주목했다. 한국에서 일본인들이 보인,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욕망 자연주의도 그들의 민족성 때문이라기보다는 식민지 지배자로서 느낀 모종의 해방감과 관련 있는 것은 아닐까?(15쪽)

강화도사건은 침공한 일본 군함의 이름을 따서 운요호雲揚號사건이라고도 불린다. 지금까지 일본은 물을 공급받기 위해 연안에 접근한 운요호에 불법적인 포격을 가한 조선 측의 개전 책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2002년에 운요호의 이노우에 요시카 함장이 쓴 보고서가 발견되면서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즉, 일본 측의 정설이 보고서 개찬改竄(변조)에 의거한 것임이 드러난 것이다. 3일간(9월 20일∼22일) 이어진 운요호사건은 조선과 전쟁하기를 몹시 바란 이노우에 함장 측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본격적인 무력 행사였다는 점 등 중요한 사실이 보고서를 통해 밝혀졌다.(24∼25쪽)

구키의 방침을 보면 전쟁이라는 절호의 기회를 이용해 학술 문화 면에서도 일본이 아시아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패권주의를 엿볼 수 있다. 이는 학술 문화 측면에서의 달성도를 문명국의 지표로 보고 중국과 조선에서 문화재를 폭력적으로 수집하여 문명화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아시아의 여러 이웃 나라와 ‘악우惡友’로서 절교하고 일본만 홀로 구미 선진국의 동료가 되려고 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과도 통한다.(43∼44쪽)

전쟁에 편승한 문화재 수집 방법을 구체적으로 쓴 구키의 요지를 보면 전시에 수집할 경우의 이점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즉, 평시에는 도저히 손에 넣을 수 없는 명품을 얻을 수 있다, 평시에 비해 매우 싼 가격으로 명품을 획득할 수 있다, 평시에 비해 중량 있는 물품도 운반할 방법이 있다, 평시에는 일어날 수 없는 탐검探檢의 편리가 있다 등 “허울 좋은 약탈 방법”(나카쓰카 아키라)이 당당히 쓰여 있다. 또한 수집은 육군대신이나 군사령관의 지휘에 따를 것, 문화재가 일본에 도착한 뒤에는 제실이나 제국박물관 소장으로 할 것, 병사들로 하여금 협력하여 수집하게 할 것 등도 교시되어 있다. 이로 보건대 문화재 약탈이 군과 일체가 되어 국가적 사업으로 구상된 것임을 알 수 있다.(44쪽)

한국을 보호국화하여 통치권을 갖게 된 일본은 각 분야에 걸쳐 문화재에 대한 학술 조사 연구를 본격화했다. 일본 인류학자의 학술 조사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했지만, 병합 전후에는 건축과 고분 등을 비롯하여 한국 전역에 걸쳐 통치하는 데 필요한 기본 정보를 축적했다. 그 때문에 한반도는 일본의 근대적 학술 연구를 시험하는 장이 되었다. 또한 식민지 통치는 근대화의 일면을 수반하면서 철도 건설과 일본인 유입 증가를 낳았다. 이에 따른 급속한 개발로 말미암아 전통적 지역 문화가 위기 상황에 몰린 것도 부정할 수 없다. 학술 조사는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는 측면이 있었지만, 식민지 지배 아래에서의 급격한 사회경제 변동은 문화재가 처한 위기를 한층 증폭시켰다.(63쪽)

보고서에는 국민의 기질을 서술한 부분도 있다. 조선 고고학의 성립에 영향을 준 니시카와 히로시는 예부터 한국 국민에게는 “자치 독립의 기상”이 결핍되어 있고, 근세에 이르면 정치가 부패하고 귀족 관리들은 “방탕하게 멋대로 놀아서” 상민常民은 갈수록 빈곤해지며, 그런 나머지 자포자기하여 “애써 노력하면서 그 직에 힘쓰는 자가 없고”, “상하 모두 게으름이 습성이 되어 공예가 발달하지 못하고 산업이 흥하지 못하여 국력은 갈수록 쇠퇴했다”는 정체적이고 차별적인 방향의 한국사 인식을 드러냈다. 이는 일본의 식민주의적 근대화를 정당화하는 발상이다.(64쪽)

여기에 등장하는 일본인들의 발굴 동기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학술적이라 말할 수 없는 아마추어의 사굴, 남굴 등의 성과 위에 세키노의 조사가 행해진 것은 확실하다.(71쪽)

식민지 지배에서 해방된 뒤 세키노의 업적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평가는 큰 차이가 있었다. 낙랑 연구를 한 예로 들면, 한국에서는 식민지 사관을 만들어 내기 위해 사전에 계획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본에서도 조선대학의 강성은과 정태헌은 세키노 등의 낙랑 고분 발굴 조사(1916)에 의해 “근대 고고학에 적합한 발굴 방법이 확립되었고, 직간접적으로 차후 일본 본토의 유적 발굴 방법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하면서도, 출토된 다량의 호화스러운 유물이 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반인 사이에도 낙랑 유물 채집 붐을 불러일으켜 “결과적으로는 1920년대를 중심으로 도굴에 의해 낙랑 유적이 괴멸적으로 파괴되었다”고 보았다.(67∼68쪽)

유명한 ‘오구라 다케노스케 컬렉션’의 경우를 보자. 오구라는 한반도에서 전기 사업 등에 종사한 실업가다. 그의 사후 그가 모은 유물 중 1,018점이 1982년에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되었다. “그것들은 특히 동양관의 조선 고고 전시에서 주요 부분을 점한다”고 일컬어질 정도로 일품을 모은 것이다. 군대의 비호도 큰 역할을 했다. 아무리 궁벽한 곳일지라도 헌병대 파견소나 출장소가 있어서 일본인을 숙박시켜 주었기에 조사단은 순조롭게 여행할 수 있었다.(71∼74쪽)

그런데 여기서 눈에 띄는 점은 아마추어 골동품 수집가 중에 우편국장, 전매국장, 보통학교장, 기상관측소장 같은 식민지 관료의 이름이 여기저기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식민지에서 문화 지도층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일본인 우월 의식과 일체화된 국가주의와도 겹치는 것이다. 그들의 문화 엘리트 의식과 국가 의식은 한편으로는 일반 일본인 사이에 충만한 욕망 자연주의에 대해 어느 정도 제동을 거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의 소유자에게서 문화재를 아무렇지 않게 유출하여 일본의 국가 기관이나 기타 공적 기관에 옮겨 놓는 등 차별 의식이 매우 심했다고 여겨진다.(88쪽)

세계 전쟁의 시대인 20세기가 우리에게 남긴 과제는 말할 것도 없이 지속적인 평화를 확립하는 것이다. 그 출발점은 전쟁을 위법화하는 것이다.(230쪽)

나는 2011년 4월 귀중 도서에 관한 한일협정을 심의할 때 중의원 외무위원회에 참고인으로 나가 의견을 진술할 기회가 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전쟁 책임 문제를 연구해 온 내가 문화재에 관해 최초로 행한 공적 발언이었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이 책이 태어났다. 국가 간의 호전을 위해서는 문화재 문제에 대해서도 미래 지향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싶다.(230∼231쪽)

최근에 국내에서도 문화재 반출 문제를 다룬 책들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와 만주 대륙으로 진출하려던 메이지 일본의 거대한 국가 정책 아래 문화재 약탈을 자행한 사실에 대한 규명은 ‘전쟁 책임 문제’ 해결을 평생의 과제로 삼아 온 선생 같은 분이 아니고는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다.(251쪽, ‘옮긴이의 말’ 중)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잃어버린 것의 귀환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받은 나라들이 자국의 약탈된 문화재를 환수하는 데 본격적인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부터다. 먹고 사는 것에 급급하던 지난 세기의 원리가 바야흐로 그 시효가 다해 가고,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주의가 청산되어 가는 추세 속에서 사람들은 공동체의 정체성과 자존심에 대해 성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은 문화적 주권 회복에 대한 거센 요구로 표출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2010년에는 이집트 카이로에서 ‘문화재 보호와 반환을 위한 국제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여기에서 한국, 중국, 인도, 이집트, 그리스, 이라크, 리비아, 시리아, 이탈리아, 러시아 등 22개국 문화재 담당 대표단은 사상 처음으로 해외로 반출된 유물을 되찾기 위한 공동 대응에 나서기로 결의했다. 이 회의를 주도한 이집트의 자히 하와스 위원장은 “그리스도 혼자 싸웠고 이탈리아도 혼자 싸웠지만, 이제 우리는 처음으로 하나가 되었다”고 천명했다.

약탈 문화재 반환 문제와 관련하여 2011년은 우리에게도 역사적인 해로 기억될 만하다. 바로 이해에 1922년 조선총독부가 강탈하여 일본 궁내청에서 소장하고 있던 『조선왕실의궤』와,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강화도 외규장각에서 약탈해 간 도서가 145년 만에 돌아왔기 때문이다. 물론 이전에도 약탈 문화재 반환 사례가 간헐적으로 있기는 했다.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회담의 결과로 이듬해 1,432점의 문화재를 돌려받은 것을 시작으로, 1991년에는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의 복식이, 2005년에는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되어 있던 북관대첩비가, 2006년에는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최근에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면서 조선왕실 어보와 대한제국 국새를 들고 옴으로써 문화재 반환 문제에 대한 관심은 더욱 고조되고 있다. 그럼에도 2011년이 각별한 것은 정부 차원에서 ‘문화재 환수 원년’이라 선포하고 본격적인 반환 활동에 착수했기 때문이다.

아라이 신이치는 누구인가

『약탈 문화재는 누구의 것인가』를 쓴 아라이 신이치荒井信一(스루가다이대학 명예교수, 전쟁책임자료센터 공동 대표) 선생은 2011년 『조선왕실의궤』가 반환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분이다. 그 전해에 일본의 간 나오토 총리는 한국병합 100년에 즈음하여 『조선왕실의궤』 반환을 약속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그러나 국회에서는 이러한 총리의 결정을 쉽게 따라 주지 않았다. 반환 논의가 수개월 난항을 겪고 있을 때, 아라이 신이치 선생이 중의원 외무위원회에 참고인으로 나가 의견을 개진하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선생은 약탈 문화재 반환은 식민주의를 청산하기 위한 기본 틀이라는 대전제 아래, 문화재는 그것이 태어난 자리에 있을 때 진정한 가치를 발한다고 역설했다. 전쟁 범죄와 그 책임 문제 연구에 평생을 바쳐 온 그의 통찰은 일본 중의원을 움직였고, 이로써 마침내 『조선왕실의궤』 반환 승인 결정이 내려지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쓰인 『약탈 문화재는 누구의 것인가』는 한 일본인 노학자의 진정한 양심을 대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피해국이 아닌 가해국의 지식인이 자신들의 과오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토대로 내놓은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약탈 문화재를 주제로 한 여느 책들과 뚜렷이 구별된다.

문화재 반환을 고리로 한 식민주의 극복

이 책에서 저자는 먼저 일제의 문화재 약탈이 어떻게 시작했고 진행되었는지를 추적했다. 그 첫 무대는 한국사의 축소판이라 일컬어지는 강화도다. 1875년 9월 군사적 위압을 배경으로 강화도를 공격한 일본은 이노우에 요시카井上良馨 함장의 지휘 아래 조선의 귀중 도서들을 노획해 갔다. 이로써 일제에 의한 문화재 약탈의 서막이 올랐다. 이후 1894년 청일전쟁, 1905년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 1907년 제3차 한일협약이 체결되면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국화는 심화되었고, 이와 함께 문화재 약탈 또한 가속적으로 전면화되었다. 청일전쟁으로 말미암아 문화재 약탈은 군軍과 일체가 된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되었고, 왕실의 귀중한 기록물을 보관하던 사고史庫는 일본 헌병들의 강탈로 빈 창고가 되었으며, 개성과 강화 부근의 고려 고분은 폭격을 맞은 것처럼 처참하게 파헤쳐졌다. 그뿐만 아니라 초대 한국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는 여기저기 다니며 고려자기를 비롯한 고미술품을 거의 싹쓸이해서 가져가 천황에게 헌상했고, 오사카에는 한국에서 나온 고물古物을 거래하는 시장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학술 조사라는 이름 아래 시행된 고적 조사는 한국의 문화재가 처한 위기를 크게 증폭시켰다. 그 중심에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라는 인물이 있었다. 도쿄제국대학 교수로 있던 그는 한국병합 전해인 1909년에 한국의 고건축물을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의 임무가 식민지 지배와 결부된 실용적인 목적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은 조사 대상 하나하나에 등급을 매긴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의 판정에 따라 하급으로 분류된 경희궁 같은 건축물은 결국 조선총독부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의 학술 조사는 고분묘에 대해서도 행해졌다. 낙랑군 유적, 고구려 벽화 고분, 삼국시대의 왕릉 등이 그 대상이었다. 일본에서는 그의 조사를 “한국 문화재 보호의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고 평가하는 반면, 한국에서는 “식민지 사관을 만들어 내기 위해 사전에 계획한 것으로”서 결과적으로는 사굴이나 남굴 풍조를 심화시켜 유적이 괴멸적으로 파괴되었다고 평가한다.

전반부에서 일제에 의한 문화재 반출사를 소상하게 기술한 저자는 이어 제2차 세계대전 전후로 연합군이 이 문제에 어떻게 접근했는지, 그리고 한일국교정상화 회담에서 이 의제가 어떻게 다루어졌는지를 살폈다. 그 밖에도 2차 대전 이후 국제 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문화재 반환 운동의 추이, 국제법적 관점의 새로운 동향, 식민주의 청산의 움직임을 두루 소개했다.

문화재 내셔널리즘과 문화재 국제주의 모두를 넘어

약탈 문화재를 원산국으로 반환하는 것은 당연한 상식으로 보인다. 문화재는 그것을 만들어 낸 민족의 혼이 담긴 신물神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문화재는 보편적 인류 문명으로 반드시 원산지에서 소장할 이유는 없다는 주장도 있다. 즉, 우수한 문화재는 특정 나라만의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가 감상할 권리가 있는 세계적 유산이라는 것이다. 전자의 관점을 ‘문화재 내셔널리즘’, 후자의 그것을 ‘문화재 국제주의’라 부른다. 이 책에서 저자는 문화재 반환을 식민주의를 극복하고 항구적인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보았다. 이것은 문화재 내셔널리즘이냐 국제주의냐 하는 이분적 대립을 넘어 전쟁 방지와 평화 정착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길이다. 대립과 폭력으로 점철된 지난 세기를 치유하고 공생의 가치를 정립하는 것은 우리 시대가 요청하는 소명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화재가 평화 정착에 핵심 고리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노학자의 목소리는 더욱 울림 있게 다가온다.

이 책을 옮긴 이태진 선생은 1990년대 초부터 규장각 소장 자료를 연구하던 중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외규장각 도서 반환 운동을 펼쳐 환수하게 되기까지 중심 역할을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저자인 아라이 신이치 선생이 『조선왕실의궤』 반환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과 좋은 대구를 이룬다. 한편 이 책에는 원서에 없는 사진 자료를 풍부하게 실어 사건의 현장감을 더했고, 책에서 언급된 주요 인물에 대한 소개도 말미에 수록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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