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한국근대사 연구 (독서>책소개)/2.개항기.구한말

1900, 조선에 살다

동방박사님 2022. 7. 19.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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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1890년 중반부터 20여 년간 자전거로 조선 전역을 누비며 서민들과 희로애락을 같이 했던 선교사 제이콥 로버트 무스(1864~1928)의 파란 눈에 비친 생생한 시골 풍경이 담겨 있다. 조선 말기에 관한 이방인의 다른 저술들이 중앙정치나 지배문화에 초점을 맞춘 것과 달리 무스의 관찰과 묘사의 대상은 대지 위에 발을 붙인 채 힘겨운 삶을 영위하던 서민들의 삶의 현장이었다.

산 옆으로 이어진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면 쉽게 마주칠 수 있는 흰 옷의 백성들, 평평한 돌판 위에 세탁물을 놓고 얼룩 없이 하얗게 될 때까지 방망이로 두들겨대는 아낙네들, 등에 업은 아기 고개가 크게 흔들리는 것도 모른 채 동전 던지기 놀이 삼매경에 빠져 있는 소년들과 같은 풍경과, 영어를 하지 못해 대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던 부인에게 지각 없는 존재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던 지체 높은 양반, 장옷으로 얼굴을 가린 채 외출해야만 했던 부인들 등 불과 100년 전의 모습이 낯설게 펼쳐진다.

기존 관습들을 ‘야만’으로 묶어 척결해야 할 대상으로 묘사하는 식의 오리엔탈리즘이 불편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시골 서민들과 특히 질곡의 삶에 갇힌 여성에 대한 무스의 깊은 사랑은 단순히 서구에서 온 이방인의 오리엔탈리즘으로 치부하기엔 그의 삶과 애정이 얕지만은 않다.

 

목차

옮긴이의 말
한국어판 발간에 부쳐
저자에 관하여

책을 내며
이 책에 대하여

1· 조선의 지리와 산천
2· 이 땅에서 나는 것들
3· 간추린 조선의 역사
4· 조선의 영혼, 서울
5· 마을, 조선의 기본 단위
6· 이 나라에는 home이 없다
7· 여행객들의 쉼터, 주막
8· 남자들의 짧은 소년 시절
9· 자유롭지 않은 존재, 양반
10· 불공평한 삶으로 태어난 소녀들
11· 속박의 굴레에 갇힌 여인들
12· 남자들만의 전당, 서당
13· 조선의 뿌리, 농민
14· 만능 재주꾼, 장인들
15· 조선의 동력, 시장과 상인들
16· 사람을 병들게 하는 한의사들
17· 팔려가는 신부, 혼사
18· 정형화된 슬픔의 의식, 장례
19· 정의와는 거리가 먼 사법 체계
20· 오랜 지배자, 토속신앙
21· 방방곡곡으로 뻗는 교회들
22· 주님의 참 일꾼, 조선의 신도들
23· 조선의 미래, 마을 교회
 

저자 소개

저 : 제이콥 로버트 무스 (한국명:무야곱)
 
1864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한 농장에서 태어났다. 그에게는 평범한 농부로의 삶이 주어졌지만, 이를 거부하고 ‘헌신적이고 영웅적인 영혼’(크리스천 헤럴드 지)의 길을 택했다. 투철한 의지로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여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을 거쳐 1892년 듀크 대학의 전신인 트리니티 대학 신학부를 졸업,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에 나섰다. 이듬해, 그는 메리 매그놀리아 더함 무스를 부인으로 맞은 후 마침내 ...
 
역 : 문무홍
 
전라북도 군산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했다. 국토통일원에 들어가 공직을 시작, 청와대 대통령공보비서관과 통일부 통일정책실장 등을 거쳤다. 퇴직 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미 평화연구소USIP에서 일했다. 귀국 후 구본태(전 국회의장 비서실장), 김건호(전 건교부 차관), 김종대(전 복지부 기획관리실장), 조일호(전 농림부 차관), 서명구(전 대통령정책조사비서관) ...
 

출판사 리뷰

구한말 이방인의 파란 눈에 비친 시골 서민들의 삶의 풍경

우리 선조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특히 서울 중심의 지배층이 아닌 시골에서 제도와 인습의 멍에를 짊어진 채 하루하루 고되게 그러나 치열하게 살아가던 일반 서민들의 삶의 현장은 과연 어떠했을까. 기존의 습속과 제도에 메이지 않은, 그래서 비교적 ‘객관적’이고 자유로웠던 이방인의 눈으로 본 선조들의 삶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1900, 조선에 살다Village Life in Korea』는 이러한 의문에 대한 한 가지 답을 제시해준다. 이 책에는 1890년 중반부터 20여 년간 자전거로 조선 전역을 누비며 서민들과 희로애락을 같이 했던 선교사 제이콥 로버트 무스(1864~1928)의 파란 눈에 비친 생생한 시골 풍경이 담겨 있다. 고춧가사가 눈병에 좋다는 한의사의 말을 믿고 여러 차례 고춧가사를 자신의 눈에 넣었던 소녀, 지아비를 대신해 관아로 나아가 지아비의 채무불이행에 대한 재판을 받으려 했던 아낙네, 언성을 높이며 한바탕 싸움을 벌이는 듯하던 상인의 가격 흥정 모습, 엄청난 흥분을 불러일으켜 마치 서양의 풋볼을 연상케 하던 돌싸움 등 지금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낯선 풍경들이 책 여기저기를 채우고 있다.
먼 나라의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가 아니다. 불과 100여 년 전, 바로 지금 우리를 있게 한 선조들의 진솔한 삶의 모습이다. 서구 열강의 침략이 본격화되고 일제의 강압적 지배가 시작되던 시기, 고된 역사의 현장을 직접 온몸으로 살아낸 서민들의 꾸밈없는 얼굴이다. 저자의 애정 어린 시선에 포착된 다양한 시골 서민들의 풍경, 그 속으로 들어가 보자.

조선은 시골 마을들로 이루어진 나라

조선 말기의 역사나 사회상 등에 대한 외국인들의 저술은 적지 않다. 하지만 『1900, 조선에 살다』는 그러한 기존의 책자들과 다른 독특한 특징이 있다. 옮긴이 문무홍은 그에 대해 다음의 세 가지를 언급한다. 무엇보다 『1900, 조선에 살다』는 “조선은 시골 마을들로 이루어진 나라”라는 저자의 시각에 따라 조선의 시골 사람들과 그 삶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조선 말기에 관한 이방인의 다른 저술들이 중앙정치나 지배문화에 초점을 맞춘 것과 달리 무스의 관찰과 묘사의 대상은 대지 위에 발을 붙인 채 힘겨운 삶을 영위하던 서민들의 삶의 현장이었다.
저자가 조선의 내부자가 되어 그 시각에서 집필된 것이라는 점도 지적되어야 한다. 조선 말기의 시골에 정통한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의 비숍, 『한국천주교회사』의 달레와 달리 무스는 부인과 함께 20년 가까이 주로 시골에 뿌리박고 살았다. 이미 조선의 내부자가 되어 조선의 시골을 체계를 갖고 심층화하여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1900, 조선에 살다』가 의미 있는 가장 큰 연유는 바로 무스의 한국 자연에 대한 사랑과 한국인에 대한 애정에 있다. 조선 말기의 제도와 습속이 갖고 있는 비인간성과 부정의에 대한 저자의 개탄과 절망은 크고 깊다. 무위도식하며 전횡을 일삼는 양반 계급은 ‘벌레’이며 태어나면서부터 학대받는 여성은 ‘야만’의 희생자들이다. 그럼에도 무스 선교사의 눈에 비친 조선의 대지는 아름다고 풍요한 어머니이며, 그 안에 사는 백성은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희망의 아들과 딸들이다. 이 책에는 이러한 저자의 휴머니즘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낯익은 그리고 낯선 서민들의 일상

그렇다면 무스의 시선에 포착된 우리 선조들은 삶은 구체적으로 어떠했는가. 무스의 눈에 기억된 구한말 조선 서민들의 모습에는 지금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들도 제법 있다. 산 옆으로 이어진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면 쉽게 마주칠 수 있는 흰 옷의 백성들, 평평한 돌판 위에 세탁물을 놓고 얼룩 없이 하얗게 될 때까지 방망이로 두들겨대는 아낙네들, 등에 업은 아기 고개가 크게 흔들리는 것도 모른 채 동전 던지기 놀이 삼매경에 빠져 있는 소년들, 개천을 따라 길게 늘어선 집들에서 매일같이 흘러드는 오물로 악취를 풍기는 개천가, 김치를 비롯하여 고추장, 무절임 등 온갖 반찬들로 풍성하게 채워진 밥상 등은 불과 얼마 전까지 시골 마을에서 볼 수 있던 낯익은 풍경들이다.
반면 소나 돼지처럼 사고 팔리는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던 종들, 영어를 하지 못해 대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던 부인에게 지각 없는 존재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던 지체 높은 양반, 장옷으로 얼굴을 가린 채 외출해야만 했던 부인들, 소년들만으로 채워진 배움의 전당 서당, 자기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전혀 모른 채 “도살장에 끌려나오는 양”처럼 혼인식을 올리던 하얀 가면의 신부들,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엄청난 짐을 지게에 짊어지고 장이 서는 ‘장마을’을 찾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던 장사치들, ‘악마의 기둥들’ 장승 앞에 모여 기원을 드리던 남녀노소들의 곱게 모아진 두 손은 무스에게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나 낯선 풍경이다.

조선의 시골 마을들을 완전히 기독교화하라

특히 긴 곰방대로 담배를 피우며 옛 지혜의 심오함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역할 외에는 하는 일이 없는 선비의 유유자적, 딸이 태어났다는 말에 깊은 유감의 표정을 지으며 “참-섭-섭-합-니-다”라는 말을 당연하게 내뱉는 조선인들의 남아선호는 무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야만이었다.
선교사라는 직분에 걸맞게 무스는 이러한 야만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치유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외부의 어떠한 도움도 없이 신도들의 힘으로 지어진 교회들이 방방곡곡으로 뻗어가는 모습은 무스에게는 보람이자 축복이었다. 무식한 하층 계급 출신이던 윤승균이 소중한 상투를 자르고 성경 공부에 매진, 걸어 다니는 성경색인으로 불릴 정도로 성경 학습에 충실하다가 하나님의 곁으로 간 사연을 말할 때는 무스 스스로 부끄러워하기도 했다.
그러한 그에게 조선의 미래를 여는 열쇠가 전 시골 마을들의 기독교화임은 당연한 귀결이다. 기존 관습들을 ‘야만’으로 묶어 척결해야 할 대상으로 묘사하는 식의 오리엔탈리즘이 불편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시골 서민들과 특히 질곡의 삶에 갇힌 여성에 대한 무스의 깊은 사랑은 단순히 서구에서 온 이방인의 오리엔탈리즘으로 치부하기엔 그 울림이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