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조선시대사 이해 (책소개)/1.조선왕

고종 : 조선의 마지막 왕

동방박사님 2022. 7. 25.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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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근대국가로의 한 걸음을 내딛는 한편
끝까지 사람의 길을 고민했던 조선 최후의 군주 고종


1863년 열두 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그늘에 눌려 지낸 끝에 겨우 홀로서기를 하자마자 격변의 시대에 휩쓸려버린 비운의 왕 고종. 그는 적들이 천지를 메운 상황에서 일신의 보전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 꼭 겁이 많아서라기보다, 먼저 자신이 버티고 있어야 나라가 무너지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끝내 망해버린 오백 년 종묘사직과 이태왕(李太王)이라는 우스꽝스러운 명칭을 받아 든 고종은 이미 모든 게 늦었다는 자책 속에서 번민하던 끝에, 죽음을 각오하고 최후의 반격을 준비한다.
[저자의 말]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평범한 사람도 편안히 살기 힘든 격변의 시대에 한 나라의 군주로서 고종이 얼마나 힘든 처지에 놓여 있었는가에 대한 생각으로 쓰인 이 책은, 고종의 일대기를 그의 인간적인 고뇌와 결단에 중점을 두고 펼쳐간다. 책 속 이야기는 고종이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하지만,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과정, 대원군의 섭정, 명성황후와의 혼인, 친정(親政)을 하고부터의 개인적·역사적 정황 등이 차례로 서술된다.

 

목차

저자의 말

프롤로그 1919년 1월 21일
1장 세 마리의 눈먼 쥐
2장 아버지와 아들
3장 개화가 무엇이더냐?
4장 흙발에 짓밟힌 창덕궁
5장 멸망의 서곡
6장 녹두꽃이 떨어지면, 배꽃도 떨어지고
7장 제국에의 역습
8장 막은 내리다
9장 고종, 죽기로 결심하다
에필로그 1919년 3월 1일

주석
참고문헌
 

 

 
 

저자 소개

저 : 함규진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정약용의 정치사상을 주제로 정치외교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성균관대학교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현재는 서울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조약으로 보는 세계사 강의』, 『리더가 ...
 

책 속으로

이형이라는 휘는 그의 개인적 일생을 나타내고, 고종이라는 묘호는 그의 공적 업적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개인으로는 잊히고 공인으로는 멸시받는 인생, 그 애잔함은 그의 이름을 돌이켜보기만 해도 진하게 묻어난다.
그런 애잔함, 그런 모든 한과 분노, 오해와 왜곡의 사십육 년 세월은 1863년 12월 8일, 신정왕후(神貞王后) 조 대비가 철종의 승하에 임하여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림으로써 시작되었다.
“흥선군(興宣君)의 적자(嫡子) 중에서 둘째아들 이명복으로 익종대왕(翼宗大王)의 대통을 계승시키기로 정한다.”
아직 열두 살 소년에 불과했던 이재황(이명복)의 운명을 결정한 조 대비의 이 전교(傳敎)에는 언뜻 들어서는 알 수 없는 ‘특이함’이 네 가지나 숨어 있다. --- p.41

고종은 전통적인 예법 차원에서 수신사를 보지 않고, 일본의 문물을 정탐하고 일본이 그렇게 앞선 문물을 갖게 된 이유를 파악하려는 시찰단 차원에서 보고 있었다. 김기수나 조정 대신들이 ‘정신’에 얽매여 있는 동안 고종은 ‘사실’을 중시했다. 그리고 선입견 때문에 정보를 취사선택하지 말고 ‘보고 들은 일을 빠짐없이, 하나하나 써 가지고 오라’고 당부했다. 고종이야말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중시했던 실학파의 정신을 이어받고 있었다. 그는 또한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정신도 투철했다. 박규수 등을 통해 서양(일본)의 문물에 전기와 증기기관이 있음을 미리 알고, 이를 실제 농업과 산업에 이용하는 길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단지 신기한 기계를 외국에서 수입해오는 데 그치지 않고, 기술을 배워서 우리 스스로 기계를 제작하고 운용해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 p.112

고종과 원세개는 놀라서 ‘텐진조약 위반이다!’, ‘만국공법(국제법)에 따르면 적국이 아닌 이상 다른 나라의 수도로 군대를 진입시킬 수 없다!’는 항의를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전주 화약으로 동학군이 해산했다는 점을 들어 ‘사태가 진정되었으니 텐진조약에 따라 즉각 병력을 철수시켜야 한다’고도 했지만 역시 마이동풍이었다.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는 ‘애당초 이런 난리가 난 원인은 미개하고 부패한 조선의 통치체제에 있다. 조선이 내정개혁을 하지 않는 이상 철군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마치 21세기의 이라크에서 ‘대량살상무기’가 발견되지 않자 ‘사담 후세인의 폭압적 불량국가체제를 교체하고 이라크를 참다운 민주국가로 만드는 것이 전쟁 목표’라고 했던 미국의 주장처럼. --- p.182

1895년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이런 일본의 ‘조선 먹어치우기’ 계획에 생각지 않았던 문제점이 발견되었다. 먼저, 그들이 자신들의 앞잡이로 믿었던 ‘친일파 대신들’이 의외로 녹록히 굴지 않았다. 갑신정변의 주역으로 역적의 오명을 썼다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을 계기로 귀환하여 요직을 맡은 박영효, 서광범, 유길준, 윤치호 등의 행동이 통일되지 않았던 것이다. 유길준 등은 일본의 지시를 비교적 고분고분 받아들인 반면 서광범, 윤치호는 이완용, 이범진 등과 함께 미국에 의존하려는 ‘정동 구락부’에 가담했고, 박영효는 독자적으로 움직이면서
일본의 입장에 가장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일본에 머물던 시절 창씨개명까지 했던 박영효가 그렇게 태도를 바꾼 이유는 아무래도 왕실의 외척이 되는 사람으로서〔그는 철종의 딸 영혜옹주(永惠翁主)와 결혼하여 금릉위(錦陵尉)라는 직함을 갖고 있었다〕 일본의 무지막지한 강압과 침탈에 반발한 것이라 여겨지는데, 어쩌면 여기서도 은근히 사람의 마음을 녹이고 다독여서 자기편으로 만들기가 장기인 고종의 설득력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튼 이는 일본으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이었는데, 오히려 장기적으로는 이것이 고종과 조선의 처지를 더욱 어렵게 만드
는 원인이 된다. 그 가능성은 또 하나의 ‘뜻밖의 일’이 현실화하면서 일단 불거져 나왔다.
--- pp.201-202
 

출판사 리뷰

고종의 인간적 고뇌와 결단을 만나다

조선 26대 왕, 대한제국 초대 황제, 그리고 사실상 한국사상 최후의 군주였던 고종. 그의 삶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많은 이들이 그를 대원군과 명성황후 사이에서, 청나라·일본·러시아 등의 열강 사이에서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하다가 맥없이 망국을 당하고 만 평균 이하의 군주로 여긴다. 한편 그의 여러 개혁 정책과 반일 독립투쟁을 높이 평가하며, 존경해 마땅한 인물로 높이는 예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는 어느 쪽이든 고종이라는 한 인물을 바라보기보다 ‘고종 시대’를 바라보고 그 시대가 개탄스러운 쇠망의 시대였느냐, 야심찬 개혁의 안타까운 좌절의 시대였느냐로 긍정 또는 부정적인 평가를 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시각이다. 고종이라는 인물은 다른 모든 인물과 마찬가지로 긍정과 부정의 요소를 모두 포함하고, 때로는 용감하고 때로는 비겁하며, 감정에 치우쳐 실수하는가 하면 냉철하게 판단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다만 그를 둘러싼 시대가 하도 특별했으며, 그 속에서 부대끼던 그의 모습이 어떻게 보면 한심하게, 어떻게 보면 탁월해 보였을 뿐이다.
그저 우유부단한 왕으로만 그려졌던 고종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 이 책은 특히 일제의 식민지가 되기 전 사실상 조선의 마지막 군주라고 할 수 있는 고종의 ‘고독’과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킨다. 특히 정치적 동반자로서 명성황후를 바라보는 시선, 일제와 열강의 침략 속에서 이완용과의 관계 등이 흥미롭게 그려지고 있다. 또한, 기존의 유교적 정치철학과는 반대로, 발전된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여(東道西器) 부국강병하려는 생각, 꽉 막힌 명분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태도뿐만 아니라, 열강의 침투를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술책으로 이겨내고자 했던 고종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을사조약 이후 최익현, 허위 등에게 ‘밀칙’을 내려 의병을 일으키게 하여 그 뒷돈을 대거나, 자주독립을 위해 끊임없는 외교활동을 벌인 일 등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다. 그러나 일국의 군주로서 난국을 타개하려던 시도만을 들어 무능한 왕이라는 이전의 평가를 무작정 쇄신하려 하지는 않는다. 당시의 역사적 배경에 관한 객관적인 서술과 대외적인 비교를 통해서, 마지막 판단은 책을 읽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고 있다.
등장인물의 감정이 이입된 대사가 곳곳에 등장해 결코 무겁거나 가볍게 읽히지 않도록 한 것도 이 책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학교에서는 그저 딱딱하게만 배웠던 역사교과서 속 내용, 일제에 의해 왜곡된 역사적 사실 등을 결코 지루하지 않고 흥미롭게 재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완용은 매국노다’라는 식으로 역사적 사실을 무작정 주입하기보다는, 이완용이란 인물에 관해, 그가 나라와 임금을 저버리게 된 정황 등을 설명하여 이해를 돕는다. 또한, 당시의 상황을 한눈에 보여줄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가치를 갖는 도판 27컷을 실어, 그 옛날의 사건들을 실감나게 해준다.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본 고종의 죽음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으면서도 개화와 광복운동에 꾸준히 힘을 보탰다는 말에, 그 실제 성과가 무엇인가를 물으며 그런 긍정적 평가를 일축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할 만큼 해보았으나 역부족이었다’는 소극적인 변명 말고도, 고종은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의 생명을 이용해서 마지막 저항을 시도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뚜렷한 비전의 제시 없이 보신만 우선시했던 고종이 죽음을 각오하고 광복운동에 나선 것 자체가 그 증거다. 고종의 죽음에는 암살이라는 설과 자살이라는 설이 있는데, 이 책은 자살과도 같은 암살로 고종의 마지막을 그린다. 오백 년 종사를 자신의 대에서 끝내게 됐다는 회환, 나라와 백성을 타국에 넘겼다는 죄책감이 그의 죽음을 각오하게 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왕조’는 사라져도 ‘백성’은 남는다. 땅덩이나 ‘국가’라는 틀이 아닌 ‘사람’이 본위임을 깨달은 고종은, 일제가 보장하는 우리 안에서 여생을 안전히 보내기보다는 죽음을 통해 국민들에게 자신의 깨달음과 비전을 전하려 했다. 그리하여 고종의 시신을 능에 안장하는 노제(路祭)가 예정되어 있던 3월 3일을 이틀 앞둔 1919년 3월 1일, ‘민중이 황제의 메시지에 호응’하는 모습을 그리며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